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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181~234)

by 바로요거 2008. 9. 22.

제갈공명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이 량(亮)이고 시호는 충무(忠武) 또는 무후(武侯)이다. 전한 말 사예교위(司隷校尉, 치안국장) 제갈풍(諸葛豊)의 후예로 낭야(瑯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갈규(諸葛珪)는 태산군(太山郡)의 승(丞, 부장관)을 역임하였다고 하지만 그밖의 일은 알려진 것이 없다. 제갈공명의 형 제갈근(諸葛瑾)은 훗날 오나라 손권을 섬겨 대장군 완릉후(宛陵侯)에까지 올랐으며, 동생 제갈균(諸葛均)은 제갈공명과 함게 촉(蜀)을 섬겨 장수교위(長水校尉)를 역임하였다. 제갈공명의 누이는 방(龐)씨라는 명문으로 출가했다.

제갈공명의 어린시절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동생인 균을 낳고 얼마 후 제갈공명이 9세되는 해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도 제갈공명이 14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제갈공명보다 7세 많은 형제갈근은 계모를 모시고 오나라로 가서 손권의 수하가 되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동생 제갈균과 함께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살고 있는 형주로 가서 살았다. 그후 숙부마저 전쟁으로 세상을 떠나자 제갈공명은 하는 수 없이 양양(襄陽) 교외의 융중산(隆中山) 근처에서 초막을 짓고 살면서, 맑은 날이면 밭을 갈고 비가 오면 책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10대 말기에 그는 석도(石韜), 서서(徐庶), 맹건(孟建)이라는 친구들과 교유를 가지면서 점점 그 명성이 세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조조(曹操)에게 쫓기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유비는 그 뒤에 군대를 이끌고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유비의 친구인 서서가 유비에게 친구인 제갈공명을 천거하게 된다.

"저의 친구 중에 제갈공명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물에 잠긴 와룡(臥龍)과 같은 인물로 한번 만나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비는 제갈공명을 꼭 만나 보고싶다고 하며 그를 데리고 올 방법을 묻자 서서는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를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인물을 만나시려면 장군께서 친히 가셔야 할 것입니다."


제갈공명이 살고 있던 초막은 유비가 수비하던 신야에서 약75㎞ 떨어진 곳이었는데, 유비는 친히 세 번을 찾아가서야 제갈공명을 만날 수있었다.

이에 유비는 제갈공명에게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계책을 물었다. 제갈공명은 당시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한 후, 유비에게 먼저 조조, 손권과 더불어 3국 정립의 국면을 만들고,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성)를 취하여 대외적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대내적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면 충분히 패업(覇業)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라고 일컫는 헌책이다. 이때가 유비의 나이 47세이고 제갈공명은 27세 때의 일이다. 이 계책을 들은 유비는 무릎을 치고 크게 기뻐하며,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이하여 날로 신뢰를 더해 나갔다. 이러한 유비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불만을 터뜨리자, 어느날 유비는 두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공명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그러니 그대들도 다시는 말을 하지 말라."

이후 관우와 장비는 더 이상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어원으로, 여기에서 유비가 얼마나 깊이 제갈공명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 적벽대전(赤壁大戰)


208년 북방의 평정을 완료하고 승상에 임명된 조조는 기세가 등등하여 남방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때 형주에서는 유표가 병사하고 차남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으나, 유종은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대로 항복하고 만다. 번성(樊城)을 지키고 있던 유비 군은 믿었던 유종의 배반으로 괴멸하여 구사일생으로 동남의 하구(夏口, 지금의 漢口)를향해 철수했다. 조조의 대군은 물밀 듯이 남하하여 양자강 유역의 강릉(江陵)을 점령했다.

하구에 몰리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 유비는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손권은 시상(柴桑)까지 진군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은 이때 사신을 자청하여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서 오나라로 건너갔다.

결국 제갈공명은 형주가 함락되면 오나라도 직접 조조의 압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와 촉이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물리쳐야만 서로가 살 수 있다는 논리로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손권은 주유(周瑜)에게 명하여 수군 3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다.

주유는 하구에서 유비의 군사와 합류한 뒤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 적벽에서 조조 군과 대치하여 화공(火攻)으로 조조 군을 대파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제갈공명은 화공전에 필요한 동남풍을 불어오게 하기 위하여 칠성단(七星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유비는이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형주를 손에 넣고 삼국정립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유비는 214년에 사실상 파촉(巴蜀)의 땅을 지배하고 221년 촉한(蜀漢)의 건국을 이룩하였다. 유비는 군신의 추대를 받아 성도(成都)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한(漢) 왕실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전의 한왕조와 구별하는 의미로 촉한(蜀漢)이라 부른다. 제갈공명은 이때 승상에 임명되었다.


☞ 정치가로서의 제갈공명



223년 유비는 오나라와의 전쟁에 출전하였다가 병을 얻어 후사를 제갈공명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제위는 아들 유선(劉禪)이 계승했지만, 유선은 평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정사는 제갈공명이 처리해야만 했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의 조직력을 강화하기에 힘썼다.

제갈공명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왕조를 부흥시켜야만 촉이 존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안으로는 내정을 충실히 하며 농경을 장려하는 한편 군사훈련도 게을리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면서, 밖으로는 오나라와 동맹을 유지해 위나라를 경계하는데 힘썼다.

제갈공명이 승상에 임명된 것은 촉한이 건국되었던 221년의 일이지만, 사실상 내정면의 총책임자가 된 것은 유비가 촉한을 영유할 무렵인 214년부터이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제갈공명은 오장원(五丈原)에서 세상을 떠난 234년까지 20여년간 촉한의 정치를 담당했다.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저자 진수(陳壽)는 제갈공명의 치세를 평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충성을 다하고 시대를 이롭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다. 법을 범하고 게을리하는 자는 친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에 굴복하고 정을 다하는 자는 죄가 무겁다 하더라도 반드시 용서하였다. 언사를 희롱하고 꾸밈에 교묘한 자는 죄가 가볍더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은 미세하더라도 반드시 칭찬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악은 미세하더라도 반드시 배척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 드디어 나라 안에서는 누구나 두려워하며 이를 사랑했다. 형정(刑政)이 엄준하다 하더라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음은 그 마음씀이 평온하여 권계(勸戒)가 명료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제갈공명은 신상필벌의 법가(法家) 노선을 채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엄하게 법을 집행하는 곳에서 그의 정치적 특성을 볼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백성들에게 원성이 없었다는 것은 그 집행하는 태도가 공평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제갈공명은 승상으로서의 사생활도 매우 검소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읍참마속(泣斬馬謖)

226년 위 문제가 죽고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제갈공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을 정벌하고자 했다. 이듬해 제갈공명은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바치고 새로운 전선으로 나아갔다. 이 <출사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천하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는 감동적인 글이다.

227년 제갈공명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성도를 출발한 6만여 촉한군은 한중(漢中)의 양평관(陽平關) 근처에서 집결하여 봄을 기다렸다가 이듬해 봄에 진공을 개시했다. 제갈공명은 먼저 군사 요충지인 기산(箕山)을 점령하고, 계속하여 남안(南案), 천수(天水), 안정(安定)을 평정한 다음, 가정(街亭)에서 장합(張합, 합=合+우부방)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와 대치했다.

이때 촉한군의 선봉부대 지휘관에 임명된 장수는 마속(馬謖)이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공명의 지시를 어기고 자신의 지략만 믿고 싸우다 패하여 촉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제갈공명은 평소에 마속을 친자식처럼 아꼈지만 군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제갈공명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을 참수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읍참마속"의 고사이다.


☞ 오장원(五丈原)에서의 최후


228년 제갈공명은 군의 체제를 정비하여 재차 북벌에 나섰다. 이번에는 산관(散關)에서 진격하여 진창(陳昌)을 포위했다. 그러나 진창은 예상외로 견고하여 공격을 한지 20여일이 지나도록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결국 군량의 보급이 중단되어 제갈공명은 눈물을 머금고 군을 철 수 시켰다.

229년 봄에 공격로를 변경하여 무도(武道), 음평(陰平)을 평정하였다. 231년 봄, 제갈공명은 또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기산(祁山)을 공격하였다.

두 차례의 북벌이 모두가 실패로 끝난 것은 물자보급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한 제갈공명은 새로이 발명한 목우(木牛), 유마(流馬)로 물자를 운반했다.

위나라에서는 사마중달(司馬仲達)이병력을 이끌고 촉한군을 맞이하였다. 사마중달은 이싸움에서 매우 신중하게 대처했다. 제갈공명이 유인 작전을 펼쳐도 말려들지 않고 장기전으로 버티었던 것이다. 원정군의 입장인 제갈공명은 단기전으로 승부를 걸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간파한 사마중달이 전혀 응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도 없었다. 결국 군량이 떨어진 촉한군은 또다시 철수하였다.

234년 봄, 2년간의 준비를 거친 제갈공명은 10만 병력을 이끌고 제4차 북벌을 감행했다. 제갈공명으로서는 이것이 최후의 출전이었다. 이번에는 사곡(射谷)에서 위수의 남안인 무공(武功)으로 나와 그곳에서 서행하여 오장원에서 포진하였다. 이를 맞이한 위나라의 총사령관은 역시 사마중달이었다.

사마중달은 처음부터 정면으로 싸울 의사가 없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여 상대의 철수를 기다리는 태세였다. 제갈공명도 이번에는 둔전(屯田)을 일으켜 식량의 자급체제를 갖추고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갈공명은 병을 얻어 병상에 드러눕고 만다. 죽음을 예감한 제갈공명은 양의(楊儀), 비위(費褘), 강유(姜維) 등 휘하 부장에게 철수작전을 명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때는 234년 8월, 제갈공명은 향년 54세였다.

≪한진춘추(漢晋春秋)≫에는 제갈공명이 죽은 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이 죽은 것을 알고 즉시 철수하는 촉한군을 추격하였다. 그런데 양의(楊儀)의 부대가 깃발을 높이 들고 전고를 울리면서 반격해 오자, 이것이 제갈공명의 계책이 아닌가 의심하여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달아나게 했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제갈공명의 북벌은 4번 시도하여 4번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치가로서의 제갈공명을 관중과 소하에 필적할만 하다고 극찬했던 진수도 장수로서의 제갈공명의 용병술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를 품었다. 분명 마속의 잘못된 기용이나 정공법(正攻法)에 치우친 작전 등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십이사(二十二史)≫「차기(箚記)」의 저자 조익(趙翼)은, "진수(陳壽)의 아버지는 일찍이 마속의 부하로, 마속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단죄에 처해졌을 때 한쪽 발이 잘리는 형을 받았으므로, 제갈공명의 용병에 대한 진수의 혹평은 이 일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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