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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by 바로요거 2008. 3. 27.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지은이: 주강현
    출판사: 한겨레 신문사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한 우리 문화론
 

"식혜는 우리 식생활문화가 거둔 승리이자 희망이다."  최근 나는 다소 엉둥한 화두를 들고 열심히 식혜 선전을  한다. 식혜회사에서 판촉비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침투한 가공할 만한 콜라의 벽을 허문 게 바로 가장 한국적인 식혜였기 때문이다. 새삼  '가장 민족적인 문화가 가장  세계적인 문화'라는 고전적 명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식혜는 '깡통'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바꾸는 순간, '성공'하였다. 민족음식의 시대에  맞춘 '변법자강책'이자 '법고창신'이지  않은가. 우리 것, 우리 문화를 갈고 닦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고 있다.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문화란 무엇인가.
최근에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기에 나는 이런 원론적인 의문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구술문화와 문자 문화, 무형문화와 유형문화, 구전역사와 문헌역사... .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문자 기록 문헌의 명료한 사실에 우선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씌어지지 않은 문화'의  진실을 모르고서야 어찌 문화의 전체상을 볼 수  있겠는가. 고려 청자의 예술적  위대성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문화의 저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금줄, 숫자 3, 서낭당, 흰옷 같은 원초적이며 토속적인 문화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의 씨줄과 날줄도 온전하게 자리잡지 않겠는가.  '씌어지지 않은 문화'를 제대로 밝힐  때 '씌어진 문화'의 올바른  상이 보인다. 반대로 '씌어진 문화'의 이해를 통해  '씌어지지 않은 문화'의 중요성도 돋보이는법이다. 뛰어난 농서를 쓰신 어느 선인께서는 "늙은  농부의 말을 간추린 농법이 농사 짓는 집에서는 제일"이라 하셨다. 나는 이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가지고 우리 문화를 점검하고 싶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비밀보다는 금줄의  비밀을 풀고자 한 것이다.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보면 '씌어지지 않은 문화'야  말로 가장 대중적으로 당대에 유행하던 문화이지 않던가.  그렇다고 '모든 과거는 훌륭하다'는  식의 복고주의나 '우리 것은  모두 아름답다'는 식의 쇼비니즘은 마땅히 경계를 요한다.  마찬가지로 자기 것은 버리고 세계적인 것만 강조하는 해체주의 역시 문제다. 문화는  시대마다 선택적이고 가변적이며, 장기적인 것과 단기적인  것이 공존하는 복잡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통한 문화접촉으로 한 나라의  문화가 뿌리째 뒤집힐 수도  있다. 이렇게 문화는 날줄과 씨줄이 복잡하게 얽힌 일종의 그물과도 같은 것이기에 순수한 자기 문화만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는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문화의 변화 파동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고추가 들어오자 김치의  제조방식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어쩌면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도 그런 변화의 예고는 끊임없이  존재한다. 불과 100년밖에 안 된 서구문화의 유입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는 쌀밥보다 피자를 즐기는 우리네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거센 서풍을 막을 동풍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1세기 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서풍에  주눅들었다. 서구우월주의의 관점에서 재단한 '문명과 야만'이란 얼마나 그릇된 편견인가. '똥은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서구적 사고와 문명관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 위생적이라는 수세식 변소가 환경오염의 주범이고  우리 전래의 똥돼지를 고사시킨 원인이었다. 개고기는 또 어떤가.  개가 애완동물이라는 사고  역시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 아니던가. '10리만 떨어져도 물과 바람이 다르다'는데, 남의 잣대로 우리 문화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동풍, 그것도 단순한 동풍이 아니라 바로 민족의 내면에 끈끈하게 이어져온 동풍으로 '문화의 신토불이론'을 세워야 할 때다. "나는 본래 조선 사람, 조선시를 즐겨 쓰리"라고 했던 정다산의 '조선시 선언'을 되새겨야 할 일이다.
  21세기 새로운 문화파동의 바람이 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문화의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심 세우디고, 우리 문화에 대한 불필요한 자기 비하도  모두 '테러'의 대상이다.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 나름의 생활문화를 가졌고 그에 바탕한 고급문화도 지녔다. 따라서 그 문화가 어떤 이유에서 낮게 평가될  필요도, 과장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자기 것을 갈고 지키겠다면 그로써 족한 일이다. 상대적 우월감이나  상대적 열등감은 모두 우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세계적인 차원의 문화교류를 가로막을 뿐이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생활 속에 가장 원초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문화현상 15가지를 골라 이 책을 썼다. 원래 한겨레신문에 반년간 연재했던 글을 대폭 손질하고 항목을 추가하여 가급적이면 딱딱하지  않게, 재미있게 꾸미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 글은 그동안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시베리아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내가 발로 뛴 20년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다. 솟대에서 성신앙까지 우리의 생활 곳곳에 남아 있으되 잘  모르는 것이나 지금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신앙, 수관념, 놀이, 옷과  음식 등 민족생활사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것을 골라 그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소 지나치게  말하자면 '금줄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한 우리 문화의 독본을 꿈꾸었다. 그들이 21세기 한국을 이끌 주역이라면 마땅히 이런 정도의 우리 문화에 대한 소양은 갖추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가급적이면 젊은이들과 호흡을  맞추기 위한 글쓰기를  시도했지만 의도만큼 소기의 성과를 이룬지는 모르겠다.
  나는 우리 시대의 문화상징으로 조선 후기의 삼두매를  제시하고 싶다. 삼두매의 힘찬 날개짓은 문화식민주의에 취해 있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줄 것이다.  이 글을 쓰기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은 분들의 노고를 어찌 다 잊겠는가. 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남모르게 우리 문화를 가꾸느라 애쓰는 이름 모를 '우리 문화의 지킴이'들께 이 책을 바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
  1996년 5월 북악을 바라보며 주강현

     

 성적 제의와 반란의 굿
   

도깨비굿, 반란의 제의
  초여름답지 않게 복날 같은 지열이 후끈 달아올랐다. 두어 달 계속된 가뭄으로 논두렁은 거북등이 되었고, 쩍쩍 갈라진 틈새로 일찍 심은 모가 빨갛게 말라붙었다. 마을은 깊은 침묵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따금 끼니를 얻어먹지 못한 동네 개들이 어슬렁거릴 뿐, 누구 하나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무제봉에서 기우제를 지냈건만 감감 무소식. 빗방울 떨어질  기색도 비치질 않는다. 가뭄에다 역질이 돌아 벌써 세 사람이 절단났다. 마을에는 연신 검불을 태우는 냄새만 자욱했다. 그래도 힘이  남아 있는 장정들이 동원되어  시신을 마을 뒷동산에 옮겨놓고 임시방편으로 거적만 덮어놓았다. 누구 하나 거들떠볼 여력이 없었다.
  기우제 지낸 지 열흘째 되는 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부황이  든 아낙들이 누렇게 찌든 낯빛으로 하나둘씩 약속이나 한 듯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자 굿을 내야 우리가 살제. 도깨비를 잡아 족쳐야제."  "암, 도깨비가 날뛰니께 죽을 놈의 가뭄에다 엠병까지 도는 것이제."  "도깨비굿을 내제. 이자 방법이 없지라. 농사일도 절단났은게."  "그란디, 누구 속곳을 벗기지라?"
  "아무렴, 새댁하고 과부댁 서답을 벗겨야 효험이 좋제."  황량한 들판의 어둠을 가로질러 요란한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숫가락으로 두드리는 양푼소리, 북채로 두드리는 놋대야 소리, 젓가락 장단의  꽹과리 소리, 온갖 불협화음들이 그 자체로 묘한 화음이  되어 마을을 시끌벅적 들끓게  했다. 마을 개들도 황망히 저마다 짖기 시작하였다. 오랜 가뭄  탓으로 동네가 시들시들해지자 짖는 것조차 눈치를 보아야 했던 개들이 제철 만난 듯 날뛰었다.
  아낙들은 저마다 장단을 두드리거나 외마디 소리를 질러댔고, 긴간대(장대) 끝에 피 묻은 속곳을 내걸어 휙휙 휘두르며 온 동네를  헤적이고 다녔다. 남정네들은 방 안에 틀어박혀 문고리를 꽉 쥔 채로 나오질 못했다. 속곳 휘두르는 여자들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른거리자 남자들은  낯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굿은 그렇게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되었다.  불볕 가뭄에 겹쳐 역질까지 돈다. 사람의  형편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기우제도 효험이 없고, 무당까지  불러다가 굿판을 열어도  마찬가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디어 여성들이 나선다. 이름하여 도깨비굿이라 부르는 진도 고유의 풍습. 월경서답을 장대에 내걸고 양푼을 두드리며 한바탕 시위를 한다. 달거리 피를 내보이는 성도착적 데먼스트레이션인데 효과는 만점이다. 역질을 몰고  온 귀신도 여성의 은밀한 그것들이 백주 대낮에  내걸리는 데는 어찌해 볼  도리가 있겠는가. 이슥한 밤부터 대낮까지 남자들은 감히 집 밖으로 나올 엄두를 못 내고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 못한다. 해방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굿판이  열린 다음에는 영영 사라진 풍습이다.  기성질서를 완벽하게 뒤바꾸어버리는  도깨비굿. 평소에 남성중심으로  사회가 유지 통제되다다 그들이 백기들고 항복. 방 안으로 도망을 치자 동네는 아낙들의 점령지가 되었다. 여성들은 못내 드러내기 어려운 속곳마저  벗어들고 시위를 하니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우먼파워가 기세등등하게 폭발하는 순간이다 평소에 남성들에게 시달렸던 스트레스도 적잖았을 것이다. 차마 내보이기  힘든 달거리 속
곳을 장대에 휘두르는 도깨비굿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압축하고 싶다
 

 '반란의 제의, 혹은 제의적 반란'
  분명한 반란이다. 일상적 엄숙함, 남녀유별,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권위, 남성들의 제의 독점... .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반란이다. 영기나  농기가 걸려야 했을 장대에 여성들의 붉은 피가 횃불에  번득인다. 반란은 사회를 엎어버리지만,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반란을 거치면 사회는 혼란과  변화를 통해 새 질서를 수립하지만, 반란이 없는 사회는 썩어 더러운 물이 고일 뿐이다.  그것은 또한 분명한 제의다. 마을공동체 전체가 가뭄과  역질로 위기에 닥쳤을 때. 공동체는 위기를 모면할 출구를 찾는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제의. 공동체를 살리려는 이 제의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최고의 호칭을 엄숙하게 올린다.
  '화려한 제의, 광란의 제의, 도착의 제의, 되살림의 제의...'
   

 생식의 힘에서 주술의 힘으로
  여성의 달거리는 생식을 상징한다. 매월 여성들은 하나의  통과의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전통시대,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생식조차도 오로지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쉬쉬해야 했다. 그러나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이 닥치자 남자들은 일시적이나마 완전 철수를 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남성들을 대신하여 주도권을 잡은 여성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식의 힘을  주술의 glamd로 바꾸어서 마을공동체의 운명을 구하고자 도깨비굿을 행하는 것이다.  폴란드 태생의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는  뉴기니 북동쪽의 트로브리안드 군도에서 무려 26개월간이나 머물면서  그 조사결과를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 Sex and Repression in Savage Society>에 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신화에 나타난 조상 집단들이 언제나 여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끔 그들이 형제나 토템, 동물을 동반하는 일은 있어도 결코 남편을 동반하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신화 속에서는  최초의 여조상이 자식을 낳는 방식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음탕한 자세로 비를 향해서 자신의 몸을 노출하거나, 동굴 속에 누워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거나 물고기에 물어뜯김으로써 자신의 후손을 잇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열리게'되며 아이의 정령이 그녀의 자궁으로 들어가서  임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신회는 아버지의 생식력을 대신하여 여조상의  독자적인 생식력을 보여 주고 있다.  여자들의 스스로 생식을 하는 모권사회적 힘. 그 원시적 힘이 도깨비굿에는 살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교적  덕목을 높이 산 전통사회에서  도깨비굿 같은 반란의 축제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을까.
  마을의 공동제사인 마을곳에서 달거리 있는  여성의 피는 부저한 것에 봉착으로 생각하여 기피대상 1호다. 그런데  정작 마을이 절대적 위기상황에 봉착하면, 달거리 있는 여성들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억눌리던 여성들이 정작 가장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는 주역이 되어 역전의 드라마를 연축하고 만다. 도깨비굿은 평소에는 은폐되어 있던 여성의 성적  상징물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적극적 통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모권적 생식의 힘이 다시 등장하는 셈이다.  도깨비굿이 진도사회에서 지니는 사회적 의미가 궁금한 사람들은 송기숙의 소설 <어머니의 깃발>을 읽어보라. 미륵을 파가려던 여인에게 진도의 여인들이 양푼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방 이 소리가 뭔 소린 중 아냐?  옛날부터 우리 동네서 도깨비 귀신 쫓아낸 소리다. 소작 농간하던 마름귀신,  징용 잡아가고 생과부 만들던  징용귀신, 공출 뜯어가고 배 곯리던 공출귀신, 생사람 쏴 죽이던 총잡이귀신, 촌가시네 홀려가던 양공주귀신, 장세 폴아묵은 장세귀신, 이런 귀신, 도깨비 다 몰아낸 소리여!
  집단적 환난을 극복하려 했던 도깨비굿의 사회적 성격을 잘 드러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인간의 성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던 이같은 풍습이 특수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보편적이라는데 있다.  엄숙하기만한 유교적 덕복이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감히 여자들이, 그것도 은밀한 그곳의 증거물을 백주 대낮에 장대에 매달아 휘드르고 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라! 성이  개방되었다고 하는 지금 시대의 남성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드의 교육 받아온 전통시대의 성관념에 대하여 일차 재고가 필요한 대목이다.  진도 도깨비굿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런 풍습을 진도만의 특수 사정으로 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야기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본다.
   

 디딜방아 액막이, 성적 유감주술
  두 갈래로 갈라진 디딜방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춘향이 생각이 절로난다. 이도령이 춘향을 만나서  취흥이 도도해지자 춘향을  안고서 농탕치면서 사랑가를 부르던 그  대목에서 방아확과 방앗간공이는  성적 은유법의 대명사가 된다. "너는 확이 되고 나는 공이 되어 천년 만년  찧고 말고... ." 우리의 속담에도 '가죽방아 찧는다'는 말이 있다. 성교 장면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그렇듯, 디딜방아는 전통시대 성적 상징물의 으뜸이었다.  디딜방아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갈라진 방앗다리에 각각  한 사람씩 올라가서 방앗소리에 맞추어 힘을 주면 공이가  확으로 내려가 알곡을 찧게  된다. 갈라진 다리가 성적 상징물임은 삼척동자도 다 알 것이다. 이 디딜방아도 마을에 우기가 닥치면 반란의 제의에 동참한다.  가뭄이 들면, 아낙들이  그 디딜방아를 훔치러 간다.
  충청도에서는 이를 '디딜방아 액막이'라 부른다. 불볕  더위로 가뭄이 계속되면 남자들이 나서서 용두레나 고리박으로 열심히 물을 뿜어본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가뭄이 이어지면 여성들이 드디어 나선다. 흡사 진도의 여성들이 그랬듯이.  상복을 차려입고 떼지어 이웃동네로 디딜방아를 훔치러 간다. 이웃 마을에서는 방앗다리 훔치러 왔음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 묵인한다. 아니, 묵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통스런 가뭄이  줄기차게 이어지는데 이웃동네라고  무사할 수있는가. 이웃마을 여자들이 방앗다리를 훔치러 왔을 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왜 하필 방아였을까. 여자들이  방앗다리를 훔치는 행위에는  집단적 성관계가 은유되어 있다. 여성들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이 집단적 관계의 공범이 된다. 가뭄같이 절박한 상황은 공동체 전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조치를 요구한다. 그 결과 마을에 일종의 비상사태가 선포된 셈이다.  훔쳐온 디딜방아는 즉각 길거리로 옮겨진다. 가능하다면 삼거리같이 행인이 많이 다니는 길목일수록 효험이 높다. 방앗다리를 거꾸로 세워서 길거리에 묻는다. 마을의 여성들 중에서 몇몇이 선택된다.  그들 선택된 여성들은 깊숙이 가리고 있던 월경서답을 벗는다. 피는 짙고 강할수록 좋다고 본다. 아무래도 성관계를 못했을 과부의 피가 강하다고 모두들 느낀다. 느낌이 그럴 뿐, 실상 과부의 피가 유난히 붉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속신일 뿐이다. 과부의 속곳이 걸쳐지면, 이윽고 여타 여염집  여인들도 벗는다. 속곳은 방앗다리의 갈라진 곳에 걸쳐놓는다.  하늘이 보고 까무라칠 일이 아닌가. 하늘도 놀랄 지경이라 비를 퍼붓고야 만단다. 방앗다리에 생식을 상징하는 여성의 달거리가 닿았음은 음양이 결합하였음을 의미한다. 바로 서적인 주술의 힘에 의하여 집단의 위기를 탈출하고자 하는 제의 그것이다. 피 묻은 속곳이 걸쳐진 디딜방아는 심지어  돌림병을 막아주는 힘까지도 지녔다고 믿는다.  이들 주술은  왜  힘을 지니는가.   이미 시대의  고전이 된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에서 프레이저(Frazer)는 주술의 기초가  되는 사고의 원리를 분석하면서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하나는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이전에 서로 접촉이 있었던  것은 물리적인 접촉이 사라진 후 멀리서도 계속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앞의  것을 '유사의 법칙', 뒤의 것을 '접촉의 법칙', 또는 '감염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 유사의 법칙에  기초한 주술을 유감주술, 또는 모방주술이라 부르고,  접촉에 의한 주술을 감염주술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디딜방아 액막이류는 '유감주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줄다리기굿, 남녀의 집단 상관
  성을 통하여 집단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던 풍습이 전국적이었을  뿐더러, 매우 다양하였다는 것은 마을간에 이루어졌던  대동 줄다리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으나 중부 이남을  중심으로 한 쌀농사지대에서는 널리 줄다리기가 행해졌다. 줄은 하나의 줄로 된 외줄과 두 개의  줄을 연결하는 쌍줄로 나뉜다. 어떤 경우에도 마을을 동서편으로 가르거나, 마을 대항으로 줄을 당기게 된다. 암줄, 숫줄로 남녀를 구별한다. 암줄과 숫줄 사이에는  기다란 통나무로 비녀목을 지르는데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남녀결합의 모양새다.  줄을 결합하려 하면, '좀더 세게 해!'하는 따위의  농지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한바탕 웃게 마련이다. 

비녀목 지름은 남녀의 섹시를 상징하기 때문에 쉽게  응낙하지 않는다. 고의적인 실수를 몇 번이고 거듭하여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전라북도  보안면 우동리 반계마을에서는 아예 암줄과 숫줄에 각기  각시, 신랑을 태워서 마을을  한 바퀴 돌게 한다. 사모관대 쓴 신랑, 족두리 쓴 각시를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하여 남녀결합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사례다. 

 남녀의 섹스, 즉 암줄과 숫줄의 줄다리기에서도 반드시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온다는 속신이 전해진다. 그래서 줄을 당길 때, 여자들은  부지갱이, 빗자루 따위로 남자측을 때리거나 일부러 잡아채는 반칙을 해도  짐짓 허락된다. 어린아이들은 사내라도 여자편에 넣는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자들이  이기게끔 되어 있다.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온다는 믿음 속에는 여성을 생산의 상징물로 간주하는 유감주술적인 전통시대의 이론이 담겨 있다.  좀더 많은 생산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염원은 줄다리기굿처럼 집단적으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정월 풍습에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란 속신이 있다. 과수나무의 Y자로 갈라진 틈에 돌을 끼워두는 일이 그것이다.

 과수나무가 낮게 양쪽으로 갈라져야 과실이 많이 열린다는 사실은 지극히 과학적인 농법이 아닌가.  옛 사람들은 이같이  뻔한 과학상식을 시집가서  첫날밤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연출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동국세시기> 같은 세시풍속지 뿐 아니라 <산림경제> 같은 농서에도 당당히  대추나무 시집보내기가 '가수'란  농법으로 등재되었다.  도깨비굿과 디딜방아 액막이굿이 위기로부터의 집단적 탈출에 여성의 성적 상징물을 활용한 것이라면, 줄다리기굿은  집단의 풍요를 비는  풍농굿에서 남녀의 상관을 적극 활용한 사례다. 어느 경우에도  집단적 공범의식이 담겨 있다. 적어도 의례기간만은 어떠한 노골적인 성적 표현도 공식화된다.  성적 상징물을 내세운 일탈된 의례를 통하여 성숙한 사회집단으로 성장한다는 측면도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민중들은  그야말로 성을 매개로 한 반란의 축제를 곳곳에서 벌였다. 그 축제는 유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신학자 하비  콕스(H. Cox)가 '바보제'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상을 바꾸어버릴 '환상'을 여전히 상실하지 않은 제의라고나 할까.  나는 이들 집단적 행위들을 '성적 제의와 반란의 굿'으로 명명하거니와, 우리들이 교과서로 배워온 조선시대 성풍속사가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는 무조건  엄숙하고 도덕적인 사회라 성적인  것들은 늘 '이부자리' 속에서나 이루어졌던 것으로 간주하는 교육에 동의할 수 없다.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비도덕인가. 백주 대낮에 여성들이 속곳을 빼들고 장대로 휘둘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도덕과 비도덕을 구분지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풍습들은 매우 늦게야 일부 사람들의 눈을 통하여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명색이 민속학자인  나조차도 대학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이 풍습들을 접하며 새삼 민중적 삶의 그 놀라운 반란의식에 놀라고 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전통시대 성에  관한 담론을 구축하지 못했다.  일생 동안 <풍속의 역사>를 쓰면서 진정 '성풍속의  사회경제사' 같은 것을 꿈구었을 풍속사가 푹스(Eduard Fuchs) 같은 임자를 아직 못만난 탓일까.

 '음란저속'하다는 이유로 히틀러에 의해 <풍속의 역사>가  분서갱유하다는 비운을 맞으면서도 정작 푹스 자신은 엄격한 모럴리스트였던 사실을 기억해보자. 푹스는  그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시대의 도덕행위, 도덕관, 도덕률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 인간의 성행동의 존재방식을 좌우하는 근본이 되지만 한편 성행동은 그 시대의 발전상을 인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요서가 된다. 그 속에 그 시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민족의  공공생활이든 개인의 사생활이든 성적인 이해관계와 경향을 내포하지 않은 것이 없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의 성행동이 각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형성되었고, 그 법칙도 새롭게  변화하여 왔다는 점이다. 그 변화방식의 틀은 한 마리도 천변만화였다. 

 21세기를 앞두고 우리의 성풍속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한 시대가 끝나면 일차 정리를 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할 터인데 우리는  지난 시기의 성적 담론조차 미처 정리하지 못하였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디딜방아  액막이 같은 생생한 성풍속의 현장사진 조차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푹스가 밀방앗간집 처녀를 묘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청춘들도 보리밭에서 한 폭의 춘화도를 그리고 있었을 터이니, 그 낙수들을 엮어서 건강한 성의 사회사를 재구축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남근과 여근의 풍속사
    

남근을 깎아 여신에게 바치며
  깊고 푸른 바다, 동해.
  백두대간을 옆에 끼고 동해바다가 누워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동해바다를 향하여 야무진 향나무로 깎은 남자의 성기가 아홉 개씩이나 굴비 꿰이듯 새끼줄로 엮여져 있는 게 아닌가? 일 년  내내 출렁이는 물결과 해풍 따라 남근이 꺼떡거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삼척시 원덕면 신남리에 가면 해랑당이  있는데 거기에는 남근을 모셔두어 뭇사람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아담한 포구 마을 산기슭에는 '큰당'이라 불리우는 서낭당이 있고, 바다로 혀를 내민 곶부리에는 '작은당'이라 불리우는 해랑당이 있어 연 2회 마을제를 올린다.
  옛날 옛적의 일이다.
  마을 젊은이들이 배를 타고서 하얗게 생긴 백섬으로 나갔다. 섬에서 조개를 잡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었고, 젊은이들은 급히 귀환했다. 그러나 동네 처녀 한 명이 미처 배를 타지 못했고, 급기야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을에서 하나 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바다에만 나가면 풍랑이 이는 이유가 뭡니까?"  "처녀애를 서낭으로 모시고, 남근을 바치도록 하시오."  "남근이라뇨?"  "해마다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서 처녀애를 달래보시오."  답답하다 못해 찾아간 무당의 입에서  처녀의 원귀를 달래주라는 공수가 내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원귀를 처녀귀신이라고 했던가. 그로부터 마을의 당은 해랑당이 되었고 예쁜 처녀애를 그림으로 그려서  여서낭으로 봉안하였다. 해마다 남근을 깎아서 정성을 드리니 그로부터 아무탈이 없었다.  남근을 바친 뒤로는 고기도 잘 잡히고 해상 사고도 없다고  한다. 해랑당의 남근은 향나무를 적절하게 깎아서 흰색과  붉은 무늬가 조화를 이룬다.  주먹에 곽 찰 정도로 굵고 시원하게 깎았기 때문에 자신의  물건이 유난히 작은 남자는 콤플렉스를 느낄 정도다. 남근에는 붉은 황토흙을 칠해서 실물과 같은 피부색을 낸다. 할아버지 한 분은 자귀 하나로  나뭇밥을 일으키면서 척척 깎아내는데, 수십 년간 남근 깎는 전문가로 불리웠을  정도로 솜씨가 보통을 넘는다.  남근 깎기에 관한 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해랑당의 남근 신앙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옳을까.  해랑당의 죽은 처녀에게  남근을 바치는 의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적인 죽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신 중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이 처녀귀신이다. 속설에 처녀귀신은 손각시, 혹은 왕신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몽달귀는 총각이 죽어서 된 귀신으로 삼태귀신이라고도 부른다. 상사병이 들어서 죽은 귀신, 특히 나이를 먹어 장가를 들 나이에  억울한 일로 죽은 총각귀신이나 그와 유사한 처녀귀신은 원한이  깊어 혼령이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원귀가 되어 떠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망자혼사 굿처럼 죽은  처녀 총각을 맺어주는 사후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랑당의 여서낭은 해마다 여러 개의 남근을 받고 있으니, 죽어서나마 남자 복은 많은 셈이다.  원귀에게 바치는 의례가 아니더라도 여신에게  남근을 올리는 신앙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사례를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서울 지방 곳곳에 부근당이  잇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으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부근이라 함은 네 벽마다 나무로 만든  많은 음경을 걸어놓은 것을 말함이니 음탕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였다. 남근을  깎아서 곳곳에 걸어두었다니! 하지만 유교가 세력을 떨치면서 중도에 남근은 사라지고  부군신이 슬쩍 자리를 꿰어찬 셈이다.  '근'을 '군'으로 바꿀 정도로 성신앙의  흐름을 바꾸려고 했던 지배층의 완강한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오늘날 서울, 경기 지방에 산재된 부군당에는 남근은 사라지고 엄숙한 신만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박물관의 무속실 유리관에 안치된 원효로 부군신이 아리따운 여신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해의 해랑당처럼 남근을 깎아서 여신에게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바위와 좆바위의 역사적 만남
  그러나 말이다. 우리에게 남근신앙이 유별났던 것은  어쩌면 '사회적 강제'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의 유교적 덕목이 요구하던 남아선호  풍습이 남근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는지.... .  누구든 칠거지악을 알고 있으리라.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대를 잇지 못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소박을 맞거나, 첩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무엇 하나. 남자아이를 낳아야 사람이지, 오죽하면 일곱 번째 공주를  강물에 띄워버린 바리공주 이야기가 대표적 무속신화로 정착되겠는가.  아들 못 낳는 것이 어디 여자만의 책임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소재는 항상 여성들에게 돌아갔다. 그런 실정이니 남아선호 풍습은 오히려 남근 숭배를 더욱 촉진시켰다. 나는 그 조선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폭발적으로 포교되는 남근신앙시대
  엄숙하고 교조적이기까지 한 도덕적  덕목에 덧붙여 가부장적 남아선호사상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남근 숭배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 많은 여인들이 절을 찾아 불공을 드렸다. 그러다가 아예 마을 미륵을 섬김으로써 절에  갈 필요조차 없어졌다. 미륵이 동네 한가운데로 스며들어오는 데에는  남아선호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중화된 미륵의 본디 모습  자체가 워낙 다양한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가 남근과 결합되었다. 미륵과 남근, 이 역시 조화 속의 부조화인가, 아니면 부조화 속의 조화인가.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미륵신앙은 하나의 구원처였다. 원래 미륵신앙은 조선 후기 변혁운동의 확산과 맞물려 있었다. 우리나라판  '메시아'를 간구하는 민중적 염운에서 민중들은 당대를 '미륵의 시대'로 만들어갔다.  미륵이 당래하생하여 중생을 구제해주기를 간구하였기에 민중들은  자연바위마다 미륵바위란 별칭을 부여한다. 그것이 남아선호사상과 결합, '남자의  물건과 비슷한' 바위마다 역시 미륵바위란 이름을 붙이게 된다.  미륵바위에 부과된 1차 과제는 아기를 낳게 해주는 역할이었다. 칠거지악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한 지경에서 좆바위와 미륵바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드시 미륵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남근을 세워두고 해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감았다. 여근과 달리 남근의 경우, 돌부리가 길게 올라와 있어서 줄을 감기에 편리한 탓도 있다. 남근에게 올리는 최대의 선물로 집단적 제의를 바쳤다. 단순한 '자지바위'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운명을  짊어진 성적 상징물로 자리잡게 된 셈이다.
   

공갈바위에 돌을 던지며
  남근이 강조된 시대였다고 하여  여근이 무시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듯한 남근이 있으니 그럴듯한 여근이 없겠는가. 동해바다 해랑당 남근에 견줄 만한 수준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충청도 제천땅 무도리의 공알바위를 들고 싶다.  마을 입구 길가에 직경 5자  크기의 원형으로 된 자연석 바위가  옴폭 패이고, 그 속에 직경 3자 크기의 난형 바위가 볼록하게 솟았으니 영락없이 여자의 음부 그 자체다. 인공으로 그렇게 만들라고 해도 쉽게 만들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무도리를 두 번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건녀편 논둑의 바위에 서서 돌 세 개를 공알바위에  던졌다. 재주가 없던지 번번이 실패하였다. 던진 돌이 들어가 ㅇ으면 첫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첫딸을 낳았다. 믿거나 말거나 주민들은 이 속신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다.  도 이 공알바위의 구멍을 작대기로 쑤시면 동네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전해진다. 여성의 음부를 작대기로 쑤시는 행위는 가 자체로 남녀 상관을 뜻한다. '계집과 아궁이불은 쑤석기리면 탈난다'는 속담도 여기서 나왔다. 이 마을에서는 연 1회 바위에 제를 올려 마을 처녀들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남자물건'하고 '여자물건'을 모신  마을들은 찾아가 보았으니  이번에는 둘 다 모신 마을을 찾아가 보자. 전라도 정읍땅 원백암에 가면, 1개의 자연마을에서 무려 12당산을 모시고 있다.  당산은 당산나무, 당산돌, 장승  따위로 이루어지는데 남근과 여근도 한몫을 차지한다.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의 남근은 일명 자지바위라고 부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나는 이 자지바위를 볼때마다 감탄을 연발한다.  '전국에서 제일 세련되게 생긴 자지다!'
  나는 3년 전 여름 한국역사민속학회 하계답사 대, 답사단  40여 명을 안내하면서 자지바위 앞에 서서 아주 당당히 그렇게 선언 하였다. 처녀애들안 알 듯 모를 듯 웃었고, 나이먹은 축들은 충분히 알만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마을이 굽어보이는 뒷산을 향해 10여 분 오르면 남근에서 마주 보이는 산자락에 후줄근하게 물이 흘러내리는 바위벽이  있으니 여자의 갈라진 그곳과 같다고 하여 농바우, 두덩바위, 보지바위라 부르고 있다.  건넛마을에서 농바우가 바라보이면 동네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음풍을 막기  위하여 동구에 남근을 세웠단다.  이렇듯 남근 홀로, 아니면 여근 홀로, 그것도 아니면 남근과 여근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예는 세 망르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만  해도 인왕산 국사당 근저리의 암벽들에는 여근암이 수두룩하다. 국사당에서  건너다보이는 이화여자대학교 뒷산에는 비죽바위라 부르는 거대한 남근바위가 불끈 솟구쳐 있다. '독립군'을 잡아두었던 서대문 형무소 자리와 독립문을 사이에  두고 여근과 남근이 마주 보고 있으니 마치 서로를 끌어당기는 형국이다.  이렇듯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남근과 여근들이 흔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도 다양하기만  하다. 자지바위, 보지바위와 같이 조금은 원색적인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가 뭐했던지 여근과 남근, 여근암과 남근암, 성기바위, 처녀바위, 미륵바위, 옥문바위 따위의 비교적 '고상한' 딱지도  붙여주었다. 그러나 좆바위, 씹바위, 공알바위, 씹섬바위, 암탑, 수탑, 좆바위, 자지방구, 소좆바위, 삐죽바위 같은 이름표처럼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한 경우도 많다.
   

성풍속의 뿌리를 찾아서
  이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선사시대로 가자.  동북아시아에 산재한 암각화를 보면, 남녀의 성기나 남녀간에 섹스하는 모습이
다수 그려져 있다. 당대인들은 성에  대한 관념을 매우 솔직  담백하게 증거물로 남겼던 것 같다. 우리의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에도 양다리를 굽혀  춤을 추고 있는 남자상이 있는데 엉덩이에 고리가 달리고 거대한 성기가 돌출되어 있다.  거친 자연풍토, 험악한 생존조건에서 본능적으로 생산력을  희구하였을 선사시대인들에게 성은 대단히 자연스런 생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당연히 남근과 여근을 암각화 따위로 묘사하는 일은 그들의 일상적 생활이었다.  역사시대로 내려오면 조금은 구체적으로 성의 상징무이 등장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군사 5백명이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여근곡에  진을 쳤다가 모두 죽는 대목이 나온다. 신라 22대 지철로왕은 음경이 커서 배필을  구하지 못해 생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기사는 대략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의 생식기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매 마땅한 배필을 구할  수 없었다. 배필을 구하러 다니는 신하들 눈에 개 두 마리가 북만한  큰 똥덩이 한 개를 물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동리 사람더러 물었더니 마을의  재상댁 따님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들어가 숨어서 누은 똥이라고 답하였다. 처녀를 찾아보니 과연 키가 7척 5촌에 이르므로 왕후로 봉하였다.  슈퍼모델인들 북만한 똥을 누을 수 있을까. 섹스의  심벌을 극대화시킨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삼국유사> 강독 때마다 사람들은  지철로왕의 남근을 두고서 저마다 그럴듯한 해석을 해대곤 한다. 하지만 남근이 1척 5촌이나 되었겠는가.  압안지에서 나온 출토품에도 남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용도는 분명치 않으나 귀두가 분명하게 다듬어진 목제 남근이다. 신라시대의  궁녀들이 야심한 밤에 잠 못 이루다가 쓰던 물건을 연못에 버렸을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이, 조선시대 민속품 중에도 궁중의 궁녀들이 '오나니'용으로 쓰던 목각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 신라시대나 조선시대 규중 궁녀들의  '쉽게 처리되지 않는 성욕'의 해결방식을 잘 말해주고 있다. 궁녀인들 욕정이  없을 수 없었으니, 궁궐의 제도적 장치가 주는 압박감 못지 않게 성적 욕구의 발산 의욕도 강했음직하다.  민간에서도 뿔이나 가죽 같은 재료를 써서 남자 성기 모양으로 만든 아녀자들의 노리개인 '각좆'이 있었다. 그래서 '동상전에 각좆 사러 들어간 계집'일나 속담도 생겨났을 정도다. 각좆을 사려고 종로 뒷골목의 잡화상인 동상전에 들어 갔다가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웃기만 했대서 비롯된 속담이다.
  신라 토우상에서도 생생한 성신앙 풍경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엄숙하기만 했을 장례식을 치른 후 순장한 무덤의 그릇에 생생한 성풍속이 연출되는 아니러니라니. 노 젓는 삿대 만큼이나 크게 묘사된 뱃사공의 '물건', 대표같이 큰 '물건'을 가슴에 품고 서 있는 남자... . 거대 남근의 '괴력'을 과시 하거나 숭배하는 듯한 인상을 던져준다.  신라 토우의 남녀결합을 보면 여자는  엎드리고 남자가 뒤에서 행하는 후굴자세가 일반적이다. 후굴자세가 동물적인  습성임은 모든 인류  성생활사의 첫장에 나와 있는데, 신라의 토기의 토우들이 이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성풍속을 말할 때  흔히들 중국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을거론한다. 냇가에서 남녀가 목욕한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꽤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남녀가 스스럼이 없었으니  조선시대처럼 '남녀칠세부동석' 따위와는 관계없었던 시대 같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충선왕비 허씨는 7남매를 거느렸으나 왕이 죽자 숙부와 붙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엄격한 도덕윤리의 잣대는 아무래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화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남녀상열지사'가 거론되던 시절의 '뼈대 있는' 양반들 문화는 어떠했던가. 기생첩을 옆에 끼고 시를 주고받거나 공식적 축첩제도에 안주하고, '국가공인 매춘부'인 '별정직 공무원 관기'의 수청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남녀유별의 덕목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립했을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고 춘향이는 과연 양반층이 의도적으로 설정했던 바대로 '열녀 춘향이' 그 자체였던가. 십대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 도령과 방안에서 '노는' 모습에서 차라리 '인간 본능의 통시대성'을 발견하는 게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우리는 여기서 조선시대 성풍속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매우  엄숙하기만 했을 것 같지만, 정작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유전하던  성풍속으 참으로 인간적이기만 했다. 비록 유교적 덕목에  의하여 남근신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손 치더라도, 그들 남근조차도 마을공동체의 공유물로 만드는 민중적 슬기를 보여주었다.  신촌 네거리에 남근을 세워둔다면?  이쯤 되면 우리의 기보상식을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는 유교적 덕목이 사회윤리의 평가  기준이 되었기에 '정숙' 같은  단어만이 연상된다. 그러나 민중들의 삶 속에서 '성과 반란'의  욕구는 분명 역사책의 상식을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의 역설까지 성립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성관념은 성의 과감한 '노출'조차도  사회적인 공동체의 산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마을 입구에 버젓이 남근이 서 있어도 음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마을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남근을 세워두고, 그것도 일 년에 한 번씩 줄다리기가 끝나면 옷을 입힌다고  짚을 감아주었다. 오히려 공개되어진 사회적 성 상징물을 묵인하고 있던 건강한 분위기다.  오늘은 어떤가. 만약 선남선녀가 오고 가는 신촌  네거리에 남근을 세워둔다면 '외설시비'로 논란이 거듭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훨씬 도덕적일까. 건강하기만 하였던 사회적 성 상징물이 자본주의적 확대 재생산 과정에서 성의 상품화로 전락되지 않았던가.  물론 중세사회에도 '매매춘'을 통한 성의 상품화는  존재했다. 한량들이 장난으로 만든 춘화전을 보면, 남녀상관의 '포르노'가 여실하게 새겨져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플레이보이>지 같은 옐로 문화는 늘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일제시대의 국학자 이능화는  최초로 기생의  역사를 다룬 <조선해어화사>란 책에서 아예 '갈보종류총괄'이란 장을 독립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관아에 속한 기생, 은근하게 몸을 파는 은군자, 매음 하는 유녀인 탑앙모리, 화랑유녀, 유랑예인집단인 여사당패 등을 대표적인 갈보로 꼽았다.  갈모란 말할 것도 없이 '몸파는 여자'를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은 전통시대 성풍속과 비할 바가  아니다. 급속도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전화되고 있다.  성은 돈과 '교환'되고 있으며  잠깐씩 보여주거나 만지는 것조차 돈으로 환산된다.  그 시대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밑바닥에 있는 성풍속과 같은 시대상이 밝혀저야 한다. 성풍속을 언급하는 것이 마치  '음란한 일'인양 여기는 한 우리는 역사의 진실과 대면하기가 어렵다. 물론 푹스가 저술한 <에로틱의
미술의 역사>에 대해 베를린 지방법원에서 내린 무죄판결문처럼, 성풍속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며, 자료들은 객관적으로 선택된 것'이어야 한다.

     

금줄과 왼새끼의 비밀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하여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내의 출산이 다가왔다면, 태어날 아기와  산모를 위해 무엇을 필수품으로 준비해 두겠는가.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더니, '산부인과에서  알아서 해주는데 따로 준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보게 했다. 태어날 때, 출생지가 집이 아니고 병원인 학생? 전원 모두가 손을 들었다. 우리집 아이도 호적등본에 '잠실동 XX산부인과'로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다.  내 또래를 둘러보면, 병원에서 태어난 친구들은  매우 드물다. 병원에 가야 할 만큼 산모가 위급하다거나, 유달리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고서야 산파나 집안 어른이 집에서 아기를 받았다. 어릴 적 어른들이 출산  준비로 분주하던 광
경이 눈에 선하다. 예전에는 무엇을 준비했을가. 미역, 가위,  실, 대야 그리고 다스한 물... . 그것들 말고도 남자들은 반드시 깨끗한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두어야 했다. 아울러 숯, 청솔가지,  붉은 고추를 마련했다.  다른 것은 여성들이 알아서 해주더라도 새끼줄 준비만큼은 전적으로  남자들 몫이다.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문간에 두르는 새끼줄을 금줄, 혹은  인줄, 검줄이라고 부른다. 빈부격차, 신부고하, 지방차이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출생과 더불어 금줄과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신세대들은 금줄을 구경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들이오, 딸이오.'하고 따져 물을 것도 없다, 대문에  내걸린 새끼줄이 말해준다. 빨간 고추가 걸리면 아들, 솔가지만  걸리면 딸이었으니 금줄은 그야말로 탄생의 상징과 기호였다.  금줄의 역할은 무엇보다 잡인 출입 금하기다. 아기가  보고 싶은 친인척일지라도 삼칠일(21일)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산모는 삼칠일 동안 미역국을 먹으면서 조신하게 몸조리를 하였고, 삼칠일이 지나야 비로서 해바오디었다. 금줄을 '닫힘과 열림'의 경계선이었고, 산모와 아기는 닫힌  성역 속에서 그 안전을 보장받았던 셈이다.  전라도 남원의 보절면 괴양리에서는  해마다 백중날 소동굿놀이를  한다. 그중 삼신놀이를 보자. 아낙들이 삼신고사상을 차리고 나와 무동을  탄 아이들의 복을 빌어준다. 일년 농사가 풍요롭게 되길 기원하는 마을축제다. 그런데 아낙들과 삼신고사상 사이에는 금줄이 늘어져 있다. 한편은 흥겨운  놀이공간이고 다른 한편은 신성한 제의공간이니 놀이 한마당 속에서조차 성과 속을 차단한다.  조금만 나이가 든 세대라면 다 아는 이같은 금줄문화도 금줄없이 태어난 세대들에게는 보지도 못하고 말로만 듣던 '흘러간 문화'다. 그러나  전래된 풍습 대다수가 급격한 쇠퇴, 소멸의 길을 걸었는데 금줄문화만은 아직도 시골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20세기 마지막까지  버티게 만들었을까.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금줄문화와 철조망문화
  우리의 민족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상징을 있는 대로 꼽아보자. 고려청자, 이조백자, 팔만대장경, 아멜레종, 금속활자, 판소리, 탈춤...  . 이들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문화상징들이지만 정작 금줄같이  '원초적인 상징물'은 연구가 부진한 상태에 있다. 금줄은 유교 문화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리 문화인데도 말이다. 금줄이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기에 그처럼  오래동안 한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을가. 금줄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글자 그대로 '금'은 금지의 뜻을  지닌다는 시각이다. 갓난아기 집에  늘어뜨린 금줄은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데 목적을 둔다. 당산제나 마을굿을 위해  동네 입구나 제관의 집, 당집에 쳐두었던 금줄도 신성구역과 일상구역을  구분하고 잡신의 침입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들 금줄은 일정시간이 지나면 바로 걷어낸다.  두 번째 시각은 금줄을 '금'이  아니라 '검'으로 보는 견해다.  일제시대 국학자 이능화는 금줄을 '감줄'로 간주하면서, '감'은 검, 곰,  한과 같은 고대어와 상통하는 신성어라고 추정하였다. 역사민속학의  개조격인 손진태(1900~?)도 '검줄문화'라고 했다. 이 경우 대표적인 예가 장승, 탑, 당수나무 등에 감아둔 금줄이다. 이 금줄은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데, 감아둔 대상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라 하겠다.  두 번째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금줄문화는 한민족의 형성  당시부터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교무화나 불교문화 어디를 찾아보아도 우리식의 금줄은 없다. 금줄은 유교나 불교문화와는 전혀 상관 없이 '홀로서기'로 이어져 왔다.  금줄은 우리 잠재의식의 밑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독특한  의례문화다. 새끼를 꼬고, 줄을 걸쳐놓는 행위 하나하나조차 엄숙한 의례다. 보잘 것 없는 한낱 새끼줄, 한 토막의 새끼줄에 의례의 엄숙함을 싣고 있다.  나는 금줄을 바라보면, 늘 휴전선 철조망이 생각난다. 우리의 선조들은 신성구역을 선포하는 금줄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누구나  승복하고 따르는 공동체의식의 소산이다. 따라서 금줄에는  부정적인 강제가 없다.  이에 반해 철조망은 얼마나 삭막한가. '접근하면 안 돼'하는 무언의 강요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그 철망의 가시에 돋아 있다. 우리 시대의 이런 억압은 철조망에서 그치지 않는다. '잔디밭에 들어 가지 마시오', '미성년자는 들어가지 마시오', '30대 이상은 출입금지', '보도진도 더 이상 들어가지 마시오' 따위의 팻말이 붙은 금지투성이다.  금줄문화를 만들면서 신성성까지 부여했던 의연한 전통은  사라지고, 고압전기가 흐르고 있으니 접근금지 따위의 살벌함이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시인 신동엽이 '온갖 쇠붙이는  가고 흙덩이만 남으라'고  절규하듯 외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과 북을 갈라 놓고 인간과 인간을 단절시키는  그 철조망을 거두어내고 금줄을 빙둘러 민족굿 한마당을 벌일 날은 그 언제일지... .
   

남방에서 올라온 왼새끼의 비밀
  금줄은 단순히 새끼줄이 범상한 줄로 바뀌는 의식적 비약이다. 이 비약의 비밀은 왼새끼에 있다. 정상적인 새끼가 오른쪽이라면, 금줄은 모두  왼새끼다. 왜 하필 왼새끼여야만 할까. 

 '인간의 공간'에는 정상적인 오른쪽 새끼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들의 공간'에는 비정상적인 왼쪽새끼가 필요하다. 왼쪽과 오른쪽, 정상은  늘 오른쪽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오른쪽으로만 새끼를 꼬다가, 제의공간을 상징하는 금줄로 가면 왼쪽의 세계를 펼친다.  잡신이 그곳을 범하려다가 일상적이지 않는 왼새끼의 '도발적 시위'에 놀라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제의공간은  그 순결성을 지키게  된다. 부정을 막아주는 금기와 신성성, 양쪽이 다 그 왼새끼 소에 들어 있는 의미이다. 

 새끼줄만 금줄로 쓰였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짚이 귀한 섬에서는 칡덩굴로 금줄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것조차도 왼새끼로 엮었다. 그렇다면, 새끼줄문화는 도작문화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쌀농사가  시작되면서 볏짚이 생겨났고, 볏짚에서 새끼줄이 생겼을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만약에 도작문화에서 새끼줄이 생겨났다면,

 우리와 같이 쌀을  먹고 살아온 인근 민족들에게서도 금줄문화가 있는가. 그렇다, 금줄은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에 가면 우리와 똑같이 짚으로 만든 금줄문화가 있다.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풀리지 않을까.

 비교문화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 금줄문화는 오키나와, 일본 남부의 금줄과 더불어 바로  도작문화의 소산임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시베리아 사하(Saha) 공화국에 갔을 때 보았던  금줄은 말총으로 만들었고 서낭당처럼 오색천을 붙들어매  놓았다.

 몽골에서는 털로된  줄을 늘어놓는다. 유목민족인 탓이다. 새끼줄로 금줄을  늘어놓는 문화권은 도작문화권인 남방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국한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의 금줄도 왼새끼일까.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왼새끼다.

 단순히 짚으로 꼰 새끼줄을 활용한다는 공통점 말고도 왼새끼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추가되었다. 이제 논의를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보자. 왜 우리나라까지만 이런 새끼줄로 된 금줄 문화가 나타났을까.

 우리나라가 왼새끼로 꼰 금줄문화의 북방한계선이 아니었을가.  손진태의 주장은 이 부분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고 있다.  대체로 중부와 남부에는 '가로 치는  검줄'이 일반적이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는 '드리우는 검줄'이 보통이다. 그리고 경성 이남에서는  일시적 '검줄'을 쓰나, 개성 이북과 함경도에서는 상시적인 '검줄'을 사용한다. 

 경기지방을 경계로 이남과 이북의 차별성이 두드러진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금줄은 좌에서 우로 늘어놓는 금줄인데  반하여, 이북지방에서는 기둥에 늘어놓는 금줄임을 일제시대 현장조사를 통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북의 금줄은 아예 송침이라고 하여 솔가지를 끼워둔다.  오늘날로 보면 휴전선이 갈라지는 경계선에서 금줄문화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줄다리기도 마찬가지다.

 오키나와에 널리 퍼져 있는 전통적인 줄다리기는 우리의 전통적인 줄다리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남녀로 패를 갈라서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온다는 믿음에서부터, 짚으로 꼬아서 비녀목을 가로지른 형태에 이르기까지 똑같다. 그 줄다리기  문화도 금줄문화 경계선과 일치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경계선은 쌀농사가 집중된 지역과 일부에서만 쌀농사가 이루어지는 밭농사 지대의 접경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은 남방에서 올라온 금줄문화의 북방한계선이라 할 수 있다.
   

마을공동체의 힘으로 전화된 금줄의 힘
  금줄의 사용영역은 의외로 넓다. 금줄은 마을공동체문화 전체에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다산, 서낭, 당수나무, 탑, 장승, 솟대, 대동샘... . 신성시하는 모든 영역에는 반드시 금줄을 늘어뜨린다. 

 1994년 음력 섣달 그뭄날, 나는 강원도 두타산 천은사 입구의 내미로리 마을에서 새해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낡은 미속학 조사 노트를 꺼내본다.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마을. 총 107호. 자연마을 평지, 천태동, 방현동, 석탄, 조지전. 석탄과 방현동 사이에 서낭당이 있음. 섣달 그뭄달 점심 무렵, 제관 신인선(63세) 씨는 목욕재계하고 새끼줄을 꼬기 시작함. 왼새끼를 꼬면서 사이사이에 창호지로 길지를 끼워넣음. 자신의 집에 금줄을 늘어놓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함. 점심을 먹고 산으로 올라감. 중턱의 당집은 괴목과 상수리,  느릅나무, 피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음. 당집을 청소하고 당집  입구에 금줄을 걸쳐놓음. 마을로 내여롬. 바깥동네로 나가는 길목에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금줄을 걸쳐놓음. 밤 10시경,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옷을 갈아입음. 밤 12시경, 지게에  제물을 지고 서낭당으로 올라감. 새해가 밝아옴... . 

신인선 씨가 1박 2일 동안 제관으로서 행한  중요한 일들 중 금줄치기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의 집에서부터 마을 입구에 이르기가지 금줄치기는 마을굿의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을굿의 핵심이기도 하다.마을굿의 제관으로 뽑히고 나서 우선적으로  하는 제의 행위가 바로 금줄치기다. 제당에 가서 금줄을  드리워놓고 황토를 지판다.  제관집에도 금줄을 쳐놓아 외부 출입을 삼가한다. 마을민이 함께 마시는 대동우물의 뚜껑도 닫아두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금줄로 막는다.  이렇게 금줄로 마을을 닫아놓으면 한동안 마을 전체가 '멈춰버린 시간'으로 바져든다. 그리고 마을굿이 끝나면서 모든 것은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금줄로 차단되는 성스런 공간, 그 공간에서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제축이 벌어진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그 순간에 금줄은  제의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그러면 일상적인 공동체의 힘과 비일상적인  금줄의 힘이 팽팽히 맞서는 긴장이 흐르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엄숙한 긴장의 순간에 숨 죽인다. 그래서 금줄치기는 마을굿의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구역을 설정하는 중요한 제의 절차이다.  금줄을 쳐놓으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다고  '터부'한다. 프로이트(S. Freud)는 <토템과 터부 Totem and Taboo>에서  터부가 금재와 제약을 통해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터부의 의미를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터부는 우리들에게 한편으로는 '신성한', '선별된' 무엇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위험한', '금지한', '부정한' 것이다. 터부의 반대말은 폴리네시아어에서 '노아(noa)'인데, 이것의 의미는 '평범한', '늘 범접가능한' 이다. 터부에는 '삼가다'의 개념 같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본질도 금지와 제약을 통해  드러난다.

 '성스러우며 두려운(holy dread)'이라는 복합적 표현이 터부의 의미에 대체로 부합할 것 같다.  금줄치기는 장 담그는 장독대, 부엌 등의 집안 신앙처 곳곳으로도 퍼져나간다. 먼저 장독대를 보자. 된장,  고추장, 간장이 우리 음식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니 장을 담그는  데 금줄이 빠질 수 없다. 심지어 술 담글 때도 술독에 금줄을 쳤다. 

 장독 둘레에 금줄을 두르고 고추나 한지, 숯을 끼운다. 때로는 한지로 오린 버선본을 거꾸로 붙인다. 왼새끼와 거꾸로 선  버선본같이 비정상적인 '괴력'앞에서 귀신이 범접할 수 잇겠는가.

 장독은  단순한 옹기가 아니라 장맛을  내게 해주는 철륭신의 '신전'이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이름 있는 날' 절기를 다져 가중에서 성주, 칠성 따위의 집안 고사를 올릴 때도 금줄은 빠지지 않았다.  금줄은 기우제에도 등장한다. 금줄에 병을 매달고 병마구리에 버들가지를 꽂아둔다. 불타는 모진 가뭄 때이니 물을 염원하기 위해서는 금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버들가지를 타고 병의 물이 떨어질  때 우제를 진행하게 된다. 함경도에서는 물건을 버릴 대, 왼새끼에 매어서 던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버리는 물건에서 부정탈 수도 있다는 생각 대문에 나온 관습이다.
   

우리 모두 왼새끼를 꼬아야 한다
  금줄은 줄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줄에 매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의미를 구별할 수 있다. 금줄에 달아매는  것으로고추, 솔가지, 숯 이외에 또  무엇이 있으며, 각각의 기능은 무엇일까. 

 고추는 남아를 상징할뿐더러, 고추의 붉은색은 늘 악귀를  쫓아내는 벽사를 의미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고추가 들어왔으니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풍습임이 분명하다. ㅅ은 일종의 '정수기 필터'처럼 정화 작용을 하는 상징물이다.

 솔가지가 살아 있는 늘 푸른 생동감, 생명의 상징임은 말할 것도 없다. 평안도에서 송침이라 부른 금줄도 바로 솔가지를 꽂은 줄을 말한다. 이북지방의 송침에서는 태어난 남녀 아이의 성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특징도 보여준다. 

 금줄에는 한지를 매다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밤에도 한지가 희게 드러나므로 구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이유이고, 한지가 전통적으로 길지라  부르는 데서 유래한 기복적 성격도 담겨 있다. 나는 한지를 '해피니스  페어퍼'라고 농담조로 풀이하곤 한다. 혹시 길지를 매단 금줄을 볼  기회가 있으면 그 숫자를 세어보라. 왼새끼를 지키듯이 짝수를 피해 1, 3, 5 ,7, 9 식으로 홀수로 매단다. 여기서도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박이나 게껍데기를 매달기도 하였다. 논자에 따라서는 박은 박혁거세 이래의 신성한 상징물로, 게껍데기는  날카로운 게발의 위력이  악귀를 잘라내어 막는다고 보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금줄을 꼴 때부터 지푸라기가 거칠고 날카롭게 삐져나오게 만들어 그 '발톱'을 과시한다.  귀신이 쳐들어오다가 목구멍을 찔릴 판이다. 

 이제, 금줄의 상징성을 정리해보자. 오키나와에서는 마을경계, 신전 정화, 신축가옥 금기에 쓰인다. 몽골에서는 지역경계 표시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금줄문화는 지역경계(금기)와 신성구역 선포라는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지니고 있다.

 두 기능은 막상 동전의 양면 같은 게  아닐까. 가령 우리의 마을굿에서 동구 밖을 금줄로 막는 것은 더  이상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경계표시 역할도 겸하는 탓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이 산업화된  사회에서 금줄이 차지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원래 금줄은 하나의 성역  표시물이었다. 인간들에게 두려워하라는 성역, 마을을 지켜주던 성역, 간장과 술을 숙성시켜 주던 성역. 그러나 이제 성역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에  인간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성역을 갖기 시작하였다.

 화학합성작용으로 간장과 술을 빚게  되었으며, 금줄을 드리우던  황토길 어귀는 자동차 달리는 포장도로가 되었다.  '삼신할매' 역할도 산부인과 의사가 떠맡게 되었다. 게다가 아파트 같은 공동주거문화의 확산으로 금줄을 걸 만한 대문 자체가 사라졌다. '문을 열고 산다'는 개념 자체가 우습게 되었다.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립문, 마당의 우물물로 등목을 하는 풍경이 밖에서도 보이는 그러한 문을 우리는 잃고  말았다. 문은 도둑이나 강도를 막기 위한 철저한 방어벽이자 이중 열쇠와 감시경으로 무장한 현대판 성문이 되었다.  하지만 금줄문화의 정신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신앙처럼 자리잡았던 금줄이라는 옛 '성역'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정신적 문화유산을 제대로 가꾸는 일이 아닐가.  우리 모두 아이를 낳거든 금줄을 매달 일이다. 도시의 젊은 남자들은 지금부터라도 새끼꼬기를 배우자. 왼새끼를 꼬아서 탄생의 외경을 배울 일이다.

     

미륵의 손가락에 숨은 뜻은
   

천년 묵은 나무의 숨결을 생각하며
  일본의 국보 1호.  아스카시대의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
  나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륵의 손가락을.  나무를 세밀하게 깎은 약지를 구부려서 동그렇게 환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가볍게 세웠다. 손가락에 혼신의 힘이 쏘린 듯하다. 그 손가락에서 나는 천 년을 훌쩍 뛰어 넘는 삼국시대 여인의 손길을 보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것을 감싸안을 듯한 손길. 왜 , 무슨  이유로 고대인들은 56억 7천만년만에 다가올 미륵보살의 손가락을 그토록 섬세하게 빚었을까.  1960년의 일이다. 어느 학생이 불상의 약지를  절단하는 사건이 벌어져, 전 세계 해외토픽에 올랐다. 다행히 미술원 국보 수리소에서  손가락을 수리하여 붙였다. 불상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미륵불로 뛰어들었을까.  밀교의 해석에 따르면 약지는  약사여래의 상징이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 병에 걸린 중생까지 모두  구제하겠다는 의지의 드러냄일까.  중생제도의 방도를 가리키는 어느 불상의 수인에서도 나는 이같은 섬세함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눈치채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이 상반신을 벌거벗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라의 정창원 보살상도 배꼽과 가슴을 드러냈으며, 우리나라 반가사유상도 다수가 반라다. 전기 앙코르 불교유산을 비롯한 고대의 많은 미륵보살들도  허리띠를 묶은 도티만을 입은 사례가 많으니 이 미륵불만 특별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상반신에 옷을 걸쳤다면, 어떻게 저토록 날렵한 등선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인가.  1300여 년 전인 7세기경, 신비의 손을 가진 장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무결의 흐름을 신기에 가깝도록 활용하여 코와 눈, 입, 그리고 눈썹을 빚었다. 눈썹에서 코를 거쳐 입술까지 물 흐르듯  고운 선이 흐른다. 자는 듯,  실눈을 뜬 듯, 미소가 감도는 눈길과 다소 육감적이기까지 한 입술, 더할 나위 없이 얇은, 그래서 더욱 돋보이게 흘러내린  옷자락,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머리의 보관, 심지어 좌대의 연화문조차도 부드러우면서 힘차게 느껴진다. 날렵한 허리의 곡선이 등줄기와 무릎으로 뻗어나가는 흐름은 균형감과 세련미의 극치이다.  1903년도 보수 이전의 기록을 보면, 현존 미륵불과는 다소 다르다. 수리 전 사진을 보면, 불상 표면은 더 두껍고  우둘두둘하다. 겉면에 나뭇가루나 향을 섞어 반죽한 흙이 엷게 입혀져 있다. 헤아안시대의 기록에는 금색 미륵보살로 되어 있다. 차갑지 않은 나무의 질감 위에  금빛으로 은은하게 감쌌다는 이야기다. 나무가 주는 거친 질감과 조화를 이루었을 그  불상을 상상하노라면 그것을 만든 이의 세심한 마음이 절로 다가온다.  미륵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잇다. 오른쪽 다리를 구부린 채  발목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몸은 지그시 앞으로 조금  숙였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의 참화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고민의 드러냄이었을까. 만약,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감탄하는 사람이 반가사유상의  그 고ㅗㄴ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멋한다면 어찌 균형 잡힌 심미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 국보 1호의  출생 비밀
  유서 깊은 일본의 도읍지 교토.
  교토는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나 부여쯤에 비견된다. 쿄토 서쪽에 자리잡은 고찰 고류사는  관광병소인 동영의 태진영화촌과 교토촬영소가 붙어 있어  여행객들로 늘 붐빈다.  며년10월 10일에는 오곡풍요와 악귀 퇴치를 기원하는 축제인 우제가 열린다. 국보급만 15개, 중요문화재만 31개에 이르는 '일본문화의 보고'로 소개되는데,  그중 단연 미륵보살상만이 군계일학이다. 이 미륵불을  보기위하여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으오기 대문에 고류사를  먹여살리는 '재정 담당'이라고 할 만하다.  유서 깊은 이 절에는 미륵불이  3개 있는데,  그중 나라시대 것이 2개다. 하나는 보관미륵이라 부르는 미륵반가사유상이며, 다른 하나는 보관을  쓰지 않는 일명 '상투미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륵불은 일본문화의 세계적 우수성을 과시하려 할대 여러 지면에 단골손님으로 늘 소개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도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정'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구인의 평가라면 '오금을 못 쓰는' 일본사람들인지라  야스퍼스의 평가를 두고두고 자랑하면서 전세계에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마이니찌신문사에서 발간한 '매혹의 불상' 시리즈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을 자랑한다. 1982년 고류사  경내의 영보전앞에 신관을 만들어  그 안에 극진히 모셔두고 잇다. 진열관을 '영보관'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글자 그대로 신령스런 보물이란 뜻이 아닌가.  총 높이 137.5cm의 불가사의한 목불. 고류사 미륵상을 보고서 곧바로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찾아가 보라. 쇠붙이냐, 나무냐 하는 재질 차이만 빼놓고서는 일란성 쌍둥이  같다. 그러나 일찍이 1897년  일본 곡보로 지정된 이래 우리나라와의 상관성은 늘 무시되어 왔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유산도 챙기지 못한 마당에 일본에 있는 우리  것까지 챙길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나 목불의 나무 재질이 우리나라 토산의  적송으로 밝혀지면서 그들도 더 이상 일본 고유의 것으로만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목불의 출생 비밀에는 세 가지 견해가  상존한다. '백제에서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전래설, '도래인들이 성스런 물건으로 여기던  소나무를 가져와서 일본에서 제작했다'는 현지제작설, '도래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손 치더라도 만들어진 풍토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순전히 일본풍이다' 라는 제작지풍토설이 그것이다.  1951년 일본의 과학자들은 미륵불의 목재가 조선산 소나무인 적송임을 밝혀냈다. 일본에서는 적송을 조각용재로 사용하지  않음에 반하여, 조선에서는 건축과 조각에 늘 적송을 사용한 데서  착안하여 미륵불의 한반도기원설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때 엉뚱한 답변이 준비되었다. 미륵불의 좌대 장식  일부분이 녹나무로 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다라서 '본토에서 가져온 적송으로 몸체를 만들고 모자라는 부분은 녹나무로 만들었다'는 궁색한 주장까지 나왔다. 후대에 좌대를 만들면서 일본산 녹나무로 보강하였음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현재  미륵은 발가락과 죄대 등의 일부가 다른 재질의 나무로 되어 잇다. 중가에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출생을 거부하는 가장  심각한 주장은 일본풍토설이다.  모든 조형성은 풍토에서 생기므로, 일단 도래한 이들의 손에 의히여  만들어졌다손 치더라도 일본의 풍토에 맞추어 조성된 것이란 주장이다. '고류산 미륵불은 한국의 국립중앙밝물관의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재질이나 기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조형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을  내놓고 잇다. 그리하여 '일본인의 이상미'란 표현까지 쓰고 있다.  글쎄, 국립중앙박물관 것과 어떤 면에서 조형감각이  다르다는 것인가. 1,300여년을 모셔온 '일본 국보 1호'를 가능한  한 일본식으로 해석하고 싶은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는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스런 은폐.엄폐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국보 1호의 출생 비밀

  일본 국보 1호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국보 1호를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때부터 품어온 의문이 하나 있다. 누구라도  시원스런 답변을 해주길 바랬는데 어느 선생님도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  왜 남대문은 국보 1호인데, 동대문은 보물 1호인가?  내 자신도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학생들이 물어오면 옳게 답변할 능력이 없다. 국보와 보물의 정확한 차이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서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어느 고명하신 문화재  전문위원에게 전화로 여쭈어보니, 이렇게 호통만 치셨다. "아니, 주 선생!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이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국보가 보물보다 한수 위'라는 판에 박힌 답변이었다. 나는  아직껏 양자의 차이를 모르겠다. 덜 중요한 어떤 문서는  국보로 지정되었건만 <월인천강지곡>같이 귀중한 문헌은 왜 보물 정도로만 여기는가. 아무도 답변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일제의 식민지 잔재이다. 일제는  문화유산정책에서도 에외없이 민족차별정책을 구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치사한 짓인데.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정하면서 국보는 한 개도  허락하지 않았다.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전령' 에 의한 문화유산 격하정책으로    모조리 보물로만 지정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병합한 이후로 고고학자들을 대량 동원하여 경주, 평양, 부여 등 삼국시대의 수도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말이  고고학 발굴이지 '유적 싹쓸이'가 아니었을까. 그때 유물을 그대로 두었다면, 해방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차근차근 원형을 보존하면서 발굴했을 것이다.  일제는 문화유산의 개명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도 별도의 암기를 해야 한다. 남대문은 숭례문, 동대문은 흥인문...... 참으로 한심한 교육정책이다.  한국민속문화답사회의 회원 한 명이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은 문화재를 설명하는 간판 앞에만 서면, 그 복잡하고 어ㅕ운 일본식 한문투성이 설명문에 주눅이 들어서 김수희의 '애모'라는  노래가 늘 떠오른다는 우스갯소리였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자꾸 작아지는가......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문화유산정책이 그런 상황에 빠져 있었으니 미륵반가사유상도 온전할 수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은  1910년 전후하여 후치가미의 손을 거쳐 데라우치총독에게 들어갔고, 총독부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부여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도 1910년을  전후하여 충청도에서 도굴되어 도굴범 가지야마가 이왕가박물간에 거금을 주고 팔아먹었던 '도굴품'이다. 도굴범의 손에서 소장자의 손으로 넘어가기까지 많은 역경을 겪은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사연은 또 얼마나 기구하던가.  그에 비하면,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은 태평스런 삶을 살아온 셈이다. 천 년을 넘긴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목제품은 모두 불탔음을 생각할 때,목불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감개무량할 일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 국보  1호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일본 국보 1호의 시대. 문화적 위상이 너무도 다름에 비애감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다 건너 이역에서 일군 문화의 대서사시
  고대 한일관계는 일본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의 우리나라 남부경영 운운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왜왕이  4세기 후반에 조선남부에 출병해서 백제, 신라, 가야를 복속시키고, 특히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직할 지배를 구축, 6세기 중엽까지 존속하였다는 식의 남한경영론은  일제 식민사관의 토대를 이루어왔다.  이에 대한 최초의 정교한 반박은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이 제출하였다. 그는 복속되었다는 백제, 신라, 가야 따위가 실은 우리나라 이주민들이 세운 분국으로서 일본 본토 내에 존재했다는 학설을 내세웠다. 말하자면 일본  본토에 백제, 신라, 가야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점이 설치되었다고 할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대목이나, 분명한 것은 초기 한일관계가 우리나라의 서부 일본 개척과 문화개척자로서의 선진적 역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본토로부터의 이민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래인들은 고국인 백제, 가야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점이 설치되었다고나 할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대목이나, 분명한 것은 초기 한일관계가 우리나라의 서부  일본 개척과 문화개척자로서의 선진적 역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본토로부터의 이민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래인들은 고국인  백제, 가야,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나갔다. 그 결과 일본땅에 도착하자마자 '귀화'하여 일본문화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7세기 전반기까지 이주민 세력은 야마토정권에  의해 통합되었지만 자체의 본토적성격은 이어졌다.  순전히 우리나라의 불상양식인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은 초기 한일관게의 비밀을 밝혀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  수 없다. 1919년 경남에서  출생하여 열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길달수 옹은 <일본  속의 한국 문화유적을 찾아서> 한국어판에서 이렇게 압축 설명한다.  "신천지를 꿈꾼 진보적인 고대 한반도인들이 바다 건너 이역에서 일군 문화의대서사시."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이주민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에도시대 말기까지 텐무천황릉으로 알려진  다카마쓰의 고분벽화가 고대 우리나라의 풍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등 무수한 증거물이  쏟아져나왔다. 본토에서 불교가 일본으로 전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서기>를 보면(603년 11월), "쇼토쿠태자가 중신들에게, '소중한 불상을 갖고 있는데 누군가 이 불상을 신앙하는자가  없을까?' 하고 물었을 때, 중신의 한 명인 진씨가 나와 이것을 받아 고류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623년에 한반도로부터 헌납된 불상을 안치시켰다는 기록도 나온다. 우리나라로부터의 '헌납', '진상'같은 용어 자체가 <일본서기>의 왜곡인 바, 상당한 윤색으로 얼룩진 <일본서기>의 역사적 진실성은 새삼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리나라의 선진문화가 끊임없이 일본 열도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미륵반가사유상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라는 새로운 신앙을 무기로 하여 귀족의 사상적 통일을 기하고 조정의 위력을 강력하게 인식시킬 정치적 필요성을  느꼈다. 막대한 자금으로 고류사, 아스카사 같은 화려한 대사원을 세웠고, 우리나라로부터 수많은 승려나 불상, 불화, 사원건축 전문가를 초빙하였다. 595년  고구려의 혜자스님은 쇼토쿠의 스승이 되어 백제의 혜종스님과 함께 법흥사를 창건하였다.  아스카문화는 한반도문화의 '붕어빵', 혹은 '카피본'이다. 일본 초유의  대건축인 아스카사도 백제 본토인과 도래인들이 이룬 성과물이다. 이와나미 발간의 <일본의 역사>라는 책에서 역사학자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예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사회는 한반도와 중국의 선진문명을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 듯이 탐욕스럽게 수용하며 미개에서 문명의 단계로 들어섰다.   대개의 일본학자들은 대륙으로부터의 문화전래설은 일반적으로 인정하며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설만 수긍할 뿐,  한반도로부터의 직접 전래설만은  애써 피하려 한다. 근년까지도 일본의 교과서는 '귀화인'이란 멸시에  가까운 표현을 의도적으로 쓸 뿐, '도래인'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오기는 왔으나 귀화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범주에 속한다는 식의 일관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1호로 지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명품이다. 그러나 그 출신지는 한반도다. 그들은 명품의 진가는 인정하면서도 출신지를 거부하고픈 '쪼잔한' 심정으로 문화유산을 대하고 있는  중이다. '섬나라 근성' 어쩌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사색하는 청년 미륵을 그리며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륵반가사유상인가.
  석가모니 불타는 2,500년 전에 중생을 제도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불교사상의 원초적 뿌리에는  미래불에서의 서원이 담겨져 잇었다. 도솔천 용화수 아래서 중생제도를 행할 삼회법회를  기다리는 심정은 석가모니 이래로 모든 중생들이 간절히 바라던 바가  아니던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서양의 천년왕국운동에 견줄까. 그래서 미륵신앙은 늘상 하나의 운동적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불교 전래 이래로 이 땅에도 무수한 미륵불이  빚어졌다. 그중에서도 반가사유상은 우리 고유의 미륵불이랄 수 있을 정도로 불료조각사에서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 불상양식이다.  반가사유상의 기원은 일찍이 고대 인도의 간다라양식에까지  소급된다. 중국의 북위시대에 조성한 운강석굴 제6동을 가면 5세기 후반에 만든 미륵반가사유상이 '사색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에도 이 땅의 장인들은 그들 중국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느낌과 감동을 연출하였다.  우리나라 불교는 결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 연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학자들은 우리의 불교문화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불교미술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미술사가 젝켈은 <불교미술  The Art of Buddism>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은 한국적 요소를 뚜렷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되는 중국 작품이 없기 때문에 학자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정도로 얼버무리고 있다. 우리의 역사와 자연 속에서 우리의 불교문화가 꽃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삼국시대의 미륵반가사유상이  지닌 뛰어난 조형양식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젝켈 같은 서양인도 다음과 같이 미륵반가사유상의 전래만큼은 잘 기술한다. "양식면에서 볼 때,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미륵반가사유상과 유사한 작품들이 일본에서  6세기와 7세기에 발견되는데 그들중 몇몇은 한국에서 건너간 것 같다."  남북조시대를 거쳐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풍미하였고, 일본까지  영향을 주었기에 가히 동양 삼국은  미륵반가사유상이라는 공통분모로 문화를  공유한 셈이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일본 고대의  불교미술은 전적으로 한반도로부터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류사 미륵불은 고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소산이며, 한반도의 영향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에 다름아니다. 현재 교토, 나라, 오사카 등지에는 아스카, 나라, 헤이안, 가마쿠라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미륵불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한반도 도래인들이 밀집된 거주지였다.  미륵반가사유상은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중요한 것만 뽑아도 여럿이 된다. 서산 마애삼존불, 단석산 마애미륵불, 봉화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경주박물관),  백제 활석제반가사유상(국립부여박물관) 등... .  이들 미륵반가사유상의 실존은 고류사  미륵불이 본토에서 건너갔다는 유력한 증거이다. ㅏ시 백제의 미륵불과  비교해 볼겸, 잠시  서산 마애삼존불로 눈길을 돌려보자.  서산 매아삼존불 세 개 중 협시보살 하나가 미륵이다. 두  개가 입상인데 반하여 미륵보살상은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몸을 약간  옆으로 튼 대담한 반가 자세인데, 오른쪽 협시보살의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와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다문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햇살이 비치면 수줍게 웃는 미소는 백제인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표정 그대로이다. 천혜의 암벽에서, 아침  해를 받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미소가 떠 오른다.  이 '백제의 미소', 삼존불을  찾아가면 안내인은 예나 지금이나  대나무 장대에 백열 등을 매달아 각도를 달리하여  비추면서, 이렇게 하면 얼굴이  웃고 저렇게 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익숙한 조교처럼 시범을  보여준다. 실제로 조명받는 각도에 따라서 얼굴 표정은 다르게 나타난다.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도 햇빛의 각도에 따라 전혀 느낌이 다르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삼국시대 장인들의 솜씨였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다.  고류사 미륵불은 목불이다. 다잇에는 상당수의  목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깝게도 금동불이나 마애석불은 있으되 목불은 전승이 끊겼다. 끊임없는 병란이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모두 삼켜버린  것이다. 일본땅에서 우리의 천 년 넘은 목불을 만난다! 그래서 더욱 감개무량한지도 모르겠다.  명상하고 있는 '청년 미륵'의 다부진  질감을 보여주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단단한 석질을 유연하게 다듬어 부드러우면서도  후덕한 표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서산 마애삼존불, 돌이나 쇠붙이와 같은  무생물과는 달리 따스한 생명이 감돌았던 나무로 빚어진  고류사 미륵불, 이들 삼자는 각각  돌, 쇠, 나무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불상의 최고 명품들인 것이다.  하나는 일본의 국보로서 교토의 고류사에 자리잡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국보로서 서울의 박물관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연 속에  있는 그대로 자리잡았다.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든 거기에서  불심을 느꼈던 탓이었을까. 안이면 어디에 있든, 전란으로 산 속에 숨기도 하고 멀고 먼  일본땅으로 이주해야 했던 백성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았을까. 나는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과 국내의 미륵불상들을 볼 때마다, 그 '사람답게 사는' 미륵 세상에  대한 해탈된 미소에서 고달픈 삶이 승화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왜 흰옷을 입었을까
    비숍 여사가 목격한 흰옷 빨래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고,  1894년 겨울과 1897년  봄 사이에 네 차례나 우리나라를 다녀간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898년에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을 출간하였다. 그 책에서 그녀는 한국식 빨래를 묘사하면서 흰옷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한국 빨래의 흰색은 항상 나로 하여금 현성축일에 나타난 예수님의 옷에 대해 성 마가가 언급한 '세상의 어떤 빨랫집도 그것을  그토록 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게 했다.  잿물에 담가두었다가 펄펄 끓여서 순전한 흰색을 내게 하는 흰옷 빨래법이 그녀에게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비숍 여사 말고도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흰옷 풍습을 주목하였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흰옷 문제에도 여지없이 칼날을 들이댔다. 도리야마 키이치는 고려가 몽골족에 망하면서 조의를 표하기 위해 흰옷을 입기 시작했다고 멋대로 주장했다. 우리 예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년)는 조선민족이 겪은 고통이 한으로 맺혀진 옷이라고 하였다. 도리야마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므로 논외로 치고 문제는  야나기 식의 주장이 지금껏 반복되는 데 있다. 그는 <조선의 미술>(신조, 1922년 1월호)이란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다. 그렇지만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역사가가 아니므로  이러한 의복이 어느시대에 생겼는지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흰옷은 언제나 상복이었다.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아마 이 민족의 맛본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이 이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색이 빈약하다는  것은 생활에서 즐거움을  잃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흰옷이 상복이라니! 나는 야나기의 주장이 식민지적 한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민족사적 위기와 고단한 역사를 강조, 민족의 한을 읊조려줌으로써 식민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성이 있었다는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니라 사람들이 흰옷을 즐겨 입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 속의 흰옷 여행
  중국사람들은 흰옷을  죽은 옷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검은옷을 즐겨  입었다. <주례>의 춘관 사복조에 이르길, 역질이나 기근이 크게 드럭나 홍수, 가뭄이 들면 임금이 흰옷을 입는다고 하였다. 흰옷을 성스럽게  생각하기는커녕 불길한 옷으로 여겼던 중국인의 색채관이 드러난다. 일본인들은 남색을 즐겨 입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검은옷이 죽은 옷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상복은 물런이고 일상복으로도 흰옷을 널리 입었다. 그리하여 우리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과연 우리가 백읨니족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왜 당연한 것을 가지고 의문을 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가 백의민족이 된 연유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고전  읽기'를 늘 주장하면서도 정작 고전을 읽지 않는 경우가 많듯이, 백의민족이란 의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우리가 그렇듯 백의민족이라면, 왜 오늘날의 우리들은 흰옷보다  원색을 더 즐겨 입는가. 과연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흰옷을 원초적으로 더 선호하는가. 문제가 불분명할 때는 아무래도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마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북사>의 '열전 고구려조'를 보면 주몽이  도망치다가 세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한 사람은 삼베옷을, 한 사람은 무명옷을,  그리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이 입었던 옷들 모두 흰색에 가까운 소색이다. <북사>와 <수서>의 '신라조'에는 복색에서 흰빛을 숭상한다고 말하였다.  <구당서> '고구려조'에는, 의상과 복식에서 왕만이 오채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희 비단으로 만든  관과 흰 가죽으로 만든  소대를 쓴다고 하였다. 반면에 백성들은 갈을 입고 고깔을 쓴다고 하였다. 같은 책  '신라조'에는 풍속, 형법, 의복 등이 고구려, 백제와 대략 같으나, 조복은 흰ㅂ을 숭상한다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를 기술한 우리들 스스로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의 기록을 통해서나마 고대사회에서 우리민족이  흰빛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귀족과 민중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왕은 오채(적, 황, 청, 백, 흑) 옷을 입어 민중들과 차별을 두었다. 민중들의 옷은 흰색에 가까운 소색인 삼베나 무명옷 이었던 반면 중국 복식을 받아들인 지배층은 채색옷을 입었던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흰옷 선호도는 바꾸지  않았다. 명나라 사람 동월은 <조선부>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옷은 흰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 또한 성글다."  조선시대의 흰옷 선호도는 그대로 구한말까지 이어졌다.  남연군묘를 도굴하러 왔던 오페르트는 그가 남긴 <조선 기행>에서  남자나 여자 모두 옷빛깔이 희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에도 흰옷을 즐겨 입었음은 당대에 찍은 빛 바랜 사진첩에서도 두루 확인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흰옷을 즐겨 입었음은 쉽게 확인되었는데 왜 흰옷을 즐겨 입었는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태양과 백마, 백두와 백설기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극적인 주장을 내놓은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조선상식문답>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대개 조선민족은 옛날에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이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입니다.  그는 덧붙여서, 조선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고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빛을 신성하게 알고 또 흰옷 입기를 좋아하니 이를테면 이집트와 바빌론의 풍속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밝(아래아)사상' 을 흰옷 숭배에 적용한 것이다.  태양과 흰색 숭배, 고대사회의 제례의식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나름의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복식 이외에 흰색을  숭상하는 생활기풍은 없었을까.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북애자가 썼다는 <규원사화>를 보면 흰색을 영험스럽게 대하던 태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흰 소를 잡아가지고 태백산록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 예전의 법에 하늘에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먼저 좋은 날을 정하고 흰 소를 골라 잘 기럴서 제사 지낼 때가 되면 그 소를 잡아 머리를 산천에  제물로 드리니 백두란 쇠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조상에게 보답하는 예식은 단군에게서 비롯되었다.  흰 머리를 뜻하는 백두의 연원이 그럴듯하게 설명된다. 흰 동물을 숭배하는 민족정서는 백마, 백록, 백호  따위에서도 두드러진다. 백마는 늘  행운의 상징이었고, 한라산 꼭대기가 백록담이 된 것도  길조와 관련된다. 좌청룡 우백호에서 백호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것 또한 흰색에  대한 민족정서를 잘 대변한 것이라 하겠다. 백마 숭배는 동북아시아 유목민문화의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전통적으로 시베리아를 위시하여 몽골, 만주, 우리나라 같은 몽골리언 계통에서는 백마를 숭상한다. 천신에게 백마를 제물로  드리는 풍습은 매우  오랜 전통으로 보이는데, 백마의 희귀성 때문에 영물로 여겼던 탓이다.  나는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흰색 선호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을 백설기에서 찾고 싶다. 나 자신도 어렸을 적부터 백설기를 참 좋아했다. 떡고물이나 속의 내용물에 따라서 먹기 싫은 떡이 있음에 반하여, 백설기는 담백한  맛 때문에 누구나 좋아한다. 민족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민족신앙일 것이고 신앙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가 제물을 올리는 것인데, 우리 생활에서  떡은 매우 중요한 제례음식이다. 제례에 쓰는 떡은 떡문화의 다양성만큼이나 복잡하나, 막상 가장 신성한 제사를 올릴 때는  순수 무색의 백설기를 올린다.  백설기는 쌀가루를 그대로 찧어낸 '원초적이 떡'이다.  칠석날 소찬으로 깨끗한 제를 올릴 때, 산에 가서 산신에게 간소하면서도 엄정한 제를 올릴 때, 백설기는 필수품이다.  돌덕으로 백설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농경 정착이 이루어진 이래로 쌀은  그 자체가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흰쌀의 순수한 결정으로 빚은 백설기는 그래서 농경민족의 상징적인 제물이 된다.  혹자는 우리 민족의 흰색 선호가  숭배의식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본다. 염료기술의 미발달이 자연 그대로 짠  옷감을 입게 하였으리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삼베나 마 같은 옷감을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는 낮은 수준의 염료기술 때문에 흰옷 선호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고대 및 중세사회에서는 염료기술이 제한적으로 보급되  탓에 색감에 따라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감이 비싸서  사용이 어려웠다면 하다못해  먹물이라도 들여 입었을 것이 아닌가. 중국사람들이 검정옷을 즐겨 입은 것과 비교해 흰옷을 선호한 것은 민족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초적 본능, 흰옷 선호
  나는 우리 민족의 흔옷 선호가  민족 형성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싶다. 흰옷 선호를 하게 된 배격 설명을 위하여 두  가지 사실을 들어본다.  먼저 몽골과의 비교문화사적인 접근을 통해서  흰색 숭배의 '원초성'을 규명할 수 있다. 몽골인의  속담에 '흰색에서  시작하여 흰색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몽골비사>에는 원나라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홍제와 백제로 나눈다고 하였다. 백제는 몽골족이 좋아하는 젖으로 만든 흰 술을 올리는 의례다.  왕족뿐 아니라 민간의 서민들도 모두 백색을 즐겨서 백색음식, 백색옷, 백색의 집이 즐비하다. 칭기즈 칸을 모신 탑도 흰색이다. 민속학회의 1990년 공동조사보고서인 <몽골민속>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몽골족은 백색 속에 충만한 희망이 깃든다고 믿었고, 급기야 백색신앙으로까지 번져 순결과 결백의 상징, 복록의 상징,  지고무상의 신앙적 색깔로 굳어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몽골사람들이 흰색을 숭배하는 풍습은 같은 몽골리언 계통인 우리와 무관할 것 같지가 않다. 민족 형성과정에서도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까.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흰색 숭배는 흰색 자체의  순수성을 즐기던 민족성에서도 비롯되었다고 본다. 섹계적인 색체연구 권위자 파버 비렌은 <색체심리>에서, '흰색은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색이며, 그  색체가 주는 느낌도 깨끗하고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흰색은 정서적으로 중립적인 색이라고도 했다. 같은 책에서 색체연구가 판코스트가 기술한 다음의 말을 상기하자.  흰색은 가장 순수한 본체다... 흰색은 활동의 균형, 즉 건전한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다.  색체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흰색을 선호했음은  '빛의 가장 순수한 본체'를 사랑했다는 말이 된다. 흰색은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색이라는 지적에서 우리의 흰옷이 지니는 색체학적 위상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흰옷에 담긴 역사적 의미
  흰옷은 역사적으로 보면 민중들의 투쟁의 산물이기도 한다. 고대사회의 지배층은 자신들과  민중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색깔을 통제했다. 지배층은 흰색 이외의 다양한  색상을 택함으로써 민중들과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한 예로 <신당서>를 보면, 백제에서는 지배층이  붉은색 계통을 입으면서도 민중들에게는 금지시켰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당대의 지배층은 흰옷을 거의 입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지배층도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다만 관복으로 채색옷감을 택하였고, 자신들의 특권을 차별화시키기 위해 민중들은 채색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고려시대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도경>을 남긴 서긍은 '고려의 평복은 백저포로서 농상민에서 도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흰옷을 입었을뿐더러  왕 자신도 백저포를 입는다'로 하였다. 민중들과 지배층  모두 흰옷을 즐기는 가운데, 채색옷만은 민중들이 마구잡이로 입지 못하게 하여 신분질서의 유지에 활용한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배층의 색깔 통제 때문에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다.  고려시대 모화적인 복식정책이 개입된면서 흰옷을 입는 행위가 흡사 '민중운동'을 방불케 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사건의 발단은 오행사상을 비주체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말 충렬왕 때(1275년),  오행사상으로 고려는 동이므로  목이 되고, 목은 청이니 흰옷을 금지시키고 푸른옷을 입어야 한다고 영이 내려졌다. 하지만 민중들의 반발이 거세 고려 말기에는  흰색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국가가 권하는 푸른옷도 널리 입었다.  기왕의 신분적 색깔 통제에다가 사대주의적 태도가 결합된 복식정책은 그대로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태조, 세종, 연산군, 인조, 현종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푸른옷을 권장하였으며, 심지어 숙종대왕은  아예 푸른옷의 착용을 국명으로 내렷다. 민중들은 모두 청색으로 통일시키려는 신분사회다운 발상이었다.  민중들이 이런 청색옷 권장을 순순히 따랐을까.  지배층의 의도는 늘 빗나갔다. 때가 쉽게 타므로 빨래품이  많이 드는 '비경제적 색깔'임에도 불구하고 흰색 선호는 영 사라지지  않았다. <속대전>에는 청의 착용이 규정될 정도로 법령강화도 이루어졌으나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흰옷을 버리고 어정쩡하게 푸른옷을  택할 리 없었다. 흰옷을 못 입게 한 양반들조차 흰색의 사촌쯤 되는 옥색 따위로 면피하는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 자주 흰옷 금지령을  내렸으나 흰옷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양반과 상놈이 따로 없었다. 국가적인 시책을 어기면서까지 지속된 흰옷 사랑은 조선사람 전체의 자주적 민족의식이었던 셈이다.  1895년의 갑오개혁에서 검은옷을 착용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1909년 광무개혁에서는 아예정식으로 백의 착용을  금하였다. 장터에서 먹물을  뿌려 흰옷 입는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발령과 더불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선 의병대열은 모두 흰옷 일색이었다. 3.1운동 때, 그날은 고종의 인산일이기도 하여 전국이 흰옷의 무리로 뒤덮였다.  결국 흰옷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옷이었고, 지배계층의 색깔 차별정책에 맞선 흰옷 지키기 투쟁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옷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흰옷에 숨어 있는 몇가지 문제  백의민족을 생각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남성들과 여성들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일단 시집을 가서 가정을 꾸리면, 미미한  색깔이나마 물을 들여  입는 것이 예외였다. '소복 입은 여인'이란 말처럼 과부나  특수한 경우에만 흰옷을 입었다.  남편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소복을 입는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백의문화라는 관념 속에는 어느 정도 남성 중심적인 사고도 개입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여성들이 백의를 싫어했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평복과 상복을 적당히 구분하던 상례 풍습이 강화되면서 생긴 변화일 뿐이다.  또 하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백의의 개념 문제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백의라는 색깔 개념도 엄정한 점검을 요한다. 잿물로 하얗게 표백해서 흰색을 내기야 했지만, 지금의 색 개념으로 보면 자연 섬유색인 소색을 넓게 흰색으로 보았다. 같은  백의라고 해도 신분이나 옷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어느 답사모임에 강의를 나갔다가 선물로  '돌실나이'라는 상표가 아로새겨진 개량한복 한 벌을  선물받았다. 색감이 천연색  그대로인 소개이라고 할 수 잇는 옷감이었다. 요즈음 개량한복이라고 불리우는 옷들이 다양한 색감을 연출하고 있는 터라 이렇게 물었다.  "색깔이 이렇게 점잖아 가지고 장사 되겠어요."  "원래, 우리옷은 색깔이 강하지 않잖아요? 색깔이 강한 옷차림은 많은  염료를 썼다는 증거고, 그만큼 환경오염의 주범인 셈이죠."  아뿔싸!  원색문화의 거센 물결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란 그녀의 말은 미처 잊고 있던 진실을 하나 일깨워주었다.  제3세계로 수출된  대표적인 공해산업인 염색업을 생각하면, 흰옷문화는 결국 복식에서조차 자연적인 삶의 전형을 찾으려 했던 선조들의 '깊은 뜻'이 담긴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지나친 견강부회라 탓하지는 마시라!  나는 흰옷 문제만 나오면 늘 북으로 간 김용준이 떠오른다. 해방 공간에서 활동하던 김용준은  북한으로  가서 1950년대에  미술사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는 1958년 조중문화교류협정에 의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남경박물원에서 뜻밖에 백제 복식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하나 발견한다. 백제국사와 왜국사 등이 있는 두루마리였다. 1950년 북한에서 발간한 격월간지 <문화유산>의 <백제복식에 관한 자료>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 복식에서 전혀 볼 수 없으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 그림에 선명하게 흰 동정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복에서 산뜻한 동정이 어느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백제 복식에서 흰 동정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고 주목을 끄는 사실이다.  백제시대에 흰 동정이라니! 고대사회의 문서만이 아니라 그림으로도 확실하게 흰색 선호의역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변화하는 상가집, 밀려나는 백의문화
  그토록 흰옷을 사랑한 우리 민족이 지금은  왜 흰옷을 입지 않을까. 일제시대에 흰옷을 입지 말자는 운동이 일각에서 전개되었다.  국학자 이윤제는 <백의금제의 사적 고찰>(신생, 1930년 12월)이란 글에서, '현대적 생활사상상 절실한 경제적 충동으로 민중의 반성 자각에서 순민간적  전 사회적으로 생겨난 운동'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백의문화가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해방 이후 미군 진주와 더불어 원색문화가 대대적으로 몰려오면서다. 원색문화의 홍수는 우리의 복식생활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카키색 군복문화가 휩쓸었고, 양복과 양장이 퍼져나가면서 흰옷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다. 특히 남자들의 양복 착용은 곧바로 흰 바지저고리의 벗어 던짐을 뜻하였다.  요즈음 상가집을 다니면서 늘 느끼는 묘한  감정이 하나 있다. 가장 완고하게 전통적인 풍습이 살아 있는 분야가 상례인데, 그곳에서도 일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주들의 복식이 소복이 아니라 검정옷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까지는 남자들이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은 소복을 입는 절충혀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검정옷을 입는  상가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흰옷, 엄밀히 따지면 삼배  같은 천연섬유를 중심으로  한 장례문화가 서구식 양복문화에게 그 색깔마저 점령당한 셈이다. 검은 상복에 검은  조화, 검은 리본에 검은 글씨, 종내는 검은 리무진을 타고 떠나는 장레 풍습도 도입되엇으니 어느결에 장례 풍습마저 미국식으로 바뀐 얼치기문화로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불기 시작한  원색문화는 바야흐로 20세기를  마감하면서 더욱 과감하게 진전하고 있다. 원새그이 홍수 속에서 오히려 흰색옷은  눈에 띄는 '선정적'인 옷차림이 되고 만다.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 내에 흰옷을 벗어던지고 서구화로 치닫게 되었는가. 불과 50년 만에 백의문화가 퇴장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정말 백의민족이었던가 하는 의심마저 품게 된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자기 것에 대해 천시하는 그 정신적 풍토가 밉다못해 혐오스럽다. 서구 것을 받아들이되, 좀더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이이화(역사연구소 소장) 선생은 <백의와 백의민족>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에 와서 색상에 대한 미의 감각을 찾고 시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는 것은 나무랄 일이 못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 현란한 것도 눈을 어지럽히고, 조화되지 않는 다색이 천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리하여 백의의 단순함이 지난날의 일이었다면 원색의 천박함이 오늘의  일이라 하겠다. 너무  양극으로 치닫는 일은 조화를 결하게 될 것이다.  흰옷은 단순함도 있지만, 그 단순함 속에  오히려 드넓은 세계를 포용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원색문화에 조화시켜 새롭게 흰색문화를 복원할 필요는 없는 걸까. 새삼스레 '온고지신'이 떠오른다.

     

브리지드 바르도와 황구의 비명
   

파리의 브리지드 바르도와 평양의 김정희
  상쾌한 날씨였다. 언제 보아도 상쾌한 날씨.  그러나 브리지드 바르도(다음부터는 남들처럼 나도 B.B로 호칭하겠다)는 화가나 있었다. 한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만 들려오지 않았어도 B.B가 이렇듯 흥분할 이유는 없었다. B.B는 그날따라 기르고 있는 강아지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혔고, 발톱도 깎아주었다. 아침식사는 대충 끝내기로 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달팽이 요리를 주문하여 포도주 한 잔으로 끝을 냈다. 신문사에 편지도 전해야 하고, 기자회견도 준비할 참이다. 도대체, 지난 88년 올림픽 때도 야만적인 개고기 음식에 대하여 격력하게 항의했건만 시정이 되지 않는 '야만의 나라' 대통령이 프랑스에 온다는 일 자체가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단호하게, 최고로 격력하게, 세계적인 동물보호운동가로서 '최후통첩'을 보내리라. 한국의 대통령은 반드시 그걸 '먹고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B.B양이 이런 식으로 우리의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준비하고 잇을 때, 나는 북한생활에 관한 책을 마무리짓고 잇었다. 출간될 책의  제목은 <북한의 민족생활풍습>(1994년 5월 출간)이었고, 나는 이렇게 썼다.  북한에서 많이 먹을 뿐더러 대중화되어 있는 단고기(개고기)는 인민적 식생활 기풍을 잘 말해주거니와 다양한  민족음식을 통한 식생활  기풍이 민족생활사에 흐름에 입각해 있음을 알게 해준다. 재미교포 김연수의 방문기에서도, '이질화될 수 없는 식습관'이라고 하면서 '남북한에 살고 잇는 우리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개고기국에 있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개고기를 대중적인 음식으로 치고 있거니와, 개고기 요리법에 관한 글이 발표되기도 한다. 전국료리사협회  평양시 창광지회  단고기국집분회 김정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이름난 우리나라 단고기는 말 그대로  그 맛이 달고 영양가가 높을 뿐 아니라 소화흡수가 잘 되어 사람들의 건강에 대단히 좋다'  (단고기국을 맛있게 끓이려면<조선료리>, 1993년 2월호).
  실상 남과 북의 음식맛이 다소  편차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이질화를 가져올 정도는 아닐 것이다. 평안도 김치와 전라도 김치의 통일,  함경도 단고기와 경상도 개고기의 통일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탓이다. 함경북도 끝녘의 김치와 전라도 목포의 김치가 다소 맛깔이 다르다고 해서 진짜 김치가 아닌가. 분단된 세월이 반백 년 가까워오고 있지만 민족음식의 원류는 남과 북 모두 동일한 것이다. 더욱이 그 '입맛'을 지켜내려고 한 북한사회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인정되어 통일 뒤 하나의 민족음식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될 것이다.  개고기를 통한 민족의 통일... 운운하는  식으로 글을 맺고 있던  나는 '개고기 추방'을 부르짖 외신보도를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그리고  세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첫째, 일반 사람들은 분개하여 직. 간접으로 행동에 나서는데  왜 우리나라 대통령과 국내 언론은 묵묵부답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국제사회에서 우리 개고기음식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가능하다면 요리법까지 소개해야 할 책무를 우리들 스스로가 저버린  데서 비롯되었다는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료리사협회 평양시 창광지회 단고기국집분회 김정희'란  긴직함에서 엿보이듯, 북한은 정책적으로 개고기를 권장하고 있다. 나는 우리  남한사회 역시 개고기집을 국가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 북한에 대해서 이러저러 말도 많지만, 개고기 음식을 그처럼 조직화시킨 태도에  대해서만큼은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다.
  셋째, 우리의 관습에 관한 문제다. 나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각인된 말이 하나 있다. 음식 투정을 부리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한 음식 놓고는 절대로 이런저런 타박을 하는 게 아니다.'  대단히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귀한 음식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비판대에 올리는 것부터 우리의 예의범절에 어긋난다.
   

황구는 황구끼리
  수캐는 어마어마한 체구를 자랑하며 암캐의 엉덩이 위로 사뿐히 몸을 실었고, 수캐에 비해 너무나 볼품 없는  조그만 암캐는 그때마다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뒷다리를 꺾고 털썩 주저않는 것이었다.  혀를 뼈물은 수캐는 뾰족하게 선 귀와 늘씬한 체구를 자랑하며 함부로 암캐를 다루고 있었다. 암캐는 복날이 서러운 조그만 재래종 황구였다.  황구는 기구한 여인처럼 사력을 다해 순종하고 있었으나  수캐의 폭력은 절저의 극이었다. 수캐는 기진하여 무릎을 꿇어버린  황구의 등위로 길게 체구를 얹어 뻗고 우람한 불알통을 딸랑거리며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였다.  "황구여, 꼬리를 내려라! 제발!"  황구는 알량한 꼬리를 받쳐들고 감질나는 쾌락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캐는 여의치 않은 동작 때문에 무척 신경질나는 모양이었다. 큰 입을 벌려 황구의 목덜미를 덥썩 물었다 놓았다 하며 장군처럼 즐겼고, 황구는 그때마다 닳아빠진 빗자루 같은 꼬리를 하늘 높이 쳐들고 뒷다리를 불끈 세워보기도 했다... .  ...그때였다. 고막이 따가울 정도로 앙칼진 황구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한 쌍의 개는 서로 돌아서고 있었으나 황구의 뒷다리는 한 뼘은 실히 공중에 떠 있었다. 수캐는 황구의 불끈 들린 뒷다리를 끌고 있었다. 황구는 진창 바닥에다 턱을 끌고 그 요란스럽고 처절한 비명을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황구는 죽어가는 듯싶었다... .
 천승세의 소설 <황구의 비명>을 다시 펴 들었다.  학생시절에 샀던 '창작과 비평사'의 1975년판인데 윗대목이 실린 220페이지는  그 당시도 감동을 받았던 대목인지 밑줄이 그어져 있다.  미군기지촌 용주골로 떠난 은주, 지금은 이름이 담비킴으로 변한 은주에게 작중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황구는 황구끼리... 황구는 황구끼리.' 그리하여, '서럽지 않은 황구와 황구'로 살자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한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도대체 황구의 비명이 바로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제아무리 국제화를 떠들어대도 황구가 스스로 토종성을 ㅇ는 순간, 국제화는커녕  목숨마저 잃을판이다. 제3세게적  시각, B.B의 '동물애호', 서구정심주의적 강요, 백인 우월주의,  애완과 굶주림 같은 명제들을 새삼스럽게 들먹일 필요도 없다.  B.B가 소설 속에 '수캐'라면, 우리는 '황구'가 아닐까. 나는 민속학 강의 때마다 개고기문화를 다루면서 천승세의 소설을 읽게  한다. 그리고 서구중심주의 시각에 길들여져 온 삭생들에게 약소민족이 본능적으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을 소설 속에서 뽑아 엄중이 선포하곤 한다.
  "황구여, 꼬리를 내려라! 제발!"
   

 복날 개를 먹는 이유
  이 글을 쓰면서 임실군 오수로 내려가 보았다.  오수에는 의견비가 전해져 온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스.
한적한 동네에 들어서면 농협건물 앞에 검정개  동상이 서 있고, 골목으로 접어들면 의견비를 모신 숲이 나타난다. 사람목숨을 구해준 의견설화는 오수가 대표격이다.  사진을 찍고 나서 신포집을 찾아갔다. 인근 일대에서 으뜸으로 소문난 개고기집이다. 의견비까지 세운 동네가 개고기의 명소라니! 탕을 한 그릇  시켜놓고 주인장에게 물으니, 의견제까지 열고 있다는 설명이다.  의견비 동네와 개고기집,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정작 어울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개는 늘 '개에 준하는 정당한 대우'를 받았으니, 소나 닭처럼 예외없이 가마솥에 들어가 최후를 마쳤다. '우량식품'을 '혐오식품'으로 기피할 만큼 고기가 남아돌았던 게 아니다.  하필이면 왜 복날에 많이 먹을까.  절기상으로도 절박한 지경이었다. 호미질을 하다  보면 '배는 고파 등에 붙고'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베잠방이는 바짝 소금기에 버무려 지고 하늘은 지글지글 타다못해 온 몸을 옥죄인다. 아시, 두벌, 만물을 매고 나면 복날이 걸쳐 있게 마련. '보신탕!'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한의학자 이영종 교수(경원대 한의대학장)가 적절한 답변을 보내왔다. 여름 자체가 불이다. 게다가 더위의  절정인 삼복은 경일로  화기가 왕성하면서도 쇠에 해당한다. 따라서 복날은 불이  쇠를 녹이는 화극금이므로, 쇠를  보충하기 위해 개를 먹어야 한다. 개에게 쇠의 기운이 있는 탓이다. 영양학적 측면 이상으로 동양의학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이냉치열이 아닌, 더울  때 더운 음식을 먹는 이열치열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위를 근본적으로 이기는 현명한 처사인 셈이다.  개고기를 즐기는 백중날은 막상 개와 깊은  인연이 있다. 백중은 우리의 전통 속에서는 머슴의 생일이자 두레의 '호미씻이' 날이기도  한지만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고통을 받고 돌아가서 방황하는 어머니의 넋을  달래려고 부처에게 부탁하여 개로 환생한 일을 기리는 날이다.  우란분재를 베풀고 넋을 달래니 개가 된 어머니가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개가 된 어머니를 기리는 날에 집중적으로 개를 때려잡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영양적인 측면에서는 어떨까? 개고기는 사람의 근육과  가장 가까운 아미노산 조성을 가진 양질의 단백질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찬물로 씻으면 기름이 엉겨붙으나 개고기는 그대로  씻겨나간다. 현대인이 그토록 기피하는 콜레스테롤도 적다. 무엇보다 개장국을 먹을 때 부추, 깻잎, 고추, 파, 마늘, 들깨 따위의 건강식 야채를 함께 먹으니, 그것 자체만으로도 몸에 좋은 것은 뻔한 이치다. 내가 보기에는 고기 자체보다도  이같은 야채가 오히려 개장국이 영양식임을 보장해주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단 복날 먹는 음식으로서만이 아니라 병후  조리, 상처 치료 등에도 효험이 높다. <동의보감>에서도, 성이 따뜻하며 독이 없고 오장을  편하게 하며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양도를 일으켜 기력을 증진시킨다고 하였다.  다신 정약용도 멀리 남도 바닷가로 유배 간 형 정약전에게  올린 편지에서 개고기의 영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지극히도 형을  아꼈던 다산은 영의 몸을 걱정하여 개고기 조리법까지 상세히 적어 보내면서, 애꿎게 개고기를 타박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선입견을 지적하기까지 했다. 다산의 아들인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8월조를 보니 이렇게 씌어 있다.
  며느리 말이받아 본집에 근친갈 재,  개 잡아 삶아 건져 떡고리와 술병이라.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그리고 개고기  고고학자들은 신석기시대 사림터에서  개뼈를 다수 발견하였다.  개는 방어용, 사냥용, 의복용, 식용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으며 선사시대부터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이다. 중국의 <주례>, <예기>,  <논어> 따위의 '엄숙한' 경전에도  이미 개고기가 등장한다. 고구려 안악 3호분에는 도살된 개가 양, 돼지와 함께 그려져 있다. 부여는 아예 육축에서 관직명을 따와 구가, 마가, 우가따위로 정하였다. 구피의라 하여 함북지방에서는 일제시대 초기까지도 개가죽옷을 입으니 개의 쓰임새가 넓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농경정착시대 초식 위주의 생활에서 개고기는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육고기 보충이 항상 필요하였다. 방대한 들판과 숲, 희박한  인구밀도, 유목과 이동생활, 고기잡이 등의 생활이 아니었기에 농경 정착과 더불어  자리잡은 우리의 식생활사는 늘 초식을 기본으로 하였다. 고도로  집약된 동물성 단백질을 필요로 했을 때, 막상 먹을 만한 야생동물은 매우  잡기 힘들거나 단백질원으로서도 높은 효율을 지닌 것들이 못 되었다.  가축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소, 돼지, 닭 정도가 기본이었다. 하지만 전통시대에 소를 잡는다? 상상하기 곤란한  일이 아닌가. 국법으로 도살금지령까지 내려졌으니... 중앙에서는 한성부, 각 지방에서는 지방관아에서 병으로 죽은 소조차도 확인한 후에 낙인을 하여 매매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벌을 주기도 하였다. 운반 교통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농령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는 가축이 아니라 차라리 가족이었다. 조선 전기 강희맹이 쓴 농서인 <금양잡록>을 보자. 마을에 일백 호의 농가가 았으나 소를 가지고 잇는 사람은  겨우 십여 호이다. 그나마 소를 가지고 있는 집도 한두 호를 제외하고 는 송아지를 겨우 기르는 사람뿐이어서 일백 호의 논을 소 몇마리로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돼지도 귀했다. 닭도 백년가객 사위가 올  때 내놓을 정도로 귀한데다가 달걀을 낳아야 했다. 그래서 꿩. 노루  사냥에 나서고, 겨울만 되면 토끼몰이와 멧돼지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여름철이 다가오면  수풀이 우거져서 사냥조차도 불가능해진다. 더욱이 한창 농번기에는 사냥할 겨를도 없다. 이때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다니는 개들이야말로 '유일하게 걸어 다니는 음식'이 아니겠는가.  개라고 흔해빠진 것도 아니었다. 가을과 겨울, 봄에 키워서 한여름이 다가오면 올해는 "누구네집 차례다"라고 하면서 순서를 정해 개를 잡았다. 기르기는  개인이 기르되 먹기는 공동체 차원에서 먹었다.  그나마 고기량도 늘상 모자라니 장국으로 끓여서 집단 시식하는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렇듯 유구한 세월을 먹어온 음식을 보고 혐오식품이라니.
   

개고기 금기와 애완동물
  개고기를 먹으면서도 가릴 것은 가려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금기가 있다. <산림경제>를 들추어보면 장황하게 금기해야 할 속신을 늘어  놓았다. 개날에 개를 먹지 말 것, 개의 형태를 잘 가려서 먹을 것  따위의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비록 짐승이나 능히 주인을 사랑하는 알음이 있으니, 집에서 기른 것은 가급적 잡지 말라'고 하는 이해할 만한 권유도 있다.  개고기에 관한 종교적 터부도 늘 존재했다.  일 년에 한 번씩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굿에  소, 돼지, 닭은 써도 개고기는 금물이다. 마을굿의 제관은 일체  비린 것과 육고기를 피하는 것이 관레인데, 특히 개고기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산신제를 올리려고  산에 가는 사람도 개를 핀한다. 산신인 호랑이가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호환을 막기 위한 방책이라고 한다. 스님 같은 종교인들도 지나친 자극을 피하기 위해 금기한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 서구식  개념의 '애완견 사고'와 식용  터부가 확산되었다. 결론은 늘 '어떻게 그토록 사랑스러운 개를 먹을  수 있느냐'로 모아진다. 그렇다면 세계의 음식문화로 시야를 넓혀서 비교해보도록 하자.  인종이 다양한 만큼 식문화도 다양하기만 하다. 원숭이 골, 송아지 태반, 말고기 내장, 심지어 곤충을 즐겨 먹는 민족도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매를 즐겨 먹었다던가. 인간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의 경계선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런 것은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개고기에 퍼부어진 비난의 핵심도 개는 어디까지나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는 애완동물'이라는 데 있다.
 

과연 애완동물은 먹을 수 없을까.
  근년에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미국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있는 몇 가지 발언들을 이 대목에서 인용함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혐오동물과 애완동물의 구분이 특정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 따라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애와동물처럼  키워지던 동물들도 그 주인의 위장(혹은 그 주인의 동의가 있다면 어떤  다름 사람의 위장)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일년 내내 고기가 모자라는 데다가 낙농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채식주의자가 되어야만 하는 중국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형상임을 지적하면서 스는 다음의 재미있는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북경의 영국대사관 관저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중국 외무부  장관이 대사의 스패니얼 암캐를 보고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대사는 그 개가 곧 새끼를 낳는데 만약 장관이 그 새끼 중 한두 마리를 선물로  받아주면 영광이겠노라고 말했다.  4개월 뒤 두 마리의 강아지를 담은 바구니가  장관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몇주일이 지나 두 사람이 공무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대사가 물었다. "그 강아지들이 어떻습니까?" 장관은 주저하는 빛도 없이 "맛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몽관게사 전문가 주채혁 교수(강원대)가 울란바토르를 다녀오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엇다. 그곳에서는 투실투실하게 살찐  누렁개 여러 마리가 떼지어 다니더라는 것이다.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군침을 흘릴  만도 한데, 정작 몽골인들은 개고기를 먹는 한국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정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유목민이다. 그들은 개를 먹을 이유가 없다. 개를 먹어치우는 것보다는 방어, 호신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풍부한 말고기와 말젖이 지천에 깔려 있는데 뭐하러 개고기를 먹겠는가.  애완동물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애완동물은 과연 개나 고양이 따위에만 국한될까. 그렇지 않다. 보아구렁이나 독거미, 바퀴벌레를 기르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끔찍이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다. 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더 많다.  뉴기니에서는 전통적으로 돼지를 애완동물로 키운다. 그들은 돼지들을 귀여워하고 총애한다고 한다. 최근의 외신보도를 보니,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애완동물이 유행이라 나이가 먹더라도 커지지 않는 좀 더 작은 돼지를 개발하는 데 열을 올린다고 한다. 예쁜 리본에다 옷까지 차려 입은 애완돈을 보면 정말 귀엽기도 하다. 그러니 개만 애완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의 생각은 편견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어떤 동물이든  애완동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들 애완동물들은 대개 주인의 솥에서 생애를 마감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세계인류학자들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개고기는 폴리네시아, 필리핀, 중국 남부 사람들이 즐기는데 특히 중국 광동성의 개고기요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광동성에서는 향육이라고 하여 개의 부위에 따라 갖가지 요리가 개발되었다. 그들에게는 개가 애완동물 이전에 그저 고단백의 음식일 뿐이다. 음식과 애완의 우선 순위를 따진다면 음식이 앞선다는 뜻이다.  중국사람들은 일허게 이야기하고 잇다.  세상에서 다리가 두 개 달린 것과 네 개 달린 것 중에서 못 먹는 것이 딱 2개 있다. 전자는 사람이고 후자는 책상이란다. 사람과 책상 빼놓고서는  못 먹을 게 없다는 말이다.
   <강철군화>글 쓴 미국의 진보적인 작가 잭 런던은 편견에 가득찬 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 <조 선사람 엿보기>에서 비아냥거리듯  개고기 풍습을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부드러움과 관용이부족하다.  특히 동물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개를 먹는다. 배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위장을 즐겁게 하기  위한, 즉 별미로써 먹는다. 봄에 어린 개는 우리에겐 어린 시기의 어린 양과 같은 것이며, 늙은 개는 그들에겐 우리가 매일 먹는 양과 같은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농사를 끝내고 먹는 개고기가  '배고파서 먹는 음식' 이 아닌 '사치품' 이란 말이가. 진보적이라는 그가 이 정도의 '삐딱한 시각'을 가졌으니 다른 서양인들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개고기 풍습도 세계의 음식문화사적 견지에서 보면 남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먹음직한 음식' 이냐, '한 가족'이냐. 양자 사이에는 무슨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게 아니다 이 점이 동서문화의 상호 이해를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야만의 얼굴과 문명의 얼굴을 생각하며
 

 언제나처럼 한여름이 다가온다.
  우리는 여전히 개고기를 먹을 것이고, 북한이나 연변에서도 여전히 '단고기'를 먹을 것이다. 오수의 신포집에도 사람이 들끓어 대목 장사를 할 것이다.  피서철만 되면 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차에  깔려 죽거나 체포.처형되는 개들이 즐비하고 개똥으로 범벅된  길거리가 있는 파리가  과연 문명적인가. 제3세계의 굶어죽는 아이들을 살리고도 남을 만한 비용이 개 먹이값으로 들어가고 있는 야
누스적 현실, 변 처리를 위하여 먹이 대신에 알약을 먹이고, 함부로 '그 짓'을 못하게 하기 위해 수술대에  뉘여놓고 '고자'를 만들거나,  아예 짖지 못하게 성대 수술을 자행하는 것이 과연 선진적인가.  사람은 '사람답게', 개는 '개답게' 키워야 하지 않을까.  언제 개들이 스스로 미용을 원했던가. 어느새 우리나라  개들도 매니큐어칠을 당하고 목욕과  미용 '학대'로 비동물적인 수모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인권이 절대적이듯 개는 개답게 살 수 있는 견권이 필요할 것만 같다.  우리가 오히려 해야 할 일은 개의 전문적 사육과 위생적인 개고기 식품가공이 아닐까. 사료를 주어서 비육소를 키우듯 비육견을 양산하다 보니 단백질의 불균형이 생겨 개 본래의 영양학적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음식물 찌꺼기를 효과적으로 처리하여 생태계보호도 할겸, 평소에 '자연식'을 한 건강한 개 사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외국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개의  도살도 법적 장치를  만들어 개선해야 한다. 음성적으로 하다 보니 불필요한 '야만성'이 더 부각되는 것이 아닐까.  이같은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개고기의 유통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개고기값도 현재보다는 훨씬 내릴 것이다. 그러면 어느 음식점에서나 설렁탕이나 해장국 메뉴판 옆에 개장국도 함께 올라가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  개고기의 보신적 효과를 어느정도는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보신탕 같은 이름으로 지나친 보신 효과만을 강조하는 과신도 버릴 때가 왔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음식을 먹을 때마다 보신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한여름에 누구는 삼계탕, 누구는 개장국 식으로 자유롭게 선택하여 먹을 수 있고, 그 자유의지의 선택에 관해서는  아무도 왈가왈부하지 않는 '음식문화의 민주주의'가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가. 몬도가네 식으로  개, 뱀, 자라따위만을 찾아다니며, 심지어 외국 나들이까지 해서 코브라를 시식하고 오는 따위의 반열에 개고기를 올려두지 말라고 간곡하게 권고하고 싶다.  아직은 각 민족마다 식생활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점은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심사숙고할 사항이다.  개가죽은 장구피로도 으뜸인데, 차마 개가죽을 벗겨 악기를 만들 수 있겠냐고 얘기한다면 민족악기마저 없애라는 말인가. 프랑스사람들도 감격해 마지않는 사물놀이패의 악기 중에서 장구피를 개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지나친 간섭은 제국주의와 문화우월주의의 '야만스런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스가 국제사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산호초 위에서 핵실험을 강행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이가 아니다. 그들의 반인류적  행위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항의'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여름밤의 '개꿈'
  B.B.초청하여 내가 직접 조리한 개고기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  음식문화의 다원성과 세계인의 국제적 연대를 위하여!

    보설 : 개고기 조리법
  이 글에 덧붙여 나는 개고기 조리법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봉유설>, <동국세기>, <열양세시기>, <규합총서>, <음식디미방>,  <동의보감> 같은 책들을 들춰보면, 구장, 개고기찜이 자주  등장한다. 개고기 애호가들이 지금 드시고 있는 방식과 옛법을  비교하거나, 혹은 직접 해  드실 수있도록 있는 그대로 옮겨본다.
  요리법 1. <규합총서>의 개찌기
  살찐 개 한 마리를 법대로 죽여 씻지  말되, 다만 창자를 정히 씻어 맹간장에 고추장을 조금 섞어 기름, 초,  깨소금, 후추가루, 미나리, 파를  함께 삶되, 먼저 개대가리와 다리 넷을 넣고 그 다음에 남새를 넣고 뚜껑을  제쳐덮어 물을 부은 후, 수건으로 둘러 김 나지 않게 하여  끓는 소리가 들리거든 잠깐 불을 물렸다가 뚜껑의 물을 퍼내고 찬물을 고쳐 붓고 끄르름한 불로 땐다. 이렇게 세 번 하면 고기가 무르고 뼈가 스스로 빠지니, 단단한 나무 말고 빈 섬 세 잎이면 족하니, 다 고아지거든 내어, 살은  고기 결대로 손으로 찢고  칼 대지 말고, 내장은 썰어 다시 삶은 국에 양념하고 간을 맞추어 국을 끓이되 밀가루를 많이 풀면 걸게 되니라. 개장을 깨소금과 기름 많이 쳐 양념하여 다시 주물러 중탕하여 쓰니라.
    요리법 2. <동국세시기>의 개장국
  개고기를 삶아 피를 넣고 푹 끓인 것을  이름 붙여 개장이라 한다.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맛이 좋다. 또 국을  만들어 고추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 시절음식으로 한다. 이렇게 하여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약을 보강하는데 효과가 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또한 이것을 많이 파느니라.
    요리법 3. <음식디미방>의 개장국느름
  개를 삶아 뼈는 발라버리고 깨끗하게 씻어 다시 솥에 넣은 다음 볶아 찧은 참깨가루와 간장을 넣고 다시 삶는다. 삶아낸 고기를 엇비슷하게  썬다. 여기에 즙을 친다. 즙은 진가루와 기름, 간장을 한 소큼 끓여 파를 두드려 넣어라.

     

 숫자 '3'의 비밀
   

 신화 속의 숫자 3
  옛날 천하세계 임정국 대감과 지하세계 김진국 부인이 아기가 없다가 공을 들여 미모의 아기씨를 얻으니 자지맹왕 아기씨라 이름지었다. 아기씨의 나이 15세에 이르매, 부모가 벼슬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하늘 공사를  올라간 동안에 시주 나온 도승이 딸아이의 머리를  '세번' 쓸어 임신시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펄펄 뛰면서 아기씨를 쫓아냈다.  아기씨는 황금산으로 남편을 찾아갔으나 '중이 부부 살림하는 법이 없으니 불도땅에 가 살아라' 하면서 외면한다. 할수없이 아기씨 혼자서  불도땅에 가서 아들 세 쌍둥이를 낳게 되었으니, 9월 초여드레엔 '본명두', 열여드레엔 '신명두', 스무여드레엔 '삼명두'가 탄생하였다.  '삼명두'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구박 속에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러나 워낙 총기가 있어 서당의 '삼천선비'들이 늘 시기하였다. 삼형제는 과거를 보아 모두 장원급제 하였으나 중의  자식인 탓으로 과거에서  낙방시키려 한다. 그러나 활소기에서도 삼형제가 이기자 결국 모두 장원급제를 시키고 만다. 그러나 삼천선비들이 흉계를 꾸며 모친을 '삼천제석궁'  깊은 곳에 가두어버린다. 집에 돌아온 삼형제는 삼천선비들의 흉계를 알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황금산 도당땅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제주도 무당의 조상이 탄생하는 내력을 담은  <초공본풀이>는 삼명두가 삼천선비의 목을 처버리는 데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삼명두는 제주도 무당의 조상신격이자 3대 무구인 '천문', '신칼', '산판'을 일컫게 된다.  상당히 민중적이다. 삼천선비의 목을  칠 정도라면 민중적이다 못해  가히 '혁명'적이어서 프랑스혁명 시기의 로베스피에르와 단두대를 연상케  한다. 그런 삼명두가 제주도 무당의 조상이 되고,  나중에는 천.지.인을 관장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주체는 이 신화의 민중성이  아니다. 앞의 인용글에서 따옴표를 붙인 숫자 '3' 의 비밀이다.  제주도 신화에서 3의  중요성은 삼성신화의 본거지인  삼성혈에서도 두드러진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인 삼성혈에서도 두드러진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인 삼성혈에  가면 탐라를 만들었다는 고.양.부  세 성씨가 나왔다는 '세 구멍' 이 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 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홍혈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삼명두나 삼성혈은 모두 신화속의 존재다.  신화는 어쩌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화야말로 인간들의 무의식의 소산이자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환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와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화는 인간에게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좀더 많은 물리적인 힘을 가져다주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신화는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환상을 통하여  인간은 우주를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과학적인 사고관을 가진 우리는 우리가 매우 제한된 정신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민족신화에 3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부터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단군신화는 또 어떠한가.  삼위태백, 천부인 3개, 무리 3,000명, 풍백. 우사. 운사,  360여 가지 일, 삼칠일간의 금기...... 모조리 3이다. 실상  환인, 환웅, 단군의 '3대'로 이루어지는  '삼신' 체계가 고대신화의 원형을 이룬다. 임재해 교수(안동대)는 그의 저서 <민족신화와 건국 영웅들>에서 단군신화의 인간상을  셋으로 나눈다. 신격으로서의 환웅, 동물격인 곰녀, 그리고 인격인 단군이 3의 원형체계라는  것이다. 해모수가 동명왕으로 이어지고, 동명왕이 유리왕으로 이어지는  고대 부여족의 신화적 중심인물도 '3대'이기는 마찬가지다.  황해도 구월산에 가면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을 제사하는 '삼성사' 가  있다. 고려 ㅁ라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아사달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다' 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성사는 오랜 세월 민족의 시조  단군의 본향으로 모셔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 '삼신산' 이 퍼져 있는 것도 이 흔적이다.  이수자 교수(금성환경대)는, '고대 서사문학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3대로 이루어진 체계는 하나의 신화적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는 염상섭의 소설 <삼대>의  문학적 원형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삼대>는 한말 세대의 보수성,  개화기 세대의 정신적 파탄, 식민지  세대의 진보성으로 대표되는 조. 부. 손의  삼대를 상징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원형질로서 3이 현대소설에까지 집단무의식적으로 잠복된 사례라고 여겨진다.
   

삼신할매 점지받아
  단군신화가 생성된 시대로부터 반만 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신화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신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민족의 신화는  우리들 안방을 차고들어와 삼신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산부인과가 드물었던 시대에는 아기를 받을 때, 난 그 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훗날에야 그 듯을 알아차렸고, 그 분이 누군가 알고  싶었을 때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삼신할매를 모르는 이는 없다. 삼신이 안방을 점거하게 된 경로는 어땠을까. 나는 민족을 탄생시킨 삼신원형이 그대로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탄생으로 이어져서 아기 낳는 안방의 신이 되었다고 본다.  삼신할매가 '빨리 나가라'면서 아기 엉덩이를 차서 생긴 몽고반점을 우리들 대부분은 가지고 태어났다. 몽고반점이야말로 북아시아 종족들 사이에서 서로간의 공통점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표정이 아닌가.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농담을 던지곤 한다. 어릴 적, 몽고반점이 없었던 사람은 분명히 조상이 다른 계통일 것이니 선대의 핏줄을 조사해보라고.  예전에는 아기 낳으러 안방에 들어갈 대, 고무신을 거꾸로 벗어놓았다고 한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처럼 제왕절개를 해야만 아기를 낳을 수 잇는 산모는 모두 죽었을 운명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삼신은 바로 이런 여인들의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다.  아기의 건강도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아기 낳아 반타작' 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이를 열 명 낳아서  다섯 명 정도가 살아남으면 괜찮은 '수확'으로 보았다. 전염병, 굶주림 등으로 어린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많았던 당시에, 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어머니들은 삼신에게 기원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아기가 커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도 삼신의  배려는 절대적이었다. 아기의 포태, 출산 뿐 아니라 15세 정도까지는 양육을 도맡아준다고 믿었다.  삼신은 삼신할매, 삼신바가지, 삼신할머니, 산신이라고도 부른다. 대개 태를 보호하는 신을 삼신이라고 하였다. 제주도의 <명진국 생불할망 본풀이>에서는 삼신 할멈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 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민간에서 삼신을 모시는 과정도 위와 같다. '삼줄(탯줄)' 을 끊고 나와 생명 탄생이 이루어지면, 밥과 국 '세 그릇' 을 바치며  '삼칠일' 간의 금기를 행한다. 신체는 안방의 아랫목 시렁 위에  모시며 '삼신바가지' 와 '삼신단지' 로  상징된다. 바가지에는 햇곡을 담아 한지로  봉하여 안방 아랫목  윗벽에 모셔두며, 단지의 경우에도 알곡을 담아 구석에 모신다. 지방에 따라서는 삼신자루(혹은 삼신주먼, 제석자루)라 하여 백지로 자루를 지어서 그 안에 백미 '3되 3홉'을 넣어 안방 아랫목 구석 높직이 매달아 놓기도 한다.  차제에 무속에 많이 등장하는 삼불제석의 성격도 보다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삼신신앙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삼불제석도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삼불의 '불'을 불가에서의 부처로 봄은 문제가 있을 성싶다. 원래는 근본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부리' 에서 나온 말이 후대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삼신신앙은 직접 불교계에 침투하였다.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으나,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조선시대만 해도 여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곳이 사찰의 삼성각(혹은 삼신각)이었다. 산신과 칠성, 독성의 삼신을  모신 삼성각은 전래 토착신앙과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만나 융합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사찰에 삼신신앙이 있
던가. 이처럼 3은 신화시대 이래로 가장 원초적인 생명 탄생에서부터 심지어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까지, 민족생활 전반에 걸쳐 뿌리내렸다.
   

3은 전 세계적인 절대수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은 완성, 최고, 최대, 신성, 장기성, 종합성 따위로 인식되고 있으니, 우리만 3을 중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엔드레스는 <수의 신비와 마법>에서 3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라이문트 뮐러는 1903년 논문에서 설화와  문학, 그리고 미술에 나타난 3이라는 수의 중요성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면 3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물과 공기와 흙을 보고 세 가지 형태의 세게가 존재한다는  사고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체의 세 가지 상태(고체. 엑체. 기체)와 피조물의 세가지 집단(과일. 식물. 동물)을 발견했다. 인간은 식물에서는 뿌리와  줄기와 꽃을, 과실에서는 껍질과  과육과 씨앗을 밝혀냈다. 또한 태양은 아침, 정오,  저녁에 각각 다른 모습을  갖는다고 여겼다. 실제로 모든 경험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라는  공간 좌표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3차원이다. 일체의 삶은 생성과 존재와 소멸로 표상될 수
있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ㄱ이라는 세 국면으로  진행되며, 완전한 전체는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색체의 혼합은 삼원색인 빨강, 파랑, 노랑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러한 자연현상 속의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다만 이를 인식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서구의 3개념이 가장 절대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역시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등장, 후에 정립된 완벽의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종교관이 3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유사성이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도 3과 종교는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시인들의 숫자 이해도를 조사한 인류학 보고서에 따르면 1,  2, 3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숫자 3이  작은 숫자라는 데서도 비롯된다.
0과 1과 2를 거치면 바로 3이 나온다.  아기들이 숫자 개념을 배워나갈 때도 하나, 둘, 셋...... 이쯤에서 멈춘다. 셋  정도를 다 배우고 나서 다섯 손가락  범주인 5, 그 다음엔 두 손을 가지고  하는 열 손가락 범주의 10까지  배운다. 3이 어떤 숫자보다도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무의식중에 각인된 흔적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중국에서도 3이 두루 쓰였다. 중국 청동기문화의 대표적인 제사도구들은 대개 세 개의 다리로 되어  있으니 제기를 뜻하는 정이란 글자도  다리 셋을 형상화한 것이다. 고대 동방의  삼재설은 천. 지. 인  관념을 3에 투영한 것으로 널리 쓰여져 왔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한자문화권에 편입되면서 한문식의 3개념이 강화되었다. '주자가례'가 강화되면서 귀착된 삼강오륜,  삼강행실도, 삼일장, 삼배,  삼색실과, 삼탕등이 그것이다. 삼황, 삼도, 삼족, 삼계도 들어온 것들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를 풀어서 '--' 과 '==' 를 합한 것을 '한자 3' 으로 보았다. '한자 3' 을 거꾸로 세우면 '내 천' 자가 되어 '셋' 과 '샘' 은  어원도 같고 무궁무진함을 뜻하기도 한다. 문자가 생성되던  상고시대부터 3은 늘 완벽의 상징이었다.  불교에서는 조금 어려운 말로 삼성이라고 하여 일체의 세간법을 그 본질 면에서 선, 악, 무기의 셋으로 보는 교설이 있다. 이 삼성의 입장에서 관조된 세계는 공(없음)일 뿐만 아니라 진실한 유(있음)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세상의 있고 없음이 모두 삼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말이다. 불보. 법보. 승보를 의미하는 삼보,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 순수한 집붕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는 상태인 삼매, 중생들의 세게를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는 삼계등은 모두  불교에서 전래된 것이다.
   

 순수 조선 혈통의 3계보를 찾아서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우리들의 원초적인  '조선식' 3일까. 아무래도 한민족의 기원과 더불어 시작된 3 선호도를 규명하자면 앞에서 예시된 신화시대, 혹은 신화의 전승체인 무속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그 원초적 모습이 모일 것이다.   소주를 마실 때, 술을 조금 뿌리는 행위가 있다. 누군가  이를 보고 이렇게 농담을 던진 기억이 난다.  "소주회사에서 술을 조금 버리는 풍습을 일부러 만들어냈다. 2홉짜리 한  병이야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수천만 병으로 따지면 얼마나 이들이 되겠느냐."  소주회사가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실은 오래 된 '고시레' 풍습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가을 상달고사를 끝내고 떡을 조금씩 떼어내어 멀리 던지면서 '고시레' 를 외친다. 고시레는 3번을 하게 되어 있다. 2번이나 4번은 안 된다. 왜 3번을 해야 하는가는 알 수 없다.  조상 대대로 그렇게 해온 탓이다. 조상 대대로 해왔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따로 숫자 3의 현실태가 드러나고 있다.  서울 근교인 구리시 갈매동에서는 격년마다 봄이 오면  도당굿을 성대하게 지낸다. 이 굿에는 2월 1일에 삼화주를 뽑으며 하는 부정풀이가 있다. 제관을 뽑고 나면 집집마다 무당이 들어가서 부정을 씻어주는데 주인네가 상을 내놓는다. 상에는 막걸리 3 잔, 밥 3 그릇, 무나물 3 그릇을 올린다. 어느 집이나 한결같이 3 그릇씩 9 그릇을 내놓는다.  이 마을말고도 여러 마을굿의 제물 차림에서도 하필이면 '3말 3되 3홉'을 고집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또한 마을의 신당에 금줄을  치고 황토흙을 좌우에 세 무더기씩 놓는 것이 원칙이다. 이 역시 토속적인 3관념에 속한다.  언뜻 보기에 한문식 표현으로 들어온 수관념이라 여겨지는  것들 중에서도 순수 조선식 3관념이 있다. 고려시대의 삼소가 그것이다.  수도였던 개경에 땅기운을 빌어 국가의 번성을 기원하고자 삼소라는 것을 두었다. 좌소. 우소. 북소라고하여 좌우와 북쪽에 소를 두었ㄴ느데, 소는  소리. 솔. 솟을 의미하며 무언가 솟구치는 것을 뜻한다. 3이 솟으면 무언가  국가의 흥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묘청이 말한대로 국풍의 소산이라고나 할까.  민족 고유의 3과 관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겠다. 최근 한국국제교류제단에서 주관하고 세계적인 한국학  연구자 30여 명이  참여한 현지답사 프로그램에 강사로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베트남의 한 연구원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의 유수기업들 이름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난감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과 관련된 기업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삼성이라는 이름이 번뜩 뇌리에 스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별의 위치에 따라 하늘을 크게 삼원과  28숙으로 나눴다. 삼태성을 중심으로 28숙의 별자리가 우주의 3대축인 3원을 이루니 숫자 3은  별자리와 우주에서도 관철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삼성그룹은 우리 고유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자신의 이름에 사용한 것이 아닌가!  대략 이런뜻으로 설명을 하니 그는 수긍하는 눈치였고 나는  위기를 숫자 3으로 넘긴 셈이다. 하지만 고 이병철 회장이  처음 삼성을 세울 때 그런 민족문화까지 고려하여 지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삼성은 내재적으로 민족적 별자리의 운기를 타서 그런지  국내 최고의 그룹으로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삼성의 이런 모습이 작명 덕분인지 조상들의 음덕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커가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창업자의 마음속에 무언가 영감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고대 동방의 삼재설의 천. 지. 인 수관념은 그대로  한글 창제원리로도 작용하였다. 홀소리 글자의 기본을 셋으로 정하여 '?' 는 하늘, 'ㅡ' 는 땅, 'ㅣ' 는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세상은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고려 개국을 기념하여 옛 백제땅에 세운 논산군 연산의 개태산에 가면, 누구나 단군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앞마당의 건물들이 나란히 '3동' 으로 붙어 있는 특이함울  관찰할 수 있다. 이 역시 단군신앙에 내포된 3의 형상화로 보인다.
  8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고대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속에서 이들 삼성의 위상은 늘 주목 받고  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대대적으로 단군릉을 건설하는 등, 단군신화의 현실성은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순수 조선혈통의 숫자 3' 이 아직 그 임무를 끝내지 않았다고나 할까.  우리의 3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로 음악에서의  삼박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삼박자는 풍물굿의  삼채장단, 세마치에서도 두드러진다. 우리나라 시문학에서의 3이 지니는 음률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향악에서도 삼분손익법이 있어 음의 길이를 3등분하는 법칙이 존재한다.  3은 민간의 주술적 기복과도 결합되었다.  '삼재수' 가 그것이다. <동국세기>에서는 삼재 막는 삼재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 유. 축이 든 해에 출생한 사람은 해. 자. 축이 되는 해에 갑. 자. 진이 든 해에 출생한 사람은 인. 묘. 진이 되는 해에, 해. 묘. 미가 든해에 출생한 사람은 사. 오. 미가 되는 해에, 인, 오. 무가  든 해에 출생한 사람은 갑. 유. 인이 되는 해에, 각각 삼재가 든다. 세속에서는  이같은 복설을 믿고 세 마리의  매를 그려 액을 막는다. 생년으로부터 9년 만에 삼재가  들기 때문에 이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3년간은 남을 범해도 안 되고 모든 일에 꺼리고 삼가는 일이 많다.  위 삼재법을 오늘날은 개인적 액막이 정도로만 축소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개인적인 액막이 이외에도  '큰 삼재'라고 하여 국토를 손상시키는 화재. 수재. 풍재를 꼽았고, '작은삼재' 라고  하여 사람을 손상시키는 도병재. 역병재. 기근재 따위를 꼽았다.  막말로 비행기 떨어지고,  철도가 이탈하고, 가뭄과  홍수가 거듭되고, 다리와 지하철이 무너지고, 백화점도 무너지는 식의  재해를 어떻게 개인적인 액막이로 막겠는가. 옛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인위적 재해를  삼재로 보아 보다 큰 차원에서 액막이 장치를 했는데, 오늘날은 순전히 개인적인 재해만을 점쟁이에게 가서 액땜하고 오는 식으로 바뀌었다.  '삼재' 를 당한 사람은 단순하게 '세 마리' 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인 게 아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역동적인 삼두일족응 부적을 만들어 부착했다.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가렴주구로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세 개의 대가리를 가진 매는 강력한 힘에의 열망 자체다. 세 개의 대가리가 먹이를 쪼아보는 매서운 눈매를 통해 민중은 자신의 힘을 보이고자 했다. 민중의 항거를 담은 황해도 장산곶의 장수매설화도 그같은 염원을 담은 것이다.  3의 역동성을 찾자면 멀리 만주 벌판으로도 떠나야 한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 각저총을 찾아가면 고구려의 상징물 삼족오를 만나게 된다. 어두운 무덤 안에서 다리가 셋이고 머리가 하나인 까마귀가 날고  있다. 삼족오의 비밀은 바로 천제 해모수에게 있으니, <삼국유사> 권1에서는 이렇게 할애하고 있다.
  천제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홀승골성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로써 성을 삼았다. 그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옮기게 되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부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 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라 일컬었다.  왜 해모수라고 했을까. 해모수의 '해'는 풀이할 해로 표현되었을 뿐, 우리가 구음으로 부르는 '해' 를 한자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태양신 그 자체를  일컫는다. 이런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는 고대사회의 태양관을 드러내주는 결정적인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삼족오가 비단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신라에서도 까마귀는 태양신이었다. 중국의 <시경>에  하늘나라 임금이 보낸 현조가 나오는데 이 역시 까마귀를 뜻한다. 현조는  여느 까마귀가 아니라 태양을 상징한 까마귀다. 까마귀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일본,  심지어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까마귀는 어쩌면 신화시대의 '만국 공통의 태양새' 였는지도 모른다. 북유럽의 '시경' 이라고 할 수 잇는 <에다>에서도 태양의 상징인 까마귀가 등장한다. 박시인은 그의 책 <알타이 신화>에서 까마귀가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이란,  그리고 성경에도 있었다고 하면서 알타이 신화가 이동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고구려시대에 삼족오를 무덤에 그릴 정도로 까마귀를 확실하게 숭배했다는 증거물을 갖고 있다. 태양신을 상징하는 삼족오, 오랜  세월 뒤에 제작된 조선시대 서민들의  삼두일족응은 똑같이 3에  기초한 제의적 상징물이다. 하나는 머리가 셋에 다리가 하나, 다른 하나는 다리가 셋에 머리가 하나다. 상징이 암시하는 바가 뒤바뀌었을 뿐, 고구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3은 민족사에서 결코 적극적인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조선적인 3' 의 가장 두드러지는  미술적 상징으로 내세우고 싶다. 시야를 넓혀 동북아시아 전체로 확대하면, 시베리아의 3 관념이 우리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천상. 지상. 지하로 세상을 3분하는 관념을 꼽을 수 있고, 아예 우주를 9로 나누기도 한다. 그들 9단계의 우주는 다시금 상. 중. 하로 각각 3단계 구분이 이루어진다. 3.  3. 3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세계는 시베리아인들이 꿈꾸던 원초적인 우주관이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이런 사고를 지녔을 것이다.    숫자 '3' 의 복권을 꿈꾸며  3은 저 홀로 쓰여지는 것만도 아니다.  3이 3번 반복되어 9를 이루면서 강한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을굿에서는 서말. 서되. 서홉으로 쌀을 준비하여 신성의 의미가 한결 강해진다. 아홉수라고 하여 29살에 결혼을 피하는 관념  속에는 이미 '삼재' 라고 하는  액이 3번 반복된 마지막 해라는 계산법이 숨겨져 잇다. 아기를  낳고 금줄을 치면서 몸조리를 하게 되는 삼칠일(21일간)에도 7이 3번 반복된 의미가 담겨 있다.  삼현육각. 삼정승 육판서처럼 3과 3의 배수인 6이  결합하여 강조되기도 한다.무언가 잘못을 하고서 부지런히 도망을 칠 때, 우리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고 말한다. 3이 열두번이나 반복되었으니 대단한 속도감을  뜻한다. 여기서 열두 번은 대단히 많다는 속뜻을 지니고 있다.  반복은 좋은 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 우리는  늘 홀수가 두 번 겹친것을 선호했다. 1월 1일의 설날은 말할 것도 없고, 3월 3일의 삼짇날, 5월 5일의 단오, 7월 7일의 칠석, 9월 9일의 중구절을 중시했다. 어느 누가 2월 2일, 4월 4일, 6월 6일, 8월 8일, 10월 10일을 중시하는가.  3은 양수이고 길한 숫자인 탓으로 양수가 겹쳐진 삼월  삼짇날(3.3) 따위를 길일로 친 것도 반복의 원리다. 삼월 삼짇날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며 냇가의 버들강아지도 눈을 트고 모처럼 기지개를 펴게 되는 길일이다. 중국사람들 최대 명절인 9. 9절도 바로 3. 3이 반복된 결과다. 이날은 양기가 그득하여 천지만물이 힘을 얻게 된다고 믿어왔다.  3을 좋아하는 수관념은 짝수보다도 홀수를 선호했던 수관념과도 관계있다. 우스갯소리로, 술집에서 맥주를 시킬 때 '1. 3. 5. 7. 9' 를 고집하는 것도 무의식중에 이러한 수관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지난 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민속학 강좌를 듣는 학생들 100여명을 상대로 '한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선호도 조사를 해보았다. 내심 '3' 이 단연 우위를 차지할 것으로 알았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많은 학생들이 '7' 을 꼽고 난 다음에야 '3' 에 표를 던졌다. 사실 칠석. 칠성 따위를 보면 선조들이 '7' 을 좋아했음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칠석 때문에 7을 선호한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서양식의 '럭키세븐', '세븐스타' 영향탓이 아닐까.  우리 민족의 신화와 풍습 속에 항상 자리잡았던  3. 나는 숫자 3과 우리 민족의 수의식을 생각할 때마다 3이 지닌 상징체계야 말로  원초적인 문화임을 거듭 느낀다. 다른 어떤 숫자보다 3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민족 고유의 숫자관을 다룬 '인문학적 숫자론' 이라도 나오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

     

돌하루방은 어디서 왔을까
   

머나먼 이스터 섬의 석상과 돌하루방
  한 무리의 폴리네시아인들이 쪽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아주 작은 섬 하나를 발견하였다. 섬에  도착하였을 때, 숲이 우거진 섬은  문자 그대로 미지의 선경과 같았다. 그들은 섬에 거대한 석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석상을 옮기기 위하여 통나무를 베어내면서 작은  섬의 숲은 고갈되었다. 숲이 파괴되자 식량이 고갈되었고, 섬은 씨족간의 전쟁으로 '지옥' 처럼 변해갔다. 1882년 네덜란드인 선장  로헤벤 제독이 섬에  이르렀을 때, 3,000여 명의 원주민들이 누추한 갈대 오두막이나 동굴에 살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부족한 식량 때문에 식인 풍습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섬을 발견한 '서양인 오랑캐' 들은 그들 멋대로 '부활절 일요일에 발견하였다' 는 뜻으로 이스터 섬이란 이름표를 달아주고 세상에 알렸다.  우리나라 대중들은 우스꽝스럽게도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라  양복광고에서 남태평양 이스터 섬과 처음으로 만난다. 이스터  섬의 신비스러운 석상들 앞에 남성모델을 내세운 광고주들은 이 어울리지 않는 대비를 통해 양복의 품격은 선전했지만 막상 석상의 비밀에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스터 섬의 석상은 오래 전부터 세계학게에 보고된 신비스런 영물의 하나였다.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머나먼 섬 중의 하나인 이스터 섬. 지도에조차 잘 나타나질 않는다. 가장 가까운 섬에만 약 2천km 떨어졌고, 남아메리카 서쪽에서는 4천km쯤 떨어져 있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 조상이 남아메리카에서 왔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어느 고고학자가 작은  배로 남아메리카에서 출항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따라서 섬 주민들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서, 혹은 황량한 화산 주변에 석상을 세웠다.  거대 석상을 무려 1,000여  개씩이나 세운 이유는  씨족간의 신앙물을 세우는 경쟁심리 때문이라고나 하나 정확한  것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녹색세계사>를 쓴 클라이브 폰팅은 거대한 석상을 세우기 위여 경쟁적으로  작은 섬의 숲을 망가뜨려 자멸을 재촉하였다고 밝혔다.  우리의 돌하루방을 생각하면서 엉뚱하게 이스터 섬을 떠올린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만약에 '서양인 오랑캐' 들이 우리의 제주도를 침탈했다면 그들은 세계 학계에 돌하루방을 어떻게 보고했을까.  제주도가 초토화되어 백성들은 노예로 팔려가고 돌하루방만 남았다면  훗날 학자들은 어떤  주장을 폈을까. 그러한 상상은 '가당치도 않다' 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재수의 항쟁' 을 환기시키고 싶다.  치외법권적으로 군림하던 성교꾼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란서함대가  제주 근해에서 위세를 떨 때, 민중들의 장두들이  관덕정 앞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어갔던 신축년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1901년이 아니던가. 여건만 허락했다면, 열강들은 능히 제주도를  '먹었을' 것이고, 돌하루방은  그들의 잣대로재단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합 모양의 고깔모자를 쓴  수녀님이 조랑말을 타면,  발 벗은 조선처녀들이 말고삐를 끌던 시절이었다. 신부님의 패스포트에  고종임금이 직접 직인을 찍어주었다.  여아대 -- 나와 같이 대접하라  임금 자신과 같이 대접하라니  지방수령 주제에 꼼짝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가마 타고 다니는 양대인이란 말도 그때  나왔다.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세계문명사란 승리자의 전리품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 문화의 수수께끼' 란 것도 서구인들이 바라본 수수께끼일 분이다. 서구인들에게는  수수께끼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삶의 문화 그 자체이지  수수께끼일 수가 없다. 이스터 섬의 석상들이 '서양 오랑캐' 의 손으로 재해석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래도 우리 손으로 온전하게돌하루방을 해석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제주도에 다녀온 사람치고 마스코트 돌하루방 한 쌍이라도  들고오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다 못 해 돌하루방 모양의 플라스틱 열쇠고리라도 몇 개쯤 사들고 온다. 홍보책자 겉옷도 으레 돌하루방이  점령하기 마련이다. 고르바초프가 제주도에서 30억 달러 원조 약속을  거머쥐고 모스크바로 되돌아갈 때, 함께 비행기를 탄 주인공도 바로 돌하루방이었다. 이래저래 국제적인 명물이 되다 보니 상표저작권을 둘러싼 소송까지 걸렸다고  한다. 제주도 꿀단지조차도 돌하루방 모양새다.  그러나 정작 돌하루방의 기원을 묻는다면  아무도 시원스럽게 답하지 못한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돌할아버지' 는 몽골 벌판의 훈촐로에서 왔다?
  하루방은 할아버지라는 뜻. 따라서 돌하루방은 '돌할아버지' 다.  조선시대, 아니면 고려시대, 그것도  아니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까. 정답은 일반상식을 뒤엎는다. 돌하루방의 공식화는 불과 수십 년 안짝.  해방 이전만 해도 돌하루방이란 말은 없었다고 한다. 제주도 민속학자 김영돈(문화재 전문위원)의 증언을 들어보자.
  본디 이 석상은 '돌하루방' 이라 부르지  않았다. 광복 전후쯤 해서 도민들 사이에서 장난삼아 '돌하루방' 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누구나가 그 뜻을 쉽게 드러내는 말이라 너도나도 애용함으로써 널리  번져갔다. 이 '돌하루방'이란 말이 상당한 세력을 뻗치게 된 것은 1971년 8월 20일, 제주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민속자료 제 2호로 지정할 때 '돌하루방' 을 갑론을박 끝에 문화재 공식 명칭으로 쓰면서부터다.  -- 한라일보, 1993년 2월 1일자
  돌하루방이란 명칭 사용이 결코 오래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다행인 것은 근래에 붙여졌으나, 듣기에도 친근하고 썩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돌하루방이 상당히 소급되는 옛말인 것처럼 알려진 세간의 상식은 잘못되었다.  돌하루방의 기원 문제는 남방기원설, 몽골기원설, 제주자생설  등 아직은 백가쟁명이다. chlorms에 몽골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몽골영향설은 반드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몽골 지배기에 몽골 석인상의 영향으로 돌하루방이 이루어졌다는 견해다. 비교민속학적 차원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기는 하나 워낙 반론이 드센 형편이다.  울란바토르 대학 바이에르 교수의 <칭기즈 칸의 혈통을  이어받은 칸. 귀족들의 돌초상 - 13. 14세기>에 의하면, 몽골  각지에 약 500여 기의 석인상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훈촐로로 불리는 석인상은  고대 유목민족의 습관이나 신앙 및 사회제도 등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훈촐로에는 우리의 돌하루방과 외형이 너무도 비슷한 것이 있고 한때 몽골의 지배기도  있어 몽골과 제주의 친연성이 그럴듯하게 제기된다. 몽골 벌판의  훈촐로가 탐라까지 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몽골의 드넓은 초원은 '고요한 들판' 이 아니었다. 많은 세력들의 피어린 싸움이 전개되었으니, 어느 시기에나 초원의 지배권을  놓고서 다투었다. 중앙아시아의 중심무대로서 칭기즈 칸이 발흥한  곳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석인상조차도 돌궐, 위구르, 몽골제국 등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석인상이 별도로 존재한다.  생김새에서 일부 친연성이 있다고 하여 몽골영향설을 주장하는 시각은 무리가 아닐는지. 바로 인근의 알타이  지방에는 전혀 다른  투르카이 양식의 석인상이 전해진다. 이처럼 중앙아시아 곳곳에 전해지는  석인상이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며 차이가 나타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몽골 석인상과 제주의 돌하루방이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는 데서 착안하여 공통성을 주장하는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우리나라 육지의 벅수도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들 벅수도 몽골 모자의 영향 탓인가? 게다가 몽골의 석인상들은 대개 손에 식기 따위를 들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상호간에 교섭이  전혀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명간에도 문화적 공통성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남해바다 건너온 벅수
  돌하루방의 '출생내력' 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런데 단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어느 날 남도의 벅수가 배를 타고서  남해바다를 건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여, 제주도 돌챙이(석수쟁이) 한 명이 남도를 갔다가 잘생긴 조선 후기 돌벅수를 만났다. 돌챙이의 고향은 정의현, 지금의 성읍 민속망르이다. 돌챙이는 돌아와서 입상을 만들었다. 물론 그는 손에 익히고  있던 탐라식의 조각 형식을 기반으로 해서, 새롭게 들어온 양식을 결합하여 돌하루방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추론하면, 돌하루방과 벅수 연관설이 분명해지는  듯하다. 그동안 육지부의 석장승 및 벅수와 돌하루방을 관련짓는  이들이 의외로 드물었다. 정의 고을에서는 돌하루방을 지금껏 '벅수머리' 로 불러왔단다. 육지부의 벅수와 상통하는 말이 아닌가. 벅수가 전남. 경남 일대에 가장 많이 산재하므로 돌하루방도 남해바다를 건너온 전승물이 아닐까. 물론 제주도 사람들의 남방전래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이 않다. 그러나 적어도 제주도의 엣 고을에서 지금껏 '벅수머리' 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무슨 근거로 에사로이 넘길 것인가.  문헌자료가 하나 있기는 하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찬한 것을 신찬이 발문을 붙여 출간한 담수계편 <탐라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옹중석은 제주읍의 성 동서남 삼문 밖에  있었고, 영조 30년에 목사 김몽규가 창건하였으나, 삼문이 헐림으로 인하여, 2좌는  관덕정 앞에, 2좌는 삼성사 입구로 옮겼다.  '옹중석' 이란 한문투는 탐라지에만 기로고디어  있을 뿐, 제주민들 누구도 쓰지 않는 말이다.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느 ㄴ것인데, 육지부의 벅수를 염두에 두고 수호신으로 세웠을 혐의가 짙다.  18세기 중엽이라! 한창 민중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당대  민중조각의 꽃이라고도 할 만한 뛰어난 석상물들이 세워지던 때가 아닌가. 연대가 확실한 것만 꼽아도, 나주 운흥사지 장승이 1719년, 남원 실상사 장승군이 각각 1725년, 1731년에 순차적으로 세워졌다. 기록상으로 같은 영조대의 실상사 것보다 23년 뒤에 돌하루방이 세워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존 민간석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품들이 대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니, 돌하루방과  육지부 벅수의 친연성은 그 생김새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석장승이 많기로 소문난 지리산 일대.  남원시에서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주천면 호기리에 돌미륵 장승이  1기 서 있다. 1850년 마을민의 현몽에 의해 논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어 1987년도에 현 위치에 세워졌다. 첫눈에 누구나 돌하루방과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 돌미륵 장승을 보면 돌하루방과 흡사한 벙거지를 쓰고, 퉁방울눈에  주먹코다. 육지의 일반 장승과는  사뭇 다르다. 돌하루방의 '친척' 을 뭍에서 찾아냈다고나 할까.  조선 후기 전국에 넓게 퍼진 석장승, 또는 벅수와 같은 민중 돌조각품과 돌하루방의 조형적 상통점을 따져보자.  주먹코, 왕방울눈, 파격적인  해학성, 푸짐한 표정...... 서로 닮은 게 하나 둘이  아니다. 각각의 민중적 조형물들은 나름의 풍토 속에서 자라나왔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성격은  하나로 보인다. 소박하고 질박한, 그러면서도 어디지 모르게 친근한 조형성.
   

 돌 많은 탐라의 돌챙이 문화

  제주도 돌하루방이 조선 후기 장승문화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같은 돌하루방의 조형성이 갖추어지기까지는 제주도 본토의 토착적 요소들이 총화되엇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란 어떤 영향관게에 놓였다  하더라도 일방적인 경우는  없다. 늘 상대적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마련이다. 국가적으로  읍성을 축조하면서 육지부의 석상과 같은 의미에서 돌하루방을  세운 것은 분명하나,  토착적인 제주도 석상 전통이 그 밑바탕을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제주도에는 돌하루방의 여러 '친인척' 이 살아왔다. 농사를 주관하는 망르신인 조천석, 제주시 동서쪽을 지켜주는 동자복. 서자복 마을미륵,  동자석, 거욱대 따위가 그것이다. 모두 현무암을  깎아 만든 점에서도 돌하루방과  정서적. 조형적 연대를 보여준다.  지금은 제주대학교 박물관 야외 마당에 있는 조천석은  제주시 건입동의 농사신이다. 19세기 것으로 미루어지는데 높이는 불과(?) 870cm에 지나지 않는다. 조천석은 형태상으로 돌하루방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돌하루방말고도 다양한 석상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물의 하나이다.  무엇보다 제주도 석상문화이 으뜸은  동자석이 아닐까. 아담한 크기의 다양한 동자석이 쌍으로 서서 무덤을 지킨다. 글자  그대로 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아이 형상의 석상인데. 그 토속성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불행하게도 이들 동자석은 많은 수난을 당했다. 지금도  수집가들의 호사취미로 팔려가거나 도난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거욱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거욱대는 돌로 사람의 형상을 세운 것이다. 제주시 영평동의 하동  거욱대를 찾아가니 냇가의 잡목 우거진 넝쿨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동은 풍수지리적으로 남북이 허하다고 한다. 그래서 '남재북탑' 이라고 하여 남쪽에슨  거울대를 세웠고, 북쪽에는 방사탑을 세웠다. 돌하루방이 읍성 경계와  수호신 기능을 했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육지부의 석장승과 비슷한 기능이다. 마을공동체문화의 전형인 바,  돌하루방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풍부하고 다듬기 쉬운 용암석을 이용한 다양한 이들 석상 전통들이 큰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전해오다가 육지부의 석상과  결합, 제주도만의 독특한 돌하루방문화를 낳은 것으로 보여진다. 재질이 다르면 조각도 달라지는  법. 육지부의 단단한 화강암, 제주도의 독특한 용암바위, 장인의 손끝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빛 바랜 흑백사진첩에 되살아난 돌하루방

  돌하루방만 생각하면 늘 빛바랜 흑백사진첩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돌하루방은 컬러사진보다는 흑백일 때 제격이란 느낌이다. 사진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목석원 주인이 손수 나서서 만든 만농 홍정표 선생의 흑백사진첩이  바로 그것을 웅변해준다.  1925년에 제주농업학교 졸업, 제주문학협회  창립, 제주사진가협회 창립, 오현고등학교 교장...... 그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만농에 관한 정보목록의 전부다. 하지만 목석원에 전시된 사진을 한 번  보는 순간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어떤 강한 느낌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주도 정서를 선생만큼 정확하게  찍은 사진을 나는  아직까지 본적이 없다. 유별난 사진이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찍을  수 잇는 정확한 사진일 뿐이다. 그런데 당신의 사진 속에서는 제주도가 살아 움직인다. 꾸밈없음이 오히려 실물의 참모습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한다.  첫 번째 사진의 돌하루방은 정의골 남문 것, 두 번째는  정의골 벅수멀, 세 번째는 제주목의 돌하루방이다. 돌하루방은 똑같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지역마다 다르다. 서로 다른 모양새를 가진 돌하루방을 만농은 정확하게 잡아낸다. 정의와 대정 것은 몸집이 제주목 것에 비하여 작지만 얼굴과 코가 유난히 크다. 머리에는 벙거지를 연상케 하는 모자가 씌워져  있다. 얼굴에 비하면 몸집이 작아 불균형을 연출하지만, 작고 조신해  보이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우리 눈에 익은 돌하루방은 제주목 것이다.  제주도 기념품으로 사가지고 오는 돌하루방은 대개 제주목 것을 닮았다. 정의와 대정의 귀여움이 넘치는 돌하루방 마스코트를 사고  싶은데 제주목 출신뿐이다. 자본주의 대량생산이 낳은 병패다.  그런데 돌하루방만이 제주읍성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  제주읍성에는 동문. 서문 밖에 미륵이 각각 1기씩  전해지고 있으니, 동자복과 서자복 미륵이라 부른다. 마을에서는 미륵돌미륵, 미륵부처 등으로 불러왔다. 하나는 제주시 동쪽 건입동에, 하나는 용담동 한두기에 서 있다.  미륵들은 보개를 덮어쓰고 눈, 코, 입이 분명한  넉넉한 표정인데 큼지막한 귀가 전형적인 미륵상이다.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읍하고 투실한 몸체에 걸친 옷자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용암으로 만든  데다가 표정마저 돌하루방과 비슷한 인상이다.  읍성들이 조선 후기에 대폭 개축된 것으로 미루어 이때에 새롭게 석상을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제주도에만 읍성 수호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충청남도 해미읍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기의 미륵이 지켜준다. 일반적인 장승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미륵석상이 서 있어 흡사 제주읍성을 지켜주는 미륵불을 연상케 한다. 전라남도의 강진병영을 지키던 벅수같이  읍성수호신으로 장승 모양의 석상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아깝게도 이들 석상은 누군가 훔쳐갔다!).  민속유산이 대개 그러하듯, 돌하루방  기원에 관한 정확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돌하루방의 전체  숫자다. 제주목(제주시) 21기, 대정고을 12기, 정의고을 12기,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2기(제주시에서 옮김), 모두 합해서 47기.원래는 48기였는데 1기는 소실되었다. 제주 3읍이었던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주변의 마을에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수문장 역할도 분명히 해냈다.  제주의 도시화에 따라 돌하루방의 위치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주대학교, 제주시청, KBS 제주총국 등지로 옮겨진 것이다. 심지어 관덕정과 삼성혈 입구의 돌하루방도 옛 위치 그대로가 아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제주시의 문화유적>(1992년)의 한 대목을 재인용하여 돌하루방을 총정리해본다.  주민들의 돌하루방에 대한 생각을  보면, '문지기 노릇을 한다',  '수위. 방어의 역할을 한다', '묘소의 동자석과 기능이 같다', '거오기(방사탑)를 촌락 동산에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사의 기능을 한다', '수호신격이다', '주현청 소재지의 존엄성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사기를 방지하고 축출하기 위한 것이다'  등등이다. 이런 생각 속에 돌하루방의 주술종교적 기능, 수호신적 기능, 위치 표지 및 금표적 기능이 다 들어 있으며, 육지부의  장승이나 거욱대의 변형으로 제주도 특유의 종교와 문화를 표현한 석상을 축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제주도민들에게 돌하루방은 단순한 읍성수호신의  의미만 가진 게 아니다. 이제 돌하루방은 제주도의 문화적 상징이자  자부심의 표식으로 여겨진다. 송종원. 장공익 옹처럼 일생을 돌하루방만 다듬어온 장인도 여럿 된다.  돌하루방, 도개질, 물질, 해녀, 지들커, 디들팡, 글묵, 그늘케, 물구덕, 아기구덕, 대남피리, 집줄놓기, 용천수,  스당클굿, 고팡물림...... 토속적인  제주도 말들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에나 지금이나 제주도 곳곳에는 바람이  끊이지 않고 돌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 속에서 어느 갈라터진 촌로의 손으로 다듬은 돌하루방. 이런 속내를 사람들은 행여 헤아리기나 할 것인가.
     
      솟대, 하늘로 비상하는 마을지킴이
    레나 강가를 지키는 아홉 마리 물오리  높다란 장대 끝에 새가 앉아 있다.
  바람은 늘 장대에 닿고, 가녀린 장대를 어루만지면서 잠든  새를 일깨운다. 이윽고 나무새가 하늘로 비상한다. 도대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새일까.  이들 새가 올라 앉은 내력을 정확히 아는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마을마다 장대나 돌기둥 위에 올라앉은 '나무새'  나 '돌새' 를 곳곳에서 볼 수  있으니, 이름하여 '솟대' 라고 불러왔다.  비행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호수는 늘 그림처럼 잔잔했다. 늙은 오윤(시베리아의 남자무당) 미트레비 부에곰. 스탈린  시절, 혹독했던 샤머니즘 청산을 피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시베리아 샤먼의 한 명. 시베리아 야쿠트 공화국 문화성의 도움으로 그를 간신히 찾아냈다.  그의 앙상한 손목이 우리를 호숫가의  소나무숲으로 잡아끈다. 그의 비밀스런 숲으로 들어가며 우리는 '신성', '성스러움' 따위를 떠올리고 숨을 죽였다. 나무가 나타났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세계수.  신들과 저승사자들은 세계목을 타고  땅 아래로 내려온다.  산 자의 영혼들은 그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우주의 가지는 세상 만물의 균형을 잡고 이로써 나무는 우주의 중심이 된다. 이들  세계수는 생명의 나무인 동시에 영원불멸의 나무다.
 

 스스로 살아 있는 나무, 생명을 주는 나무
 

 오, 위대한 오윤의 나무, 캐리약스 마흐!
  오윤의 나무는 가지를 하늘로 치켜올린 채 우리를 마중하였다. 위대한 신수앞에는 긴 소나무장대가 걸쳐져 있고, 그 위에 정교하게 깎은 물오리 아홉 마리가 하늘로 비상한다. 밑에서 위로  아홉 마리가 차례대로  앉아서 날개를 퍼득이며 솟구친다. 물오리 밑에는 에메겟(인형) 아홉이 두  손을 벌리고 있다. 하늘로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이다.  샤먼은 무복을 갈아입었다. 시베리아 샤먼의 옷은 새. 순록.  양. 곰 모양의 세 가지가 있는데 그는 새 모양의 옷을 입었다. 새 모양은 가장 특별한 복장이었다. 샤먼들은 가능하면 무복을 새의 깃털에 가깝게 꾸미려 애썼다. 부에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태양을 향해 두팔을 벌려 고하였다.   태양이시여, 우리들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가슴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재앙은 물리쳐 주십시오.
  1993년 여름, 모스크바를  떠난 에어로플로트  항공기는 한국의 역사민속학자 여럿을 싣고 우랄산맥을 넘었다. 엘리아데 같은  서양인 학자들의 눈과 글을 통해서만 접했던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실체를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먼질을 돌아갔다. 흡사 코사크 긱병대가 우랄을 넘어 시베리아로 동진을 거듭한 것처럼 바이칼에서 발원한 레나  강이 북극으로 흘러들어가는 시베리아 대평원의 중심지 야쿠트 공화국(현재는 사하 공화국)을 향해.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우리 문화의  친연성이 있다면, 그  실마리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근접된 사례는 바로 '장대 위의 새' .  물오리 아홉 마리는 각각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닐거, 가가라, 위러, 드라크허, 곱더, 이그리에, 부리크흐, 직작즈하, 북작자하...... 이름만 다른 게 아니라  맡은 바 직무도 달랐다. 이들 오리들이 사는 곳에 따라 '숲의 수호신' 가가라, '호수의 수호신' 곱더 식이었다. 왜 하필이면 아홉 마리였을까.  북아시아 샤머니즘에서는 세계를 3층으로 나누고 있다. 각각의 층위는 상, 중, 하로 갈라지므로 아홉 마리의 새는 밑으로부터 하층, 중층, 상층을 상징한다. 천상, 지상, 지하의 세 구분이 그것이다. 우주를 이루는 세 개의 세계를 새들이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원주민들은 결코 새를 죽이지 않는다. 새는 집을  지켜주는 가장이며, 망자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는 조상  영혼의 현신이며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중개자이다. 샤먼들은 새를 조상신으로 섬긴다.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북극  바람이 지나가고, 무려 8개월에 육박하는 겨울이 지나면 짧기만한 봄과 여름이 온다. 툰드라의 들녘에도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난다. 그 여름 시베리아에서 만난 민들레꽃은 참으로 반가웠다. 원주민들은 봄이 오면 오롱코라 부르는 축제를  준비한다. 말젖으로 담근 술이 키위스를 가죽통에 담아서 말에 싣고  와, 들녘에서 축제를 벌인다. 아홉  마리의 새는 즐겁기만 한 봄의 축제에서도 상징물이 되어 비상의 날갯짓을 한다.  서툰 통역사의 통역을 새겨 듣고 있는데 백조와 흡사한 몸집이  유난히 큰 새들이 호숫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창공을 나는 일은 꿈, 그 자체였다. 서구 과학문명은 비행기로 그 꿈을 이루었으나, 스스로 비상하는 '환상적인 꿈' 을 상실하였다. 비록 비행기를 만들지는 못했으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의 새나 우리의 솟대에 올라탄 새의 비상이 더욱 인간  본연의 모습과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모든 문화현상이 그렇듯이, 독자적인 특수성과  대외적 보편성은 함께 존재한다. 시베리아의 새와 우리의 새가 똑같을 수 없고 문화적 성격에서도 분명 변별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을 넓게  동아시아 전체로 돌리면 우리의 솟대문화가 이들 동아시아 전역에 퍼진 새문화와 무관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새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알타이 특별전을  본 이들은 일명 '얼음공주' 미이라가 왔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산지 알타이 우코크에서  1993년 발굴된 파지리크 여사제의 복원된 머리에는 생명수를 상징하는 길다란 관과 그 위에 올라앉은 수많은 새들이 있었다.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 왕궁에도 은으로 된 나무가 있고 네 마리의 오리가 앉아  있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 이께가미 유
적에서도 나무새가 발굴되었다.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새는 샤머니즘의 상징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민족도 선사시대부터 새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전통은 삼국시대로 이어졌다. 고구려 벽화의 태양을 상징하는  까마귀인 삼족오, 박혁거세를 위시하여 개국신화에 나타나는  무수한 '알' 도  바로 새의 상징이다. 심지어 혼레식에 올리는 닭도 새를 길운으로  보았던 상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새는 장대에 앉게 된다.  장대세우기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사를  제외하면 대략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고려도경>을 들춰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옛부터 창기와 광대들이 사는 곳에는 장대를 세워  일반집과 구별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고 대개 그  풍속은 귀신을 섬기고 또한 기를 누르면서 기양을 위한 기구인 것 같다.  아무튼 문헌에는 대개 돌로 된 석장과 구리로  된 동장, 그리고 나무로 된 목장으로 구분될뿐더러 곳곳에 이들 장대들이  세워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솟대는 그러한 장대의 대표격이다.  솟대 못지않게 짐대나 오릿대로 부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솟대 집안의 족보에 끼일 만한 이름들을 쭉 나열해보자. 짐대, 솔대, 소주, 소줏대, 표줏대, 거릿대, 갯대, 수살이, 액맥이대, 방아솔대, 화표주, 심지어 일시적으로 세우는 장대인 볏가리, 풍간 등등. 왜 우리 민족은 솟대를 세웠을까?  몽촌토성을 복원할 때 나무로 깎은 새가  발굴되었다. 새 가운데에 장대를 끼운 구멍이 뚫려 있어  한눈에 솟대였음을 말해주었다.  울주의 천전리 암각화를 유심히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대 위의 새' 가 날카로운 철끝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무엇보다 대전 근교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의기에는 새 모양의 장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한편에서는  따비로 농사짓고 한쪽에서는  두 마리의 새가 장대 위에 앉아 있다. 선사 및  고대사회에서의 솟대문화를 밝혀주는 유력한 증거물들이 아닐 수 없다.  하늘로 향한 인간의 외경심은 대개 장대나 기둥, 당수나무와 연결된다. 단군신화에도 신단과 신수가 결합된  신단수가 있다. 즉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통로로서 나무가 기능하였다.  장대를 세워 신을 맞이하는 풍습은 후대의 문헌에도  자주 등장한다. <동국세시기> 2월조의, "제주도 풍속에 2월 초하룻날 귀덕, 금령 등지에서는 장대  열두개를 세워놓고 신을 맞이해서 이에 제사를 지낸다" 는 기록도 이들 장대가 지닌 하늘과 땅의 통로 역할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 문헌과 유물상의 새와 오늘날의 현존 솟대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 나의 답변은 이러하다.  우리 민족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새 상징'  이 이어져 솟대문화를 꽃피우다가, 조선 후기 마을공동체문화의 발흥과 더불어 새롭게 재생의 꽃을 피웠다.  솟대 전문가인 이필영 교수의 견해도 이와 같다.  넓은 개념으로 볼 때, 솟대나 소도나  독같은 입간(장대) 신앙이다. 실제로 선사 및 고대사회의 북아시아 솟대는 모두 발생기원과 그 기능상의 일치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솟대는 층위별로 계단이 나뉘어져  있고, 샤먼의 제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변별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솟대는 바로 마을공동체의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과 발생기원을  지닌 후대의 시대적 산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는 온갖 철새가 지나가는 징검다리다.  그들 철새가 마을로 날아들어 보금자리를 틀며 텃새가 되었다. 새는 선사  및 고대사회에서 마을 풍요의 상징물이다.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비를 몰아주는 농경의 수호신인 것이다.  우리나라 솟대의 새는 오리, 갈매기, 기러기, 따오기, 해오라기, 왜가리, 까마귀 등 여러 가지이다. 거의 대부분이 물새이자 철새다. 그 대표격은 오리다.  오리는 물을 상징한다. 농사짓는 데 물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수경농업지대인 우리나라의 경우 물은 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 현존 솟대가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쌀농사지대인  남부지역에 더욱 밀집되어 세워진 이유도 그 탓이다. 오리를 짐대에  올라앉게 하여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새는 솟대에서만 있는 것일까. 새는 늘 날아다녔다. 한민족의 생활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날아다니며 흔적을 남겼다. 하늘에서 새를 통하여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풍물패의 농기 끝에 매단 꿩장목을 무심코 지나친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곧 새의 흔적을 보게 된다.  풍물패는 농기를 돌면서 농기고사를 올려 농신을 받는다. 마을굿패가 들고 다니는 서낭기 장대 끝에도 꿩장목을  달았다. 은산별신제에서는 농기를 앞세우고 꿩장목에 방울을 달아 방울울림으로 신의 강림을 알린다. 새가 늘 신과 인간, 혹은 하늘과 땅의 중간 지점에 자리잡아 왔다는 증거물이다.

   

나무솟대와 돌솟대, 공동체문화의 표징
  조선 후기는 가히 봇물처럼 마을공동체문화가 꽃핀 시대이다.  솟대문화도 공동체문화의 하나로  재등장하였다.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웠다. 그밖에도 배가 떠나가는 행주형 지세의 마을에 돝대를 나타내기 위하여 풍수상의 목적으로 세우거나, 장원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는 경우도 있다.  변산반도가 자리잡고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내요리 돌모산(석제리마을)에는 논바닥에 오리당산이 서 있다. 돌기둥 위에 서북쪽을 향한 오리가 올려져 있는  당산이다. 이를  마을에서는 진대하나씨(짐대)라고  부르는 바, 행주형 솟대의 대펴적 에이다.  솟대 중에는 심지어 불을 끄는 화재막이  솟대도 있다. 전라도 고창의 신림면 무림리 임리마을에 가면, 마을 입구 모정옆에 화재막이 솟대를 볼 수 있다. 마을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부안면의 화산봉으로부터 오는 재앙과 화재를 막기 위하여 오리를 깎아 솟대를 세웠다고 한다. 오리는  물을 상징하므로 물로 불을 예방하려는 수극금의 뜻에서이다. 대개 이지역에서  서쪽을 바라보느 ㄴ마을들은 화재막이 솟대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솟대는 마을 입구에 홀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장승, 선돌, 탑, 신목 등과 함께 세워져 마을의  하당신 또는 상당신이나  주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타 신앙 대상물과 함께  나타나는 복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장승과 솟대가 같이 공존하는  경우가 가장 보편적이다.  대개 솟대는 하위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만한 연구가 축적되는 데도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남창 선생의 개척자적인 연구가 있은 뒤로, 역사민속학자 이필영 같은 연구자들이 솟대문화의 성격을 속속 밝혀냈다.  대개의 솟대는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몇 해 지나면 스러진다. 그러한 탓에 조선 후기의 나무솟대는 증거물을 남기지 못했다. 또한 연대측정이 모호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결정적인 증거물을 하나 찾았다. 변산반도 부안에 가면 동문안과 서문안 당산이 있고 돌솟대가 서 있다. 서문안 돌솟대에는 숙종  15년(1689년)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돌솟대를 만들고 연대를 아로새겨준 장인에게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명문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후기에 열풍처럼 불었던 '민중예술운동(?)' 의 산물로 보여진다. 서문안  당산의 명문은 현존 솟대이 조선후기설을 증명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물이 아닐  수 없다. 돌솟대가 생성시기의 수수께끼를 풀어 준 셈이다.
  새는 절에도 들어가 앉았으며, 거기에 또한 증거물을 남겼다.  고성땅 통일전망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개 건봉산의 명찰  건봉사를 들렀다 왔으리라. 동부전선 휴전선 근처의 고즈넉한 건봉사를  찾아들면, 근세의 명화가 김규진의 글씨가 걸려 있는 불이문을 통과하게 된다. 불이문을 지나자마자 언덕배기에 사각진 돌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위에 새가 않아 있다.
  불기 2955년 무진.  편년이 뚜렷하다. 옛 불기법으로 따져보니 1928년의  일이다. 숙종조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과 200년 사이에 솟대문화가 정착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가 아닐까. 이 돌솟대는 민간에 널리 퍼진 솟대문화가 사찰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시켜 준다.  솟대가 조선 후기에 널리 퍼졌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물은 유랑예인집단인 솟대쟁이패다. 놀이판 한가운데에  솟대와 같은 큰  장대를 반듯이 세우고 줄을 늘어뜨려서 갖가지 재주를 부린 데서  솟대쟁이패란 이름이 붙었다. 이 패거리는 곡예를 위주로 했으니, 서커스의 원조격이다.  주요 레퍼토리인 솟대타기는 높은 장대에 매단 평행봉 넓이의 두 가닥 줄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두손걷기, 한손걷기, 고물묻히기 따위의, 묘기를 보이는  것이었다. 당시 대중의 사랑을 받던 예인집단 이름에 솟대가 붙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또한 조선 후기에 솟대가 보편적이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아닐까.
   

 솟대를 우리의 상징물로

  이들 솟대는 어떻게 세워질까. 솟대는 신성한  것이기에 솟대를 깎을 때 뽑힌 제관은 목욕제계하고 미리 점지해 둔 나무  중에서 잘 선정하여 베어낸다. 제관은 나무를 자르기 전에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나무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입조심을 해야 하며 일단 마당으로 옮겨놓고도 정성을 다해 깎아야 한다. 껍질을 벗기고 그냥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먹으로 무늬를 그리기도 한다.  새를 깎는 방식도 가지가지라서 정확하게 새 모양을 내기도 하고 비슷하게 생긴 나뭇가지로 흉내만 내기도  한다. 대나무를 잘게  갈라서 깃털로 달아주기도 한다. 때로는 입에 물고기 조각을 물게 하여 풍농을 기원하기도 한다. 새를 조각하는 소박한 손길은 그 자체가 단순 질박한 농민적 조형예술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셈이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금기를 행하고 짚을 추렴한다. 줄을 꼬아 암줄과 숫줄로 만든다.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믿음은 동일하다. 그리고 줄다리기가 끝난 줄로 깎아 세운 솟대를 겹겹이 감아둔다. '솟대에 옷 입힌다' 라고 하는 이 의례는 설빔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솟대는 다양하게 모셔진다. 강원도 강릉시 안목에는 진또배기 서낭이 서 있다.  성황님 예단이라고 하여 흰 종이를 접어서 실로  매어둔다. 진도군 군내면  세등리에는 솟대의 정상부에 소의 턱뼈를 걸어두며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에서는 솟대  밑에 돼지 아가리뼈를 묻어두기도 한다.  몇 해 전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연구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린 일이 있다. '우리나라의 상징물로 무엇을 꼽겠는가?' 장승, 솟대, 초가, 한복, 떡문화......  백가쟁명으로 견해가 제출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솟대를 우리나라의 상징물로 꼽자고 동그라미를 쳤다.  상징물이 되자면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데, 위에서  예로 든 것들은 대체로 보편성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지나치게  종류가 복잡해도 조형물로 상징화하기 어렵다. 장승이 그렇다. 말이 장승이지 돌하루방, 벅수 등 지역적인 특성도 존재하고, 돌장승과 나무장승의 차별성도  있다. 그런 면에서 솟대는  긴 장대에 새가 올라 앉은 상징성  하나만으로 단순화가 가능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소견일 뿐이지만.  어떤 것이 우리의 상징물로 되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조금은 북방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훨훨 새가 날아서 만주벌판 광개토대왕비 위에도 앉고, 연해주의 옛  발해땅까지 날아가서 '발해를 꿈꾸며'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 분단의 철조망이 가로막힌 처지에  멀리 나는 새의 비상을 통해서라도 비원의 꿈을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북방새 찌르레기를 통해서나마 남북의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던 원병오(조류학자) 선생의 집안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금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늘  꿋꿋하게 마을을 지켜주는  솟대. 해가 바뀌면 새로운 솟대가 세워져 임무를 교대한다. 일 년 동안의 고단한 짐을 내려놓고 멀리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렸을 적, 문설주에 기대 서서 저녁노을을 수놓으면서 이동하는 철새떼를 구경하던 추억이 새롭다. 저  새들은 어디로 갔다가,  언제 돌아오는 것일까. 바로 그 새떼들이 우리의 나무장대 위에 올라앉았다.  그 새들에게서 민족의 삶을 배우려는 우리들의 화두풀이가 얼마나 신명나는 일인가.

     

서낭당이냐 성황당이냐
   아침에 판교원을 떠나    남으로 구성현 가는데
   길 옆에 오래된 성황당   숲은 어이 그리 무성하뇨

  예로부터 전하기를  저 숲에 귀신이 있다 하면서
  오가는 길손들  저저마다 복받고자 하더라
  지전을 나뭇가지에   시새워 걸어놓고
  숲속 성황당 향해   정성으로 비는 말

  앞길 가는데   만사형통 하옵시여
  말은 부디 등창나지 말고  말발굽 탈도 전혀 없기를
  조선시대 선조조와 광해군조에  살다간 석주 권필(1569  ~ 1612)의  시 <성황부>의 일부분이다.
  그는 관념론과 숙명론에 반대한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성황당에  대해서도 그 미신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임제의 시대에도 '성황당' 이  있어 길가는 길손들이 지킴이로  모셔졌음을 이 시에서 알게 된다. 길가에 위치했다는  사실, 숲으로 이루어졌으며 신목이 있고, 지전을 걸어두었으며, 오가는 길손들이 무언가 소원을 빌면서 모셨다는 사실 등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서낭당' 과 일치한다. 그러나 임제는 분명 '성황당' 이라 썼다.  조선 초기로 올라가 <시용향악보>에는  성황반이란 향악곡명이 등장한다. 민간신앙인 서낭신앙을 기반으로 한 무가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노랫말도 '성황'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황의 본적은 중국
  성황의 '호적초본' 을 떼어보면, 본적은 틀림없는 중국땅.  성황의 원뜻은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인  해자에서 비롯된다. 성지의 신을 성읍의 수호신으로 믿게 된 것이 성황이다.  원래 성황은 국가나 고을의 방어시설에 대한 단순한 명칭이었을 뿐이다. 중국의 성황신앙은 일찍이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어 당과 송을 거쳐 명나라에 와서는 국가적으로 널리 권장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문종조에 성황신앙이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로부터 '성황사' 는  국조오례의의 중사로서  간주되어 국가의례로  모셔졌다. 조선왕조<태조실록>에는 이렇게 이른다(원년 임신 8월조).  모든 신묘 및 모든 군의 성황은 나라에서 제사드리며, 다만 모주, 모군의 성황신은 위판을 설치해서 각각 그곳 수령이 봄, 가을로 제사를 행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 성황사만 336개에 이를 정도였는데 이는 조선 전기 중앙집권 강화의 한 시책으로 재정비한 탓이다. 이런 이유로 각 지방마다 성황사가 보급되며, 인물을 봉인하기 시작했다.
  가령, 전라도 순천지역의 <강남악부>에  수록된 성황은 그야말로 '성황신'  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되는 성황신을 말하지만.
  김별가는 뛰어난 사람이네.  살아서 평양의 군장이 되지는 못했어도  죽어서 성황신이 되었다네.
  신의 음덕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보살펴주시니,  대대로 문관과 무관에서 어진 신하가 많구나.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진례산이 높고 높아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는 것을.  지금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드린다네.
  한양은 물론이고 읍치마다 여단. 사직단. 성황사를 두었으니, 중앙정권과 지방토호들과의 대립관게를 잘 암시해준다.  김갑동 교수(원광대)는 고려  초기에 각 지방의 성황사가 국가가 아닌 지방세력들에 의하여 건립된  것은 자신들의 조상을 성황신으로 배향함으로써 그 지역의 지배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성황신이 된  김별가도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성황당은 중국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의 중앙 및 지방권력이 체제 유지를 위해 보급한 관제적인 신앙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임제 권필이 노래했던 성황당은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서낭당과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황당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강남악부>의  성황당은 전형적인 국가적 성황당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똑같이 성황당이라고 기술했지만 그 의미는 두 가지란 말인가. 사실이 그러했다.  하나는 국가적인 성황체계요,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사' 라 부르던 것이다.
   

 서낭당의 노래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어느 봄날, MBC의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를 찍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밭치리에 갔던 적이 있다. 밭치리(일명 전치곡)에는 장승과 솟대, 서낭당의 전형적인 모습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예전에 한양가는 길목이었다. 마을 어귀에 서울  300리, 춘천 60리, 홍천  40리, 동산 15리와 같은 이정표가 씌어진 장승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따오기, 혹은 기러기라 부르는 솟대가 우뚝 솟아 있다.  마을 중심에는 작은 기와집이  하나 서 있으니  그것이 밭치리의 서낭당이다. 마을 뒷산을 가파르게 올라가면 지금은 죽은 나무지만 500년  되었다는 매우 큰 서낭나무가 있다. 즉 이 마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목을  장승과 솟대가 막고, 뒤쪽으로 빠지는 산길은 서낭목이 막으며,  마을 가운데의 서낭당이 마을전체를 관장하는 그런 형국이다.  밭치리에서는 온전히 '서낭당' 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드러나듯, 서낭당은 주로 동구나 고갯길에 자리잡거나 돌무더기, 서낭목, 서낭당집 따위와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다. 또한 장승. 솟대.  수구맥이. 홍수맥이탑. 수살 같은 수호신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복합신앙적 양상도 보여준다.  서해안을 찾아가면 마을의 안녕과 어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서낭당이 있다. 충남 서천군 도둔리 각시당도 그중의 하나이다. 각시란 '각시서낭' 을 말하며 서낭이 좋아할 만한 화려한 물색(옷감), 바느질  도구, 심지어 화장품을 제물로 바친다. 시시때때로 새옷을 갈아입혀 단장해 주기도 한다. 앞에서 나왔던 삼척의 '해랑당' 도 서낭당이다.  이렇게 서낭당은 분명 성황당과 달랐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는 민간의 서낭당을 성황당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강원도  삼척지방에 가면 묵은 해가 새해로 바뀌는 자정에 '성황당제' 를 올리고 있는데, 신체로는 철마로 된 '마서낭'  을 모시고 있다. 주민들 말로는  '성황' 님이 왔다가  그 말들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마을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서낭과 성황이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성황당'  항목을 펼쳐보았다. 성황당 ->서낭당 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항목 '서낭당' 에서 찾으라는 말일 터이고, 양자는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서낭당과 성황당이 두루뭉수리 같이 쓰이고 있을까. 같은 마을신앙인데도 하나는 '서낭' 이고,  다른 하나는 '성황' 인 까닭은  무엇인가. 정비석의 소설 제목에는 '성황당' 이라 했고,  유행가 가사에는 '서낭당' 고갯목이라 한다. 이같은 혼선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강의시간마다 항상 이렇게 정리해준다.  성황은 두 가지 '기능' 을 지닌다. 하나는 국가적인  성황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민간적인 '음사' 를 의미한다. (둘은 이름은 같고, 의미는 다르다.)  민간에서 '음사' 는 두 가지  '이름' 을 지닌다. 하나는  성황이요, 다른 하나는 서낭이다. (둘은 이름이 다르고, 의미는 같다.)  이 글을 보면 대개 알쏭달쏭하게 생각한다.  위의 가로 부분을 유심히 읽어주길 부탁드린다. 그러나, 갸우뚱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양자는 너무도 자주 혼동하여 쓰여졌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성황당이야 분명히  설명이 되는데, 문제는 민간의 서낭당, 혹은 성황당이다.
   

성황과 서낭은 하나?
  아무래도 논의를 앞으로 되돌려야만 할 것  같다. 앞에서 각 지방세력들이 성황사를 앞다투어 세웠다고 설명하였다. 각  지방의 성황사는 지방관아의 고유한 행사가 되어 '관민 합동' 으로 이루어졌다. <동국세시기> 12월조를 보자.  고성 풍속에 군의 사당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관에서 제사를 지낸다. 비단으로 신의 탈을 만들어 사당에 안치해 둔다. 12월 20일 이후에 그 신이 오른 읍사람이 그 탈을 쓰고 춤추면서 관아의 안과 고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논다. 그러면 집집에서는 그 신을 맞아서 즐긴다. 정월 보름전에 그 신을 사당에 돌려보낸다. 이 풍속이 해마다의 상례로 되었다. 이는 대체로 나례신의 종류이다.  이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는데,  단오날 성황사에서 백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의 경우, 지방관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이 드러난다. 기록을 하나 더 들추어보자. <임영지> 풍속조에 이렇게 적혀져 있다.  읍에는 각기 성황당이 있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강릉만은 제사를 지내는 일 외에 유달리 이상스런 일이 있다. 매년 4월 15일이면 이곳 강릉의 시임호장은 무격을 거느리고 대관령 위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신당이 한 칸 있다. 호장은 신당에 나아가  고유하고 무격으로 하여금  나무 사이에서 신령을 구하도록 한다. 나무 하나에 광풍이 불어 나뭇잎이 스스로  흔들리면 '신령이 내렸다' 고 하고 나뭇가지 한 개를 자른다. 호장은 건장한  이로 하여금 받들고 가게 하고, 이것을 일컬어 국사신의 행차라고 한다.  다시 설명할 것도 없이 강릉 단오제의  옛 기록이다. 읍마다 성황신을 모시면서 왜 국사신을 별도로 모셔올까. 민간에서  오랜 세월 모셔온 무속적인 국사신을 단오제에 모심으로써 민간신앙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를 의도하였던 결과다. 아울러 민간에서 산신으로 모셔오던 대관렬의 국사신은 어느덧 국사성황으로 바뀌게 된다.  국가적으로 민간신앙을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포섭하는 동안에  전혀 반대적인 현상도 일어난다. 대략 17 ~ 18세기가 되면서 성황당이 국가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민간적 성황사로 다수 바뀌었던  것이다. 서울시립박물관 정승모 전문위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토호세력이 주도하고 민간인이 참여함으로써 중앙사족들에 의해  음사로 몰린 성황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재지사족이  향촌의 주도권을 잡은 17  ~ 18세기에 이르면 폐기되거나 유명무실해진다. 그 대신 이것은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촌락이 성장. 확대되어 가면서 촌락 단위의 행사로 주변화되어  갔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잦은 재해, 특히 전염병의 발생은 이의 확산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는 읍성 밖으로 밀려난 외방성황을 예로 들고 있다. 나주의 성황당이 그 예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국가적 성황신앙이 밀려나면서 외방성황이 되어, 결과적으로 '성황사' 가 민간화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앞에서 임제 권필이  부른 '성황당' 은 '외방성황'  따위와는 무관하다. '민간화'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민간적' 이다. 이같은 혼선은 두가지로 추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서낭당이란 말을 한자로  쓰기가 불가능하므로 한자를  빌려와 편의상 성황으로 표기하였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민간에 보편적으로 서낭이란 말이 있었고 서낭신앙이 실제로 '성황신앙' 과 무관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즉, 서낭을 성황과 분리하였다.  명칭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다양하게 말하였다. 하나의 모음집으로 묶어보자.
  - 조선후기 이옥의 소설 <최생원전> :  이른바 선왕이란 것은 성황의 그릇된 말이다.
  - 손진태 : 선왕당은 성황당의 화음인 것이 거의 명백하고, 한학에  소양이 있는 자 이외의 일반민중은 어느 것이나 선왕당이라고 한다.
  - 이능화의 <조선무속고> : 팔도의 고갯마루에 있는 선왕당은 성황의 잘못된 말이다.
  - 김태곤의 <한국무속연구> : 산신을 나타내는 산왕이 변화하여 산왕  -> 선왕 -> 서낭으로 변화되었다.
  선왕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성황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다만 김태곤 교수만 음운 변화로 유추한 서낭의 기원에 대한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표현상의 차별로 보아 '성황' 과  '성왕' 의 구별이 모호하지만 '성황  -> 선왕 -> 서낭' 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우리 고유의 생활과 풍습을 중국의 것에 기초해서만 바라보려는 모화적인 시각이 배어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민중들 특유의 생존방식으로 국가에서 강조하는 성황이란 이름을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민중들은 음사로  비판되는 서낭당을 수호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으로 명칭과 내용을 구별하지  않았을까. 성황당이란 명칭은 빌려오되, 제의 자체에서 무속적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셈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서낭제에는 무속적인 양식이  기본으로 되어 있으면서  반면에 유교적 양식이 가미되어 나타난다. 하나의 타협책인 것인데, 다른 민간의 마을굿들이 걸어온 길을 서낭당도 예외없이 거쳐온 것이다.나는, 서낭은 이전부터 별도로 존속하여 왔던 신앙 풍습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성황에서 취음을 하였을 뿐이다. 원래는 순수 민간신앙이었던 대관령 국사신앙이 후대의 성황으로 바뀐 것에서 하나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결정적 이유를 또 하나 들라하면, 서낭당의 친족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 서낭당은 복잡한 양식으로 전해져  왔다. 앞에서의 마서낭과 각시서낭당이 그렇고 다른 신앙과 결합된 국사서낭당, 사신서낭당, 짐대서낭당, 골매기서낭당 등이 그렇다.  동해안을 제외하고 남해안과 서해안에 가면 곳곳에 배서낭을 모신다. 배를 새로 만들어 ㅁ루에 내리는 진수식을 행할 때나 당제. 출어시에 배에 제물을 차려놓고 뱃고사를 올린다. 배서낭은 당나무나  돌무더기와 관련이 없다. 또한 '배성황' 이란 말도 없다. 굳이 한문식으로 풀자면 '배의 왕' 이란 뜻인 선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있다. 어쟀거나 배서낭은 서낭이  매우 원초적이며 뿌리 깊은 이름으로서 성황과 무관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존재양상이 복잡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 민간의 서낭당이야말로 원래 토속인 것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것들은 '서낭' 이든 '성황' 이든 그 이름과 관계없이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양자는 변별성을  상실하여 부르는 이에  따라서 편의대로 불리웠다. 그러다 보니 성황과 서낭이  혼선되어 쓰였던 것이다. 이렇듯, 성황과 서낭 두 가지 말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서낭의 돌멩이는 전투용?
  그렇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문헌에 나타나는 '서낭당' 훨씬 이전 시기에 돌을 쌓아 경계를 표한다거나 마을의 길목에 돌을 쌓아두어 전투용으로 대비하였을 돌무더기들이 신앙적 존재로 모셔지기까지의 기원에 관한 문제다.  서낭당은 주로 고갯목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강원도의 경우에는 마을의 주신이 되어 마을 복판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지만, 고갯목에 자리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가 서낭당고개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왜 하필 서낭당고개일까.  여기서도 하나의 추론이 필요하다. 고갯목은 널리 시야가 펼쳐지는 전망 좋은 곳이다. 유사시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려 했던 데서 서낭당고개의 전통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굳이 행주치마 전설을 들지 않더라도, 돌멩이는  민중들의 결정적인 무기였다. 고구려시대에는 아예 국왕이 친히 참석하여  돌싸움을 독려하였다. 평상시의 돌싸움 연습이 유사시의 실제적인 돌싸움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아예 척석꾼이라고 하여 돌팔매를 잘 하는 장정을 뽑아 별도의 특수부대를 조직하기도 했을 정도다. 나중에 석전이 민간화되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돌싸움으로 변화하였고, 20세기 초반까지도 널리 이어졌다.  서낭당의 돌무더기는 마을을 지켜주는 결정적인  무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연을 지녔기 때문에 신성시된 것이 아닐까. 지금도 나그네가 서낭당고개를 지나치다가 돌을 던져놓고 가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선조들의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우리의 마을신앙에는  탑신앙이 상당히 많거니와, 돌을 쌓아두는 풍습은 보편적인 민간신앙일  뿐이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서낭당의 돌맹이는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탑의 비교적 큰 돌과는 다르다. 이른바 '짱돌' 이라고 부르는 던지기에 알맞은  돌이다. 민중의 전투적인 풍습에서 유래하였다가 전투의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단순한 서낭 풍습으로 잔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돌무더기를 굳이 몽골의 오보에  견주는 견해도 다수  있다. 그러나 서낭당이 몽골의 오보에서 영향을 받은 전래품이라는 견해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망망대해같이 펼쳐진 초원에서 오보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나그네는 오보를 목표물 삼아 방향을 잡았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돌을 쌓아두었다가 나중에는 깃발도세우게 되었다. 물론 깃발에는 오색천을 내걸었다. 즉 몽골의 오보는 경계표시의 상징물인지라 우리의 서낭과는 많이 다르다. 다만, 인정해야 할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 시베리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돌무더기 풍습이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다는 문화의 상대적 친연성일 것이다.  문화적 친연성이 돋보이는 것은 단연 물색이 아닐까. 물색이란 나무에 갖가지 천을 걸어두는 풍습이다. 시베리아나 몽골, 알타이 지방에 가면  나무에 천을 걸어둔다. 우리의 경우에도 서낭당에 천을  걸어 둔다. 그런데, 육지부에서 당산나무에 천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낭당에는 천을  거는데, 당산나무에는 천을 걸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가면 그 의문은 풀린다.  제주도의 신목에는 늘 물색을 바친다. 그것도 매우 화려한 물색을 엄청난 양으로 걸어둔다.  서낭목이 아닌 경우에도 물색을 걸어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주변의 나무에  물색을 걸어주던 풍습이 서낭당이나 제주도의 물색에 잔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시베리아에 가면 '아마리우스' 라고 하여  거대한 나무에 주렁주렁 물색을 걸어둔다. 어쨌든, 서낭당에 바치는 화려한 물색은  동북아시아 지역과의 문화적 친연성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동탁 조지훈 시인을 생각하며
  나는 '서낭' 만 또올리면  늘 동탁 조지훈  시인이 생각난다.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그 분이 왜 훗날 시인말고 민족문화 연구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까.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 어렸을 적 한학을 공부했고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학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를 탐독하였다. 1947년 고려대 문과대 교수가 되었고, 만년에는 시쓰기보다 고려
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으로 '한국문화대계'  를 기획하기도 했다.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한국민속학자료집성', '한국민속학개설', '한국민속학사전'  등의 발간을 추진하였으나 1968년 사망으로 말미암아 미완의 사업으로 남았다.  그는 역사학과 민속학을 자신의  학문적 기둥으로 삼았다.  그 역시 서낭당을 주목하였다. <서낭 간고>, <주석단. 신수.  당집신앙연구>따위를 썼음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한국사상사의 기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민중들은 서낭당이라 부르지 성황당이라곤 하지  않는다. 성황은 송나라 성지의 신으로 그 수호신적 의의가 서낭당과 상통되어 후세에 부회되었을 따름이다.  성황과 서낭이 혼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동탁 조지훈 시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우리 문화사에서 이같이 뛰어난 시인이 민족문화에 깊은 애정을 보여준 데 대하여 늘 감사드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서낭이냐  성황이냐는 질문법에는 단순한 용어 차이를 벗어나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여  그 기원과 변천과정에 관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겨져 있다. 그 광대들은 어디로 갔을까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방년 21세, 꽃다운 나이.  안성 고을의 이름난 여사당 바우덕이 젊디젊은 나이에 죽었다. 미색이 아름다워 양귀비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그녀였지만 죽음의  신만은 뿌리칠 수 없었는가 보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안성 청룡사 개울에 뿌렸다.  뭇남자들치고 바우덕이 한 번 만나는 게  소원 아닌 자가 없었다. 바우덕이는 소고에 특히 능했다. 남사당패는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안성 원육덕패, 이원보패 같은 패거리 이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그 중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던 청룡사 사당하면 늘 떠오르는 인물이 바우덕이다.  그의 남편 역시 남사당이었다. 바우덕이가 죽을 당시, 그의  남편은 나이 마흔두 살의 장년. 떠꺼머리 수총각으로 이십 년 세월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얻은 부인이었다. 어린 아내가 죽자 그는 매일같이 바우덕이와 놀던  바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아내 때문에 실성했다고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그는 바위에 올라가서는 나발을 불고 장고를 치거나, 때로는 노래를 불렀고 울기도  했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다가 어느날 그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가 올라섰던 바위를 나팔을 불었던  바위라는 뜻으로 나팔바위(혹자는 울바위, 떵뚱바위라고도 부름)라 불렀다. 바우덕이는 100여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으나 사람들이 그를 빗대어 지은 노래만큼은  지금도 안성땅에 전해지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오늘날에는 한갓 작은 암자에  불과한 청룡사를 찾았다.  절에서 받은 신표를 들고 수많은 '바우덕이' 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안성장터는 물론이고 전국을 떠돌면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본산. 한겨울에는 그들이 돌아와 시끌벅적했을 그곳 청룡사.  정처없이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동가식 서가숙하며 떠돌던 사당패가 겨울이면 되돌아와 청룡사에서 아기도 낳고 연희도 가르치고  휴식도 취하면서 이듬해 봄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래서 청룡사는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빨리 들을 수 있던 '정보통신의 메카' 이기도 했고, 광대들의 고달픈  사연들이 맴돌다 쉬는 '성지' 이기도 했다.  청룡사 마당에 서면 그 옛날 살판, 어름판을  놀고 버나(접시돌리기)하던 장소가 여긴가 하여 늘 감회가 새롭다. 나는  여러 번 사람들을 이끌고 청룡사를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쇠락한 절 풍경에 실망하는 표정인데, 정작 이곳이 한국불교사의 거목 나옹화상의 주석처였음을 모르는  탓이다. 나는 청룡사를 찾는 이들에게 서슴없이 그곳을 '광대들의 메카' 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이즈, 이경규, 신은경, 안성기,  서태지, 김원준, 김건모......  그들에게 반드시 한 번쯤은 찾아가야 할 '순례 메카' 로 권하고 싶다. 하다못해 탤런트, 영화배우,가수, 코미디언 등의 협회에서 나서서 기념비라도 세워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와 브레히트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떠돌면서 춤과 노래, 곡예를 무기 삼아 살아가던 무리들. 이름하여 유랑예인집단. 상세한 자료가 변변치 않을뿐더러, 일제 식민지가 시작되면서 급격히 단절되어  그들의 실체 규명이  어렵다. 사당패,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초란이패, 걸립패, 중매구패, 광대패, 굿중패, 각설이패, 얘기장사, 남사당패 등 그 이름은 여러 가지이나 유랑예인집단의 구체적인 실체는 제대로 드러나질 않는다. 천민집단이었던 이들에 대해서  문자쓰는 양반들이 기록을 남겨줄 리 없었다. 그러나 예인집단이야말로 어느 시대에서나 서민들과 함께 애환을 나눠온 당대의 '대중스타' 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각광받는 스타들의 선조격이 아니겠는가.  사실 장르 구분과 연예인  범주가 세분화된 현대와,  예술. 놀이. 연예 자체가 미분화된 전통시대의 예인 개념을 그대로  일치시키기는 쉽지 않다. 전통사회에는 예인집단이 세습적인  천민집단으로 존재했다면,  오늘날에는 전 계층적으로 연예인 공급이 이루어질뿐더러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기는 해도 민중속에서 함께 살아온 예인의 세계관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법. 더욱이 예능훈련, 레퍼토리, 사회적 기능 따위 등을 비교하면 유랑예인집단은 오히려 오늘의 스타들보다도 더 전문적이고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나는 유랑예인을 생각하면 늘 코메디아  델라르테와 브레히트가 떠오른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 완성되기까지,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나름의 역할을 한 것 같다. 브레히트는 그의  대펴적인 서사연극론 <반  아리스토텔레스극에 대하여>에서 서사극의 기본 모델로 '가두장면' 을 제시한다. 자연스럽고 초보적인 서사극의 대표적 예로서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나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한 사건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도 가두극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7 ~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의 연극사에 영향을 준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어원 그대로 '희극' 과 '기술' 의 결합이다. 이 집단에  속하는 자들은 배타적 집단을 형성,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거기서 출생한 아이는  어려서부터 저절로 부모들 품에서 연기술을 배웠다.  유럽의 길거리와 광장을 떠돌던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예술이야  말로 어쩌면 현대 연극이 상실한 가장 매력적인 개방적 요소를 두루 지닌  우수한 연극 전통일 것이다. 브레히트가 이들 가두극 전통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창의적인 서사극 전통을 재발견하였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배우의 풍부한 상상력, 발랄한 기지, 즉흥적인 재능, 말과 동작의 세련된 구사와 발표력은 바로  극의 생명이었다. 이들의 기발한 극술과 가면, 의상들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페라. 발레. 묵극. 인형극. 심지어는 그림자 놀이나 서커스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유랑예인들도 집단 내 결혼을 많이 했으며, 어려서부터 무동을 타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커서 기예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갖춘 전문적 예술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브레히트 같은 혜안을 가진 '큰 광대' 를 못만난 탓일까.  전통예술에서 현대예술로 넘어오면서 그만 족적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늘 만나는 무대예술인들에게 이렇게  '한탄조' 로 이야기하곤 한다. 조선 후기의 풍부한 유랑예인 전통이 고스란히 현대로 이어졌더라면, 우리 예술의 심도가 얼마나 더 깊고 풍부해졌을까!  민족연극사, 민족음악사, 민족무용사, 심지어는 코미디언의  역사, 서커스의 역사, 매춘이나 남색의 역사에서도 유랑예인집단은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19세기 초 이들이 사라지자 그  빈 공간을 일본에서 들어온 대중오락물들이 차지한다. 민중들은 남사당패의 꼭두각시극에서 즐거움을  택하기보다, 축음기에서 들려오는 엔까소리에 열광했다. 아니 일제 당국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잃었던 한수산의 소설 <부초>가 떠오른다. 현대판 유랑집단인 곡마단의 애환이 잘 그려진 소설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개천가에 천막을 치고 사람을 불러모으던 곡마단의 나팔소리에 저마다  흥분하여 몰려가던 추억이 새롭다. 그러나 곡마단은 어디까지나 일제로부터 유입된  곡예이다. 곡마단이 민중의 애환이 서린 집단이기는 해도 서커스를 연출하던 솟대쟁이패 전통과는 무관하다.  일제시대를 풍미했던 곡마단,  신파극단, 해방  이후 전국을 누볐던  여성가극단...... 이들은 유랑예인집단이 사라진 틈새를 비집고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었다. 일제가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예인집단은 그힘을 잃고, 신식  악기와 신식 노래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북한이 교예를 발전시켜 유랑예술의 일맥이나마 이어가고 있음은 뜻깊게 생각된다. 교예는 북한사회에만  있는 독특한 예술형식이자 군중 오락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서구식 서커스가 퍼져 잇으나 유독 북한사회는 교예라는 명칭으로 글자 그대로 '교' 와 '예' 를 결합한 예술형식을 강조하고 있다. 훗날 통일시대의 남북문화 통합과정에서 되살렸음직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거사에서 사당으로
  조선 후기 유랑예인만이 연예인의 조상격은 아니다.  <삼국사기>, '악지' 에 전하는 오기(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의 다섯 재주), 고구려 수산리벽화에 등장하는 재주꾼,  후대로 내려와 고려시대의  괴뢰패(꼭두패), 또한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춤꾼,  악공 등 이 바로 그 원조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창우, 기생, 무당, 판소리꾼, 심지어 마을의 '아마추어' 적인 탈춤꾼,  풍물꾼도 포함된다. 특히 소학지희라는 말을 낳게 한 창우가 중요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봇물  터지듯 생겨난 유랑예인집단처럼  조직적 결집력과 전문성을 아우르면서 서민대중을 직접 상대했던 민중적인 연예인집단은 없었다. 왜 조선 후기에서야 이런 유랑예인집단이 급증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그같은 집단들이 없었을까.  아무래도 사당패가 가장 오래된 집단이니 사당패를 추적해보면  그 해답이 나올 성싶다. 사당패의 원래 명칭은  거사패였다. 언제, 어느 시기에,  어떤 이유로 명칭이 바뀌었을까.  불교에서는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불도를 닦는 재가의  비승비속 무리를 거사라 부른다. 반면에 속가에서 불교를 믿는 여자는 사당이라고 했다. 조선 전기 거사패 출현은 억불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승려와 절의 감축으로 인하여 재가에 떠도는 무리가 급속히 증가한 탓이다.  거사는 생업을 버리고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사주. 관상. 손금보기, 떠돌이 장사치 노릇을 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남녀가 한곳에 뒤섞여 징과 북을 울리며 안 하는 짓이 없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전신재  교수(한림대)는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아주 일목요연하게 거사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집단이다.  - 승려를 비롯하여 관리. 군인.  노비 등이 이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모두 조직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 서울 및 지방에 존재했다.
  - 생업을 버리고 부역도 회피했다.
  - 남녀가 함께 거처하여 남녀관계가 문란했다.
  - 사찰과 관련이 있다는 연화를 사칭하여 백성의 재물을 탈취했다.
  - 도성 안에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닌 '사' 를 짓고 불사를 거행했다.
  - 사기로 시장의 이익을 독점했다.
  - 사람들을 모아놓고 징과 북을 치며 가무를 했다.
  임진. 병자 양난이 끝나자 조선사회는 극도로 어수선해진다. 먹고 살기 힘들어 유랑민이 갑자기 급증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거  예인집단으로 편입된다. 더욱이 기근이 들거나 가렴주구를 일삼던  통치자들의 압제를 피해서  유랑민은 날마다 불어났다. 아이를 굶겨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광대들 뒤를 쫓아가게 해서 밥이라도 굶지 ㅇ낳게 하려는 게 당대의 세태였다.이제까지는 그런 대로 종교성을 지녔던 거사패들은 사당  무리와 함께 다니면서 본격적인 예인의 길로 나선다. 이때 명칭마저 사당패로 바꾸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 교수는 이들 종교세계의 인물들이  당시대적 특수한 사회 사정 때문에 성의 세계에서 속의 무리로 전락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사당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수많은 유랑예인 패거리 중에서 아무래도 가장 오래 된 집단은 사당일 것이다. 유독 사당이란 말이 조선 전기부터 등장할뿐더러, 다른  집단들이 보유한  레퍼토리가 사당패 연희로부터 분화된 것이 많은 탓이다. 사당패는 연예를 파는 사당(여자)과 일종의 '기둥서방' 역할을 하던 거사(남자)로 이루어졌다.  사당과 거사는 참으로 재미있는 관계였다. 마을을 돌아다닐 때, 거사는 사당을 등에 업고 다닐 정도로 대단히 소중히  다루며 세수마저도 거사가 해주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사당과 거사가 동침을 하지만, 객이 있으면 사당을 내놓고 거사가 하인 역할을 맡았다. 창녀촌에서 매춘을  하는 동안에 기둥서방이 망을 보는 꼴이었다.  사당패는 사당벅구춤, 산타령 같은 민요창,  줄타기(재담줄) 등을 중요 레퍼토리로 삼았다. 청룡사의 바우덕이가 가장 잘 놀던 춤도 법고를 들고 추는 사당벅구춤이었다. 그들은 춤과 노래와 재담이 어우러진 예능을 선보였다.  사당패는 고스란히 그대로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인 분화가 남사당패다. 남사당패는 조선후기에 느지막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거사패는  사당패로, 사당패는 남사당패로 전승. 분화되면서 그  맥을 이었다. 오늘날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는'문화재 보존정책' 에 힘입어 '무형문화재 남사당패' 로 명맥만 잇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레퍼토리, 또 하나의 '르네상스'
  우리는 조선 후기가 민간예술의 전성기라고  들어왔다. 그 구체적인 증거품으로 판소리, 탈춤, 민화 따위를  꼽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랑예인집단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면, 가히 연예예술의 '르네상스' 였음을 알 수 있다.  흥부전의 놀부가 박 타는 대목에는 사당, 거사, 각설이패, 초라니 따위가 쏟아져나온다. 변강쇠전에서는 장승을 베어다 불을 땐  이유로 장승 동티가 나자 옹녀가 초라니패 따위를 불러 시신을 떼어내려  한다. 이같이 조선 후기를 풍미한 판소리에서 유랑예인집단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이들 예인들이 시대적 총아였다는 증거간 된다.  유랑예인집단의 레퍼토리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방울던지기 따위의 요술
에서부터 고려시대의 꼭두각시극까지, 전승되는 모든 '기예' 가 종합되었다. 대략 풍물, 법고춤, 줄타기, 땅재주, 얼른(요술), 죽방울치기, 비나리,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 버나 따위를 망라했다. 물론 집단마다 특성에 따라  주력으로 삼는 레퍼토리가 달랐다. 오늘날로 치면 사물놀이, 서커스, 요술, 비나리(고사반), 노래, 춤, 악기연주 등에서 특정한 한두 가지 '주종목' 이 있었다. 오늘날 덤블링을 하면서 재주넘기와 노래. 춤. 악기 연주를 곁들이는 '만능가수' 를 보면 영락없이 조선시대의 유랑예인들을 보는 듯하다.  그러면 예인집단 몇 개만 추려서 그들의 중심 레퍼토리를 살펴보자. '기산풍속도첩' 의 그림으로 보아 솟대쟁이패는 서커스꾼으로  보인다. 솟대쟁이패는 높은 장대를 중심에 세우고 줄을 늘어뜨려  놓고 곡예를 선보였다. 땅재주(공중회전), 얼른(요술), 병신굿, 솟대타기(물구나무서기, 두손걷기, 한손걷기, 고물묻히기 등)를 보여주었다. 최영년은  <해동죽지>(1921년)에서 장대에서 춤을  춘다고 하여 무간장이라 하면서, '한들한들 추는 춤, 사지와  허리가 나긋나긋 열 길 되는 긴 장대 흔들리지도 않는다' 고 뛰어난 재주를 노래하였다.
  걸립패는 민간의 풍물굿패가 동네에서 걸립을  다닌 데서 비롯되었다. 애초에는 대동걸림으로 출발하였으되, 기량이 뛰어난  걸립패가 나오면서 차츰 이웃동네로 걸립을 나갔고, 종내는 전문적인 걸립패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유랑걸립패는 무엇보다 비나리를 잘했다.  걸립패와 관계 깊은 패로 중매구패가 있다. 글자 그대로 중이 매구를 치는 패거리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권  1을 보면, '승희를  구경함' 이란 시가  있다. '중의 무리 십수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둥둥 울리며,  때때로 마을 안을 들어와입으로 염불을 외며 발 구르고 춤추면서 속인의 이목을 현혹시켜 미곡을 요구하니, 족히 한 번의 웃음거리가 된다. 시 한수를 지었으니  대개 실상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왜 사찰에서 속가로 굿패를 내려보냈을까. 아니면, 직접 내려가지 않더라도 절의 신표를 주어 사당패와 공존을 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당시의 어려웠던 사찰 재정에서 찾을 수 있다. 탁발을 다니던 전통이 있는 터에, 아예 전문 광대를 고용하는 방식을 써서 사찰 운영은  물론이고, 불사에 필요한 자금을 구한 셈이다. 예인집단은 그들 나름대로 절의 '신용장'  을 들고 다닐 수 있어 걸립에 도움을 받았고, 비수기에는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예인집단에 각설이패를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여 거지를 예인집단에 넣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 '거지집단' 은 단순히 거지가 아니었다. 각설이의 구성진 장타령은 그 자체로 일품이었고, 조직적 대오를 갖추어 민가와 장터를 나다녔다. 각설이의 장타령은 당대 시대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고, 구성진 목구비로 신명을 돋구었다. 최근까지 전해지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는 식의 노랫말을 누구나 기억하리라.  예인집단에는 얘기장사도 있었다. 그들은 1인의 이야기꾼과 1 ~ 3인의 잽이가 당대 인기소설을 읽어주는 집단이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적인 직업 강담사가 존재했고, 우리의 경우는 이들 이야기꾼이 있었는데 판소리의 서사구조를 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예인집단들의 구체적 실상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사당패만큼은 비교적 많은 정보가 전해진다. 제일  늦게 시작된 패거리인 데다가 최근까지도 명맥을 이어온 탓이다.  탈춤의 본디 우리말인 덧뵈기,  줄다리기를 뜻하는 어름판, 곤두박질을 하는 살판, 접시를  돌리는 버나 따위가 기본종목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풍물굿은 기본이었다.  어느 시대나 예인의 생명은 높은 기량이다. 낯익은 각설이패 장타령조차 고도의 반복훈련에 의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공연단장격인 꼭두쇠, 기획의 곰뱅이쇠, 전문 연회자인 뜬쇠, 초입자인 삐리로 이루어진  남사당패 조직을 보면 바로 고난도의 예능훈련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기량연마와  레퍼토리 개발을 추구한 전문 연예인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연예인은  말 그대로 이들의 '직계자손' 인 셈이다.
   

 꽃값과 호모 섹슈얼의 원조
  사당패나 남사당패는 우리나라 성의 역사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이다. 최근까지 살았던 그들의 후예들이 쉬쉬하는 탓에  그 면모가 잘 드러나질 않지만, 매춘의 역사나 남색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사당패는 연희를 팔아서 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천민신분으로서 '팔 것'은 모두 팔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육체였다. 해우채란 말은 거기서 생겨났다. 사당은 거사와 부부관계를 맺고 의복, 화장품 기타 일체를 거사로부터 지급  받는 대신에 해우채는 몽땅  거사의 소득이 된다.  해우체란 말은 오늘날 매매춘에서 여자에게 주는 화대(혹은 꽃값)에 해당되는 말은데, '치마를 벗는다'는 해의채에서 비롯되었다. 거사는 사당을 업어 데려다주고 일이 끝나면 다시 업고 왔다. 공존공생의 삶 속에서, 흡사 오늘날의 창녀촌에서 기둥서방과 창녀가 그러하듯이 거사는  사당의 보호자이자 판매자였다. 그래서 양주별산 대놀이 애사당 북놀이에는 이런 노래도 전해지고 있다(일명 여사당자탄가).
    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이 내 손은 문고린가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네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네
    이 내 배는 나룻밴가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네
  이능화가 1926년에 슨 <조선해어화사>에서는, '여사당의  묘기가 절정에 이르게 됐을 때, 청중이 동전을 물고 '돈, 돈'소리를 내면 여사당이 가서 입으로 돈을 받으며 입 맞추는데 또한 묘기이다' 라고 하였다. '50년  전(대략 1875년) 본인이 어렸을 때, 직접 괴산에서 보았다'고까지 증언하고 있다.  한편, 남사당패는 남색사회였다. 그들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면 파트너를 정하였다. 개인적으로 기량을 전수받는 교육체계에서 파트너십은 중요했다. 암동모와 숫동모로 정해진 파트너십은 쉽게 남색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남사당은 농촌으로 공연을 나갔다가 여성을 맞아들이기에는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머슴 등 하층민의 남색 대상이 되어주기도 했으니, 그들의 성행위를 계간이라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호모 섹슈얼'이었다.  그들의 남색행위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양반이나 돈 있는 층은 기생첩을 끼고 살 정도였지만, 하층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그들의 억눌린 성적 배출구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남사당들은 그들 스스로의 성적인 문제를 남색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행동양태는 그들이 유랑
예인집단이라는 독특한 집단적 속성과 천민이라는  계급적, 사회적 속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여진다. 이 점은 근래에  상영된 중국 영화 '패왕별희' 에서도 드러나듯이 '경극패'에게도 있었던 남성예인집단만의 특이한 성문화라고 하겠다.
   

 한국 대중연예사의 한 페이지를 들추며
  유랑예인집단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 대중연예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  정신만큼은 연연히 이어지고 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을 한 번  들추어보라. 곳곳에 사당골이란 이름이 나올 것이다. 이들 지역이야 말로 사당패가 정착하였던 근거지였으니, 황해도 구월산 사당골, 강진 정수사 부근의 사당골 따위가 그것이다. 비록 사당은 사라졌어도 이름만은 마을명에 남기고 간 셈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물놀이패의 뿌리도 조선 후기 유랑연예인이 아닌가! 그들이 이루어내는 전문예인적인  풍물굿 가락이 바로 유량예인집단의 전문적 굿가락에 그대로 잇닿아 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이 조선 후기  유랑예인들과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기질 속에는 '유랑예인의 뜨거운 핏줄'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들 예인집단의 어제와 오늘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우리 대중문화의 겉과 속을 옳게 이해하는 첩경이 아니겠는가.

     

배꼽문화의 혁명, 혹은 구멍
   

 배꼽에서 어머니의 자궁을 생각하며
  배내웃음, 배내옷, 배냇냄세, 배냇니, 배내털, 배냇머리, 배냇짓... .
  배에 얽ㅎ힌 토박이말들이다. 누구든 국어사전을  펼치면 배로 시작되는 무수한 토박이말을 찾을 수 있다. 배에 얽힌  풍부한 어휘로 미루어 보아 우리 민족에게는 '배꼽문화'가 일찍부터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태어난 아기는 세상에서 처음 입는 옷인 배냇저고리를 입는다. '배내'는 바로 '배'를 말한다. 입을 벌려 소리없이 가볍게 웃는 모습을 '배식배식 웃는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놀던 '배냇짓', 아기를 임신하였다는 뜻인 '배슬리다', 혹은 '배임'이란 말, 이 모든 게 배꼽과 연결된다.  옛 사람들은 태교를 중시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예외없이 태몽을 꾸었으며, 때로는 배꼽을 보고서 태아를 점치기도 했다. 대충 다음 같은 속신이 전해진다.
  임부의 배꼽이 튀어나오면 딸, 들어가면 아들.  임부의 배꼽이 단단하면 딸, 물렁물렁하면 아들.
  아기의 태동이 심하면 아들, 얌전하면 딸.  아기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어서도 증거물은 남는다. 탯줄의 매듭을 자른 유일한 증거물인 배꼽만큼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일생 동안 남게 된다.  뱃속의 아이는 탯줄로 생명을 유지한다. 탯줄은 자궁으로 이어진다. 어둡고 비밀스런 자궁은 태초의 숨결을 머금고 신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궁의 숨결을 '태동'이라 불렀으며, 그래서 새로운 움직임을 '태동'이라 표현한다. 어머니는 아기가 발길질하는 태동을  통하여 새 생명의  출산을 예감했으며, 인류 역사도 늘 새로운 태동을 통하여 변화, 발전하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어머니의 자궁과  연결되었으며, 그들 자궁은 탯줄과 연결되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인류의 역사를  탯줄의 이어짐으로 풀이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배꼽은 바로 이 탯줄의 출구이다. 태어를 세상과 이어주는 구멍이다. 또한 배꼽은 생명의  근원지 그 자체이다. 어두컴컴한  자궁에서 탯줄을 따라 생명은 숨을 이어왔다.
   

우리의 탯줄은 어디에 있을까
  지리산 노고단 남부능선이 이어진  수려한 계곡, 마을  앞으로 섬진강 줄기가 흘러가는 구례 운조루에 가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배꼽문화'가 있다. 운조루의 주인인 문화 유씨 집안에서는 장손의 태를 태워서 남은  재를 단지나 옹기 같은 태반에 담는다. 태반은 사당의 숲 그늘에 소중하게  묻어둔다. 장손이 죽으면 태반에 넣어두었던 재를  꺼내어 관 속에 함께  넣어준다. 새 생명을 지켜준 탯줄은 그 집안에서 평생을 함께 살다가 주인공의 죽음과 더블어 마지막 동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민간에서는 태를  태우거나 물에  떠내려보냈다. 깨끗이 태워버리거나 모르는 곳으로 멀리 떠나가야 좋다고 믿었다.  어릴 적 한강가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늘 강가에  나가서 노는 일이 우리 '악동'들의 일과였다. 검정 고무신으로 송사리를 잡는다거나 조그만 조개를 줍는 일, 하얀 물새떼를 쫓아다니거나 강변에서 뗏목을 구경하는 일 따위는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다. 그런데 물에 띄운 탯줄이  모래톱에 걸리는 일이 종종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징그러웠는지.  탯줄을 강물에 띄워버리는 풍습은 서울의 보편적인 관행이었고, 나의 탯줄도 아버지의 손으로 한강에 띄워졌다고 한다.  여러분의 탯줄은 어디로 갔는가? 태웠는가, 묻었는가, 아니면  어느 강가에 띄워졌는가.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반드시 여쭈어보길 바란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탯줄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고 하는 이들도 태반이리라.  서민들의 탯줄 처리는 그렇다 치고, 구중궁궐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태실로 대표되는 왕실의 '배꼽문화'는 가히 통치권자만이 누리는 특권적인 것이었다. 왕족이 태어나면 태를 태우지 ㅇ낳고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모셨다. 태실에 모신 태의 주인 중에서 왕이 되는 자가 나타나면 트겹ㄹ대우를 하여 태봉이라 부르는 또 하나의 '왕릉'을 차렸다. 태는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보았기에 국운의 흥망성쇠와도 연관지었다.  왕릉은 왕궁에서 100리 안쪽에 써야 했으나 태실만큼은 거리  제한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멀더라도 풍수의 명당을 찾아 태의 거처를  정했으니,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에는 무려 13위의 조선왕조 태실이 전해질 정도다. 인촌리의 서진산이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산은 태봉으로도 봉해졌다.  태실의 사방 300보(약 500m) 거리에는 금표를 세워 강력히 보호했다. 모든 일은 관상감에서 관장하였고, 태의 호송과 태실의 역사는 선공감에서 도맡았다. 태를 봉송하는 책임자로 안태사 같은  벼슬을 내려 관리를 특별  파견했을 정도였다. 또 한 석물을 설비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 등,  왕의 위엄에 걸맞게 태봉을 모셨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시했던 태를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었다. 일제는 수많은 태실을 마구잡이로  모아들여 서삼릉에 집결시켰다.  조선왕조 500년간 모든 왕족의 배꼽이 들어 있는 태실을 연병장에 병사들 집합시키듯이 모아들였다. 태실을 명당에서 들어내 민족정기를 진압하려는 가증스런 작전은 빈틈없이 이루어졌다. 서오릉 바로 옆의 서삼릉에 집결된  태실들은 일본식 담장과 문으로 봉쇄하였다. 태실을 표시하는 비석들은  일본을 뜻하는 일(한자  날일)자로 배치되었다. 명산의 정기마다 쇠말뚝을 박았던 식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우리들 배꼽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세상의 중심인 배꼽
  배꼽은 늘 세상의 중심을 뜻한다.  배는 삶의 중심이기도 하다. 인간사에서 배고픔보다 절박한 것이 있을까. 배고픔이란 세 글자는 인생살이에서  고통의 상징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뿐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삶 자체를 배고픔으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배꼽은 의학적으로도 중심이다.  한의학에서 제라고 부르는 배꼽은 신체의  정중앙과 무게중심에 해당된다. 단전을 세 군데 꼽는바, 상단전은 눈썹  위, 중단전은 명치, 하단전은 흔히 말하는 단저능로서 배꼽 밑 2촌 4푼 거리를 가리킨다. 지금 바로 손을 배꼽에 놓고서 2촌 4푼 거리를 내려가보면 틀림없이 하단전에 당도할 것이다.  따라서 배꼽은 호흡에서도 기준이 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단전호흡에서 중요한 호흡법인 태식법은 태아가 숨쉬는 방법을 재현한  것이다 탯줄에 매달린 아이의 호흡이 가장 원초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민간상시긍로도 단전 아래가 차가우면 안 좋은 것으로 본다. 목매달아 자살한 사람도 포도청의 나졸들이 나아서 검사할 때, 배에 온기가 있으면 되살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로  배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무더운  여름, 잠자리에서 배만큼은 덮고 자야 한다고 이부자리를 챙겨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에서 도 그 중요성은 확인된다. '배앓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포괄성을 상상해보라.  배꼽은 정기의 근원이기도 했다.  정력제라고 하여 태를 먹는  정력에 미친 아저씨들도  많다는 사실에서, 과연 배꼽이 정기의 근원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사실  배꼽을 먹는 풍습은 매우 오래 된 풍습이었다. 아기의 탯줄을 잘못 잘라서 덧난 태독에는 배꼽 떨어진 것을 말렸다가 다려서 먹었다. 혹은 태를 태운 재를 가루 내어서 발라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병원에서 태를 은밀히 처리하여 정력제로 팔아먹기도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보면 여간 언짢은 일이 아니다.  우리 아기들의 탯줄이 산부인과에서 팔려나가고 있는 이 어지러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배꼽은 웃음과 시기, 질투의 중심이기도 했다.  심하게 웃길 때, 누구나 '배꼽을 뺐다', '배꼽을 쥐었다'고 한다. 웃기는데 왜 하필 배꼽이 연상될까. '골때린다'는 비속어가  등장하기전까지, 적어도 웃음만큼은 배꼽의 전유물이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서처럼, 시기 질투에서도 중심이었다.  배꼽은 심지어 동네에서도 중심이었다.  동네 한가운데의 중심되는 큰 마당을 옛 사람들은 배꼽마당이라고 불렀다. 이동하의 소설 <우울한 귀향>을 보니 배꼽마당을 이렇게 썩 잘 표현해놓았다.  올망졸망 늘어서 있던 아이들의 그 조그만 머리 속에 오만가지 기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던 그 배꼽마당의 진상은 곧 뜨거운 뙤약볕 아래 환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배꼽은 인간, 아니면 여타 포유동물들만의 전유물일까. 물론 '아니다'. 포유동물의 전유물 같지만 '식물의 사생활'을 잘 들여다보면 식물에도 배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꽃받침이 떨어진 자리가 유난히 뽈쑥 튀어나온 배곱참외를 연상해보라. 식물에게도 배꼽은 생명의 근원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인 배꼽은 우리 민족에게만 적용되는가. 멀리 북쪽 시베리아 야쿠트로 떠나가 보자. 시베리아인들은 '세상의 황금배꼽'에 가지가 여덟 개인 나무가 자란다고 믿는다. 이 나무가 자라고 있는 '세상의 황금배꼽'은 원초적인 낙원이다. 이 낙원은 최초의 남성이 태어나, 나무  둥치에서 윗몸만 내민 여성의  젖을 먹고 자라는 그런 땅이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 태평양  신비의 섬 이스터로  떠나가 보자. 폴리네시아의 토속 이름은 원래 테 피토  테 헤누아인데, 이것은 섬들 중의  배꼽이란 뜻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의 말을 빌리면 이스터 섬에 붙여진 가장 오래 된 이름이라고 한다. 문명 이동의 흔적을 찾아서 콘티키란  뗏목으로 남태평양을 건넜던 토르 헤이에르달은 <콘티키>란 책에서 이렇게 기록을 남겨주었다.  이 섬의 동쪽 최초의 장이족이 상륙했다는 곳  근처에는 '황금의 배꼽'이라 부르는 잘 다듬은 둥그런 돌이 놓여 있고,  또 이곳은 이스터 섬의 배꼽으로 알려져 있다. 시를 알았던 폴리네시아인의 조상들이  섬의 동쪽 해안에 섬의 배꼽을 조각해놓고 페루에서 가장 가까운 섬을 이보다 서쪽에 있는 여러 섬의 배꼽으로 택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폴리네시아의 전설은 '섬의 발견'을 '섬의 탄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전설을 생각할 때 이스터  섬이 여러 섬들의 탄생 표시인 배꼽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애초의 고향을 이어준  점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 마땅할 것이다.
   

배꼽에서 혁명을 생각하며
  1892년 임진년 여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꼭 300년  되던 해. 세상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스러웠다.  그때 선운사 석불의 배꼽비결사건이 기름에 불 붙이듯 민중혁명의  불을 붙였다. 영광접주로서 실제 현장에 있었던 오지영의 <동학사>는 당시 정황을 소상히 알려준다.  그해 8월의 일이다. 석불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무장현의 손화중 접중에서 농민군이 백주 대낮에 횃불을 들고 선운사를 들이쳤다.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무언가를 꺼냈다. 세상이 뒤바뀔 만한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호남 일대에 퍼져나갔다. 소문이 확산되자 고창, 고부, 무장, 부안, 영광, 장성, 흥덕, 정읍 등 전북 우도 일대에서 수만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기가 드디어 민중의 손으로 들어갔음은 곧바로 한양의  기운이 그 명을 다한  것으로 판단된 까닭이다.  왜 하필이면 선운사 마애불의 배곱이었을까.  선운사  석불을 보면 정작 어디에도 배꼽은 없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결을 꺼냈는지, 어떤  비결이 있었는지 확인된 바도 없다, 아니, 동학도들은 비결을 꺼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훗날 그 비결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나 <목민심서>였을 것이란 설도 전해졌다. 세상 갈아치우는 혁세의  한마당에서 판을 새로 짜기 위한 통과제의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비결 탈취사건은 세상 판갈이로 나아가는 '좁은 문', 혹은 '구멍'같은 것이었다.  동학 지도부가 연출했음직한 이  사건의 불가사의는 배꼽의  비결에 있다. 새 생명은 배꼽으로 연결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에게 변혁으로 나아가는 출구로 배꼽이 선택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중세사회를 마감하면서, 민중들의 혁세사상을 펼치고자 했던  동학농민전쟁의 불ㄱ이 바로 생명의 상징인 배꼽에서 당겨진 것이다.
   

 '배꼽혁명'의 시대에서 '배꼽 섹스 어필'의 시대로
  이로부터 97년 뒤인 1989년 여름, 나는 동경에 있었다.  자료수집차 일본에 갔다가 동경 교외에  사는 일본인 친구 다다미  방을 빌려 보름쯤 기거하면서 매일 J.R 선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전철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는데 어느 젊은 여자가 내 앞에 섰다.  그 여자는 배꼽이 완전히 드러난 달라붙는 티 셔츠를 입고 잇었다. 내가 앉은  위치에서 내 눈과 그녀의 배꼽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1989년이었으니까 당시 일본에서 도 첨단 패션이었을 것이다. 패션감각 따위와는 원체 거리가 먼 나였기에 무척 당황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이 한창일 즈음, 서울 거리에서도 배꼽티 입은 여성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제,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나 홍대 앞이 아니더라도 어느 곳에서나 여성들의  배꼽을 볼 수가 있다. 수영장이나 대중목욕탕이 아니면 동성간이라도 어느 누구의 배꼽을 보기 어려운 일인데, 세상이 '확실히' 변했다. 물론 나는  일본에서처럼 당황했던 모습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우리 시대는 바야하로 '배꼽문화'라고 붙여도 될 만큼 배꼽 자체가 하나의 화두로 등장하였다. 서양 풍습을 따른 배꼽노출 패션이  장안을 메운다. 머지않아 코걸이, 귀걸이처럼 배꼽에 장신구를 매단 배꼽걸이 패션도 상륙할 조짐이다. 이제 '배꼽혁명'의 시대에서 '배꼽 섹스 어필'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네의 저고리는 치켜올리면 젖무덤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배꼽 노출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드을  다산하여 '당당한 자격증을 얻은' 서민 여성들이 과김히 젖무덤을 드러낸 모습을 우리는 구한 말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에서 많이 보아왔다. 양반 부녀들이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유교사회라서 퍽이나 엄격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서민들의 경우에는 그 운신의 폭이 넓었다. 물론 이를 보고 아무도 섹시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ㅂ보 노출은 어떤 경우에도상상하기 어려웠다.  사람에 따라서는 배꼽을 여성 성기의 또 다른 상징물로 보고, 그야말로 '구멍'을드러내놓고 다니는 '말세'라고 논박하기도 한다.  이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선운사 마애불의 '구멍'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새로운 세상을 엿보았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육체의 열려진 '구명'을 통하여 또 다른 세상의 문을 들여다 보고 있다.  하긴, 프랑스의 '라베라시옹' 문화부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쟝 뤽 엔니그는 전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엉덩이의 역사>에서 엉덩이 하나만 가지고 역사책을 썼다. 그러한즉,  누군가 '배꼽의 역사'를 통하여  '구멍' 이야기를 쓴다 한들 말릴 수 있겠는가.  오늘의 '배꼽문화'는 성적 훔쳐보기를 유도하는 문화다. 그래서 살짝살짝 은근히 드러내야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된다.  우리 시대의 성 개방은 노골적으로 벗은 토플리스 차림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영화나 술집문화를 즐길 정도로 열려져 있으면서도, 정작  백주 대낮의  거리문화에서만큼은 토플리스를 거부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준다. 은폐된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하수구' 같은 성문화가 있음에 반하여, 공개적으로는 유교적  윤리의 잣대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패션디자이너들은 속도감 있게 다양한 배꼽패션을  선보인다. 그에 맞춰 우리의 젊은이들도 앞다투어 배꼽에 투자하며, 배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성형수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긴 배꼽을 동그랗게 해주세요  눌린 배꼽을 환하게 펴주세요  덮인 배꼽을 열어주세요
  남성들도 성적 훔쳐보기를 유도하는 배꼽문화에 동참한다. 남성 인기연예인들은 저마다 옷을 벌리고 배꼽을 예사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 하여 일반적인 젊은 남자들 사이에 배꼽문화가 정착된 것  같지는 않다. 아직은 젊은 여성들의 전유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성만을 집중적으로 노출시키는 성적 훔쳐보기에서 배꼽이 맡은 역할은 그야말로 도 하나의 '구멍'이 아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 젖무덤은 보여주어도 되는데 배꼽만은 안 되었던 전통사회, 배꼽은 보여주되 젖무덤 노출은 아직은 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오늘의 사회, 10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노출의 개념부터 달라졌다. 배꼽이 자궁으로 연결되고 배가 차가우면 부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일반상식을 생각해보면 배꼽 노출이 어쩐지 걱정이 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다시 혁명을 들여다보며
  동학농민전쟁이 터진 1894년으로부터 꼭 1세기  뒤에 '배꼽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 이것도 무슨 암시가 아닐까. 열망과 욕망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이나 배꼽에서 혁명을 꿈꾸었던 그 시절이나 하수상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이 자리에서 배꼽 노출에 관한 도덕적 반대론이나 암묵적 지지, 혹은 적극 지지 따위의 객설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즈음  배꼽 노출을 바라보면서 나는 혁명, 혁세, 그런 것부터 떠올렸다. 배꼽과 혁명, 혹은 혁세, 그런 것부터 떠올렸다. 배꼽과 혁명, 혹은 혁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양자의 천연성을 따져보니 오늘의 배꼽문화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학혁명 100주년과 배꼽 노출의 시대. 이  '부조화의 기묘한 일치'를 보며 문화의 패러독스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나는 새삼 문화의 천변마화를 보는 것 같아 마음  가득 씁쓰레함을 느낀다. 어쩌면 배꼽에서 태실이나 생명 탄생, 혹은 혁명을 읽는 내 의식구조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성동본, 혼인과 불혼의 수수께끼
    동성불혼은 역사가 오래?  '민법 제 809조.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을 하지 못한다.'  이 조항은 지금도 수많은 동성동본 혼인 희망자들을 울리고 있다.  참으로 논란 많은 법조항이다.  수많은 동성동본 연인들이 어쩌다  '잘못 만나서' 속앓이를 하게 만드는 법. 하지만 '법은 멀고 사랑은 가깝다' 법적. 사회적으로 고통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왜 '위험한 관계'  에 자신의 일생을 걸고 있는가.  모든 사회적 고통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 도대체 동성동본 불혼이라는 역사적 뿌리는 타당한 것인지 우리의 혼례사를 다시 점검해볼 시점이다.  동성불혼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동성불혼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동성불혼은 동종족,  즉 한 시조에서 유래한 혈족간에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예에,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거론하고 있는 동성은 씨족 단위를 말할 뿐,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동성동본은 아니다. 오늘날의 동성불혼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간의 불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족외혼과 족내혼을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족외혼은 일정한 단위 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여 집단간의 연계관계를 증진하고  상호 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족내혼은  단일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서 성립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족외혼, 신라는 족내혼이 유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의 족내혼은 동성근친혼이 많았다. 신라에서는 사촌,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이종, 고종들과의 혼례도 다반사였다. 가장  먼 촌수가 육촌간의 혼인이며, 가장 가까운 촌수는 삼촌간의 혼인이었다.  그래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의 딸과 결혼한 내물 이사금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장가를 드는 데 같은  성을 취하지 않는  것은 윤리를 철저히  밝히려는 것이다...... 신라와 같은 경우는 같은 성과  혼인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소생과 고종, 이종 사촌누이들까지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저마다 다르다 하더라도 중국 예절을 표준으로 이를 따진다면 아주 틀린 일이다. 흉노가 어미과 붙고 자식과 관계하는 것은 또 이보다도 심한 일이다.  동성혼인에 대해 유교측이 행한 최초의  본격적인 공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살던 고려시대에도 근친혼은  일반적이었다. 예컨데 고려 4대조 광종과 그의 아내인 태목왕후는 태조의 배다른  형제로서 같은 왕씨 집안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훗날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집필한 유교사가들은 비판을 가했다(열전 권1).  태조가 옛 법을 본받고 풍속을 개화하려고 뜻을 두었으나 고유한 풍습에 젖어서 배다른 아들과 딸을 혼인하게 하고, 이를 꺼려서 딸로 하여금 이성을 칭하게 하였다. 그 자손들이 이것을 본받아 가법으로 삼아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애석한 일이다.  신라나 고려에서 왜 이같은 근친혼이 이루어졌을까. 신라의 경우, 골품제로 유지되던 신라 지배층의 특권  유지를 위한 방편이었다. 막말로  '끼리끼리 해먹는다' 고나 할까. 고려의 근친혼에 대해서는 이종휘의 <수산집>에 잘 나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는 원래 용의 종족으로 모두 그 겨드랑 밑에 하나의 비늘이 있었다. 태조는 이 종족을 타 씨족에게 전파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동종족간의 혈족 혼인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동성결혼은 비단 왕족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행해진 풍습이었으니, 가부장적 종법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한 15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동성혼인이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태조 시기에도 풍습을 개변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멀리 신라시대의 사촌. 오촌지간의 친척과 혼인하던  것에서 유래되는 바, 이것이  수치스러운 줄 몰랐다' 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근친혼, 넓은 의미에서의 동성혼인이 이루어졌을 정도이다.
   

동성동본 금혼의 내막
  과연 동성동본이란 무엇일까.  성이 같고, 본(본관, 관향)이  같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성이 같으면 조상이 같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중간에 성을 내리는 사성이나 개성 따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사실에 비추어  같은 성씨를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증거는 없다. 국가에 의하여 성을 받은 결과, 성시는 다르지만 같은 혈족인 이성동본도 널리 존재했다.  그렇다면 왜 이같은 동성동본 불혼 풍습이  생겨났을까. 유교적 인륜법에 의한  것말고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동성끼리 결혼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길함이 아니었을까. 동성동본끼리 결혼하여 출산이 어렵게 된다거나 기형아를 출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따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길한 예감이  동성동본 불혼을 주장하는 데 강력한 힘을 마련해주었을 터이다. 연변대학의 민속학자  박경휘 교수는 <조선민족 혼인사 연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친금혼은 고려 중기로부터 대두되었다. 그때로부터 고려사람들은 점차 근친혼의 결과가 인류생존의 경험으로 보아 자손의 번창에 유해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근친혼 유해의 경험은 장구한 역사시기를 통하여 인간 의식을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의식이  바로 근친혼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한 그것이다. 실로 조선민족은 이 문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장기간의 역사적 시기를 경유하였다.  중국의 종법가례의 영향에 의해서 동성동본 불혼이 강화된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중국의 주요한  원인이었겠지만 내재적인 원인도 중요했다는 견해다.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동성불혼의 영역이 지나치게 넓다는 데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에 이르면 동종혈족뿐 아니라 외척, 인척을 포함한 친척 불혼으로  넓게 확대되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동성불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외척,  인척까지 포괄하는 넓은 영역으로 점차 확대된 셈이다. 오히려 중국 본토에서는 동종혈족간의 혼인만을 금지하였을 뿐 외사촌, 고모사촌, 이모사촌을 포함한 이성 근친혼이 근대에까지도 존재했던 것과 대비된다.
   

모건과 엥겔스를 생각하며
  잠시 눈길을 세계혼례사로 돌려보자.  아무래도 모건과 엥겔스의 저작물들을 중심으로 세계혼례사 일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진화론자  모건은 그   유명한 저서  <고대사회>(1877년)에서 군혼에서 일부일처제에 이르는 혼인의 변천사를 서술하였다.  모건은 진화론적 예증을 통해 인류의 초기에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했었다는 난교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난교설에 대한 반발이 거셌으니, 반발의 원인은  '인류로 하여금 이러한 치욕을 면하도록 하자는 것' 이라고 엥겔스는 말하였다. 과연  난교는 난잡한 성관계였던가. 엥겔스는 난교에 대해 결코 뒤범벅된 난잡한 성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능한 한 난교라는 말을 피하고 '완전히 무제한적인 성교' 라든가 '규율없는 성교' 라는 표현을 썼다.  모건은 가족의 첫째 단계를  혈연가족으로 보았다.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가 금지된 혼인집단으로서 진일보한 세대별 가족이었다.  제 2의 진전은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 금지였다. 한 어머니의 자녀들간의 성교가 허용될 수 없다는 관념이 생기자, 그것은 낡은 세대공동체의 분해와 새 세대공동체의 수립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푸랄루아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다음에는 '대우혼' 이 나타났다. 남자들은 많은 아내들 중에서도 본아내(애처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여자도 여러 남편들 중  본남편을 가졌다. 대우혼 관계는 씨족이 발전할수록 더욱 공고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혼인사는 일부일처제로 귀결되는데 이는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에서 '대우혼 가족' 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르는 것으로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하게 가부장적 목적을 가진  것이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혼인에는 데체로 인류 발전의  3개의 주요단게에 상응하는 3개의 주요 형태가 있었다. 야만시대에는 군혼, 미개시대에는 대우혼, 문명시대에는 간음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 일처제가 있었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는 대우혼과 일부일처제 사이에 여자노예에 대한 남자의 지배와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동성동본 불혼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모건과 엥겔스의 견해를 길게 반복한 이유는 혼례사란 시대적 조건의 변천에 따라 늘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동성동본 불혼의 역사도 우리나라 전체 혼례사의 맥락에서  점검해보면 그 위상이 명확할 것이 아닌가. 동성동본 불혼이 유난히 강조될 수밖에 없던 조선 후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참으로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여주었던 우리의 혼례사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우리의 혼인풍습도 인류혼인사에서 예외가 아니다  동성동본 혼인이 '벼락' 을  맞는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혼인 형태가 존속하고 있었다. 일처다부제, 형수혼,  처자매혼 따위가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일부일처제 방식만이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혼례사도 세계사적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여자가 다수의 남자를 거느리는 풍습인 일처다부제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잔재가 남아 있었다. 빈객이 오면, 여자를 방에 들여보내 접대하는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풍습은 곧 사라졌다.  문제는 형수혼이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형수혼은 남아 있는 풍습이다. 멀리 진도 같은 남도땅의 바닷가에서는  으레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책임졌다. 이 관행은 하나의 미풍이었다. 생활력을 상실한  형수와 그 아이들, 즉 조카들의 양육을 동생이 책임지는 행위는 어찌보면 대단히 사회도덕적인 풍습이라 할 수 잇다. 형수혼은 동북아시아  제 종족들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한 풍습이다.  형수혼의 본래 의미는 형제일처혼에서  유래한다. 인류학자들은 일처다부제와 형제일처혼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형제일처혼을 일부일처제의 변형으로 간주, 일부일체저에 바탕을 둔 결혼에  불과하다고도 본다. 말리노프스키는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처다부제와 일부다처제는 합성적인  결혼이다. 즉  그것을 만들어낸 배우자 몇 명이 하나의 커다란 체계에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은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의 전형을 근거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 풍습도 조선사회에서 매를  맞아야 했을까. 이는 가부장적 장자상속이라는 유교 통치질서의  확립과 결부된다.  장자권리의 절대화 과정에서 형수혼이란 상속 질서를 무너뜨린 소지가 큰 것이니 용납될 리 만무였다.  반면에 처자매혼은 홀아비가 된 남자가 죽은 아내의  자매와 결혼하는 관행이다. 한 마디로 처제와의 결혼이다. 이 역시 세계혼레사적으로는 자매일부제에 해당한다. 가령, 칭기즈 칸은  두 자매를 아내로  맞이했다. 남자들이 여자를 여럿 거느리는 일부다처제는 문명국가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상대 여자들이 동일 혈통인가, 전혀 다른 남남인가 하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처자매혼은 '자매형 일부다처제' 에 해당된다. 모건은 이  혼례방식에서 '아득한 엣 조상들의 푸날루아혼 관습의 자취를 발견한다' 고  언급하였다. 인류학자 브론스키는 이를 '역연혼' 과 '순연혼' 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역연혼' 은 과부가 죽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해서 결혼하는 것을 말하고, '순연혼' 은 홀아비가 죽은 아내의  동생과 재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각각 형제일처혼 또는 자매일부혼과 결합해서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역연혼' 과 '순연혼' 에도 형제일처혼과  자매일부혼에 작용했던 '연장순의 원칙' 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앉은가마혼, 누이바꿈, 삼혼이란 풍습이 있었다. 앉은가마혼(일명  대들이풍습)이란 과부가 된 여자가 개가할 때 남자집으로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남자가 여자집으로 오는 결혼이다. 과부집으로 들어온 남자는 이전 남편의 부모, 즉 여자의 시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로 칭한다. 시부모들도 과부가  된 며느리가 맞아들인 남자를 자식처럼 대우하는 풍습이다.  일부일처제 풍습과는 모순되는 형식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뿐더러 가족의 틀이 그대로 지속될  수 있다. 또 오랜 과거의  유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서류부가혼 풍습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를  드는' 모계사회적 흔적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앉은가마혼 역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가는 모계사회적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누이바꿈은 가난한 집에서 혼례를 치를 만한 돈이 없으므로, 신랑. 신부집에서 서로 딸을 교환하여 혼례를 치르는 방식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던 집안끼리 널리 행해졌다. 삼혼은 누이바꿈이 고도로 발전한 형태인데, 갑이 을에게, 을은 병에게, 병은 갑에게 상호간에 딸을 바꾸는  다소 복잡하고 연쇄적인 혼례 관행이다.  이렇게 우리의 혼례사도 깊숙이 따지고 들어가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들 혼례풍습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각각의 혼례방식은 모두 사회.  역사적인 산물로 세계 곳곳에서도 보여지는 것들이다. 동성동본 혼인과 동성동본 불혼의 변천에 관한 수수께끼도 그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해답을 구해야 옳지 않을까.
   

동성과 동본을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한문식의 성씨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원시씨족공동체 단계에서 이루어진 족외혼은 어디까지나 같은 씨족끼리 혼인을 피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시 씨족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씨족명은 성으로  옮겨졌다. 애초에 성은 권력층에게만 부여되었다. 성씨의 부여는 일종의  신분적 특권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성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성이 없이 이름만 주어졌다.  씨의 설정은 성의 양적 증가에 따르는 동족의 지역적 확대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밀양 손씨, 안동 권씨, 해주 최씨 같이 씨칭이 지명을 취하고 있음은 그것이 지역적으로 분화된 동족의  계통임을 드러낸다. 14  ~ 15세기 이후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동족 성원의 양적 확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본관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본관의 사용은 대략 14세기 말부터였다. 그리하여 본관  수가 김씨는 500가지, 이씨는 470가지를 헤아렸다. 동일한  본관도 동족 수  증가에 따라 다시금 파로 나뉘었으니, 전주 이씨의 경우에는 무려 100여 파로 갈라졌다.  이쯤 따지고 보면, 성이 같다는 것만으로  혈연의 근본을 따짐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족보상에서 성씨와 본관만 가지고 혈족의 이동을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성씨를 바꾸는 변성 등으로 혈통 분간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안동의 권씨와 김씨는 분명히 같은 조상으로 김씨가 권씨로 성이 바뀌었을 뿐인데도 근래에 양쪽이 혼인함을 꺼리지 않음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수광는 <지봉유설>에서, '본관이 다르면  성이 같아도 혼인하니  이 때문에 중국인에게 조소를 당한 것이다' 라고 이본동성혼을  비방하였다. 민법의 예규에는 남양 홍씨는 토홍과 당홍이 있으나 조상이 같으므로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는다.  반대로 성은 다른데 본은  같은 동본이성, 예컨대  기씨, 한씨, 선우씨는 성은 다르나 소위 기자의 같은 자손이라서 혈통이  같다 하여 서로 결혼하지 않았다.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도 이성동본이면서 같은 혈족에 속한다.
  차제에 족보 문제도  점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종휘는 <수산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적어서 오늘날  족보를 가진 가문도 십수  대 위는 모르므로 동성끼리도 그저 관향만 다르면 다 통혼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우리나라의 김. 이씨는 대성으로 본관만 다르면 다 동성혼인을 하니  크게 예에 어긋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무 7년(1903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형법대전>은 혼인조에서  성씨와 본관이 동일한 사람이 결혼하는 일을 100대의 매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성과 동본, 이성과 이본과의 관계는 '칼로 두부 베듯이' 명료한 것이 아니다. 친인척간의 결혼을 금지시킴으로써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손을 이어가고자 했던 선조들의 입장은 대단히 과학적인 판단이었고, 후대에 근친혼을 배제한 태도 역시 인륜을 옳게 세우려는 훌륭한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하나의 도그마가 된면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려던 관습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둔갑한다.
   

동성불혼의 역사적 뿌리를 재평가해야
  동성동본 불혼에 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한가는 북한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북한에서는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하는 개방형태를 취하고 있다. 북한의 민속학자 전장석은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동성동본 혼인이  가능한 이유를 논문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법조문과는  달리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을 금기시하는 전통과 풍습이 철저히 지켜진다는 보고가 있다.  남한사회는 법적 장치과 현실론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절충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10년에 1번 꼴로 1년간 유예기간을  두어 사실혼관게에 있는 동성동본 부부에게 특별법으로 혼인신고를 허락하고 있다.  일제 당국도 식민지 헌법에서 동성동본 불혼을 명시했다. 정작 자신들은 동성
동본 불혼 관습이 애초에 없으면서도 식민 백성들의 민감한 관습문제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이웃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누구나 쉽게 본관을  창설할 수 잇는 탓이다. 근친혼  금지를 논할 때면 흔히 중국의 예를 인용하곤 하는데, 정작 중국 본토보다 우리가 더욱더 강하게 금지되어 있으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모든 혼례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사회의 규칙 속에는  나름의 합법칙적인 연원이 있고 마땅히 어떤 풍습이 강조되어야 할 사회적 이유가  존속해야 관습은 유지되는 법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동성동본  불혼의 역사적 뿌리부터 재평가하면서 출발해야 옳을 일이 아닌가.

     

똥돼지의 내력을 묻는다
  지금부터 조금은 '지저분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양해하시라. '변' 따위의 점잖은 '위장 명칭' 보다는 보다 원초적인 '똥' 을 화두로 '생태민속기행' 을 떠나려하기 때문이다.  똥돼지는 글자 그대로 똥을 먹여 키운  돼지. 똥돼지하면 누구나 제주도를 연상하지 않을까. 그만큼 제주도에서 가장 널리 키워왔다. 그러니 사람들은 당연히 제주도에서만 키웠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살던 남원땅
  88고속도로에 몸을 싣고 광주에서 남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지리산 휴게소가 나타난다. 휴게소에 차를 세워두고 좁은 샛길로 나가서 주민들이 다니는 굴다리를 통과, 5분여만 걸어가면 아곡리마을에 당도한다. 고속도로가  지날 뿐 완벽한 산골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집집마다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함께 독립채로 세워진 유별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2층변소'라고도 부르는 그 건물의 층계로 올라가서 일을 보면 아래층에 살고 있는 돼지가 달려와서 날름 받아먹는다. 돼지우리는 지극히 컴컴하다. 1층에는 창문을 달아  밖에서 햇볕이 들어오게  만들었고, 외부에서도 돼지를 보게끔 되어 있다. 제주도 '통시'의 돼지우리는 넓게 운동장이 있어 햇볕도 쬐고 운동도 하게  되어 있는데 비해 이곳은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몇 집을 찾아가서 면담조사를 시작했다.  "똥돼지를 키우고 있다면서요?"  "똥돼지요? 그런 것 몰라요"  "아, 집집마다 '2층변소'가 있잖아요"  "동네 망신이지. 그런 거 사라진지 벌써 오래요."  웬 동네망신? 두 집을  들렸으나 냉담한 반응만 나왔다.  밭에서 감자를 캐던 할아버지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겨우 답을  얻었다. 분명히 동돼지를 키우고 있으면서, 왜 이다지 냉담한 거부반응을  보였을까. 할아버지의 설명으로는 똥을 먹여 돼지를 키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되, 똥만 먹이지 않고 사료도 함께 먹이는 방식으로 바뀌었단다. 막상 똥돼지마을로 소문나는 것을 주민들이 싫어하는 분위기란 설명을 덧붙였다.  이장의 허락을 받아서 20여 집을 일일이  다니면서 변소 실태를 점검했다. 개량변소로 신축한 집도 더러 있었으나 대개 개량변소가 아니었다. 변소에는 모두 돼지가 살고 있었고, 별도로 분리된 독립변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변소 없이 생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돼지우리와 변소가 같은 장소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확인되었다. 몇 집에서는 변소의 화장지가 돼지우리에서  발견되었다. 심지어  어느 집에서는 개량변소를 버젓이 만들어놓고도 재래식 변소를 없애지 않았다. 물론 재래식 변소에서는 돼지가 살고 있었다.  <은자의 나라,  꼬레아 Corea,  The Hermit  Nation>를 쓴   그리피스(W. E. Griffis)는 '조선사람들은 화장실 사실이 매우  불충분하다'고 단언했다.  똥조차 '자원 재활용'했던 우리식  거름문화가 그들 서양인들에게는  불결하게만 보였을것이다. 그리고 남원의 농민들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요즘에도 이렇게 똥으로 돼지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남부끄럽다는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똥은 지저분하다. 그러나 똥돼지는 맛있다. 그러니 똥돼지는 계속 키워나가되, '지저분한 똥문화'를 공개할 수 없다... .  남원의 그 마을사람들은 현실의 경제적 이득과 심리적  위축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비공개 똥돼지 키우기'를 했으리라. 하지만 무엇이 남부끄럽다는 말인가.    똥은 돼지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똥을 늘상 '지저분한  것'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똥사랑'은 유별났다. 우리 농민들에게 똥은 참으로  '황금'이었다. 똥은 농사짓는 황금 그 자체였다. 사람똥, 소똥, 돼지똥, 닭똥 가릴 것 없이 각각의 용도에 맞게 퇴비를 만들어 논밭에 뿌렸다. 몸에서 나온 폐기물을 똥장군에 실어서 논밭으로 내가고, 논밭에서 거두어들인 식물을 먹고, 다시금  폐기물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자연계 순환, 그게 과거의  방식이었다. 나는 똥돼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항상 이런 도표를 그린다.    똥 - 돼지 - 돼지똥 - 곡식과 채소 - 사람 - 똥  각각의 똥들은 성분이 일정치  않다. 돼지똥은 어디에 쓰이는가.  지리산 같은 산동네로 가보자. 산간동네는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밭농사  위주다. 제주도는 더 말할게 있겠는가. 제주도의 논은 전체 경작지의 고작 1~2%를 넘지 못한다. 바람에 날리는 푸석푸석한 화산재투성이의 열악한 조건에서 곡식에게 준거름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밭농사의 으뜸은 역시 보리밭이었고, 비료  없던 시절에 보리밭에는 돼지똥이 최고였다. '쌀 세 말을 먹고  시집을 가는 처녀가 없다'  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가난했던 산골에서 돼지똥은 보릿고개를 넘겨주는 밑거름인 셈이다.
  민속학자 고광민(제주대 박물관)은, 제주도 서부지역은 아예  보리씨와 돼지거름을 섞어서 밭에 뿌리고, 동부에서는 돼지거름을  뿌리고 밭을 갈고 나서 씨를 뿌려 농사짓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제주도는 밭이 절대적으로 많다. 따라서 가장 늦게까지 똥돼지가 남게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왜 하필 똥돼지인가. 똥은 돼지에게 가장 '영양가  높은 음식' 이다. 나 자신도 똥을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대충은 안다. 우리가 먹은 음식물이 몸에서 흡수되는 비율은 극히 낮다고 한다. 우리의 몸은 그때그때 흡수할 수 있을만큼만 받아들인다. 나머지는 그대로 배출한다. 돼지로서는 아주 간단하게 '고단백 종합영양식품' 을 받아먹게 된다.  돼지는 잡식성이라 사람이 먹던 음식찌꺼기도  잘 먹는다. 그러나 음식찌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먹고 살만해진 최근의 일이다. 사람이 먹을 식량조차 귀했던 시절에 돼지가 먹을 충분한 양의  음식찌꺼기를 매일 쏟아버릴 수 있었을까.똥이 아니었다면 늘 사료부족으로 돼지는  아사할 판이었다. 마을의 개들조차도 사람의 똥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똥개' 라 부르지 않았던가.  돼지 사육의 사료문제 해결. 처치 곤란한 똥의 수거.  보리밭에 뿌려지는 돼지똥. 이 셋이 결합, 똥돼지문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결국 똥처리, 사료조달, 비료공급이라는 '일거삼득', '일석삼조' 의 효과가 아닌가.  오늘날 생태환경의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면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리사이클링의 중요성이 부쩍 주목받고  있다. 쓰레기를 다시금  재생시키는 문제가 늘 제기되고 있으나 리사이클링은 되돌려주기  위하여 또 다른  열량을 요구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똥돼지문화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리사이클링이란 생각이 든다.
   

그대들의 허울 좋은 도덕청결주의
  우리는 매일 화장실에 간다. 물론 우리 집도 어렸을  적에는 재래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한다. 예전에 비하면 참으로 위생적이고 청결한 삶은 누린다고 할 수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서울 근교에  나가면 밭에 똥을 뿌려 '상서롭지 않은 냄새' 를 풍기며 채소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밭을 지나치려면  코를 쥐고 다녔던 추억을 누구나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러다가 수세식문화가 보급되었고, 똥은 그야말로  물에 씻겨 강물로 흘러들어갔다. 서구인들이 칭송해 마지  않는 수세식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똥을 물에 씻어서 정화조를 통하여 강물에 섞어 보내는 것이다. 정화시설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환경오염문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폐기물이 아니라 재생품이었던 똥을 버림으로써 우리가 얻는 게 무엇인가.  청결을 금과옥조로 삼는 현대인들. 그들은  똥돼지문화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똥은 수세식  변소를 거치는 순간부터 자연을 더럽히고 있다. 그러나 선조들의 똥은 자연으로 되돌려져서 자연과 함께 소멸되고 먹거리의 자양분이 되었다. 양자를 비교한다면, 우리는  알 수 있다. 무엇이 더 문명적이고, 무엇이 더 야만적인 것인지. 적어도 선조들은 똥을  내버려 강물을 오염시키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  깨끗한 수세식 처리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환경 훼손의 시작임을 안다면, 서구식 청결관은 '청결도덕주의' 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프랑스의 구조주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명저 <슬픈 열대>에서 서구사회 자체가 하나의 부족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서구인들의 발명과 업적을 중시하는 태도를 '과열된, 혹은 움직이는 사회' 라고 부르며, 종합적 재능과 인간적 교환의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냉각된 또는 정적 사회' 라고 불렀다. 과열된 사회는 확실히 '열역학적' 사회다.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냉각된 사회에서 과열된 사회로 이동하였다. 엄청난 에너지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는 심각한 생태환경의 파괴로 나타났다.  한국민속답사회의 회원들과 함께 지리산 동남부인  산청지방 답사를 갔다. 산청에는 전통적 살림집이 잘 보존되어 있는 남사마을이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옛 양반집에 들어갔다가 뒤뜰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변소는 2층으로 높게 올라가 있었는데, 용무를 마치고 난 다음에 '물' 은 흘러서 밖으로 나오게 설계되어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듯 대리석으로 동그랗게 물이 고이는 홈을 파놓았다. 그 거름을 떠서 집안의 채마밭에 주게끔 되어 있다. '돈깨나 있는' 양반집에서조차 왜 이다지도 '똥' 을 중시하였던가. 어떻게 집안에  '더러운 시설' 을 둘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남사마을을 방문하여 뒤뜰 구경을 할 일이다.   

 

똥돼지문화권은 전체 동아시아?
  돼지가 우리 선조들의 생활에서 늘 함께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역시 선사시대 출토품이다. 돼지뼈가 다수 출토되어  돼지사육의 역사가 선사시대로 올라감을 보여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조' 에 이르길,  그 지방의 기후는 추워서 부여보다 혹독하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좋아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제주도에서도 돼지를 기른다고 했다. 장례식에는 망자의 먹이감으로 돼지고기를 관 위에 쌓아  놓는다고도 했다. 주몽신화에도  알을 돼지우리에 집어던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돼지기르기의 역사는 정착생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본래 활엽수가 우거진 습윤한 숲에서 자라던 돼지를 잡아다  길들였다. 돼지는 넓은 잎나무 수풀이나 습기 많은 골짜기에서 잡식성으로 생활하던 야생의 무리였다.  떠돌이 유목생활에서 종경정착생활로의 변화는 가축사육의 보편화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사료문제의 심각성도 불러왔다.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는 사료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돼지를 방목한다. 물이 풍부한 활엽수림에서 야생으로 자라던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같이  고밀도의 집약농법사회에서는 돼지를 방목할 처지가 못 된다. 사료난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잡식성 동물이었던 돼지는 사람의 똥을 먹기에 이른 것이다.  돼지사육과 사료문제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돼지고기를 금기식품으로 만들게 된 원인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금기한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그  원인을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른 사료문제에서 찾았다.  원래 중동지역은 지금 같은 사막이 아니었다. 활엽수림이 울창한 지대에서 돼지는 부족하지 않은 물을 근간으로 하여  폭넓게 분포되었다. 그러나 숲이 사라지고 사막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숲의 멸망은 돼지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다. 그 바람에 돼지고기를 예전처럼 쉽게 먹을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다. 단백질을 쟁취하기 위한 심각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종교적  금기가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돼지고기 먹는 행위 자체를  종교적 금기로 묶어버림으로써 돼지고기를 둘러싼 갈등의 소지를 없앤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의 선조들은 종교적 금기로 묶기보다는 똥을 돼지에게 먹임으로써 사료문제의 심각한 위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돌파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 산간지대는 그렇다고 치고, 논농사를 많이 짓는  평야지대에선 왜 똥돼지문화의 사례가  하나도 없을까. 평야지대도 이모작을 하며 보리농사와 쌀농사를 병행했으니 똥돼지가 있어야 논리적으로 맞는 것이 아닌가.  평야지대에 똥돼지문화가 없는 것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산간지대에서는 전적으로 보리농사를 짓기 때문에 똥돼지가 필요했지만, 평야지대에는 보리농사가 보조적이므로 똥돼지문화의 발전이 덜 이루어졌다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 같다. 해답은 오히려 가축사육의 지역적 차이에서 주어질 듯하다. 돼지사육은  대체로 평야지대보다는  산간지방에서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 점이 산간지방에 똥돼지문화가 집중되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남원 같은 지역에 일부 남아 있으나 예전에는 전국이 똥돼지를 키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점에서 서서히 똥돼지문화가 사라지고, 남쪽에서도 극히 일부에만 잔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 본토에서의 똥돼지문화는 일단 남원에서 발견된 것  이외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혹시 이 글을 읽고 필자가 모르는  곳에서 똥돼지를 길러왔다면 제보를 부탁드린다.) 똥돼지 하면 역시 제주도다.  그렇다면 인근 다른 나라에서는 똥돼지가 없을까.  제주도와 문화적 친연성이 깊은 오키나와부터 살펴보니 예외없이 똥돼지가 발견된다. 오키나와 똥돼지도 돼지가 마당에  나와서 노는 제주도식 '통시'로 양자간의 친연성이 너무도 뚜렷하다. 한반도의 육지에서  제주도, 오키나와에서 걸친 똥돼지문화권이 확인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똥돼지문화는 남쪽 해양문화였을까.  그렇게 단정짓기는 곤란한 것 같다. 변소  밑에서 돼지를 기르는 모습의 중국 후한시대 출토품이 전해진다. 미루어보건대, 과거에는 동아시아 전역에 똥돼지가 퍼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똥돼지문화가 소멸하면서  외부와 격리된 일부 섬지역에만 흔적을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오지에  지나지 않았던 제주도와 오키나와에 똥돼지문화가 잔존된 이유도 거기에 있을 성싶다. 물론,  이 역시 추론에 불과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서양돼지는 똥돼지가 될 자격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돼지 종류는 1,000여 종.  우리나라에서도 요크셔, 바크셔를 비롯한 외래종  돼지가 침투하여 토종을 몰아내는 데 99.99% 이상 성공하였다. 토종돼지는  흑색으로 체질이 강건할뿐더러 질병에 잘 견디는 장점이  있음에도 거세당하였다. 그  이유는 돼지가 육용으로 보급되면서 몸집이 큰 왜래종만 키웠기 때문이다. 또 토종돼지는 주로 산간지방에서 많이 사육되었다. 똥돼지를 찾아다니다가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똥돼지는 몸집이 작고 주둥이가 긴 토종 검정돼지들이다. 남원은 물론이고 제주도 똥돼지도 모두 그렇다. 그런데 서양돼지도 똥을 먹여서 키울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실험을 해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체질상 불가능할 것 같다. 오래도록 똥만 먹인다면 틀림없이 그 체구를  유지할 영양의 부족으로 틀림없이  병이 날 것이다.  똥돼지가 토종돼지뿐인 것은 단순히 우연적인 일만은 아니다. 토종 돼지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똥에 익숙해 있었고  먹이량이 적다. 아니 어쩌면 이런 적응과정에서 체질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토종은 이 당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배설물과도 친숙했던 셈이다. 그래서 '신토불이'론이 등장한 것이리라.  우리에게 돼지는 매우 가까운 동물이다. 돼지가 신이 된 적은 없어도, 늘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렸다. 웃는 듯한 돼지머리는 늘 복을  주는 인상이었다. 소와 더불어 돼지는 조상이나 신에게 올리는  희생양의 으뜸이었다. 황해도굿에 생타살과 익은 타살이 있거니와, 산 돼지를 칼로  얼러서 혼을 빼고 무릎을 꿇게 하는 타살거리가 그것이다. 이 타살거리는 바로 수렵시대의 잔혼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예이다.  우리들의 돼지에 대한 생각은 참으로 양면적이다. '돼지발톱에 진주', '돼지발톱에 봉숭아 물들이기', '돼지우리에 주석 자물쇠'같이  격에 어울리지 않음의 대표처럼 거론되기도 하고, '돼지같이  생겼다', '돼지 오줌통에 몰아넣은  이 같다'는 대목에서는 돼지를 극도로 못생긴 사람에  비유하기도 한다. 반면 긍정적으로는 '복돼지 같다', '돼지 같이 먹는다'와 같이 풍요와 다복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동국세시기>를 보면, 새해 벽두의 돼지날인 상해일에 돼지주머니를 신하에게 나누어주어 풍농을 염원하는 대목이 나온다.  토종이야말로 우리네 토양에 맞아  병도 없고 기르기도  편하다. 한데 오로지 양과 크기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이 토종을 밀어냈다. 양과 크기라는 상품경제의 '슈퍼 콤플렉스' 논리가 이 아담하게 생긴 토종을 밀어냈다.  그나마 참으로 다행한 일이  하나 있으니, 지금도  마을굿에서 토종 돼지만을 올리는 곳이 꽤 있다. 마을굿 제물로 검정돼지만을 고집하는 걸 보면 토종의 신에게 차마 서양돼지를 올릴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를 보는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다.  논의를 마무리하기 전에 똥돼지의 맛을  예찬하련다. 나의 소견으로는 사람의 몸에서 배출된 똥을 먹어서인지 맛이 그만이다. 사료를먹여 키운 돼지에서 항생제가 발견되고, 그 항생제가  그대로 사람의 몸에  축적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백화점에서도 '무공해 돼지고기'를 일반 돼지고기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싼 값에 별도로 팔고 있지 않은가.  남원이나 제주도에서도 아는 사람은 똥돼지만 찾는다고 한다. 혼례식 같은 잔치가 있는 집은 아예 똥돼지를 한 마리 주문하여 잔치상에 내놓는다. 서울의 이화여대 앞에도 똥돼지 전문집이 하나 있어서 알만한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고 한다.

그 똥돼지집의 고기가 확실한 똥돼지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무쪼록 곳곳에서 똥돼지를 다시 키우고 전국에 보급할 일이다! 그래서 중국의 연잎 돼지요리나 서양의 바베큐요리를 능가하는 요리를 개발할 일이다. 그것이 우리 것을 살리고 우리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길이자  선조들의 자연관을 잇는 길이 아니겠는가.

     

매향의 비밀문서를 찾아라
   

삼일포 매향비는 어디에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금강산 삼일포에 강릉도 존무사(관찰사) 김천호를 비로ㅅ여  강릉부사 박흥수, 판관 김관보 등 동해안 일대의 지방관리들이 승려 지여와 함께 모였다. 의관 정제하고 먼길 마다않고 식전부터 모인 것을 보면,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법하였다.  석수장이 하나가 지게에 비문 하나를 지고서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김천호는 아무 말 없이 넌지시 배를 가리켰다. 비문이 먼저 배에 실렸다. 그리고 김천호를 비롯하여 박흥수 등이 차례로 배에 올랐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지여가  날자 하나는 참으로  잘 잡았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으나 좌중은 묵묵무답. 아무도 응답할 분위기는 아닌 모양이다. 배는 서서히 노저어 갔다.  "단서암에 배를 대게."  김천호는 단호히 말했다. 삼일포 호수 안에 있는 네 개의 섬 중에서 단서암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단서암을 선택한 이유는 남달랐다.  단서암에는 신라 화랑들이 삼일포를 다녀간 기념으로 썼다는, '술랑 일행이 남석을 다녀가다'라는 여섯 글자가 남아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미륵의 당래하생을 서원하면서 은밀하게 찾아들던 비밀스런 곳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곳이기에 지게에 지고 온 매향비를 세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호수가 가로막고 미륵도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 곳이니, 누근들 이 매향비를 함부로 옮기지는 못하리라' 하면서.  위 글은 일제시대 삼일포에서  발견된 삼일포 매향비의 40행  369자를 풀어서 매향비 세우던 광경을 추리해본 것이다. 당시  강원도 각 포구마다 향나무를 베어 물 속에 넣은 뒤 그 증표로서 삼일포에 매향비를 세웠다.  매향비가 건립된 1309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349년 가을, 이곡이 그 삼일포를 다시 찾았다. <죽부인전>의 작가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올라가 있는 이곡은 <동문선>에 전해지는 <동유기>에 이렇게 썼다.  초4일에 일찍 일어나 삼일포에 이르렀다. 포는 성북 5리쯤에  있는데, 배에 올라 서남쪽 조그만 섬에 이르니, 덩글한 큰 돌이 있다.  그 꼭대기에 돌벽장이 있고, 그 안에 석불이 있으니, 세칭 미륵당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곡이 찾아갔을  당시에는 매향비뿐 아니라  석불도 있었고 미륵당도 있어, 미륵신앙의 '메카'였음이 틀림없다. 그뒤로도 매향비를 직접 보았다는 기록은 곳곳에 있다.  배를 옮겨 대고 사선정 남쪽의 작은 바위 봉우리에 오르니  짤막한 갈이 있는 데 마멸되어 글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이를  세상에 전하기를 '미륵 매향비'라고 한다.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이 1671년 여름에 금강산에 갔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호수의 섬에 들려  남긴 글이다. 박종(1735~1793년)이 1767년  경주 구경을 떠났다가 삼일포에도 들려서 쓴 기록인 <동경기행>에도  참향비라고 하여 향을 묻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단서암에 올라 침향비를 보고는 배를 타고 오른쪽 언덕에 이르러 걸어서 솔숲을 빠져나와 돌아보니, 중은  노를 저어 돌아가고  있는데 풍경이 한적하기로는 그만이다.  이처럼 삼일포 매향비는 후대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던 비석으로 조선시대 사람들만 해도 누구나 매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위당 정인보(1893~1950년) 선생이 금강산을 다녀오며 기술한 증언이 있다.  관동 해안에 향 묻은 곳이 많으니, 이는  불사라, 미륵하생할 때같이 용화회에 나게 해달라는 발원이라 한다. 호수 위에 매향비가 있었으므로 근재의 단갈사제의 시어가 이를 이름이다. - 조선일보 1933.8.3~9.7 연재  매향비가 세워지던 충선왕 원년이면 고려가  저물어가던 시기가 아닌가. 숫처녀와 내시를 바치는 등 원나라의 횡포에 나라가 어지러웠고 불교의 타락상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불교가 보여주었던  그릇된 행실을 새삼 탓해서 무엇하랴. 그러한 시대에 동해바다 변방에서  지방관리들에 의하여 매향의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당시 민중의 염원을 형식적이나마 풀어주려는 노력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삼일포 매향비는 1926년에 일본인 등전량책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 뒤 막상 매향비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단지 그가 탁본한 비문만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경로로  이 매향비가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높이 60cm, 가로 30cm, 세로 23cm에 불과한 작은 비였으니 집어 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모두 함께 그 섬으로 가서 옛일을 되새기며 용화회를 기다리던 당대  민중의 서원이나마 느껴볼 일이다.
   

침향의 비밀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스런 서원이 담겨져 있는 매향비란 무엇일까. 매향비는 글자 그대로, 향을 묻고 미륵 오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비문이다.  우리나라 불교사의 수수께끼?  바위에 글씨로 새겨진 비밀문서?  미륵세상을 찾아가는 해법... .
  이 모든 의문의 열쇠가 매향비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라가 좁다보니 비밀스런 것이 별반 없는데  반하여, 매향비는 우리들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해주는 탐구대상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매향비문을 보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현장을  찾아나선다면 실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삼일포  매향비문에는 삼척현 맹방촌에 향나무 15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맹방촌은 오늘날의 동해안  맹방해수욕장에 해당되며, 산봉우리가 아름답게 솟고 백사장이 좋아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삼일포 매향비에서 지적한 맹방에 가면 지금도 매향의례에 대한 촌로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매향비는 모조리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다년간 매향의례를 연구해온 공주대학교 이해준 박물관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교수는 예의 말투로 이렇게 되물었다.  "주 선생, 기지시 줄다리기 알지?"  "느닷없이 왠 기지시?"  "기지시 줄다리기에서 비녀목을 매년 물에 담가두었다가 쓰는 이유를 알겠어? 그게 바로 침향을 재활용한 것이여."  바닷물이나 개펄에 오랜 세월 향나무를 담가서 침향이 되면, 강철같이 단단해져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 충남 당진의 기지시 줄다리기에서 해마다 비녀목을 수렁에 담가두었다가 꺼내 쓰는 이유도 같은 이치다. 수천 명이 줄을 당겨도 암줄과 숫줄을 이어주는 비녀목이 부러지는 경우는 없었다.  향 자체의 비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찰에서 피우는 향은 늘 그을음이 생기므로 해마다 불상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침향은  그을음이 없어 귀하게 친다. 침향은 약재로도 쓰인다. 부적에  영험이 있다고 믿듯이, 어떤 과학성보다는 침향 성분의 신성성에 기대어 고급 약재로 인정된 것 같다.  침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는 사리함에서  잘 드러난다. 겉은 금동으로 감싸져 있고, 안에는 옥함이 있다. 그리고 옥함을 열면 사리와 직접 닿는 부분은 침향으로 되어 있다. 명품이라고 부를 만한 목재 불상 중에도 그 딱딱한 침향을 파서 조각한 것들이 다수 있다. 침향을 예사롭지 않게 대했던 옛 사람들의 경외심이 배어나온다.  개펄에 묻어둔 향목은 침향이 되면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이무기가 천 년이 되면 용으로 승천하듯이, 단순한 향목도 침향이  되면 '승천'한다. 미륵하생을 기다리는 민중들에게 침향의 상승은 바로 새로운 세상의 떠오름이 아니었을까.  매향비는 강물과 바닷물이 함수하는 개고랑에서 미륵을  기다리며 집단적으로 서원하던 당대 민중들의 장엄, 그 자체를 웅변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침향만 가지고는 '왜 바닷가의 민중들이 주로 매향을 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매향비, 혹은 민중의 염원
  서해바다 당진땅 안국사지에는 거대한 배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향을 묻었다는 기록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당진에서 조금 내려온 서산 해미읍성에서도 세종 9년(1427년) 지역민이 주동이 되어 미륵당래를  기원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진 해미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고창 선운사 일대에도 매향처가 있는데 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갯벌 속에서 향나무가 나왔다고 한다. 마침  이곳 출신 서정주 시인은  <천년을 가늠한 간절한 소원 - 선운사 침향>이라는 짧은 글에서,  산골을 흘러내리는 육수가 바다에서 산협을 기어올라오는 조수와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을 집어넣어 가라앉혀 두면 그게 침향이 된다는 것인데, 시간으로는 이건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에 그 향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 적어도 200~300년, 길게는 천 년  넘게 집어넣어 두어야만 향이 된다고 하니, 이것을 여기 집어넣던 이들은 자지가  살아서는 물론, 자기 아들이나 손자에게 써내 쓰게 하려고 이걸 이런 데 물 속에  집어넣어 둔 것은 절대로 아니다. - 조선일보 1977년 7월 16일자
  실제로 인천강에서 건진 향목을 구해다가 선운사  대법회에서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바로 그 인천강은 이름난 풍천장어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전국에 이름을 떨치던 풍천장어는 사라지고 없으나, 그  옛날 풍천장어들은 침향된 향나무에서 뿜어내는 향내를 맡으며 자랐으니 남다른 향미를 가졌던 것일까.  고창 바로 밑인 영광의 법성포에서도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더 밑으로 내려가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영암군의 엄길리에  가면 쇠바위라 부르는  작은 바위산이 들판에 우뚝 솟아 있다. 우뚝한 바위들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바위 형태가 흡사 여성의 '그것'처럼 움푹 들어갔고 가운데는 나무가 웃자라고 있다.  바위가 갈라진 틈새로 덤불이 우거져서  접근을 가로막았다. 600여 년이 넘는 세월, 잘 보존되어 온 연유를 거제서야 깨달았다.  막상 육안으로 보면 쉽게 보이지 않으나 탁본 결과 암벽의 한쪽 벽에 총 18행 129자가 음각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충목왕 원년(1344년)의 기록이다.  해남의 맹진 바닷가에 이르면 예로부터 보물 내력을  담은 글자바위가 있다고 믿어온 만대산이 나타난다. 글자바위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으며, 바위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면 서족 벽면에 희미한 글자가 나타난다. 역시 매향에 대한 기록이다. 하찮은 전설일지라도 유의만  하면 매향비를 찾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다.  남해바다 장흥땅의 삼십포가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세워진 장흥 매향비(1434년)는 가로 세로 높이 각  4m 정도의 정방형 바위에 이렇게  비문이 적혀 있다. '천인이 같이 서원하여 향을 묻었다'라고. 대단히 서투르고 엉성한 글씨. 배운 자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신안 앞바다 암태도에서도 매향비(1405년)가 속속 발견되었다.  목포대학교 암태도 학술조사단에 의해 비석거리라 불리는 개활지에서 발견되었다.  경상도로 접어들어 남해고속도로 부근의 사천군 홍사리에 가면 1970년대에 일직이 발견된 사천  매향비가 있다.  고려 말  우왕 13년(1387년) 사천의  지방민 4,100여 명이 모여 세웠다. 당시 인구수에  비하면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갯고랑에 모여서  미륵하생을 서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의례의 장엄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렇게 동해안만이 아니라 서, 남해안에서도 매향비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국의 해안 곳곳에서 매향의례가 있었다는 말이다.  매향은 대체로 말단 지방사회를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발원자들이 느끼는 현실적 위기감을 반영한 민간신앙에서 나왔다는 점으로 보면, 어떤 시대적인 위기감이나 전환기에 처한 지방민의 동향, 그 자체였다. 심리적  불안감에서 나온 집단적 제의, 그리고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 투영된 것이다.  중앙권력이 덜 미치는 바닷가는 늘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이런 어수선한 세월에  평화와 안녕을 담은 절절한 염원을 미륵불에 의탁하여 집단적으로 서원했다.  여기에 용화세계를 꿈꾸던 미륵도들의 비밀결사의례가 결합, 기존의 세계와 질서에 대한 변혁의지까지 담았다. 말단 지방수령들조차 이 대열에 참여했던 것은 그런  민중적 요구가 광범위했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현존 매향비의 태반이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다. 매향비는 흡사 해적들이 남긴 '보물지도'처럼 미륵신앙이나 밀교의 비밀과 맞닿아 있다. 사천 매향비를 제외하고는 비문의 글씨가 워낙 소략하여 전모를 알기가 어려운 데다가  왜 하필 매향으로 그 집단적 염원을 담았을까 하는 점이다.    팔금도의 매향비를 지명수배하며  매향비 자료를 이리저리 구하다가  문헌 하나를 찾게 되었다.  <세종실록>(15권)에 보면 세종 4년(1422년) 2월 29일, 침향을 찾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의 전모는 이렇다.  태상왕이 성균 직강 권극화를  보내어 나주의 팔흠도에서  침향을 캐게 하다. 이보다 먼저 극화가 나주 군수로 재임시에 염분을 살피기 위해 팔흠도에 이르렀다. 자그마한 비가 풀 속에 있어, 비명에 대체로 이르기를, '통화 20년, 중과 속인의 향도 300여인이 침수향을  만드는 일로 충현  정남방 백보 지점에 있었는데, 그 기간은 100년까지'라고 하였다. 극화가 그런 내용의  글씨를 써서 올렸으므로 사람을 보냈더니, 마침내 찾지 못하고 돌아오다.  요나라 연호인 통화 20년이면 1002년이며, 고려조로 따지면  익종 5년. 팔흠도는 지금의 신안군 팔금도.  신안 앞바다에서 중과  속인 향도 300명이 무리지어 침향의례를 행하였다.  권극화는 1422년보다 이른 시기에 나주군수를 지낼 적에 매향비를 발견하였으니, 약 400여 년 뒤에 매향비가 풀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가지 발견된 여러 매향비들이 제시하는 연도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000년대에 이미 매향의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결론인데, 문헌상으로는  가장 앞선 시기가 아닌가 한다. 호남 일대 지방관인 권극화가 직접 매향비를 발견하였다고 하니, 세종실록의 기록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매향비는 이제껏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금 팔금도에 간다고 하여 이 매향비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 비문이 파괴되지만 않았다면 섬 어딘가에  여전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팔금도에 갈 일이 있으면, 부디 매향비를 찾아보시길!  미륵에 의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민중들의 삶의  증거물인 이들 금석문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가 전체상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곳곳에 숨어 있던 매향이 그야말로 '말법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미륵불시대가 오면 그 비밀스런 자태를 드러낼까. 이제  우리들도 매향비에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가득 쏟아부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글씨가 씌어진 비문을 발견하면 누구든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