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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인생담론*행복론/인생행로*나침반

마음의 정의 - 북계자

by 바로요거 2008. 4. 4.
 
북계자의 마음의 정의
'북계자의"라는 책은 "주자"선생의 제자이신 북계 "진순"선생의 작품입니다.
흔히 유가는 인간의 외적인 형식을 따지는 예(禮)를 가르치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북송오현에 의해 정립된 "성리학"과
왕양명선생의 "양명학'을 보면 그 주제가 마음 즉 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공부하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유가의 가르침의 핵심이 마음이라는 한 글자라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유가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사상의 근저에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모두 나의 마음의 소산입니다.
인간이 바라보는 모든것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모두 마음의 주재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체가 모두 마음의 소산이라고 본 것은 동서 고금 모든 성철들의 공통점입니다.
아래글은 유가 성리학에서 바라본 마음의 정의입니다.


1,마음은 몸을 주재한다.
사람의 사지(四肢)운동, 즉 손으로 쥐고 발로 밟는 행위, 배 고플 때 음식을 떠올리는 것,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
여름에 시원한 칡옷을 원하는 것, 겨울에 따스한 갖옷을 원하는 것,
이 모든 것에서 마음이 행위의 주재자인 것이다.
이를테면 미친 사람의 경우는 마음에 사기(邪氣)가 타고 앉아 안에 주재자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의 먹고 마시고 행동하는 일에서 모두 그 상도(常度)를 잃어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된 것이다. 그런 경우는 이(理)와 의(義)를 모두 잃어버리고, 단지 헛되이 약간의 기(氣)만이 남아 맥과 숨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끊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대체로 사람은 천지의 이(理)를 얻어 자신의 성을 이루고,
천지의 기(氣)를 얻어서 자기의 몸을 이룬다.
이(理)와 기(氣)가 합해져야 비로소 마음이 이루어진다.
마음에 허령(虛靈)한 지각이 있으므로 마음이 몸을 주재하게 된다.
그런데 허령한 지각도 하늘에 근거하여 이(理)를 좇아 발동하는 것과 마음을 좇아 욕심대로 발동하는 것이 있는데, 양자가 각기 다르다.
2,마음은 그릇과 비슷하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
소옹(邵雍)은‘마음은 성(性)의 바깥을 둘러싼 성곽(城郭)’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이 비록 거칠기는 하나 뜻은 매우 적절하다.
성곽은 마음이다.
그 성곽 안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마음속에 이치가 갖추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갖추어져 있는 이(理)가 곧 성이다.
즉 갖추어져 있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다.
이(理)는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며, 여기에는 많은 오묘한 작용이 있다.
지각이 이(理)를 따라 발동한 것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이자
도심(道心)이다.
만약 지각이 형기(形氣)에서 발동한다면 그것은
인심(人心)이며 이(理)와 어긋난다.
사람은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니 두개의 지각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지각이 형성되는 과정이 다를 뿐이다.
이를테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인심이다.
그리고 마땅히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마땅히 마셔야 할 것을
마시는 것이 도심이다.
설령 배고파 죽음에 임박하였더라도 발로차서 주거나 경멸을 하면
서 밥을 주면 아무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은 어느 곳에서 나오는 것인가?
내면의 도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경멸을 받으면 먹지 않는다거나 사과를 해 오면 먹는다거나 하는
경우에 그 의미를 알기란 대단히 미묘하여 이해하기가 어렵다.
모름지기 식견이 충분히 명철해야만 비로소 변별할 수 있다.
3,마음에는 체(體)와 용 (用)이 있다.
마음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이치가 체이고,
마음이 수많은 일에 반응하는 것이 용이다.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체이고 느껴 소통하는 것이 용이다.
체는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으로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용은 이른바 정(情)이라는 것으로서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성현의 공부는 매우 지극하다.
그래서 그 마음이 고요하여 발동하지 않고 있을 때는 전체적으로 그 뛰어난 경지가 마치 거울의 비어 있음이나 저울의 평평함처럼 안정되어 있다.
한편 그 마음이 움직여 사물에 응할 때는 그 대용(大用)이 아름답고 추한 것이나 높고 낮은 데에 두루 유행하여 각 사물마다 적절한 상태에 놓이게 하고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한다. 이른바 거울의 비어 있음, 저울의 평평함과 같다고 한 그 실체는 항상 자신의 본연을 유지하고 있어서 응하는 와중에는 휩쓸리는 법이 없다.
4,성(性)은 이(理)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선할 뿐 악이 없다.
그런데 마음은 理와 氣를 품고 있다.
理는 진실로 완벽한 선(善)이지만
氣는 양극(兩極)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한 선(善)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며 쉽사리 선하지 않음을 따라가게 된다.
마음은 살아 있는 것이어서 가만히 죽은 듯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 움직임을 좋아하는데 마음의 움직임(心之動)은 氣를 타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감흥
(感興)’이라는 시편에서‘사람의 마음은 오묘하여 예측을 할 수 없으며,
기의 변화를 타고 왔다 갔다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살아 있는 것은 기(氣) 때문으로, 이로 인해 마음이 활성되는 것이다.
마음이 영명한 것은 이(理)와 기(氣)가 함께 있기 때문으로 이(理)로 인해 마음이 영명한 것이다. 이른바 묘(妙)하다는 것은 이가 기와 함께 있기 때문이므로 이로 인해 마음이란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란 정해진 시각이 없이 홀연히 나왔다가 홀연히 들어
가고, 정해진 곳이 없이 문득 이곳에 있다가 문득 저곳에 있고, 또 붙잡으면 여기에 있다
가도 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는‘붙잡고 있으면 존재하고 놓으면 없어진다. 출입에 때가 없으니 그 가는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들어온다는 말이고 없어진다는 것은 나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가는 것이 곧 내면의 본체가 달아나 밖으로 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사악한 생각이 사물에 응하여 그것을 좇아 나감으로써 본연의 정체가 마침내 드러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들어오는 것 역시 밖으로 잃어버린 마음이 들어왔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한 생각으로 깨우쳐 마음이 이곳에 있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을 굳게 다잡아 보존하고 함양하는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본체가 안에서 굳건히 주재자 노릇을 하게 되어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학문에서 귀하게 여길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학문의 방법은 다른게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뜻이 아주 적절하다.
5, 마음은 비록 조그만 것이지만 온갖 커다란 변화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근원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자사(子思)는 미발지중(未發之中)을 천하의
큰 근본으로 삼았고, 이발지화(已發之和)를 천하의 달도(達道)로 삼았다.
인(仁)이라는 것은 마음이 만화를 낳을 수 있는 도이고 경(敬)이라는 것은 마음이 그것을
가지고 만물을 낳는 것이다.
6,이 마음의 용량은 지극히 커서 만리(萬里)를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고
만사(萬事)를 통섭하지 않는 바가 없다.
옛날 사람들은 항상 배울 때는 널리 배우고자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공자가‘배움에 물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두 이 마음의 무궁한 양을 다 채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맹자가‘마음을 극진히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마음의 극대 무궁한 양을 다하여 한 가지 이(理)나 한 가지 사물도
남김이 없이 통섭해야 함을 가리킨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을 극진히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맹자 역시 제후의 예의에 대해 공부하지 못하였고, 주나라의 작록 제도에 대해서도 듣지 못하였다.
결국 마음의 무궁한 양에 비추어 볼 때 빠진 부분이 있고
극진히 하지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
7,마음은 지극히 영명하고 지극히 오묘하다.
그래서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도 있고
천지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고, 귀신을 불러 올 수도 있다.
비록 만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도 한 생각이면 도착한다.
지극히 오래된 사람의 사정과 사변(事變)의 비밀도 한번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금속이나 돌같이 견고한 것도 꿰뚫을 수 있다.
사물의 지극히 모호하고 은미한 것도 다 꿰뚫어 볼 수 있다.

8, 불가에서 성을 논하는 것은 유가에서 마음을 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다만 사람 마음의 저 허령한 지각을 성으로 바꾸어 파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9, 정이(程B)왈
‘마음은하나이다.
체(體)란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용(用)이란 감응하여 통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포괄적으로 잘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성(性)은 마음의 이(理)이고 정(情)은 마음의 용(用)이다.
마음은 성과 정의 주인이다’라고 하였다.
장재(張載)는‘마음이 성과 정을 통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더욱 간명하고 의미가 완벽하다. 맹자 이후에 이 말보다 적절한 것은 없었다. .
이말 또한 두루 포괄하는 동시에 명백하다.
횡거는‘허(虛)와 기(氣)가 합해져서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다.
성과 지각이 합해져서 심(心)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명도선생왈
하늘의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다.
는 易이라하고
그 理는 道라하고
그 用은 神이라 한다.고하였다.
여기서는 천지의 心 性 情을 말한 것이다.
역은 곧 마음이고,도는 곧 성이고 신은 곧 정이다.

허는 이치라는 점에서 말한 것이다.
이와 기가 합해져 마침내 사람과 사물을 낳는다.
사람과 사물은 이와 기를 얻어 성을 이룬다. 여기서 비로소 성이라는 이름이 생긴다.
성은 이를 좇아 나오지만 기와 분리되지 않고,
지각은 기를 좇아 나오지만 이와 분리되지 않는다.
성과 지각이 합해져 마침내 마음을 이루게 된다.
이에 비로소 심(心)이라는 이름이 생 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하여 몸과 마음을 풀이하고 있으며,
성리학에 입각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전개하여 내면의 선(善)한 성(性)을 보존하여 본성을 길러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체(體)를 지키고, 수많은 일에 반응하는
용(用)을 각 사물마다 적절한 상태에 놓이게 하여 조금도 천리(天理)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고자 하였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지 모르지만,
그 의미를 잘 새겨보면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정신 수양을 외면하는 현대인에게 절실한 교훈이 될만한 요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초록색은 권양은 이라는분이 정리하신것임 안동권씨 회보에 실린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