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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진평(? ~ BC 178)

by 바로요거 2008. 9. 22.

진평


진평(? ~ BC 178)은 서한 왕조의 개국 공신의 한 사람으로 서한 초기에 승상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로 알려진 그는 양무(陽武, 지금의 하남성 原陽 동남)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황로학(黃老學)을 좋아하였으며, 진나라 말기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봉기하자 그는 위왕(魏王) 구(咎)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았다. 다시 항우(項羽)에게 기탁하여 진나라 공격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그때까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자 후에는 다시 유방(劉邦)을 섬겼다. 유방은 진평을 대면한 후 그를 매우 신임하여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항상 유방의 막하에 있으면서 뛰어난 계책을 짜내어 몇 번이나 유방의 위난을 구했으며, 항우와의 승패를 건 초한전(楚漢戰)에서도 그는 타고난 지모를 발휘하여 유방의 중요한 참모가 되었다.

혜제(惠帝) 6년(BC 189년) 좌승상에 임명되었다가 여후(呂后)가 전권을 장악하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BC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여씨(呂氏) 일족을 주살하고 문제(文帝)를 옹립하여 한왕실을 평정함으로써 현상(賢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문제 2년(BC 178년)에 세상을 떠났다.

 

☞ 유방을 구한 뛰어난 계책

진평은 유방을 섬긴 후 여섯 번 기계(奇計)를 내고 여섯 번 봉록이 올라갔다. 그 중 진평의 뛰어난 계책으로 유방 군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겠다.

BC 205년 관중(關中)을 수중에 넣은 유방은 56만의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을 덮쳤지만 항우의 반격으로 괴멸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이에 유방은 형양(滎陽)으로 물러나 패잔병들을 집결시켜 포진했다. 후방의 관중에 있으면서 수비 책임을 지고 있던 소하(蕭何)로부터는 새로운 부대가 편성되어 투입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 전열이 채 가다듬어지지 않았던 유방은 항우에게 강화를 제의했으나, 항우는 이를 거절하고 서서히 형양성을 향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형양성에 고립되어 위기를 느낀 유방은 진평에게 그 계책을 논의했다. 진평은 먼저 항우 진영을 이간질하여 내분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항우 진영으로 첩자를 파견하여 종리매(鍾離昧)를 비롯한 항우의 측신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소문을 내게 하였다. 이로써 항우는 종리매 등 측근의 장수들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침 항우 진영에서 유방에게 사자를 보냈다. 이 사자에 대해 유방은 호화로운 연석을 베풀고 왕을 받들 때만 내어놓는 귀중한 보물인 정려(鼎呂)까지 준비시켰다. 그런 다음에 사자의 얼굴을 보면서 자못 놀란 듯이 "이런, 나는 범증(范增)의 사자인가 했더니 항우의 사자였던가"라고 말하고는 준비한 요리를 모두 물리게 하고 새로 형편 없는 요리를 가져오게 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진평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사자는 돌아가서 이러한 상황을 항우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범증은 항우 진영의 가장 뛰어난 참모였는데, 항우는 이 일로 인하여 범증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범증이 유방의 형양성을 급습할 묘책을 권했지만 항우는 그를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항우의 의심을 사게 된 범증은 마침내 항우에게 작별을 고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범증을 항우 곁에서 쫓아 버린 진평은 기회를 보아 먼저 여자들로 편성된 2천여명을 형양성의 동문으로부터 출격시켜 항우군이 이것을 공격하는 사이에 야음을 틈타 유방을 서문으로부터 탈출시켰다.

유방은 함곡관에 들어가자 재차 병력을 집결시켜 반격을 개시하였다. 진평의 이간 공작으로 범증이라는 뛰어난 참모를 잃은 항우는 이때부터 서서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 토사구팽(兎死狗烹)

BC 202년 유방은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반역자의 속출에 머리를 앓고 그 진압을 위하여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동분서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동안에 진평은 시종 고조(高祖) 유방과 행동을 함께하면서 뛰어난 계책으로 반란군의 진압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잇따른 반란 가운데서도 가장 유방의 마음을 떨게 한 것은 아마 초왕(楚王) 한신(韓信)의 반역 사건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신은 당대 그와 비견할 사람이 없는 용병의 명수였으며, 유방의 군단과 거의 필적할만한 대군단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위기를 구한 것이 바로 진평의 책략이었다.

고조 6년(BC 201) 한신이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는 상서가 있었다. 유방은 한신을 정면으로 치려고 하였으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방은 진평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으며, 진평은 유방을 위하여 이러한 계책을 내놓았다.

 "옛날 천자는 천하를 순행(巡幸)하여 제후와 회동하였습니다. 남방에 운몽호(雲夢湖)가 있습니다. 이번에 폐하는 이곳을 순행한다고 속이고 제후와 진(陳)의 땅에서 회동해 주십시오. 진(陳)은 초(楚)의 서쪽에 있으니 천자가 나들이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한신일지라도 일을 꾸밀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스스로 찾아와서 알현을 청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강력한 자 한 사람이면 문제없이 그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일행이 진(陳)의 교외에 다가가자 과연 초왕(楚王) 한신이 마중을 나왔다. 유방은 미리 무장병을 배치해 두어 한신이 모습을 나타내자 기회를 주지 않고 그를 포박하였다. 이때 한신은 다음과 같은 비통한 말을 토했다고 한다.

 "과연 내려오는 말이 맞도다. 민첩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하던 개는 소용이 없어 삶아 죽이고(狡兎死, 走狗烹),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진다(高鳥盡, 良弓藏). 적국을 치고나면 모신(謀臣)은 망하는구나. 천하는 이미 정해졌다. 나는 처음부터 삶겨질 운명이었어!"

 

 실은 이때 한신의 마음은 확실히 동요는 있었지만 모반에까지는 용단을 내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유방은 진평의 헌책에 의해 미연에 그 화근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 뛰어난 처세

한 고조 유방이 세상을 떠난 후 혜제(惠帝)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혜제 6년(BC 189)에 진평은 상국(相國)인 조삼(曹參)의 뒤를 이어 좌승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후 혜제가 세상을 떠나자 혜제의 모후인 여후(呂后)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로부터 8년간에 걸쳐 여후의 친정이 계속되면서 여씨 일족이 전횡을 일삼았다. 여후는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다음 여씨 세력을 확대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나아가서는 여씨 일족을 각지의 왕위에 앉히려고까지 했다. 이때 우승상인 왕릉(王陵)은 여후에게 그 부당함을 간했지만, 진평은 여후의 그러한 처사에 그대로 동의하였다. 그러자 여후는 왕릉을 우승상에서 파면하고 진평을 최고의 직위인 우승상에 임명했다.

진평은 여후 밑에서 우승상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여후가 하는대로 내 버려두었다. 심지어는 여씨 일족을 왕위에 세우는데도 유유낙낙한 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여후가 죽자(BC 180년) 진평은 태위(太尉, 국방장관)인 주발(周勃)과 짜고 일거에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문제(文帝, BC 180~157)를 옹립함으로써 유씨의 천하를 회복시켰다. 굳이 여후의 뜻을 거슬리려 하지 않고 요령부득의 처세로 일관했던 것은 원래부터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문제(文帝)는 여씨 타도의 제일 공로자로 여긴 주발을 우승상에, 진평을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그 후 주발이 우승상을 사직하고 물러나자 진평은 혼자서 승상을 맡았으면서 어진 재상의 명성을 떨쳤다.

BC 178년(문제 2년)에 진평이 세상을 떠나자 문제는 그에게 헌후(獻侯)의 시호를 내렸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평을 이렇게 평하였다.

 "진평은 마지막에 고조의 막하에 몸을 의탁하고 항상 뛰어난 계책을 짜내어 분규와 나라의 환난을 구했다. 여후의 시대는 바야흐로 다사다난했다. 그러자 진평은 스스로의 활약으로 위난을 벗어나 한나라의 종묘를 편안케 하고 명예롭게 생애를 마쳐 어진 재상으로 찬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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