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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by 바로요거 2008. 3. 27.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지은이 : 주강현
  출판사 : 한겨레신문사


  '도깨비 없이 자라난 세대'를 위한 우리 문화론
 

1권을 펴낸지 불과 반 년 만에 2권을 내게  되었다.

 첫 번째 책이 많은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또 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계획한 것이 두 권 분량이었다.  1권을 펴낸 후 참으로 많은 격려와 호응을 받았다. 과분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1권을 펴낸 뒤로 강연요청이 쇄도하였는데, 우리 문화 포교사 역할을  자임했던 나로서는 가능하면 이에  응하였다.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들을 다수 만나면서 새삼 우리 문화의 희망을  읽은 것은 내게는 신선한 개안이었다. 만나 본  이들의 깊은 관심과 애정에 우리 문화의  포교사로서의 깊은 책무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를 강조하고  싶다. 새로운 글쓰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1980년대 중반에 공단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늘 노동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더불어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를 마시며 삶과 운동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원을 이미 마친 상태였는데, 대학에서는 늘  지식의 독점적 지분만을 따지는 분위기였다. 도대체 지식이란 무엇인가? 혼자만 읽고, 끼리끼리만 암호해독을 하듯 주고, 받고,  급기야 그 주고받음에서 소외된 보통 사람들을  '정보 사회의 낙오자' 취급하는 것,  그것이 소위 지식인가.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은 혼자서 가는 길보다 훨씬 행복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새로운 글쓰기를 꿈꾸는 이유다.  그렇다면 새로운 글쓰기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나.

 연암  박지원은 박제가의 <초정집>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예전 것을 본받은 자가 너무 옛것에만 집착하고, 창신하는 자는 규범을  따르지 않음이 우려되니,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 능히 규범을 따를 줄 안다면  오늘의 글이 예전의 글과 같으리라."

 구한말의 문사 이건창은  "배우는 데 쉬운 것으로 하는 것은 도로 들어가는 기틀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쉽고 새롭되 규범과 어우러지는 것. 그런 글쓰기야말로 글쓰는 이들이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게 아니던가. 나는 그 이상을 향해 부단히 노력을 하고 싶다. 

 여기서 다루는 우리 문화는 너무나 흔해빠져서 막상 아무도 챙기지 않는 것들이다. 남근과 여근, 금줄, 미륵반가사유상,  흰옷, 개고기, 숫자 3, 돌하르방, 솟대, 서낭당, 유랑예인, 배꼽,  동성동본 불혼, 똥돼지, 매향비, 풍물굿,  무당, 두레, 구들, 바위그림,  생명나무, 장례와 제사, 모정과  누정, 장승, 욕설, 도깨비,  여신과 남신......
  하지만 나는  확신을 갖고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문화를  내세우고자 한다.
왜냐하면 늘 우리 곁에 있기에 눈여겨보지 않던 문화야말로 우리 문화의 진정한 속살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엽에 우리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은 된장 냄새를 맡고서 '썩은  냄새'라고 했다.  장승은 우상이라고 하였고, 무당은  무조건 미신이라고 하였으며, 풍물굿은 시끄럽다고, 당수나무는  베어버리자는 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에 치즈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 냄새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었는가.  이미 나는 1권에서  우리 문화의 전략화를 강력히 제기한 바  있다. 식혜가 깡통을 만나고,  구들이 겹구들을 만나고,  된장이 항암전선에  투입되고, 도깨비가 21세기 컴퓨터 그래픽으로 되살아나고......  또한 2권에서도 전통  시대의 가부장문화에 대한 반대한다는 견해를 단호하게 표명하였다. 우리들은 가부장문화의 부산물인 '내숭주의'에 온통 빠져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오로지 정치,  경제, 예절 따위에만 빠져서 성관계조차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될 정도다.  우리들이 잘못 배워 온, 유교적 엄숙주의를 21세기에까지 강요하려는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는데 이 책이 작은 무기로 쓰여지길 기대한다.  서구열강의 침략 앞에서 동양 제국의  뜻있는 이들은 '동도서기'를 부르짖었다.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다.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동도서기를 적용해야  할 듯 하지만, 나는 도리어 이 시점에서 동도동기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당수나무를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 우리들의 숲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간당하듯 처참하게 몰살당하였다. 무자비한  개발과 발전, 근대화, 현대화 따위로 우리가 얻은 게  무언지 새삼 반성해야 할 때다.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전환, 동도동기를 통한 우리 문화의 새로운 전략 수립, 그것이 절실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나의 우리  문화 탐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10여권의 저서를 냈다.  적지 않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시작이란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우리 문화라는 알려지지 않은 전인미답의 숲길은 아직도 먼 느낌이다.  사람들이 자주 나의  공부와 집필 방식에 관하여 물어온다. 그러나  나 자신은 막상 들려줄 말이 없다. 나는 참으로 요령 없이 공부한다. 어떤 이론공부를 하고 이를 적용시키는 식의  탁상물림 방식은 애초부터 체질에 맞지 않는다.  나는 무조건 현장으로 떠난다. 삶과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고, 농기구를 줄자로 재고, 함께 소주를 마시고,  돌아와서는 부지런히 카드를 정리하고......  늘상 그런 식이다. 본업이 학자이니 책을 등한시할 리야 없지만  나의 작업은 늘상 현장에서 거의 이루어진다.  2권을 마무리하면서 단단히 결심한 게 하나  있다. 우리 문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혼자 가는 길보다는 여럿이 가는 길이 낫기에, 우리 문화 길잡이들이  길목에서 지킴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글을 쓰기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은 분들의  노고를 어찌 다 잊겠는가, 학계의 연구성과에  기초하였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신문연재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일찍이 표명해 준  한겨레신문사 문화부, 책이 간행되기까지 온갖 것을 챙겨준 출판부에 감사할 뿐이다. 그  밖에도 많은 분들의 애정에 대해 어찌 필설로 다 쓸 수 있으리오.  또 하나를 마무리지었으니 이제 늘 꿈꾸던  현장으로 떠나야겠다. 그것만이 늘상 안일해지기 쉬운  마음을 경계하는 길이 아닐까.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1996년 12월 초순 장안벌에서 주강현

 

도깨비, 벽사상징의 원형질

 

천년유혼, 연년이 이어져온 원형질
  민속미술 강의시간에 대학원생들에게  '우리 문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문양'을 한 개 꼽아 보라고  했더니 도깨비문양이 수위였다. 얼마 전, 모 어린이 신문에서 가장 많이 읽을 뿐더러  재미있는 옛이야기 베스트 10을 선정했을 때도 도깨비 이야기가 가장  많이 꼽혔다. 도대체 도깨비가 무엇이길래 천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면서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을까.
  도깨비, 약간은 익살스러우면서도 뿔과 이빨을 드러낸 괴물. 이 도깨비는 물론 환상이고 상징이다. 선조들은  그러한 환상을 가지고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기왓장에조차 그려넣는 삶의 지혜를 즐겨왔다. 허구는 창작력을 북돋고, 창작력은 수많은 가변성을 낳기 때문인지 도깨비 가족들은 가지에 가지를 쳐서 늘어났다.  그럼 도깨비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존재일까.  도깨비의 정체를 탐구하려는 노
력은 다각도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명쾌한 답변에는 이르지 못하고 아직은 이러저러한 가설만 있을 뿐이다.  도깨비는 언제부터 있어 왔는가. 그 이름도 도채비, 돗가비, 독갑이, 도각귀, 귀것, 망량, 영감, 물참봉, 김서방, 허체,  허주 등 다양하다. 지역에 따른 방언도 많아 돛재비,  또개비, 토째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만큼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이고,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깨비 박사인  김종대 박사(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는 15세기부터  나타나는 '돗가비'라는 용어에 주목하면서 도깨비 문화가 조선 전기의 소산이라고 본다.  <월인석보>에 '망량은 돗가비'라 하였고,  <역어유해>는 '독갑이', <계축일기>에서도 '독갑이'라 하였다. '그것'이라고 표기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고대의 도상을 보면  이미 더 앞선 시기에 수많은 도깨비가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도깨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랜 옛날로 소급되지 않을까.  아직 논란이 많은 대목이기는  하다. 도깨비의 범주를 정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벽사적인 상징물을 모두 도깨비라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깨비를 극히 좁은 범위로만 규정짓기도  어려운 탓이다. 나는 도깨비의 역사를 "고대사회에서  출현하여 조선 시대에 다시금 꽃을 피웠다"고  정리하고 싶다.  자연을 극복하는 끝없는 싸움  속에서 사람들은 비, 바람, 구름, 번개, 천둥 따위를 관장하는 신을  창조하였고, 자연재해로부터 액운을 막아주는  수호신을 필요로 하였다.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올 때도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와서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였다. 이들 각각의 직능신들은 훗날 민간신앙으로 귀착된다. 바람의 신인 영등신, 뇌성을 일으키는 벼락대신 따위가 그들이다. 도깨비 출생의 역사도 이 같은 직능신에서 출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벽화에 도깨비에 가까운 문양이 선보인 점으로 미루어 고대 사회는 우리식 도깨비의 기초를 닦은 시기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과학보다는 초자연적인 미신에 의존하던  시절에 형성된 이 같은  관념들은 조선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성호 이익  같은 이는 자연의 영기가 모여서 도깨비를  만들었다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고대사회에 1차 완성을 보았던 도깨비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복잡하고 다양한 형식으로 변화,  발전한다. 허구와 상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도깨비 동네를 채워 나간 것이다. 반면에 고대사회에서  형성된 도상들은 차츰 단순해지는 양상도 나타났다.  조선 시대의 풍부해진 도깨비 문화 속에서 민중은 분명히 도깨비를 나름의 어떤 상징으로 규정지었을 터이다. 그들의 관념 속에 형성된 그 무엇, 그것은 도깨비의 역사, 문화적 원형질일  것이다. 그 원형질을 찾는 일이야말로 도깨비의 정체를 밝히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원형질로 인정될 만한 분명한 것이 있다. 도깨비가  악귀를 쫓는 귀면 혹은 벽사수면상이라는 점이다. 나는 벽사상징으로서의  변하지 않는 원형질을 도깨비의 알파요, 오메가라 생각한다.  그 형태가 어떻든간에 중요한 것은 벽사상징이라는 원형질이 아닐까.  동아족의 고유한 도상  도깨비의 원형질  탐구라는 정말 '도깨비 같은'  과제와 씨름하면서 나는 문득 대학시절에 읽은 허버트 리드의 역저 <도상과  사상>을  떠올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지는 그것이 내가 일컫는 바 도상이라는  조형예술로 나타날 때, 인간의식의 발전에 있어, 그리고 그 의식에 따른  적절성과 기교성의 발전에 있어 사상보다 선행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의 손을 통해 한국어판으로 나온 그 책은 구석기 시대 인류문화의 태동기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4백세기에 걸친 방대한 미술의 역사에서 도상이 의식을 선행함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내가 왜 도깨비 원형질 탐구에서 리드의 주장을 떠올렸을까.  도깨비의 신비를  밝혀주는 고대 문헌은  거의 없다. 반면에  우리들은 풍부한 도상으로 도깨비를 접할  수 있다. 도상의 규명은 도깨비 원형질  탐구의 첩경이 되어줄 것이다.   경주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뒤편, 동해 쪽에 자리잡은 장항사터를  찾아간 적
이 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폐사지에 동, 서탑이 전한다. 손연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의  안내로 탑들을 친견하다가 우연히  자물쇠로 상징화된 도깨비 한 쌍을  발견하였다. 조선 후기 자물쇠에도 영낙없이 비슷한  것들이 다수 전해지니, 천여 년을 사이에 두고  도깨비의 벽사수호신으로서의 원형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도깨비 도상의 원형을  중국 사례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치우의  형상이 그것이다. 중국신화학의  대가 원가는 <중국고대신화>에서 치우가  인간에게는 악신으로 낙인 찍혀 있지만 사실은 용감무쌍한  거인족의 이름에 불과했다고 하였다. 그는 치우가 구리  머리에다 쇠 이마, 짐승 몸집이지만 사람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보았다. 사람의 몸집에 소의 발굽을 하고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으며, 어떤 전설에는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나 있고 귀밑의 수염이 마치 창처럼 뻗어 있다고 했다. 이 밖에  여덟 개의 손과 다리를 갖고 있다는 전설도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치우는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속하는 존재였다. 치우는 분명히 고대 중국인들이 꿈꾸었던 벽사신으로 보인다. 혹자는 치우를 상, 주 시대에  유행했던 도철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여씨춘추>에서는 도철에 관하여 "주나라 솥에 도철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만 있고 몸이 없다."고  하였다. 북송 이래 중국의  금석학자들은 모두 이 설명에  근거하여 상주 시대 청동기에 흔히 보이는 괴상한 동물의 얼굴을 도철이라 불렀다.  나는 우리 도깨비 도상의 기원을 치우나 도철에서 찾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중국 청동기 문양에  도깨비와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대 문화가 지니는 문화사적 유사성으로 보아야지 직접적 영향관계로 유추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비슷한 것만 나오면 중국의 영향  운운하는 주장은 또 다른 모화주의에 다름아니다.
  하버드 대학 인류학과 장광식 교수가 <신화, 미술, 제사>에서 쓴 바에 따르면, 동물문양은 은상과 서주  초기의 청동장식예술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도철 문양은 그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하대는 기원전  2205-기원전  1766, 상대는  기원전  1766-기원전 1122, 주대는 기원전 1122-기원전 256으로 어림잡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하상주 시대의 문화가 그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 고대문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가설이 가능할까. 우선  우리의 삼국 시대와 중국의 하상주 시대는  시기부터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의 선조들은 벽사상징물로 도깨비를 창조했고, 그  도상이 성립되고 난 다음에야 도상에 따른  자세한 설명이 뒤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벽사를  위한 무서운 인물상을  만들다 보니, 그들 인물이  반인반수의 특질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중국 고대 신화,  지리서인 <산해경>을 보면 복잡한 괴수들이 보이거니와,  동물문양 같은  인물군은 고대문화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따라서 동북  아시아 고대 문명의 하나인  동이족의 문화에서 도깨비의 독자적  출현은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내가 서두에 허버트 리드를 들먹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 예증을 더 찾아 볼 필요가 있다면 윤회의 바퀴를 나타낸 티벳의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19세기에 그린 생명의 바퀴라는  그림으로,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가 <시간-리듬과 휴지>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림 중앙의 돼지, 닭,  뱀의 세 마리 동물들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이 바퀴를 계속 돌게 한다.  오른쪽의 인물들은 지옥으로 하강
하고 있으며, 악귀들에게  고문을 당한다. 왼쪽의 사람들은  승천하고 있는데, 꼭대기에는 승리의  깃발을 든 수행자가  있다. 그는 바퀴로부터  빠져나가 업보에 눌린 존재들의 세계를 영원히 떠나려고 하는 참이다.  바퀴 주위의 이 여섯 사람은 구원의 사명을 띤 관음 보살이 방문했던  중생의 여섯 가지 운명을 상징한다. 바퀴를 감싸안은 괴물은 모든 존재를 삼키는 아니티야타(무상)이다.  아니티야타를 유심히 보면,  우리의 도깨비와 다를 바가 없음을 금세  알게 된다. 특히나  사찰에 있는 도깨비 도상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도깨비는 인도에서 왔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불교 전래 훨씬 이전에 이미 고구려 벽화에 도깨비가 등장한 사실을 보면 무관한 게 분명하다.  이제 하나의 작은  결론이 나온다. 우리의 도깨비는 우리 민족  고유의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우리 도깨비는 동이족  고유의 벽사상징으로서의 원형질을 그 문화적 근거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깨비의 전형적인  도상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도깨비의 영역을 넓게 잡아 그들  친인척까지 끌어들여 다양한 석수들도 포함시킨다면 벽사신으로서 도깨비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진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도깨비 범위를 너무 넓게 잡다  보면 귀면 모두를 도깨비로 몰아가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도깨비의 도상 범위는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그 누가 정확하게 그을  수 있겠으며,그렇게 단정적으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근거가 있겠는가.  도깨비는 어차피 관념문화의 소산이므로  영역을 정하는 것도 관념적이고  극히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괄적인 범위로 설정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도깨비로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대개 기왓장이다. 집을 세우고 지붕을 덮을 때  끝에 있는 망와에 도깨비문양을 그려넣는다. 망와란  망을 보는 기와라는 뜻이다. 무서운 도깨비가 망와에 그려져  있으면 집안에 들어오려던 악귀가 물러간다는 믿음에서 도깨비가 등장하였다. 와당의  도깨비 모양은 워낙 많기 때문에 사가들은 도깨비와당, 이른바 귀면와에서  어떤 도상적 기준치를 찾는다.  물론 연구자에  따라서 귀면와는 도깨비가  아니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해동잡록> 에는 귀면와가 곧바로 도깨비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진다.  창손이란 사람은  정승 벼슬을 20년이나  한 사람으로 지금은  90세가 되었다. 어느 날 자기 집에 갑자기 요귀가 출몰했다.  어디선지 모르나 대낮에 돌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지는 권세가인 창손의  집인데 감히 누가 이런 짓을 하겠는가 하고 그는 재빨리 지붕에 올라가  귀와를 불에 태웠다. 그러자 요귀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깨비가 기와가  만나는 전통은 상당히  오래 전으로 소급된다.  고구려 붉은 와당의 약간은 우스꽝스런 도깨비, 백제 와당의  복잡하면서도 단순 소박한 도깨비, 통일 신라의 대단히 정교하면서 뚜렷한 형태의  도깨비 등 도깨비 기와의 전통은 삼국 시대까지 소급된다. 와당을 보면 도깨비의  기원이 악귀  쫓는 벽사의례의 관념적 소산이라는 것도 분명해진다.  절이나 궁궐의 석수,  문살문양에도 도깨비가 등장한다. 청도  운문사, 부안 내소사, 경주 불국사  등의 대웅전 문이나 단청 가운데도 도깨비문양이  그려져 있다. 절은 수호한다는 상징이다. 여천 흥국사, 범어사, 창덕궁 금천교 등에도 도깨비 형상의 석수가 자리잡아 절이나 궁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나타난다. 범어사의 석수는 껄껄 웃는 도깨비 얼굴에 네발 동물이 두 발만을 살짝 드러낸 형상이다. 대흥사 도깨비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점잖은 장수상으로서, 도깨비라기보다는 도깨비들을 부리는  장수의 모습이다. 통도사 감로탱화  가운데는 박쥐처럼 생긴 뇌공이 북채를 들고서 8방의 북을 두드리면서 휘돌아다니는 그림이 등장한다. 벽사수호의 문배그림처럼 문짝에 그려넣은 사찰 도깨비들도 상당수 있다.  이 외에도 도깨비 도상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역시 가장 오래 되기는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도깨비 도상일 것이다.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된 도깨비가 부릅뜬  눈으로 악귀를 쫓는  형상이다. 이들 도깨비는  한결같이 무서운 표정이다. 그렇지만 잘 뜯어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무서우면서도 우스꽝스런 표정은 바로  장승의 표정과도 일치된다. 외경심과 해학성이 고루  섞여 있다고나 할까. 바로 도깨비 자체의 양면성이 도상에 반영된 결과다.  실상 도깨비 도상에  관해서는 이론이 구구하다. 악귀를 쫓는 여타  다른 귀면
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도 생긴다. 몽당빗자루 도깨비, 차일 도깨비, 등불 도깨비, 강아지 도깨비 등 여러 가지 도깨비도 전설로는 전해지나 실체는 불분명하다.  도깨비의 전신을 설명한다면 다리가 하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도깨비와 씨름을 하다가 한쪽 다리가 없는 도깨비인지라 무사히 이겨내고 살아 왔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깨비의 모습이  이렇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 모습이 다양할 뿐더러 혼재되어 있고, 도깨비 자체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상징물인 탓이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그 존재를  믿어온 것을 보면 도깨비가 악귀를 쫓는 민중적 믿음의 대상으로,  민중의 삶 속에 전해져 왔음이 잘 드러난다.

 

 민중성을 획득한 도깨비 이야기
  <용재총화>를 쓴 성현의 외숙인 안부윤이 젊었을 적 이야기다.
  파리한 말을 타고 어린 종  하나를 데리고 서원 별장으로 가는데 10리쯤 가자 캄캄한 밤이  되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없더니 동쪽  현성 쪽에서 횃불이 비치고  떠들썩하여 유렵하는 것  같았다. 그 기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좌우를 삥 두른 것이 5리나 되는데  빈틈없이 모두 도깨비불이었다. 공이 진퇴유곡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직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7-8리를 나아가니 도깨비불이 모두 흩어졌다. 하늘은  흐려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는데, 길은 더욱 험해졌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귀신이 도망간 것을 기뻐하여  공포심이 진정되었다.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산기슭을 돌아 내려가는데 앞서 보던 도깨비불이 겹겹이 앞길을 막았다. 공은  계책도 없이 칼을 뽑아  크게 소리치며 돌입하니, 그 불이 일시에 모두 흩어지더니 우거진  풀숲으로 들어가면서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었다. 공은 별장에  도착하여서도 마음이 초조하여 창에 의지한 채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비복들은 솔불을 켜놓고  앉아서 길쌈을 하고 있었다. 공은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함을  보고 큰소리로, "이 귀신이  또 왔구나"하며 칼을 들고  치니, 좌우에 있던 그릇들이 모두 깨지고 비복은 겨우 위험을 면하였다.  이 도깨비불 이야기를 보면 성현이 살던 16세기 초반에도 도깨비 이야기 구조는 오늘날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산길 모퉁이, 날이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도깨비가  출현하는 것도 지금과 같다. <용재총화>의 도깨비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도깨비 이야기는 널리 퍼져 민중 속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권력자의 무덤이나 사찰 같은 귀족문화를  치장하던 도깨비들이 어느 시기엔가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내려온 것 같다.  도깨비 이야기의 첫  문헌 정착이기도 한 <삼국유사>  진평왕조를 보면, 비형이라는 도깨비 두목이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 도량에  큰 다리를 놓아, 귀교란 다
리 이름이 붙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청송군 부남면  화장동에도 '도깨비 다리'라는 신비한 돌다리가  있다. 중국설 화집인 <유양잡조>에는  도깨비 방망이류 설화가 신라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도깨비 이야기가 후대에 널리  퍼지고 발전한 결과이다. 민중의 입과 입을 통해 이러저러한 내용이 첨가되어 도깨비 이야기는 날로 풍성해진다. 역사적 상상력이  허락된다면, 대략 조선 후기  민중의식이 솟구치던 시절, 장승 따위가 나름의 정형성을 획득하고 이른바 민중적 예술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여러 장르의 서사적 구조가 정착되면서 도깨비도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오늘날 도깨비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들도 연원은 멀리 고대사회로  이어짐이 분명하나, 지금 같은 기름진 토양을  확보한 것은 역시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한다.
  그럼 도깨비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도깨비  방망이'는 대단한 효력이 있어 가히  요술 방망이라 할 만하다. '도깨비 잔치'는  흥겨운 신명의 흐드러짐이 엿보인다. '도깨비가 오실  만한 날'이라면 무언가 흐릿하고 스산한 날이다. "도깨비불에 홀린다"는 뜻에는 시골 밤길에 떠도는 불빛이 연상된다.  김종대 박사는 도깨비 이야기 3백여 편을  분석하여 도깨비 방망이 얻기, 도깨비를 이용해 부자 되기,  도깨비와 대결하기, 도깨비에게 홀리기, 도깨비를 보기, 도깨비 은인 되기, 도깨비가 암시하기, 기타 유형을 여덟 가지로 분석, 정리했다. 하지만 이야기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 곤란할 정도다.  도깨비는 출발 자체가  벽사수호신이었기에 여느 사악한 잡귀와는  다르다. 도깨비는 어떤 귀신일까.  주자는 말하기를, "이르러 펴는 것은  신이 되고, 돌이켜 돌아가는 것은 귀가 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은 <담헌서>에서"하늘을 신이라 하고,  땅을 지라 하고, 사람을  귀라 하나 그 실은  하나다"라고 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과 죽은 사람의 혼백도 하나로 보았다. 귀신을 이기의 영능으로 보았기에 신은 이가 아님이 명백한데도 이로서만 귀신을 말함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홍대용이  지적한 바대로 이것만을 가지고 귀신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홍대용이 살던 시절에는 아직 이익이 생존하고 있어 실을 숭상하고 용을 힘쓰는 많은 이들이 이익을 따르고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귀는 음의 영이고, 신은 양의 영이라고 보았다. 이익도 음양이 하나이기 때문에 귀와 신도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도깨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추측컨대 큰물이 져서 산이 무너지고 언덕이 없어졌다는 그 시대에 사람과 귀신이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면 사람을 해치는 도깨비도  많았을 것이다. 그 중 제일은 사람에게 걱정되는 것은 이매 망량이란 것인 바, 공자도  이르기를, "나무와 돌로서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이 기와 망량이다"라고 하였다. 대제 이 망량이란 따위는 나무로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이 많다.  도깨비는 실제로 '괴상한  짓'을 많이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인간에게 해코지만 하는 미물은 아니다.  허깨비가 몹쓸 환상이라면 도깨비는 쓸 만한 환상이다. 쓸 만한 환상은 꿈을 불러일으키고, 그 꿈은 문화를 다채롭게 한다. 꿈을 불러일으키는 도깨비가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었던 조선 시대에는 구전문학도 르네상스를 맞았음을  상기해 보라. 도깨비는  아무때나 출몰하지는 않는다. '낮도깨비'란 속담이 있듯 정상적인 도깨비라면 밤에 나타나야  한다는 규정성도 지닌다. 밤은 성스러움이고, 음지이며, 습한  것이다. 바위나 나무 같은  자연물이 도깨비로 둔갑하여 사람을 홀린다.  한낮에는 숨이 있다가 해가 지면 슬그머니  걸어나와 길손을 유인한다. <용재  총화>를 보면 도깨비가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의 전형성을 잘 드러내준다.
  도깨비는 아예 형체가 없기도 하다. <어우야담>에 도깨비집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가 무너진 후, 송도에 빈집이 있었는데 도깨비가  나온다 하여 아무도 그 집에 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상인이 그 집을 싸게 샀다. 절구질을 할 때마다 벽에서 소리가 나기에 벽을  허물어 안을 보니 온갖 금은 보화가  있었다. 글도 있었는데, 고려의 환관들이  난을 만나서 보화를 감추고 벽을 이중으로  했다는 것이다. 벽의 일부가 비었으니 울리는 소리가 나서 도깨비 소리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도깨비는 형체 없이 소리나 빛으로만  출몰하기도 한다. 지금도 흉갓집으로 알려진 도깨비집이 신문 지상에까지 화제로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가 아닌가.  또한 도깨비는 변신에 능하다. 옛사람들은 손때 묻은 빗자루나 부지깽이, 절구공이 등이 도깨비로  변할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김학선은 설화를  분석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물건 도깨비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밝혔다. 사발 도깨비, 종지 도깨비, 쟁반 도깨비, 망치 도깨비, 낫 도깨비, 꽹과리 도깨비, 징 도깨비,  부지깽이 도깨비, 솥 도깨비, 주걱 도깨비, 도리깨 도깨비, 멍석 도깨비, 짚신 도깨비,  나막신 도깨비, 달걀 도깨비, 방울 도깨비, 갓 도깨비, 메주 도깨비......  왜 하필이면 손때  묻은 빗자루 따위일까. 사람의 손때가 묻었다는  것은 사람의 기가 물건에  전해져 영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도깨비가 될 수 있으니  일종의 변신인 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러한 물건들은 반드시 태워 없애는  습관이 있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도깨비의 발생을 논하면서, 물건에 영력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주물신앙과는 판이하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도깨비로 생성되는  과정을 중시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판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인 셈이다. 이 점을 보면 어떤 인간 중심적 사고가 돋보이는 것 같다.  도깨비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는 도깨비가 멍청한 짓을 자주 한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똑똑한 체하다가  당하고 마는 도깨비, 아니면 약은 꾀로 도깨비를 이용하다가 당하고 마는 사람, 도깨비가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허점을 드러낸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적이다.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고,  미녀를 탐하고, 수수팥떡을 좋아하고, 시기와 질투도 있고 멍청하기도 하다. 우리들 인간사의 파노라마와 다를 바 없다.  마실을 다녀오다가 도깨비와 밤새워  씨름을 겨루었는데 날이 새고 보니 애꿎은 빗자루 몽둥이를  껴안고 씨름 벌이고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  돈을 빌려주었더니 매일 돈을  갚으러 와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혹부리와  도깨비 방망이를 바꾼 이야기  등 도깨비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일본이나 중국의 귀신과는 달리 결코 잔인하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도깨비를 위한 집단적 의례
  도깨비는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의 굿으로도 전승되었다. 진도에  가 보면 도깨비굿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권에 소개한 바 있다. 마을에 어려움이 닥치면 여자들이 나서서 도깨비굿을  행한다.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든다거나 전염병이 들어 액운이 닥쳐오면 여성들 특유의 주술을 통하여 액을 물리치고자 한다.  마을 남자들이 방안에 틀어박혀서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동안에 가면을  쓴 마을 여자들이 긴  장대에 여자들의 월경서답을 내걸어 휘젓고 다닌다. 은밀한 부분을 공개하여 악귀에  대항하고자 하는 벽사의례의 한 전형이다.  남도에서는 매년 2월 초하룻날 도깨비굿을 쳐서 도깨비를 가두어 두었다가 농사철이 지난 다음인 중구날에 다시 도깨비를 풀어주는 도깨비제를 행하게 된다.  도깨비굿이 벌어지면 동네가 한 바탕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이처럼 도깨비는 주술의 대상으로서,  인간에게 해코지를 해서는 아니되는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는 것이다.  서해안에서는 도깨비참봉 혹은 물참봉이라는  도깨비에게 고사를 지낸다. 주로 선착장 주변에  살면서 어민들을 도와준다고  하는데 형체가 알려진  바는 없다. 고기 싣고 오는 갯가의 뱃머리에 사는 까닭에 갯가의 나물을 참봉나무로 정해두고 간단한 고사를 올려준다.  바다의 큰 신에게는 일 년에 한두  차례 큰 뱃고사를 하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지만 참봉을 풀어먹이지 못하면 심술이 나서 온갖훼방을 놓는다는 것이다.  대개 밥덩이나 떡  같은 제물 약간을 물가에 뿌려서 참봉을  달래준다. 현재는 거의 사라졌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해안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도깨비 참봉 고사이다.  조기 떼 우는 소리에 밤잠을  못 이루었다는 칠산 앞바다 위도에 가면 띠뱃놀이를 볼 수 있다. 풍어제를 끝낸 칠산어민들이  짚배를 만들어 제물을 싣고 도깨비 여럿을 선원으로 태워 보낸다.  망망대해로 나간 이들 도깨비  선원들은 어부들의 뱃일도 도와주고 조기 떼도 몰아준다. 학자에 따라서는 도깨비가 아니라 수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도깨비영감,  도깨비참봉이 집안을 지켜주거나  물고기를 몰아다준단다. 도깨비가 집안의 수호신인 일월조상, 어선의 선신, 부신, 대장간의 신, 마을 당신 등으로  등장한다. 특히 제주도 도깨비는 부신으로 멸치와  갈치를 몰아다 주는 풍어신이  되고 있다. 도깨비가 수수떡과 수수밥을 좋아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것들을 차려 놓고 도깨비를 풀어먹인다.  반면에 제주도 도깨비는 변덕도 심하고 사람들에게  골탕도 잘 먹인다. 심지어 병을 일으키게까지 한다.  영감놀이는 도깨비신이 범접하여 일어난  병을 치료하는 굿이다. 이 굿은 병을 고치는 의례로써 행할  뿐 아니라 어선을 새로 지어 선왕을 모셔  앉힐 경우나 마을신에  대한 당굿으로서도 행한다.  도깨비의 변덕을 달래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감굿은 밤에 행하는데  제주도 무당인 심방이 신을 청하면 영감신으로 분장한  심방이 등장하여 연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어두운 밤에 얼굴을 가린 도깨비들이 횃불을 들고  나오는, 참으로 재미있는 연극 한 토막인 셈이다. 이처럼 도깨비는 굿판, 연극판에서도 전승되어 왔다.  의례로 표현된다는 말은 의례에  동참하는 대다수 성원들의 암묵적 합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조선 후기에는 의례에 도깨비가 주인공으로 등장, 집단적 벽사상징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의례에 등장한 도깨비들은  벽사적 기능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다 서민적이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컴퓨터 그래픽에서 왜색 도깨비를 몰아내자  오늘날에도 도깨비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고 창작하여 널리 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도깨비  방망이가 열쇠 마스코트로 나오는 등 도깨비는  여전히 생활 속에  살아 있다. 심지어  상품광고에도 등장하고 현대화가는  그림의 소재로 즐겨 이용한다. 도깨비가 우리 문화의 대중적인  상징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도깨비는 천년의 시공을 건너 불현듯  도깨비불같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들의 상상,  허구, 이미지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그러나 말이다. 일본의 오니(혼)가 우리  도깨비로 둔갑하여 동화책과 텔레비전을 장식한다.  아이들은 오니를 우리 도깨비로  착각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잘못 배운 지식을 그대로 전수시켜준 데 1차적인 책임이 있다. 도깨비까지 왜색이라니!  일본의 요괴와 우리의 도깨비를 자꾸  연관짓는 것보다는 장주근 교수(경기대)가 <배서낭과 도깨비>란  글에서 지적했듯이 오키나와 요괴인 기지무나아를 비교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기지무나아라는  말 자체는 오키나와의 사투리
로 나무의 정령이란 뜻이다. 더펄머리의 동자형으로 고목에서 살기도 하고, 고기잡이의 운을 빌어주고 고기를 몰아다주며, 밤중에 자는  사람을 타고  앉아 장난을 치기도 하고, 부르면  달려와서 밤길에 불을 밝혀주고, 씨름을 좋아하여 밤에사람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등 우리 도깨비와 상당히 흡사하다.  우리 20세기 말의 사람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도깨비를 도깨비 역사에 추가시켰다. 21세기에는 도깨비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21세기의 도깨비들이 우리 사회의 모든 악을  물리치는 상징물이 되길 빌며 왜색 도깨비의 추방을 제안한다.

 

바위동물원에 울려퍼진 고래울음

  그곳에 바위동물원이 있다?  동해로 흘러 나가는 태화강  가 바위동물원에는 온갖 짐승들과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사람들 숫자가 워낙 적어서  가히 동물들의 낙원으로 불릴 정도였다. 서 있는 남자는  '가운데 다리'를 비쭉 내밀어 '그것'만 두드러지게  보였다. 다른 남자들은 활을  든 사냥꾼이거나 고기잡이 배를 타고 있었다.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도 보였으며, 탈같이 생긴 얼굴도 보였다.  동물원의 주인공들은 하늘,  땅, 바다를 망라하였다. 정확한  숫자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당시 동물원을 지키던  사람들이 바위에 그림으로 기록한 숫자는 다음과 같다.
  바다동물 :  고래 48마리, 물개(바다사자를 포함했을  것이다) 5마리, 바다거북 14마리, 물고기 14 마리, 기타 2마리.
  뭍동물 : 사슴 41마리, 멧돼지 10마리, 호랑이(표범, 범,  스라소니, 삵을 포함한 것 같은) 14마리, 소(정말  소인지는 불분명하지만) 3마리, 족제비 2마리, 토끼  1마리, 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17마리.
  하늘동물 : 새 1마리.
  바위동물원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문자사회였기 때문에 말로 소통하거나 땅에 작대기로 그림 따위를 그려서 의사를 전달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점점 항구적인 기록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품은 생각을 오래도록 남겨둘 수 있을까.  그로부터 사람들은 바위에  무엇인가 그리기 시작하였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은 단단했고, 마땅한 쇠붙이가 없던 시절이라 바위면을 파내거나 선을 쪼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많은 동물들을 그리는 데만도 여러 세대가 흘렀다. 한  세대에 다 그리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세월은 자꾸 흘렀다.  사람들은 동물원 앞의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제사도 지내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대를 이어 살았다. 그러다가  이 바위동물원을 아끼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가야 했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대곡천을 떠날 때, 바위 위에 아무런 인사말도 써놓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들의 공격을 받고  황망히 떠났거나, 홍수가  밀려와서 높은 산으로 떠났거나,  이제 사냥은 그만두고 농사일에만 기념하기 위하여 떠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들은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참으로 오랜 억겁의 세월이 흘렀다.  눈 오고 비 오고 꽃이 피길 수천  번. 바위동물원의 동물가족들은 참으로 외롭게 살아갔지만 수많은 역사의 굽이를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다. 신라의 화랑들이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모습도  보았고,  어쩌면 김유신 장군이 동해로 출정하는 길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긴 세월이었나. 20세기 접어들자 그만  지쳐버린 거대한 고래들부터 울기 시작했다. 아, 서기 1년부터만 따진다 하더라도 2천 년 청춘의 세월이 그만 그대로 지나가버렸구나! 이제는 안돼, 안되고 말고. 동물원에  갇혀 살기가 너무 힘들어, 어떻게든 나가야 ...... 동물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렀고, 여러 차례 동물회의도 열었다. 그러나 바위동물원을 빠져나갈 방법은 막막하기만 했다.
  동해로 나가는 강물이  차츰 줄어들고, 바위에 갇혀서 나갈 길은  잃은 고래들은 큰 몸짓으로  바다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슴들과 호랑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현대인들은 아무도 그 고래울음을 듣지 못했다.  어느 날 바위동물원은 탐욕스런 인간들의 댐건설로  물에 잠겨버렸다. 어쩌면 물에 잠긴 동안이  그런대로 행복했던 시절 같았다.  그러나 20세기는 더 이상 그들이 잠자코  침묵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물개와 바다거북, 멧돼지, 토끼, 족제비 그리고 선사 시대의 사냥꾼과 고래잡이꾼들이 모두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만 했다.  늘상 가뭄으로 물이 빠지면  자주 동물원의 사생활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어느 날 사람들이 동물원에 들이닥쳐 동물들  얼굴과 몸에 먹물을 바르고 흰 종이를 발라서  '탁본'이라는 이름의 증명사진을 찍어 갔다.고래, 물개, 거북, 사슴들의 모습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찍혀져서 사람 사는 세상에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아예 '국보  285호로 임명함' 따위의  엄숙한 선언문을 낭독하였고, 바위동물원의 가족들의 사생활은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다.  나는 이쯤에서 바위동물원의  역사를 마치겠다. 그들의 현주소는  경상남도 울산시 언양면 대곡리, 일명 반구대라 부르는 깎아지른 암벽. 울산시를 가로지르는 태화강 지류, 대곡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돌병풍에 둘러싸인 절경이 나타난다. 그늘진 것이기는 하지만 전망이 뛰어나 인근에서  절승으로 소문났던 바위이다. 댐이 만들어져 수천 년 간직한 비밀은 영원히  그렇게 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바위동물원의 가족들은 낯선 현대인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1971년도 다 저물어가는 크리스마스날,  일군의 울주지역 조사단은 동네사람들의 제보를 받고 태화강 가로 나간다. 이미  일년 전에 인근 천전리에서 기하학적 문양과 신라시대의 서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년 있다가 

반구대 바위동물원도 현대인들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기다렸던 보람의 있었던지 '선사 시대의 프라이버시'가 신문지상과 텔레비전에 통째로 공개되었다.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사회에서는 무조건 축하해야 할  만한 '발견'이 바위동물들에게도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발견된 이래 이 바위동물원의 학술연구를 빙자한 탁본과 모형뜨기로 형체가  무참히 뭉개졌다. 그래서 나는 바위동물들의 편에서 본다면 불행이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차라리 발견되지 말고 그대로 좀더 있다가 훗날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더라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는 늘 그랬다. '발견'
이란 이름으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고, '발견'이란  이름으로 무참한 파괴가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반구대 바위그림의 귀신고래와 사슴뿔
  학자들은 이 같은  선사 시대 바위들의 공식명칭을  암각화, 바위그림, 암벽화, 바위새긴그림 등으로 불렀다.  지명도 높은 명칭은 '암각화'와 '바위그림'이다.  나는 한문투의 암각화보다 바위그림이란  이름이 더 아름답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에 늘 바위그림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이나 멕시코 등지에서는  안료로 직접 바위그림을 그렸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화가들이 야외에서 환경미술을 한다고 할까.  우리의 선조들은 안료를 써서 그리기보다는 선을 긋고  면을 쪼아서 암각했다. 안료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선사인들은 현대인과 똑같은  상상력과 표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표현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감수성은 놀라을 정도로  뛰어났다. 나는 돌을 쪼아 만든 이  바위그림들을 바라보면서 늘 경외심과 공포감을 함께 느낀다. 인간이 손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생겨난 인간예지에 대한 경외감, 또한 손도구를 써서 '생산력 발전'이란 이름 아래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에 대한 공포감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아동문학가이자 과학소설가인 미하일 일리인은 <인간은 어떻게 거인이 되었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돌과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이것은 그들을 전보다. 더욱 강하고 자유롭게 해주었다...... 우리들의 조상은 언제든지 먹을 것을 찾아서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숲에 서 저 숲으로 갈 수도, 온갖 숲의 법칙을 깨뜨리고 오랫동안 훤히  트인 평지에 머물러 있을 수도, 먹으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먹이를 다른  짐승에게서 빼앗아올 수도 있었다. 이리하여 모험에  넘치는 그런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법칙의 파괴자가 되었다.  그렇다. 바위그림은 무문자 사회에서 최초로 씌어진 역사기록이며, 더할나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현장기록이다. 동시에 노동도구의 발달을 암시하는 사회경제사적인  유적이기도 하다. 인류와 자연의  대립이 시작되는 환경문화사적인 유적이기도 하다.  수많은 고래의 등장은 고래  울음소리가 들렸던 아름답기만한 울산 앞 바다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며, 등시에 고래사냥의 찬미가 시작되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대곡리 바위그림의 동물들 중에서 고래와  사슴에게 특히 관심을 갖는다. 우리 선사문화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품고 있는 동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동해안에 자주 회유해오는 고래는 긴수염고래과(북극고래, 긴수염고래), 참고래과(브라이드고래, 밍크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돌고래, 흰긴수염고래), 향고래과(향유고래), 참돌고래과(흰옆돌고래, 돌고래, 참돌고래), 곱시기과(곱시기, 흑곱시기), 귀신고래과(귀신고래) 등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고래를  연구해온 정동찬 국립과학관 연구실장은 바위그림에 그려진 커다란  고래를 귀신고래로 보았다. 우리 나라 연안에는  옛부터 귀신고래가 많아서 19세기  말 일본선단에 잡힌 고래의 태반이 귀신고래다.  세계 수십 종의  고래 가운데 우리 나라  학명이 붙은 고래는 귀신고래를  뜻하는 '한국 작은 고래' 뿐이다. 이 귀신고래는 일부 일처제로 금슬이 아주 좋아 암놈이 죽으면 숫놈이 암놈 곁을 떠나지 않아 결국 같이  잡힌다. 또 이동할 때도 가족 단위로 하는데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가 새끼 곁을 빙빙 돌다가 같이 잡힌단다. 그래서 나는  '천연 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된 귀신고래를  보면 늘 안타까운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  우리 나라 동해  남부는 고래의 보고였다. 포경업이  국제적으로 금지되기까지 방생포는 고래잡이  전진기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 명성을'악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선사 시대의  고래사냥을 마냥 나무랄 일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포경업이란 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간혹 고래를 해변가로 몰아서 잡거나 떠내려온 놈을 생포하는  아주 소박한 수준에 불과했다.  동해를 '피바다'로 물들였던 광란의 역사는  무능한 조선 정부를 무시하고  몰려들었던 일본과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포경선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선사 시대에는 이곳  대곡천까지 고래가 왔을까. 반구대에서  바닷가까지는 직선거리로 20킬로미터. 지형이  변하기 전까지만 해도 불과  10킬로미터 근처까지 고래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태화강  가에 그려진 수많은  고래그림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임에 분명하나 고래가 근처까지 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바위동물원에는 사슴도 여러  마리가 있다. 나는 사슴뿔을 볼 때마다  저 툰드라 벌판이나 몽고와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외로운 사냥꾼들을 생각한다. 사슴들은 때로는  외롭게 떨어져 있기도 하고,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달려 나가기도 한다.

사냥꾼이 따라붙기도 하고 그들 혼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기도 하다. 북아시아의 수많은  선사인들은 이들 사슴을 소재로  무수한 바위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남아 있는 바위그림이  적을 뿐, 사슴사냥의 역사는 우리 선조들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봄이 되면 사슴뿔이 의젓하게 솟아나온다. 사람들은  옛부터 그 뿔을 명약으로 쳐왔다. 사슴뿔을 자르면 붉은 피가 아니라 흰  피가 솟구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사슴의례라고 할 만한 제의적  공간이 바위그림에 엿보인다. 사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전령이었다. 그래서 알타이  문명의 다양한 장식품에도 사슴뿔이 등장한다. 신라  금관을 볼 때마다 이들 사슴뿔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라를  개국한 사람들은 사슴을 주로 잡던 집단의  후계가 아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선사인들은 왜 하필이면 반구대에 바위그림을 그렸을까.  학설이 구구하나 이곳은  지금 보아도 신성스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랑들이 놀았다는 전설도 전해지며,  실제로 인근 천전리에는 신라 시대의 옛  글씨도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울주는 감포 바닷가의 길목으로 물산이  집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뭍짐승과 바다짐승이 표현된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울산대학교 전호태 교수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대략 다음의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성역이자 제단(김원룡), 제의 교육의 터(정동찬), 동물수호신을 위한  굿터(김열규), 재생과 풍요를 위한 봄의  정기적 의례장소(임장혁) 등으로 보고 있다. 견해와 입장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바위그림 유적이 신성한  존재가 강림하는 성역이자 이를  모시는 제사터(임세권)라면 그 주변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장명수)도 나오고 있다.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바다와 뭍동물 그림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여 동물에만 관심을 두면 당대  사회가 수렵사회였다는 그릇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바위그림을 만들었음직한  청동기사회는 분명히 정착농경사회다. 그렇다면 그들 그림에서  정착농경사회의 흔적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의문점도  제기된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지모신의 풍요다산과 관련된  남성 성기의 심벌, 동물을 사육하는 울타리의 정착생활 흔적 등을 새삼 강조하기도 한다.  바위그림을 생각하면서 늘 품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바위그림들은 물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일까. 대곡리 바위그림은 태화강  상류 냇물과 닿은 절벽에 있다. 천전리 것도 개곡천 상류인 사연댐 최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고령 양전리 알터바위는 고령읍 남동쪽의  낙동강 지류 가천과 서남쪽의 안림천이 합치는 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고령 안화리 바위그림은 양전리 회천의  지류인 안림천 상류 냇가에 자리잡고 있다.
 함안 도항리 바위그림은 남강지류인 함안천 유역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포항 인비리의 것은 포항시 기계면의 기계천 가에  있다.

경주 석장동 금장대 바위그림은 천하의 절경에  있다. 밑으로 형산강 상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높은 산정의 깎아지른 곳에 자리잡아 인근 일대가 훤히 굽어 보이는 전망대다.  영천 보성리 바위그림은 금호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영주 가흥동 바위그림은 영주시 내성천  지류인 서천이 굽이도는 지점에  외따로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여수 오림동의 것은 여수반도 연등천 지류인 개울이 흐르는 것에 있다. 남원 봉황대 바위그림은 섬진강 지류인  삼천의 분지에 있으며 서남쪽에 작은 개울을 끼고 있다.  안동 수곡리는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진 임동면  수곡동 한들마을에 있다. 금산 어풍대 앞에도 금강 상류인 봉황천이 흐른다.  포항 칠포리는 또 어떤가. 칠포 바위그림을  최초로 발견한 포철고 문화연구회의 한형철, 이하우  선생 등이 엮은 <칠포마을  바위그림>이란 책자에는 칠포를 소개하는 글이 나온다.  비학산 줄기가 흥해의  넓은 벌판을 열고, 이를 감싸듯 흐르는  지맥이 곤륜산으로 높이 솟아 있다. 곤륜산과 마주보는 오봉산  사이를 소동천 작은 개울이 흘러 이윽고 바다에 닿는 아담한 하구에 칠포마을과 포구를 연다.  이들 물가에서 발견된  이유는 하나가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보기에도 절경  중의 절경인 반구대 같은  신성스런 곳에 바위그림을 새겨두었던  선사 시대인의 마음가짐은 우리 현대인에게 자연에 대한 외경심같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을까.

 

우리 나라 바위그림 해독의 열쇠는?
  풀리지 않는 의문은 천전리 바위그림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곧 드러난다. 천전리는 대곡리에서 불과 2킬로미터쯤 떨어진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다. 반구대  그림이 동물 위주라면 천전리의 것은 조금은  복잡하여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슴 같은  동물그림이 첫 번째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두 번째요, 역사시대로 접어들어 그려졌을 신라 시대의  글씨나 그림 등이 세 번째다. 문제는 두 번째의 기하학적 문양들이다.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천전리 바위그림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기하무늬 : 마름모꼴(단독 마름모꼴, 종연속  마름모꼴, 횡연속 마름모꼴), 둥근무늬(홑둥근무늬, 연속홑둥근무늬,  포도송이꼴무늬, 겹둥근무늬, 연속겹둥근무늬, 타원형무늬), 굽은무늬, 가지무늬, 우렁무늬, 기타(화살무늬, 쌍십자무늬 등)  동물그림류 : 사슴, 호랑이, 새, 물고기, 기타 알 수 없는 환상동물 등  인물그림류 :  탈, 서 있는  인물, 기마행렬도, 기마인물도,  인물입상, 동물(말, 용, 새, 물고기), 배, 기타 등  왜 반구대와 같은 물줄기에  위치한 천전리의 것에서는 기하무늬가 큰 비중을 차지할까. 이 기하무늬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 무늬야말로 우리 나라 바위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이 아닐까.  기하무늬는 곳곳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가장  가까운 예로 고령  알터에 있는 동심원, 포항 칠포리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문양, 함안 도항리의 동심원 등이 그것이다. 기하무늬들은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인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학자에 따라 견해가  사뭇 다르다.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들이 후기에  오면서 기하학적 문양이나 단순한 풍요와 생산을  상징하는 성혈 등의 문양 등으로 그 형태와 대상물이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동심원만 하더라도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주장에서부터 재생과 우주의 배꼽, 달이나 강물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선사고고학 개론서의 1장에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유명한 몰타의 거석문화에도 동심원이 나타난다. 지중해의 몰타유적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더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거석문화다. 특히  몰타섬의 타르시엔 유적은 복잡다단한  신전의 집합체로 이루어졌으며 기단벽면에  돌기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  문화와 친연성이 주목되는 시베리아 바위그림에도  잡다한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유럽과 시베리아의 선사문명에 모두 동심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문명의 원초성을 상징하는 것이 틀림 없을 것 같다.  마름모꼴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 혹은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물결무늬는 물과 관련된 풍요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이 의문점을 풀려고 노력해왔으나 정확한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반구대 이후에 추가로 발견된  바위그림의 대부분이 반구대의 것과 내용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새 유적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동심원, 패형 바위그림이 나타난다. 패형이라 부르는  것도 일부의 견해일 뿐, 바위그림 전문가 임세권 교수(안동대 사학과)는 사람  얼굴로 보고 있다. 방패형과 청동의기를 연결시키는 견해로부터 인면상징으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그 동안 관심을 끌었던 대곡천 분포된 동물형 바위그림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고, 이후에 발견된 바위그림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기하문양이 전국에 걸쳐 보편적인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 선사 시대 바위그림의 전형은 기하문양으로 상징화된다.  그렇다면 왜 반구대  바위그림에만 유별나게 많은 동물그림이  그려졌을까. 혹시 반구대 바위그림을 제작한  선사인들은 한반도로 진출한 어떤 별난 종족들이라도 되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 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반구대 형식의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동물그림 형식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들 종족과 어떤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이들  기하무늬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날, 우리 나라  바위그림의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전리 바위그림  앞에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마다,  "우리 나라 바위그림 암호 해독의 키는 기하무늬다"라고 단언하곤 한다.  마지막 의문은 이들 바위그림이  왜 하필이면 경상도 지방에 집중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반구대나 천전리에서 바위그림이  발견된 이래로 더  많은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상호 비교방식을 통한 문제의 실마리는 엿보인다. 남원 봉황대, 여수 오림동, 남해 평리, 고령 양전동, 안화리, 함안 도항리, 포항 칠포리와  인비리, 안동 수곡리, 영천 보성리, 영주 가흥동,  경주 금장대, 경주 상신리, 금산 어풍대등 남부지방에만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고, 지금도 속속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의 바위그림이 경북 내륙에  분포하는 것도 하나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그렇다고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바위그림을 연구조사한 역사가 워낙  일천하며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영남지방이 중부기호지방이나 호남지방보다 바위그림이  밀집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럴까?  민족이동 시절에 경상도 방면으로  진출한 일군의 세력이 바위그림 문화를 지닌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이 역시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수, 남원  같은 전라도 지역에서도 부분적이나마  발견되고 있는 탓이다. 만약 김제, 무안, 목포 같은  지역에서도 새롭게 발견된다면 이 가설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보편적인 기하문양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만 반구대 같은 동물그림이 집중적으로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한 탓에 아직은 '경상도 집중'이란 가설도 유효하다. 이 가설을  완전히 깰 만한 또 다른 바위그림이 우리 나라  어느 곳에선가 나타날 것이란 기대, 특히  북한지역의 어딘가에도 있으리란 기대를 하면서......

 

시베리아와 몽고, 만주와 중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1995년 겨울,  포항공대 정보통신연구소 중강당에는  방학중인데도 바위그림에 관심을 표명해온 일군의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한국역사  민속학회와 포항제철고문화연구회에서 주최하고 포항공대에서 후원한 '한국 암각화의 세계' 심포지움이 그것이다. 필자가 2부 사회를 맡았다. 그때  포항 칠포리와 인비리, 경주 금장대까지 함께 공동답사를 하면서 각양각색의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새롭다.
   참석자들은 바위그림에 관한 연구는 어느 일개 학문분야의 몫이 아니고 고고학,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종교학,  신화학, 고생태학, 지질학, 천문학, 고생물학 등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각 분야의 학제간 연구를 통하여 진척해야  할 분야라는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풀리지 않는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현재  바위그림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찾아 많은 학자들이  몽고와 만주, 시베리아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석호 같은 미술사가는 아예 몽고  벌판을 누비면서 러시아에서 바위그림을 탐구하고 있기도 하다.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의 가려진 비밀들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을 기대하면서, 동북아시아 전반의  연관성을 비교문화사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저래 바위그림은 선사 시대인들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지니고서 지금도 속속 새롭게  발견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  선사인들이 남긴 바위그림들이야말로 가장  생생한 삶의 흔적이 아닐까.  바위그림의 문화사적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옹이  들려주는 다음의 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려 한다. 신부이자 신학자이면서도 미국현대언어문학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1982, 한국어판 이기우,  임명건 번역)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차적인 구술문화--즉 전혀 쓰기를 알지  못하는 문화--
와 쓰기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 문화 사이에는 지식을 다루는 방법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에  어떤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새로운 발견에는 놀라운 만한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즉 문학, 과학 등의 사고와 표현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던 많은  특징들, 그리고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의 구술 담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던  많은 특징들조차, 결코 인간에
게 있어서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쓰기라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유용하도록  작용되는 여러 자질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  어쩌면 바위그림에 관하여 내가 쭉 늘어놓은 여러 해석상의 문제들도 결국 문자문화에 익숙한 사람의 한갖 '길들여진 자질'  때문에 생겨난 판단은 아닐까.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그림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듯이 문자 없이 단순한 그림으로만 표현하였던 바위그림문화 시대인들에게 문명의 원초성 따위를 배워야 만할 것 같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원초성, 선사인들은 바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열녀전 끼고 서방질한다?

  수청 들 남자를 원한 전라감사의 부인  옛날에 투기가 아주 심한 여자가 있었다.  지아비가 전라감사로 부임하자 그녀도 따라서 임지로 갔다.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감사는 수청기생을 들였다. 화가 난 감사의 부인은  아랫사람들에게 감영의 통인 중에서 미남을 골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감사가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미남을 데려다가 어디에다 쓰겠소?"하고 물었다. 부인 왈, "공께서는 곧 수청기생을 두어 즐기시면서 어찌 저에게는 수청남을 허락하지  아니하옵니까." 감사는 크게  놀라 기생을 물리치고, 다시는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겠노라고 부인에게 다짐하였다.  일제 시대의 국학자 이능화가 <조선여속고>에  소개한 옛이야기 한 대목이다. 나는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 이야기를 문득 떠올렸다.  화면에는 남창 노릇을 하다가 붙들린 젊은 청년들  열댓 명이 경찰서 바닥에 쭈그리고 있는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방송기자는 천하의 악당을  잡은 것처럼 공격하고 앵커맨은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찼다.
  하루도 빠짐없이 남성을  기다리는 '꽃집'을 찾은 남성들이 파렴치범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또한 그 '꽃집'을  찾은 남성들이 파렴치범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여장부가 당당하게 수청남을 청했다는 옛이야기를 문득 떠올린 것이다.  우리 인류의 가족사를 들추어보자. 배우자 선정에서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던 가장 낮은 발전단계의 혼인이었던 집단혼에서 빠져나온 인류는 서서히 대우혼으로 이행하였다. 대우혼은 집단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넘어오던 과도기적 혼인방식으로, 남녀 각기 여러  명 중 '본처'와 '본부'를 갖는 것이었다. 대우혼 단계에  이르러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등 혼인과 핏줄로 연결된 육친의  관계가 명백해졌다. 일부일처제 혼인은  부계제도에 기초한 일부일처제 가족을 출현시켰으며, 또
한 그것은 계급사회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엥겔스는 이것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서술하였으며, '가장 심각한 혁명의 하나'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전통적 성관념의 대부분이 조선 시대의 강력한 부계제도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방식의 일부일처제는 강력한 도전을 받아 그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일처제 자체는 그대로 존속될 수밖에 없겠지만 기존의 방식대로 답습될 전망은 흐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간통이 아닐까 한다. 간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합법적인  매춘은 간통이 아니고, 비합법적인 남녀관계만 간통일까. 혹시 신성불가침처럼  모셔온 일부일처제에서는 간통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가  지적했듯이 유럽에서도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간통이 시민계급에서조차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갔다. 사유재산제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던 일부일처제의 모순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행위의 하나로서 간통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일부일처제 사회지만 남성들은  합법적인 매춘, 즉 합법적인  간통을 허락받고 있다. 반면에 여성들은 남성을 위한 매춘의  대상으로만 전락한 데다가 여성들의 간통은 남성들의 간통과는 비할 바 없는 극형을 당하였다.  물론 성의 역사  또한 억압과 해방의 오랜 싸움이었다. 사회적  규범이란 잣대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는 거대담론과 인간의 본능에  기초한 개인의 욕망이란, 어쩌면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사회적인 선택에 의하여 운명지어졌다. 때로는 그 운명을 거역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간통, 정조, 과부, 개가, 열녀 등의 언어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다. 특히 엄격하기만 했던  조선 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함부로 언급하기조차 꺼리던 이들  '욕망의 본질'속에서 우리 문화의 숨겨진 상징 이데올로기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자유로운 야합의 시대, 고대사회
  <한서> 지리지에는  고조선 여자가 정절을  소중히 여긴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확고하게 성립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서> 부여조를  보면 남녀가 음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다 죽였다고 하였다. 질투가 아주 심하여 사형을 받으면, 그 시신을 국남산에 내놓아 썩게 하였으며 여자집에서 시신을  찾아가고자 하면 우마로만 실어가게  하였다. <북사> 백제조에는 그 형법에 부녀가  범간하면 부가에서 잡아들여 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일단 기록으로만 보면 남자의 범간은 나오지 않고 대개 여자에 대한 처벌규정만 나온다. 그만큼 여성에 남성의 우월적 지위가 확고부동하였으며, 여성의 간통은 남자의 강간보다도 강한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고대사회의  남녀는 어느 정도의 평등성도 보장되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성립된다"고 하였다. <북사>권 94에서는 고구려 풍습을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다.  풍속이 매우 음란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풍속에서는  유녀가 많고 남편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밤이면 남녀가 무리 지어 섞여서 놀고 귀천의 구분이 없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고구려인들은  자유연애를 하는 데다가 남녀관계도 개방적이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오늘날  야합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 야합의 원래 뜻은 남녀가 정식  혼인절차를 밟지 않고 자유의사로 결혼함을 뜻한다.  유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의 결혼은  대부분 야합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비하면 얼마나 자유스러운 결합방식이었던가!  <동이전>의 '음란하다'는 표현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지만 그만큼  개방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유녀가 많은 것으로  보여 일부일처제 사회였음도 분명하다. 일부일처제의 보완책으로  유녀제도를 인정하고 있었고, 유녀는 남편 없
이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일종의 '프리섹스 전문직'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제가 확립된 사회에서 일부일처제는  애초부터 남성들의 '완벽한 섹스의 자유'와 여성들의 '성적 억압'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들어가는 제도다. 가부장 제도가 강해질수록 매춘제도는  복잡 다양한 성향을 지니며,  일부일처제의 보완책으로 기능하게 된다.  남성들은 합법적인 매춘을 통해  '일상적 간통'을 허락받게 된다. 매춘의 역사는 이렇듯 그 뿌리가 깊은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일부일처제는 남녀평등에 가까울  정도로 여성의 지위를 인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여성들의 처지가 조선 시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 같다.  신라는 어땠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김유신이 김춘추를 유인하여 누이동생  문희와 야합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문희는  오라버니의 묵인 아래 부모  몰래 김춘추와 밀회를  거듭하다가 임신하게 된다.  문헌상으로 보면 임신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지 밀회 자체는  문제가 아니란 해석이 가능하다. 조선 시대에는 생각도 못할 대담한 일이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문호와의  동생 차득공이 왕의 밀지를  받고 전국을 미행하다가 무진주에  이른다. 안길이란 자는 그가  비범한 인물인 줄 알고  처첩 세 명을 불러 "오늘 이 손님과 자는 사람은 평생 해로하리라"고 하였다. 두 처는 거절하고 한 처가 받아들였다.  오늘날 에스키모 같은 종족들  사이에 일부 남아 있는 진객 접대방식으로서의 부인 내주기 풍습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여성은  남편의 권유 아래 아주 합법적으로 '간통 아닌 간통'을 허락받은 셈이다.  신라 시대 간통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주인공은 처용이 아닐까. 용왕의 아들  처용이 밤새워 노닐다가  들어와보니 침상에 다리가  넷이었다. 자기 처가 외간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하는 걸  목격한 것이다. 처용은 "본디 내 것이
지만 빼앗아간들 어찌하리오"  하고 체념하며 춤을 춘다.  아내를 빼앗은 남자는 역신으로 나타나지만 이 기록 역시  당대 사회에 간통이 묵인될 수도 있다는 증거물로 채택할 수 있다.  신라 진성여왕은 유모의  남편을 빼앗아 자기 정부로 만들었다. 또한  그가 죽
자 미소년 두세  명을 끌어들여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그 같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열려 있었던 당시의 성풍속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여속사를 전공한 김용숙 교수(숙대)는 신라 말 경애왕  때 포석정에서 열린 잔치에 참가한 인물 가운데 비빈, 후궁, 궁녀, 종친, 외척 이외에 내시와 유모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조의 폐쇄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적어도 신라의 여인들은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방적인 생활을 했음이 분명하지 않을까.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고
  고려 시대는  어땠을까. <고려도경>권 23을  보면 여름철에  시냇물에서 남녀 구별없이 옷을 벗고  목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고려사>를 보면 곳곳에서 여자들이 절에 가서 술 먹고 춤 추고 놀아 풍기가 문란함을 지적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고려도경>에는 아예 '경합이리'라고 하여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진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송나라  사신의 기록이므로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개방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여성들의 개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임금 중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김용숙 교수는  이같이 쉽게 헤어지는 풍습이  결국 여성들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자유롭게 이혼하고 결혼한 듯 하다.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고려 시대의 성풍속에 대하여 궁금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고려속요의 활달하면서도 건강한 성  노출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악장가사>에 등장하는 쌍화점을 보라. 쌍화점은 만두집 사건,  삼장사 절간 사건, 우물 사건, 술집 사건으로 이어진다. 쌍화점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다가 회회아비가 손목을  쥔다. 삼장사에서는 주지가 손목을 쥐고, 우물에  물 길러 갔더니 용이 손목을 쥐는 식이다. 고려가요는 "남녀상열지사가 대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려가요의  특색"이란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시작되자마자 그들 시구들은 철퇴를  맞고 만다. 어쨌든 고려 시대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이해하는 데는 고려속요보다 좋은 자료가 없을 성싶다.
  당시의 일부일처제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을까.  <고려사> 박유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축첩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때 박유가 나서서 일부다처제를 왕에게 권한다.  그가 임금을 호위하여 연등회를 갈 때 어느 할머니  하나가 나서서 "축첩을 청한 자가 저  늙은이다"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 서로 전하여  손가락질 하니 온 마을에  붉은 손가락이 다발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박유가 건의한  축첩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유가  뭇여성들의 공격대상이 될 정도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대로  지켜지고 있던 것 같다. <고려사>에는, "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부인을  하나만 거느리고 아들이 없는 자도 감히 첩을 두지 않았다"는 대목도 나온다.  고려 시대의  일부일처제에 대해서는 학계에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기왕의 견해는 고려  시대 역시 축첩제도가 발달한 사회로 본다.  그러나 고려사 전공자 허흥식 교수(한국정신문화원)는 몽고의  압제를 받으면서부터 일부다처제가 발생한 것으로  본다. <고려도경>같은 중국 문헌에는  부유한 집안에서 부인을 여러 거느리는 축첩풍속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부 특권계급은 축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첩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려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남녀관계의 균형이 유지된 사회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 시대, 특히 후대로 올수록 사태는 역전된다. 우리들이 지금껏 알고 있는 상식과는 매우 다른 셈이다. 조선 시대 풍습에만 지나치게 매달린 짧은 지식 탓이다.

 

청상과부에다 마당과부까지
  조선의 개국은 남녀평등에 관한  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준비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무리 좋게 해석을  해도 그런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조선 시대 남녀관계의 특징은 '남존여비'와 '삼종'의  악법으로 대표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 사회였다.
  먼저 대표적인 남녀유별 풍습으로 역시 내외법을 들  수 있다. 내외라 함은 남과 여라는 뜻이니, 내외법은 남녀에  관한 법을 말한다. 그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남녀칠세부동석은 남녀가 7세부터 만나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석이라 함은 돗자리, 더욱  좁혀서는 아랫목에 까는 요석, 즉 보료 같은 것을 뜻했다. 한마디로 앉은자리에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또한 삼종지도라 하여 출가 전에는 아버지에게 ,  출가 후에는 남편에게,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에게 순종해야 했다. 삼종지도의 시절에 내외법은  여자를 구속하는 유효한 불문율로 사용되었다. 쓰개치마를 벗어 던지고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난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차츰 내외법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억압의 뿌리가 깊은 탓에 8.15해방 당시까지도 사회적 통념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엄격한 내외법은 당연히  여성의 외출제한으로 이어졌다. 장옷이나  너울이 발달한 것도 여성의  얼굴 가리기와 관계 있다. 부득이한 경우에  상면이 허락되는 촌수도 부모형제, 시부모 및 백부모, 숙부모, 고모, 이모, 삼촌, 외삼촌 등의  범위였다. 이래서 반보기라고  해서 시집간 새색시끼리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서 만나는 풍습도 생겨났다.  고려 시대에는 사대부의 부녀가  집 밖 출입을 하는 데 아무  탈이 없었다. 심지어 궐문에까지 나아갔으니 외출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와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 여성에  대한 비하는 이혼관례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조선 시대에는 '조강지처'를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사회적 관례였다. 이혼법에 해당되는 성문화된 법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버리는' 폐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었을 뿐, 남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여자를 쫓아낼 수 있었다.  양반계급이 이혼출처하여 여자를  내쫓으려면 꽤나 까다로워서 임금께 상세히 아뢰어 명을 청해야 했다.  상민층에게는 사정파의, 할급휴서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사정파의란 부부간에  만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 결별 이유를  밝히고 그 사정을 밝히는 것이다. 할급휴서란 이혼문서가 따로  없으니 이혼할 때에 지아비가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지아비에게 윗옷깃의 한 자락을 가위로  잘라주는 불문법이었다.  그 밖에는  이혼은 아니더라도 소박을  주는 방식도 있었다.  아내가 지아비를 마다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내소박, 지아비가  아내를 돌보지 않음은 외소박이라 하였다.  홀로 된 여자의  거취도 문제였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 시대에  인간으로서 가장 못할 짓을 한  것이 바로 과부 재가금지가 아닌가 한다.  더욱이 젊어서 청상과부가 된 여자들이 한을 생각해 보라!  과부의 재가금지는 고려  말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고려말의  신유학파는 과부 재가금지를 법령으로  정비하였다. 벼슬을 한 사람의 처로서 과부가  된 자는 3년 동안 재혼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법이  일반 서민에게까지 미쳤다고 볼 수 없다.  조선에 이르면 개가한 자의 자손에게는 현직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자손대대로 벼슬을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강화된다. 태종 6년 사헌부 대사헌 허응 등이 시무  7조를 올린 적이 있다. 대소양반의 정처로서  세 지아비를 섬긴 자는 자녀안에 올려  부도를 바로잡자고 건의한다. 성종 8년에는  부녀의 재가를 막는 명을 내리어 재가한 집안 자손의 벼슬 천거를 금지시키는 내용을 율령으로 선포한다. 이렇게 날로  강화되니 애초에는 사대부 집에서만  실시하던 재가금지가 서민층에까지 풍미하게  된다. 그 결과 빈궁하고 의탁할 길이  없는 여자들까지 재가금지에 묶여서 고난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과부 중 가장 '억울한 과부'는 혼약만 하고서 성례도 못한 채 신랑감이 죽어서 평생 수절을  해야 했던 '마당과부'였다.  청상과부보다 더  억울한 처녀과부였던 셈이다. 혼례청이  차려진 마당에도 서보지  못했으니 그 한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으랴.  <해동야서>를 보면, 시전 상인었던 시아버지가  처녀과부가 된 며느리에게 개가를 권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음양의 이치를  널리 깨닫고 있던 상인은 며느리로 하여금 권생이란  선비와 성관계를 맺게 한다. 상인은 권생이란  남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자식이 열다섯에 혼인해서 미처 합궁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저 애가 금년 나이 스물넷으로 명색이 성혼은 했다지만 아직  음양의 이치를 모르는지라, 항상 제 심중에 측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릇 천지간에 사는  만물이 제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모두 음양의 이치를 알고 있는데,  저 애만 유독 모르는 고로 내 매양 개가하기를 권하였습죠만,  저 아이 말이 만약 딴 데로  살러 가면 늙은 이 몸이 의지 할 데가 없다고 끝내 듣지 않는군요."  정을 통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여주인공을 자살에 이르게 함으로써 소설은 당대의 봉건성  탈피에서 일보 전진에 머물고 마는 제한성을  보여준다. 작가인들 여주인공을  자살시키고 싶었겠는가. 갈등하는 '마당과부'의  방황이 눈에 선하다.

 

남녀의 음욕은 사람의 대욕
  과부들은 어떤 길을 택하였을까.  말할 것도 없이 열녀문으로 들어가는 길, 아니면 어떻게든 한을 푸는 방식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중봉의 <동환봉사>에는 "청상과부로 아들이 있는 자가 아들의  앞길에 꺼림이 있을까 두려워 몰래 간음하여 자식을 낳아 밤에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유몽인의 <어유야담>에는 아예 이런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한 유생이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에 왔다. 인적  끊긴 밤에 이르러 종가에 이르니 장정 넷이 골목에서 나와 유생을 밟아 땅에 넘어뜨리고 가죽 포대로 그의 몸
을 싼 다음에  짊어지고 어디론가 향하였다. 한참을 달린 다음에야  포대를 열어주니 어느 담장 높은 집 안이었다. 유생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켜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화려한 벽지를 바른  방 안에 넣었다. 문득  문이 열리더니 연소한 미녀가  시비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의복이 신선하고  용모가 고우나 좀 누른기가 있었다. 동숙하다가  밤이 되어 정을 다하니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미인이 일어나 나가자, 장정  넷이 다시 가죽 포대로 유생을 싸서  본디 종가 자리에 부려 놓았다.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연산군 4년 단성의  훈도 송헌동은 국왕에게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남녀의 음욕은 사람의  대욕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삶에  지어미를 거느리고자 하며, 여자는 삶에 지아비를 섬기고자 한다.  이것은 삶이 비롯됨이요, 인정에 본디부터 있는 바이므로  말릴 수 없다...... 그러나  혹 사흘 만에 청상과부가 되는 이가 있거나, 혹은  한달 만에 청상과부가 되는  이, 혹은 20-30세에 청상과부가 되는 이가 있다. 30세에  아래 되는 청상과부로 아들 없는 이는  다 개가를 허하시어 생계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조선 시대에 열녀는 지아비를 바꿀 수 없었다.  대개 부인은 한 지아비를 따라 생을 마쳐야 했다. 불과 십사오 세에 청상과부가  된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으니, 참으로 개탄할 지경이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개가를 한 집안은 벼슬길이 끊기고 문벌을 지키기 어려웠다. 따라서 과부 당사자가 수절을 원치 않더라도  부모 형제가 굳이 수절을 시켰다. 과부는 깊은 안방에 갇혀 밖과의 인연을 끊었으며 늘 감시를 당하였다. 대개의 여성들은  고운 베개를  낭군 삼아 동침하는  일이 많았다. 연암  박지원의 <열녀 박씨전>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벼슬길이 막힌  아들들이 어미에게 사연을  묻자 어미는 동전을  하나 꺼낸다. 청상과부가 된 어미는 평생을 방 안에서 동전을 굴리면서 수절을 지켜왔다.  "이것이 네 어미가 참은 신부다. 참을 수  없는 10년 세월을 만지고 또 만져서다 닳았다. 대저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욕정을 혈기로 나타나며 생각은 고독한 곳에서 생기며 슬픔은 생각에  말미암는다. 과부는 유독하고 상하고 슬프기가 말할 수  없는데 혈기가 있어 때로  왕성하면 어찌 과부라고 욕정인들 없겠느냐?"  이야기를 들은 아들들은 모친을 붙들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청상과부의 설움을 잘  드러내는 얘기다. 오죽하면 청상이  된 딸을 몰래 빼내어  멀리 북방으로 내보내고 다시 출가시켰던 재상까지 있었겠는가.  <기문습유>에는 구수훈이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소설(이우성, 임형택 두 분이
재편찬하면서 '의로운 환관'이란 제목을 달았음)이 하나 있다. 성불구자인 환관이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여자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길 가는 선비를 납치하여 정을 통하게 한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선비를 따라가 살게 한다. 성불구자인 주인공이 여성의 새 인생을 열어주는  이 소설은 진정한 삶이란 규범이나 격식과는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은 이렇게 송별시를 써서  선비와 여
인에게 준다.  엄격하기만 했던 조선  시대에서조차 인간 본연의  대욕을 꺾기란 불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물이 음양을 갖추었는데, 나 홀로 그렇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열여섯 춘규의 여자가 석양에 꽃을 대해 눈물을 흘리놋다.

 

 탕녀 되기가 열녀 되기보다 어려워라!
  홍양호는 <열부정려기>에서 "부인의  행은 죽음으로써 열을 나타냄이니  대개 타고난 천성을 지킴이로다"고 하였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백제의 도미, 조선  시대 경남 밀양의 아랑과 같은 열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요구하였던 열녀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열녀였던가. 또한 그녀들에게 그토록 지키도록  강요했던 정절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정절이었던가.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 반인간적 억압'이 아니었을까. 정조라는 것조차도 임진왜란 당시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장기간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사대부가의 부녀들이 많이 잡혀갔다. 문제는 왜병이 물러간 뒤에 그런 집안과는  혼사를 맺고자 하는 집안이 없다는데 있었다. 잡혀갔던 아내는 이미 지아비와  대의가 끊겼으니 사대부의 가풍을 어지럽힐 뿐이란 게 사대부들의 주장이었다. 그  비운의 여인들은 환향녀라고 불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만 가문을  위한 열녀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왜적에게 손 한번 잡힌 일을 탓하여 스스로  몸을 던진 여성들도 숱하게 많았다. 그녀들은 열녀의  대열에 올라서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다. 반면에  살아 돌아온 환향녀들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런 점에서 민간에서 "열녀전 끼고 서방질한다"고 한 속담은 열녀의  허와 실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까. 비록 '열녀전'을 끼고  살아야 했지만 '서방질'을 하지 않았을 수 없었던 인간의 욕망에서 우리는 오히려 삶의 진실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오해가 없길  바란다. 정조를 잘  지켜서 품행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열녀문이 세워진 여성들을 탓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선  시대는 탕녀 되기가 열녀 되기보다 더  어려웠음을 실감하면서,  열녀에게서보다 탕녀에게서 민중  생활사의 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인근에 새 과부가 났다고  들으면 밤에 몰래 업고 나와 가난한 홀아비로 하여금 하룻밤 강겁을 하게  하여 짝을 이루게 하는 습속이 상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나의 불문이었고 관아에서도 탓하지 않았다.  또한 소박 맞은 여자가 돌아갈 것이 없게 될 경우 으레 서낭당 고갯목으로 갔다. 서낭당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누구라고 먼저  '주워 가는 자가 임자'였다. 그 여자가 양반 사대부집 출신어었건, 주운 남자가 천하의 불쌍놈이었건, 그런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박 맞아 내쫓긴 마당에 '정절'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청상과부가 된 여인이 남자를 접한  사실을 알고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한 친오빠가 직접 나서서  여동생을 연못에 밀어넣은 일도 있었다. 아니면  청상의 한을 뭇남자와 풀어내고  난 다음에 자살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수절을하다가 뭇남성에게 '강간'이라는  공격을 받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누가 그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여성들의 정조가 학문의  대상으로 올라 있었다. 앞의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동시대인들의 일치된 비판에 따르면 부부의 정조란  아주 희귀한 꽃과 같았다. 희귀한 꽃을 찾아 하루 종일 헤매더라도 그 꽃을 찾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 꽃은 '두 번  다시 피지 않는' 잡초로 결혼식날에 심어졌다가 바로  그 다음날에는 시들고 마는  하루살이 꽃이었다. 반대로 '의롭지 못한' 잡초는 모든  사람의 정원에서 피어나고 또 도처에서  번성하는 꽃이며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었다.

 

 서방질의 연원을 생각하며
  우리네 속언에 여자들의 간통을 '서방질'이라고 불렀다. 서방이란 무슨 뜻일까.  함경도 지방에서는  남자가 장가드는 것을  '서방간다'고 한다.  여자가 불의의 남녀관계를 맺는  것을 서방질이라고 하는 속어도  바로 서방이라는 사위집에서 나온 것이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드는 집을 서옥이라고 하였으니, 서방질은 남녀의 침실로 감을 뜻함이다.  서방질의 '질'  자체가 이미 하대하는 말투다.  전통 시대에 여성은  일단 성적 대상물로 간주되었다. 가령 우리말에서 몸을 상징화하는  표현을 보면 대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 많다. '배 지나간 자리'라고 하여  여성을 염두에 두고 성적 행위의 결과를 판단한다. 남녀의 상관을 '몸 섞었다' '정을 통했다'는 표현을 쓰면서도, 여성들의 수동성, 피동성만을 강조한다.  몸을 바친다, 몸을  빼앗겼다, 몸을 판다, 몸을 주었다 등은  모두 성에서의 남녀 불균등을 전제로  한 말투다. 여성들의 몸은 대개 바치는  대상물로 상대화되어 있고, 남성들의 역할은  대개 '몸을 빼앗는다', '몸을 차지한다' 등의  정복자로 남는다. '몸을 더럽혔다'는 말은 남녀가 같이 몸을 섞으면서도 어느 한쪽만 '더럽혀졌다'는 뜻을 강하게 내포한다.  그리하여 '이왕 버린 몸'이란 체념형의 말투도 나온다.  여성들의 몸은 보통 때는 금기의 대상이지만 성적인 충동을 유난히 많이 지닌 것으로 판단되기도 하다. "계집과 아궁이불은 쑤석거리면  탈난다", "계집과 옹기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 "고운 계집은  바람 탄다" 같은 말에서는 충동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자들의 간통 대상은 남자들의  매춘과는 달리 합법성을 지니기 어렵기 때문에 '개구멍 서방', '샛서방'이란  별칭이 붙었다. "샛서방 고기맛이다", "서방질 한 번 하나 열 번  하나 말 듣기는 매 한가지다", "말 헤픈 년이  서방질도 헤프다", "미운년이 벌리고 덤빈다", "밑구멍에  불나겠다", "바람둥이 여편네 속곳 가랑이
펄렁이듯", "열 서방 사귄 계집 늙어서 서방 한  명도 못 챙긴다", "계집은 상 들고 문지방 넘으며  열두 가지 생각을 한다", "늦바람난 여편네  속곳 마를 새 없다", "서방질도 하는 년이 한다", "같잖은 서방질에 쫓겨만 났다" 같은 속담이 생겨났다. 서방질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면서, "골난(속상한)김에 서방질 한다"고도 하였다.  이렇듯 당대  사회의 속언을 살펴보면,  여성들의 간통은  '서방질'이란 공격을 받고는 있었지만 적지 않은 여성들이 도리어 '사회질서 파괴'에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당대의 음녀 '어우동'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상당수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성적 지배구조에  반기를 든 것이다. 당대에는  '음란한 여성'으로 돌을 맞았을지 모르지만 인간 본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선구적인 여성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여성들이 대거 안방을 나서고 있다  여성들이 대거 외출을 시작하고 있다.
  텔레비전 연속극, 신문 잡지, 주부들의 일상적인 대화로 미루어볼 때 여성들의 외출은 이미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성들의 외출은 단순한 외출로만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가출이 되기도 한다. 남성들은 이제 저녁밥을 지어놓고 여성들을 기다려야 할 것만  같다. 남성들의 외도만이 문제가 되던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외도가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현실생활에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텔레비전 연속극상으로는 그렇다.  일부 남성들은 충격을 받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다. '간통'이란 문제를 놓고 사회 전체가 호들갑 떠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우리 사회가 덜 '진화'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나는  늘 우리 문화의 변법자강과 법고창신을 부르짖는  편이지만, 우리 사회의  남녀불평등 문제에  있어서는 '개벽'정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구의 여성해방론'을 그대로 들여오는 '수입오퍼상'식 논리에는 늘 반대하는 편이지만.

 

생명나무, 황금가지의 수수께끼

 

문명세계에 보내는 편지
  나는 지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간 북미 인디언 수와미족의 추장 시애틀이 쓴 '문명세계에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다.  1855년 피어스 대통령에게 이 편지를 보냈으나 미국 정부는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 미국독립 2백 주년을 기념하여 뒤늦게야 공개했다.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백인들이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당신네 신과 우리의  신은 같은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당신들은 신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
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신입니다. 그리고 신의 연민은 백인들에게 동등합니다. 이 대지는  신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를 해치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백인들도 소멸할지 모릅니다. 아마 다른 종족들보다 먼저 소멸할지 모릅니다. 당신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오염시켜 나간다면 당신은 어느 날 밤  자신의 오물 속에 질식하게 될 것입니다.  들소들이 모두 살륙을 당하고 야생마들이 모두 길들여지며 성스러운 숲 속이 인간 냄새로 꽉 찰 때 그리고 산열매가  무르익는 언덕들이 수다스러운 부인네들에  의해서 더럽혀질 때 잔목숲과 독수리는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리고 이동과 사냥이 끝장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삶의 종말이요, 죽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들의 숲도 인간의  냄새로 가득 찬 것이  아닐까. 아니, 냄새를 가득 채울
만한 숲조차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닐까. 참으로 위대한 자연의 선물, 숲과 나무에게 위대하다는 말밖에 달리 붙여줄 말이 있을까.  그러나 대지는  모욕당하였고, 숲은 능욕당하였다. 동물들은  숲에서 쫓겨났고, 어린 잡목은 인간의 발자국에  뭉개졌고, 숲은 수다스런 음성으로 가득 찼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수나무는 '미신나무'로 내몰려  금줄이 벗겨졌고, 심지어 전기톱에 잘려 바둑판이나 장식용  나무등걸이 되었다. 인간의 역사,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당수나무의  나이테는 무늬목 장식  이상의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이  땅에서 추방시켜버렸을까. 그리고  그러한 가혹한 행동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사람들은 마을에  신성공간을 설정하여 당숲, 당산,  당섬 따위의 이름을 붙였다. 숲이  아니라면 나무 몇 그루를  심어서 신성공간을 연출하였으니 정자나무, 당산나무, 당나무, 당목, 신목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 나무와 숲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이탄층의 화석꽃가루를 찾아내어  당대의 식물군을 재현하는 고생물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 탄생 이전의  지구는 전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숲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시작되었다. '신석기혁명'은  농경정착으로 나타났으며 이때부터 숲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류는  숲을 장악하기는커녕 극히 일부분만을 쓸 뿐이었다. 적어도 중세사회까지 이러한 상태가 이어졌다.  애초에 숲과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원래 숲에서 왔다고 한다. 원시 선조들은 숲에서 그들의 생활터전을 닦았고, 나무열매를따먹고, 고기를 얻기 위해  숲 속의 야생 조수들을 쫓아다녔으며, 나무를 연료로 삼고 숲그늘 아래서 추위와  더위를 피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와 전혀 달랐다. 독일의 대중저술가 펠릭스 파투리는 역저 <숲>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원래 숲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바람일 따름이고 사실은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빙하기 이전의 숲들은  인간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인간이 뚫고 들어가 살기에는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늘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무서운 존재였을 뿐이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던 시기에도 숲은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숲은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정착되었다. 산림자원을 한없이  이용하면서도 숲에 대한 외경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는 어느 날 갑자기 비약적으로 발전하여--'비약적 발전'이라는 표현을 허락한다면--숲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숲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자 이제 인간은 숲을 깔보게  되었다. 숲은 집단적 능멸을 당하였고 숲 속의 동물들은 추방명령이나 학살경고 따위를 받아야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의 자연관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과의 친화였다. 집을 짓더라도 자연에 순응하여 바람과  물을 다스리는 풍수를 활용하였고, 숲과 나무를 두려워할 줄  알았다. 숲과 나무가 많이 모여 사는 산을 숭배하여 산신신앙이  지금껏 강하게 이어지고  있다. 마을이 만들어지면  으레 숲과 나무를 정하여 마을의  신으로 모셨다. 나무로 땔감을 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수많은 나무를 벤 것은 사실이지만 송금령 따위로  나무를 적절히 보호했다. 또 마을마다에는 마을숲이 있어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구한말에 이 땅에 들어온 열강들이 눈독을 들인 것 중의 하나가 잘 보존되고 있던 우리의 숲과 나무였다. 결국 제국주의  세력이 이 땅에 들어와서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숲과 나무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갑자기 마을나무를 베기 시작하자 업구렁이가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나오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업구렁이의 세상 출현은 신성스런 나무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무에 신성 따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무슨  원수를 대하듯이 마을나무를 베어  넘기기도 했다. 마을나무에서 신이 떠나자 나무는 생명을 잃고 단지 목재 따위의 실용적인 용도만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마을나무로서는 대단히  수치스런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스스로 살아 있는 나무, 생명을 주는 나무
  마을나무의 성스러운 역사  역시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윗대 할아버지인 단군은 신단수를 통해서 지상에  나타났다.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에 이르렀다"라고  <삼국유사>에 씌어 있다.
왜 하필 신단수로 내려왔을까.
  사람은 오래 산다고 해도 기껏 백 살을  넘기지 못한다. 반면에 정상적으로 자란 나무는 1천여 년을  살아도 울창한 나뭇가지를 드리우고 여간해서 죽는 법이 없다. 사람이 생명력이 강한 나무에 외경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무를 향한 우리들의 외경심은 수직적 우주관과  관계가 깊다. 웅장한 나무들은 어머니 대지에 뿌리박고 서서 우주를 바라본다.  나무는 땅 속 깊이 파고드는
뿌리로 지하계까지 잇고,  솟아오르는 식물의 생장력으로 하늘  꼭대기까지 뻗어오르는 상징성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천계와 지상, 하계를 연결시키는 우주축으로서 나무만큼  적합한 것은 없으리라.  나무를 통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민족은 우리  민족뿐일까? 박시인이 엮은  <알타이 신화집>은 시베리아 신화의 한 대목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이 만드신 하얀색의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구경하며 걸어다녔다. 동쪽에 가 보니 넓고  밝은 벌판에 높은 산이 있고, 그 산꼭대기에는 큰나무가 있었다. 나무  꼭대기는 일곱 층의 하늘  위에까지 솟았고, 뿌리는 땅 밑에 있는 깊은 나라까지 내려갔다.  나무에서 흐르는 진이 아래에 괴어 있는데, 아주 맑고 향기로웠다. 그 나무는  생명의 나무였다. 마르는 일이 없고 사시로 청청한 잎사귀는 하늘나라 신령님들과  살랑살랑 속살거리고 있었다. 하얀  사람은 동쪽을 떠나 남쪽,  북쪽, 서쪽으로 갔다. 그리고 사방을 살펴본  후에 생명의 나무에게 말하였다.
  "나무의 신령님, 땅의 신령님, 숨 있는 모든 것이 짝지어 살며 가지를 치고 있는데, 사람인 저만은 짝이 없이  혼자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머리 숙여 무릎 꿇고  비오니 제게도 짝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생명의 나뭇잎이 속삭이기 시작하더니, 젖빛 비를 내려 주었다. 향기로운 바람이 감도는  그 나무가 딱하고 갈라지더니, 나무 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나와 유방을 드러내고 젖을 먹으라고 했다. 그것을  먹고 나니 원기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나무에서 나온  신령님은 이 사람에게 온갖  복을 주고 물, 불,  쇠 등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젖과 꿀이 흐르기에  일명 생명 나무 또는 우주나무, 세계수라고  부르는 나무다. 영원불멸의 나무로 '스스로 살아 있는 나무', '생명을 주는 나무'인 것이다. 시베리아 야쿠트족은 '세상의 황금배꼽'에 가지가 여덟 개인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이 낙원은 최초의 남성이 태어나, 나무 둥치에서 몸만 내민 여성의 젖을 먹고 자라는 그런  땅이다. 그들 시베리아인에게 세상은 천상,  지상, 지하 3층으로 나뉜다.  생명의 나무는 이들 세계로  통하는 우주축으로 작동한다. 시베리아 무당인 오윤의 성스런 주거처에는 신수인  캐리약스 마흐(위대한 오윤나무)가 서 있다. 오윤나무에는 아홉 개의 가지가 하늘로 뻗어 있어 우주로 통한다. 이 같은 신화는 인도나 이란은 물론이고 고대 동방의 문화권에서 두루 발견할 수 있다.
  유럽에서도 생명나무는  자라났다. 북구의 신화에 '이그드라실'이란  이름이 붙은 양물푸레나무가 그것이다.  유달리 흰빛을 지닌 양물푸레나무가  지닌 생명의 환희가 지금도 북구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유럽의 축제에 등장하는 '5월의 나무'도 생명의 나무이다.  나는 여기서 영국의  프레이저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방대한 학문적 결정인 <황금가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는 이태리의 성스러운 숲, 한 그루의 나무를 둘러 싼 신화를 연구하여 무려  13권의 노작을 완성했다. 일설에는 그가 네미의 호수  근처에 있는 디아나 신전을  묘사한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시에서 <황금가지>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황금가지>는  우리 자신의 당나무를 깊게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왜 우리들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의 황금가지를  끌고 온 이유는 바로 우리의 황금가지가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심정에서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1949년 조르주  뒤메질의 서문의 붙은 <종교사개론>에서 '식물 숭배의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다음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1.돌-나무-제단의 집단. 이 유형은 종교 생활의 가장 오래된 층에서 실제적 소우주를 구성한다(오스트레일리아, 중국-인도차이나-인도, 페니키아-에게 해).
  2.나무-우주의 이미지(인도, 메소포타미아, 스칸디나비아 등)
  3.나무-우주적 신의 현현(메소포타미아, 인도, 에게 해)
  4.나무-생명, 무궁한 풍요, 절대적  현실의 상징. 대여신이나 물의 상징과 관계를 가지며, 불멸의 근원과 동일시된다.
  5.나무-세계의 중심이며 우주의 버팀목(알타이족, 스칸디나비아인 등)
  6.나무와 인간의 신비한  관계(인류의 선조로서 나무, 조상 영혼의  집적소로서 나무, 나무들의 결혼, 통과의례에서 나무의 존재 등)
  7.식물의 재생, 봄, 해(년)의 '재생'의 상징으로서 나무(5월목 등)
  엘리아데의 친절한  분류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생명의  나무가 자랐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인간을 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로  파악한 인물이다. 온갖 종교가  공생하고 있어 가히 '종교박람회장'이라고도  부를 만한 우리 나라 역시 호모 렐리기오수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나무 그리고 마을 지킴이
  우리 나라 마을나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나무는 느티나무가 아닐까. 괴목이라고도 하는데, '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나무와 귀신의 만남을 뜻한다.  이들 나무는  금기의 대상이며, 숲은 성역이  되어 마을지킴이라 부르게 된다. 마을나무를 꺾거나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히면 벌을  받는다. 이들 지킴이에는 마을굿이나 개인의례를 통하여 지전이나 물색을 걸어  모시기도 한다. 특히 서낭당이나 제주도의 마을굿에서 헌납하는 화려한 물색들은 민중의 소박하면서도 원초적인 미적 감동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주도  신목에 널브러진 화려한 '물색'의 민중적 미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마을지킴이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사람들의 정성어린 대접을  받은 나무는 더욱 영검을 지니게 된다.  역사 속에서 나무의 영검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일화는 셀 수 없이 많다.  도둑이 훔친 소를 끌고 밤새  도망을 쳤는데 날이 새어 아침에 보니 은행나무 주위만을 맴돌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에 나무가 크게 울어 국난을 알렸다. 일제 시대에도 할머니  당산의 힘이 작용하여 마을에  일본사람이 사는 것을 아예 막았다. 한국전쟁  때도 마을나무를 모신 마을에서만큼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병이 전국을 휩쓸어 여러 마을의 소들이 떼죽음을 하였는데 어떤 마을의 소들은 마을나무의 가호로 아무 탈이 없었다. 마을나무에  소를 매두었다가 돌아가면 병이 씻은 듯이  없어지자 소를 나무에 묶어두려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름 모를 전염병으로 이웃 고을에서 죽어 나갔으나 어떤 마을에
서는 한 사람의 환자도 없었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려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일이 없으며 개미나 뱀이 나무  밑에 나타나는 일도 없다. 나무에 올라가서 놀던 아이들이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대홍수로 보가  넘쳐 흘러 마을이 떠내려갈 지경에 이르렀지만 마을나무가 구해주었다.  마을나무의 영험을 인식하는 민중의 이해방식은 대충  이런 식이다. 또한 마을나무는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바로메타이기도 하다. 파릇파릇  솟아나는 새봄의 잎사귀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한해 농사를 점쳤다.  나뭇잎이 한목에 나면 풍년이고 여러 번 나누어  나면 흉년이 든다. 잎이 나무 밑 쪽에서 먼저 나면 그 해는 조생종벼가 잘 되고 위쪽에서 먼저 나기 시작하면 만종벼가 잘 된다. 매년 꽃이 필 때 위 아래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꽃이 피면 풍년 든다고 기뻐하고 꽃이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면 흉년이 든다 하여 미리 식량을 절약하고 준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코지를 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절대로 썩은 나뭇가지도 잘라서는 안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 마을나무를 잘못 대하여 벌을 받았던가.  어떤 사람들이 나무에  신이 없다며 먹물을 뿌렸으나  그날로 집에 불이 났고 그들은 마침내 미쳐버렸다. 당산나무를 무시하고 그 옆에 정미소를 차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았으며 아들도 눈이 멀었다. 장터에서  당산나무에 바칠 제물을 사 오다가 맛을  본 죄로 입이 퉁퉁 부어버렸다. 예전에  어느 사람이 금줄 친 마을에  들어와서 사냥을 하다가 죽었다. 왜병들이 마을을  급습하여 마구 나뭇가지를 잘라 냈는데, 잘린 나뭇가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왜병들이 깔려 죽었다. 새마을운동 당시에 당산제를 모시지 못하게  하려고 일꾼을 시켜 나뭇가지를 베게 했는데 그날로  일꾼이 죽고 말았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조금 다치게 했더니 뱀들이 쏟아져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위의 예를 통해 우리는 '마을나무에 손 대면 아주 안 좋거나 마침내 죽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렇듯 나무의  영험성이 늘 강조되곤 했다. 그래서 수몰 등으로 마을을 떠나야 할 때 당산나무도 함께 모셔 가는 경우마저 생겨난다.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의  충주호 언덕에 자리잡은 당나무의  경우에는, 1984년 수몰로 마을이 이주하면서  풍장을 치고 제를 지낸 후 서낭신을  옮겨왔다. 연기
군 서면 용암리 주민들은  1985년 마을저수지가 완공되자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물이 차  오르고 있을 마을의 동구나무가  윙윙 우는 소리가 매일 들렸다. 그래서 그 해에는 제사를 한 번 더  지내면서 동구나무를 위로했다. 송기숙 선생의 소설<당제>를 읽어 본  이라면 누구나 이들 수몰지구의 마을나무가 처한 상징적 지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미신타파' 등으로 마을나무를  모시지 못하게 되자 마을에 변고가 잇따랐다는 얘기가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동네 청년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죽어 나간다거나 마을에 되는  일이 없다는 식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일이 마을나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생긴 변고로 믿고, 그  동안 소홀했던 마음을 반성하고 다시 정성을 들여  집단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 모두 마을나무의  영검을 믿는 소박한 신심이 아니겠는가.

 

 나무를 대신하는 높다란 신간
  신령스런 나무는 살아 있는 나무 자체로서만  존속했던 것도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  자체라는 원초적 형태로서만이 아니라  이동이 가능한 신간으로서도 존재했다.  신간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솟대를 꼽을  수 있으니,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권에서 두루 살펴보았던 그대로다. 처음에는 가지와 잎이 그대로 살아 있는 생명나무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차츰 나무의 생장력만이 상징적으로 옮겨진,  즉 가지와 잎이  제거된 나무기둥이 대신  생명나무로서 자리를 잡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곧 나무기둥은 단순한  기둥이 아니라 나무의 생장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살아 있는 나무의 대용품이었던 것이다.  장대가 신간으로 쓰이는  가장 좋은 실례는 제주도굿에도 있다. 큰  굿판에 큰대라는 긴 신간을 세우고 제상과  신간 사이를 다리라고 부르는 긴 무명으로 연
결시켜서 신을 청하게 된다. 신들이 이 큰대를 통하여 강하하고, 큰대와 제상 사이의 무명다리를  건너서 온다고 여긴다.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신간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동국세시기>2월의 기사에는 제주도의 신간이 잘 드러나  있다. "2월 초하룻날 귀덕, 금녕 등지에서는 장대 열두  개를 세워놓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기다란 장대가  상징하는 신령성은  두레기에서도 두드러진다. 꿩장목을  위에 달고 깃폭을 늘어뜨린  두레기는 농민들의 자긍심의 상징이었다.  꿩장목은 단순한 꿩털로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비상하려는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다. 새 대신 새털이 장대에 앉은 셈이다.  충청도에서는 볏가리 세우기가 전해진다. 긴 장대에  오곡을 매달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볏가리 풍습  역시 신간의 범주에 들어간다. 서낭대의 신간, 하늘에서 신을 받는 신대...... 이 모든 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이다.  이 대목을 쓰면서 한남대학교 이필영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련다. 징기스칸이 13세기에 세운 몽고제국의 수도  캐라코룸 왕국 입구에는 은으로 된 나무가  있었는데, 이 꼭대기에 네  마리의 오리가 앉아서 각각  술, 말젖, 꿀차, 쌀술을 뿜어냈다고 한다.  이 은빛 나무는 북아시아 여러 종족의 세계나무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신간의 형태를 숭상하는 풍습이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모든 숲 속의 빈터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시베리아 야쿠트족에게는 이런 속담이 있다. "모든  숲 속의 빈터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거의 모든 숲들이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야쿠트족의 전통적 자연철학의 전형성은 바로 정신에  관한 것이다. 1991년 여름 세계 샤머니즘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사하로브 박사는 세 개의 정신은 어머니의 혼과  땅의 혼, 공기의 혼을 뜻한다고 설명하였다. 전통적인 중부 시베리아  사람들은 특수하게는 정신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눈다. 그들이세상에 대한 전망을 갖는 정보의  주요 원천은 조상들의 정신적인 유산 속에 담긴 자연철학적 요소이다.  따라서 그들이  위대한 신성거목이란 뜻을 지닌  '아리마 마스'를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 아리마 마스는 주로  길가에 서 있다. 나뭇가지에 오색의 헝겊을 걸어 잡아매고 나들이길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비는 것이 우리의 서낭목과 너무도 똑같다. 숲 속의 빈터마다 이름을 부여하는  정성어린 마음으로 나무를 지극하게 모시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마을의 숲과 나무는 저마다  이름이 있었다. 신성스런 공간인 마을나무숲은 그 자체가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숲과 나무가 마을신앙처로 기능하면서 생태문제를 해결하는 사례가 무수하게 많다.  그 구체적인 증거는 마을나무,  면나무, 군나무, 도나무, 천연기념물 등으로 지정된 수목이나 숲들 중에서 마을에 있는 것들의 상당 부분이 바로 마을신앙처라는 점이다. 또한 지정 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에 현재는 공식보호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상당수의 신목이나  당숲들은 공식 지정하여 보호해야 할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다. 또한  현재는 신앙심이 해체되어 단순한 고목으로만 남아  있는 나무들도 과거에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경우가 태반이다.  또 현재는 홀로 존재하는 수목도 과거에는 거대한 숲 속에 자리잡았다.  제주시 월평동과 영평동에 가면 다라쿳당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 부부신이 자리잡고 있다. 본풀이에 보면  남신인 산신백관은 한라산의 토착신으로, 수렵 목축의 신이며  마파람의 신이며 육식을 하는 부정한 신이다. 여신은 강남에서 온 외래신으로,  농경신이며 하늬바람의 신이며 쌀밥을  관리하는 깨끗한 신이며  아기를 보살피는 신이다. 이들  팽나무로 된 남녀 신이  부부의 연을 맺고 좌정하고 있는 중이다.  보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예송리의 아름다운 바닷가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낮에도 캄캄할  정도로 숲이 깊어서 사람들은  당숲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곤 한다. 보길도는  물이 귀하다. 예송리에서 큰 하천은  산신당고랑, 작은 하천은 우대미고랑이라 부른다.  산신당고랑은 이름 그대로 예송리  당에 인접하여 흐르기에  붙여진 말이다. 바닷가에서  위로 올라가 작은  계곡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숲이 나오는데,  하천에 바로 인접한 나무들 중에 거대한  당산나무가 서 있다. 산신할머니가  숲 속에서 잠들고 있다.  당할머니가 거주하는 나무 아래로 흐르는 물은 바로 그녀가 내려주는 신성한 물이니 함부로 물을 더럽힌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진도의 상만리  비자나무(천연기념물 111호)는 높이  9.2미터의 웅장한 거목으로, 천년 세월을 자랑한다.  해마다 정월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산등성이를 타고 비스듬하게 눌러앉은 비자나무 아래에  모여서 소나 돼지를 통째로 잡아놓고 제사를 지낸다. 신안군의 관매도 후박나무(천연기념물 212호)도  수령 8백 년, 높이 18미터의 거목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은 물론이고 마을성황님으로 정초에 모셔진다. 이와  같으니 많은 천연기념물들이  마을나무인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몇 년 전에  한겨레신문사에서 '이곳만은 지키자'는 국토살리기 캠페인을 벌였을 때, 다시금  주목받은 숲 중에 성황림이  하나 있다.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에
있는 천연기념물 92호인 성남리의 수림지와  93호인 성황림이다. 서로 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로 비유한다. 숲에  들어가면 해묵은 고목 등걸이  쓰러져 있고, 이끼가 생생하게  자라고 있다. 바로 천년 세월을 버텨 온 천연림이다.

 

21세기의 생태환경을 읽으며
  근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들은 이들 숲에다 '미신'이란 딱지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마을나무를  '미신나무'라고 구박하면서  학대하였다. 도대체 미신이란 무엇인가.  '문명인'의 관점에서 '야만인'을  덜 개화된 인종으로 비하해서 보는 것과  같이 미신이란 다분히 제국주의적,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당당한 정신이  된다. 이에 반하여 바깥 사회의  국외자들에게는 미신이 된다. 더욱이  마을나무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거론되는  것일진대, 이를 '미신나무'로만 몰아대는 우리의 편협한 이해방식이 안타깝다.  이렇게 미신 딱지를 붙인 것은 서구 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 땅을 찾은 서양 선교사들(그들은 대개 애숭이 청년들로 타민족 문명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였다)은 마을나무와 숲을 단지 '우상타파'라는 네  글자로만 해석했다. 1992년 가을에  한국역사민속학회에서 서울시 사당동 장승배기의 장승을 베어  넘기는 사건을 가지고 긴급  좌담회를 연 적이 있다.  그때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참석하여 이런 말을 했다.  제주도에는 곳곳에 수백 년이  넘은 '팽나무' 등의 신목이 있는데 이 팽나무를 천주교인과 신부들이 파괴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미신을 타파한 셈이 된 거죠. 특히 제주도 남쪽지방에 가면 '뱀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뱀이라면 '사탄' 아닙니까? 사탄을  숭배하다니 이건 말이 안된다며 주민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미신을  적극적으로 타파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몇 군데의 신목을 잘라버리고 당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잘라버린 나무로 '공소'를 짓는 데 썼습니다. 그러니까 '일거양득'이었겠죠. '미신타파'에도 좋고, 공소를 짓는 데 재목으로 쓰고 '일석이조'였던 셈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기독교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근대화, 문명개화, 사회개조, 구습타파,  새마을운동 따위의 무성한 구호들이  숲을 가득 채워 나갔다. 70여 년 전의 월간 <조선농민>(1926년)을 들추어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개 묵은 고목압헤 가서 제단을 모아놋코 꽤쇠를  치며 술을 부어 절을 한다. 별 기괴망측한 짓을 다하나니  그 따귀신이 나무귀신으로 변하엿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도 보입니다......   야만인종들이 토템을 중심으로 굿센 단결을 짓는 것처럼 동신을 중심으로 동네사람들의 마음을  모우는 것은 똑같은 의미로 볼 수 잇을 줄  암니다...... 토템생활을 하는 그  사람들은 야만인종이라 하는만치 동신제 지내는 여러분도 야만인종일 것입니다.  자긔도 토템생활을 하면서도 토템생활을 하는 야만인종들을 비웃는 동신제 지내는 여러  어른님네. 하로밥비 태고시절 이약이 생활을 벗어나서 사람다운  의식있는 생활하기를 몹시도 기대려 말지 안슴니다.  문명과 야만을 편가르기 하는  잘못된 습성이 매우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들이 오늘날 보는 것처럼 마을 숲과 마을나무는 왜소해졌다 거대한 나무들은 거의 베어져서 사라졌고  마을나무, 정자나무 등으로 일부만 존재할 따름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왜소해진  숲과 나무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깊은 숲과 웅장한 나무가 던져주는 신성함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현지 조사를 다니다  보면, 오늘날은 신앙심을 상실하고 그저 홀로   존재하는 정자나무도 예전에는 거대한 숲  속에 사는 나무였고 마을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자주 확인한다.  그런데 숲과 나무의 변화가 너무나 극심하여  과거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을 이제는 흔적조차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우리의 생명나무에서 21세기 생태환경의 미래를  읽고 있다. 전세계의 숲을 누가 망쳐버렸는가. 오늘날 전세계 숲의 대부분을 망치고 있는 '아무 대책 없는 과학'은 바로 구미인들로부터 출발했다고 본다. 세계사의 발전이란 명제는 바로 숲과 나무의 소멸이란 차례를 밟아 나갔다. 그들의 세계관은 바로 근대화, 선진과학기술문명 따위의 방식으로 대지를 오염시켰다.  과학기술문명의 오염을 그야말로 서구적인 시각에서 극복해 보려고 하지만 서구사회가 주창해온  '무한정 발전론'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진보적인 생태론자들조차 애써  생태환경의 미래를 서구적인 관점에서만 모색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들의 나무와 숲으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나무와 숲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공존방식은 그 자체가 생태문제를  뛰어나게 인식한 것이기도 했다. 나무와 숲을 사랑하던 살림방식, 그것은 대단히  오래되고 원초적인 삶의 방식이며, 생태의 문제가 바로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큰나무 전시회를 다녀와서
  1995년 여름이었던가. 손장섭  화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1980년대 어느 모임에선가 뵌 적이  있고, 1989년에 경희대 박물관에서 무속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이석우 교수와 함께  찾아와 잠시 담소를 나눈 정도가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전화를 거는 필자의 마음은 무척 설레었다.  신문에서 '손장섭 전시회 큰나무'란 제목과 사진 한 컷을 보는 순간, '드디어  기다렸던 그림이 출현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압축한  그림이 나타났다는 기쁨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우리의 마을나무를  그렇게 본격적으로 그린 사람이 있었던가.  삼척 궁촌 신수, 강화 당산나무, 강진 신수, 삼척 근덕 신수, 서해안 신수, 삼척 도계 신수, 김제  신수, 법성 근교 신수, 남해 언덕  위의 당산나무, 백련사 신수, 마을 동구 당산나무, 김해 신천리 신수, 대전 근교 당산나무, 강화마을 당산나무, 마을신수, 강화 당산나무, 언덕 위의 당산나무...... 그의 그림 제목이다.  느티나무, 푸조나무, 음나무, 은행나무, 왕버들, 백송, 후박나무,  비자나무, 동백나무...... 그가 익히 그린 나무들이다.  임학자 김학범 교수가 <마을숲>이란 책에서 꼽은 마을나무가 소나무, 느티나무, 오리나무, 느릅나무, 은행나무, 팽나무,  쉬나무, 회화나무, 상수리나무, 버드나무, 왕버들나무, 푸조나무, 이팝나무, 노린재나무, 벚나무, 모감주나무, 미루나무, 물푸레나무, 졸참나무, 털야광나무,  음나무, 합다리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잣나무 등이나 대략 일치한다.  흡사 고호를 연상시킬 만큼  흰색을 강렬하게 사용한 마을나무는 더욱 신령성을 얻은 듯싶다. 그  흰색은 마을나무에 한껏 어울리는 위엄과 격조, 그러면서도 하늘로 올라가고 땅에 뿌리박은 생명나무에 숨결을  부여하고 있다. 실제로 삼척 도계의 느티나무의 뻥  뚫린 나무 등걸에서 푸른 새싹이 솟아나고  있다. 고목나무에 새 잎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문화의 희망 읽기를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라고나 할까. 그는 작품집의  마을나무 옆에 실물 사진도 함께 실었다. 그는 발로  뛰면서 이 땅의 마을나무들을 최초로 집대성한 셈이다. 그이의 붓길을 통하여 마을나무는  비로소 '미신' 따위의 잘못된 딱지를 벗고 대중 앞에 우뚝 선 것이다.  그림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큰나무  전시회 포스터를 연구실 벽에 붙이고, 손 화백이 기념으로 준 화집에서  '서해안 느티나무' 그림을 오려서 책상의 유리판에 깔아두었다. 생명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풍물굿 1799-1999
 
  내가 서태지의 팬이 된 이유
  어느 날 문득, 나는 서태지의 팬이 되었다.  그네들의 두 번째 앨범에 실린 '하여가'가 인연의 끈이다. 그들이 은퇴한 지금에도 나는 즐겨 '하여가'를 듣곤 한다. 어느 날 문득 학교 앞 카페에서 날라리의  신명 돋우는 음정으로 시작되는 '하여가'를 들었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대뜸 무릎을 치면서 "바로 저것이다!"라고 외쳤다.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그들이 꿈꾸는 바를  이해할 것도 같았지만, 정작 결정적인  것은 '하여가'의 풍물소리였다. '하여가'가 날라리까지  포함한 풍물굿으로 시작된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내가 서태지를 좋아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은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젊은 음악인들이  민족음악을 포기, 무시, 박대하면서 서풍만 흉내내고 있을 때, 그들은 과감히 풍물굿을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풍물굿은 가장 인기 있는 대중음악계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서태지는 나같이 대중음악에 둔감하면서도 풍물굿을 즐기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하였다.  풍물굿은 뉴욕에서 열린  '해방과 유엔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에도  '주연배우'로 출연하였다. 불과  네 명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패는 1980년대 이래로  전 세계를 돌면서 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심지어 어느 나라 사전에는 아예 '사물놀이'란 명사가 올랐다고 한다.  우리 문화가 사라지고,  우리 문화에 애정이 없다는 식의 한탄이  습관처럼 오르내리는 시대에서도 풍물굿은 가히 압승을 거두고  있다. 대학교에 풍물패가 꾸려졌고, 노동조합에도 빠짐없이  풍물패가 있다. 그것은 풍물굿이 전통적이되 아주 현대적이란 증거이다.  그렇다면 풍물굿은 어떤 '근대성'이  깊숙이 내재된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사 통일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신명축제예술단의 통일염
원대동굿 '뚫으세 뚫으세  물구녕을 뚫으세'를 보면서 <한겨레 21>에 다음과  같이 다소 '흥분'된 글을 쓴 일이 있다.

 

오랜만의 벅찬 감동! 

공연 하나를 보고서 왜 그런 '포괄적'인  감동을 느껴야만 했을까. 여기에는 필연적인 하나의 사연이 있으니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몇 대학에 이른바 '농악패'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풍물굿 논의가 무성해지면서, 아울러 '축제에서 대동제로'  같은 화두가 던져졌다. 농악이란 말에 대한 반성이 풍물굿으로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대동굿이  대학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가 짐짓 해체주의로 흐르자  이내 대동굿은 사라졌고, 풍물굿의 음악성만 강조하는  분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풍물굿을  음악으로만 파악하려는 의도가 공연의  기동성 확보라는 점에서는 타당할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전술에 불과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전략이 아닌가.  "사물놀이가 하나의 전술이라면, 풍물굿은 전략이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다. 전술은 기동성과 공격성이  뛰어남을 자랑한다. 사물놀이패 네 사람이 전 세계를 누비며 풍물굿의 음악성을  세계에 드러냈을 때, 전 세계가 놀랐고, 우리의 음악이 세계성을 인정받았다는  데서 우리들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사물놀이는 우리들 시대가 거둔 중요한 전리품이기는 하되, 하나의 전술일 따름이다.  그러면 풍물굿이라는 전략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대동성이 아닐까. 노래, 춤, 신앙, 노동, 전투  따위가 모두 망라된 대동놀이야말로 풍물굿의 알파요, 오메가다. 놀이는 음악보다 넓은  개념이다. 20세기의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문화사가 호이징가는 '놀이하는 인간'을 다룬 <호모 루덴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음악은 놀이의 영역 안에 포함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음악을 만든다는  것의 발단부터가 놀이 고유의 형식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풍물굿은 그  대동성으로 말미암아 '토탈 아트'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풍물굿은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풍물굿의 흘러온 역사 속에서 오늘을 다시금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악이냐 풍물굿이냐
  풍물굿의 역사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풍물굿이냐 농악이냐"라는 오랜 논쟁부터 재정리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라면, 나는 '풍물굿' 쪽이다. 심포지움에서 만난 선학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농악이나 풍물굿이나 다 똑같은 말 아니오?"  물론 맞는  말이다. 학자들이 쓴 보고서를  보면, 한결같이 농악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이래로 풍물굿에 관심을 기울인  수많은 '굿쟁이'들은 모두 풍물굿이란 말을 고집한다.  어째서 이런 구분법이 생겼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농악이라고 표현하는 사람과  풍물굿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의 생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조선 시대 양반들의 문자에는 '쟁고, 금고' 따위가 등장한다. 그러나 민중이 실제로 그렇게 불렀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민중은  '풍물굿, 지신밟기, 뜰밟이, 매귀, 매구, 풍장,  두레, 걸궁, 걸군, 글입' 따위의 다양한  명칭들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꾸어 불렀을 것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돈이나 쌀을 거두는 걸립,
마당을  밟아주는 뜰밟이(지신밟기),  두레의  들풍장, 마을당산에서  치는  당산굿...... 각기 자기 쓰임새에 따라 다른 이름을 지녔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전수를 받고 갔을 정도로  소문난 풍물굿 마을인 전북 임실군 필봉마을에서도 '굿친다'고 하지  농악이라 하지 않는다. 굿, 바로 그것이 정답이다.  농악이란 말이  처음으로 공식화된 시기는 일제  시대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까지는 '농민, 농촌'이란 말도  없었다. '향곡에 살고 있는 민' 같은  표현으로 농촌과 농민을 나타냈다. 조선 시대의 농악  운운하는 표현은 문헌상으로나 민중의 현장 용어로나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 학자에서 시작된 이후 학계에서는 일사분란하게 농악이란 말을 써왔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중앙대 정병호 교수 같은 이는 정작 <농악>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농악 명칭은 우리 나라 예능을 한자로 정리할  때 나온 어휘라고 추측된다. 국악은 정악과 속악으로  나누는데, 속악 중에서도 '농촌의  음악'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농악이라는 말이 문헌상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부락제>라는 책에서였다. 따라서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 시대에 생긴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농악은 문자 그대로  '농촌의 음악'이란 뜻이 아닌가.  하지만 풍물굿이 음악이기만 하던가. 1985년도에 김봉준  화백, 종교연구가 진철승 선생 등과 함께 민족굿회를 창설한 뒤에 나  자신이 편집하여 1987년에 발간한 <민족과 굿>이란 책에서 풍물꾼 김원호는 이렇게까지 쓰고 있다.  풍물굿에 대한 시각 중에서 가장 저해한 시각이 풍물굿을 가락 중심으로 바라보는 점이다. 음악성이 아주 높다는 둥, 리듬음악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탁월하다
는 둥 음악이라는  장르만으로 풍물굿 정신을 찢어발기고 있다. 이  여파는 상당해서 풍물굿의 현재 모습이 음악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일제 때 제국주의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던  농악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에 '농촌의 악'이라서 농악이라면, 현재 도시민이 치는 악은  '시악', 공장에서 치는 악은 '공악', 학생들이 치면 '학악'이 되어야 하는가.  이쯤 설명하면, 풍물굿이  농악보다는 한결 포괄적이고 정확한  표현일 뿐더러 역사적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풍물굿'에서 '굿'을 떼어내고 '풍물'이란  말을 자주 쓰는데, '풍물'은 실상 악기를 뜻함을 감안한다면 잘못된 용례라는 지적이다. 백번  옳은 지적이니 앞으로는 집단적인 굿을 뜻하는 풍물굿과 악기를 뜻하는 풍물만큼은 가려서 쓸 일이다.  18세기 마지막 해에 이옥이 저녁밥을 지으며  풍물의 기원을 언제부터일까.  선사 시대의 사슴가죽북, 삼국  시대 사찰의 징, 고려 시대 청자에  그린 장구...... 이들 악기의 유물로만 보면  선사, 고대로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물굿 원형에 접근한  문헌기록은 아무래도 후대로 내려온다는 게 학계의 일치된 견해이다.  조선 전기인 16세기  초반(1952년), 경주에서 출판된 <용제총화> 성현의 진술을 몇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섣달 그믐날 밤에 관상감에서는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궁중에 들여보내 북과 피리를 갖추고  새벽이 되면 방상씨를  쫓아내던 풍습이 있었고,  이를 민간에서 모방하여 북과 방울을 울렸으니 방매귀라 불렀다.  방매귀는 악귀쫓기로 보이니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 뜰밟이를 행해주는 매귀굿의 원초형이  아닐까. 섣달 그믐에 행하던 나례에서 매굿  등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풍물굿의 모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로부터 1세기 뒤인 17세기 중엽(1684년),  김육이 쓴 <송도지>를 보면, 사태가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12월 하순에 북을 치면서 동리를 돌아다니며  쌀을 얻고 복을 빌어주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날의 걸립굿과 기능은 유사한데, 정월 대보름이 아니라 12월  하순에 행해졌고 꽹과리, 장구,  징 등에 대한 언급이 없이 북을 치면서 돌아다녔다는  차이는 있다. 사실 걸립의 역사는 이미  고려 시대에도 확인된다. 광대, 재인, 수척 따위의  예인들도 걸립을 놀았음이 분명하고,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도 걸립, 걸양 등이  확인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이 완성된 형태의 걸립 풍습은 풍물굿이 좀더 세련되고 화려해진 후대가 아닐까.  성현의 시대로부터 150여 년 뒤인 18세기의  마지막 해(1799년), 이옥의 <봉성문여>를 보면 사태가  보다 분명해진다. 12월 29일에는 매귀희를  하고, 정월 12일에는 화반을 하였다고  씌어 있다. 조선 전기에도 행해지던 섣달  그믐날의 악귀 쫓던  전통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초에  걸립이 출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름 또한 매귀희, 화반으로 나타난다.
  꽹과리 3인, 징  2인, 소고 7인이 종이꽃을  꽂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는데 쌀을 문 밖에 내놓아서  화반이라고 하였다. 쌀과 돈을 얻으러 다니는  것은 걸공이라고 불렀다. 매귀희는 매귀굿, 종이꽃은 고깔, 화반은 꽃반, 걸공은 오늘날의 대보름 걸립이 아닌가.  이옥이 누구인가. 이옥  연구가 김균태 교수(한남대)는 그의  업적을 '탈모화적 민족문학', '조선적 문학', '고유문화 옹호'로 압축한다. 실제로  그는 시정잡배들의 생활, 사당이나 영등굿,  걸립굿 따위의 서민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했으니, 나는 그를 '한국민속학'의  머리를 장식했던 주체적 인물군에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18세기 후반의 연암그룹이나 다산그룹과는 그 문학세계가 판이했던 김려그룹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려는 순조 1년(1801년)에 천주교를 신봉하여 진해로 유배되었던 인물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가수재전> <삭낭자전>  <장생전>등의 소설이 전해지고 있다.  김려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이옥 역시 소설에 능하였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연암처럼 '불순한' 소설 따위를 쓰면 불우한  처지가 되는 게 당시의 실정이었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이었던 33세 때,  그는 소설문체로 과거에  응시하여 논란을 일으킨다. <봉성문여>의 '추기남정시말'에 따르면, 그의 나이 36세 때 정조는  문체가 괴이하다고 하여 삼가현(지금의 구례)의 군적으로 편입시켜 쫓아보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40세 되던 해, 삼가현에서  재차 소환을 받아 그해 10월에 내려간다.  삼가현 서문 밖에서  남의 방을 빌어 기거하며 밥조차 사먹으면서  지낸다. 그때 보고들은 인정과 풍물을 기록하였으니  <봉성문여>가 그것이다. 18세기의 마지막 황혼이 저물어갈 때,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으면서 기록을 남겼으리라. 그의 나이  41세 때, 2월 18일에  귀경하였으니 삼가현에 머물렀던  기간은 1799년 10월 18일부터 만 118일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옥은 풍물굿에 대한 소상한  기록을 남긴다. 물론 이옥의 시대인 18세기 말기 이전에도 풍물굿은 있었을  것이다. 그 태동의 역사는 <송도지>의 매귀희 기록이 17세기 중엽인 것으로 보아 1600년대 중반기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형태의  풍물굿이 완성되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이옥이  살던 당시에 걸립굿이 막 시작되었다는 정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매귀희가 유행하는 촌락에서는 쌀과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름하여 걸공이라고 한다.  위 기사로 미루어볼 때, 아직 '유행하지 않은' 촌락도 많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간 막연히 매귀희로 표현하거나,  소박한 개념의 금쟁, 고 따위로 표현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봉성문여>에 이르면 아주  구체적으로 매귀희, 화반, 걸공 등이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풍물굿의 걸립,  꽃반, 걸립 따위가 18세기 말에는 완전히 정착단계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김육이 <송도지>를 쓴  1648년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사회가 새롭게 재편되던 조선 후기의  첫머리다. 이옥이 <봉성문여>를  남긴 기대는  18세기를 마감하고 19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임란  이후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민중의  성장이 이루어진 때이다. 따라서 평안도농민전쟁, 임술농민항쟁, 동학농민전쟁 등  변혁의 시대였던 19세기가 시작되는 바로 그  즈음에 민중은 자신의 분출되는 힘에  가장 알맞은 풍물굿이라는 표현양식을 찾고 발전시켰다.  1799년, 저물어가는 18세기의  저녁 무렵 한사 이옥이 서문 밖에서  밥을 사먹으면서 풍물굿이 시작되던  당대의 정황을 정확히 그렸던 때로부터  2세, 우리들은 20세기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땅도 땅도 내 땅이요, 조선땅도 내 땅이다!
  19세기에 이르면 민란이  터지는 곳마다 맨 앞에 풍물굿이 나섰다.  일제 시대에 농민들이  주재소 앞으로 몰려가  소작쟁의를 벌일 때도,  삼채가락이 이렇게 쏟아져나왔다.  땅도 내 땅이요, 조선땅도 내 땅이다!  그 전통에 따라 1970-1980년대의 어려운 고비마다 굿패들은 똑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도대체 풍물굿에는 어떤 변혁적 역동성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노동의 현장에서 얻어진 힘에서 해답을  구해야 할 듯하다. 애초에는 풍물굿이 악귀를 쫓고 복을 구하던 신앙풍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모내기 노래를 부르면서 논북을 치던 모방고, 김매기의 두레풍장굿은 가닥이 다르다. 영조 14년(1738년) 11월의 <승정원일기> 881책에 이렇게 적혀 있다.  상이 말하시다. "원경하  어사 때 속공한 것은 모두 사중  기치였는데 지금 이 서계에 민간의 쟁고 기치를 민간에 돌려주자는 요청이 있는데 민간에 이런 물건이 이전부터 있었던가?"  인명이 말하다. "민배 경획때 모두 이 소리로  소리를 내어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경하가 당초 이를  금단한 것은 비록 나라를 위해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해서 취한 것이지만 이것은 지나친 염려입니다.  인심이 이반하면 호미와 고무래, 가시나무 자루가 모두 도둑이 될 수 있는데  어찌 병기 없는 것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것들은 본래  민물이 되어서 갑자기 속공하면 의당 민원이  돌 것입니다."  태량이 말하다. "민물은 결코 속공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할까요?"  상이 말하시다. "복험의  직임이 어찌 조각쇠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을 상대할 것인가? 이상스러워 놀라지 않겠는가? 그 깃발은 군문에서 보통 쓰는 것과 같은가?"  태량이 말하다. "모두 쓸모없는 물건이고, 또 이미 백년이 된 민속이어서 금지하기도 어렵습니다."  풍물의 '위험성'이 논란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백년 민속'이란 표현에 주목하자. 앞에서  설명한 1648년 <송도지>의  매귀희로부터 백년을  더하면 1748년이 되니, 위 <승정원일기>의 1738년은 '백년 민속'에 근접한 연대가 아닌가.  옛 사람들이  오래 되었음을 뜻할 때  쓰는 '백년'이란 시간관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야 없지만, 17세기 정도에 풍물굿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음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이 시기는 이앙법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대며, 두레의 역사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여 그 앞뒤의 맥락이 모두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는 풍물굿의 역사가 농민들의 두레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풍물굿은 매귀굿에서 기원하였으되, 노동의  힘겨움을 놀이로 풀어내던 농민들의 일터에서 완성된 셈이다.  <승정원일기>의 위  대목을 보노라면, 늘  풍물굿의 변혁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미 이때부터 지배층은 풍물굿에서 어떤 '불온한  기운'을 감지한 게 아닐까. 이후로도 풍물굿의  '불온성'은 계속  이어졌다. 1738년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이동할  때 영기 뒤에는 꽹과리, 호적, 북  같은 악기가 뒤 따라 다녔다. 농민군은 악기의 차이만 갖고도 자기  진영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 악기와 결합된  연희적인 요소들, 가령 길군악 같은 요소들은  바로 일상적인 생활에서 단련된 것이었지만 유사시에는 군악대의 역할도 했다.  고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때, 주모자들은 1월 10일(양력 2월 15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10여 마을의  풍물굿패를 동원하여 예동에 수천 명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전봉준은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봉기를 선언하고 나서 고부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역설한 다음, 대오를 둘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향한다.  음력 1월  10일은 정초에서 대보름 사이이므로  한창 걸립굿이 벌어질 시기이다. 10여 개 마을의 걸립꾼이 모였으니 1개  마을당 약 30여 명쯤 어림잡아도 걸립꾼만 3백여  명이 모였음직하다. 그 외의  동리 사람을 합하면  수천의 사람이 모였을 터이니 풍물굿패가 범지역적 합굿을 이룬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98년, 한말에 일어난 농민운동의 하나인  영학당 사건의 공초에도 농민군을 동원할 때 풍물을 쳤다는  기록이다. 장에 가는 백성을 모으기 위해 날라리, 꽹과리,  징, 장구가 동원되었다. 이 같은 전통은 일제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풍물굿은 늘 불온시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종교지도자였던 강증산은 어릴 때 풍물가락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증산은 자신이 행한 천지공사를 천하굿이라 불렀고, 풍물장단으로  춤추면서 의례를 집행했다고 한다. 풍물의 대중성을 잘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1970-1980년대에도  풍물굿은 시위대를 모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고 풍물소리만 나면 경찰이 몰려들었다. 방독면을 허리에 찬 '로마병정'들이 굿판을 늘 지켜주었다.  일과 놀이의 한바탕 어우러짐이 변혁이란 토양과 만남으로써 풍물굿은 민중적 진취성을 획득한 셈이다.  그러나 과연 이쯤에서 풍물굿이 완성되었을까. 사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벙어리 노인 혹은 노트르담의 꼽추
  내가 대보름 때마다 자주 들렀던  부안의 어느 마을에는 벙어리 노인이 한 분 살고 있다. 70년대 초반의 노인치고는 힘이 장사지만  말만 못하는 게 아니라 듣지도 못한다. 행동거지마저 어눌하여 동네 아이들에게조차 놀림거리가 된다.  그런데 동네에서 대보름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대동  걸립을 다니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 벙어리 노인이 나타난다. 어디 있다  왔는지 모르게 훌쩍 뛰어들어 신명나게 한바탕 춤을 추는데, 지게목발을 가지고서 추는 막대춤이 일품이다. 평생을 지게목발만 지고 살아온 인생의  한풀이인 양 그 막대춤에는 어떤 달인의 경지가 엿보인다.  그의 보릿대춤은 또  어떤가. 엉덩이를 불쓱 내빼물고 꼽추처럼 등을  숙여 춤을 춘다. 그  춤을 보면 왠지 안소니  퀸이 분한 '노트르담의 꼽추'  생각이 절로 난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삶의 한과 고통이 발산되는 것이랄까.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벙어리 노인이야말로 굿판의 진정한  주역이고, 진짜 '인간문화재'라고 생각하곤 했다.  우리는 흔히 풍물굿을  잘못 알고 있다. 앞에서 이끄는 상쇠나  장구잡이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락을 이끄는 앞치배  못지 않게 뒤에서 흥을 돋우는 뒤치배도 중요하다.  우리의 풍물굿은 아예 뒤치배를 조직적으로 발전시켰다. 뒤치배가 없으면 볼품이 없고 신명이 없어 굿이  이내 깨지고 만다. 뒤치배의 으뜸은 역시 잡색이다. '농촌 탈춤'이랄 수  있는 잡색놀이에서 각시, 양반, 포수 등이 어우러져 거리굿을 연출한다.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잡색이 무수하게 따라다니는 판굿은 풍물굿이 최고도로 발전한 대동굿판이 된다.  동네 판굿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다 보면 이웃마을로 나서는 본격적인 걸립도 생겼다. 바야흐로 풍물굿이  본격적인 '연예의 길'로 나선 것이다. 풍물굿에는 또 다른  요소도 흘러들어왔다. 장터를 누비면서 연예를 팔며  살아가던 유랑예인집단의 세련된 기예가 풍물굿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예능을 팔아야 했던  예인들의 전문적인 기량은 일반 농민들의 두레풍물굿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사당패가 마을로 들어와  한껏 기량을 과시할 때, 마을 상쇠도  전문적 기량을 열심히 연마하였을 것이다.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아예 남사당을 따라나서기도 했다.  풍물굿패는 군사적인 요소도 흘러들어왔다. 풍물패는 늘 행진곡풍의 질굿(혹은 길굿)을 치는데, 이를 길군악이라 부른다. 길을 가는 군악이란 뜻이니,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을 하던 군사적 풍습이 결합된 것이다.  풍물패의 상징인 농기,  명령전달기인 영기도 바로 조선 시대   군기와 결합된 것이다. 덕수궁 소장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용기, 영기 등의 군기와 풍물패의 농기는 그 모양과 형태가 모두 똑같다.  농민들이 국가적인 위엄을 갖춘 군사 깃발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상징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당시 농민은  그야말로 '향토예비군'으로서 유사시에는  늘 전투원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풍물패를 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풍물굿에는 다양한 진법도 들어와 있다. 진법이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전투진용 아닌가. 군문열기 같은 놀이에서는 완벽한 정도로 진법 변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풍물굿으로 유입되었을 것이  분명한 쇄납은 그 자체가 군악의 중심이기도 했다.  일명 태평소, 호적, 날라리라고도  하는 쇄납은 몽고에서는  'suru-nai', 터키, 페르시아, 인도에서는 'sur-na'라고 하여 아시아에  널리 퍼진 악기다. 일찍이 <악학괘범>에 이르길, "태평소는 본디 군대에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신앙, 노동,  군사, 연예 같은 여러 요소들이 지류처럼  합쳐져서 큰 강물을 형성하여 풍물굿을 완성시켰다. 상쇠덕담의  신앙성, 진풀이의 전투성, 춤과 노래와 노래가사의 총체적  예술성,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쌀농사  현장에서 완성되었으니, 풍물굿의 폭과 깊이는 '장강대하'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민중의 역사 속에서 성장, 발전한 풍물굿도 일제 말기에 '끝장'이 나버렸다.  구장을 앞세운 순사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놋젓가락과 징, 놋사발과 꽹과리를 공출해갔다.  총알공장 혹은 대포공장에서 녹인  징과 꽹과리는 총알이 되고, 대포알이 되어 각각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어떤 놈은 남양군도로 향하였고, 어떤 놈은  북만주로 향하였다. 또 어떤 놈은 일본사람 총구멍으로 들어갔고, 어떤 놈은 징병간 조선사람 대포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조선사람 중에는 마을에서 풍물깨나 치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풍물굿이 약화된 것을  어찌 일제의 탓만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브라스 밴드가 들어와 길군악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장구  소리는 유치하게 여기면서 바이올린 소리는 고급스럽게 보는 식의 그릇된  근대주의, 개화주의가 풍물굿을 경시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심지어 새마을운동도 풍물굿의  보존을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별따세 별따세 하늘잡고 별따세
  풍물굿을 이야기하다 보면 흔히 명인들의 계보를  꼽는다. 판소리 계보가 있듯이, 풍물굿도 계보가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견해에 썩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저런 장단을 배울 수야  있었겠지만, 풍물굿은 '모태 신앙'처럼 아기 때부터 온몸으로 체화되어야 제 가락이 나오는 법이다. 요즈음이야 어느 선생님에게  가서 배웠다는 식으로 '주소성명'이  분명할지 몰라도, 예전에야 자라면서 보고 들은 입장단으로 시작되었지 않은가.  악기를 치고는 싶은데 악기에  손대는 것을 막으니 살짝 건드려보았다가 혼이 나서 도망을 치던 아이, 무작정 따라나서서 동네  아저씨 어깨 위에 무동을 타고 넘실넘실 춤을 추다가  그대로 장단이 온몸에 밴 아이, 엄마품에  안겨서 새록새록 잠을 자다가 풍물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 그렇게 배운 아이들에게 무슨 계보가 있고, 스승이 따로 정해져 있었겠는가.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입장단을 익힌다. 풍물굿을 익히는 '배냇짓소리'처럼.
  별따세 별따세 하늘잡고 별따세
  줄기줄기 물줄기 골짝골짝 산줄기
  꽁꺾자 콩꺾자 두렁너머 꽁꺾자
  사실 풍물굿은 온몸으로 배워  나가는 것이지만 단순한 가락으로만 배우는 것은 아니었다. 산굽이를  돌아서 고향을 찾아갈 때 먼 들판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풍물굿 소리를 생각해 보라. 어찌 보면  징과 꽹과리, 북과 장구와 소고, 날라리는 각기  다른 음색으로 어우러져  신명을 만들어낸다. 각각은  때때로 호흡을 맞추다가 때로는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그 오묘한 음색과 부조화의 조화, 조화 속의 부조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풍물소리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으리오! <악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쇠와 가죽과 대소리의 조화야말로 풍물굿의 음악적 완벽성을 이루는 핵심인 셈이다.  쇠소리는 갱하니,  그 갱한 소리는  호령을 일으키고 호령은  기운이 가득하게 하고 기운이  가득하면 무를 일으킨다. 가죽소리는  훤하니, 훤한 소리는 동하게 하고, 동하면 군중을  진발시키니 군자가 북과 도의 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 대소리는 남하니, 남한 것은  합회를 일으키고, 합회는 군중을 모은다.

 

북상하는 풍물굿, 남하하는 풍물굿
  사람들이 풍물굿에 대해 오해하는 게 하나 더 있다.  풍물굿을 전국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점이다.  하지만 풍물굿은 중부지방을 상
한선으로 하여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풍물굿의 역사를 훑어보면, 삼남지방에 생겨나 쌀농사  보급과 함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간다. 20세기 초반까지 나날이 발전한 남도의 풍물굿이 황해도, 강원도를 거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모내기도 남부지방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계속 북상하였다. 모내기의 보급과 더불어 모내기의 모방고  소리도 북상하였고, 모고의 북소리도 올라갔다. 전라도
식의 모방고 소리는 일명 '상사디여'라  부르는데, 충청남도 부여까지 올라가다가 그만 칠갑산을 못 넘고 중간에서 멈추어버렸다.  북한의 민속학자 전장석도 1957년도에 <문화유산>이란 잡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개풍군 광수리 최승록(70세)의 증언에 따르면, 60년 전만 해도 신해방지구에서조차 건파농사를 하였으며, 두레는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홍기문 동지의 증언에 따르면, 북강원도의 농악은 일제  강점 초기에 남조선에서 들어왔다고 하며, 리상춘 동지에  따르면 개성 이북 황해남도에 두레가 파급된  것이 그다지 오래지 않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에는 풍물굿이  제주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논농사 지대가 아니라서 풍물굿이 자생적으로 생겨날 토양이  없었다. 풍물굿은 제주도로 내려가 독특한  걸궁이 되었다. 걸궁은  제주도에서도 성읍을 중심으로  퍼져 있을 뿐 다른 지역에는 없다. 걸궁은 걸립에서 나온 말로 보이며, 걸궁의 구대진사 같은 잡색이나 가락으로 미루어볼 때 호남  걸립굿에서 기원했음이 분명하다. 남도로부터 바다 건너 제주도로의 이 문화적 유입은 20세기 초반에야 이루어진 셈이다.  만물이 운동을 하듯이 풍물굿도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풍물굿 운동은 18-19세기에 남으로 북으로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제의  억압과 제것을 무시하고  내다버리는 풍조 속에서 풍물굿 운동도  잠시 숨을 멈추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1970-80년대 이래로 풍물굿은 다시 자기 운동을 시작했다.  풍물굿은 출생부터가  조선 후기 민의 성장이  만들어낸 '근대성' 그 자체였으니, 오늘날까지 힘차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되살아난 풍물굿은 바로 우리  문화의 주체성 복원과도 같은 것이다. 축제가  죽어버린 억압의 시절을 이기고 대동굿의 한마당을 열어제친 것이니 그 생명의 끈질김에 새삼 놀랄 일이다.  얼마 전, 북경  아시안 게임 때의 일이다.  남북이 풍물굿을 가지고 합굿을 쳤다. 휴전선을 허물어내리는 합굿, 남과 북이  함께하는 합굿, 그 합굿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열망을 담아낸 통일의 대동굿이 아닐 수 없다.  이옥이 <봉성문여>를 쓴  1779년으로부터 2백여 년이 흐른  1999년, 21세기의 풍물굿은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무당과 신내림

  그대, 몸주신을 맞이하라  50년 만의 열대야 현상으로 한창 무더웠던 1994년도 말복 무렵.
  생면부지의 여학생 한 명이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았다면서 연구실을 찾아왔다. 모 미술대학 3학년에 다니는데 몸이 안 좋아 얼마 전에 휴학을 했노란다.  무슨 병인가 싶어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눈에서 확실한 신기가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점쟁이라도 된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신기 들린 사람을 한눈에  척 알아본다. 특별한 비결이랄 게있는가. '서당개 삼 년에 뭐'라고 20여 년  가까이 수많은 무당을 만나러 다닌 덕분이다. '신의  자식들'(그들 자신은 그렇게  부른다)은 눈빛부터  다르다. 인간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럴까.  너무나 말라서  보기에도 안쓰러운 몸매, 쾡하니  풀린 눈망울, 굳게  다문 입, 철 지난 해수욕장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녀를 둘러싼  스산한 기운,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휴학하고 백방으로 병원을 다녀보아도 병명은 알 수가  없었으며 끼니조차 거르면서 하루 종일 잠만 잔지 벌써 여러 달.  "꿈에 무엇이 보였다고?"  "느닷없이 할아버지가 왔다 가요."  "할아버지?"  "수염 허연 할아버지요. 자정만 되면 나타나서 뚫어져라 날 바라보다가 사라져요. 그 눈빛이 무서워요. 깨고 보면 새벽이고요."  "할아버지만 보이니?"  "아뇨, 말 탄  장군님도 있어요. 마부도 데리고 나타나는데  붉은 말을 탔어요. 등에는 화살통을 메구요."  정황은 명백했다.  그 여학생은 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니 병원에 가보아야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내림굿을 권했다. 여학생은 울면서 한사코 무당이 되기는 싫다고 했다. 어머니의  반대는 더욱 완강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무렵에 여학생은 모친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신의 길을 가겠노라고.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체념한 듯이,  흡사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이'내림굿을 받고 '신의  자손'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개인적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달리  보면 신의 선택으로 '영광스러운  길'을 나서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는 그 길. 그래서 나는 늘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무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큰무당에게 여학생을 데리고 갔다. 그이의 첫 마디.  "왜 이제 왔니!"  그렇다. 큰무당은 첫눈에 알아보고 도리어 늦게 왔음을 나무랐다. 그리고 내림굿을 서둘렀다. 날짜는 시월 상달 초닷새. "오곡이 풍성하고, 단풍이 새록새록 물들어 가고 있으니 단풍맞이  굿이 보기에도 좋지 않겠냐"면서 큰무당이 날을 잡았다. 큰무당을 만난 지 불과 10일만에 우이동  숲 속의 굿당에서 내림굿이 벌어졌다.  여학생은 굿이 시작되자마자  신기가 발동하여 날뛰기 시작하였다.  대개의 입신자들은 제 몸에 들어온 신을 이기지 못해  날뛰기 마련이다. 그 여학생도 입에 거품을 품고 나뒹굴더니 돌연 벌떡  일어나 단숨에 날카로운 작두 위로 성큼 올라섰다. 그것도 맨발로.  여학생의 모친은  작둣날을 올린 드럼통  주위에서 울고 있었고,  그 여학생을 따라온 친구 네댓은  넋이 나간 듯 자지러졌다. 도당 할아버지,  임경업 장군, 작두 대신, 군웅 대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실린 이름을 줄줄 외워댔다.  정작 본인은 그 동안  굿구경을 딱 한 번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큰무당의 점괘로 모친이 숨겼던 집안 내력이 나왔다.  외가 쪽 작은할아버지가 박수무당이었는데, 그 조상신이  여학생 몸으로 옮겨온 것이다.  '신까머리(신기)'가 붙은 셈이다.  황해도에서는 이 같은 내림굿을 소슬굿이라고 부른다.  무병 걸린 이가 있으면 허첨굿으로 잡귀를 쫓아내고,  내림굿을 하여 신을 내리게 한 다음에  신이 완전히 솟아오르라고 소슬굿을  한다. 솟구쳐라, 솟구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으리라! 솟구치는 소슬굿으로  무당이 탄생하고, 솟구치지 못하면  그는 죽은 자와 다를 게 없다.  평범한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내리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어느 누구나 갑자기 무당이 될  수 있다. 무당 내력이 있는 집안의  사람은 누구보다 쉽게 신까머리가 붙는다.  스스로 무당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피하려 하지만 운명은 어김없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유난히 고통 받고  삶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특히 여성들)에게  신내림이 많다. 억눌린 자가 거꾸로 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무당이 된다는 것은 마치 박해 받은 예수가 도리어 민중을 해방시켜 주는 것과도 같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어느 날 갑자기 환청이 들리거나 꿈에 조상 따위가 나타나는  일이 계속되거든 반드시  큰무당을 찾아갈 일이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을 어찌 범인인 우리가 만만하게 뿌리칠 수 있으리오! 

 

샤머니즘? 무당이즘?
  반드시 신내림을 해야 무당이 될까. 신이 내린  무당과 신이 내리지 않은 무당이 있으니, 세습무,  강신무라는 무당의 양대 산맥이 그것이다. 그럼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는가.  대개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우리 나라 무당의 역사가 오래 되었으리라는 짐작과  '무당'과 '무속'을 오래 된 옛 말로 착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옛 기록에도 '무' 혹은  '무적'은 자주 등장하고 있으나 정작 무당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무당이 기도하는 장소를  '무당'이라 표기하는 경우는 있어도 무녀를 무당이라고 표기하지는 않았다.  남무와 여무를 통칭하는 무격이란 말 혹은 국무, 사무, 아무 따위는 자주 나오지만 오늘날 흔히 쓰는 '무당'이란 표현은 확인할  길이 없다. 무격이란 말은  기원전 4세기에 만든 중국의 <국어, 초어>에도 분명히 나온다.  옛날에는 사람과  귀신의 일이 어지럽게  혼동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 가운데 정명하고 변함이  없어 언제나 하나같이  공경스럽고 마음이 바르며,  그 지혜는 위아래의 마땅한 도리를 알고 그 통달됨은 멀리까지  밝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명석함은 두루 빛을 비출 수가 있고, 그 총명함이  들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이에게  귀신이 강림하게 되는데  남자에게 임하면 격이라  했고, 여자에게 임하면 무라 하였다.  <청구영언>의 작자미상 노래에도,  "덩덕꿍치는 무당년들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무당'이란  표현은 있었어도 '무당'이라 쓰지는 않았다. '무당'은  없어도 '무당'이란 표현은 더러 있다. 규장각에서 발견된 무당내력이란 그림(조선말로 추정)에는 감응청배, 제석거리,  별성거리, 대거리, 호구거리, 조상거리, 만신말명, 신장거리, 창부거리, 성조거리, 구릉, 뒷전 등의 굿거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무속'이란 말도  원래는 전혀 없던  말이다. 그렇다면 최근세에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럼 왜 이런  표기상의 난맥상이 일어난 것일까.  추정컨대 한글로 '무당'이란 말은 민중의 구어로  옛부터 널리 쓰였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무당의 어원을 퉁구스의  여자 샤먼을 지칭하는 우다간 계통어로 파악한다. 그것이 한자로 무라 표현하다가 당과  결합되어 무당으로 고정된 것으로 본다. 러시아 민족학자 트로찬스키는 1902년에 몽고인, 브리야트인, 야쿠트인, 알타이인, 터키인, 키단인, 키르키스인이 여무를 각각 utagan, udagan, udagham 등으로 부르고, 타타르에서는  udage, 퉁구스에서는 utakan이라고 하듯이  우랄 알타이 민족간에 동일 어근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끝음 '당'이 재미있는 것  같다. 우리가 신라왕을 이두식으로 표기했을 때  거서간, 마립간 등의  '간'이라 부른다. '간'은  몽골어 징기스칸  등의 '칸'과 같은 어근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끝음이 '당'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음이 우다간처럼 '유'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당의 '엠'으로 시작됨을  설명할 길이 없어 불완전한 이론이 되고 만다. 전라도 세습무인 단골을 단군 > 단굴 > 단골이라는 변천을 거쳐왔고,  화랭이는 화랑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어쨌든  아직은 무당의 어원문제가 미완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무당'과 '샤먼' 사이의 친연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의 논의를 아시아 전체로 옮겨보자.  '무당 박사' 김태곤 교수는 1996년 겨울, 타계하기 직전에 쓴 미완의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필자는 한국 안에서는 한국어로 원어인  '무속'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해왔고,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할 경우에 한해서만 '무속'과 가장 가까운 말을 선택한 것이 '샤머니즘'이라는 말이었다.  '무속'을 '샤머니즘'이라 번역하는  경우에도 '무속'을 곧바로 '샤머니즘'이라 번역할 수  있겠느냐는 이견과, '무속'자체가 샤머니즘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의 무속은  아시아 전체의 샤머니즘과 어떤 변별성과 동질성을 갖는가 하는 점이다.  논의를 샤머니즘으로 돌아가  보자. 로퍼는 <샤먼의 어원>(신종원 역)이란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 말을 러시안들로부터 받아들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7세기 후반에 동시베리아를 탐험하고  정복하여, 퉁구스족으로부터 그 용어를  듣고 기록한 러시아인(주로 코자크인)이었다.  그 말이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1692년부터 1695년 사이에 표토르 대제가 중국으로 보낸 러시아 대사와 동행했던 네덜란드인 이데스와 브란트에 의해서였다고 하면서 몇 개의 인용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몇 마일 위쪽으로 가면 많은 퉁구스인이 사는데,  거기서도 역시 샤먼 혹은  마법사라고 불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로퍼는 퉁구스어인 saman, xaman 등과 터키어의 kam,  xam 등은 북아시아의 토양에서 배양된  가깝고도 분리될 수  없는 동료들이다. 또한  샤머니즘 형태의 종교가 위대한 유산으로  살아 있는 증거라고 밝혔다. 샤먼은 본디  17세기 후반 러시아 탐험대가  바이칼 호수와 예니세이 강변에  거주하는 퉁구스족 주술사를 접촉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원래 샤먼이란  북아시아 특히 북중국과 만주, 몽고, 연해주 등지의 주술, 종교 직능자를 일컫는다. 서양으로 퍼지면서 샤머니즘은 전세계적인 용어가 되었다.  만약에 우리의 무당이 처음으로  외국에 소개되었다면 무당이즘이라 불렸을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학계에  제출된 견해를 종합하면,  어원상 우리 무속이  북아시아 전 지역에 넓게 퍼져 있는 샤머니즘의 한 갈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샤먼과 샤먼니즘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적인  해석 과정만 거쳤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무속을 상대로  비교하는 일은 늦게야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시베리아  땅은 옛 소련령으로, 갈 수 없는  동토의 나라였다. 우리는 우리 무속의 기원문제를 풀기 위하여 직접 시베리아로 찾아가야만 했다.

 

에벤키족 샤먼과의 추억
  무덥기만 하던  1993년 여름, 시베리아의  아름다운 레나 강가의  사하 공화국 수도 야쿠츠, 거기서 에벤키족 무당을 만났다. 그네들의 이름은 알렉세이에비치  바실리예프, 셰먼 스티파냐비치 바실리예프. 러시아 말을 전혀 모르는 우리는 전적으로 이들을 이끌고 온 통역자인 방송기자 유드 밀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바로프스키에서  출생한 에벤스키인이다. 고아시아족인 에벤키족은 극소수가 살아 남았을 뿐이다. 할아버지에게서 굿을 배웠는데 그들은 소련말을 전혀 못했으며, 에벤키 말로 굿을 했다. 그때 쓴 민속학 답사노트를 그대로 옮겨본다.  새의 형상을 한  장중한 무복을 꺼내 입음.  그릇에 불을 켰고, 샤먼이 앉아서 북을 치며 노래.  일어나서 북을 치고 춤춘다. 무언가를 던져서  점도 친다. 다른 샤먼도 같이 뛰다가 앉아서 노래한다. 노래는 주고받는 화답식이다. 흡사 우리의 무당노래를 듣는 듯. 샤먼은 옷자락을 잡고서  끊임없이 앞으로 자연스럽게 흔들면서(가끔 땀도 씻고) 노래한다. 둘러앉은 가족들이  화답한다. 다시 일어나서 춤을 춘다. 이때 북을 치던 사람도 같이 일어나서 악기를 쳐준다(이때 같이 구경하던 김태곤 교수가 60-70년 전 소련에서 찍은 기록영화에는 혼자 뛰는 것으로 나오고, 화답도 하지 않는데 조금 변한 것 같다고 말을 거든다).  흡사 인디언 복장 같다. 머리에는 새털을  꽂고, 치마를 입었다. 다시 일어나서 춤을 춘다. 북군도 같이  춤을 춘다. 담배를 피운다. 보드카도 마신다.  트랜스(이입)에 들어가기 위함일까. 샤먼이  춤을 춘다. 뒤에서 2인이 샤먼 무복의  뒤끈을
잡아당긴다. 샤먼에 새가 되는 모양이다. 새가 날아가는 형상이다. 격렬한 춤. 새는 날아간다. 참으로 격렬한 동작.  다시 북을 치는 샤먼.  앉아서 북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쓰다듬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나서 북을 놓고  북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점을 치는 것이다(제주도의 심방들이 굿 도중에 점을 치듯이).  다시 일어나서 칼을 던진다. 칼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우리의 무당들도 칼을 던지며, 그 칼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칼을 두 번  던져서 성공시킨다(우리의 무당들도 칼이 안쪽을 향하면 재차 시도하여 성공시킨다).  북으로 다른 여자를 씻어준다. 점을  치고, 칼을 다시 던지고 나서 콩 같은 검은 것을 꺼내서 집어던진다(이것은 알 수가 없군......).  다시 일어나서 춤추며, 북채를  던져 점을 치고, 지친 듯이 샤먼은 쓰러져버린다. 격렬한 운동,  무거운 무복, 장시간의 제의 끝에 그는  새가 되어 날아가려다 지친 듯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 앉아서 불을 다시 켠다.  추운 시베리아. 불이 소중하기만 하다. 더운 듯, 무복을 벗는다. 굿은 끝났는가?  그날 밤 우리는 국영 스트로이텔  호텔 식당에 앉아 보드카를 앞에 두고 토론을 벌였다.  동학인 중앙대 박경하 교수를  비롯하여 단국대 고부자, 금성환경대 이수자, 숙대 강영경, 서울대 윤승용...... 그리고 시베리아 언어철학연구소의  종족음악학자 안나 라리오노바를  비롯한 시베리아 연구자 몇몇이  동석했다. 시베리
아 사람들은 재미있는 의례를 즉석에서 연출했다.  접시에 보드카를 부었다.  그리  불을 붙였다.  우리가 중국 술인 배갈에 불을
붙이듯이 그들은  보드카에 불을 불을  모신다고 했다. 몹시  추운 북방지대임을 생각한다면, 불을 숭배하는 의식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지하  10센티미터만 파도 만년 얼음이  나오는 툰드라와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타이가가 있는 원시 종족사회의 샤먼과 온대 고밀집 지대의 개명한 민족국가에서 나온 무당의 차이를 논하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샤머니즘이 우리처럼 고도화된 서사문학과 더불어 복잡하고 다양한 제물차림, 춤과  악기연주같은 고난도의 의례에 도달한 경우가 있는가! 북방의 샤머니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여러 면에서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우리의  무속이 한 뿌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샤머니즘이 입무 과정에서  갖는 이니티에이션을 통해 터득한 엑스터시를  자유롭게 반복하는  종교현상이다. 그렇다면 샤먼은  엑스터시의 기술자이며, 엑스터시 속에서 신령과 직접 교섭하여  자연과 초자연의 합일을 찾는 주술적  매개자라 지칭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무당도  예외가 아니란 결론이다.  다만 몇  가지 문제는 남는다. 야쿠티아의  샤먼들은 접신을 하면  오리, 백조, 물고기, 물방개, 커다란  땅벌레, 곰, 늑대 등의 영과  대화하며 접촉한다. 때로는 그들 동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들의 샤머니즘은  시베리아의 숲과 호수, 산과 강에서의 원초적인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모든 신들이--해와 달, 물과  바람의 신조차도--인격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또한 우리의 경우 무당을 표현하는 호칭도 시베리아  샤먼에 비해 유례없이 복잡하고 다양하며 의례도 복잡하게 이를 데 없다.  이는 우리의 무속이 바로 고도의 문명국가에서 성장해왔다는 역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당의 사회적인 기능이 폭넓었으며, 종교 혼합현상이 심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북아시아 전체의 세계적  보편성과 한반도 나름의 문명발달에 따른  민족적 특수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명국가에서 최고도로 정치하게 굿을 발달시켰고, 굿을  용도에 따라 섬세하게 분류하였고, 지역적 풍토에 따라 차별성이 분명한 다양한  굿거리를 만든 게 우리의 무당문화란 점에서 우리 문화의 발달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대도 무당이 될 수 있다 

민속학 수업이나 대중강좌를  진행하다 보면 으레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신내림으로 무당이 된다면, 전라도 같은 지방에서  흔히 존재하는 세습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샤머니즘  이론이 신내리는 강신무에게는 적합한 이론인데,  신내림과 무관하게  대대손손 세습되는 세습무당에게는  적용되기 곤란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호남의 단골이나 영남의 무당은 대대손손 가계혈통으로 이어지는 단골형이다. 단골형은 신내림과는 무관하게 엄연히 가입을 세습으로 이어 나간다. 그렇다면 '북방식 신내림'과 '남방식 세습무'로  구별해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통용되는 갈래나눔은  북부지방의 강신무, 남부지방의 세습무인 단골무 그리고 제주도의 세습무인 심방형,  남도에 나타나지만 세습무는 아닌 명두형 무당의 네 가지이다.  단골무는 글자 그대로  '단골손님'을 갖는 무당이다. 늘  찾아오는 손임을 단골손님이라고 하였으니, 전라도  단골도 늘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무당이다. 단골들은 단골판이라고 하여 1백호,  2백호, 5백호 식으로 나름의 종교적인 관할구역을지니며 대대손손 이어간다.  천주교에서 일정한 교구권을 설정하여  영역을 침입하지 못하게 사제권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신내림과는 애초부터 무관하다.  세습 단골무당들은 어려서부터  굿판에서 자라난다. 그들은 늘  신명이 그득한
장단과 노랫가락, 제물차림과 단골접대를 보면서  자라난다. 더욱이 '천하의 불쌍놈'인 팔천(사노비, 중,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의 여덟 천민) 신분으로서 무업 이외에는  살아 나갈 방도가 없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기에 천직으로 알고서 무업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무업과  가까이서 생활하다가 굿판을 주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신내림 받은 것과 같지 않을까. 그들의 굿거리 형식, 받아들이는 신격, 무당의  사제적 역할, 신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직적 세계관 따위를 놓고 보면 그들  역시 샤먼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북아시아  전체의 무당들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의  무당들은 세습무건 강습무건간에 본질적으로 샤먼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북방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시베리아나 만주처럼 자연적인 상태에서  신내리는 샤먼과 달리 우리는 고도의 문명국가라는 틀 안에서 나름의 자기 분화과정을 거듭한 결과 세습무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경기도 구리시에 가면  2년에 한 번씩 복사꽃  필 무렵 갈매도 도당굿이 열린다. 이 마을에는 도당굿을  주관하는 단골무당인 일명 '복뎅이'네가 있다. 갈매동 단골은 마을민중에서 어느  날 갑자기 도당의 신들이 내려서 무당이  된다. 그런데 도당산신은 어김없이  복뎅이네만 내려서, 복뎅이네는 현재 4대째  무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딸들에게만 신이  내림으로 모계승계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전라도 단골처럼 모계승계가  이루어지면서도 반드시 신내림이라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세습과 신내림의  이중구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강신무와 세습무의 중간지점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주도에서 세습무인  심방이 신점도 치는 강신무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음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통계에 따르면 제주도 심방에는 세습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무속연구에서 지나치게 간과되어  온 존재가 충청도  법사가 아닐까.충청도굿은 여타 지역의  '선굿'과 대비되는 '앉은굿'이다. 법사는 앉아서  천수경, 옥추경 같은 경을  읽어 집안을 평안하게 해주는 세습무다. 오랜  학습을 거쳐야만 법사가 될 수  있다. 또한 장님으로서 생계를 위해 무속에  뛰어든 사람은 판수라고 별도로 구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충청도에도  선무당이 지배적이고 앉은굿은 차차  사라지고 있다. 이 같은 현재까지의 연구를  고려하면 세습무는 남쪽, 강신무는 북쪽이란 식의 획일적인 구분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사실상 '신내림'의 의미부터 엄밀히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백제의 옛 땅, 부여의 은산에 가면  은산 별신제가 열린다. 별신굿에서 압권은 무당들의  굿이 아니라 은산의 제관들이 대를 잡아 신을 받는 과정이다. 꿩의 장목(꽁지깃)을 매단긴 대나무장대에  농기를 매달고 방울을  달았는데, 신이 내리면  방울이 울리게 되어 있다. 부정을 타면 신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제관은 다시 은산천으로 가서 얼굴과 손을 씻어 부정을 가려야만 한다.   신내림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사람도 일단 제관으로 뽑혀서 대를 잡으면 공동체의 신명으로 신내림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신내림이라는  형식 자체가 '무병, 신기'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즉 신내림은 신내림 받은 특수한 신분계층인 무당에게만 가능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신내림이라는 특이한 현상 자체도 여러  형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세습무를 포함하여, 누구나 본질적으로는 '신내림'이라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무병을 앓느냐 그렇지 않느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신이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두 위에서 춤출 수 있다?
  무당과 관련하여 늘  풀리지 않는 또 다른 의문점의 하나가  작두타기다. 시퍼렇게 갈아놓은 작둣날, 무당은 버선을 벗고 맨발로 작둣날 위에 오른다. 설령 신발을 신고 올라선다고 하더라도 작둣날에 잘리지 않을까.  큰무당들에게 물어보지만 "신령님 덕분이다"라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그 답변 가지고야 시원한 설명이 되겠는가.  멍석 깔린  마당에 작두탑을 쌓는다.  장군탑, 장군단,  칠성단이라고도 부르는 작두탑은 무당이  작두를 탈 대를 말한다.  드럼통을 세우고 그 위에  떡을 치는 안반을 놓고 밥상,  물동이, 송판, 양푼 순으로  올린다. 드럼통이 없던 예전에는 절구통을 세웠고,  양푼에 쌀을 넣는  대신에 둥근 모말[대두]을  올렸다. 물동이 안에는 조기를 한 마리  넣어두기도 한다. 작두탑 양옆에는 승전기(혹은 장안기)를 세워서, 나중에 무당이 붙들고 중심을 잡게 한다.  굿에서 작두는 신성한  영물이다. 시퍼렇게 날이 서게 갈아 붉은  치마로 감싸서 부엌의 조왕에 모셔둔다. 조왕은 전통적으로 가정신이 자리잡은 곳이다. 무당은 조왕에게 제를 지낸 다음 작두를  둘러메고 나온다. 이때부터 '작두 어르기'가 시작된다. 치마를 걷고,  시퍼런 작둣날을 허벅지에 가져간다. 푸른  핏줄이 팽팽히 돋아난 살갗에  작두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들이밀어도 살은  베이지 않는다. 팔은 물론이고 뺨과 혓바닥에도 날을 대본다.  두 개의 작둣날을 작두탑 위에 올려놓고  천으로 움직이지 않게끔 고정시킨다. 운이 나빠서 액땜을 하고 싶은 이들이 작둣날을 붙잡고 있으면 액이 사라진다고 하니, 누구에게나 작두의 영험은 강하게 작용하는 셈이다. 굿이 무르익어 장단이 거칠어져갈 무렵, 무당은 신명이  올라 춤을 추다가 순식간에 작두로 오른다. 작
두 위에서 삼현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둘러싼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공수를 내린다. 무당이 인간이 아닌 신의 매개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때의 무당은 장군신으로 변신했으니  인간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두타기에서  가장 높게 드러나고 기세등등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열두 굿거리의 클라이맥스라고나 할까.  실험을 해 보았다. 작둣날로 신문지를 베어보니  면도칼 이상으로 썩썩 베어진다. 놀라운 일이다.  오히려 날을 날카롭게 세워야  발을 베지 않는다? 무당들은 작두를 타는 순간에 발바닥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오히려 작둣날이 제대로 서지 않아 고르지 못하면 발을 벨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잡힌다.
  사람의 몸이 내리쏟는 무게중심은 발바닥으로 몰린다.  두 개의 작둣날과 발바닥은 일직선을 중심으로 만난다. 이때 작둣날은  반듯하고 날카롭게 그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날 위에 선 사람의 무게를 분산시킬 수 있다.  다음으로 몸이 최대한 가벼워져야 한다. 작둣날이 살을  벨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야 한다.  신명(神明)이 실리면 무당은 몸이  가벼워진다. 춤꾼이 신명나게 춤을추면 몸이 가벼워져 날 듯이 춤판을 누비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신명이 중요하다. 하지만 몸무게가 내리누르는 중력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중력을  일직선의 칼날이 받을  정도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작두를 타기 전에 '작두 어르기'를 통하여  무당은 다리와 팔, 뺨과 혓바닥에까지 작두를 들이민다.  이때 살은 팽팽하게 긴장하여  칼날을 물리친다. 신명이 실린 무당이 작두에 올랐을 때,  팽팽한 긴장이 발바닥과 칼날을 물리친다. 양자의 균형은 아주 팽팽하여, 만약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실패로 돌아간다.  어느 무당들이나 작두타기를 앞두면 긴장하게 마련이고 굿판의 주위 사람들도 모두 긴장감에 빠져든다. 굿판의 공동체적 긴장감이 작두탑에 쏠릴 때, 명실공히 굿판의 주역이 된 무당은 신명의 신바람에 팽팽한 긴장감을 실어 작두로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불충분하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유리겔라가 어떻게 눈빛만으로  숟가락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며, 차력사의  배 위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가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기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당의 신명은 신기라고도 하거니와, 신기는 기의 신명적 표출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기는 과학적으로 해명이 가능할까. 내 생각에는 이렇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받아들인 과학적  명제들은 데카르트와 뉴턴  이래의 근대 자연과학의 분석적, 기계적 환원주의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들 과학적 사실은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생체 에너지의 문제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하다. 기는 서구에서 말하는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작둣날에 가해지는 인체의  힘으로 당연히 발을 베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작두타기에서 무당의 발은 전혀 탈이 나지 않는다.  결국 기의 규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간의 의식과 생명과  물질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총체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날 신과학운동이 말하는  인간의 초능력과 생체 에너지에 대한 규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작두타기는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에만 있는  접신 현상이다. 따라서 '작두타기'라는 특수한 무당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농경문화와 굿거리의 발전과정에서 나온  신과 기의 결합현상이라고 본다. 작두는 원래 소 같은 가축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이런 작두가 무당의 굿거리 마당에 쓰이면서 무당의 권위를 높이는 도구로 변용된 셈이다. 섬뜩한 작둣날  위에서 춤을 춘다고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할 것이고 그에 따라 무당의 권위도 올라갈 게 아닌가.

 

무당신으로 모셔진 예수님
  무당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건 미신이 아닌가요" 하는 질문도 꼭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듯 단정적으로 묻는 그들에게 앞에서  설명한 시베리아 샤머니즘이 어떻고, 시로코고로프의  명저 <퉁구스의 기원>을  읽어 보라든지, 신내림은 비단 북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진 현상으로, 조금만 공부해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따위의 설명은 해줄 겨를도 없다.  '굿은 미신'이라는 질문에는 보다 세밀하게   '굿 - 무당 - 샤머니즘 - 미신 - 미신타파'라는 일련의 연상이 내포되어 있다. 즉 '굿  - 미신타파'로 귀결된다. 굿은 부정적 양상이 많았고 역사진보에 역기능을 초래한 면이 많았기 때문에 철저히 박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무당은 늘 미신을  퍼뜨리는 주범으로 조준사격을 받아왔다.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년)는 장시 노무편에서 기꺼이 '무당 저격병'의 선두로 나섰다.  내가 사는 가까운 동린에 노무가 있어 날마다 사녀가 모이고 음가괴설이 귀에 들려와 심히  언짢았다. 국가가 칙을  내려 무당들을 멀리  이사시키고 개경에는 오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비단 동쪽의 음탕함이 씻은 듯  적연해짐을 기뻐함만 아니라, 다시는  서울 안에 다시 음사가  없이 세상 백성이 질박  순후하여 장차 태고의 풍이 복구될 것을 축하하여 시를 짓는 것이다.  ......
  나라에 무풍이 사라지지 않아 여자는 무당, 남자는 박수가 되네. 자칭 몸에 신이 내렸다고 하지만 내가 들을 땐 우습고 서글플 뿐이네.  굴 속에 든 천 년 묵은 쥐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숲 속의 꼬리가 아홉 되는 여우일레.
  여기서 '태고의 풍'은 '공자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후대로 내려와서 민중 신앙에 대한 지배집단의 비판적 입장을 가장 강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로, 제주도의 신당을 파괴하여 변방지역  제주에 유교적 봉건체제를 확립하려 하였던 조선 시대  이형상 제주목사가 있었다. 숙종 28년(1702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삼읍(제주, 정의, 대정)의 음사와 불사 130여 개소를 파괴하고, 무격 4백여 명을 귀농시켰다고 한다. 무당은 예나 지금이나  정당한 평가에서 제외되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팔천의
무리로 하대 받았고, 음사를  일삼는다고 공격 받았다. 장희빈이 왕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해 화상을 그려놓고 화살을 쏘는 식의 흑주술도 무당의 부정적 측면을 더욱 부각시키게 만든  요인이었다. 근대로 들어와서는 기독교  신앙의 대척점인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늘 음지에서만 존재하였다.  고대사회에서도 미신으로  공격 받았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청동기 출토품에 팔주령 같은 방울 모양의 제의 도구가 보이거니와 제정일치 시대의 흔적을 알려준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적자인  남해차차웅에 대해 김대문이 이르길, "방언으로 무당이라  불렀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다"고 <삼국사기>에 기술하고 있다. 중세사회로 접어들면서 무당의 지위는 하락한다.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선교사 헐버트는 1903년 <코리아  리뷰>라는 영문판 잡지에, 무당의 무란 '속이기 위함'이고, 당이란  '무리'를 뜻한다고 썼다. 무당이 과연 속이는  사람일까. 종교적  편견이나 잘못된 개화주의,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이 오늘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무당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많은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당과 기독교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서양인 선교사가  평안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당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무당을 만나자마자 성경을  꺼내들고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가를 잔뜩 설교하였다. 그러자 무당 왈,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오늘부터 당장 신단에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날로  예수님 사진을 받아서 굿당에  걸었음은 물론이고 아침 저녁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예수굿을 해준 셈이다. 그 무당에게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관우장군, 백마장군,  칠성신장, 도당할아버지 모두가 만신의 대열이었을 뿐이다. 우리의  전통적 신관은 다신교적인 만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당을 만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1996년 여름, 세계적인 신학자  하비 콕스가 모처럼 우리나라에 왔다. 나 역시 <세속도시>, <바보제> 같이 널리 알려진 그의 책을 두어 권 읽은 터라 그의 방한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신문을 들추어보니, 그는 "한국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에 샤머니즘이 깔려 있다"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샤머니즘적이란 주장은 처음 나온 것이 아니지만 교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접수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신도들이 트랜스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믿는 방언,  신도들의 영혼이 천상계로 올라간다고 믿는 입신따위가 북아시아 샤마니즘의 트랜스 형식과 흡사하다.  평양의 무당이  예루살렘의 예수님을 '만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나, 한국 기독교에서 샤머니즘의 기복족 요소를  도입한 것이나 그 맥락은 같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이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법하지만, 그 반론에 대한 답을 미리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중국인인 송천성의 신학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국 사람의  '한'을 모르고 어찌 한국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송천성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중국과 아시아에 있어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신은 대체로 우상과 잡귀를 몰아내는 푸닥거리의  신이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사람들에게서 그  잡귀 잡신을 몰아내주려고 중국에 온 것이다. 중국 초대  교인들은 새 신앙의 힘으로 악귀만이 아니라 중국문화까지  몰아내는, 말하자면 푸닥거리의 사역을  위해 임직된 셈이었다...... 아시아에서 그  토착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포증은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와 토착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유럽에서는 그렇지 아니했다. 그 한 예로 크리스마스 축제행사를  보라. 그것은 시리아, 로마의 태양신 숭배제의에서 유래한 그리스도 탄생축제가 아닌가.  위 중국의 경우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기독교는 민족문화를 몰아내는 푸닥거리 역할을 충분히  해낸 셈이 아닐까. 무당
이 단순한 미신으로 내몰리게  되기까지 근 백년의 역사는 바로 이 '푸닥거리'의 역사였던 탓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  자신이 '예루살렘의 큰무당'이었다고 나는 늘 믿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문제는 무당 자신에게도 있다.  진정한 무당이 되려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강신무이거나 세습무이거나, 무업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큰무당을 만나서 굿을 배워야 한다.  무가를 외우고, 제물차림을 배우고,  굿거리마다 옷을 차려 입을 줄 알고,  춤을 배우고 온갖 의례를 격식에  맞게 배우고, 단골을 조직  관리하는 방법을 알고......  적게는 몇 년, 많게는 평생 배워도 부족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배움을 제대로 한 무당다운 무당이 얼마나 있을까.  일제 시대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큰무당 이야기가 황해도 무당들 사이에서 전설같이 전해온다. 그이는  큰 굿이 끝나면 항상 수많은 제물을  배고픈 이웃들에게 돌렸고 늘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 뒷자금도 대었다. 굿은 곧 '나눔의 잔치'임을 몸으로 실천한 이다.  전라도 단골을  생각해 보자. 단골들은  평소에는 호미를 쥐고  논밭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집안에 궂은 일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호미를 집어던지고 땀 흘린 베적삼을 입은 채  굿을 행하였다. 그들은 굿판에서 직접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두 번 쌀과 보리로 '연봉'  비슷한 것을 받았을 뿐이다. 그들 자신이 민중임과 동시에 종교적인 사제였다. 시베리아  샤먼들도 결코 제의를 행하고 돈을 받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의 굿을 더욱 중시하였다는 보고서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무당을 보고서 이  같은 민중의 무당을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으리오!  강증산도 자신을  '큰무당'이라고 했다. 강증산은 "후천개벽을  하는 데 무당을 따라가야 한다", "광대와  무당이 바로 큰 개벽장이다"라고 하였다.  김지하 시인의 해석으로는, 이때의 무당은 '만신'을  뜻하는 무당이자 동시에 '없을 무'자, '무리 당'자 무당, 즉  어떤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은 '무당파'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김 시인은 그의 이야기 모음집 <밥>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이른바 천지공사,  즉 후천개벽을 실질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집행하는 그의 천지공사는 모두  이와 같이 우리 나라  농민들의 농업노동의 가락과 장단 및 전통적인 굿의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스스로 천지 생명을 낳고  키우고 살피는 '한울님'일 뿐만 아니라,  '무당'이요 '천지농사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제까지 이야기해  온 후천개벽과 '몸에 대한 틈'의 선포로서의 큰굿, 대동굿, 일과 춤, 두레와 대동놀이, 노동과 문화 사이의 통일적인 상관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증산 자신이 실제로  후천개벽 공사를, 그의 천지공사를 바로 '천하굿'이라고 불렀고 바로 '무당공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쯤 되면, 강증산같이 근세의 풍운아가 생각하던  무당과 굿의 개념은 상당히 폭넓었음을 알수  있다. 오늘날 큰무당은 사라지고 선무당만 설치는  격은 아닐까. 그들에게만 이 모든  책임을 물을 수야 없지만, 오늘의 무당들에게는 타산지석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무당의 긍, 부정을  떠나서 오늘날도 여전히 무당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무당들의 조직인 경신회에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신의 자식'들이 무려 10여만 명에 육박한단다. 더구나 요즈음은 저학력자에서 고학력자로 옮겨가는 추세이며, 대학을 나온 무당도 만만치 않은 숫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 양산되는 무당들을 사회적  문제로 진지하게 대처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무당들의 복지', '무당들의 사회교육' 따위를  주장한다면 제도종교만을 주무르는 종교문화 정책입안자들 중에서 웃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일찍이 유럽이나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근 2백여 년이나  연구해온 샤머니즘의 내용에 수준 높은  우리의 무속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또 이능화의 <조선무속고>(1927년)가 출간된 이래로  이미 7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후의 성과는 미미하기만 하다.  얼마 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출간한  <대륙을 넘어서>란 책을 보니, 몽골리언들의 베링  해협을 건너서 북미로 이동해 간 파란만장한  역사와 그들의 샤머니즘이 너무나 쉽고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귀중한 자료를 쌓아두고도 왜  이런 성과물조차 없는 것인가. 우리 무당의  온전한 연구
는 전 세계적  차원의 샤머니즘 연구, 종교현상연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종족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쌍욕과 쑥떡, 성에 빗댄 야유

  모든 것은 배와 넓적다리에서 나온다.  '욕쟁이 할머니집'이란 유명세 붙은 집이 전국에  널려 있다. 왜 사람들은 욕을 얻어먹어 가면서까지 제  돈 내고 음식을 사먹는가. 욕설에 어떤  매력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자주 욕쟁이할매 해장국집을 찾는다.
  할매의 접대방식은 손님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반말과  욕이다. 깍두기 한 보시기 더  달라고 해도 잔소리, 술 한 병 더 주문하면  아예 그만 가라는 구박이다. 자기 돈 내놓고  먹는데도 잔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연일 사람들로 바글바글 끓고 인근에 널리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만약 할매의 욕이 없다면 그 집의 매력이 여전할까. 욕에는 나쁜 욕도 있지만 사랑스런 욕도  있다. 동창생을 만나 "야, 짜슥아!"하는 정도는 그야말로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남성들이 가장 가깝게  여기는 친구를 '불알친구'라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욕은 사랑반  미움반이다. '욕먹을 짓'을 해서만 욕을 먹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욕을 하기도 한다. 전혀 모르거나 미워하는 사람 사이에는 욕을 함부로  하기 어렵다. "욕에는 맛있는 욕이 있다"고 하였으며, "욕에  정든다"고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욕을 이렇게 정의 내렸다.  욕이란 부끄럼이고 굴욕이다. 우리 나라의 풍속은 추악한 말로써 꾸짖는 것을 이름하여 욕이라 한다.  욕설의 꽃은 역시 쌍욕이  아닐까. 욕은 성을 기호화하여 발전해 왔으며, 성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욕설이 쌍욕의 주종을  이룬다. 그래서 "쌍년, 쌍놈, 쌍소리한다"는 쌍시옷 계열이  주종을 이룬다. 대개 활자문화에서  ***식으로 가려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문명'의 세계를 떠나간 그들  육두문자야말로 욕의 진수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 속담에는 "씹과 좆 빼고 나면 욕할 말 있나"하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왜 그럴까.  에드워드 카펜터가 말했듯이, "섹스가  가장 먼저이며, 손, 눈,  입, 두뇌가 뒤따른다. 배와 넓적다리 한가운데로부터 자아에 대한 지식, 종교 그리고 불명성이 발산되어 나온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할까. 조선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엄숙한 사회였던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쌍욕은 더욱 번성하여 가히 '쌍욕의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했다. 나는 잠시 그들  쌍욕의 세계로 떠나고자 한다.

 

 전통 시대 '좆과 씹'의 담론
  욕설의 백미로  역시 성기 자체를  극대화하는 데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의 쌍욕은 남근, 여근을 구분하여 욕설화하기도 하고, 통합 상태로 직접적 성관계를 묘사하기도 한다. 전통 시대 욕설의 담론에서 가장 많이 쓰인 용례는 역시 '좆과 씹'이 아닐까. 이를 남근과 여근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한자어 남근은  이른바 불알, 좆, 고추,  자지, 음경 등으로 부른다.  그 중에서 '좆과 불알'만큼 많이 쓰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남성 생식기는 태고 이래로 남근숭배의 대상이었다.  어떤 남성이나 지니고 있는 최소한 기본을 이야기할  때, "가진 것이 불알 두 쪽밖에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을 상실하면 "불알 두 쪽 가릴  힘도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남성답지 못함을 공격할 때, "불알 달린 값을 해라", "불알만 찼다고 다 남자냐", "차라리 불알을 떼버려라"하는 욕설을 가한다.  남근을 강조하고,  어쩌면 가부장적 권위를  '불알'에 위탁한  남성들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많은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남성들은 오로지 '불알 두  쪽에 땀나도록' 뛰어야 하고 '좆대가리에서 땀까지 날' 정도로 일을 해야 한다. 남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불알 긁어준다"는 비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 사는 게 "좆나게 힘들다"는 푸념을 잊지 않는다.  남성들이 도망칠  때는, "불알 두 쪽  덜렁거리며 뛴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불알아 앞섰거라"하고 내뛴다.  상대편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때도,  "불알 잡고 늘어져야"일이 성사된다.  남근의 '위대한 힘'을 지나치게 믿는 잘못된 관념은 곳곳에서 남근을 칭송하는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가을 좆은  쇠판도 뚫는다"고 정력의 위대함을 강조하기도 하고,  "꼿꼿하기는 서서 씹하겠다"고 힘을  자랑하기도 한다. 자신의  물건이 "난쟁이 좆만하다"고  자조하면서도, "작은 고추가 맵다"는  대응책도 잊지 않는다. "남자가 머리가 좋은 건  대가리가 둘인 탓이다"는 자부심을 지니면서도 "새벽 좆 안 서는 놈은  외상도 주지 말라"는 말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역시 '좆도 좆 나름'인 셈이다.  '좆심'이 좋아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좆빠지게' 일하지만 "좆으로 뭉개도 그보다는 낫겠다"는 비난마저 감수해야 한다. "만만한 게 홍어 좆이다"는 자조 섞인 표현도 자주 나온다. 그리하여  다양하고 푸짐한 욕의 성찬이 '불알'보다는 '좆'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좆'은  남성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좆 같은새끼', '좆 같은 년'에서 보듯 남녀 공용이다. 그러나 남성용으로 많이 쓰인다.  좆 꼴리는 대로 해라,  좆 까고 있네, 좆도 모르고 탱자탱자하네, 좆만한 새끼, 좆 먹어라, 좆으로 까라면 까야지, 좆 짜고 있네, 좆퉁수 불고 있네, 좆나게 팬다, 좆나게 맞는다, 좆도 모르면서, 좆되부렀구먼!......  여근 쪽 사정은  또 어떤가. 여근은 통칭 씹,  보지, 음부 등으로 부른다. 가장 많이 쓰는 '씹'은 종자를 뜻하는 씨와 입의 합성어다.  남성 위주의 중세사회에서 여성을 칭송하는 표현은  드물다. 여성을 남성의 성적 대상물로서 간주하고  비하하거나 공격하는 식으로 편향적이다.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하고, 안방 차지나 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여자와 항아리는 내돌리면 깨지기' 때문에  나돌아다녀서는 아니 되며, '여자가 말이 많은  건 입이 둘인 탓'으로 돌린다. '여자 셋만 모이면' 어쩌구 하는 식의 여성 비하 시리즈는 욕설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여성의 몸은 늘 탐색의 대상이었다. 남성의  몸이 욕설에 등장하는 확률보다는 여성의 몸이 훨씬 잦다. "계집 못난 건  엉덩이만 크다", "계집이 젖통만 크다"는 식으로 신체부위별로 비난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글래머' 급에 속하는 여성들이 과거에는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되었음직하다.  여기에도 남성들의 이중적 잣대는 늘 있다.  "여자 입이 크면 씹이 크다"는 표현으로 은근히 큰 여성기를 기대하는가 하면, "씹은 작을수록 좋다"는 식으로 은근히 작은 여성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여자와 돗자리는 새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여자는 닳을수록 좋다"는 표현에서  경험 있는 여자를 선호하기도 한다. "니
글니글할 정도로 요분질 친다", "요분질을  쳐서 사내 피를 다 말린다"고 하면서도 "요분질 못하는 년은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여성기 표현의 백미는 역시'씹'이다. "씹  이야기 하면 부처님도 돌아앉아 웃는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남성들의 주관심사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성적 만족도를 예측하거나 여성을 오로지 성적 동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사내 싫어하는 계집 없다"는 관용어 말고도 "성에  굶주렸다"는 뜻으로 "씹구멍에 곰팡이 슬겠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섹스를 많이 즐긴 경우에는 "씹구멍에  불나겠다", "씹두덩에 가래톳 섰다" '사내 받치는 년' 하면서,  "씹에는 염치가 없다", "계집은 씹 잘하면 좋은 일 없어도 사흘 웃는다"는  식으로 비하하기도 한다. "씹 마르고 눈물 마르면 계집은 볼장 다본 셈이다"는 식으로 여성기를 강조하며, "좆도 좆 나름이다"는 남성기에 대응하여 "씹도 씹 나름이다"는 표현이 쓰인다.  욕설은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접어든다. "씹창날 줄  알아라" "가랭이를 찢어 죽일 년" "네 년 씹에는 금테 둘렀냐"는 식으로 쌍욕의 극치를 이룬다.  또한 여성기를 빗댄  욕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부에 대한 공격이다.  누군들 과부가 되고 싶어 되었겠는가. 과붓집 가지밭에는 다 큰 가지가 없다, 과부 씹두덩은 과부가 씻는다, 과부는  개를 키워도 수캐만 키운다, 과부 서방질은 삼이웃이 먼저 안다, 과부 아이  낳고 진자리 없애듯, 과부 아이 밴 듯,  과붓집 머슴 행세하듯...... 오죽하면 갑오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조에 과부개가 조항이 혁명 슬로건으로 제시되었겠는가.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 욕설
  아주 오랜 옛날,  오누이가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뒤를 묵묵히 따라가던  오라비는 깜짝 놀랐다. 누이동생의 흰옷이 비에  젖자 뽀얀 젖무덤이 드러난 것이다.  오라비는 갑자기 성욕이 솟구쳤다. 그러나 누이동생과 할 수는 없는 일. 오라비는 결국 자신의  성기를 돌로 짓이겨서 성욕을 억제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누이동생은 울면서 이야기하길, "그렇게 죽을 바엔 한번 달라고나 해 보지"라고 하였단다. 그 뒤로 사람들은 오누이를 기려서 그 고개를 '달래나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명 '달래나고개' 전설에는 근친상간을 할 수  없는 금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우리 문화의 욕의 근저에는 바로 그러한 근친상간이 가장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니 에미 씹새끼, 니  에미 좆이나 빨아, 니 에미하고 붙을 놈,  니 에미하고 씹
할 새끼, 제미 붙을 놈, 제미 밑구멍에 좆 박을 놈 따위의 쌍욕은 어머니와 아들간의 근친상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네 애비하고 붙을 년"식의 아버지와 딸간의 근친상간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오누이끼리의  근친상간도 욕설에서는 귀하다. 왜 근친상간이 욕설에서 주역으로 등장할까.  평상시에 근친상간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것을 입 밖으로라도  내놓는 것 자체가 일종의 죄악이다. 그러나  욕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사태는 달라진다. 인간의 심충에 가려져 있던 근친상간의 금기가 장막을 과감히 벗고 모습을 드러낸다.  근친상간의 욕설은 하나의 저주, 신화적 모티브를  지니는 신탁의 소리가 아닐까.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에 나오는  신탁과 같이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은  우리의 욕설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나  우리 신화로 되돌아오면 '달래나고개' 전설같이 오누이 근친상간형이 주종이다.  예전에 큰 물이  져서 모든 동식물이 절멸당하였다. 높은 산으로  올라간 사람 중에서 마지막으로 오누이만이 남았다. 그러나 오누이가  상관을 할 수 없으므로 신에게 뜻을 물었다. 맷돌을  밑으로 굴려서 짝을 이루면 신의 뜻인  줄 알고 결혼하라고 했다. 실제로 맷돌을  굴린 결과 짝을 이루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들은 그 오누이가 맷돌을 굴려서 낳은 후손들이다.  이 홍수신화의 모티브에는 오누이 근친상간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매개
물은 맷돌이다. 암맷돌과 숫맷돌로 짝을 이루는 맷돌의  암수 구별은 늘 성적 매개물이 되어 왔다. 그래서 욕설에서도  맷돌이 빠질 수 없다. "맷돌 씹하냐", "성미 급한 년이  맷돌거리한다", "맷돌 씹에 좆 빠지듯"과  같이 되는 일이 없다는 식으로 맷돌이 쓰인다. 맷돌치기, 맷돌거리로 불리는 체위를 빗대어 욕이 이루어진다.  나는 혹시나 '좆과 씹', 혹은 근친상간  따위의 소제목 자체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영국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가 세세하게 밝혀준 빌헬름 라이히에 관한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라이히는 편집증적 공격성을 보여주었지만 일생 동안 추구했던 급진적 사회개혁사상을 잘  드러내준 '들어라 소인배야'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정신분석학적 성 급진주의자로서 현대 사회의 성이  불행을 초래한 실마리가 생식기의 성--그것의 좌절 혹은 개발--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공격한 소인배란 '불쌍하고 옹졸한, 역겹고 무능력한, 완고하고  활력이 없으며 속이 텅 빈' 그런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지 못하게 막으려고 안달하면서 자기 자신은 노예가 되는 인간이다. 라이히는 소인배의 신경증이 성적  에너지를 억제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불쌍한 소인배들'이  짐짓 숨기고 있는 것을 이렇게 외쳤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당신이 영원한 성적 결핍의 상태를 맴돌고  있고, 모든 여성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사람에 대해서 친구와 더러운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어느 날 밤, 나는 당신이  친구와 함께 거리에서 이렇게 합창을 하고  다니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여자를 원한다, 우리는 여자를 원한다!"  그러나 라이히 자신은  그의 적들이 비난한 것과는 달리, 무절제한  성적 방종을 전파한 것은  아니었다. 갈릴레오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가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는 사실은 보내는 조소였다.  '좆과 씹'이란  표현만 나오면 무조건적인  반사작용으로 엄숙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혹시나 라이히가 말한 소인배가 아닐까...

 

남녀상열지사 그 자체가 욕이 된다
  사람들의 침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침실에서도 분명  남녀간에 욕설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욕설은 상대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동물적인 성적 표현일 뿐이다. 상황이  바뀌어 이들 성적 표현을 뒤집으면 그대로  욕설이 되고 만다. 성애의 욕설과 비난의 욕설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뿌리를 지니는 표리관계를 이룬다.  정상적인 성관계도 욕설에서 중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사추리 사추리 삿뽀뽀"란 비어는 삿(샅)끼리  이루어지는 섹스를 뜻한다. 씨팔년, 씨팔놈,  씨팔새끼, 씨팔년놈 등은 가장 흔한 욕설이다.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일은 인간이 으레 하는 일인데도 '씹하기'가 하나의  터부가 된다. 그래서 '씹하기'는 늘  공격 대상이 된다.  쌍욕은 일반론적 단계를  벗어나서 성관계의 구체적 단계까지  나아간다. 가죽방아를 찧느냐, 디딜방아에 겉보리 찧느냐, 웬 낭자한 감창소리?, 공씹하기냐, 얼마나 급하면 벽치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먼저 올라탈  년이다...... 모두 구체적 성행위를 염두에 둔 말이다.  역시 구체적인 성관계는 "좆이나 빨아라"는  대목에서 압권을 이룬다. 오럴 섹스에 관한 표현은 비단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욕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니 에미 좆이나 빨아라"는 식으로 근친상간에서의 오럴  섹스 단계까지 나가면 욕설을 극에 달한다.  수음 행위도 빠질 수 없다. "용두질 안 치는  사내 있더냐", "손가락 안 집어넣는 계집 있냐"고 하여 마스터베이션이  강조된다. '좆 주무르듯이' 늘 주물럭거리는 모습이 비판의 대상에 오르기도 한다.  성관계에는 변태적인 성도 빠질 수  없다. "비역질이나 해처먹어라"는 욕은 호모를 뜻한다. "아무리  궁하다고 밴대질하겠냐"는 것은 레즈비언을 뜻한다.  호모와 레즈비언도 금기의 대상이지만 막상 욕설에서는 튀어나오고 만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동물과의 변태적 성관계, 혹은  막연하게 동물에 빗댄 욕설도 등장한다. 개년, 개보지  같은 년, 개잡년, 개잡놈, 개좆 같은 인생, 개좆  같은 새끼, 개자지, 개씹에  보리알, 개씹 같은 년, 개씹으로  낳아도 너보다야 낫겠다, 암내 맡은 수캐 싸대듯 따위로 단연 개가 수위를 차지한다.  개는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다. 또한  암캐와 수캐가 하는 관계도 늘상  보는 모습이다. 그러한 친근성으로 개는 욕설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혜원 신윤복은 풍속화첩에 개가 관계 맺는  모습을 구경하는 여인 둘을 그려놓았을 정도다.  또 말씹, 말자지, 말보지  식으로 숫말에게 달린 성기의 위력이 강조되거나 물개좆 식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동물에 빗대는  욕설은 수간이라는 변태적 성풍속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금기되었을 수간이 욕설로  둔갑하여 백주대낮에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엿을 먹이는 이유
  우리는 욕설을 한다. 그런데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엿먹어라"면서 '쑥떡질'을 한다. "좆 먹어라"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도 '엿'이 궁금하다.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먹을 것 중에서 '엿'을 먹으라고 할까. 엿은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이었던 남사당패에서  여자의 '음부'를 가리킬 때 쓰던 은어였음이 밝혀졌다. 대개의  천민집단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기호를  지녔듯이 남사당패도 다양한 은어를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는 사람 몸에 빗댄 은어도 많다.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수집한 목록을 보니 다음  같은 은어가 눈에 뜨인다. 애초에는 쑥떡질이라는 인간행동이 먼저 생겨났고,  조선 후기에 '엿'이라는 욕설이 뒤따랐음직하다.  머리-글빡.구리대, 눈-저울, 코-홍대, 입-서삼집,  이빨-서삼틀, 배-서삼통, 젖-육통, 손-육갑, 발-디딤, 남자 성기-작숭이, 여자 성기-엿.뽁  얼마 전의 일이다. 내가 탄 차가 포항  시내에서 칠포 쪽으로 올라가다가 다른 승용차와 작은 접촉으로  인하여 시비가 붙었다. 10여 분 사소한  언쟁이 오고간 뒤에 대충 평화와 타협이 이루어졌다. 차가  움직이자마자 상대편 승용차 뒷자석에 탄 청년들 셋이 우리 일행을 향해  일제히 '쑥떡'을 먹이는 것이 아닌가. 기어히 쑥떡을 먹이고서 사라지는 차를  다시 불러세우고 시비를 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뿔싸! 우리는 기어코 그 쑥떡을 먹고 말았다.  우리 세대는 모두  쑥떡을 먹고 자랐다. 비오는 날 학교  등교길에는 승용차가 흙탕물을 튀기면서 달려갈 때,  말로만 하는 항의는 필요 없었다. 전달되지 않을게 뻔했기  때문에 일제히 쑥떡을 먹였다.  물론 집에 들어오면 그런  못된 짓은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았다.  1960년대 후반쯤, 서울  변두리의 아이들도 쑥떡에 관한 한 대단히  다양한 손짓과 표정을 개발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인근의 미군부대 병사들이 GMC를 타고 갈 때 껌이나 초콜릿을 주지 않으면 일제히 쑥떡을 먹였다. 나중에는  미군들도 되받아서 우리를 향하여 쑥떡을 돌려주었다. 입으로 연신 무어라고  영어로 떠들어댔는데 틀림없이 쌍욕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휴전이 끝난 뒤에 태어난 세대들은 그렇게 쑥떡을 늘 먹고 먹이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그런데 홰 하필이면  욕먹이는 데 떡이 쓰였을까. 떡은 성적  행위의 노골적인 암시다. '떡친다', '떡치듯 한다', '찰떡꿍  궁합' 따위의 말 뜻은 남녀의 성적 결합을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따라서 떡 중에서도 강력한  양기가 듬뿍 든 쑥떡을 먹이는 행위는  성적 공격심을 드러낸다. 행위의  명칭은 쑥떡이고, 먹이는 행위는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는 '엿'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쑥떡을 무조건 '교양없는 짓'으로만 평가절하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양'을  빙자한 '길들이기'에 익숙해져 있으나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본능적으로 쑥떡을 먹인다. 아무래도  점잖은 사람들은 쑥떡을 비천하게  생각할 뿐더러 에티켓에서 벗어나는  저속한 짓으로 비하하기 때문에 쑥떡 따위는 금기시한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얼마든지 쑥떡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드러난 손짓과 드러나지 않는  마음 사이의 괴리현상이 보인다. 나는 오히려  21세기의 문턱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쑥떡문화'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쑥떡 혹은 드러내놓고 싶은 성
  쑥떡은 단순하게 "엿 먹어라"고 욕설을 하기 위한 동작만은 아니다. 쑥떡은 전통 시대 섹슈얼리티의 도발적 표현이 아닐까. 쑥떡의 동작은 이렇다.  주먹을 쥐고 다른 손바닥 위로 불끈 내밀면서  한 손은 손목에 가져간다. 아니면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상대 손가락들을 잡아서 튕기듯이 들이민다. 상대방이 멀리 떨어져 있어 잘 보이게  동작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팔뚝에 다른 손바닥으로  받치고서 팔뚝을 흔든다. 팔뚝은  남성기의 끄떡거림을 암시한다. 보다 과격한 행동도 나온다. 아예 한쪽 발을 기역자로 꺾은 채로 들면서 두 손으로 무릎을  훑고 난 다음에 손을 뒤로 뺀다. 이 같은  동작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여러  번 반복할 뿐더러 차츰 가속도를 붙여서  상대방에게 무언의 적의를 전달한다.  자그맣게 하는 쑥떡  있다.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서  엄지가 앞으로 삐쭉 손톱만 나오게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두 손가락 틈새에 엄지가 들어감으로써 삽입된 남근을  상징한다. 사람에 따라서 하는 동작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즐겨 쓰는 쑥떡은 그렇다.  이런 쑥떡은 우리 나라에만 있을까.  영국의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데스먼드 모리스의 솔직하면서도  흥미로운 <인간동물원>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우리의 쑥떡과의 관련성을 생각하였다.  네 발로 기어다니다가 두 발로  서게 된 인류는 무엇보다 손이라는 유능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 모리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의 앞발 동작이 제한적임에 반하여, 인간은  무려 3천여 개의 제스처를  가지고 있다. 손으로 하는 이들 제스처는 모두 인간이란  동물이 직립하여 앞발이 기어다니는 일에서 해방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인간은 동료들에게 훨씬  더 정확하게 방향을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모욕을 주는 손짓도 그 중의 하나다.  영국인들은 손등을  보이는 브이자를  모욕적으로 생각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남근을 상징한다. 고대 로마에서 기원한  '가운뎃손가락 치켜세우기'도 너무나 유명한 남근상징이어서 '외설스러운  손가락' 내지는 '파렴치한 손가락'으로  알려진다. 손을 모아 쥐고 엄지손가락을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로 내밀어 엄지손톱 정도까지만 내보이는 피그  사인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방어의 의사를 나타내는 고대의 제스처다.  이런 행동의 기원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사악한 마법을 무력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 여자들의 성기를 내보내는 의식이  행해졌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까지 소급된다고 한다. 자기를  노출시키려는 정신의학적 증상인 노출행동은  고대 종교적인 제스처의 상징적 변형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제스처를 성적인 모욕이나  성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의 용도인 방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이런 행동의 기원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사악한 마법을 무력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 여자들의 성기를 내보이는 의식이  행해졌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까지 소급된다고 한다.  자기를 노출시키려는 정신의학적  변형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제스처를 성적인  모욕이나 성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의  용도인 방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나는 우리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엿 먹어라" 하는 쑥떡도 실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상대편을 향하여  성적인 동작을 감행하는 우리들의  쑥떡은 우리 조상의 어느  시대에선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결과물로 남은 쑥떡의 외설스러움  때문에 오로지 '교양 없는 행위'로만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교양'이라는  두 글자의 한계에서  과감히 벗어난다면,  쑥떡이란 행위 속에는 '성기 드러내기'를  통한 외설의 극대화를 통하여  현실세계의 분노, 격정 따위를 풀어  보려고 하는 인간심리의 심층적인  뿌리를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집단심리는 매우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며, 밝혀지지 않은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를 어떤 고결하고  엄숙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단정하여 귀족적 취향으로만 재단하려는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못마땅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늘 그렇듯이 고급이 있으면 저급이  있다. 그리고 고급은 고급대로 저급은 저급대로의 몫과 임무, 각각의 쓰임새가 별도로 존재하는 법이다.  우리들이 무조건적인 '교양인'을  추구하는 동안에 우리 문화는 쑥떡질을 거의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은 하루에도 열댓 번 쑥떡을 먹이고  있는지 모른다. 쑥떡을 그대로  드러냈던 시대와 쑥떡을 마음 속에서만 하고  있는 시대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들은 '교양인'이 되기 위하여  화가 날 때도  쑥떡 따위는 감히 드러낼 수 없어 속으로만 쑥떡을 먹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속으로만 과대섭취한 쑥떡에 체하여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자리에서  쑥떡 같은 것을 옹호, 발전시키자는 주의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체언어를 통제당하고 급기야는 상실해버린 '권위통제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쩜 원초적인 우리들의 신체언어를 회복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다.  모리스는 우리 인간을 동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숭고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물이다. 아무리 스스로를 날개 잃은 천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도 우리는 서 있는 원숭이에 불과하다"면서 '신체언어 통제'를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급적 신체언어를  통제하려는 경향의 저변에는 생물학적 이유가  깔려 있다. 영장류나  원숭이 그리고 늑대  집단의 우두머리는 그보다 지위가 낮은  성원들보다 몸을 훨씬 적게 움직인다. 어떤  집단에서건 우위에 속한 동물은  거의 고요한 정적 속에서 거동하며, 순위가  낮은 구성원들이 멋대로 굴 때도  질서를 잡기 위하여 한 번  무섭게 노려보는 것 이상의 동작을 하지 않는다. 구태여 신체언어를 사용하느라고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 우두머리는 단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사회에서 사회적인 '신체언어 통제의 기초'에 깔려 있는 것이 바로 이 우위의 '냉정함'이다. 침묵의 거의 주술적인 자신감을 나타내며 다른  동료들을 선동하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전혀 없다.

 

대리만족 혹은 배설의 쾌락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대리만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탈리아 출생의 세계적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어법을 재활용해 보기로 한다.  우리들은 그람시가  민속문화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곤 한다. 민속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람시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민속적인' 세계관을 넘어서 대중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고, 상부로부터  전달된 문화인 지배계층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요소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민속적인 것이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민속이란 '신중히  다루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민속현상은 다른 세계관과  연관된 사회문화적 상황에 부합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포함하거나  나타낸다고 하였다. 민속문화의 주역인 '인민의 세계관'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공적  세계관'과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반대나 모순, 갈등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양 있는 부류나 지배계층 혹은 국가의 특질인 공적 개념은 일반적인 공적 사회가 그러하듯이 민속과 양자택일적으로 경쟁하고 갈등한다. 이는  "민속이란 인민의 문화생활 조건의 반영을 따름"이라는 견해에 이른다.  장황하게 민속에 대한 그람시의  견해를 끌어들인 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욕설'이라는 것도 하나의 민속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욕설은 결코 단순한 욕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한다.  따라서 욕설은 인간의 심층심리와  행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민속문화의 하나가 아닐까.  이제 문화는 더  이상 '생산의 문화'이기를 멈추었다.  문화 자체가 소비품목이 된 탓이다. 20세기를 마감하는 가운데 거대자본주의가  거둔 가장 중요한 전리품의 하나는 바로 문화라는 소비품목이다. 그 소비품은  더 이상 기존의 일과 놀이 혹은 일과 제의를  벗어난 지 오래다. 오늘의  문화는 배설을 원한다. 그 배설은 포만한 잔치, 끝없는 욕망의 굴레, 되풀이되어 끝내 거부할 수 없도록 포박 지우는 광고선전 등 다양한 종류로 특징지워진다.  화장실은 늘 쾌락한 공간이며  쓰레기장은 늘 넘쳐나며 도시의 하수처리가 사회문제로 된 것은  이미 고전에 속한다. 침실에서 이루어지는 남과  여의 섞임이 밤낮 없는 배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누구나 그  배설의 기쁨, 경건성, 놀라움, 찬란함 따위에 감탄하고 끝내 자신도 늘 배설하고 만다.  대리만족, 그 배설의 시대에 살면서도 정작  우리는 '교양 있는 계급'을 자처하면서 욕설이 지닌  원초성을 깔본다.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고
운 말 쓰기'라는 도식에만 빠져서 욕에 담겨져 있는 원초성을 미처 보지 못한다.   인간이란 그렇게 고상하기  만한 존재인가. '고운 말'을  쓰는 것에 반대하지도 않고, 반대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걸쭉한 육두문자 소멸을 마냥 좋다고만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육두문자가 사라진  그 빈 자리를 음란비디오 따위의 정말 불건전한 매체가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매월당 김시습에게서 다시 배우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참으로 참담한 느낌을  한시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매월당 김시습, 시대를  거역하면서 천하를 주유하던 방랑 시인 김삿갓이  써놓고 간 이러저러한 시편을 들추어보았다. 조선 전기 문학에서  일찍이 그가 이룩한 성애의 당당함과 건강함을 우리는 모두 추방시키고,  값싼 포르노 성애문학으로 대체시켰다.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문화 곳곳에 깔려 있는 쌍욕도 무참히 버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김시습이 한때  묵었던 부여 땅 무량사를 찾아갔다. 무량사  오층탑 앞에 서서 "오호, 애재라! 육두문자의 소멸을 통곡하노라!"고 여러 번 외쳤다.  서울로 돌아온 날 그의 시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컴퓨터에 옮기고 누런 종이로 출력하여 책꽂이 옆면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호탕하게 늘 그 시를 읽어 본다.  성당은 내좆이고 방 안은 개좆물 같다  생도는 제미씹이고 선생은 내불알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의 삼각관계  백년 동안의 언어마술사에서 깨어나
  나는 미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쓴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음식문화의 수수께끼>로 국내에 번역됨)를 읽으면서 몹시 화가 난 적이 있다. 문화유물론자인 그는 한 지역의 문화적 전통에  변화를 주는 가장 큰 힘은 고단백질을 섭취하는 생물학적  강제라고 주장하면서, 줄곧 동물성  단백질이 사회문화를 움직이는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동물성 단백질 신화'는 잘못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교육 받은, 동물성이 최고라는  그릇된 등식을 새삼  확인한다. 20세기로 접어든  이래 우리는 근 백년 동안 근육질,  고깃덩어리, 동물성 단백질 따위가 곧바로 힘, 정력, 에너지, 건강 같은 말을 뜻한다는 묘한 언어마술에 걸려왔다.  사람들은 동물성을 과도하게 섭취했을  때 비만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백년  동안의 언어마술에서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는 못했다. 우리의 우수한 식문화를 포기하고 햄버거 따위에 매달리는 후진성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천년 세월을 누려온 우리의 장문화 역시 아직은 잠에서 덜 깨어난 듯싶다.  나는 동물성 단백질 신화에  빗대어 식물성 단백질 문화의 정수로서 장문화를 내세우고 싶다. 장문화에는 비단 단백질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은 콩단백질의 위대한 힘을 내세우고  싶다. 무엇이 콩을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의 대두론에서 이렇게 갈파하였다.  콩은 오곡의 하나인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콩의 힘이 가장 크다.  후세 백성들은 잘사는 이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으므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돌아가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었다. 값을 따지면 콩이 쌀 때는 벼와 서로 맞먹는다. 그런데 벼 한 말을 찧으면 네 되의 쌀이 나오니, 이는 한  말 콩으로 네 되의 쌀과 바꾸는 셈이다. 벼 여섯 되를 더 얻는 것이니  콩이 훨씬 더 이익이다. 또한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들면 얼마든지 찌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 또한 싹을 내서 콩나물로 만들면 몇 갑절이 더해진다.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 합쳐서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이런  일들을 알기 때문에 대강  적어서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자에게 보이고 깨닫도록 하고자 한다.  "콩의 힘이  가장 크다"고 명쾌하게 진술하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콩의 원산지는 만주 벌판이며  야생콩에서 비롯되었다. 만주라면 부여족의  옛 땅이니 콩은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그 콩으로 장문화를 일으켰으니, 우리의 장문화에는 고구려의 숨결이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곰팡이를 먹다니!
  구한말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메주에 엉겨붙은 하얀 곰팡이를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곰팡이를 먹다니! 그들은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지면에 애꿎게도 곰팡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서양인들의 눈에는된장이 숙성되어  나가는 과정이 오로지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식문화로 비쳤을 뿐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을까. 크게 나누어 날로 먹기, 익혀서 먹기가 있고, 발효시켜  먹기를 더할 수 있다. 음식학자들은 서슴없이 발효음식을 가장 선진적인 식문화라고 말한다.  된장, 고추장, 간장, 개장, 청국장, 김치, 젓갈...... 우리 음식의  으뜸은 대부분 발효음식이다. 서양  발효음식의 으뜸이 요구르트, 치즈, 따위의 동물성이지만 우리의 발효음식은 젓갈 따위를 빼놓고는 식물성이 대부분이다.  발효음식의 으뜸인 장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헷갈리기 일쑤다.  장이란 말이 중국에서는 <주례>의  '장 12동'이란 표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우리와 달리 콩이 아니라  고기로 장을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장은 젓갈이다. 해는 '젓'이라고  말한다. 장은 종류가 여럿인데 시장(메주로 만든 장)이 그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젓갈과 장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왕충의 <논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콩장이  등장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젓갈을 장이라고 부르면  그들은 도리어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울러  우리 나라에서 콩장만 있는 줄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그가 지적한  것은 유효하다. 우리들은 으레 콩으로 쑨  된장 따위만 장으로 알고  젓갈은 장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넓은  범주의 장문화에는 젓갈까지도 포함된다.  된장이 우리 나라 장문화의 으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숭어.도미.홍합 같은 생선으로  만든 어육장도 널리 존재했다. 김장에 명태 같은 생선을 함께 넣어서 먹는 풍습도 장문화 범주에 넣어야 한다.  해는 소금으로 절인 생선으로  만든 음식을 말하고, 혜는 시큼한 초를 뜻한다. 식혜란 밥을 섞어서 만든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우리가 흔히 먹는 민족 음료이다. 흔히 '식혜'와 '식해'를  혼동하기는 하나 '식혜'라고 부르지 '식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식혜가  자칫 쉬면 시큼한 초가 되어 술로  변하는 이치를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를 보면 젓갈을 뜻하는 해도 장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 - 혜, 젓 - 해, 육장  본디 중국의 장은 '해'란 이름의 육장이고,  우리의 장은 시란 이름의 콩장이었다. 진대의 <박물지>에서 "외국에서 콩장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한대 이후에야 외국에서 콩장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콩의 원산지가 만주라는 사실과 중국에서는 콩장이 늦게 시작되었다는 문헌기록 따위는 우리 민족이 콩을 주원료로 한 장문화를 독창적으로 꽃피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닐까.  우리 문헌에는 일찍부터  콩장이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3년조를 보면 왕이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납채를  수레로 보내는데 그 목록에  쌀, 술 기름, 꿀,  포 등은 물론이고 장.시.혜 같은  것들도 눈에 띈다. 장.시.혜가 따로따로  나온다는 것은 각각을 명확히 구별하여  썼다는 증거다.  어쨌든 지금 장은 된장, 고추장, 간장,  김장 따위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김장김치'에서 보듯이 김장은 다른 장르로 떨어져  나갔고 된장, 고추장, 간장이 장문화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의 장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의 장인 미소가 된다. 우리는  된장을 콩으로만 만들지만  일본에서는 콩과  쌀누룩으로 빚는다.  조선 시대  구황식품서인 <구황보유방>을 보면, 콩과 밀을 2:1로  섞어서 메주를 빚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콩 한 말을 무르게 삶고, 밀  다섯 되를 볶아 함께 섞어서 쑤고......"고 하였으니 일본 메주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된장을 콩으로만 빚는  것으로 알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일찍이 우리가 전해준 된장문화가 일본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리 것이 변한 것이 아닐까.  장은 나라마다 이름이 다르다. 우리는 메주나  미주라고 하는데 만주에서는 미순, 일본에서는 미소라고 부른다. 음식학자 이우성  옹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전화로 자문을 구했던  적이 있는데 그는 단호하게  이 말들이 같은 계열이라고 증언했다.  아무튼 고구려 땅에서 나서 중국 본토로  들어갔고, 일본으로 넘어간 장문화는 동양 삼국 식문화의  으뜸이 되었다. 비교문화사를 쓰는 데는 장문화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재료가 된다. 어떤 이는  아예 '곰팡이 문화권'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장의  기원을 유목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쿠치족에게는 '씌'라는 장문화가  있다. 콩을 삶아 낙타 등에 실은  채 콩에서 하얀 실이 날 때까지 띄운다. 실이 난 콩을  암염 가루에 섞은 것이 씌인데 이것을
된장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다.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  나는 메주의 하얀  곰팡이를 '아름다운 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칙칙한 검정색의 독버섯 같은  꽃이 피면 안된다. 순진무구하고 깨끗한 하얀  꽃이 피어나야 한다. 꽃이  핀다는 사실은 박테리아가 살  만큼 영양분이 충분하다는 증거이다. 메주는 꽃을 피움으로써 새롭게 변신한다. 사람들은 "메주같이 못생겼다"고 나무라지만, 나는  하얀 꽃이 핀  메주에게서 매혹적인 체취를  맡곤 한다. 앞으로는 "메주같이 아름답게 생겼다"고 쓸 일이다.  장맛은 곰팡이가 결정한다.  집집마다, 지방마다 독특한 종류의 곰팡이가 메주덩이에서 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들은 장을  담금 때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장의 중요성을 아예 이렇게 일렀다.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요, 인가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을지라도 맛좋은 장이 여러 가지가 있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 간장은 우선장 담그기에 유의하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좋은 도리다.  친구와 장과 술은  오래 묵을수록 좋다도 하던가. 집집마다 대를  물려서 먹는 장맛은 그 집안의 살림솜씨를 재는 기준이기도  했다. "광 속에서 인심나고 장독에서 맛난다", "장맛 보고 딸 준다", "장은 장이다", "고을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집안 일은 장맛으로 안다", "아이  가질 때 담근 장, 그 아이 결혼할 때  국수 말아준다" 등등등.  김명자 교수(안동대)가 몇 년 전에 책을 한  권 냈다.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는 책이었다. 전통의 멋과 슬기를 잘 압축하고 있는 제목이 아닌가.  조선 시대에도 장  담그기는 중요한 연중행사일 수 밖에 없었다.  정다산의 형인 정학유(1834-1849년)가 쓴 <농가월령가>를 보면 선인들이  얼마나 장 담그기를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요긴한 일 장 담는 정사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추하소(삼월령)
  장독을 살펴보아 제 맛을 잃지 마소  맑은 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 내어라  비 오면 덮겠은즉 독전을 정히하소(유월령)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쓸 일이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십일월령)
  장을 담그기 전에는 고사를  올리기도 했고 장독대에 금줄을 치거나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놓았다.  장맛을 망치는 잡신이  집 안으로 들어오다가  거꾸로 붙은 버선본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친다는 속설도 있기 때문이다. 장을  담그는 동안 주부는 외출을 금하였고  여성의 음기가 닿지 않도록  입을 떼지 않고 일하기도 했다. 장을  담근 지 21일 동안에는  아기를 낳았을 때처럼 초상집도  가지 말고 달거리 있는 여자나 낯선 사람을 집으로 들이지 말라고까지 했을 정도다.  조선 후기에 나온 <규합총서> 같은 생활지침서에는  장 담그는 법, 장 담그기 좋은 날, 피해야 할 날, 장 담그는 물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일단 메주를 띄우고  나면 고추와 숯도 함께 띄운다. 살균과  흡착효과도 있겠지만 주술적 효과도  기대한다. 고추의 독한 맛과 일종의 필터작용을  하는 숯이 어우러져서 잡신을 쫓아낸다는 믿음이다.  장독대는 신성한 공간으로 존재한다. 어머니들이 칠성님  앞에서 손 모아 비는 칠성단이 바로 장독대다. 마을풍물패는 집굿을 치면서 으레 장독대로 몰려와 '철륭 철륭 좌철륭 우철륭' 하면서 철륭굿을 쳐준다. 말할 것도 없이 철륭신은 장맛을 지켜주는 신이다.  집안신으로 어엿하게 자리를 잡을 만큼 장은  위엄과 격조가 있었다.

 

된장 할아버지, 간장아들, 손자고추장
  어린이들에게 된장, 고추장, 간장의 관계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 장문화의 족보를 쉽게 풀면  된장은 할아버지, 간장은 아들, 고추장은 손자뻘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젓갈은 작은할아버지, 청국장은 동생뻘쯤 되지 않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애초에 된장이 있었다. 된장할아버지가 소금물과 만나면서 간장이 탄생하였다. 예전에는 소금물로만 먹던 사람들이 메주를 띄운 소금물이 더욱 좋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후기에 고추가 들어오자 사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사람들은 된장을 담그듯이 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메주를 쑬 때, 아랫목에 덤으로 불린 콩을  짚에 싸두었다가 청국장을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청국장은 동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젓갈 같은 장은  콩장과 무관하지만 장문화의 원조격이 분명하므로 작은 할아버지뻘이다.  이들은 모두 친족관계이며, 간장처럼 된장이 없으면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부자관계도 성립한다.   된장 가운데데는 순전히 된장만을  먹기 위해서 담그는 막장도 있지만 단기간에 숙성시키는 청국장.빠개장.가루장.빰장.보리장 같은 '즉석된장'도  있다. 그러나 된장에게 부여된 임무  가운데 가장 절대적인 것은 간장을 만드는  일이다. 호적을 된장에 둔 간장은 곰팡이 꽃이 핀  메주와 소금물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소금물에 띄운 메주는 늘 뚜껑을 열어놓아 햇볕을  쬐야 한다. 따사로운 햇볕은 간장의 숙성을 촉진시키는 주역인 것이다.  간장은 어떤 맛일까. 짜기만  할까. 현대인들은 간장이 짜기만 하다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맛을 보면 짠맛은  물론이고 단맛과 감칠맛이 함께 난다. 오묘한 맛이다. 무조건  짜기만한 간장은 간장이기를 포기한 놈이다. 정정당당한 간장은 열 가지  맛을 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양념으로 들어갔을 때, 열 가지 맛을 내면서 음식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간장 맛을 잃어버린 20세기 후반의  우리 식생활은 '설탕문화'에 압사당하였다. 설탕은 확실히 달다. 단맛이  너무 강해 입맛을 죽여버린다. 심지어 설탕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단 '사카린' 같은  '메가톤급' 당로가 위세를 떨치기도 한다. 설탕문화는 우리들의 입맛과 건강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은 간장을 농도에 따라 진간장, 중간장, 묽은간장으로 나누었고 각각 용도를 달리했다. 담근 지  얼마 되지 않는 묽은간장은 국물을 낼  때 가볍게 사용하나, 5년 이상 오래 묵은 진간장은 약밥 따위의 '진한 음식'을 만들 때 썼다. 그래서 큰집의 독마다에는 담근 연도가 다른 간장이 담겨져 있었으며 쓰임새에 따라 손놀림이 달랐다.  프랑스인들이 포도수의 연도를 따지면서  식도락의 묘미를 음미한다면 우리는 간장의 연도를 따지며 음식의 묘미를 즐겼다고나 할까.  족보를 따졌을 때 된장과 간장의 역사가 깊다면 고추장은 조선 후기에 탄생한 신출내기다. 그렇지만 고추장은 담백한 우리 식문화에  화끈하다 못해 뜨거운 맛을 선사하였다.  고추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김치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혁명이란 말에 걸맞을  정도로 김치혁명은 우리의 밥상문화를  바꾸어놓았다. 그 동안 침채 같은 김치에 천초  따위의 향신료에 의존해 왔는데 고추는 매운 맛과 붉은 색소로 입맛의 혁명을 예고했던 것이다.  고추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고추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비로소  건너온 것이기에 왜겨자라 한다"고 하였다. 고추의  캡사이신은 기름의  산패를 막아주고 젖산균의  발육을 돕는 성분이다.  이런 고추가 된장과 결합하여 고추장이  되었다. 된장에서 모범을 배우고서  독자적인 고추장 노선을 걷게 되었다.  조선 후기 <증보산림경제>를 보면,  가루로 만든 메주 한 말에 고춧가루 3홉, 찹쌀가루 1되를 놓고  좋은 간장으로 개어서 고추장을 담근다고  하였다. 분량을 따져보면, 맵기는커녕 막장에  가까운 고추장이 아니었을까. 애초에는 된장을 응용한 상태에서  고추장이 탄생되었음직하다. 그러다가 <규합총서>에  이르면 사태가 조금 달라진다. 삶은 콩 한말과 쌀 두  되로 흰무리를 쪄 함께 찧어 메주를 만든 다음에 소금 넉 되, 고춧가루 5-7홉을 넣었다고  하니 고추 양이 늘어난 셈이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매운 고추장으로 변화해갔다. 조선  후기에 고추와 함께 들어온 담배가 차츰 중독성을 띠면서 널리 퍼지듯이 고추장도 일종의 중독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외국인들이  늘 놀라듯이 '매운 고추를 매운 고추장에 찍
어 먹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 얼큰하고 뜨거워서 더욱 더 매운 찌개를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표현할 정도다.  서양의 '핫' 음식이 매운 맛만 있다면,  우리 고추음식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하고 단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일단 발걸음을 뗀  고추장은 보리고추장, 무거리고추장, 판고추장, 수수고추장, 약고추장, 고구마고추장 따위로 발전했다. 순창고추장처럼 지역적인 명물도 탄생했다.
  고추장이 탄생하자 우리 장문화는 명실상부한 삼총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된장, 간장, 고추장 삼총사의  임무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찌개, 무침, 볶음, 구이 등  다양한 음식문화에 침투하여 상호 결합하면서 엄청난 효과를 나타냈다. 우리  음식문화 대표적인 특징을  '국물 음식'이라고 압축한다면, 이들 삼총사는 국물을 종횡무진하면서 음식의 가짓수와 입맛을 확대발전시킨 셈이다.  또한 장아찌를 보라.  된장에 묻어둔 장아찌, 간장에  묻어둔 장아찌, 고추장에 묻어둔 장아찌...... 보릿고개 시절, 변변한 부식물도  없던 시절에 장은 밥상을 지켜준 유리한 밑천이었다. 심지어 된장떡까지 만들어 먹지 않았는가.

 

'빨리빨리 문화'를 탓하며
  <동의보감>에서는 장의 위력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또 열상과 화독을 다스린다. 또한 장은 흔히 콩과 밀로도 만들지만 그 약효가  콩장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육장과 어장은 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약에 넣어서는 안된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시판중인 간장이 유해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없다를 놓고 이따금 시비를  벌인다. 발암물질 디클로로크로판을과 불임  유발물질이 다량 들어 있다는 유해성 논쟁이 그것이다. 요즈음은  양조간장과 화학간장 두 종류가 팔린다. 양조간장은  전통적인 방법을 가미하여,  누룩곰팡이를 이용해 발효시킨다. 아무리 빨라도 3-6개월은  족히 걸린다. '빨리빨리'를 '효율과 경영'이란 구두선으로 외치는 시대에 수지타산이 맞는 것은 아무래도 화학간장이리라.  화학간장은 콩을 염산으로 가수분해하여  아미노산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에 간장 맛을 내기 위해 맛, 향, 색깔을 합성시키는데 우리가 왜간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일본은 전체 국민의  8할 이상이 양조간장을 쓰고 일부분만 화학간장을 쓰고 있는데, 우리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늘 제기되어  온 '간장파동'은 맥없이 끝나곤  했다. 미국의 권위  있는 기관에 의뢰한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는 식의 결론이 되풀이되었다. 우리의 장문화까지 미국에 가서 판정을 받아 와야 하다니! 이쯤되면  우리 '장문화의 우수성' 운운하는 주장도 할 수가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라는 독특한 생활 조건, 여성의 가사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점에서 장문화의 산업화는 필연적이겠지만 화학적 공법의 '빨리빨리'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의 장문화에도 완벽하게 또아리를 튼 '빨리빨리' 정신은 정말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항목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참으로  '빨리빨리' 아파트로 이사하였으며, 거추장스런  애물단지가 된 장독대를  '빨리빨리' 부수고  베란다 문화로 옮겨갔다. 아낙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장독대가 부서지고 칠성님도  사라지는 그 순간, 우리들이 장문화는 마지막 라운드의 기진맥진한 권투선수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된장, 간장  따위를 'Doenjang' . 'Ganjang' 같은 고유상표로 등록시켜 세계로 진출해야 할 때가 왔다. '김치'가 일본식의 '기무치'로 사전에 오르는 비극을 또다시 겪는 못난이 짓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를 이어오는 간장과 프랑스의 백포도주, 양자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럼에도 백포도주의 수백 년 전통은 힘껏 존경하면서도 우리들의 간장 대물림은 왜 무시하는가!  나는 요즘처럼 스트레스가 많고 온갖 현대병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된장 같은 것을 듬뿍  먹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고기조차 된장을  발라서 구워먹었다는 기록이  흔하다. 된장을 식문화의 중심에  두고 간장과 고추장을 좌청룡, 우백호처럼 거느릴 일이다.

 

 왜 하필 여신이었을까


  섬과 강을 창조한 마고
  성해방, 성차별의 철폐 따위가  우리의 일상적 화두가 된지 이미 오래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화두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아프로디테에 대해서는 해박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여신과 남신의 역사를 아는 이는 드물다.  신화를 단순한 허구나 전설 같은 이야기로 여기는 풍조는 근대 이래의 지나친 계몽주의적 지식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체코 출신의 저명한 신화학자 희브너가 갈파한  '신화의 명예회복'을 꿈꾸며, 우리들  신화 속에서 여신과 남신의 자리를  매김해 보자. 신화의 원형이야말로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 삶의 비밀을 보여주는 '청동거울'이리라.  참으로 오랜  옛날, 신화시대에 마고라는 여자  거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해를 뚜벅뚜벅 걸어서 건너가고 있었다. 바람이 고요하여  풍랑이 일지는 않았지만 바다가 생각보다는 깊었다.  깊은 곳으로 발을 잘못 내딛어 빠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젖었다. 워낙 큰 마고였지만 치맛자락이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젖은 치마를 벗어서 월출산에 잠시 널어  두었다. 치마를 널자 산에 난리가 났다. 산 전체가  컴컴해져서 동물들은 갑자기 밤을 맞이한 듯했기 때문이다.  마고는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소피도 여러  번 보았다. 마고의  오줌은 물줄기를 이루어 곳곳에 강을 만들었다. 마고가 서해에서 몇  차례 변을 보자 곳곳에 섬이 만들어졌다. 저녁 찬이슬을 맞은 마고가 기침을  하자 갑자기 폭퐁이 일어나면서 풍랑이 일었고 산과 들의 나무들의 세차게 흔들렸다.  이윽고 밤이 왔다. 마고는  하늘의 별을 만지고, 달을 껴안으며 그렇게 외로운 밤을 지냈다. 아직 사람이 탄생하기 전이라 마고의  친구가 될 만한 이들의 없었던 탓이다.   마고가 얼마나 컸으면 겨우 치맛자락만 적셨겠는가.  거인 설화는 비단 마고에 그치지 않는다. 제주도에 가면  마고와 거의 흡사한 설문대할망이 있다. 이들 마고와 설문대할망은 우리 민족의 시작과  더불어 전해져 온 가장 오래 된 신화였다.  우리 민족 최초의 신은 남자였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여자였다. 적어도 우리 신화의 첫 장을 장식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마고와 같은 여자였다.  마고는 서구 신화학 용어로 지모신이다.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을 문헌에서 찾자면 신모를 들 수 있다. 마고 시대까지는 적어도 이들 신모들의 독무대였다. 어머니의 힘이 위대하듯 신화 시대의 초기도  여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여성들이 헤게모니를 잡았던 모계사회의 흔적이 아닐까.  중국 신화에서는 반고가  천지개벽을 이루고 나서, 여와가 인류를 탄생시킨다. 여와는 복회와 오빠  동생 사이였다고 하고 혹은 부자 사이라고도  한다. 오누이 사이였는데 부부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있다. 한대의  석각화상을 보면 사람의 머리에다 뱀의 몸뚱이를  한 복희와 여와의 그림이 자주 나타난다.  여와는 황량한 대지를 걷다가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의 진흙을 한 웅큼 파서 물과 반죽하여 어떤 형체를  만든다. 그리고 만든 물건을 땅에 내려놓자마자  신기하게도 살아 움직였다.  이렇듯 중국 신화에서도  여신의 손을 빌려 인류가 탄생했다. 여와는  바로 우리의 마고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마고는 독신녀이고 여와는 기혼녀였다. 또한 마고는 천지를 창조한  인물이고, 여와는 사람만 창조한 인물이다. 서해에 가서 마고가 빚었다는 섬을 바라보면 늘 서해 건너편의 여와도 떠오른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어머니들이 인류의 역사를 창조하였음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 그리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신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소한 신화의 들머리에서 남자들이란 참으로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아버지들은 나중에야 하늘의 이름으로  천신이 되어 하늘에서 강림하며,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국조가 된 신모
  단군신화에 이르면 남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신단수를 통하여 강림하고, 곰과  범이 사람이 되고자 환웅에게 빈다. 곰은 웅녀가 되었으며, 웅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토템의 대상이었던 곰이 왜 하필 웅녀, 즉 여자일까.  통치적 주권을 상징하는 천제의 아들 환웅과 자연의 신인 웅녀의 결합은 가부장문화와 모계사회의 결합이 아닐까. 조동일 교수(서울대)는 웅녀가 단군의 어머니라는 설정을 신모신화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웅녀가 단군을 낳았듯이  유화는 고주몽을 낳는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왕위를 승계한 금와가 태백산(백두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누구인가를 묻는다. 여자가 대답한다.  "나는 하백의 딸로  유화라 하는데 여러 아우들과  노닐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나를  응신산 밑 압록강 가에 있는 집 안으로  꾀어내 남몰래 정을 통해놓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을 보낸 것입니다."  금와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여인을 방 안에  가두니 햇빛이 방을 비췄다. 여인이 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다시 비췄다.  그로부터 여인에게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 만했다.  알에서 깨어  나온 사람이  바로 동명왕이었으니,  <삼국유사>권1 고구려조에 나온 동명왕 탄생신화다. 하백은 틀림없는 수신이다. 반면에 유화는 고주몽을 낳은 신모로 보인다.  비록 가부장적인 천제 해모수에게 꼬임을 당했고  햇빛을 받아 알을 낳는 식으로 하늘과  결합 하나 지모신으로서 신모적 성격을 잃지 않는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으로 있던  서긍의 <고려도경>은 신으로 숭배되는 유화를 잘 그려놓았다.  동명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정전의 방은 동신성모의 당으로 쓰였는데 장막으로 가리고 사람에게  신상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무를 깎아  여인상을 만들어놓았을 것인데  혹 부여처인 하신의  딸이라고 한다. 주몽을  낳아 고구려의 시조가 되게 했다 해서 이를 제사 지낸다.  지모신앙의 흔적이 국조신화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미미하게나마 이어지고 있던 여성들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최숙경 교수는 <한국여성사>(이대출판사)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여신에게 농사 풍작을  비는 사상은 구석기 시대  비너스 이래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한편 농경에  있어서의 여신 숭배는 채집에 종사하던 여성에  의해 농경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 일정 기간동안 줄곧  씨 뿌리고 밭 갈아 백배, 천배의 수확을 올리던 농경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풍요로운 여신  비너스로서만이 아니라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권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김두진 교수는 여사제가 고대사회의  유풍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부장적 집단인  유이민이 이주해 오기 이전, 토착부족 세력들은 저마다 지모신 신앙을 가졌고,  대체로 여성들이 그 제사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까지 여사제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노구나 노모의  존재는 그런 유풍이었다. 그러나 국조신화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문명, 즉 철기문화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전일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산신이 된 신모
  우리 나라는 참으로  산이 많다. 그래서인지 산신신앙의 역사가 깊고  넓게 분포되었다. 신모가 산신과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신모의 흔적은 곳곳의 산신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권  5의 "선도성모가 불교행사를 좋아하다"는 기사가 그렇다. 진평왕 시대의 여승 지혜의 꿈에  선도산 신모라 부르는 선녀가 나타나는 것으로 신화는 시작된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다.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변한 땅에 와서 신선의  술법을 체득하여 오랫동안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신모는 소리개를 만난다. 황제가 기르던 소리개가 우리 나라까지 날아온 것이다. 소리개의 발목에는 편지가 있었는데,  "소리개가 머무는 것을 따라 집을 삼으라"는 내용이었다. 소리개가 날아서  산에 앉자 그 산을 서연산이라 하였다. 신모는 오랫동안 서연산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보위하니  신령한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신모가 신령한  아들을 낳아 동쪽나라의  첫 임금으로 삼았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의 시초가 된다.  그는 일찍이 하늘 신선들을 부려 비단을  짜게 하고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의 영험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지모신인 신모는 어느덧 산신이 된다.  산신이 된 선도성모는 혁거세와 알영을 낳아 신라를  개국한다. 이것은 신화 체계에서 여성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러나 <삼국유사>의  다른 편에서는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고 처리하고  만다. 신모  역할이 거세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인데도 서로  다른 것은 여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화체계와 남성을 강조하는 신화체계가  상호 대립하며 병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여신이  산신도 되고 나라를 여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도 잃지 않아서, 산신이  된 지모신이 국가를 창조하였다는 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9권 고령현조에도 나온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에 응감하여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 하였다.  기록자는 "가락국 옛 기록의 여섯 알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된 것으로서 믿을 수 없다"고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허황된 것'이야말로 신화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야를 개국한 정견모주도 산신이 된 여성이다.  산신이 된 여성들인 지리산성모, 치술령신모, 운제산신모 등은 곳곳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연 신과  무관하게 단순히 산신이 되어 무속
화된 여성의 이야기로는 지리산성모가 대표적이다.  조선 성종 3년(1472년) 음력 8월 15일 김종직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천왕봉에 오른다. 그리고 천왕봉 성모사 작은 신상 앞에서 제를 올린다. 그 신상이 지리산 성모였으니 눈과 눈썹이 선명하고 머리에 쪽을 지고 화장까지 짙게 했다고 김종직은 기록하였다. <유두유록>에 나온 기사다.  그로부터 520여 년 뒤, 나는 천천히 천왕봉에 올랐다. 1학기 한국 민속학 중간 시험을 답사로 대체하고서 버스 두  대를 빌려 9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산을 오른 것이다. 성모상은 현재 시천면 중산리  중턱의 천왕사라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설명을 들으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단다.  푸른색의 특이한 돌멩이인 성모상은 다부지게 살아온 인생역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은 석상이다. 또 성모상은 여느 불상들과 결코 닮은 꼴이 아니다. 일설에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도  하나 김종직은  이미 "서천서역이 우리 나라와 천백여 세계나 떨어져 있는데  어디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느냐"고 지적하였다. 완벽하게  독자적인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여신상일 뿐이다. 신모신화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이들 신모신화의 흔적이 다양한 신화들 속에 아주 교묘하게 파편 박히듯  각인되어 있다고 본다. 아직 초기의 신화  속에서만큼은 여성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신화  시대 여성의 힘이 가려져 있음은 남성 연구자의 시각이 지배적인 상황 때문이 아닐까.

 

바리 모두 바리데기에게 박수를!
  본격적인 역사 시대가 열리면서 나름의 새로운  신들을 요구하게 된다. 민중의 세계관에 자리잡은 신들은  주로 무속신들이 태반을 차지한다.  기독교가 보편화되면서 헬레니즘적 신관이 쇠퇴한 것과 다르게,  외래종교인 불교가 토착화에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적인 토속신앙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무속신의 존재는 중요하기만 하다.  무속신의 반열에도 여성들이 대거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무속신이 된 여성들은 바리데기나 당금애기에서 압권을 이룬다.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 죄로 아기는  궁전에서 쫓겨난다. 생년월일시를 옷고름에 매고 함에 넣어  자물쇠를 채운 후 강가에 아기를 버린다.  아기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비리공덕 할아비와 비리공덕  할매의 손에 건져져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어느 날 국왕의 병이 위독하여 백양이 무효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바리데기는 비록 자신을 버린  아버지이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약수를 찾아 먼길을 떠난다. 바리데기가 겪은  고생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리오. 심지어 무장승을 만나  일곱 아들을 낳기까지  하다. 천신만고 끝에  서천서역에서 얻어 온 약수를 부왕의 입에 넣는다.  그 순간 죽었던 부왕이 깨어난다. 그 후로 바리공주는 언월도와 삼지창, 방울과 부채를 손에 든  무당이 되어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게 된다.  딸이 아버지를 구하는  대목은 다분히 효심을 자극하는 묘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딸이  아버지를 구한다는 설정은 영원한 생명수의 원천이 여자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들은 이 탁월한 서사문학으로서의 바리데기 신화를 그 동안 너무 잊고 살아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를 읽으면서 무릎을 치는 사람들이, 똑같이 영웅적인 고난을 거쳐가는  우리의 딸에게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우리 모두 바리데기에게 박수를 치자. 그리고 버림 받은 딸이 죽은 사람조차 되살리는 무조의 여신이 되어 우리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서사를 사랑하자. 그리스  신화의 난잡방탕한 여신들, 남신에게 성추행을 당하여 가부장적 제우스 독재체제에 편입된  올림프스의 여신을 기억하고 아낄 것이 아니라 고난의  연대를 거쳐간 영웅서사시의 늠름한  주인공 바리데기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많이 슬퍼해야 한다.  그녀가 버림받은 이유가  일곱 번째 딸이라는 죄였기에...... 

 

남성의 성기를 바치던 부근당
  역사 시대로 들어오면  신화는 보다 현실성을 띠게 된다. 마을의  신으로 자리잡은 마을신들은 대개 남녀를 함께 모신다.  수탑과 암탑, 남근과 여근,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여사낭과 남서낭,  용왕과 용궁 부인 식으로 남신과 여신이 음양조화를 이룬다. 음양조화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신에서 압권을 이룬다.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 골매기할머니와 골매기할아버지가 그것이다.  부부관계의 친화력은 인격신의 경우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해 조기잡이의 신인 임경업 장군 옆에는  '임장군 마누라', 개성 덕물산의 최영 장군 옆에는 '최영 장군 마누라'가  따라붙는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부부관계를 반드시 고려했음은 무속의 신관이  그만큼 현실적이었다는 반증이며, 음양의  상생조화에서 유래했음직하다.  부부가 금실이  좋은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부부가 신이 되어  같이 앉아 있게 된 것은  일부일처제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일처제는 역시 남성 우위에 기초한 제도로 귀착하였다. 조선시대  제의에서 남성 우위는  보다 확실해진다. 여신보다는  남신이 먼저 상을 받는다. 당할아버지에게 제상을 먼저 올리고  난 다음에 당할머니에게 차리는 식이다. 남성우월사회에서는 신들도 남신에게 우선적이었음을 뜻한다. 신들의 세계에도 가부장적 권위가 은연중 반영된다. 심지어  여성신을 남성 신격으로 바꾸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서울.경기지역에는 부군당신앙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부군당은 예로부터 남자의 성기를  깎아서 여신에게 바쳤던 곳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서울의 음사중  각 사에 신사가 있어 부근당이라 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 번 제사에 드는 돈은 누백금에 이른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도하 각  관부에 으레 작은 사우를 두고 여기에  지전 등을 걸어놓고 부군이라 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관아에서 모시던 부군당은 기실  민간성신앙으로서의 부근신앙을 포섭하여 모시던 것이 이후에 다시금 민간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까지 서울에만도 한강  가인 동빙고동이나 서빙고동, 당산동  등에 부군당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부군신앙이었던 서울  원효로 부군당의 주신이 송씨인데, "부근은 송각씨가 실려 있고 사방 벽에 목경물을 달아 지나치게 음설하였다"는 지적과 연결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자 성기를 신이  된 여자에게 바치는 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부근'은 '부군'이 되면서 '관료화'된다.  부근신을 여성의 그림으로 모시기도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 성기를 제물로 받아오던 강력한 여신을 사라진 셈이다.  신들의 세계에서 여전히 강한 여성의 힘  아, 그러나 여신들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강릉 단오제에서 모시는 대관령국사성황의 여성황은  절대적 힘을 지닌다. 최영이나  임경업 장군의 '마누라'는 매우 별난 힘을 지녀서 간혹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일도 도와주는 탓으로 여성들이 끔찍이도 모신다. 변산반도 칠산바다로 나가 보자.  나는 답사회 회원들과 변산반도를 갈 때마다  격포의 수성당을 찾아간다. 자그마한 수성당은 깎아지른 절벽에 서 있는데,  그곳에는 수성당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러 답사회에 소개한 덕분에 이제는  안내책자에도 오르고 제법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 군부대 벙커가 지키고 있던 요새였는데, 전주박물관에서 이곳 일대를 발굴한 결과 마한시대 제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수성당할멈은 일명  '개양할미'라고도 부르는데, 딸 일곱을  거느리고 칠산바다를 지켜준단다. 수성당  바로 옆에는 여우골이란 지명이 붙은 협곡이  바다로 치닫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할머니가 무찔렀단다. 민중적 수호신이 여신으로 설정되어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여신이 노하면 무섭기가 한이 없다. 총각은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지만, 처녀가 죽으면 '오뉴월 서릿발'  같이 무섭기만한 왕신이 된다.  삼척 해랑당의 여성낭에게 남자 성기를 매년 바쳐야만 마을에 아무 일도 없게 된다는 이야기도 처녀 귀신이 대단히 무섭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현실세계에서는 약한 여성이 신들의 세계에는 강하게 나타나는 역전의 드라마도 종종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현실세계의 한을 풀기 위해 신들의 세계에서나마 여성의 위력을 강하게 설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이 지닌 임신과 출산의 힘은 그대로 세상 창조와 풍요의 다산으로 반영된다. 농사의 풍요와  마을의 안녕을 찾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은  여성의 승리를 꿈꾸도록 만든다.  줄다리기에서 암줄이 이기도록 하거나  윷놀이에서 여자가 이기면 풍년이 온다고  믿는 점풍 따위가 그것이다. 시대가 바뀐  뒤에도 신모신화는 지속되어 여신에게 힘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의과대학의  볼린은 <우리들 안에 있는 여신들>이란 책에서 여신들을 몇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1그룹은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추구하는 원형으로서 아르테미스.아테나.헤스티아  세 처녀 여신을  그렸다. 제2그룹은 헤라, 테메테르, 페르세포네로서 상처받기  쉬운 여신들로 분류했다. 우리의 여신은 어느 유형에 속할까. 애초에는 제1그룹의 세  처녀 여신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어머니, 딸, 아내를 상징하는 제2그룹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그녀는 다른 책<우리들 안에 있는 남신들>에서  남성에의 순응을 요구하는 가부장제 문화는  강제로 키를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같은  것이라고 비판가고 있다.  하늘과 땅의 통치자, 올림프스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가부장제 신화를 우리  역시 답습하고 있는 중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여신은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혹시 '간 작은 남자'들은 꿈에서라도 남신이 주인이 되는 신들의 세계를 꿈꾸거나  않을까. 그러나 이 땅은 아직까지 '간 큰 남자'들이 살고 있는 가부장적사회가 아닐까.

 

장승은 어디서 왔는가
  천하의 색골 옹녀가 천하의 오입쟁이 변강쇠에게 투정을 부렸다.  "건장한 저 신체에 밤낮 하는 것이 잠자기와 그 노릇뿐, 굶어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옵소"  옹녀의 투정을 받고서 강쇠가 나무를 하러 갔다.  그런데 하라는 나무는 안 하고 장승을 빼내어 지게에 지고 왔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옹녀가 말했다.  "에그, 이게 웬일인가. 나무 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왔네그려. 나무 암만 귀타 하되 장승 빼어  땐단 말은 듣도 보도 못했소. 만일  패어 때었으면 목신동증 조왕동증 목숨 보전 못할 테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전 자리에 도로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옵소"  그러나 강쇠는 도끼  들고 달려들어 장승을 패어 군불을 지핀다.  이에 함양장승 대방이 발론하여 통문을 보내 조선팔도 장승을 모두 소집하여 장승동증을 발동하여 강쇠를 공격한다.  변강쇠전의 한 대목이다.  장승 동티 난 변강쇠 이야기가 소설과 판소리로 두루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당대 사람들은 장승을 건드려서는 아니 되는 영물로 인식했던 것이 아닐까. 

 

장승의 기원
  장승은 무엇일까.  근대 민속학의 개조  남창 손진태 선생은  장승에 관해서도 첫 번째 관심을 표하였으니, 그가 내린 교과서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장생은 Devil Post 또는 천하대장군의 이름으로 외국인  사이에 가장 선전되어 있는 조선민속의 하나다.  지금은 점점 없어져가지만 왕년 이 목우는  도처에 건립되었다. 보통 장승이라고 하나 몇 개의 다른  이름도 있다. 대강 분류하면 1.목
장승.석장승(물질상으로)  2.이정표로서의 장승.수호신으로서의  장승(성질상으로) 3.사원의 장승.읍촌 동구 장승.경계의 장승.노변의 장승(장소상으로)  등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장승의 기원을  추적해왔다. '옛부터 있어온 문화'라고 애매하게 말해서는  답이 풀리지 않는다. 장승의 출발은 어쩌면  대단히 복잡한 경로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초기 장승과 현존하는  장승이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명칭부터 다양하다. 경기.서울지역의 장승,  관서.관북지역의 장승, 전라도나 경상도의 장승.벅수.법수.벅시, 충청도의 수살막이.수살목.장승.장신 등이  그것이다. 마을 신격을  나타내는 뜻으로 할아버지.할머니당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미륵으로도 부른다.  가장 보편적인  이름은 역시 장승이며, 그  다음이 벅수다. 일괄하여 장승이라 부를 뿐, 남도에는  벅수도 만만치 않게 많이  쓰인다. "왜 벅수같이 서  있냐"는
속담처럼 벅수는 매우 흔한 말이다.  장승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은 애매하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 장생.장생표주.국장생석표 같은  이름으로 미루어 장승의 역사를  '장생'에서 구하려는 이들도 많다. 거대한 사찰 소유지를 보유하고 있었을 때  그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에서 장승을 세웠다는 장생고표지설이 그것이다.  일찍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도갑사 장생이 등장하며, 후대의 허목(1595-1682년)은 <미수기언>에 다음과 같은 시도 남겼다.
  장생의 돌 푯말 보이지 않으니 천고에 어찌하여 함부로 속여왔나
  괴이한 일 아득하니 뉘라서 알아내랴 홀로 선 내 마음 슬프게 하네
  그러나 단순한 경계표지석이 사람의  얼굴을 한 장승으로 바뀐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한 설득력이 약하다. 그 밖에  솟대, 선돌, 서낭당같이 한민족 고유의 토착신앙에서 기원했다는 설,  고대사회의 남근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더 나아가 퉁구스문화설같이 인근 지역과의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나는 장승 역시 그 기원은 멀리 선사 시대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역사를  지나치게 한반도 내부에만 편협하게 묶어두는 모순을 범하곤 한다.  우리는 북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신상들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축치.고리약.유가키르.길리약.골디.오로치 등 시베리아 일대의  고아시아족 목각 신상은 우리의 장승과 너무도 비슷한 영감을 던져준다.  원시사회의 신상이 오늘날의  장승으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존 장승은  특히나 조선 후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중세사회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손 치더라도 상고  시대에 이미 어떤 원형이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며  미완의 장이기도
하다.  장승 기원은  어느 하나만의 설로써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민속현상이 그렇듯이 고유의 전래설과 더불어 비교문화설을 함께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기원문제야 어찌되었든간에 우리 민족의 생활과 풍습 속에서 유전하는 독자적인 문화틀로서 나름의 변화발전을 거듭해온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장승에 담겨 있는 전형적인 표정은 그 자체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다. 또한 해학과  분노, 기괴와 웃음을 함께하는 이 땅의 주인공들의 것이다. 장승의 기원문제와는  별도로 '조선 토종'임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 조선 토종을 서양인들은 어떻게 보아왔을까.

 

 이교도들의 생활풍습, 우상을 만나다
  백여 년  전의 일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러 왔던 오페르트는 장승을 접한 첫 서양인의 하나다.  그는 1982년 라이프치히에서 펴낸 <조선기행>에서 '우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에서  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키가 서로 틀리지만 나무로 만든 막대기가  여러 개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과연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가!  자세히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이었으며, 사원 혹은 기도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호할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행길 가의 땅바닥에 그냥 박아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 의식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 가량 되는  통나무 토막에 하느라고  하였다는 장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 위쪽 끝에다가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기분 나쁘게 찡그린 얼굴을 새긴 것이 곧 모든 장식이다.  오페르트가 장승에게서 '우상'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양인들이 제3세계 문화를  처음 대할 때, 문화적 상징물을 대개 '우상'으로 보는 탓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들어온 선교사 게일의 말을 들어보자.  당시 조선의 큰길이나 샛길에서 마주치는 장승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 무의식중에 이스라엘인들이 숭배하는 다곤, 몰록, 그모스, 발과 같은 신이나 우상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상에 관해 들었고 박물관이나 성경책을 통해 그런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상을 실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듯 장승은 외국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우리 문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우상'을 직접 본 셈이다. 성경책과 박물관에서나 보던 '우상'이 한국의 길가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감격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예외없이 '이교도의 생활풍습'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장승의 여러 가지 자리잡음
  장승은 세운 장소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기만  하다. 가장 크게는 마을과 사찰 그리고 읍성을 수호한다. 때로는 이정표 기능만을 담당하기도 한다.  장승을 단독으로 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남녀를 상징하는  2기가 마주보거나 나란히 서 있다.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에 다섯 장승이 서  있는 경우도 있어 음양오행사상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승에는 대개 기문이  씌어져 매 장승마다에 임무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축귀대장군.토지대장군.방어대장군.상원주장군.하원당장군.....
. 주종은 역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다. 장군 명칭을 뒤에 붙인 것은  용맹한 '무장적 수호신'이 마을을 지켜주리라는 기대심리 때문이 아닐까.  가장 보편적인  장승은 역시 마을장승이다.  수구신.노신.거리신.오방지신 등이 마을장승 신격에 가장 근접한 명칭일 것이다.  오가는 자리에 자리잡은 거리신으로 신의 서열에서는 아랫자리다.  장승은 비단  마을 지킴이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짐대(당간)처럼 불이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문장같이 우뚝 서서 불법을 수호한다. 예천 용문사 호법대장군.삼원대장군, 함양 벽송사의 호법대신.금호장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고을의 읍성이나 진성.병영.해창에  장승을 세워 공공의 시설을 보비하는 기능도 지닌다. 부안읍성이나 장흥 관산읍성.순창 남계리 등의 장승이 바로 그것이다. 강진 병영의  하고마을에는 병영성을 수호하기 위한 한 쌍의  벅수가 전해지면(아깝게도 1984년에 도난당함), 해미읍성에는 동서남북에 미륵장승이 전해지고 있다.  부안읍성에는 현재 동문과 서문에 각각 당산이  전해진다. 읍성 중앙에는 성황산이 자리잡고 동문에는  돌짐대가 1기 서 있다. 보조  하위신으로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 있는데, 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바로 장승이다. 서문 안에는 주신인 돌짐대 1기와 그의 부인이 서  있고,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장승이 서  있다. 명문으로 미루어보아 1689년(숙종  1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1795)를 보면, "후자는 이정을 표시하기 위하여 흙, 돌을 쌓은 것으로  옛날의 장정, 단정이던 것이 오늘날 와전되어  장승, 장생, 장성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같이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던 장승을 이름하여 노표장승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노표장승은 전해지지 않으며 간혹  목장승 하반신에 '한양 50리, 과천 30리'하는 식으로 리수를 기록한 장승이 전해질 뿐이다.  이들 각각의 장승을 자리매김하다 보면 어떤 것이 먼저 발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가령 사찰장승이 먼저인가, 아니면  마을장승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개의 민속문화가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어떤 물적 증거는 없다. 다만 나는
마을장승이 먼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민간에서 널리 존속되어온  장승이 무불융합을 거치면서 사찰에  수용된 것이 아닐까. 물론 아직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장승문화의 르네상스
  '험악한' 얼굴, 차라리  친근하고 우스꽝스런 얼굴, 위엄과 권위를 지키려는  안간힘, 왠지 웃음기가  배어 나오는 표정, 시집 장가 가는  총각 처녀의 옷차림새, 위압감을 줄 정도로 험상궂은 표정, 우락부락한  거인, 비쩍 마른 놈, 오동통하다 못해 비만에 걸린  놈, 왕방울처럼 불거져 나온 눈망울, 어울리지  않는 관모, 기괴하게 찢어지거나 배꼽을 잡도록 웃기는 모습으로 벌어진 입...... 이들 천태만상의 차림새는 우리 민중의 얼굴 그대로가 아닐까.  한평생 노동에 찌들면서도 그 웃음과 낙관적 세계관을 잃지 않았던 민중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변강쇠  타령에서처럼 기어히 엄벌을 내리는 데서 민중적 수호신의 권위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장승  얼굴에 그러한 민중의 표정이 담기게 되었을까.  그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16세기  임진.병자 양난을 겪으면서 민중은 전례 없던 전쟁의 참회를 겪어야  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은  무수한 민란을 야기하였으며 각성된 민중은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들의 사회정치의식을 조형물로서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민중의  수호신상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  장승이 대거 출현하였고 동시에 민중 스스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순박한 장승들을 같이 세웠다.  물론 이들 장승들은 전래의 장승 모체로부터  변화.발전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선 후기에 이룩된 장승  창작의 치열성은 가히 '장승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지칭할 만하였다.  운흥사지 입구에는 1719년에 세웠다는 명문을 새긴 석장승이 전해져 사찰장승의 연도를 분명히  해준다. 무안의 법천사, 총지사, 월출산  도갑사, 상주 남장사, 합천 북방사의 장승들도 모두  조형미가 뛰어난 조선 후기의 사찰장승으로 알려진다. 이들 사찰장승은 석장승이 다수이며 조형감각이 뛰어나다.  미술사가 유흥준 교수(영남대)는 실상사 돌장승에서 위엄과 권위의 형상을, 남원 운봉 돌장승에서는 민중의 자화상을, 부안의  당산과 불회사 장승에서는 전형적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형상을, 진도 덕병리 장승에서는 미소년의 모습을, 광주 엄미리 장승과 선운사 장승에서는 나무장승의 단순미와 자연미를 발견했노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장승문화의 르네상스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인가?

 

 나무와 돌은 느낌부터 다르다
  민중적 조형물로서 장승을  바라볼 때, 재질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목장승은 중부지역에 많고 석장승은 영호남과 제주도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 점도 일률적이지는 않다.  목장승은 10년을 넘기지 못하므로  매년 혹은 몇 년에  한 번 씩 새 장승을  세워야 한다. 이전에 세웠던 장승은 비바람에  썩어 무너져내리고 새롭게 단장한  장승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 목장승은 매번  새롭게 창조되는 탓으로 전대의 장승과는 조금씩 다르게 변해왔다.  장승은 그것을 빚는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취향, 조형 솜씨의  차이에 따라서 대단히 불규칙하게 변해왔다. 오늘날 전해지는 경기도  광주의 엄미리 장승은 목장승의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아주 형편없는 조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수명이 오래 가기로는 역시 석장승이다. 특히  전라도나 경상도에 산재하는 벅수라고 불리는 석장승들은 그 뛰어난 조형성과 유구한 역사성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바로 이들 석장승에서  조선 후기의 장승이라고  정확히 지칭할 수 있는 증거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돌이  지닌 특유의 질감과 내구성, 세월이 지나면서 풍상에 씻긴  형체, 연륜이 쌓인 이끼에서 완숙해질 대로  완숙해진 장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솜씨  좋은 장인은 바로 당대 민중의 모습 그대로였다.  광주 성촌마을의  돌벅수 중에 할아버지벅수는 머리에  탕관을 쓰고 타원형의 눈, 세모난 코, 한일자로 다문 입, 굽은 팔자형 수염 등이 근엄하기만 하다. 곡성 가곡리 여자장승의 경우 어여머리 형태에 삼산관을 쓴 것처럼 세 부분을 돋음새김으로 표현하여 이채롭기만 하다. 반면에 남자장승은  당당한 장부의 기상이 엿보인다. 곡성 탑동의  대장군장승은 휘어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아주 해학적인 표정이  재미있다. 무안 법천사  석장승은 목 부분만  뚜렷하게 파내어 상하를 구분하는 조각수법을  썼다. 얼굴의 눈, 코, 입 등은  주위만을 파내어 사실적인 입체감이 부족한 편이나  해학과 기괴스러움을 아울러 갖춘 벽사의 상징성이 잘 표현된 장생이다.  장승의 생김새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체구, 머리와 이마, 눈매, 귀, 코,
입, 이, 표정, 턱, 수염, 어깨,  옷 등을 일일이 눈여겨보아야 한다. 웃는 얼굴이면서도 근엄하고  성이 나 있으면서도 노기를  숨기고, 때로는 볼이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고 있는 지혜로움을 담고 있다.  도깨비를 닮았거나 부처님, 문무관, 시골노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등 천태만상이다. 남장승과 여장승을  구분하여 신랑과 각시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들 장승의 민중적 조형성은 바로 민중적 미의식의 압권으로 그 자체가 '토종 조선사람'의 얼굴이자 시대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각시장승과 신랑장승의 혼례식
  장승을 어떻게 깎아 세우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써둔 짧은 글을  소개해 주곤 한다. 몇 년 전 '어린이 민족문화 그림책 솔거나라'를 기획하면서 <장승>이란 그림책을 낼 때 써둔 밑글이다.  사람들이 톱을 들고 숲으로 왔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나무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서 어느 나무를 선택할까 고민했답니다. 그때였어요. 젊은이 한 사람이 총각참나무를 톡 건드리며 말했어요.  "여기 있군그려.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긴 나무로군. 요놈을 베어다가 장승을 만드세." 총각참나무는 눈물이 와락 쏟아졌어요.  "이제는 영낙없이 끌려가는구나. 아! 이왕 장승 재목감으로서 선택되기 했지만 나의 각시는 누가 될까." 요행히 총각참나무의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아주 어여쁜 참나무가 각시참나무로 결정되었답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기 시작했어요. 참나무는 아팠지만  꾹 참아야 했어요. 숲  속의 친구들이 보는데 눈물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사람들은 참나무를 베내어 팔과 다리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내서 말끔하게 만들어 지게에 지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답니다.  "모셔가세 모셔가세, 천하대장군 모셔가세,  우리마을 지켜주실, 천하대장군 모셔가세." 노랫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숲 속의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두 그루 참나
무와 헤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답니다. 산 아래에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였답니다.  베어온 참나무를 마당에 뉘여놓고  마을 목수가 능숙한 솜씨로 끌과 망치를 들고 깎아내기  시작했어요. 각시참나무는 비명을 질렀어요. 신랑참나무가 달래기 시작했지요.  "조금만 참아. 장승어른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잖니."  하지만 총각참나무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나무를 깎는 일이  거의 끝났어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서서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어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부디  궂은 일 물리쳐 주시고 오곡이 풍성하길  비옵니다."  숲 속의 참나무가  신랑장승과 각시장승이 된 것이지요.  마을풍물패들이 굿을 치고 아주머니들은 온갖 음식을  차려들고 장승을 모시고서 동구 밖으로 나갔답니다.  길가에 신랑과 각시를  세워놓고 결혼식이 시작되었어요. 몸에는  짚으로 만든 금줄을 치고  한지도 걸쳐놓았지요. 신랑 각시에게  절을 하고 두 손  모아 여러 번 빌고 나자 결혼식은 곧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차려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장승 앞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푸짐하게 펼쳤답니다. 장승에게는 북어대가리를 매달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마을로 되돌아갔지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고......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답니다. 사람들은 해마다 나무를 베어다가 장승제를  올려주었습니다. 장승동네 식구들도 차츰차츰 늘어나서 아예 장승백이란  지명도 생겨났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장승백이 장승님께 두 손  모아 빌면서 아무 탈 없이 해  달라고 빌었고, 장승들도 마을을 잘 지켜주었답니다.  이렇게 장승제를 통해서 세운  장승은 사계절 비바람을 맞으면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일개 나무에 지나지 않던  살아 있는 자연물이 사람의 손을거쳐서 하루 아침에 마을의 수호신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리 선조의 소박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장승을 지명수배하며  유구한 역사 속에서 민중의  생활과 더불어 호흡해온 장승은 어디로 떠나갔는가. 많은 장승들이 일찍이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고향을 떠나온 장승은 우선  음식점이나 민속촌 입구에 서서 손님을 마중하는 관광장승으로 새 살림을  차렸다. 아니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이정표를  겸하여 고갯마루 같은 길목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들 장승은 거개가 신랑  각시를 나타낸 형상으로, 사모관대에 연지를 찍은 모습이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것은 모두  '못난이장승'이라는 점이다. 어떤 것은 달려가서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조형성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다. 국가기관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아예  돌로 깎아 세운 장승도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데 '장승제작 금지령'을 내려야  할 판이다. 단순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미적 감각이 민중적 창조력은 어디로 갔는가.  더 큰 수난은 장승들이 대거 도둑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유보다는 개인소유가  앞서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앞장 서고, 정신보다는 물질이 승한 시대에 진정한 문화유산을 이어  나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아닐까.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불멸의 진리를 우리 시대는 망각하고 말았다.  반가운 소식도 있다.  일부에서나마 장승이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을장승이 이제는 학교  같은 사회집단을 지켜주는 장승으로  새 살림을 차린 것이다. '민족통일대장군,  민족해방여장군' 따위의  시국장승에서 장승문화의 미래를 읽어본다.  그러나 세련미는  넘치지만 왠지 민중적 조형성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음은 웬일일까.  보설 : 잃어버린 장승을 찾습니다.  이 글에 덧붙여  나는 잃어버린 장승을 전국에  '지명수배'하고자 한다. 주위에서 비슷한 장승이  확인되면 즉각 연락을 기다린다. 우리들 공동체의  희망이 되돌아 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잃어버린 장승을 되찾아야만 하지  않을까(사진 황헌만).  지명수배1. 도갑사 장승  도갑사를 지키던 도갑사의  호법장승. 길목에 한쌍이 서  있었는데 1989년무렵에 사라졌다. 조선 후기 호남  일대에 널리 세워진 전형적인 돌장승이다(전남 영암군 월출산).
  지명수배2. 덕병리 장승  마을의 안녕을 빌던 장승으로 해마다 장승제를  지내고 소뼈를 목에 매달았다. 역신과 악귀를 쫓는데 효험이 높았다고 한다(전남 진도군 덕병리).  지명수배3. 율촌리 할아버지 장승  1991년 무렵 밤 사이에 돌장승이 없어졌다.  골동상품이 다녀간 후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장승만 홀로 둘 수 없어 다시  할아버지 장승을 세웠다(전남 곡성군 오산면 율촌리).

 

 황두와 두레, '노동의 비밀'
  "황두가 무엇인가."  가끔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러나 아는 학생이 없다.  "두레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그래도 몇몇이 어눌하게나마 답변한다.  황두와 두레, 모두 일찍이 사라진 풍습들이다.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는 물론이고 어른들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더욱이 황두는 학자들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우리 문화에 대한 우리의 지적 수준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삼천리 건갈이벌판의 황두  1950년대 후반의 일이다.  북한에서 사회주의 협동농장을 만들던 시절,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의 몇몇 민속학자들은 사라져가는 전래풍습을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민속학 연구실장이었던 황철산은 청천강 건갈이 지역을 답사했다.그는 문득 재미있는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왜 남쪽은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북쪽의 그곳은 넓은 벌판인데도 건답직파로  농사 짓고 있을까. 민속학자로서 의심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상부상조하는 두레로 농사를 짓는데 그곳은 '황두'라는 이름의 별난 조직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쪽의 청천강  인근에서는 여전히 모를 내는 이앙법 대신 마른 땅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일명 건답직파법으로 농사 짓고 있었다. 안주.문덕.숙천.평원을 포괄하는 넓디 넓은 '열두삼천리벌'이  바로 그곳이다. 궁금증을 가지면서 조사를 거듭한 끝에 황두의 실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황두는 마을마다 이삼십 명의 농민들이 '군대'같이 엄격한 작업 단위를 이루어 김매기를 수행한 조직이었다. 농사 경험이 많은  황두꾼 중에서 작업반장격인 계
수, 부계수도 뽑았다.  새벽에 신호용 나팔인 박주라 소리를 듣고 한자리에 모여 계수의 점검을 받고 그날 작업에 들어갔다.  워낙 바삐 일을 했기  때문에 빨리 달리는 사람을 두고, "황두꾼 같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였다. 황두꾼들의  소지품은 호미.늬역(짚으로 엮은 비옷).조삿갓(갈로 엮은 삿갓).겨블(담배불) 따위였다.  황두의 제초작업은 두레와 달랐다. 그 작업은  맨땅에서 하기 때문에 작업강도가 꽤 높았다. 그리하여 소를 이용한 제초도구인 '칼거'가 등장하였고, 다행히 중복 무렵에 비가  와서 물을 대게 되면 '물후치질'을 하였다.  황두꾼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호미매기 노래(평안북도 박천군 형팔리)를 들어보자.
  빙혈냉수 길어다가 시원하게 먹자구나  에-헤이야 에-헤이야 호-호메가 논다  어떤 사람 팔자 좋아 금의호식 잘 먹고 잘 쓰는데
  이 녀석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곤궁한고  에-헤이야 에-헤이야 호-호메가 논다
  황두는 건갈이농법에 아주 적합한 조직이었다. 마른  땅에 그대로 볍씨를 뿌려 농사 짓는 건갈이는 일찍이  조선 전기 농서 <농사직설>에서 이미 향명으로 건삶이로 불린 농법이다. 그러나 모를 옮기는  이앙법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에는 남부지역의 경우 대부분 물삶이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다만 서북지방은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라 이앙법이 부적합하여 여전히 건갈이를 하고 있었다. 이앙법이 확산된 남부지방에서 두레가 새롭게 발달하는 동안, 전통적인 건갈이지역에서는 여전히 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북한학자들이 부지런히 현장을 뒤진 덕분에 황두가 향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의 향도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황두에 흔적을 남긴 셈이다. 향도 - 향두 - 황두. 이 같은 음운학적 발전도식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향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향도는 또한 무엇인가.  향도는 이미  삼국 시대에도 널리  존재했다. 신라 지배층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귀족적이며  준국가적인 화랑제도를 만들었다. 향도는  바로 화랑집단의 조직으로 나타났으니, 용화향도 따위가 그것이다.
  고려에 들어와서 향촌사회는 불교를  모시는 제의공동체인 향도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  자연촌이 성장하여 독립하게 됨으로써 군을 여러 개씩 묶은 거군적  규모의 공동체 모습을 보이던 향도는 변질되었다.  또한 향도 공동체를 낳은 불교의 쇠퇴도 향도의 변화를 이끈 요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향도는 여전히  마을공동체의 성격 속에서 민중의 삶과 더불어있었다. 성현이 <용재총화>에 쓴  모습 그대로였다. 조선 초기 지배권력은 민중의 생활조직을 보다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략으로서 '향약'을 강구한다. 그에 따라 향도는  다시 한 번 변질된다. 그러나 마을마다  '향도결계'하여 늘 상부상조하는 생활기풍은 그대로 이어졌다. 물론 지역에  따라 향도가 변질되거나 없어지는 정도가 달랐다. <명종실록>권 29를 보자.  이항인들이 향약을 맺는 것을 시속으로 향도라 일컫는다.  새롭게 실시하는  향약마저 향도라고 부를 정도로  향도는 당대까지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차츰 향도는 변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향도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중의  하나가 앞에서 살펴본 '상두꾼으로의 길'이었다. 또 다른 길도 있었으니, '노동조직으로의 길'이 그것이다.  그 동안 역사책에서  향도를 불교조직으로만 단순화시켜 다뤄왔다.  그러나 신라나 고려 시대의 향도는 함께 노동했던 노동조직에 대한 명확한 명칭이 전해지는 문헌은 없지만 향도의  성격이 단순한 상부상조 조직으로서만이 아니라 공동노동 조직으로도  병존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것은 향도가  황두로 변형해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황두는  단순한 노동조직이 아니라 향도에 뿌리를 둔 유구한 역사성을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두레를 살펴보자.

 

두레, 공동체문화의 결정
  장목을 해 꽂은  깃대에는 기폭이 펄펄 날리었다. 그들은 정자나무  밑에다 농기를 내꽂고 우선 한바탕 뛰고 놀아보았다...... 

저녁 때, 마을사람은 집집이 저녁을 치르고 나왔다. 여자들도 싸리문 밖으로 바람을 쐬러 하나 둘씩 나온다. 한낮에 쩔쩔  끓던 불볕은 저녁이 되어도  땅이 식지 않았다. 북소리가  둥둥 울리자 그들은 신이 나서  모두 정자나무 밑으로 몰키웠다. 풍물이 제각기  소리를 내니 마을에는 별안간 명절  기분이 떠돌았다. 어린아이들은 함성을  올리며 돌아다닌다......  깽무갱깽, 깽무갱깽, 갱무깽, 깽무갱, 깽무갱깽......  아침해가 뿌주름이 솟을 무렵에  이슬은 함함하게 풀끝에 맺히고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내 건너 저편으로 불어온다. 깃발이 펄펄 날린다. 장잎을 내뽑은 벼포기 위로는 일면으로 퍼렇게 푸른 물결이 굼실거린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꽁무니에는  일제히 호미를 찼다. 쇠코잠방이 위에 등걸이만 걸치고  허벅다리까지 드러난 장단지가 개구리를 잡아먹은 뱀의 배처럼 뿔쑥 나온 다리로 이슬 엉긴  논두렁 사이를 일렬로 늘어서 걸어간다. 그 중에는 희준이의 하얀 다리도 섞여서 따라갔다.  두레가 난 뒤로 마을사람들의 기분이 통일되었다.
 

한여름 농촌의 두레패 김매기.
  일제 시대 식민지 농촌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한 민촌 이기영의 소설 <고향>의 한 대목이다. 소설에서 두레는 식민지 농민을 단결시키는 '전통적인 무기'이다. "두레가 난 뒤로 마을사람들의  기분이 통일되었다"는 대목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레는 농사일의 어려움을 상부상조로 극복했던 가장 전형적인 공동체 조직이다. 두레박.용두레.두레길쌈 따위에서 보이듯 두레 자체가 고유의 우리말이며, 고대사회에서도 이미 공동노동은  존재했다. 그리하여 후대에 생동감  넘치는 노동공동체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두레는 농사.농계.농상계.농청.계청.목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감에 따라서 초벌두레.두벌두레.만물두레  등의 농사두레뿐 아니라  꼴을 베는 풀베기두레, 여자들만으로 조직되는 길쌈두레도 있었다.  두레는 초여름에 조직을  정비한다. 모내기가 끝나면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서 두레를 이끌어 나갈 일꾼을 뽑았다.  좌상, 영좌, 총각대방 등의 지도자들이 뽑혀 김매기를 이끌게 된다. 사실상 집중적으로  김을 매는 여름은 매우 더운 철이다. 게다가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두레꾼들은 풍물을 꾸려서  악기를 치고 신명을 잡으며 논두렁으로 들어갔다.  나는 두레를 모르고는 농민문화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음력 2월 1일 머슴날(혹은 하아드렛날) 농군들의 볏가리 쓰러뜨리기 축제, 호미를 모두어 일꾼들의 의식을 거행하는 호미모둠,  머리에 지고 온 참을 먹는 공동식사의 한마당, 칠월 칠석날 두레잔치를 벌이면서 결산하는 호미씻이(혹은 호미걸이), 두레의 풍물패가 벌이는 합굿, 두레패들끼리  선후를 정하여 인사를 하는 기세배, 있는 힘을 다하여 치고받고 싸우는 두레싸움......  구한말에 한 외국인 선교사는  "한국의 농민들은 일은 하지 않고 놀이와 술로 시간을 보낸다"고 비웃었는데 이는  우리 농민의 세계를 전혀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닌가.

 

두레, 모내기가 가져다준 늦자식
  두레를 낳은 장본인은 모내기였다.  모내기는 17세기 후반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농사직설>에 '삽앙'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모내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내기철만 되면 가뭄이 드는  특유의 몬순기후 탓에 모를 내지 못하여 농사를 작폐하는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모내기를 국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렇게 금지했는데도 모내기가  소출이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완강히 모내기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쯤에 이르면 남도 전역은  거의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는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때쯤이면 보리도 패여서  배고픔을 달래주게 된다. 모내기철과  보리 수확이 맞물려서 일년 중 가장  분주한 농번기가 찾아든다. 그래서 두레 같은 강력한 노동조직이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일제 시대에 들어올 때까지도 두레는 북쪽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북쪽에서는 여전히 황두로 농사를 짓고 있었으나 두레의 북상으로 말미암아 차츰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 황두는  일부 지역에만 남았다. 나는 늘 이들 황두와 두레의 교체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곤 한다.  '신진세력'인 두레가  세력을 팽창하면서, '구세력'인  황두를 밀어냈다.  두레는 중남부지방을 장악하였고, 황두는  건갈이지역에서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황두는 분명 '향도의  숨겨둔 자식'이었다. 나중에야  황두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향도.두레.황두의 친족관계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두레는 황두보다 늦게  태어났다. 따라서 두레는 '향도의  늦게 본 자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레가 먼저 태어난  형님뻘인 황두를 밀어내고 남도땅을 접수한 것이다. 두레는 서서히  북상하여 북쪽의 논농사지역에서는 대개  두레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후시기까지만 해도  전해지던 두레는 제초제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다만 풍물패의 풍물굿에만  일부 '유전자'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노동의 비밀, 일과 놀이의 화두
  돌이켜보면, 두레는 1970-1980년대 민중연희운동의 화두이기도 했다. 수미일관하게 '일과 놀이'를 추구했던 놀이패들은 당시대의 이상향으로 '대동세상'을  꿈꾸었으며, 두레에  천착했다. '공동체사회, 공동체문화,  공동체정신' 따위의  말들이 자주 거론되는 시대였다. 또한  두레패.두레꾼.두레조직.뜬두레.두레방.두레정신.한두레.두레농장 등의 '두레가족'이 태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1980년대의 민중판화운동을 살펴보면 유난히도 악기를 치는 그림이 많다. 작고한 오윤이 남긴 그림에도 대동세상을 이룰 것만 같은 무리들이 등장, 대동의 춤을 연출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1970-80년대에 즐겨 읽던 시몬느 베이유의 수상집(이화여대 민희식 교수의 손을 거쳐  1977년에 나온 작은 문고본) <사랑과 죽음의 팡세>를 다시 꺼내서 먼지를 털고 '노동의 신비'란 글을 읽었다.  플라톤은 한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이나  스포츠에는 익숙했지만 노동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주인이 노예의 노예라는 것은, 노예가 주인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 역사를 끌어간 주인은 바로 농민들 자신이었다. 1909년 파리에서 태어나 아주 어린 나이에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일생을 낡은 사회와  '레지스탕스'를 벌였던  시몬느 베이유. '아는 것'과 '온 정신을 기울여서 아는 것' 사이에서 절망적 거리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그 거리를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 그녀는 나에게 진정한 주인과 노예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주었다.
  누구 하나 시대의 주인공들인  농민들이 조직했던 황두나 두레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레와 향도, 황두, 심지어  상여소리를 내면서 장례를 치르는 상두꾼까지도 하나의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 이제  그 속에 숨은  '노동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겉으로 보았을 때,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풍습들에서 짜임새  있는 연결고리가 밝혀진다면  우리 문화의 속알맹이를 벗겨내는데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들은 역사적으로 명멸해간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독립적으로 떼내어서 사고하려는 잘못된 학문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우리 문화를 탐구할  때 사람들은 곧잘 불상의 계보나  탑의 계통 같은 귀족적인  유형문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민중의 생활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생활양식들, 더군다나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황두나 두레 같은 민중조직에 대해서는 무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심하다.  나는 우리 문화에 대한 탐구가 깊어질수록 이들 민중의 생활사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고조될  것을 굳게 믿는다. '15세기의 농민과  황두', '16세기의 농민과 두레' 따위의 주제는 '1980년대의 도시민과 직장생활'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을까.  두레와 황두.향도의  관계에서 그 연결고리의  끈을 찾다 보니 그것들이  결코 독립된 개별현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노동과 신앙, 놀이 따위를 모두 '축제화'하여 종합적으로 묶는 힘을 지녔던 농민들의 숨은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두레와 황두,  향도는 몸통은 하나이되 팔과  다리가 각각인 셈이다. 향도라는 하나의 몸통에서 가지가 갈라진 것이다. 장구한  세월을 겪으면서도 민중의 생활 속에 살아 남아 그 힘을 보여주던 이 '혈연가족'!  남북학자들의 공통된 노력이 없었다면 그  '혈연가족'마저 밝힐 수 있었겠는가. 얼굴도 모르는 황철산 씨에게 감사할 뿐이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 구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바라본 구들
  북아시아에 관심을  지니고 있던 니콜라스 위트센(1641-1717년)이라는  사람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인 위트센은 1667년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타르타리아(북아시아)에 관한 지리적인 식견을 넓혔다.  그는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를 출간했는데  거기서 한국을  다루었다. 그는 1690년까지 유럽에  알려졌던 한국의 기록을  거의 섭렵한 듯하다.  특히 온돌에 관한 기록도 남겼다.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2피트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17세기 말엽,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 나라의 구들에 관한 초기 기록이다.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구들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의 카톨릭 전도사 달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1593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큰 박해가 끝나던 1871년까지 280여 년  간의 교회사를 <조선교회사>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187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했다. 교회사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풍물도  세세히 기록하였는데, 거기에 구들이  등장한다. 다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이지만 뿌르띠에라는 사람의 편지를 발췌한 대목을 들어보자.  중국.인도와 비교할 때 방바닥을 덮고 있는 자리가 꽤 보잘것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약간 두꺼운 짚으로 흙을  덮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종이로 흙벽을 바르고  유럽의 마루와 타일처럼 두꺼운 기름종이로 방바닥을 바릅니다......  벽난로가 없는데  어떻게 자리 위에서 불을  피울까요? 벽난로를 대신할 것이 준비돼 있습니다. 집 바깥에  옆으로 부엌 아궁이가 있고, 방바닥 밑을 통과하는 여러 고랑이 아궁이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고랑이나 파이프는 커다란 돌로 덮여 있고,  그 틈새와 들쭉날쭉한 곳은  반죽한 흙으로 메워 놓았는데  그 바로 위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방고래를 지나서 집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와 열은 희한하게도 당신에게 온기를 전해주는데  그 열은 돌 두께로 말미암아 꽤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보시다시피 조선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전에  난방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연기가 방바닥 틈새로 뭉개뭉개 피어오르지만,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 세상에서 결점  없는 것이 있나요?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말투이기는 해도 구들에 대해 비교적 꼼꼼하게 적어놓았으며, 우리의 구들이 자기들 난방법보다 빨랐음을 실토하고 있다.  주한공사를 지냈던 알렌도 <조선견문기>에서  구들을 관찰하고 있다. "방바닥은 갈색 대리석처럼 보이는 호화로운 기름종이로 덮여 있다"고 상류계급의  온돌방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양반사회의 문화수준을 엿보게 해준다.  또한 소작인이나 품팔이 노동자의 오막살이에 있는 구들도 짙은 갈색의 기름종이로 덮여 있으며, 이  점이 일본이나 중국 같은  이웃나라보다 훌륭하다고 하였다. 그리피스는 1882년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구들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똑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  위를 벽돌이나 구들로 덮는다. 그래서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 방 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불을  때지 않으면 방이 차갑게 식고 밑불을 죽이면 열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애로가 있다.  사람을 굽는다? 하긴 뜨거운  장판은 사람도 구울 정도로 고온이니 이런 표현이 나옴직하다. 서양인들이 우리의 구들문화를 모두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 그들에게 그토록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만큼 우리의 구들문화가 돋보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너무도 흔하면 귀한  줄 모르는 법일까. 정작 온돌의 주인공인  우리들은 무덤덤하게 지낼  뿐, 온돌문화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기하고 있다. 연탄이 사라지고 아파트에서 보일러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그나마 아궁이마저 사라져서 온돌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온돌보다는 구들을  나는 이 글에서 온돌을 피하고 애써 구들이란  말을 쓰고 있다. 온돌이 한자말이라면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보편적으로 온돌이라고 쓰는 것을 나무랄 일이 아니겠지만  데워서 난방한다는 그 뜻이 좋아서 나는 구
들이란 말을 굳이 쓰고 있다.  구들에 관한 말 가운데 사라진 것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유형에 따라 구분하는 선자구들.쇠구들.토판구들, 불아궁  안쪽에서 연료가 타는 불목, 부뚜막이 없이 불만 피우는 함실아궁,  불기가 빠져나가는 구들고래,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치는 두둑, 편편하게 덮은 구들장,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내어 연기가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도록 파낸  개자리, 구들고래가 개자리에 접속되는 곳인 바람막이...... 이 모든 것이 거의  사라진 구들문화의 토속어들이 아닌가! 구들은 가장  원초적인 문화유산이면서도 희소성이  없기에 '화끈하게'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들만큼 민족생활양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문화유산이 또 있을까.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물었다.  "우리 나라 의.식.주 풍습에서 무엇을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꼽습니까?"  나는 늘 똑같은 답변을 한다. 의생활에서는 백의풍습, 식생활에서는 된장 같은 장풍습, 주생활에서는 구들을 꼽는다.  백의, 된장, 구들이야말로 우리 민족 의식주 생활의 첫머리를 장식하지 않을까. 흰옷이 원색문화에 떠밀려 차츰 사라지고, 된장도 입맛 까다로운 어린 아이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지만 구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구들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풍습 가운데서 현대까지 적응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데 있다. 즉 구들의 힘은 그 '장기지속성'에 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왔으며, 초현대적  생활과 어울려 21세기로 온전히 넘어가고 있는 풍습이 또  있을까? 땔감용구들, 연탄구들, 보일러와 전기를 쓰는 개량구들을 거쳐서 '온돌침대'마저  등장할 정도로 전통의 지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탓에 왠지 한문투의  온돌보다는 구들이란 말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싶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
  펄펄 끓는 아랫목에서 산모가 몸을 푸는 곳,  추운 겨울날 할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자식에게  대를 이어가면서 구전의 역사가 펼쳐졌던 '씌어지지  아니한 역사'가 저술되던 '구술문화'의 현장 그리고  사람이 마지막 운명을 다할 때 자손들의 손을 마지막으로 쥐던 곳...... 그러한즉 구들을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최초로  지은 집은 신석기 시대에  땅을 파고 만든 움집이었다. 움집의 갖춤새는 매우 단순하였다. 자갈이나  모래, 진흙 등을 깐 맨바닥이었다. 그 움바닥 중심부에는 예외없이 화덕을 설치하였다.  대체로 바닥을 일정한 깊이로 파고 그 주위에 강돌이나 진흙으로 둥글게 테두리를 만든 것이었다. 화덕을 방 안에 설치한  탓으로 연기를 뽑기 위해 천장에는 구멍도 뚫었을 것이다. 이때는 아직 구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의  동이전> 읍루조에도 이르기를, "기후가  추워서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안에서 사는데 깊을수록 귀하고 큰 집은 아홉 계단이나 내려간다"고 하였다. 추위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기에 움집은 후대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지상으로 솟아오른 집다운 집이  출현한다. 움집에서 화덕 따위로 난방을 하던  수준으로는 지상가옥의 난방을 감당할 재간이 없다.  더욱이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는 만주  벌판에서 나라를 건설해가던 선조들은 다양한 구들을 개발하게 된다.  북한 고고학계는 북한의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평북 영변군 세죽리, 평남 북창군 대평리 등지에서 구들의 초기 형태를 다수  발견했다(<고고민속> 1966년 4호). 판돌을 세워서 이어 대고 그 위에 판돌을 덮은 좁고 긴  구들이었다. 전체를 데우지 못하고 방바닥 한구석에 작게 독립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평리 유적 3호 집자리의 구들은 고래 너비가 다른 고래보다 근 3배나 되어 구들이 제법 넓게 발전하였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문헌상으로 구들을  처음으로 암시한 <신당서>와  <구당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고 하였다. 갱은 무엇일까.  갱은 중국사람들이 캉이라  부르는 난방시설이다. 한국 민속학사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역사민속학자  남창 손진태 선생은 그의 '온돌고'에서 캉과 구들의 기원이 같다고  하였다. 구들이 바닥 전부를 데운다면 캉은  실내의 한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분만 데운다.  구들이 전면적인 방바닥 난방이라면, 캉은 벽 일부만 난방하는 형식이므로 페치카와 구들의 중간 성격을 띤다고 할까.  남창 선생은 간단한 부뚜막에서  실내 일면 캉으로, 일면 캉에서 삼면 캉으로, 삼면 캉에서 전면 구들로 발달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캉이

 

중국 북부 만주
에서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구들의 고구려 기원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고구려의 구들이 궁금하거들랑 고구려  벽화무덤 속으로 들어가보라. 고국원왕릉과 약수리 벽화무덤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부엌과 긴 고래온돌을 그린 그림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으며,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궁이에서 지핀 불길은 긴  고래구들을 따라 굴뚝으로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굴뚝도 예전에는 없던 풍습이다.  그런데 고구려 벽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 중국식의 입식문화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회는 입식문화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회는 입식문화단계였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건축학자 강영환 교수(울산대)는 의자에 앉는 입식문화, 책상다리로 앉는 구들문화가 혼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구들은 있으되 본격적으로 발전한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벽화무덤의 주인공들인 귀족들과 달리 고구려의 민중은  '돈이 덜 드는 난방방식'인 구들을  선택하였음이 분명하다. <신당서>와 <구당서>  기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구들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귀족문화는 '신발 신는' 입식과 '신발 벗는' 좌식생활이 병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본격적인  구들문화의 창시자를 '고구려의 민중'이라고 결론 맺고자 한. 우리들이  누워 잠자는 구들에는 바로 고구려 민중의  강골차면서도 따스한 숨결이 서려 있는 셈이다.
 

백제나 신라 쪽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875-886년)대에는 서라벌에 기와집이  줄줄이 있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 그을음을 피하려고  숯으로 난방을 한 것은 구들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고상식 주거양식으로서 마루가  중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내려와 고려  시대의 구들문화를 살펴봄으로써 하나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구들과 마루가 움직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1123년)에 이르기를, 귀족들은 중국과 비슷하게 낮은 평상생활을 하여 아무 불편이 없었으며 전혀 외국에 온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흙침상으로,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하였다. 여전히 구들이 민중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자의 <보한집>을 보면  흥미를 끄는 기사가 나온다.  고려의 고승으로 이인로.이규보 등과 교류하였으며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각훈에 관한 대목인데 구들풍습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행자가 일찍이 겨울에 자리 하나를 펴고 앉아 승복 한 벌을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그 옷자락 속에는 서캐라곤 없었다. 얼음장  같은 구들방에 앉아 있어도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도를  배우고자 하는 후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곡진하게 일러주었다.  한때는 날씨가 추워 얼어죽을까 염려해서 그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자를 보내어 급히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했다. 밖에 나갔던  행자가 들어와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없이 천천히 방을 나가 자갈을 주워서는 아궁이를 막아버리고 회를 이겨서 틈을 바르고는  다시 자리 위에 앉아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다시는 사람을 보내어 방을 데우게 하지 않았다.  평북 삭주지역의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북부지역은 지금 보는 온돌과 거의 같은 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 고려 시대의 중부지역은 어땠을까.  문경의 원터 유적은 구들 남하과정을 아는  중요한 단서이다. 일군의 학자들이 1977년 문경  새재의 제1관문 안에 있는  원터를 발굴하다가 구들고래를 발견했다. 알맞은 크기의  산돌과 개울돌로 쌓은 고래가 고려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으로 구들이 이미 소백산맥의 남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신영훈 선생은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어 사용했는지, 아니면 제주도처럼 서울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관아 건물에만 설치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확정적인 견해표명은 유보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구들문화는 여전히 북쪽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들은 조선 전기에 들어와 서서히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말엽, 고득종의 <홍화각중수기>에는 "구들을 서쪽 방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은 아궁이와 구들 없이  맨바닥에서 잔다"고 하였다. 구들이 조금씩 퍼져 나가던 과도기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구들이 없는 곳이 여전히  많았다. 17세기 후반, 숙종조에 제주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 따르면  제주도 살림집에는  그때까지도 구들이  없었다. <숙종실록>권12(숙종 7년 9월)를  보면, 구들이 비로소 한양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경연사 벼슬을 하던 이단하가  왕에게 올린 내용이다.  근년에는 대내의 여러  방실을 판방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온돌이 점점 많아져 기인(나무를 공물로 제공하는 자)이 공물로  바치는 땔감과 숯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근년까지 마룻방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국이 본격적인 구들문화권에  들어서지 못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넓은 집에 구들이 두어 칸뿐이고 나머지는 판자를 깔았다고 하였을 정도다.  심지어 구한말 제정 러시아가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할 때 자료로 쓰기  위하여 1900년 페테르부르그에서  발간한 <한국지>에도 맨땅에서 살고 있는 민중의 생활상이 드러나 있다.  땅이 그대로 방바닥을  대신하는데 가끔 짚을 깐 경우도 있다.  바닥이 나무인 경우에는 짚으로 엮은 깔개가 바닥에 덮여 있다.  여러 문헌과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북방에서 시작된 구들문화가 남하하고 있었고, 남방에서 시작된  마루문화가 북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양자의 만남은 우리의 주거생활을 통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식 생활과 백제나 신라식 생활이 통일되는 형식이 바로 마루와 구들의 조화가 아니었을까.  마루는 끊임없이 북상을  모색하였다. 마루는 북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서울.경기 지역의 대청마루로 완벽하게 진출했다. 서울  양반집의 널찍한 대청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대청마루에  누워서 시원한 매미소리를 듣노라면 땀방울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대청마루에서 밤 늦도록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의 낭만은 또 어떤가.  한편 구들은 '호시탐탐'  남하를 꿈꾸었다. 애초에 구들은  부뚜막과 방이 구분되지 않은 미분화 상태였다. 선조들은 화덕을 개량하여 구들로 발전시켜 나갔다.부뚜막은 구들이 발전하는  단서가 되었다. 추운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근년까지도 부엌과 방의 경계가 아예 없었다. 부뚜막의  열기가 벽을 거치지 않고 방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양통집'이라  불리는 집 안에는 외양간까지 있었다. 그러나 남하를 거듭한 구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함경도같이 추운 날씨가 아니었기에 방과 부엌의  경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밑에서 올라온  마루도 중부지역에서 만났기 때문에  마루방으로 향하는 불기운을 정확히 차단시켜야 했다.  구들과 마루의 만남은 구중 궁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국가에서도 구들을 본격적으로 차용하였다. 구들과  마루의 만남은 우리식 살림집의  정형을 창조하였다. 깔끔하게 지은 조선  시대 살림집을 생각해 보자. 시원스럽게 뻗은 대청마루와 적절하게 배치된 구들,  이 두 문화가 균형을 이루게 된  역사적 만남이 드디어 실생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 시대 이래로 발전해온  민중의 문화가 궁궐에까지 침투해 들어간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덕수궁이나  창덕궁에서도 구들과 굴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민중의  저력이 민족생활사를 이끌어왔다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앉은문화, 접촉문화, 굴뚝문화
  외국여행을 하다가 몸에 한기라도 들면, "아, 구들방이 그립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몸이  찌뿌둥하면 아랫목에 '몸을 지져야'  거뜬해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영낙없는  '조선사람'이다. 침대문화가 들어왔어도 안방바닥은  여전히 장판지다. 이렇듯 동양 삼국에서도 유독 우리만 구들을 발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답변은 어렵지만, 삼한사온이 분명한 기후 조건 때문인 듯하다. 겨울의 뜨듯한 방바닥과 여름의 시원한 방바닥을 상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구들은 천천히 데워지고 서서히 식는다. 우리의 속성인  '은근과 끈기'도 바로 구들의 속성에서 나온 것 같다. 그리하여 구들은  '구들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구들은 바람과 기후  조건을 잘 따져서 아궁이와 고래구멍, 굴뚝을  배치해 연기가 나지 않고  난방이 잘 되었다. 아랫목은  낮고 윗목은 높게 구들장을 놓고, 아랫목은 두껍게 흙을 바르고  윗목은 얇게 발라 열전도율의 균형을 맞추었으니 선조들의 열관리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들의 등장.발달은 굴뚝과 부엌의 발달을 의미하였다. 굴뚝을 잘 뽑아야 연기가 잘  빠져나가고, 구들이 골고루 데워졌다.  그러나 유목민들처럼 연기가 나지 않는 말똥을 태웠던  제주도에서는 굴뚝 없는 독특한 구들도 존재했다.  벽과 분리된 부엌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생활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엌의 부뚜막에 모신 조왕신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모시는 가장 강력한 신이  되었다. 구들의 윗목에는 조상신이 자리잡고, 아랫목에는 아기를 돌보는 삼신이 자리잡았다.  일본은 습기를 피하여  다다미를 깔고 살며 방 가운데에 화덕을  둔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중국 북부 사람들은 캉을 설치한다.  우리 구들이 신발을 벗는 좌식생활임에 반하여 캉은 입식생활이다. 따라서 구들은  우리 민족만이 창조해낸 독자적 '앉은문화'인 것이다.  우리의 가구배치, 활동반경, 방의 쓰임새 등은 모두 앉은문화에 알맞게 이루어졌다. 침대와 소파가 들어왔지만 여전히 대다수 민중은 앉은문화를 선호한다. 앉은문화는 청결을  보증한다. 반짝반짝하게 콩기름  먹인 장판을 닦고  또 닦아서 윤기가 흐르도록 청결을 유지했던 우리네 살림살이였다.  먼지가 풀풀 나는 카펫문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들은 '앉은문화'와  '선문화'의 양대문화권을 구분하게  만들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 쓰는  문화로 볼 수 있겠다. 어느 책에선가 구들을 '접촉문화'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겨울철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고, 여름철 시원한 구들장에 배를 대는  식의 접촉문화가 우리의 구들문화이다.  전기밥솥이 탄생하기 전만 해도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위하여 주발에 담은 밥을 아랫목에 넣어  구들과 접촉하게 했다. 그리하여 구들과 똑같은  온도의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인생의  2/3 이상을 바로 접촉문화의 끈끈한 정서 속에서  살아온 셈이 아닌가. 앉은문화,  접촉문화, 구들문화는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들문화를 논할 때 굴뚝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우리 건축미에서 굴뚝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사람이다. 전세계 어느 민족도 이처럼 굴뚝을  아름답게 꾸민 경우는 없었다.  굴뚝의 원조도 역시 고구려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 3호분을 보면 부엌일 하는 아낙네 옆에 굴뚝그림이 선명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굴뚝을 실용적인 용도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서는  처마에 잇대어 소박한  굴뚝을 매다는 데 그쳤지만, 사찰이나 대갓집에서는 멀찍이 굴뚝을 설치하여 나름의 멋을 냈다. 실용적인 물건에서조차 멋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여유가 있으면 경복궁 아미산의 육각형 굴뚝(보물 811호)을 찾아가 보라. 원래 교태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무늬 굴뚝(보물 810호)과 더불어 굴뚝의 정상을 차지한다.

 

황토에서 올라오는 기
  지리산 반야봉 남쪽의 칠불암 아자방.  칠불암은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수행하였다는 절이며,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화상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신비의 선방이다.  아자방은 구들을 한 번 지피면 45일간 뜨겁고,  따스한 온기는 무려 백일이 간다는 불가사의한 구들이다.  전쟁통에 타버린 구들을 1982년에  다시 복원하였는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우선 아자방은 토질에서  부근과 차이가 났다. 또한 구들  밑에는 15-20센티미터 정도의 강회다짐이 있어 일종의 보온층을  형성했다. 부채살 모양으로 시작된 구들은 다시금 부채살로 모아져서 굴뚝까지 연결되었다.  지금도 봄 가을에는 일주일 정도 온기를 유지하며, 영하 10도가  넘는 한겨울에도 사나흘은 따뜻하다고 한다. 장작을  지필 때는 일곱 짐이나  되는 땔감을 세 개의  아궁이에 한꺼번에 넣고 땐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아자방을 다시 다녀왔다. 아자방을 다녀온 이유는  우리 구들문화의 앞날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아자방을 신비롭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선조들의 뛰어난 '노하우'를 계승.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구들은 국학의 연구사  초기부터 주목을 받은 주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열축적에서 뛰어난 강점을 지닌 구들을 개량 발전시켜 세계에 내놓을 문화유산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족적 생활양식을  잘 보존한 것도 아니다. 살쾡이 우는  깊은 겨울 밤, 따스한 윗목에서 화롯불 주위에 둘러앉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를 듣던 '전설의  고향'도 우리는 잃어버렸다. 1927년  정인섭 선생이 설화집 <온돌야화>를 펴냈을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구전 문학의 현장마저 텔레비전이 가로채버렸다.  바닥에 깐 돌 사이에 우수  파이프를 통하여 난방을 하는 외국의 최신식 패널히팅이 바로 우리의 구들문화와  같은 뿌리임을 볼 때, 자괴감도 느껴진다. 지그문트 그루페 같은 독일 기업은 아예 우리의 옛 구들 형식을 이용한 온수순환 난방(에어코노미)을 보급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전기구들을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김치는 '기무치'로 빼앗기고, 온돌은 '온도루'로 빼앗기는 식이다.  육군 공병장교 출신으로 구들 연구에 혼신을 쏟는 최영택이란 분이 있다. <구들>이라는 독특한 책을 낸 구들연구자인데, 구들학회를 만들었고 아예 겹구들을 놓는 '현대전자구들' 주식회사를 차렸다. 그  역시 '구들인생'의 목표를 구들의 다변화와 국제화에 두고  있다. 그는 온수순환식 구들을  '멍텅구리 구들'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멍텅구리를 구들의 전부인 양  알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한심한 느낌을 감추지 않는다.  요즈음 웬만한  집들은 대개 침대를 들여놓는다.  이제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고까지 선언하고  있다. 우리들은 구들문화가  지니는 복합적인 장점을 포기하고 그저 침대만이  선진 생활양식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서구에서조차 우리식 접촉문화, 구들문화를  새롭게 차용하는 추세인데 정작  구들의 본고장에 사는 우리들은 대단한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구들문화의 법고창신과 변법자강을 꿈꾸어야만  할 것 같다. 식혜가 깡통을  만나 개벽을 이루었듯이 구들도  법고창신하고 변법자강하여 마침내 개벽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21세기 문화전략상품으로 국제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싶다.  나 역시 아파트의 '멍텅구리 구들'에 살면서  늘상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 모두 구들의 황토에서 올라오는 기를 받자!

 

모정과 누정에 숨은 뜻은
  찜통더위가 계속되면 누구나  탈출을 꿈꾼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마룻바닥에 누워 뭉게구름을 바라보는 나른한 오후의 한때...... 이것은 모든 도회인들이 꿈꾸는 바가 아닌가. 대뜸 원두막에서의 한가로운  피서를 연상할지 모르나 원두막은 임시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랜 옛날부터  한여름 '피서지'로 정평이 나 있는 곳, 모정과 누정으로 떠나가 보자.  모정과 누정. 모정은  농민들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이  딸리지 않고 마루뿐인 마을건물이다.  글자 그대로 초가를 얹은 소박한 정자로, 농민들의  휴식처이자 집회소이다. 반면에 누정은 누각과 정자에서 '누'와 '정'을 따온 말 그대로  정자식 건물이다. 쌓아올린 대위에 세운 건물을 누각이라 한다면, 누정은 밑에 대가 없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한 시대를 들여다볼 때 두 가지 병렬적인 문화현상에서 당시대 문화구조를 총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정과 누정이 아닐까.  양자를 대비하면, 같은 시대에 어쩌면 그렇게 다른 문화가  병존하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게 된다. 당시대  신분구조는 물론이고 삶의 태도,  일상적 관습, 신분에  걸맞은 예우 같은 중세사회 풍속사 자체가 모정과 누정을 통하여  온통 드러난다. 물론 이 둘은 요즈음처럼 돈만 있으면 누구나  자기 식으로 혼자만의 별장을 짓고 사는 행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문화의 소산이기도 하다. 

 

유유자적한 '관음의 문화', 누정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 먼 빛이 더욱 좋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춘사의 첫  구절이다. 고산은 탐라로  향하던 중에 해남에서 남쪽으로 70리  길, 기암절벽과 동백꽃이 어우러진  보길도에 매혹되어 그대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보길도에서 완성한다.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걸작을 꼽으라고 하면 대개 시문을 드는데,  나는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시문학이  거둔 높은 격조를  폄하할 뜻에서가 아니다. 고산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순전한 조선식  정원'인 부용동이야말로 조선 시대 선비문화의 최고 걸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한 지형  때문에 부용이라 이름했다고 하는 부용동. 소나무.대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세연정을 세웠으니 파도소리와 솔바람에 세상의 풍진을 씻음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부용동 제일의 절승은 동천석실
이다. 누정을 세웠던 동천석실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서 굽어보면 보길도를 둘러싼 녹빛  남해바다가 늘 안개 속에  잠겨 있고, 비껴가는 구름  속으로 섬들이 드문드문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절경 속에 서면 나  같은 사람조차 시문이 절로 나올 것만 같다.  은둔거사를 자처했음에도 윤씨  가문의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마칠 수  있었던 고산이었기에 남해바다 오지에  이 같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선비들만의 '전매특권'이었으니 누정문화는  그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시에 많은 누정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월출산  쪽으로 가 보길 권한다. 월출산 서쪽의 구림촌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촌락이다. 워낙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라 동네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누정의 보고'다. 솔밭과 대나무숲 사이에 정자 10개, 서원.사우 5개,  우산각 7개가 전해진다. 구림동을 구성하는 12동네는 간죽정, 총취정, 죽림정, 쌍취정 같은 누정들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림동의 으뜸 누정인 회사정은 1646년부터 무려 8년여의 세월이 걸려 완공되었다. 우리 나라 대동계의 으뜸으로 꼽히는 구림  대동계 모임터이자, 모든 정치.경제.문화의 토론 중심지였다. "나막신으로 벼를 모아서 상부상조의 자산으로 삼았다"고 하니 공동체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17세기 선비 조행립(?-1663년)은 시에 이르되, "복사꽃과 오얏꽃이 단정하고 물이 끼고 도는 마을에 우뚝 솟은 고각이 중장하구나" 하였으니 지금의 웅장한 건물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같은 것을 일러서,  누정이라 불러왔다. 이들 누정은 단순하게 선비들의 휴식터만은 아니었으니, 당대 양반층들의 '종합문화센터'였다고 할까. 

 

양반 남성들만의 독과점적 종합문화센터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만 꼽아도 885개소에 이를 정도로 누정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누정을 경영하였고, 지방관들도 행정의  권위나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누정을  세웠다. 조선 후기에는 동성마을이 번창하면서 '뼈대 있는 가문'임을 과시하기 위해 자못 경쟁적으로 누정을  세웠다. 시쳇말로 빼어난  명승지에 누정을 세우지  못하면 못난 동네 취급을 받았다.  진주 촉석루, 부여 백화정, 울진 망양정,  밀양 영남루, 안주 백상루, 함안 와룡정, 담양  소쇄원의 대봉대, 간성 청간정,  그리고 대표적인 궁궐  누정인 창덕궁 부용정...... 일일이 꼽을 수 없이 많은  누정들, 그 뛰어난 경관과 신분사회에서의 사회적 기능을 연상해 보라!  향촌사회의 사대부들과 관리들이 모여서 친교를 도모하고 당대의 경세를 전론으로 펼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특권층만이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는 비판도 따른다. 어쨌든 누정은 가히 전국적인 규모로 정착하였다.  누정은 야트막한  구릉이나 산록, 계곡이나 경관  좋은 강변, 절경의  암반 위, 자연 연못이거나 아니면  인공으로 판 연못 가, 심지어 마을의  살림집 복판이나 논밭 가운데도 세웠다.  나는 음풍농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선비의 자연을 관조하는  격조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대로 녹아드는 누정의  건축 양식이나 위치를 보면 자연을 대하는 선조들의 뛰어난 산수관을 느낄 수 있다.  한국적인 산수화나 절창의  산수시들을 논할 때 어찌  누정을 빠뜨릴 수 있으
랴! 동해의 그 유명한 관동팔경 중에 총석정, 청간정,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이 모두 누정일  정도였으니 그 높은 안목에 새삼 놀랄  뿐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누정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누정문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정은 풍광이 곱고 경관  좋은 곳에 위치하다 보니 시가 빠질  수 없다. 모란봉 부벽루에 올라서서 차마 시를 끝내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고려 시대 김황원의 일화처럼 선비들은 누정에서  시를 겨루었다. 가히 '누정시단'이라  할 만한 세력이 나타났을 정도다.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송순의  <면앙정가> 등 누정에 뿌리를  둔 시가들은 수없이 많다. 듣기만 해도 쟁쟁한 문사들이 누정문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으니 누정은 선비문화 그 자체였다. 이름난 누정의 편액에는 지금도 당대 일류의 글씨와 문장이 전해져 오고 있다.  누정은 시문을 창작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토론하는 강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누정에 따라서는 인근 일대의 뜻 있는  후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는 큰 배움터, '마을에  세워진 사립대학'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누정은 향촌사회의 지방자치가 구현되는  정치집회소이기도 했다. 앞의 구림대동계가 태동했던 회사정의 사례에서 보듯이,  향촌사회의 질서를 잡고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중심지였다. 물론 긍정적 의미에서  자율적인 질서를 잡는다는 측면도 있지만, 양반들의  기득권을 확고부동하게 하기 위한 지방통치의 한  가지 수단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누정은 당연하게 '남성문화'의 중심터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사회에서 어디든 여자들이 끼여들 자리가 적었지만 누정은 여성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는 구역이었다. 남성들만의 '독과점 문화장소'였던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누정에  기생들이 출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에 나타난 그  생생한 모습을 보라. 근엄한 양반들의 일탈된  모습이 너무나 해학적이지 않은가!

 

여름철에 모정이 없다면?
  반면에 모정은 무지랭이 농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시정.유산각.농청.농정.동각.양청 같은 명칭이 두루 쓰이나 역시 주류를  이루는 것은 모정이다. 시정 같은 표현들은 후대에  모정문화와 누정문화가 일부 섞이면서 등장한 이름이지 순수 '모정혈통'은 아니다.
  누정이 양반들의 유유자적한 '관음의 문화'라면 모정은 '노동의 문화'라고나  할까. 무더운  여름철 양반들은 누정을  찾아들어 죽부인을 껴앉고  오수에 접어들 수도 있지만, 농민들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해마다 음력 2월 1일(머슴날, 혹은 하아드렛날) 모정에서 마을회의가 열리는데 이때 품앗이, 다리보수,  공동혼상구 준비 따위의 일년  대소사를 결정한다. 그러나 모정이 제 역할을 십분 발휘하는 시기는  역시 한여름철이다. 김 매던 농군들이 점심을 먹고 잠시 불볕 더위를 피해  눈을 붙이는 요긴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굽이치는 들녘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랑방  구실도 하고, 모깃불이 사위어가도록 밤더위를 피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모정이 없다면?  아마 한여름철 농촌문화 자체가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 아닌가.
  드넓은 벌판지대에 가 보면 막상 쉴 만한  곳이 마뜩찮다. 오뉴월 뙤약볕에 세 벌 김매기로  허리를 펴지 못하다가 점심바구니가  들어오면 술푸념에 한시름을 잊는다. 점심 먹고서는 불볕 더위를 피해 차라리 한잠을 자야만 했다. 이때 모정이야말로 불볕을 가려주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모정은 당산굿을 치르는 종교 중심터이기도 했다.  호남의 넓은 들판마다 마을이 있고, 그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서 있다. 해마다 당산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풍물굿을 친다. 느티나무같이 가지와 잎이 많은  활엽수가 무성하게 그늘을 만들면 여름철의 피서지가 된다.  반대로 겨울에는 신성한 제의공간이 된다. 당산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경우도 많지만, 나무그늘에 모정을 지어서 여름을 나기도 한다. 성과 속이 계절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호남의 모정을 샅샅이 조사한  바 있는 최재율 교수(전남대)의 보고에 따르면, 모정이 민중의 문화였음이  분명해진다. 양반들이나 노약자들은 설령  모정에 나가고 싶어도 한창 농군들이 일할 때는 조심해야  했다. 일꾼들이 들로 나간 연후에야 잠시 쉬는 정도였다. 모정이 노동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모정은 글자 그대로 초가지붕이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모정에도 불어닥쳤다. '초가집도 없애고' 어쩌고 하는 마을회관  확성기 소리와 더불어 모정의 초가지붕도 날아가버렸다. 대신 슬레이트나 양철지붕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논 가운데에  슬라브 지붕 따위로 '완벽시공'하여 들판의 '분위기'를  망쳐버린 곳도 있다. 요즈음에  새로 짓는 모정은 기와를 올린다. 초가가 사라졌으니 '와정'이라고 부를 것인가. 자연과 어우러져 농사  현장을 지키던 모정의 옛 모습이 사뭇 그립기만 하다.

 

모정이 호남에만 있는 까닭은
  모정과 누정, 어느 것이 먼저 발생했을까.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누각무늬 벽돌을 볼 수  있다. 호화스런 기와집 누정이 날렵하게 돋음새김되어  있어 당대의 화려했음직한 누정문화를 그대로  전해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연못을  파고 호화로운 누정을 지어 귀족들의 휴식처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누정이  모정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귀족층이 농민을 배려하여 쉼터를  만들어주었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중국에서도 누정문화가 발달하여 시인묵객의  시구에 오르내렸다. 우리 나라도  삼국 시대에
이미 호화로운 누정을 국가적으로 세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모정은 어떤 경로로 발전했을까.
  먼저 모정의 전국적  분포상황을 알아보자. 모정은 주로  호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호남,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모정  분포도가 높다.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모정문화 자체가 극히 희박하다.
  가령 전북 익산지방에서 모정문화를 조사하다가 금강을 건너가 충청남도 부여로 접어들면 이내  모정이 사라지고 만다. 섬진강을 경계로 전라도  곡성에서 경상도 하동으로 접어들어도 마찬가지다. 호남에만 모정이  발달한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모정과는 구별되지만  다른 지역에도 모정에 준하는  공동체적 결집소는 있었다. 모정의 이명인 동청,  농청, 농정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집회소는 두레꾼들이 모여서  두레의 출범의례인 호미모둠을 이루거나  한해 농사의 대소사를 토론하는 회의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젊은 두레꾼들이 모여서  악기를 배운다거나 멍석짜기 따위로 소일하던 공간이다.
  공동집회소는 이북지방에도 있었다.  함경도 북청 같은 지방에는  도가라 불리는 공공건물이  있어 마을의 제의.노동.놀이 따위를  관장하였다. 북청사자놀이도 도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도가라는  말뜻에는 공동집회소로서의 의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신도시를 건설하기  직전에 안양시에서 민속조사 의뢰를  받고 평촌을 조사한 적이 있다. 오늘날은  평촌 신도시가 들어서서 완벽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 곳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넓은 들이 펼쳐있던  서울 인근의 곡창지대였다. 그 평촌을 둘러싼 여러 마을에는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동청이 있어서 두레꾼들의 집회소로 기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두레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정, 농청, 농정 같은 마을공동체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다가  일제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촌락의 공동체적 행사나 모임이 이루어지던  결집소가 사라지고 호남의 모정만 남은한 것은 아닐까.
  물론 들판에 모정이 서 있는 형식은 호남의 독특한 풍토가 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산조차  없이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녘은 그야말로 햇볕  가릴 곳조차 없다. 마을 당수나무 그늘과 모정이라도 있어야 견딜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같은  농사지대라도 경상도에서는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평상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모정만을 놓고서 판단한다면, 호남 민중의 공동체적인 결집력만큼은 여느  지방에 비하여 단연 돋보인다. 같은 호남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도서나 산악지방에는 모정이 드물다. 평야지대가 모정문화의 중심권역이다.  또한 단결력이 강한 마을일수록  모정도 잘 이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호남사람들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단결력이 모정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백두에서 한라까지
  누정은 멀리 두만강.압록강으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는 전국성을 보여준다. 박준규 교수(전남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뽑은 각도의 누정 수를 살펴보자.
  경도 14/ 한성부  24/ 개성부 13/ 경기도  34/ 충청도 80/ 경상도 263/  전라도 170/ 황해도 50/ 강원도 81/ 함경도 56/ 평안도 100/ 합계 885  전라도에 비하여 경상도의  누정이 압도적으로 많다. 경상도에서도  양반이 많이 살았던 안동이 으뜸을  차지하였던 데서 양반문화와 누정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다.
  누정은 멀리 북방에까지 세워졌다. 변방으로 나간  장수들이 지은 시구를 보면 '전선의 밤'에 누정에서 느낀 정취가  다수 등장한다. 당대 '야전사령부'에도 누정이 있었다는 증거다. 성문에  문루를 올렸는데, 그들 누각은 전망이 좋게끔 높은 곳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물로 뛰어든 '기생파티장'인 촉석루도 원래는 진주성의 지휘소였다.
  서울은 어땠을까. 양반층이 밀집해서 살았던 만큼 서울도 단연 수위를 달린다. 흰 바위와 북한산  내린 물이 어우러진 세검정, 한강 뱃사장을  오고가던 백구를 바라보던 압구정...... 서울은 누정이 설 만큼 아름답기도 했지만 권문세가가 즐비하여 그만큼 경제력이 뒷받침 되었으니 누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누정 창설자의 면면을 보면 중앙과 지방정치권력의  세력균형도 엿볼 수 있다. 가문이나 문벌을 내세워 누구누구 가문의 누정을  세워놓고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다 보니 공연히  거들먹거리는 부정적 요소도 없지 않았고, 민중의  원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비판의 대상만 될 수야 없지 않은가. 조선 시대 선비정신이 구현되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모정과 누정의 21세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급문화와 서민의 문화는 나름의 가치와 몫이 있으므로 제 갈 길을 이어가게끔 도와주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누정은 어떠한가. 누정은 엄밀하게 말하여 전통  시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하였다. 시인묵객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이제 인걸은 간 곳  없고 건물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 나는 누정이 지녔던 자연친화적인 교감을  굳건히 이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누정이  설 만한 전망 좋은 곳은 예외없이 호텔, 콘도 따위의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서 경관을 망치고 있다.
  누정이 지녔던 자연  속의 자리잡음 방식만큼은 이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한  누정의 뛰어난 건축미가  지닌 전통의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이어져야 마땅하리라. 누정의 날렵한 처마, 숲 속에  그윽하게 들어앉은 자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빼어난  정감, 나무와 연못과  바위가 연출하는 선비정신  따위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의 자산인 탓이다.
  모정은 누정에 비하여 전통의 지속력이 완강한  편이다.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여전히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공간이 되고 있다. 초가는  기와로 바뀌었을지라도 모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역사  속의 민중과 더불어 유전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의 육모정도  바로 모정의 되살아남이다(단청 입힌 콘크리트  모정도 출현하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땅에 뿌리박은 농민의 문화가 가장 생명력이 강하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닌가.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의 이중주
  요즈음은 남자가  결혼할 때 '장가간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장가든다'고 흔히 표현했다. '든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어떤 것에  소속된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속언에 처를 취하는 일을 장가든다라고 하니  장가는 처가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처갓집으로 장가를 '들어가는'형세다. 왜 그러한 말이 생겨났을까. 우리 문화의 혼례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은행에 갔다가  우연히 여성잡지를 들추어보니, '신세대의  결혼풍습도'에 관한 글이 있었다. 거기서는 시대  못지 않게 처갓집에 의존하는 경향을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풍습'이라며 신기한  듯 소개하고 있었다. 기사를 쓴 여기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풍습'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갓집과 변소는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1980년대 이래로 처갓집 근처에 집을 구하거나  아예 들어가 사는 경우도 생겨났다. '신 처가실이 풍습'이라고나 할까.
  신처가살이 풍습은 결코  새롭거나 별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누려온 혼례풍습은 처가살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고단한 역사를 20세기  말기에 청산하면서 민족 고유의 처가살이로 되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로 되돌아가 보자.

 

2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서류부가혼
  혼인하기로 언약하면 여자집에서는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것을 사위집이라고 부른다. 남자는  저녁에 여자집에 찾아와서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여자집에 묵을 것을 재삼  청한다. 이때 여자의 부모가 청을 들어주면 그는 사위집에서 유숙한다. 한편으로 돈과 천을 준비하는데, 아이를 낳아 성장하면 그제서야 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일명 서류부가혼이라고 하는 고구려의 혼례풍습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아예 사위집을 지어놓았을 정도다. 모권제의 발전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고 여자의 지배권은 강화되었다. 고구려의 '장가들기' 풍습은 고대사회에만 이루어지던 유풍이었을까.
  13세기 초, 당대의 문인 이규보는 장인을 애도하는 제문에서 "처가에 의거하게 되니 처부모의 은혜가 친부모와 같다"고 하였다.  또 13세기 초 태부소경 자리에 있었던 정국검이 사위 두 사람에게 악당을 잡아 관청에 넘기도록 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등장한다. 사위가 그만큼  늘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거의 2세기 뒤인 1415년 <태종실록>권 29에서는 고려의 혼인풍습을 이렇게 말한다.
  고려 시대의  옛 풍습에 따르면 혼인의례가  남귀여가하고 아들과 손자까지도 외가에서 낳아 그들이  거기서 성장하게 되므로, 외가 친척을 더욱  은혜롭게 생각한다.  남귀여가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뜻한다. 조선 시대는 어땠을까.
조선 초기  <세종실록)권 40에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한 어미의 자손들이 한집에 같이  살게 되니 서로 친애하는 풍속이 대단히 성하다"고 하였다. 또한 "남자가 처가살이를  함으로 조카가 아자비를 자기 아버지로 삼고, 또 아자비는  조카를 자기 친자식과 같이 여기니 이것은  전적으로 처가에 은혜를 입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의 개국을 주도한 신유학파는 가족제도 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남자가 장가는  '드는' 풍습은 천륜의 도를  거스르는 행위로 보였다.  그들은 <주자가례>의  친영제도를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렇다면 친영이란 무엇일까.  친영은 남자가 처갓집에서 사는  일없이 신부가 남자집으로 시집살이를 오는 것이다.  처가살이혼에 대응한 시집살이혼의 시작이 친영제도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보편화된  혼례규범집인 <사례편람>에 잘 드러난다.
  <사례편람>은 혼례 과정을 의혼, 납채, 납폐 그리고 친영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의혼이란 중매를 시켜서  양쪽 집을 오가면서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이다. 납채는 신랑집에서 청혼을 하고 신부집에서 허혼하는  절차다. 우리 나라 관행에서는 이것을 납폐로 대신하였다. 납폐는 신랑집에서  납폐서를 써서 사자에게 주어 신부집에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이것을 받고 주인이 북향하여  재배한다. 그리고 음식, 술과 폐백으로 사례한  다음에 답장을 써준다. 마지막 절차가 혼례식을 실제로 거행하는 친영이다. 친영을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드는 식의 '있을 수 없는 수치'는 면하게끔 되어 있다.
  1407년 태종은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파격적인 혼례를 거행한다.  세자로 하여금 김한로의 딸을 친영의 예로 맞아들이게 한다.  세종 역시 왕세자의 친영을 결의하고 의식절차를 정하였는데  이를 둘러싸고 궁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진다. 온건파들은 국왕이 친영을 솔선수범해서 자연스럽게 백성이 따르게 하자는 주장을 폈고, 급진론자들은 무조건  친영을 강행하자고 했다. 온건파는 무엇보다도 풍습이란 일조일석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친영 반대 의견을 제기한 김종서는, "우리  나라 풍속에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드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간다면 몸종.의복.가장집물을 모조리  여자가 장만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꺼려 한다.  남자집에서도 가정이 빈한한 자는  신부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자집에서도 꺼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이 어린 처녀를 시집보내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예의범절을 몰라서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친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친척간의 남녀 상간이  많은 원인을 처가살이혼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가부장사회에서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15세기 초에 처가살이혼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영문제는 15세기 말-16세기  초에 다시금 불거져 나온다. 당시  친영 지지론자들은, "친영의 예는 훌륭한 제도이며 그 뜻이 아름답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아직도 낡은 습속에  매달리고 이것을 거행하지 않는다. 법을 세우지  않고서는 능히 실행되지  않을 것이니  사법기관으로 하여금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까"(<증보문헌비고>)라는 강경책을 내놓는다.  또 부부의 도가 무너지고  천도를 역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 등은 "남귀여가 풍속은  폐단이 없지 않으나 풍속이란 스스로 변하는 것이지 위에서  강제할 것은 못된다"는 이유로 입법 시행을 반대한다. 삼국 시대 이래로 내려온 민속을 갑자기  바꾸는 데 반대했으며 고유한 민속의 지속성을 지지하였다.
  혼례사 전문가 박혜인 교수(계명대)는 친영강행론  입장을 예속과 예제를 혼동한 것으로  본다. 서류부가혼을 주자가례의 친영  예로 바꾸자는 것인데, 이것은 혼속을 혼제로 이끌고자 하는 지배층의 생각일  뿐이다. 친영 지지론자들은 우리의 전래 서류부가혼 풍습이 대단히 뿌리 �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익(1682-1763년)도 <성호사설>에서 "백년 전만  하여도 아직 처가살이혼 풍속이 숭상되었다"고 하였다. 이익이 살던 시기로부터 백년 전이면 16세기경이다. 사대부들의 희망대로 민중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정책적으로 친영을 의도하였지만 민중의 생활에서는 처가살이혼 풍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논쟁사가 아닐까.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의 대타협인 반친영  그런데 처가살이혼은 좋은 점만 있었을까.
  양반 부호집에서는 몇 명이나 되는  사위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며 매우 호화롭게 생활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가난한 층에서는 신랑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신부집에 찾아가서 주식을 강요하는 남침 풍습이  유행하기까지 했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폐습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함을 들여갈 때 신랑 친구들이  때로는 행패에 가까운 무리수를  범하는 폐습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전통에서 이어진 것이 아닐까.  또한 몇 년씩  계속되는 처가살이 동안 빈번하게 왕래할 때마다  드는 선물비, 향연비, 게다가 사위의 의식비는  여자집에 큰 부담이었다. 인습을 어길 수 없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처가살이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처가살이혼의 개혁안과 친영  강행론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을까. 양자의 대다협과 절충이 반친영으로 일단락 된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3일만 자고 오는, 3일 친영이  16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성들은 처지에 따라서 2일 친영, 3일  친영 등 머무는 기간을 다양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 반친영이란 것도 처가살이혼 유풍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친영이란 것도 남자가 여자집에 체류하는 기간을 3일 이내로 단축하였을 뿐이지 결혼하자마자 여자를  데려오는 풍습은 아니었다. 처갓집에  여자를 그대로 두고 남자가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기를 처갓집에서 낳아서 기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타협의 산물인 반친영조차 민중에게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들어오면서 가부장제적 봉건질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계제의 유습이었던  처가살이혼도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3일 나들이 풍습은 여전히 남아서 일제 시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처가살이혼은 '데릴사위' 풍습에도 그 잔영을 남겼다. 일찍이 <동국통감>에 고려 충혜왕 4년 원나라 어사대에 보낸  소에 이르길, "아마도 신랑으로 하여금 신부를 데려가게 해야 할 터인데도  그 풍속은 신부를 내놓지 않으니 마치 진나라의 데릴사위 풍습과 같다......"  운운하였다. 처가살이혼과 데릴사위제가 비슷하다고 느낀 것이다.  가난한 집의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서 머슴을  겸하며 노동력을 제공하여 사위가  되는 데릴사위 풍습은 상당 기간 존속하였다.  비록 형식은 바뀌었을지라도 지금도 데릴사위 제도는  이어지고 있다. 모계사회의 처가살이혼 풍습이 데릴사위혼에 일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21세기, 신처가살이혼 풍습의 만개
  처가살이가 되돌아오고 있다.  처가살이의 반대말이었던 시집살이가  줄어들고 처가살이의 유풍이 널리 퍼지고 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아내를  취한다고 하지 않고 장가를 든다고 한다. 이것은 양이 음을  좇는 것이니 남녀의 예의를 크게 잃는다"고 하였다. 양
이 음을 좇는, '불알 달린 사내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했던 처가살이가 지금 만개하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 나는 우리 문화의 급격한 변모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처가살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시집살이혼이 쇠퇴해 모권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질서는 어떤 의도에서였건간에 시집살이혼을 국가적으로 요구하였고, 그 폐단은 여자의 혹독한 시집살이로 귀착되었다. 단순하게 맞벌이부부의 등장, 탁아시설 미비 등을 이유로 들어  20세기 말에 새롭게 시작된 처가살이 풍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마치 유전인자처럼 오랜  세월 잠복해 온 처가살이 풍습이 다시 때를 만나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남자들이여! 그렇게 놀랄 것은  없다. 시집살이혼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차지한 기간이 고작 3백여 년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 보라.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이래로 어언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 고유의 혼례방식은 처가살이혼이지 않았는가.

 

장례, 놀이와 의례의 반란
  사람은 죽는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침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저녁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저녁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아침이면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젊다'고 생각할지라도 죽어야만  하는 인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젊은 사람들도  죽어간다. 남자도 여자도 차례차례 죽어갈 뿐.  붓다 스스로의 감상을  적어놓은 우다나바가에서 이른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차례차례 죽어갈  뿐이다. 죽음은 결코 생을  마감하는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많은  이들과의 인간관계가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그 자체는 개인적인 일이지만 어느 죽음도 사회성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삶과 죽음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죽음의 세계는 늘 무섭고도  경외심이 가득 찬 곳으로 다가왔다. 선사  시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내버리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차츰 장례라는 절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내세를 믿어  미라를 만들었고, 대지의 신
오시리스가 선행과 악행을 저울로 달아 망자를  심판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민족마다 죽음에 대한 그 나름의  의식이 형성되자 그에 따라 장례법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땠는가.  중국측은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다양한 장례형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옥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하였으며 나무로 만든 덧널을 만들어 주검을 안치시켰다. 부여에서는 순장  풍습이 있었고 장례 기간이 매우 길었다. 고구려에서는 혼인하자마자 수의를 마련하였고, 장례 때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후하게 치렀다. 물론 기록된  문헌만 보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다양한 장례풍습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죽음을 대하는 의식은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죽음을 달래는 인간 심성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망자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절차인 장례에서만큼은 각 민족마다 고유한 자기 성격을 드러낸다.  죽은 자에 대한 공경심과 공포심 따위가 어우러지면서 상장례 예법은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보수적인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 우리의 사정은 어땠는가. 전통적 무속이나  불교의 례로 이루어지다가 주자가례  예법이 덧붙여지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예법보다도 엄격한 절차를 갖추게 된다.  나는 매년 명절날이나 어른들의  제삿날 또는 주위에 장례가 있어 밤샘이라도 할 양이면 늘 우리의  상장례에 대한 작은 반란을 꿈꾸곤 한다.  좀더 심하게 말한다면, 전통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 모반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 섬에 가면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여러모로 풍부한 민속유산을 지니고 있는 남도 땅 진도.
  유장한 씻김굿이 있는가 하면 질펀한 들노래가  있고, 마을마다 아낙들이 지정된 장소에  모여서 노래하는 우리식 '노래방'이  있어 전통시대의 노래가 아직도 이어지는 섬. 장례풍습도 독특하여 늘 세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1979년에 연극으로도 올린 <다시래기>의 한 대목을 보자.

  가상주 : 장삿집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어디서 장사를 하나?
  산받이 : 무슨 장사? 뭘 팔아?
  가상주 : 장삿집에서 팔 거라고는 뻔하지.
  산받이 : 뻔하다니?
  가상주 : (비밀 이야기 하듯이) 애비 송장을 팔아야지.
  산받이 : 에끼 천하에...... 진짜 상주가 들었단 말이야!
  가상주 : 그건  자네씨가 모르는 말씀이야! 내가 돈을  벌려고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그걸  저울질 해 보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아버지 제사 밑천 삼고, 비석도 해드리고, 묘막도 짓고,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협조정신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니, 얼마나 효성 지극하고 건전한 장사냐 말이야?
  '장삿집(상가)'이니 애비 파는 '장사'를 해야 한다?
  아버님 영전에서 '애비 송장'을  판다는 것은 엄격한 유교적 관습에서 보면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옛 진도의  풍습에서는 '애비와 에미'를 늘 장례식날 팔아왔기 때문이다.  다시래기는 장례식을 '애비를  팔 정도'로 웃기는 난장판으로 꾸미는 장례놀이다. 옛부터 우리에게는 양반집에  초상이 나면, 상민을 불러다가 상여를 메게 하고 단골이  소리를 메기는 전통이  있었다. 민촌에서는 마을민  모두가 상두꾼이 되어 상여놀이를  한다. 슬픔에 잠긴 유족들을  웃게 하는 다시래기를 보노라면, 도대체 상갓집에 와 있는지, 아니면 놀이판에 와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상갓집의 놀이  풍습은 진도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다. 섬보다  육지쪽이 일찍 소멸되었을 뿐, 장례와 놀이는 하나로 묶여 이어져왔다.
  황해도에서는 생여돋음(상여돋음)을 놀았다.  해가 져서 밤이 이슥해지면 풍물을 치며 빈 상여를 메고 집집을 돌았다. 놀이 잘 하는 사람을 태우고 우는 시늉, 상제 시늉, 재산 나누는  시늉 등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상가에서는 이들에게 돈을 내주고, 닭 잡고 술  대접을 하는데, 술을 가져오면 안주를 내라는 식으로 아주 짓궂게 군다.
  상여놀이로 돈도 벌어들여 모처럼 모두 모여  놀기도 하고, 공동기금을 조성하거나 상포계에 보태기도 한다. 상여놀이가 끝나면  상가로 돌아와 마당에서 시신을 상여에  안치하고, 상포계원들은 다시 선소리를  위시하여 각종 놀이를 한다.
그리고 곱새치기(투전)를 하면서 밤을 새운다.  경상도의 부유한 집에서는  장례놀이 대돋음을 행했다.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출상 전날 저녁에 상두꾼들이  모여서 빈 상여를 메고 앞소리를 메기며, 출상할 때처럼 상여소리를 낸다. "내가 너희들 자랄 때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가며 잘 키웠다. 그러니  너희들이 나를 섭섭히 보낼 수 있느냐?"는 뜻으로 대돋움을 한다. 대돋움을 할 때  상주는 '사돈의 팔촌'까지 청하여 밤새도록 음주가무를 즐긴다.  경북 안동(서후면 저전동)의 경우, 짓궂은 사람은 안상주처럼 삼베치마를 차려입고 뒤뚱뒤뚱 걸으며 곡하는 척하다가 큰 소리로 넋두리를 하기도 한다.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잘 죽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그나 저나 잘 죽었다. 잘 죽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언제새나 병이 들어 그다지도 죽었는고."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
  슬픔에 잠긴 초상집에 와서 잘 죽었다니......
  진도의 다시래기, 경북의 빈상여놀이,  충북의 대드름, 충남의 호상 놀이, 경기도의 상여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나라 장례문화는 원래 놀이마당이 아니었을까.

 

장례의 축제성을 살린다면?
  그 동안 우리는  주자가례에 지나치게 주눅 들어  기 죽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공자님 말씀만  따지다 보니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풍습은  철저하게 무시해왔다. 전문 연구자들조차  민중의 장례문화 풍습을 도외시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앞의 임 교수는 그의 '장례관련 놀이의 반의례적 성격과 성의 생명상징'이란 글에서 민중의 진정한 장례풍습을 바로 봐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선 지배층의 관점에서 사대적인 발상 아래 진행되고 있는 장례 연구의 고정관념을 효과적으로  깨뜨리기 위해서도,  사대부 중심으로 형성되어  위에서부터 밑으로 주어진 예학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밑에서부터 위로 치받치는 민중적 요소들을 주목하고,  큰 나라 중심의  관점에서 형성되어 밖에서부터  안으로 치고 들어온 외래적인 요소와 인류학적  방법에 맞서서 안에서부터 맞받아 버티는 민족적 양식들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두 가지 요소들을 함께 갈무리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장례 현장에서 연행되는 민속놀이들이다.
  단적으로 오늘날의 상갓집 풍습은  엄숙한 예법이 분위기를 압도하여 혹시 웃기라도 할 양이면 '불효'로 징벌을 받을 판세다. 미국의 인류학자 울프가 "농민문화는 축제로 통한다"고 쓴 글이 떠오른다.  영남대 박현수 교수의 유려한 번역으로 일찍이 1970년대에  소개된 <농민>(1966년)이란 작은 책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농민들은 여러  가지 축제를 통하여 자기네의 유대감을 앙양하고 이 유대감에 금이 가지 않도록 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런 축제의 형태는 스페인의 수호성자 예배로부터 중국  일부 지방의 수호신을 찬양하기 위한 불꽃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이런 축제 중에는, 예컨대 장례식처럼 개인적인 가정 사건을  계기로 열리는 것도 있다. 프레드 기어링은  그리스의 카르다밀리 마을 사람들이  장례에서 그들의 공동의식을 다지는 모습을 기술한  바 있다. 장례식에는 죽은 사람의 친지나  친척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도 참석하며 적들은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
  장례식이란 단순하게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끼리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사회적인 단합과 축제문화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장례의 축제성'을 상실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상갓집에서는 화투짝이나 만지면서 밤샘하는 게  고작이다. 그렇다면 주자가례가  강화되기 이전에 이미  성립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축제형식의 장례풍습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처음  상을 당했을 때는 곡을 하고 울지만,  장사를 지낼 때는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면 장례를 치른다"고 하였다. 후대의 유교식 장례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었다.  그로부터 천여 년이 흐른  뒤, 조선왕조 <태조실록>권 15에 이르길, "외방  백성들은 부모의 장례일에 인근 향도를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조금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향도의 전통을 잘 알 수 있다. 1504년 성현의 <용재총화>는 향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졌지만, 오직 향도만은 아름다운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의 천인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7.8.9인이요, 많으면 혹 1백여 인이 된다.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향도 사람들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마련하거나......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건너 안산이 북망이로세......"  꽃상여는 서서히 미끄러지듯  간다. 차디찬 침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서양식 죽음'이 아니라 친척은 물론이고 사회성원들의 잔치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장례식의 축제성을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우리의  장례풍습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했던 카를로  로제티 이탈리아
총영사가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서울학연구소 번역)에서도 이렇게 적고 있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가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아시아 모든 민족들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진행하고,  가족들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들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는데,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풍습을 어색하게  보았듯이 현재의 우리들도 장례식에서 웃는다는 것을  어색하게 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두꾼이 사라지면서 이제 우리들도 병원 침대의 창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음조차도 축제로 받아들였던 선조들의 풍습은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인가.
  상부상조하는 풍습의 전범으로서  향도를 꼽는데, 성현의 표현대로 '참으로 좋은 풍속'이 아닐 수 없다. 그 향도에서 놀이하는 장례풍습과 상두꾼 전통이 나왔다. '향도 > 향두 > 상두'로의 변화발전이 그것이다.  조선 초부터 엄숙하기를 요구하는 유교식 장례가 강요되면서 향도식의 떠들썩한 장례는 거세되었다.  다행히 진도, 제주도 같은  '변방'에는 그 전통이 이어진 셈이다.
  상두꾼 행렬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원초적 풍습이다. 함께 어울려 마시고 놀면서  죽음의 슬픔을 털어내는 행위들에서 달관의  경지마저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북망산길로 떠나는 이를  달래는 그 기막힌 가락의 상두가를 들으면 죽음은  두렵고 먼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친숙한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화장풍습
  초상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묘지를 구하는 치산이다.  우리는 시신을 묘지에 묻는 것만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화장을 하는 것은 불효로  취급받기도 한다. 국토가 비좁은 탓에  묘지난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화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지만 그렇게 권장하는 사람부터도 화장을 기피한다. 왜 그럴까. 우선 장법의 역사부터 들추어보자. 맹자 등문공장귀를  보면 장사 제도를 역설한대목이 나온다.  예전에 부모가 죽어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시대가 있었는데,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뒷날 그곳을  지나다가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먹는 모습을 본 그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보지 못했다. 그  식은땀이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로 나타나 흐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곧 들것
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부모의 시체를 흙으로 덮는 것이 진실로 옳은 일이라면, 효자나 인한 사람들이  자기 부모의 시체를 장사 지내는 데에도 반드시 법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애초에는 시신을 들에 버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장례풍습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장사풍습은 유교가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 생겨났으며 민족고유의 것이  되었다. 고인돌 유적은 선사 시대 장례풍습을  잘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전세계적으로 장례풍습은 땅에 묻기와 불에 태우는  화장, 물에 떠 내려보내는 수장, 새나 들짐승에게  시신을 먹이로 주는 조장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대개 땅에 묻거나 화장했다. 그러나 시체를  들에 유기하는 풍습이나 나뭇가지에 시체를 걸쳐놓았다가  나중에 매장하는 풍장,  탈육시킨 뒤에 뼈만  다시 장사를 지내는 초분 같은 독특한 풍습도 근대에까지 이어졌다.
  불교 전래 이래로 우리 장례풍습에서 일대 변화를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화장이다. 불교에서는 이승의  사연 많던 '더러운' 육신을  태움으로써 인간이 저승으로 미련없이  떠나간다고 믿는다. 이승을  떠나는 마당에 티끌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단 불교가 대중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면서 화장이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국가적으로도 화장을 솔선하였다.
  화장은 엄밀히 말하여 두 번 장례를 치르는  셈이다. 한번은 시신을 태우는 일이요, 두 번째는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동해 감포 앞바다에 가면 그  유명한 대왕암이 나온다. 일명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수증릉이 아니라 화장한 대왕의 뼈를 뿌린 산골처였으리라.
  <삼국사기>에도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  불로 태워 장사 지낼 것이요, 초상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고 하였다.  토장이 보편적인 풍습이었는데, 불교 전래 이래로  토장과 화장이 병행되었다. 화장의 경우에도 뼈를 단지에 넣어 무덤에 묻었기에 무덤풍습은 보편적으로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도 불교식에 따라 널리 화장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신진 유학자들에 의하여 성리학이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화장법도 변하게 된다. 충렬왕 16년(1290년) 안향에  의해 성리학과 성리학적인 주자의 가례가 도입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 초기의 여러 문집에 화장풍습을 금지하고 성리학식 상장례를  권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으로 볼 때  상층부에서는 성리학적 의례를 시행하려고 했지만 민중은 여전히 불교식 화장을 선호하고 있었다.  주자가례가 널리 배포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규모와 절차가 복잡한 데다가 비합리적인 요소도 많아 일반은 물론이고 사대부계층에서조차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탓이다. 체제 안정을 지향하려는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서,  민중교화책의 일환으로 주자가례 보급이  늘 강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화장  풍습이 많이 사라지고  매장 풍습이 보편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상장례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매장과 화장 풍습이  늘 병존하고 있었고, 화장에 대한 비판은 조선 시대에 강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장을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는 사고방식의 밑바닥에는 조선 시대 주자가례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화장이 기피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는 근 1천여 년 동안 화장을 해오지 않았던가.

 

국립묘지부터 화장터로
  나는 국립묘지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국가 지도자의  장례식부터 화장을 해야지 민중이 따라가지 않을까. 지도층은  화려한 매장을 선호하면서 민중에게만 화장을 하라면 누가 따르겠는가.
  우리는 언제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지금의 호화 분묘가 말썽이 되듯, 예전에는 왕릉 때문에  민중의 고통이 컸다. <연려실기술>에  서경덕이 상소를 올린 대목이 나온다.  지금은 모두 풍수설에  따라 왕마다 따로 능을 씁니다. 왕릉이  이루어질 때마다 비록  왕실과 외척의 무덤이라도 모두  파냅니다. 또 산 밖  백성들의 논밭도 모두 묻게 될 뿐 아니라 한 능을 들이는 데 매우 넓은 땅을 차지하므로 풀 뜯고 소 먹이는 곳마저 없어집니다. 나라 운세가 크게  일어나 멀리 천년에 이르면 왕릉이 서로 이어져 논밭과  들이 모두 묻고 땅이 남지 않을 것임, 백  리 안에 사람의 흔적이 없어질  것입니다. 폐해가 여기에 이르면 신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옛 임금의 화려한 장례풍습 못지않게 풍수를 따지고 명당 찾기에 골몰하고 있으니 역사의  시계바늘이 중세사회로 되돌아간 것일까.  화장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기왕이면 화장터를 좀더 아름답고 격조있게 만들어 마지막 죽음의 길을 장엄하게 꾸며주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부터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에서도 무덤을  장려할 것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화장을 권장해야  한다. 화장이 종교적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은데, 부활은 정신적인 것이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화장에 관한  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계가 화장문제에 관한 사회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종교고유의 '직무유기'에 속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나는 일본의  납골당 방식도 권장할 만하다고 본다. 그 동안 정부에서 보급하였던 납골당은 민중의 정서와 전혀  맞지 않는다. 사서함 박스와 같이 빼곡히 들어차도록 만든  납골당은 민족의 생활정서를 모르고 시행한 탁상물림 행정의 대표격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봉분을 큼지막하게 만들고 그 위에 금잔디도 심고 봉분 밑에 유골을 넣는 가족형 납골묘는  어떨까. 봉분을 큼직하게 만들고 커다란 비석을 세우더라도 수십 기를  함께 넣을 수 있으니 토지문제 해결의 묘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덤이  후손들에게 소외되어 방치되는 일도 없어질 것이 아닌가.
  <동이전> 동옥저 전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새로 죽은 사람을 땅 속에 우선 가매장하였다가 살이 모두 빠진 뒤에  뼈만 추려서 곽 속에 넣어두므로 결국 한집안 식구들이 한 곽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나무를 새겨 신주처럼 만들어 죽은 사람의 수를 헤아렸다"고  하였다 한집안 식구들이 한 곽에 들어가는 전통이 이미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핵가족화하는 우리 시대에 3대, 4대의 후손들이  무덤을 자주 찾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이름없는  무수한 무덤들이 방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무덤만을 선호할 필요가 있을까.  화장을 하여 가족 납골묘를 만드는 것은 앞서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에 거부감이 있다면 일단 매장을 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파묘하여 뼈를 추려 화장하여 납골묘에 다시 안장하는 방식을 국가적으로  추진해야 옳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립묘지부터 화장터로 변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만 같다.

 

조상숭배는 유교식만이 전부였을까 

<근사록>을 보면  승냥이와 물개조차 제사  지내는 시늉까지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주자는 제사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오직 이 천지음양의 기는 사람과 만물이 모두  얻은 기이다. 뭉치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가 된다.  그러나 그 개체 기는 비록 이미  흩어졌을지라도 이 천지음양의 이치는 늘  생겨나고 생겨나서 궁색한 법이 없다. 조상의  정신과 영혼은 비록 흩어졌을지라도 자손의 정신과 영혼은 스스로 여기 있으니 조금은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상 제사로 조상과 후손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에 대해 공경지심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조상을 모시는 것을 모두 유교에서 나온 것으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전라도 위도에 가면 마룻방 윗목에  시렁을 달고 조상의 위패를 달아 맨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이것은 기존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와 주자가례가 서로 타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절 차례를 올릴 때도 시렁 앞에서 올리고, 마루의 성주독  위에도 조상상을 차려 올린다.  제주도에서는 심방이 와서 '조상본풀이'를 구송하면서 가운가업의 수호신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교적인 제사법이 전일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 사정은 이처럼 전혀 달랐다.  21세기를 앞둔 지금까지도 이 같은 토속적인  조상숭배가 일부 지역에서나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토속적인 의례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을 반증한다.
  민중의 의례를 유교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조선 시대 개국과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일찍이 사찰을 중심으로 행한 불교의식이나  무가를 중심으로 행하는 음사를 혁파하기 위한 첫 과제는  각 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고려 말에  정몽주나 문익점 같은 신진 유교세력이 건의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멸망한 뒤 과제는 조선왕조로 넘어간다.  조선왕조를 세운 지 2개월 후인 태조 원년  9월, 가묘를 세우고 음사를 엄단할 것을 도평의사사의 배극렴.조준 등이 왕에게 건의하였다. 그 뒤 풍속을 규정하는 소임을 맡은 사헌부가 중심이 되어 주자가례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음사라고 하면  오신행위와 야제를 통한 재화예방이  대종을 이루었다.
오신행위는 장례 전일에  무격을 초청하여 밤낮으로 음주작락케  하였다. 그것은 조상신을 위로하는 것으로서 당시 세속에서는 그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면 부모를 박대하는 불효라고  생각했다. 세종 13년 사헌부의 장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런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나면  즉시 야제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무리를 지어 무당을 불러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린다.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을 맞아들여 향화와 다식을 차려놓으니 노래와 춤과 범패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수령들로 엄하게 다스리되......
  상장례 전문가  정종수 박사(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는 조선  전기에는 무불식 상장례 풍습이 보편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상  주자가례를 따르는 일은 유교의 교화는 물론이고 경제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었기에 민중은 대개 전통적인 관행을  지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음사를 유교적인 의례로  변화시키는 데는 거의 백여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나마  완전하지도 못했다. 민중교화책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삼강행실도>, <소학> 등의 윤리서와 향사례,  향음주례의 보급운동으로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유교적인 조상숭배 의례가 보편화되면서도 민중생활 곳곳에는 여전히 토착적인 조상숭배가 존속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우리들의 조상신은 대대손손 이어져온  집안의 조상들이다. 집안의 흥망성쇠도 조상 탓으로 보며, 조상의 음덕이 후손들의  제반사를 돌보아주고 집안의 풍요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이능화는 고려 시대에 신주를  무가에 맡긴 유풍이라고 지적한다. 흔히 안방의 윗목에 모셔두고 어떤 굿에서나 조상을 모신다. 전라도에서는 조상단지.신주단지.제석오가리.시조할미단지라고도 부르며,  경상도에서는 조상단지.세존단지.시조단지.조상할배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부르독이나 부르단지라는 이름도 보인다.
  제주도에서는 군웅.일월 등 타지방에서 볼 수  없는 조상신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씨족수호신을 모시는 신앙이 강하다. 조상신은 조상.삼신.곡령신이 서로 중복되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상신에 제석이나 세존이라는 말이 결부되는 것은 불교적 요소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조상지킴이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신으로서의 속성 및 장손집에 모시는  조상숭배성, 술과 고기를 바치지 않는다는 불교적 속성이 잘 결합되어 있다.  신체는 단지로 된 경우와 별다른 신체 없이 건궁인 경우도 있다.
  차례 때 조상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햇곡식이 나면 성주신과  함께 천신한다. 집안의 대를 잇는 장손집에서 집중적으로 행하며, 굿을 할 때 조상상을 따로 차려 제사 지내며  별식이 나면 조상에게 바치고 먹어야 한다.  주자가례가 강화되면서 차츰 양반층을 중심으로 조상숭배가 관철되어  나간 것에 비해, 조상신은 고래의 전통적인 조상숭배 유습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조상숭배를 무조건 유교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여성들의 제의 소외, 남성들의 제사 독점
  상장례 풍습에서 여자들의 제사 참여문제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하여  집에 따라서는 여자들도 제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에서 제삿날 여자들이 하는 일이란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게 고작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남성의 제사 독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는 이가 어찌 남자뿐이겠는가. 그래도 딸만 낳은 남자들은 후사를  이를 사람을 걱정한다.  여기서 그렇듯 중요하게  여기는 후사 문제란 제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의 성비가 깨어져서  사회문제가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남성들의 제사독점 때문이다.  애초에는 주자가례에서도 부부공제가 보편적이었다.  남자가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을 행하면, 아내는 아헌을  행하였다. 그러나 아헌의 몫을 같은 남성들인 형제들이 빼앗아가면서 여성들은 제의에서  밀려났다. 전통적인 무속식 조상숭배에서는 오히려  여성들이 조상신을  모셨다. 토속신앙에서는 오히려  조상숭배에서 남성들이 소외될 정도로 여성들이 주도권을 지녔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상속제도를  다시금 생각해보자. 자녀들은 누구나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다. 심지어 시집 온 여자들이 가지고  온 친정 재산이 있으면 당연히 장부등재를 다르게 하여  여자 소유로 하였다. 아들이 없다고 양자  들이는 법도 없었고, 여자도 당연히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재산권의 균등은 제사에서도 균등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자들의 재산권도 사라지고 장자상속에 따른 가부장체제가 보다 강화된다.  조선 전기의 제사풍습만을 놓고 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남녀평등이 지켜진 것이 아닐까.
  나는 조선 시대 성리학이 지닌 건강한 정신을  굳게 믿는 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주자학은 지나칠 정도로 번잡스럽게 격식을 따지기 시작했으며 남녀의 관계를  너무 엄격하게 가르고 공리공담에 숱한 노력을  허비했다. 이런 풍조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여성들이 제의에서 소외된 것은  주자학의 잘못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사회를 위해  만든 예법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번쇄하게 되면 형식으로 흐르는 법이다. 조선  시대의 예법은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인간을  위한 예법을 넘어서서 예법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여자들의  제의 소외 역시 지나치게  번쇄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아주 단호하게 외친다.
  여자들이여! 당당하게 조상님께 제사 지낼지어다. 남자들이여! 그대들은  그 동안 '조선 후기식'의 잘못된 제사 독점을 포기하고 예전에 해왔던 대로 공생의 길로 모색할지어다.

 

고정관념을 깬다면?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상장례 풍습  중에서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몇 가지만 추려보았다. 인간이면 누구나  당면하는 죽음이란 문제,  그 죽음의 문제에서조차  역사적 진실을 방기하면서  지나치게 편향된 생활방식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옥스퍼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쉴즈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란 부제가 붙은 <전통>이란 역저를 낸 적이 있다. 그는  과거의 포착, 과거 사물의  잔존, 과거 관례의  지구력으로서의 전통과 그 전통의 안정성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전통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놓치지 않는다. 전통은 변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전통'이라고 했을  때, 민족생활사의 장강대하 같은 유구한 흐름을 망각하고 조선 후기  풍습에만 매몰되는 감이 있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민족 고유의 것을  많이 상실하였고, 그 반대급부가 '조선 시대의  것'을 되찾게 하려는 것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21세기를 앞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하게 조선  후기의 생활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이  있다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그릇되게  고착된 삶의 방식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냉정하고도 단호한 취사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전통을 지나치게 오늘의  사회과학과 과학주의로 재단하는 우매함은  나 자신도 반대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상하게도 좋은 것은 버리고  나쁜 것은 이어가는 잘못된 전통관에 빠져  있다. 서로 돕고 사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흘려보내고 불필요할 정도로 엄격한 격식만을 이어가는 것이 올바른 전통의 계승인 양 치부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전통은 삶의 무기는커녕 한낱 자신을 옭아매는 밧줄이 될 뿐임을 상장례 풍습에서 톡톡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문화 수수께끼의 현장 2
  "우리 문화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될까요?"하는 식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어떤 공부든 왕도가 별도로 있을까. '그저 열심히  나다니는 게 첩경'이라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다. 그러나  왕도가 없다고 하여 찾아가는 길이  없겠는가.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권처럼  본문과 관련된 현장을 중심으로 마땅히 들러볼  만한 곳 몇 군데만 추려서 도별로 소개해본다. 10만분의  1 지도를 준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들은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하길 바라며, 본문의 삼두매 표지를 거슬러 읽어주길 바란다.
  아쉬운 대로 아무쪼록 우리 문화 현장답사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경기 강원
  1.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아미산 굴뚝 (263쪽)
  경복궁 안에 있는  우리 나라 궁궐 굴뚝의 백미로 보물  811호다. 원래 교태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무늬굴뚝(보물 810호)과 더불어 굴뚝의 정상을 차지한다.  육면체로 화면을 구성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2.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근정전 문무표석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정령을 반포하는 정전이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을 배열하였다. 문무의 동서구분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좌우대비의 대표격이다.
  3.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금천교 도깨비 석수(21쪽)
  창덕궁 건물배치는 정문인  돈화문이 남향이고, 이 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에 이르고, 이 문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인정문이 나타난다. 금천교  남면 다리 밑에 도깨비문양의 석수가 부조되어 있으며 괴수가 앉아 있다. 궁궐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일종이다.
  4.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부용정(275쪽)
  창덕궁의 후원은 비원이라 부르며 우리 나라  조경의 원형으로 손꼽힌다. 거목들과 계류, 연못, 정자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궁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부용정은  비원에 있으며 조선 후기  건물로 겹처마 단층정자이다. 부용지에 걸쳐서 세웠는데 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고기를 낚으며 시를 읊기도 했다. 궁권 누정문화의 대표격이다.
  5.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부군당(207쪽)
  부군은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던  남근신앙이다. 대체로 용산, 마포,  이태원 등 한강변에  집중적으로 신당분포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만 해도 부군당에서는 다량의 남근이 출토되었으며 성신앙과 관련 있었음이 확인된다. 당산동, 노량진, 당인동, 도화동, 동빙고동, 명륜동,  보광동, 산천동, 서빙고동, 신길동, 신정동, 양평동, 응봉동, 이태원동, 전농동, 창전동, 흑석동 등에 부군당이
전한다.
  6.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 장승(223쪽)
  하남시에서 43번국도를 따라 광주군  중부면 쪽으로 가다 보면 엄미리계곡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 앞의 시멘트길로  0.5킬로미터쯤 가면  가게가 나오는데,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장승과 솟대가 마주보고  있다. 0.5킬로미터쯤 더 들어가면 엄미 2리가 나오며 이 마을에도 장승이  있다. 중부지역 장승문화의 전형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통나무를  소박하게 잘라 만든 담백한 모양의 목장승이다. 남한산성 주변인  광주군 초월면 무갑리.서하리, 퇴촌면  우산리.관음리, 광주읍 목현리, 중부면 검복리.하번천리 등에서도 쉽게 장승을 볼 수 있다.
  7.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북방식 고인돌(304쪽)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사적 제137호다.  강화읍을 지나 48번국도상에 위치한다. 지상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대형으로 두  개의 긴 굄돌만 있다.  이 고인돌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파괴된 고인돌이 있다. 강화도에는 삼거리, 하도리 등지에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 10여 기가 남아  있다. 인근에 오층탑(보물 10호), 석조여래입상(보물 65호),  백련사 철조아미타불상(보물  994호), 강화산성, 청련사, 홍릉 같은 유적.유물이 전한다.
  8.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도당굿(146쪽)
  중랑교에서 신내동으로 접어들어 47번국도를  가다 보면 퇴계원 못 미처에 갈매동이 나온다. 갈매동은 동구능 뒷산마을이다. 격년으로 음력 3월 3일에 도당굿을 하는데 경기도 일원의 대표적인 마을굿의 하나다. 1994년, 1996년에 도당굿을 했으므로 1998년, 200년, 2002년에 도당굿을 한다.
  9.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청간정(275쪽)
  속초에서 7번국도를 따라  간성 방향으로 가다가 용촌검문소를 지나면 천진해수욕장을 바로 지나서  야트막한 동산에 있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혀왔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32호다.  시원스럽게 뻗은 열두 개의  돌기둥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정이 올라  서 있다. 소나무, 벚나무와 벗하며 동해의 시원스런 절경과 어우러지는 누정이다.  2킬로미터 정도 북상하면 청학정이  나오며, 송지호, 왕곡전통마을 같은 관광지도 접해 있다.
  10. 강원도 강릉시 강릉 단오제(207쪽)
  강릉시 남대천변에서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단오축제다.  음력 3월 20일에 신주를 빚는데서 시작하여 대관령  국사성황에게 가서 신을 봉송하기까지 장장 50일 간에 걸쳐 벌이는 대대적인 행사다. 지역적인  세시행사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강릉은 물론이고 전국적인  축제로 정착하였다. 단오제 본굿이  벌어지는 남대천에는 난장이 선다. 강릉 관노가면극, 씨름,  그네를 비롯한 온갖 놀이판이 마련되는 도시축제이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행사는 산시제와 국사서낭제, 구산서낭제, 봉안제, 영신제 및 영신행렬,  족전제, 본굿, 송신제 등으로 이루어진다. 단기간에 중요한 굿만 보려면 음력 5월 4일부터 7일까지 가면 된다.
  11. 강원도 강릉시 경포대(276쪽)
  팔작지붕으로 지은 누대로 경포대를 굽어보는 경승지에 위치하며 '제일강산'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빼어난 경관으로 전국의 시인묵객들이 반드시  거쳐 갔던 명승지다. '거울처럼 맑다'고 경포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자연 석호다. 인근에 금란정, 경호정,  방해정, 해운정 등 열두  채의 누정을 거느릴  정도로 누정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12.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276쪽)
  죽서루는 삼척시를 관통하는 오십천  내린물에 위치한다. 삼척시내에서 태백시 방향으로 가는  길목이다. 오십천 건너편에서  보면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장중한 건축물이 서 있는 셈이다. 대개의 관동팔경이  해변가에 자리잡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강가에 있는 누대란  것이 특징이다. 건물규모가 클 뿐더러 벽  없이 탁 트인 누대에서 오십천을 시원스럽게 조망하게끔 되어  있다. 자연석 기단에 마구잡이로 세운 듯하면서도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다.  누대 안에는 삼척부사를 지냈던 미수 허목의 글씨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 율곡의 시문도 걸려 있다.
  13.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천제단(85쪽)
  태백시 황지에서 태백산  입구까지 시내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소도동을 거쳐서 산길로 2시간여를  올라가면 천제단에 이른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천제를 성대하게 지낸다.
  14.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성황림(100쪽)
  원주시에서 5번국도로 20킬로미터쯤 가면 신림리  삼거리에 도착한다. 왼쪽 영월 방면의 402번 도로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좌측의 좁은길로 접어들면 천연기념물 92호인 성남리의  수림지와 93호인 성황림이 있다. 이들은  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한다. 숲 크기는 작지만 다양한 생태보존으로 일찍이 1962년에 천연기념물 92호로  지정되었다. 5백 년 된 당목을 비롯하여 다양한 수종과  풀이 자라고 있으며 이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올랐을 정도다.
  15. 충남 부여군 쌍북리 백화정(275쪽)
  부여읍내의 부소산성 안  낙화암 정상 부근에 있으며  자연 암반 위에 건립한 육각적이다. 암반 위에 석주를 놓고 기둥을  올린 백화정은 겹처마에 육각지붕을 도리식으로 설치하였다. 백화정은  1929년 당시 군수였던 홍한표의  발의로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소동파의 시  구절 강금수사백화주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16.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178쪽)
  부여읍내에서 대천 방향 40번국도로 가다가 청양 방향의 606번 지방국도 쪽으로 갈라져서 접어든다. 만수산  남쪽 자락에 자리하며 마곡사 말사다. 신라 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보물 233호인  석등과 보물 185호인 오층석탑, 보물 356호인 극락전 등 유수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정림사 백제오층탑에 견주는  양식을 보여준다. 매월당 김시습이  거처하였던 곳이며 그에 관한 다양한 일화와 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17.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 별신제(147쪽)
  은산 별신굿은 백제의 고도 부여의 금강 지류인 은산천을 끼고 도는 은산리에서 3년에 한  번씩 펼치는 대동굿이다. 백제의 토성 흔적이  남은 당산에는 아담한 와가당집이 서  있고 백제부흥군 복신장군, 도침대사를 마을지킴이로 모신다. 백제유민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진대(장승)나무 베기, 고란사에서  꽃 받아오기, 축원과 행군을 거듭하며 드디어 당에 올라 당굿을 친다. 굿이 잘되어야 만민과 동네가 편하다는 믿음이 있다.
  18. 충남 서산시 해미읍성 미륵(220쪽)
  삽교천을 건너  신평에서 합덕을 거쳐 45번국도를  타고 덕산온천에서 들어간다. 해미읍성 동서남북에 4기의 미륵불이 지켜주고 있다. 해미읍성에서 서산시내 방향으로 10분여를 걸어가서 오른쪽 반양리로 꺾어들어 첫 번째 만나는 집의 창고같이 생긴  미륵당에 미륵이 있다.  남쪽으로는 홍성 방향으로  뻗은 해미교를 건너서 해미천 냇가를 끼고 들어가면  집이 드문드문 모여 있는 밭 가운데 조산리 미륵이 자리잡고 있다. 읍성을 끼고서  작은 농로를 따라가면 해미초등학교가 나타난다. 동네 구멍가게를 돌아서 마을회관 뒤편으로  가면 평평한 시멘트단 위에 황락리 미륵이  눈에 띈다. 산수리 미륵은 해미읍에서 덕산면으로  가다가 좌측 샛길로 무려 3킬로미터 정도나 들어가야 나타난다.
  19. 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 풍어굿(122쪽)
  창리는 서해안  풍어굿이 전승되는 대표적인 마을이다.  서산시에서 649번국도를 타고 30여 분 내려와서 천수만 간척지 방조제가 시작되는 곳에 창촌나루터가 있다. 수백 년 동안 잘 보존된 소나무숲이  우거진 당섬이 있으며 임경업 장군을 모신 영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해마다 정월 초이튿날부터 영신제를 올리는데, 수준 높은 배치기풍물굿을 볼 수 있다. 점심  무렵에 영신당에 오르면 밤새도록 굿을 하며, 이튿날인 1월  3일 새벽에 당에서 내려온다. 이곳 사람들은 배타적이지 않아서 외지인이 굿에 동참해도 괜찮으며, 서산  창리어촌계로 사전 연락을 취하면 좋다.  인근에 서해안 천수만 간척지  에이.비이 지구의 철새도래지를 구경할 수 있으며, 어리굴젓으로 유명한  간월도를 들러 올 수 있다. 방조제길을 통하면 불과 30여 분 안되어 안면도에 들어갈 수  있다. 안면도 황도에서도 정초에 붕기 풍어굿이 이루어진다.
  20. 충남 홍성군 결성명 결성두레(245쪽)
  결성의 두레놀이는 옛 두레의 흔적을 그런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홍성읍내에서 구항면으로 통하는 29번국도를 타고 가다가 갈산초등학교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결성면  형산리 원형산마을이  나온다. 마을에는  160여 년  전인 순조  24년(1824)에 제작한  용대기(도무형문화재 4호)가 전해진다.  인근 주교리에도 '광서 17년' 명문을 새긴 용대기가 전해진다. 결성에는  옛 결성현 관아터가 있다. 결성의 두레패는 민속놀이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21.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마량 각시당(206쪽)
  대천에서 21번국도로 내려오다가  비인면 성내리에서 비인만을 끼고 돌아가는 아름다운 바닷길을 가다가 고개 못미처 길가에  있다. 각시란 각시서낭을 말하며 해마다 제를  올릴 때 각시가  좋아하는 화려한 물색(옷감),  바느질도구, 심지어 화장품을 바치기도 한다. 바다일을 도와주는 여성신인데  연지를 찍고 부부가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소를  잡고 남긴 흔적인 소뿔을 각시  옆에 수북히 쌓아놓았다. 고개 넘어 마량방파제까지  가면 천연기념물 169호인 동백숲과 동백정이 있다.
  22. 충남 공주시 계룡면 상신리 목장승(224쪽)
  상신리에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까지 번성하였던 구룡사지가 전해진다. 아직도 당간지주, 주초석, 부도대석, 탑재, 기와편 등이 발견된다. 이 마을에는 장승, 솟대, 선돌, 당간지주,  서낭당, 선바위, 산신당 등 풍부한 민간신앙이  전해진다. 목장승은 마을 입구에 솟대와  함께 남녀 한 쌍이 서 있다. 이웃한 하신리에도 장승이 전해지고 있다.
  전북 전남
  23.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119쪽)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고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때, 주모자들이 10일(양력 2월  15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10여 마을의  풍물을 동원하여 예동에 걸꾼 수천 명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전봉준은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선언하고 나서 고부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역설하였다.  전봉준 고택과 말목장터, 만석보  등이 가까이에  있으며 백산에서도  아주 가깝다. 신태인에서 710번 지방국도로 들어가거나 정읍시에서 705번 지방국도로 들어갈 수 있다.
  24.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당산굿(110쪽)
  변산반도 곰소만에 인접한 마을이다.  변산반도 일주도로 30번도로상에서 10분여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반계 유형원 선생 유허지'란 현판이  서 있고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5분여  좁은길로 들어가면 우동리가 나온다. 들판다. 당산나무와  솟대가 있으며 2년에 한 번씩  마을줄다리기를 한다. 우동리 입구의 정자나무 건너편에는 고인돌 무덤군도 있다.
  25. 전북 부안군 격포 수성당(209쪽)
  변산반도 격포해수욕장의 우회도로를 통하여 북쪽 해변가로 2킬로미터쯤 가면 부안 수산종묘배양장이 바닷가에 있고  죽막동이 나온다. 천연기념물인 후박나무군락 옆으로  걸아가면 시누대가 우거진  숲 사이로 수성당이  나온다. 자그마한 당집인 수성당은 깎아 지른 절벽에 서 있다.  얼마 전까지 군부대 벙커가 지키고 있던 요새였는데 전주박물관에서 이곳  일대를 발굴한 결과 마한 시대 제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수성당할멈은 일명 '개양할미'라고도  부르며 딸 일곱을 거느리고 칠신바다를 지켜준다. 수성당 바로 옆에는 여우골이란  지명이 붙은 협곡이 바다로 치닫고 있다. 인근에 아름다운 채석강과 적벽강이 자리잡고 있다.
  26. 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 띠뱃놀이(30쪽)
  칠산바다는 조기떼가  몰려드는 황금어장으로  주가를 높였다. 너른  칠산바다 위에 위도, 치도,  식도, 상왕도가 모여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위도로, 칠산어장의 전진기지가 된다. 부안 곰소에서 하루에 한 번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3시간을 가면 벌금포구에 도착한다. 다시  터덜거리는 시골버스를 타고 가면  대리마을에 이른다. 위도의 진리, 대리, 식도  등에 풍어굿이 지금껏 전하고 있다. 특히 위도 대리의 당제는  띠뱃놀이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인근 섬들에서도  전부 행했는데 지금은 대리에서만 행한다. 위도 사람들은  위도에 세 가지 굿이 있다고 말한다. 띠뱃놀이로 불리는 원당 모시는  굿, 나흗날부터 정원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마당  밟기와 줄다리기, 음력 3월에 밤낮  없이 사흘 동안 선창에서 놀던 별신굿을 꼽는다. 띠배는 원당제가 끝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행하는 놀이다.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만든다. 과일, 떡,  밥, 고기 등 제물을 놓고 허수아비를 여러 개 만들어 태우며, 온갖 액운을 실어 떠내려 보낸다.
  27. 전북 부안군 부안읍성 돌장승(220쪽)
  부안읍에는 동문과 서문을  지켜주는 돌당산이 전해진다. 동문안  당산은 부안읍 동죽리에 있으며 김제에서 부안으로 들어가는 23번국도변의 중앙주유소 옆에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돌장승이 도로 양편에 서 있다. 돌장승은 남녀 한 쌍으로, 화강암으로 투박하게  조성되었다. 남신은 당산하나씨, 당산할아버지, 문지기장군이라고 불리며 상원주장군이란 명문이  있다. 여신인 당산할머니는 하원당장군으로 양미간에 백호가 있으며 눈망울이 이중으로  퉁겨져 나왔다. 서문안은 부안군청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원불교당 건너편에 있으며 할머니장승과 할아버지장승, 돌솟대 2기를 한군데 모아놓았다.  서문안 솟대당산에 숙종 15년(1689년) 명문이 나와 있어  조선 후기에 이룩된 민속문화임을 알려준다. 동문과  서문 당산은 전북지방의 전형적인 돌장승 및 돌솟대문화권을 상징한다.
  28.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 대웅전 도깨비문양(21쪽)
  변산반도의 자연조건은 들판과 산, 바다를 고루 갖추었다. 백제 고찰인 내소사와 개암사가 유명하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설하였다. 절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꽃창살문양의 아름다움으로  유명세를 탔으며, 문 아래를  살펴보면 도깨비문양이 있다. 대개의 사찰에 있는 것과 비슷하나 오래 된 고형이라 눈낄을 끈다.
  29.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필봉 풍물굿(111쪽)
  전주에서 27번국도로 가다가 옥정호를 지나면 깊숙한 산자락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길가에서 수백  미터만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붓같이 생겨서 필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뾰족한  봉우리 아래로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산등성이에 의지하고 모여 있다.  필봉은 호남 좌도풍물굿 칠채가락을 꾸준히 대를  이어 보존하고 있다. 들당산굿, 날당산굿, 당산제굿, 샘굿, 뜰볼비굿, 판굿, 문굿, 두레굿, 이사굿, 매굿  등으로 이어진다. 좌도풍물굿을 배우려는  이들이 해마다 연수를 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30. 전북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 돌장승(222쪽)
  88고속도로 지리산 톨게이트를  이용하거나 남원에서 24번국도로 운봉을 거쳐 인월장터에서 1084지방도로를 따라  산내면 소재지를 지나 3킬로미터쯤 가면 나온다. 실상사 입구에서  해탈교 건너기 전의 개인집  앞에 옹호금사축귀대장군이 있고, 2백여 미터  떨어진 실상사 입구에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이 각각 서 있다. 조선 후기 민중예술의  결정판으로 높게 평가된다. 오른쪽 논길로  걸어서 3백여 미터를 가면 논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뛰어난 선돌을 덤으로 볼 수 있다.
  31. 전북 남원시 운봉면 북천리 돌장승(222쪽)
  운봉면의 도서관에서 인월 방향으로  9백 미터쯤 가다 보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다리 못미처에서 왼쪽 신기리 방향으로 50미터쯤 떨어진 신기리.북천리 경계에 2기가 마주보고 서 있다. 마을 입구의 논가에 서서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동방축귀댕장군과 서방축귀대장군인데, 이 책의  사진에 보이는 장승은 동방축귀대장군이다. 마을에서는 장성, 법수,  벅수라고 부른다. 매년 음력 정원 초사흗날 찾아가면 당산제를 볼 수 있다. 남원에는 돌장승이 유난히 많다. 운봉 근처만 해도 아영면  의지리 개암주마을, 운봉면 권포리,  운봉면 서천리 웃물애기에 해당 마을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32. 전북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안대실마을 바위그림(46쪽)
  남원에서 순창 방향 24번국도를  타고 가다가 대곡리 방향으로 북상하여 88올림픽고속도로 밑을  관통하며 죽동초등학교를  거친다. 일명 봉황대라고  불리는 바위의 암면에 '패형암각'으로  새겨져 있다.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분지에 있으며 서남쪽에 작은  개울을 끼고 있다. 패형암각은 2개소에서  확인되는데 성혈도 패어 있다.
  33. 전북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돌장승(224쪽)
  남원시에서 화순 동복으로 내려가는  29번국도상에 위치한다. 가곡리 여장승은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여장승 머리형태는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어여머리형에 삼산관을 쓴 것처럼 세 부분이  돋음새김되어 있다. 얼굴도 달걀형으로 턱선이 후덕하다. 남장승은 몸 전체가 이끼로 덮여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지금은 들 가운데 서 있지만 원래 위치는  그 아래 다리목이다. 도난을 방지하고 역병을 퇴치하는 수구막이 기능을 지닌다.
  34.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돌장승(219쪽)
  순창읍에서 남원시로  가는 도로에서 1백여 미터  들어간 제방에 세워져 있는데, 중요민속자료  1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돌형의  돌을 풍수비보적인 역할로 세웠다. 양미간에 백호가 선명한 점으로 미루어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사례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동제와 장승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바로 인근인 순창읍 충신리에도 남계리  장승과 거의 흡사하게 생긴 돌장승이 전해오는데 마찬가지로 풍수비보를 위하여 세웠다.
  35.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구림동 회사정(272쪽)
  영암읍내에서 819번 지방국도로 구림동으로 들어가면 구림중학교 앞에 회사정이 있다. 구림동 복판에  해당되는 위치다. 지금도 여름이면 마을의 노인들이 모이는 중심지이며,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장소이기도 하다. 회사정을 창립한 구림대 동계에 관련된 자료는 청사인 강수당에 소장되어 있다.
  36.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구림동 국장생(214쪽)
  동구림리에 황장생  1기, 서구림리와 동구림리에서 도갑사로  들어가는 동중의 죽정리에 국장생이 서  있다. 고려 시대에 세운 장생으로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기능을 지녔다.
  37. 전남 광주시 광산구 옻돌마을 당사나무(85쪽)
  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될 만큼 널리 알려진  광산 고싸움놀이가 전승된다. 호남고속도로 비아 인터체인지에서  13번국도로 내려가다가 다시 22번국도로 접어들어 819번 지방도로를  이용한다. 놀이를 벌이기 전에 으레 마을에  서 있는 당할머니에게 가서,  옛부터 서낭나무로 부르던  금줄 두른 당나무  밑에 광목으로 포장을 두르고 제를 올린다. 옻돌마을의 당목은  8백여 년 이상 된 은행나무로서 높이 26미터, 전체 둘레 13.3미터에 이를 정도로  나무의 크기나 형태에 있어, 보는 이가 압도 당할 만한 위풍을 보여주고 있다.
  38.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쇄원(275쪽)
  조선 시대 중종조의  양산보(1503-1557년)의 정원으로, 사적 304호로 지정되었다. 양산보가 삼십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사십대에 완성하였다. 소쇄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초가정자인 대봉대, 가장 높은  곳에 세운 제월당, 중심공간에 세운 광풍각 등이 전해진다. 우리 나라  정원의 대표격으로 누정문화의 본산이기도 하다. 담양과 화순 사이 광주호 못 미처에 자리잡고 있다. 식영정 앞에서 88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대나무숲 사이로 소새원  가는 좁은길이 하나 있다. 식영정.취가정.독수정.환벽당.풍암정  같은 누정문화를 주위에서 가깝게  들러볼 수 있다.
  39. 전남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불회사 사찰장승(222쪽)
  운흥사 입구에서 818번 지방도로를  타고 화순 방향으로 3킬로미터쯤 가면 길강 불회사 입구가  나온다. 길목에서 불과 1킬로미터 들어가면  불회사장승을 만날 수 있다. 버스도 들어가며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사찰 입구 전방 3백 미터 도로 좌우에 있는데 여장승은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 있다. 누군가 남장승의 명문 하원당장군의 하자를  왕 자로 장난을 쳐놓았다. 장승의 표정은  한결같이 조선 후기 민중이 꿈꾸었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으며 당대의 미학적 정서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순조 8년(1808년)에  건립한 불회사 대웅전도 볼 만한다.
  40. 전남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운흥사지 사찰장승(222쪽)
  나주 남평에서 819번도로로 가다가  송현에서 화순 운주사로 빠지는 818번 지방국도로 접어든다. 암정  버스정류장에 운흥사 방향 표지판이  있으며 암정마을을 거쳐 청산농장  있는 곳까지 6킬로미터 정도를 간다. 길이  좁을 뿐더러 마지막 구간은 비포장도로이며 버스는 들어갈 수 없다. 길목에 할머니, 할아버지장승 2기가 서 있다. 운흥사지는 한국전쟁 때  완전히 사라져서 밭과 살림집으로 변했다. 운주사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함께 들러봄직하다.
  41. 전남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총지사지 돌장승(222쪽)
  호남선 몽탄역에서  3킬로미터만 들어가면 총지사지가 나온다.  한적한 산야로 접어드는 길로, 이름만  절터일 뿐이지 1810년 무렵에 일찍이 절이  사라져서 주초석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 돌장승은 민속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달산 북쪽에 있다.  마을 입구에 장승 2기가  마주보고 서 있는데  할머니와 할아버지 한 쌍이다.  자연석을 잘 살리면서 얼굴부분만  다듬었는데, 조선 현종  7년(1666년) 총지사를 중건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42. 전남 무안군 몽탄면 법천사지 장승(222쪽)
  무안-목포간 1번국도변 구암에서 815번 지방국도로 들어가면 감돈저수지가 나온다. 거기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들어가서 달산저수지를  지나자마자 법천사지에 이른다. 총지사지 장승과  바로 인접한 승달산 남쪽 지역에 있으며, 전라남도 민속자료 24호로 지정되었다. 인자한 할아버지장승과 할머니장승이다. 돌탑을 쌓아서 그 위에 올려 두었다. 수줍은 표정에서 순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나온다.
  43. 전남 진도군 진도 씻김굿(297쪽)

  이승에서 풀지 못하고 맺혀  있는 망자의 원한을 풀어주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굿이다. 무형문화재 72호로 지정되었으며 진도에  사는 단골무당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박병천패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조왕반,  안땅, 혼맞이, 초가망석, 처올리기, 손님굿, 제석굿, 고풀이,  영돈말이, 이슬털기, 왕풀이, 넋풀이, 동갑풀이, 약풀이, 넋올리기, 손대잡이, 희설, 길닦이, 종천 등의 굿거리로 이루어진다.
단골패에게 직접 연락하여 굿에 참관할 수도 있지만 유족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진도에는  소포리마을같이 진도 나름의 민요가  잘 전승되는 마을도 많으며, 비교적 전래문화가 잘  전승되고 있다. 운림산방, 남도석성,  용장산성 따위를 들러볼 만하며, 진도 홍주는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진 술이다.
  44. 전남 진도군 진도 다시래기(298쪽)
  출상 전날  밤에 밤샘을 하면서  노는 익살스러운 놀이로,  무형문화재 81호로 지정되었다. 다시래기는 공연화되어 특별한 날  이외에는 하지 않는다. 사당놀이, 사자놀이, 가상주놀이,  상여놀이 등으로 이루어진다. 진도에서  장례식이 벌어지면 다시래기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자들도 동참하는  특이한 의례를 늘 볼 수 있다. 다시래기를 보고자 한다면 진도문화원에  연락하여 협조를 구하는 편이 좋다.
  45. 전남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비자나무(99쪽)
  높이 9.2미터의 웅장한 거목(천연기념물 111호)으로  천년 세월을 자랑한다. 산등성이를 타고 비스듬하게 눌러 앉은 이 마을의 비자나무 아래는 마을 사랑방으로 이용된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온 마을사람들이  나무 아래에 모여서 소나 돼지를 통째로 잡아놓고 제사를 지낸다. 마을을  남녀로 갈라서 벌이는 줄다리기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진도읍내에서 남도석성 가는 길로 18번국도를  타고 가다가 801번 지방국도로 접어들어 상만초등학교 있는 곳에서 정차하면 된다.
  46. 전남 신안군 관매도 후박나무(99쪽)
  수령 8백 년, 높이 18미터의 거목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은 물론이고 마을성황님으로 정초에 모셔진다. 천연기념물  212호로 방풍, 방사 기능을 하는 귀한 수목이다. 마을에서는 이 후박나무를 비롯한 일대  수림을 성황님으로 받들어 매년 정초에 마을제를 연다.

  47.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장춘동 대둔사 목장승(226쪽)
  해남에서 827번 지방국도로 10여 킬로미터 접어들면 남도의 거찰 대둔사에 이른다. 매표소에서 경내까지  장장 십 리에 달하는 장춘동 숲길은  경관이 뛰어나다 부도탑과 일주문을 지나 삼진교를 건너면  중심건물인 대웅보전과 침계루, 백설당 등에  닿는다.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당, 처영스님의 유품과 영정을 봉안한 표충사도  있다. 우리 나라  다도의 명인 초의선사가  차문화를 일으켰던 일지암도 널리 알려졌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 길목의 숲가에 목장승 2기가 서 있다.
  48.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 굴뚝(249쪽)
  해남에서 완도로  내려가는 13번국도의 월송에서  땅끝으로 향하는 1번국도로 가다가 서정에서 왼쪽으로  접어든다. 기암절벽이 10여 킬로미터  병풍처럼 두른 산자락에 안겨  있다. 우리 나라 제일  남쪽에 있는 절 중의  하나이며 고즈넉한 산사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봄에 가면 동백나무꽃의 진한 풍경을  볼 수 있으며, 가을에는 기암절벽에 물든 단풍의 멋을 즐길 수 있다. 미황사 대웅보전과 부도밭이 유명하다. 대웅보전 주춧돌에 새긴 거북,  게 같은 문양이 특이하며, 기왓장을 마구 쌓아올린 소박한 굴뚝이 눈길을 끈다.
  49. 전남 완도군 군내리 주도 상록수림(100쪽)
  천연기념물 28호로 우리  나라 상록수림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숲이다. 주도는 군내리 바로 옆에 있는 섬으로 각종  상록활엽수로 덮여 있다. 조선 시대에도 봉산으로서 채벌을 금지하였으며,  중앙에 서낭당이 있어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 옛날의 원시림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신성스런 숲으로 알려진다. 완도읍내에서 5분 거리다.
  50. 전남 완도군 장좌리 당산굿(125쪽)
  완도 연육교를  지나서 13번국도로 완도읍을 향하면  길목에 장좌리가 나타난다. 마을 앞섬을 장도라  부르며 옛 청해진 유적지다. 장도에서는 장보고 당시의 목책이 그대로 발굴되었으며 대대적인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섬 정상에는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이 있으며  그 안에 당집이 있어 송징 장군을 주신으로 모신다. 매년 정월 15일 새벽이면 횃불을  켜들고 풍물을 치면서 섬으로 걸어 들어간다. 일출에 맞추어 제를 집행하며  음복을 끝내고 9시경에 마을로 돌아오는데, 밀물이 들어오는 때이므로 배를 타고 풍물을 치면서 돌아온다. 아침바다에서 풍물소리를 듣는 멋이 그만이다. 물에  도착하면 정자나무당산 밑에서 우물굿을 치면서 굿을 끝낸다.
  51. 전남 완도군 노화읍 보길도 예송리 산신당고랑(99쪽)
  예송리는 보길도 동남쪽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바닷가를 따라서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펼쳐져 있다.  예송리 산골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큰 하천은 산신당고랑, 작은 하천은 우대미고랑이라 부른다. 산신당고랑은 이름 그대로 예송리  당에 인접하여 흐르기에 붙여진 말이다. 바닷가에서  위로 올라가 작은 계곡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숲이 나오고  하천에 바로 인접한 나무들 중에 거대한  당산나무가 서 있다.  상록수림과 동글납작한 검은  자갈밭이 가득 깔린 아름다운 바닷가가 있어, 늘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52. 전남 완도군 노화읍 보길도 고산 유적지(271쪽)
  해남 땅끝마을의 선착장에서  노화도를 거쳐 가는데, 뱃길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뱃길 자체가 아름다운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잔잔하고 고즈넉하다. 선착장에서 1.5킬로미터 정도  가면 보길초등학교에 맞부터 있는 세연정에 이른다.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우러진  우리 나라 원림의  대표격이다. 낙서재는 부용리사무소까지 가서  5백 미터 정도 가면  나오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서  5백 미터 정도 동백나무 같은 활엽수가 우거진 숲을 지나면 산정에 동천석실이  나타난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보면 부용동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53. 전남 강진군 병영면 하고마을 벅수(219쪽)
  병영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독특한 형태로 전해오던 벅수다.  1984년 도난당하여 지금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는데 다행히 사진은  전한다. 원래 병영성에서 불과 3백 미터 떨어진 흥교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54.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돌장승(219쪽)
  장흥읍내에서 좀  더 밑으로 내려와  남해 바닷가로 나가면  관산읍에 닿는다.
남도의 명산인 천관산 자락에, 위씨의 증시조라고  하는 위백규의 사당이 자리잡은 유서 깊은  방촌마을이 나온다. 관산읍에서 방촌리로 가자면 작은  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길  양옆에 돌장승과 벅수가 서 있다. 돌장승은  진서대장군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남장생,  벅수 또는 진서대장군이라 부른다. 반면에 반대편 것은 미륵, 미륵석불, 돌부처,  여장승 등 다양하게 부르며 명문이 없다. 벅수는 왕방울 눈에 굵은 테가 있고 코가 둥글며  코, 입, 눈이 분명하다. 화강암을 사각으로 다듬어  조형했다. 건너편의 미륵은 풍만한  여성같이 통통한 몸체다. 두상이 오히려 하체보다 길어 가뜩이나 투실한 얼굴이 더욱 비대하게 느껴진다.
  55. 전남 승주군 죽학리 선암사 목장승(220쪽)
  남해고속도로로 승주  인터체인지에서 들어간다. 매표소에서  승선교로 걸어가다 보면  길가에 장승 2기가 마주보고  서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찰장승으로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현재의 것은 근자에 새롭게 세운 장승이다. 방생정계, 호법선신이란 명문이 있다. 인근에는  낙안읍성, 금둔사지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다.
  56. 전남 여수시 오림동 고인돌 바위그림(46쪽)
  여수반도 연등천 지류인 개울이 흐르는 곳이다.  남방식 고인돌에 석검 모양을 선명하게 새긴 바위그림이  있다. 바위그림 전문가들의 현지조사에 따르면, 내려꽂힌 듯한 모습을 새긴 한단자루돌검 한 자루를 향해 무릎 꿇고 손을 모아 경배하는 사람과 그 뒤에 서서 바라보는 사람,  무언가를 찌른 듯한 비파형투겁창 한 자루, 또  다른 사람이 무릎을 꿇고  별을 향해 경배하는 듯한  불확실한 그림이 있다. 고인돌에 석검을 새긴 독특한 사례다.
  57. 전남 여천시 흥국사 도깨비형상 석수(21쪽)
  여천공단 바로  옆에 위치한다. 공해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여천공단 옆이라 사찰도 위기에 처해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1195년에 사원을 개창하였으며 승군들이 주둔하던 사찰이다.  인근의 남해 보리암, 돌산 향일암과 함께 관음신앙 도량이다. 원통전을 따로 짓고 대웅전  후벽의 관음벽화, 대형괘불, 더 나아가 만일염불회 결성  등이 모두 관음신앙과 연결된다.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유추되는 귀면 석수가 전해지고 있다.
  58. 제주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 할망당(81쪽)
  제주시내에서 16번국도로  가거나 조천에서 와흘리로 가는  지방도로로 갈 수 있다. 도로변에 아담한  담을 쌓아 두었는데 거대하고 우람한 신목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길가에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숲 속에 둘러싸인 와흘당은 여신과 남신이 결합하여  있고 허정승의 따님을 주신으로 모신다. 매년  정원 14일과 7월 14일에  제를 올리며 마을민들의 지극적성은  여전하다. 오래 된  고목은 그 자체에서 신앙심을 자극한다.
  59. 제주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당 도깨비굿(30쪽)
  제주시 동족의 건입동에는  바닷가에 칠머리당이 있었다. 현재는  선박이 들어서는 부둣가로 변하였고  칠머리당은 인근 사라봉의 정상으로  옮겨갔다. 칠머리당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룻날 영등신을 맞이하는 영등손맞이굿과 2월 14일에 영등신을 보내는  영동송별제가 이루어진다. 굿이 파할  무렵에 영감도깨비굿이 시작된다.  영감은 멸치를 몰아다 주는  도깨비다. 도깨비굿을 마치면 작은 짚배에 액운을 실어 멀리 바닷가로 띄워 보낸다.
  60. 제주시 월평동.영평동 다라쿳 본향당(99쪽)
  제주시내에서 16번국도로  조천읍 쪽으로 가다 보면  월평동과 영평동 사이에 다라쿳이 나온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 부부신이 자리잡고 있다. 제주상고 앞  동산 '신대기마루' 과수원 안에  있다. 남신 산신백관은  한라산에 솟아난 토착신으로, 수렵  목축의 신이며 마파람의 신이며  육식을 하는 부정한 신이다. 여신은 강남에서 온  외래신으로 농경신이며 하늬바람의 신이다.  본향당 앞에는 깨진 그릇이 쌓여 있다. 그릇을 깨고 와야  아이의 그릇 깨는 버릇이 고쳐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61.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신양리 하로산당 영등굿(146쪽)
  제주시에서 12번 해안일주도로로  성산일출봉으로 널리 알려진 성산을 지나면 신양리에 닿는다. 신양리는 반도로 튀어나온 섭지코지가  있는 아늑한 마을로 모래톱이 발달하여 신양해수욕장이  있다. 마을로 깊숙이 들어가면  바닷가 용암바위가 널린 곳에 신양의  본향당인 하로산당이 위치하며 현존하는 영등굿의 제장으로서 유명하다. 매년  음력 2월 15일에 하로산당에 가면  전형적인 제주도당굿을 구경할 수 있다.
  62. 제주 제주시 삼양동 본향당(103쪽)
  제주시내에서 12번 우회도로로 화북을  거쳐 삼양동까지 불과 10여 분이면 도착한다. 아직도 전형적인 어촌이다.  일명 '설개' 본향당이라 부르며 어부에게 고기잡이의 풍어를 가져다 주는 신이라고 믿는다.
  63. 경북 문경시 원터 유적(258쪽)
  1977년 문경 새재의 제1관문 안에 있는 원터를 발굴하다가 구들고래를 발견하였다. 알맞은 크기의  산돌과 개울돌로 쌓은 고래가 고려 시대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터라고 부르는  곳은 제1관문에서 제2관문으로 가는 길의 계곡  속에 자리잡고 있다.
  64. 경북 영주시 가흥동 바위그림(46쪽)
  영주시내를 관통하는 내성천 지류인  서천이 굽이도는 지점에 외따로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서천변에 돌출한 별봉(해발 158미터)의 동쪽 사면 끝자락에 있는 수직의 자연  암면 하단에 새겨져 있다.  예전에는 앞쪽이 범람하던 저습지였다. 패형암각이 새겨져 있다.
  65. 경북 상주시 남장동 남장사 돌장승(222쪽)
  남장사는 신라 흥덕왕  7년(832년) 진감국사가 창건하였다.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탱화로 알려진 남장사 목각후불탱화가 있다. 상주시내에서 남장동 방향으로 들어가면  절 못미처에 돌장승 2기가 철책 안에 서 있다.  조선 후기 것으로 짐작되는 남장상 돌장승은  같은 시대의 전라도지방 것과는 다르게  수줍은 듯한 표정이다. 조형양식의  독특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66.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바위그림(46쪽)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진  임동면 수곡동 한들마을에 있다.  신선바위에 윷판형 기하문양과 말굽형 기하문양이  암각되어 있다. 안동 수곡리에서  유일하게 말굽형이 발견되었다. 임세권(안동대)은  셔성의 성기로 해석되기도 하며,  말굽형 도형 내부에 직선이 들어 있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상태로 추정하기도 한다.
  67. 경북 영천시 청통면 보성리 바위그림(46쪽)
  금호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봉수마을 앞에  놓여진 바위의 윗면에 바위그림이 새겨져  있다. 거북이같이 생겼다고 하여  거북바위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앞 논에 파묻혀 있던 것을 옮겨놓았다. 이 바위를 처음 발견한 송화섭(원광대)은 고인돌의 상석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68. 경북 울진군 근남면 신포리 망양정(276쪽)
  관동팔경의 하나다. 울진읍내에서 동해안 7번국도로 조금 내려가면 나온다. 아름다운 동해를  굽어보는 누정 아래에는  평평한 해암인 임의대가  펼쳐져 있다. 인근 근남면 구산리에는 천연기념물 155호인  성류굴이 있다.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는 장장 15킬로미터에  달하는 불영계곡이 있으며 신라 고찰 불영사도 있다.
  69. 경북 경주시 석장동 금장대 바위그림(52쪽)
  1994년 4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학술조사팀이 세상에 소개하였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근처의 금장교를  927번국도로 넘어가자마자 차를 세운다. 산으로 20여  분 오르면, 천하의 절경에 금장대가 있다.  밑으로 형산강 상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높은 산정의 깎아지른  곳에 자리잡아 인근 일대가 훤히 굽어보이는 전망대다. 기하학적 문양이 발견되었다.
  70.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장항사터(15쪽)
  경주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뒤편이다.  경주시내에서 4번국도로 추령고개를 넘다가 우회전해야 한다. 지금은 토함산에서 직접 관통하는 도로가 뚫렸다. 한적한 곳이어서 찾는 이들이 드물다. 그러나 유적으로  미루어보아 예전에는 상당한 수준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대좌가 중앙에 자리잡은 금당터가  남아 있고 오층석탑 2기가 서 있다. 장항리의 석조여래상은  도굴범에 의해 조각난 것을 대충 수리하여 경주박물관 뜰에 내놓았다. 석탑도 한  개는 온전한 편이나 한 개는 몸돌이 없다. 일층  몸돌 양쪽 우주 가운데에 도깨비문양이 새겨져  있고 좌우로 인왕산이 지키고 있다. 이 도깨비문양은 같은  시대의 도깨비와당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당대 유행품임을 알 수 있다.
  71. 경북 경주군 양북면 용당리 문무대왕 대왕암(306쪽)
  뼈를 뿌린 산골처로 알려진다. 감포 앞바다에  위치하며 한때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졌으나 당대  장법으로 보아 납골을 뿌린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보물 만파식 적을 얻었다는 이견대가 있으며 우현  고유섭 선생의 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서 있다. 감은사터가 입구에 있어 경주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기도 한다.
  72. 경북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201쪽)
  390미터 높이의 아담한 산이다. 선도산은 서산, 서술산, 서연산, 서형산 등으로 불린다. 무열왕릉 옆으로 난 길로 1.5킬로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며 차는 올라갈 수  없다. 경주국립공원 서악지구로 서악산성이  있는 곳이다. 선도산 성모 사소가 자리잡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사소는 이 산에 거처를 정하여  신라의 시조왕 부부인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을 낳았다고  한다. 선도산 성모가 신라 개국 이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신라를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김유신의 누이동생 보희가 왕비가  될 길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서악동에는  7미터 거구의 삼존불상, 통일신라 모전석탑계열인  삼층석탑, 문무왕의 공적을 새긴 귀부 등이 전해진다.
  73.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인비리 바위그림(45쪽)
  1985년 경주박물관에서  발견하였다. 31번국도에서 영일군  기북면으로 빠지는 길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논바닥에 고인돌이 있으며 석검 2점, 석촉 1점이 암각되었다. 기계천이 흐르는 물가에 위치한다.
  74.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바위그림(46쪽)
  1989년 11월, 포항제철 고문화연구회에서 발견하였다. 칠포리는 포항에서 흥해로 가서 칠포해수욕장 쪽으로 가면 된다. 비학산  줄기가 흥해 들의 넓은 벌판을 열고, 이를 감싸듯 흐르는  지맥이 곤륜산으로 높이 솟아 있다. 곤륜산과 마주보는 오봉산 사이를 소동천 작은 개울이 흘러  이윽고 바다에 닿는다. 아름다운 포구마을로, 곤륜산 일대에 바위그림 유적지가 널리 퍼져 있다. 칠포마을을 가로지르는 소동천 남쪽 일대의 쌍두들, 농발재,  신흥리 오줌바위 일대, 곤륜산 일대에 걸쳐 전체 5개소, 총 11종의 바위그림이 분포되어 있다.
  75. 경북 고령군 고령읍 양전동 알터마을 바위그림(45쪽)
  고령읍 남동쪽에 낙동강 지류  가천과 서남쪽의 안림천이 합치는 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고령읍에서 26번국도로 회천교를 건너  양전 쪽으로 가다가 웃알터를 찾으면 된다. 양쪽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의 동쪽 산자락(금산재) 아래에 있다. 동심원과 패형암각을 만날 수 있다.
  76. 경북 고령군 쌍림면 안화리 바위그림(45쪽)
  88고속도로 고령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서  바로 안화장터를 찾아가면 된다. 양전리 회천의 지류인  안림천 상류 냇가에 자리잡고 있다. 양전동  알터 바위그림에서 상류 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거슬러 올라간 안림천변의 구릉 하단 경사면에 있다.  양전동에 비하면 바위그림의 양이  적은 편이며, 패형암각이 새겨져 있다.
  77. 경북 청도군 운문사(21쪽)
  560년에 한 도승이 대작갑사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절을 찾아들면 호거산 운문사와 운문  승가대학이란 두 개의  돌기둥이 산문을 대신한다.  국내 최대의 비구니 강원이다. 해발  천여 미터를 넘는 가지산 도립공원의 수려한  산세와 물 맑은 계곡으로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절경에 자리잡았다.  보물 316호인 원응국사비, 317호 석가여래좌상, 318호  사천왕부조석상 등이 있다. 운문사의 문이나 단청에는 여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도깨비문양이 많은데 그림 수준이 격조 높다. 언양에서  24번국도로 산굽이를 구비구비 넘다 보면 얼음골, 석남사 같은 명승지가 널려 있다.
  78.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상리 벽송사 목장승(219쪽)
  남원 인월에서 1084번국도로 함양을 가다가 마천 의탄교에서 추성동으로 오른다. 벽송사까지 비포장길을 올라가야 하는데 상당히 가파르고 길이 험한 편이다. 버스는 아래 칠선산장에  세워두고 올라가야 한다. 입구에 나무장승이 한  쌍 서 있는데 호법대신.금호장군이다.  전형적인 사찰수호신으로, 툭 튀어나온  눈과 파격적인 조각솜씨가 눈길을  끈다. 금호장군은 절반쯤 사라졌으며  호법대신도 비바람에 썩어가고  있다. 사찰 목장승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사찰 바로 입구에 이들 장승의 후계자를 한 쌍 세워 두었다.
  79.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지리산성모상(203쪽)
  산청군 단성에서  20번국도로 천왕봉  쪽으로 올라간다. 아스팔트가  매끄럽게 깔려 있으며 중산리 매표소  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중산리 중턱 천왕사에 성모상이 있다. 해방  이후에 한때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사연을 거쳐서 이곳에 모셔졌다. 푸른색의 특이한 돌멩이인  성모상은 다부지게 살아온 인생역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은 석상이다. 성모상을 보러 가는 길에는 대원사, 단속사지, 덕산서원 같은 문화유산이 있다.
  80. 경남 하동군 화개면 칠불암 아자방(264쪽)
  구례-하동간 19번국도상에 쌍계사  입구 화개장터가 나온다. 화개천을  따라서 산길로 접어들면  가파르긴 하지만 칠불암까지  승용차로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봄이면 가는 길목에 벚꽃이  만개하여 꽃맞이를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칠불암은 산정에 의지한 암자인데 일반 사찰과  비슷할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화상이 만들었다는 신비의 선방이다. 칠불암에서 6시간 여를  등반하면 뱀사골산장과 토끼봉에 다다르며, 남원군 뱀사골로 넘어갈 수 있다.
  81. 경남 진주시 남성동 촉석루(275쪽)
  남강의 벼랑 위에 솟아 있는 촉석루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누각이다.  진주성 맞은편에 자리잡아 남강물에 비친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려 공민왕 때  축조했다.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장소가 바로 촉석루 밑의  의암이다. 그녀의 넋을 기려서 촉석루 옆에 의기사를  지어 논개의 사당으로 삼았다. 일제 시대까지도  잘 이어져오던 촉석루는 한국전쟁 때 온전히 소실되어 1959년에 새롭게 세웠다.
  82. 경남 밀양시 밀양백중놀이(241쪽)
  밀양시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5분  거리인 야트막한 산정에 백중놀이전수회관이 있다. 매년 백중날 놀이를 재현하며 예전에는  삼문동 강가에 있는 긴늪의 소나무숲에서 놀았다. 놀이를  전수하기 위하여 해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온다. 중요무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으며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으로 이루어진다.
  83. 경남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275쪽)
  우리 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힌다.  밀양을 굽이쳐 돌아가는  밀양강 가 절벽 위에 세웠다.  거창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의 누각에서 조선 시대  누각 건축술의 뛰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 밀양팔경의  제1경인 영남루 추월은 밀양강 가에 우뚝 솟은 영남루  누각 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가을달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옆에는 아랑사가 있어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넋을 위로하고 있으며,  해마다 아랑제를 열고 있다.
  84. 경남 울산시 울주구 언양면 대곡리 바위그림(37쪽)
  울산의 중심 하천인 태하강 지류인 대곡천  암벽에 위치한다. 사연댐으로 막힌 하류를 향한 계곡의 오른쪽  절벽, 강물과 잇닿은 부분에 새겨졌다. 언양 불고기로 유명한 언양읍내에서  24번국도로 들어간다. 경북.경남 내륙지방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바위그림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길이 좁아  버스는 접근할 수 없다.  승용차로 들어가서 입구의 음식점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가야 한다. 병풍을 두른 듯한  바위가 서 있고 맑은 물이 절경이다. 바위그림이 있는 바위는 석양 무렵을 제외하곤 늘 응달이므로  사진 찍기가 쉽지 않다. 바닷짐승, 뭍짐승, 사람, 도구 등이 새겨져 있다.
  85. 경남 울산시 울주구 두동면 천전리 바위그림(47쪽)
  대곡리 바위그림과 가까운  거리이나 산이 깊어 돌아가야  한다. 언양읍내에서 35번국도로 북상하여 천전리로 들어간다. 요양소를 지나  계곡 입구에 차를 세우고 5분여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산세로  따지면 반구대 바위그림  앞을 흐르는 대곡천 중상류지역에 해당된다. 철책으로  보호각을 둘렀는데 암벽의 보존상태는 대곡리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사슴 같은  뭍짐승, 사람 얼굴, 여러 가지 기
하무늬, 명문 등이 새겨져 있다. 대곡리에  비하면 차량접근이 쉬운 편이다. 1970년 문명대 등이 발견한 이래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86. 부산시 금정산 범어사 도깨비 석수(21쪽)
  범어사는 부산시내 금정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의상대사 화엄전교십찰 가운데 하나이다. 범어사에는 층계 입구를 수호하는 귀면호계석이 있다. 인격화된 귀면과 네발동물의  발로 이루어졌다. 껄걸 웃는 도깨비 얼굴에  두 발만을 살짝 드러낸 형상이다. 무서우면서도 과장된  표정이 기괴하고 때로는 우습기조차 하다.
  87.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돌벅수(225쪽)
  충무시로 들어가 미륵섬을  건너 미륵섬 일주도로로 원당마을까지  간다. 원당은 포구  마을로 횟집이 들어서 있고  인근 도서로 가는 연락선이  뜨는 곳이다. 원당마을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돌로 만든 벅수  한 쌍이 있는데 몸이 파묻혀서 머리만 드러나 있다. 아주 토속적인  모습으로 자못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벅수 있는  곳에서 산을 오르면 장군봉이 나오고 장군봉  꼭대기에는 목마로 된 장군신을 모신 신당이 있다.  장군봉에서 내려다보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절경이 그만이며,  미륵섬을 한 바퀴 일주하는  답사도 일품이다. 특히 미남리의 미륵사는 오늘날 지은 절이기는 하지만 절경에 자리잡은 명찰이다.
 

주강현
  경희대에서 '두레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경희대에서 '한국민속학', '민중생활과 민속',  '민속미술연구'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역사민속학회 이사로 있다.

그 동안 우리 문화와 관련한 집필에 주력해왔으며, 주요 저서로는 <굿의 사회사>,  <마을로 간 미륵>(1, 2), <조선땅 마을지킴이>,  <북한민속학사>, <북한의 민족생활풍습>, <한국의 두레>(1, 2),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2) 등이 있다.

<한겨레>에 연재한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저자는 민족문화의 현장은 물론이고 시베리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로 연구문대를 넓혀  자료를 수집할 만큼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민족문화유산연구실의 자료더미에 파묻혀 우리 문화의 원형을 탐구하는 작업에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