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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담론*행복론/인생행로*나침반

천지의 마음

by 바로요거 2008. 4. 5.

마음은 만지지도 잡을수도 없는 개념이지만

나에게 나의 마음이 없다면

나는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를 포함한 개념일 것입니다.

닦는다 하면 실체가 있어야하는데,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닦아야할 대상이

없다고도 말합니다.

닦는다는 말은 “바꾼다”라는 말이 더 적절 할 것 같습니다.

바꾸는 대상은 내가 우주 만유를 바라보는 세계관,우주관,

내지는 가치관일 것입니다.

세계관 우주관 가치관이라고 한다면 이는 우리가 인식이 가능한

개념들입니다.

주자선생 말씀으로 보면 인간의 마음은 허령불매하여

지각을 갖추고 몸을 주재하는 곳이고,

신명이 머무는 곳이며,

천지의 뭇이치(理:인간에게는 性)를 갖추고

만물과 감응하는 자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카페에 올린 자료 한토막입니다.

세계관 우주관 가치관이라고한 표현이

한 인간의 현재心을 정의 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천지의 마음이 그 근본입니다.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천지의 마음이 가장 온전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 천지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天地之大德曰生즉 천지의 대덕은 만물을 낳는데 있다.

生生之謂易이라. 생하고 생하는 것이 천지의 마음인 易의 공능이라는 것입니다.

공자선생의 이러한 견해는 천지의 마음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仁者 天之生物之心이라. 즉 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

주자선생의 인설에 있는 명구입니다.

사람에게는 仁이요 천지에게는 元이라 하였습니다.

천지는 元亨利貞이라는 도리를 갖추고서 만물을 낳고 기르고 거두고 감추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변화의 질서를 무한히 반복하는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증산도 도전에 보면  生物無窮天地之大業(생물무궁천지지대업)

이요 運行不息天地之大德(운행불식천지지대덕)이라는 천지의 마음을 꿰뚫는 명구가 있습니다.

만물을 생함이 무궁한 것은 천지의 대업이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운행함은 천지의 대덕이다.

이로보면

이라는 한 글자가 천지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단어일 것입니다.


천지의 마음은 변화의 道, 生生의 道인 으로 드러납니다.


주자선생 말씀으로 보면

다만 명도 선생이

其體則謂之易 其理則謂之道 其用則謂之神

“그 체는 역이고 ,그 리는 도이며, 그 용은 신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易 心也. 道 性也. 神 情也.   此天地之心性情也

:역은 천지의 마음이고

도는 천지의 이고

신은 천지의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천지心 性 情이다.

<권오 성리2 주자어류 92조목>


천지 변화의 주체는 천지의 마음인 易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나의 행위의 주재자가 나의 마음이듯이

천지의 동정과 변화의 주재자인 천지의 마음은 易이라는 것입니다.

천지의 마음은 그 안에 법칙인 理즉 道를 머금고 있으며,

이러한 理를 현실에 역사하는 존재는 氣라는 物인데,

氣의 형이상학적인 모습은 神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천리(천도)가 인간에게 부여된 性이라는 物을 갖추고

情으로  드러낸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氣라는 物의 능력임을 볼 때

천지의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나 소우주인 인간의 마음이 用하는 원리는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작용할 때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와 같은 자율성을 근본으로 하는데,인간은 천지자연처럼

광대하고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정신이 노니는 운동장인 몸이 너무 우주에 비해 작기 때문입니다.

작으면 충돌이 많이 일어납니다.

또 천지 기운을 고루 받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협소한데다가 천지 기운마저 고르지 못하니,

이러한 조건에서 인간의 정신은 자유롭기 힘든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조건 뿐만이 아니고,

인간은 환경이라는 절대적 조건의 영향을 받습니다.

앞의 인간의 조건 또한 환경에 포함된 개념입니다.

가까이는 나의 몸과 정신의 제약을 받고 멀리는 나의 주변 사람들,

많은 사람들 ,지구, 태양계, 가장멀리는 우주의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불가에서 말한 것 처럼 一切唯心造가 나의 바깥 세계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산을 물이라한들 산은 변화하여 물로 되지 않습니다.

주변에 사람들 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데,

다른 사람이 절대 나의 뜻대로 해주질 않습니다.

도대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천재지변 앞에 선 인간은 그야말로 작은 존재입니다.

화산이 터져서 한 도시가 폐허가 되고 수십만이 목숨을 잃은 일이 일어났을때(아르매니아)  인간의 선악의 문제는 펄펄 끓는 용암 속에 함께 묻히고 말았던 사실을 우리는 목격한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나 존재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극락의 경지에 가 있은들 그것이 참다운 극락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차라리 괴로울지언정 뭇 존재와 함께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도에 가까운 길일 것입니다.

나만 즐겁다고 극락이 아닐것입니다.

장횡거 선생이 서명도설에서

<무릇 천하의 늙어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여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이다.>

라고 하였듯이

우린 혼자만 위대할 수도 즐거울 수도 없은 따뜻한 정을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인 것입니다.

환경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환경인 천문과 지리를 살펴서 인간의 길흉화복에

이를 적용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였지요

順天者는 興하고 逆天者는 亡한다.

평범하지만 절대적인 가르침입니다.

만약에 혼자 도를 구하여 도통하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장담하건데,그는 절대로 도를 통할 수 없습니다.

道는 공공(公共)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道와 천지 자연의 道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일 것이지만

無爲(무위)와 有爲(유위)라는 차이성을 가집니다.


노자 선생은 스스로 그러한 천지의 조화를 無爲(무위)라 하였는데

無爲란 有爲 作爲(작위)와 반대말입니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는 구절이 ‘노자’ ‘도덕경’에 있습니다.

즉 “인간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으며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법도로 삼는다

주역 계사상전에 보면

易 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역 무사야 무위야 적연부동 감이수통천하지고

“역은 思(사려함)가 없고 작위 함이 없다(無爲).

  적연(고요하다)하여 부동하고,

  감응하면 천하의 동정과 변화의 모든 이치(天下之故:천하의 연고)를 드러낸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의 마음은 그 공능(公能)를 이룸에 無爲한 것 처럼 보입니다.

스스로 그러한다고 하여 자연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으로 보건데 천지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은 본질은 같지만

그 능력면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능력의 5%이하로 바라보는 천지의 모습이기에

인간인 나의 가능성를 개발한다면 천지와 인간의 차이는 줄어들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