안영
안영(?~BC 500)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명신으로, 자는 평중(平仲), 산동(山東) 고밀(高密) 사람이며, 제나라의 상대부(上大夫) 안약(晏弱)의 아들이다. 제나라 영공(靈公)·장공(莊公)·경공(景公)을 섬겼으며, 경공 때에 재상으로 등용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춘추시대 후기의 사상가이자 외교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생활은 얼마나 검소하였든지 한 벌의 여우 가죽옷을 30년간이나 입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뛰어난 외교가
춘추시대 중기에는 제후들이 난립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 때 중원의 강국 진(晋)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진나라 평공(平公)은 먼저 제나라의 국내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범소(范昭)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제나라 경공은 범소가 도착하자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를 접대하였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범소는 경공에게 "친히 술을 한 잔 내려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경공은 주위의 신하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과인의 잔으로 손님에게 한잔 권해 드려라."
범소는 경공을 모시고 있던 신하가 건네주는 경공의 잔을 받아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이것을 보고 있던 안영은 준엄하게 그 술잔을 건네준 신하에게 말하였다.
"주군을 위하여 다시 다른 술잔으로 바꾸어라."
당시의 법도로는 연회석상에서 군신은 각각 자기의 술잔으로 술을 마셔야 되는데, 범소가 경공의 술잔으로 술을 마신 것은 그러한 법도에 어긋난 것이며, 그것은 바로 제나라 임금에 대한 불경의 표시였다. 범소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제나라 측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그것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범소의 무례를 용서하지 않았다.
범소는 진나라로 귀국한 후 곧바로 평공에게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금은 아직 제나라에 공격을 감행할 시기가 아니옵니다. 신은 경공을 시험해 보았습니다만 안영에게 간파당하고 말았습니다."
즉, 제나라에는 안영과 같은 현신(賢臣)이 있으니 지금 공경을 감행하더라도 이길 가망이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진나라 평공은 곧바로 제나라 공격 계획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안영은 이와 같이 외국 사절을 영접할 때에 당당하게 교섭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을 때에도 의연한 태도와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군왕의 명예를 욕되게 하지 않고 중책을 완수했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안영이 춘추 말기 중원의 패자인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초나라 영왕(靈王)은 안영이 온다는 통지를 받고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좌우의 신하들과 상의하였다.
"안영은 키가 5척에도 못미치지만 제후들 사이에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과인의 생각으로는 초나라는 강하고 제나라는 약하니 이번 기회에 제나라에 치욕을 안겨주어 초나라의 위엄을 떨치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하여 초나라에서는 안영을 놀려주기위한 계책을 이미 세워두었다. 안영이 초나라 도성 동문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이 열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문지기를 불러 성문을 열라고 하자, 이미 안영을 놀려주기 위한 계책을 하명 받은 그 문지기는 안영을 성문 옆의 작은 문으로 안내하면서, "재상께서는 이 개구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구멍만으로도 당신이 출입하기에는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귀찮게 성문으로 출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영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개가 출입하는 문이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 아니지요. 개 나라에 사신으로 온 사람은 개문으로 출입해야 하고, 사람 나라에 사신으로 온 사람은 사람문으로 출입해야 하는데, 내가 사람 나라에 왔는지 개 나라에 왔는지 모르겠군요. 설마 초나라가 개 나라는 아닐 테지요!"
문지기가 안영을 말을 초나라 영왕에게 전하자 영왕은 그것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한 후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안영은 당당하게 초나라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나라 영왕은 안연을 접견하자 대뜸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제나라에는 인재가 그렇게도 없는가? 어찌하여 그대와 같이 작은 사람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가?"
안영이 대답하였다.
"대왕, 저의 제나라에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수도 임치에는 인구가 백만이나 되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면 그 입김으로 구름을 만들 수 있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땀을 흘려 그 땀을 훔치면 마치 비가 오듯 하며, 행인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녀 발을 디딜 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인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의 나라에는 한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사신을 파견할 때에, 현자(賢者)는 현명한 나라에 파견하고, 불현자(不賢者)는 현명하지 못한 나라에 파견하며, 대인은 대국에 파견하고 소인은 소국에 파견합니다. 지금 저는 무능하고 부덕하면서도 가장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나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으니 대왕께서는 이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나라 영왕은 이 말을 듣고 할 말을 잊고 있었는데, 마침 두 명의 무사가 죄인 한 사람을 끌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초나라 영왕은 그 무사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무사가 대답하였다.
"그는 제나라 사람으로 절도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다시 초나라 영왕이 안영에게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모두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소?"
안영은 초나라 영왕이 조금 전에 당한 수치를 만회하기 위하여 고의로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소신이 듣기에 귤을 회수(淮水) 이남에 심으면 그것은 귤이 되어 달콤하기 이를데 없지만, 만약 그것을 회수 이북에 심는다면 작고 시면서 떫고 쓰서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토질 때문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결코 도적이 아니라 양민이었는데 어찌하여 초나라로 온 이후에는 도적이 되었겠습니까? 이것은 초나라가 그를 이렇게 변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있는 것은 마치 귤이 회수 이북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제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초나라 영왕은 한참동안 묵묵히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과인은 본래 그대에게 창피를 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조롱거리가 될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이는 과인의 잘못이니 그대는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라오."
이에 초나라 영왕은 안영을 잘 접대하게 되었으며, 안영은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하고 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영은 강국의 오만한 영왕을 대면하여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반론을 폄으로써 개인의 명예는 물론 제나라의 명예까지도 꿋꿋이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안영과 공자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안영에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안영은 사람들과의 교제에 뛰어났으니, 아무리 상대방과 오래 사귀어도 그를 공경하였다."
≪안자춘추≫에도 안영에 대한 공자의 비평이 몇 군데 보이지만, 공자는 대체로 안영에 대하여 공경을 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영이 노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국왕을 알현했을 때 공자는 후학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안영의 언행을 견학하게 하였다. 이를 견학하고 돌아온 공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안영이 예(禮)에 정통하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입니다. 예에 이르기를 '계단에 오르되 넘지를 않고, 당상에서 달리지 않으며, 옥을 받을 때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영의 방식은 모두 이에 반하고 있었습니다.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니 터무니 없는 얘기입니다."
계단을 오를 때는 한 단씩 천천히 오르고, 당상에서 바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옥을 받을 때는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당시에 왕을 알현하는 외국 사신의 예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공의 말은 안영의 행동이 모두 그것에 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 규범을 말한 것인데 공자는 일찍부터 극히 이것을 중시하고 있었다. 훌륭한 선배(공자는 안영 보다 30세 가량 아래임)로서 경애해 마지 않는 안영이 예를 무시했다면 공자로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공자는 안영을 만나서 그 진의를 따졌다. 안영은 공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당상에서는 군신이 각각 서는 위치가 정해져 있으며 군주가 한걸음 걸으면 신하는 두 걸음을 걷는다고 알고 있네. 그런데 노나라 임금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정한 자리에 제시간에 닿기 위해서 나는 계단을 달리듯이 올라야 했고, 당상에서도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면 안되었네. 또 옥을 받을 때도 노나라 임금의 자세가 낮았으므로 꿇어 앉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네. 이에 관하여 나는 이렇게 알고 있네. '인륜의 기본을 이루는 첫 번째 덕에 관해서는 약간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두 번째 덕에 있어서는 실행상 방편이 있어도 좋다. 나는 임기응변의 조처로서 약간의 방편을 취했던 것이라네."
안영의 말을 공손히 경청하고 있던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불법(不法)의 예는 안자(晏子, 즉 안영)가 능히 이를 행한다."
불법의 예라는 것은 예를 넘어선 예라는 의미로 이것 또한 최상의 찬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공자는 안영에게 깊이 경도되어 그 인물됨을 높게 평가했다. 그렇다면 안영은 공자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공자는 36세 때, 노나라 소공(昭公)의 뒤를 다라 제나라에 갔다. 제나라 경공을 설득하여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를 제나라에서 실현시키고 싶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제나라에서는 바로 안영이 재상에 재위하고 있었다.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제나라에 간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논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의 음을 배우면서 그 아름다운 음률에 감탄하여 3개월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한다. 이 때 그 소문을 들은 경공이 공자를 접견하여 정치의 요체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주는 군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아비는 아비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각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경공은 진심으로 감복했다.
"그렇도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재정이 풍부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지!"
며칠 후 경공은 다시 공자를 불러 정치에 임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첫째는 재정을 절약하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듣고 기뻐한 경공은 이계(尼谿)의 땅을 공자에게 봉읍(封邑)으로 주고 그를 임용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임용을 정면에서 반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재상 안영이었던 것이다.
"유자는 말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고 자만하는 자들이므로 아랫사람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또 그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인민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여러 나라를 유세하여 거지와 다름 없는 짓을 하고 다닙니다. 그런 작자들에게 나라의 정치를 맡겨서는 안됩니다.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이미 가셨고, 주나라 왕실까지 이미 쇠퇴하여 예악도 쇠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공자는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 군주께서 이러한 인물을 임용한다면 결코 인민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경공은 공자의 임명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세의 유가(儒家) 중에는 이 이야기를 사실무근이라 하여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공자가 존경하는 안영이 공자에 대하여 이렇게 심한 대접을 할 리가 없다는 심정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해도 전혀 우스운 일은 아니다. 당시 36세에 불과한 공자가 일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아직은 무명에 가까운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며, 정치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후세의 성인상(聖人像)을 가지고 이 시기의 공자에게 적용시키려는 것은 무리이다. 한편 안영은 60세를 넘어 원숙의 경지에 달한 베테랑 정치가였다. 그러한 안영의 입장에서 볼 때 공자의 임용은 그 자체가 모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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