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증산도JeungSanDo/증산도 커뮤니티

그 날밤, 하늘과 땅은 온통 물바다

by 바로요거 2008. 3. 12.

[1] [2] [3] [4]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나, 눈 한번 깜짝하는 때에 개벽이 되느니라.
  되느라면 그처럼 빨리 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7:10:1)
 
 상제님께서 원일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양황 한 갑을 넣으면 천지가 물바다가 될지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운 것이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에 이르기 전에 쓰면 재앙만 끼칠 뿐이니라.” 하시고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서 부안 석교(石橋)를 향하여 뿌리시니,
  갑자기 그 쪽으로 구름이 모여들어 큰비가 쏟아지고
  개암사 부근은 청명하더라.
  상제님께서 원일에게 명하시어 “속히 집에 갔다 오라.” 하시거늘
  원일이 명을 받고 집에 돌아가니 그 아우의 집이
  방금 내린 비에 무너져서 그 권속이 원일의 집에 모여 있더라.
  원일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곧 돌아와서 그대로 아뢰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개벽이란 것은 이렇게 쉬운 것이라.
  천하를 물로 덮어 모든 것을 멸망케 하고
  우리만 살아 있으면 무슨 복이 되리요.”하시니라. (道典 2:56:3∼7)

 
 
(월간개벽 2002.10)

“나는 아직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서 나왔기 때문에!”
 

함순덕(여, 36세)/ 강릉 옥천도장/ 부포감/ 강릉시 병산동 거주


 
 그날 아침 나는 출근하기 위해 승용차에 올라탔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차량 와이퍼를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차에 올라타면서 직장에는 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시동을 걸고 나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그렇게 퍼붓고 있었다. 불끄는 소방차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 그렇게 비가 오고 있었다. 길가에 차량을 놔두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지대보다 마당이 낮았던 우리 집은 벌써 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아이들 둘(중1, 7살)과 남편도 학교와 직장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마당에서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우리 가족은 쉬지 않고 바가지와 양동이를 들고 물을 퍼냈다. 어느덧 벌써 오후 4시가 되었다. 이때쯤 전기와 전화가 끊겼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고들 있는지…’그러나 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날이 어둑해 지자 남편은 일찍 저녁을 챙겨 먹고 잠자리에 들자고 말했다. 간단히 저녁을 해 먹고는 누웠다.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자고 나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 때까지도 우리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연락 방법은 이 핸드폰뿐이었다. 시청의 재해 상황실에 근무하는 남편의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곧 동네 뒤에 있는 저수지가 무너저 내리려고 한다. 만일 저수지가 터지면 동네가 물바다가 되니 빨리 피하라.”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게 정말인가 보구나.’ 우리 식구는 다 일어났다. 방을 치우며 문틈을 통해 무심코 도로 쪽을 내다보니까 물이 찰랑찰랑 차 있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뜩하며 깜짝 놀랐다. ‘도로가 저 정도라면 그렇다면 앞마당은?’
 
 방문을 열고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물이 콸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물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마당으로 나가니 물은 벌써 허벅지를 차 오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아무 것도 못 챙기고 아이들만 들쳐 엎고 나왔다. 도로 위로 올라가니 아직 차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행이 시동이 걸렸다. 이때가 밤 10시쯤이었다. 이미 동네 사람은 다 빠져나간 뒤였다.
 
 두려운 마음이 들며 막 떠나려는데 앞집 할머니 두 분이 우리 쪽을 보고 외치고 있다. 같이 가자는 소리였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순간적으로 상황판단이 안되었다. ‘만일 차를 세우고 저 할머니들은 모셔와 차에 태운다면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만일 잘못되면 다 죽는다.’이렇게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기고 망설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차를 세웠다. 만일 저 할머니들을 안 태우면 죽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차를 세우고 할머니쪽으로 갔다. 잠시 뒤 할머니 두 분을 모시고 돌아왔다. 승용차 1대에 6명이 탄 것이다. 마을을 빠져 나와 친정집으로 가 할머니들을 모셔 놓고 우리는 시누이 집으로 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 것은 다음날 새벽 4시 무렵, 물이 다 빠진 뒤였다. 100여 가구가 사는 농촌 마을인 우리 동네(강릉 병산동)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니 물은 천장에서 한 팔 길이 정도를 남기고 꽉 찼다가 빠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큰 냉장고가 좁은 공간에서 둥둥 떠다니다 엉뚱한 곳에 엎어져 있었고, 가전제품이며 살림살이 등이 제대로 쓸 수 있도록 남은 것이란 거의 없었다. 온통 진흙물 흙탕물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물이 빠지고 난 이후부터였다. 사흘동안 수도물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씻을 물과 먹을 물이 없었다. 논이랑 밭이랑 모두 모래사장이 되어 버렸고 농민들을 실의에 차 있다. 올해 농사 망쳤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서 나왔기 때문이다.
 
 도장의 성도님들이 매일 같이 오셔서 다 도와주셨다. 수호사님도 오셨고 포정님도 오셨다. 도장 성도님들이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을 집안일을 하나하나 추스르기 시작했다.
 

(월간개벽 2002.10)

“너무너무 무서웠던 하루, 온세상이 모두 바다로 보였어요”
 

김정희(여, 30세)/ 강릉 옥천도장/ 강릉시 월호평동 거주


 
 2002년 8월31일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지나가던 그날,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아침 7시30분 경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는 비가 너무 많이 오고 또 태풍이 몰려온다고 하시며 될 수 있으면 직장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하루 빠지면 5만원이 까져요. 더군다나 오늘이 말일인데 꼭 가야해요.”이렇게 말하며 집을 나섰다. 그런데 밖을 나오니 강한 빗줄기가 온몸을 때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해.’하고 발을 몇 발자국 더 디디는데, 물이 벌써 무릎 반 정도까지 찼다. 빨리 헤쳐나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빗소리는 점점 커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단돈 5만원 때문에 직장 가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버스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좀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안개도 너무 자욱한 것 같고 비도 많이 오고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와야할 버스는 오지 않는다. 20분이 흐르고 30분이 흘렀다. 8시30분이면 와야할 버스가 아직 오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차들을 세워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서지 않았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바람도 강하게 불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직장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거의 집에 도착할 무렵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오늘 출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고 회사에 전화를 하고는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갑자기 거센 물길이 집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지하실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나, 오빠가 정신없이 물을 막았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 앞을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섬돌보(섬돌이라는 동네)댐이 터졌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러다가 말겠지’하고 있는데, 지하실을 채운 물이 계단 위로 치오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방에까지는 올라오지 않을 거야’생각했다.
 
 오빠는 부모님께 피신하자고 조르다가 친구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을 나간 오빠가 연락도 되지 않은 채 돌아오지 않는다. 오빠가 내내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히도 다른 민박집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진작에 피신할 걸”하고 후회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지금이라도 피신 가세요.” 했더니 “안돼, 무섭단 말이야.” 하시며 머뭇거리셨다.
 
 119구조대에 연락을 했다. 몇 번의 연락 끝에 간신히 연결은 됐지만 구조대에서는 올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미 물이 너무 많이 불어서 구조차가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우리보고 죽으라는 얘기로구나.” 하고 탄식을 하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은 점점 더 불어나고 위험을 알리는 싸이렌 경고방송소리만 귀전을 때렸다. 그 와중에 강아지 네 마리, 닭 다섯 마리, 토끼 한 마리를 방으로 들여오니, 정말 난장판이었다. 그날 따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춘천에 있는 명숙 언니, 대전에 있는 동생 연희, 오빠들, 그리고 도장에서….
 
 얼마 후에는 전기도 물도 끊어졌다. 오직 전화만이 외부와의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다. 나는 양초와 라이터를 준비하였다. 가슴이 정신없이 뛰면서 점점 겁이 났다. 물이 자꾸만 차 오르자 우리 식구는 밖으로 나가 장독대를 안으로 들여다 놓고 비닐로 문틈을 하나하나 막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는 통장과 현금, 도장을 챙기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이때 다시 전화가 왔다. 또 다른 댐이 터졌다는 것이다. 순간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하시는 것이었다. 춘천에 있는 명숙 언니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상황을 들은 언니는 “상제님 태모님께 간절히 빌면 반드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언니의 말에 나도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물을 퍼내시며 청수를 모시고 내게 주문을 읽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청수를 모시고 신단 앞에 앉았다. 무작정 심고문을 간절하게 읽고 기도를 올렸다. 나는 울면서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다. ‘저희 부모님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이때만큼 사람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적이 없다. 나는 계속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머리 속은 뒤죽박죽 ‘내가 신앙을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라는 후회감이 밀려들면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마지막이구나.’나는 다시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화장실, 다용도실에서도 물이 차 오르고 어머니는 계속해서 물을 퍼내셨다. 그러면서 “정희야!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이 계시고 우리 도장 신도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또 춘천과 대전에 있는 내 딸들이 기도하니까 분명히 우리는 살 수 있다. 나는 믿는다.”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 몰래 눈물을 흘리며 청수 앞에 앉아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조상님께 간절히 빌었다. 물은 출렁출렁 파도를 치고 바람은 강하게 불고 있었다. 너무나도 무섭고 소름끼치는 1분 1초의 순간순간이 이어졌다. 그날 밤 온 세상은 캄캄하고 세상은 모두 바다로 보였다.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물이 조금씩 빠진다는 것이다. 갑자기 내 눈에서 아주 뜨거운 눈물이 막 쏟아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진짜냐고 몇 번을 확인했다. 어머니는 뒷 베란다에서 밖을 보고 소리치셨다. 아버지는 갑자기 “아이고, 살았다.” 라고 하셨다.
 
 내 입에서는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조상님, 도장 성도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쉬지 않고 나오고 있었다. 물이 빠진 시간은 새벽1시 반쯤이었다. 칠흙 같은 사투(死鬪)의 밤, 세상이 온통 물로 덮이는 물개벽의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읽으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 비행장의 담이 터지면서 그 쪽으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월호평동에 있는 모든 집들이 방안까지 물에 잠겼지만 약간 지대가 높은 오직 우리 집과 옆집 두 집만이 마당에만 물이 찼을 뿐 더 이상 방안으로는 물이 차지 않은 것을 알았다.
 
 며칠 뒤 나는 성묘를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다시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우추리에 있는 증조할아버지 묘가 괜찮은가 싶어서 가 봤는데 오직 우리 할아버지 묘만 괜찮고 주위에 다른 묘들은 물에 쓸려나가고 형편도 없더라는 것이다.
 
 참으로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의 보살핌이 이렇듯 깊구나 하는 것을 깊이 되새겼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는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도장 성도님들 정말로 감사합니다’하는 기도가 계속되고 있다.
 

(월간개벽 2002.10)

 “물개벽, 하늘도 마비되고 땅도 마비되고 사람도 마비되다”
 

최우순(남, 36세)/ 강릉 옥천도장/ 포감/ 강릉소방서 119구급대원

 
 다음은 영동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던 물개벽의 그날, 119구급대원인 내가 겪은 하루를 스케치 한 내용이다.
 
 8월 31일 아침, 상제님 태모님께 청수 올리고 사배심고를 드리고 평소와 같이 출근길에 나섰다. 태풍 ‘루사’가 온다지만 그냥 평범한 비오는 날일뿐이었다.
 
 자동차에 올라 습관처럼 사부님의 청량한 소리에 맞춰 태을주를 읽으며 임계에 접어들었다. 태백으로 가는 다리에 물이 차 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괘념치 않고 삽답령을 향해 차를 달렸다.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는가 싶더니 금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었다. 삽답령 내려가는 길에 군데군데 산이 무너져 내린 것이 보였고, 산에서는 도로를 향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물이 쏟아져 내렸다.
 
 왕산에 다다를 때쯤에야 ‘무언가 심상치 않다! 이게 뭔 일이지’이런 생각이 들어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 조심하라는 당부를 했다. 오봉댐을 지날 때쯤 구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구조차가 오봉댐 위로 출동을 하다가 산사태로 도로가 막혀 10여 대의 차량이 정지해 있는 곳에서 돌아왔다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난 5분 여 정도의 차이로 그곳을 통과했다. 물론 그곳에서 정지해있던 차량 10여 대는 2차 산사태로 모두 흙더미에 깔려 버렸다.
 
 난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채 강릉시내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생겨난 물인지 온 시내가 물난리 그 자체였다. 차량으로는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터미널 앞에 차를 세웠다. 혹여 차가 침수될까봐 『도전』과 『우주변화원리』, 『증산도의 진리』 책만 가방에 넣고 허벅지까지 차는 물을 헤치고 1시간 여 만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도 물에 잠길 것 같아 ‘가방’을 캐비넷 위에 올려놓고 무전기를 들었다. 그런데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침수…침수…고립…떠내려간다! 지원요청 바람”
 
 혼란스러웠다. 처음 출동한 곳은 노암동! 출동로 곳곳이 물에 차서 몇 번을 우회하여 겨우 도착한 그곳은 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어디서 생겨난 물인지 배꼽까지 차 올랐고, 나이아가라 폭포 버금가는 속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이하게 생각하고 보트를 띄우고 진입을 했다가 하마터면 보트가 뒤집어질 뻔했다. 20여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다음 장소인 월호평동으로 이동했다.
 
 비행장 근처 동네인데 위에 있는 장현 저수지가 넘치면서 이미 동네가 모두 싹 쓸려 내려가 허허벌판이 되어 버렸다. 워낙 침수지역이 넓어 어느 곳으로 먼저 가야할지 막막했다. 동네 사람에게 대충 고립된 집을 파악한 후 일단의 대원들을 보냈다. 대기 중에 오봉댐 쪽에 흙더미에 깔린 차량10여 대를 구조하러 갔다가 고립된 대원들이 있다는 무전을 받고 그쪽으로 향했다. 곳곳에 산이 무너져 있었고 세워진 차들은 이리저리 물길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오봉댐 현장 20여 미터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려는 바로 순간, 10여 미터 뒤에 세워져 있던 전봇대가 쿠∼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불과 2초 정도의 시간!! 모두들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한국전력에 전기가 끊긴 것을 확인하고 구조차를 100여 미터 뒤로 이동 주차시키고, 도로붕괴 현장에 가보았다. 댐 아래 20여 미터의 도로가 보이질 않았고, 건너편 구조현장에 투입되었던 수십 명의 대원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인근 야산으로 올라가 로프를 연결하여 1시간 걸쳐 모두 구조하고 귀대했다.
 
 저녁 8시쯤!!
 대관령 어흘리로 출동하였다. 현장에 가깝게 갈 수가 없었다. 무너져 내린 산사태로 인해 진입이 불가능했다. 고립자 구조에 필요한 장비들을 챙기고 10명의 대원들은 현장으로 향했다. 7미터 정도의 도로 왼쪽에는 10미터 폭의 하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 정도의 강한 속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은 산, 도로 우측에 봉고차 한대가 서있었다. 건너편에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한 어르신 한 분이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고립되어 있던 어르신을 안전하게 구조하기 위해 로프를 던져 건너편에 묶고, 제반 준비를 했다. 물이 흘러내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 물 속에서 돌끼리 부딪치는 “꿍∼꿍∼”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에 맞춰 도로가 들썩들썩하였다. 사방은 깜깜하고 후레쉬 불빛에 의지해 작업을 하고 있던 그 순간!! “땅!!!”
 
 산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나는 손질하던 로프를 내던지고 위쪽으로 뛰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땅! 소리와 함께 무조건 뛰었다. 스무 걸음 정도 뛰었을까. 앞이 보이질 않아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후레쉬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그곳, 바로 조금 전에 내가 있던 그곳에 아홉 명의 대원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쏟아져 내린 토사가 도로 옆에 세워져 있던 봉고차에 “처∼얼썩”하고 부딪히는 순간, 단 1초의 여유가 생긴 그 순간에 그 대원들이 뛰기 시작했다. 두 명의 대원이 엎어졌다 다시 일어나 뛰는 모습도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땅∼ 소리가 났을 때 그것이 산사태 나는 소리인 줄 모르고 봉고차가 미끄러질 때 비로소 산사태임을 알았다고 했다.
 
 모두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한자리에 모여 인원을 확인하고 산사태가 난 곳에서 100여 미터 위로 이동하였다. 모두들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순간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위로 대피하면 안 된다. 산사태가 나면 다 죽는다. 어찌되었든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나는 다른 대원 한 명을 불러 함께 조금전 산사태가 났던 곳에 가보았다. 토사가 쌓여 있긴 하지만 신속히 빠져나가는데 지장은 없을 듯 싶었다. 다시 위로 올라와 대원들과 상의를 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산 위 대피지점과 처음 산사태 난 곳의 중간쯤 내려왔을 때였다.
 
 “땅!!!”
 대피해 있던 산 위 바로 옆에서 또다시 산사태가 난 것이다. 10명의 대원들은 동시에 뛰었다. 말이 필요치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후레쉬도 없이 너무도 잘 달렸다. 돌에 넘어지고 나무뿌리에 넘어지고, 진흙에 빠져도 잘 달렸다.
 ‘뒤처진 대원이 없는가?’ 확인하면서 맨 나중에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 보니 선두에 위치한 대원은 저 멀리 가있었다. 조금의 여유(?)가 있어서인지 앞서가는 대원들 걸음걸이를 보니, 그 두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걸어 내려와 차량에 탑승하여 성산 쪽으로 이동하는데 반대편 차선으로 갤로퍼 차량이 오고 있었다. 10여 미터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갑자기 진흙덩어리가 무너져 내리면서 갤로퍼 차량이 밀리기 시작했다. 후진, 후진! 흘러내리던 토사가 우리 차량으로 따라오며 무너져 내렸다. 갤로퍼 차량도 후진으로 피하고 우리도 차를 황급히 돌렸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오봉댐 아래 구산 휴게소로 향했다. 30여 대의 차량이 대피해 있었다. 휴게소 뒤쪽 야산과 앞 개천의 상황을 확인하고 차를 주차시키고 라디오방송을 듣고 있었다.
 
 천지가 조용한 그 순간에 “쿵, 쿵”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그 충격으로 주차시킨 차가 들썩들썩 했다.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긴 상태여서 그 두려움은 다들 더 했으리라.
 
 라디오에서 120미터 되는 오봉댐이 이제 채 1미터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슈트도 벗지 못하고 차문도 열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피령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긴박하게 외치던 무전기 소리도 잠잠해졌다. 돌끼리 부딪치는 쿵, 쿵 소리에 잠은 오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특별 교육받으러 태전으로 간 우리 성도들은 잘 도착했을까? 가족들은 모두 무사할까? 천지가 넘어가는 이 때에 나는 진정 상제님, 태모님의 일꾼인가? 이번 물개벽은 세속에 물들어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우리 일꾼들에게 무언의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닌가? 이런 조그마한 변국상황에서도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데 실제 상씨름이 터지고 병겁이 터지면 어떨까, 무슨 정신이 있을까?’
 
 새벽 4시, 빗줄기가 그치고 깜깜하던 밤하늘이 조금 벗겨지기 시작했다. 다시금 강릉땅을 밟는 게 그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그 난리를 치던 물은 빠져버리고 사람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차는 도로 곳곳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날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다음날 30대 후반의 젊은 부부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친구 집에 놀러간 열살 난 아들이 아직까지 돌아오질 않는다고, 혹시 본적이 없냐고, 묻고 또 묻고 또 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또 몇 명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가? 하천에 떠내려가다 모래에 묻혀 있던 사람, 집 뒤의 산이 무너져 집과 함께 파묻혀 버린 사람, 공원묘지를 관리했었는데 그 산이 쓸려내려가 통탄하는 사람, 실종 신고된 후 아직 찾지 못한 사람 등등. 그나마 시신을 찾은 사람들은 좀 나을까?
 
 9월 7일, 백두대간에 퍼부은 폭우가 영동지역을 휩쓸고 간 지 8일째 되는 날, 오랜만에 사무실 앞에 앉아 시퍼런 하늘을 보며 여유를 가져본다. 문득 하나의 단어가 퍼뜩 떠오른다.
 천지마비(天地痲?)!! 지난 8일간의 이곳 강릉을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닌가 싶다. 하늘도 마비되고 땅도 마비되고 사람도 마비되고. 오늘도 119 대원들은 집으로 가지 못하고 매몰자 발굴현장으로 투입된다. 이제 겨우 8일째인데 모두들 퉁퉁 부은 얼굴이다.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우리 애 본적이 없냐?”고 묻고 또 묻던 그 젊은 부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직도 그 슬픈 표정이 눈에 어른거린다.
 
 
 본 기사의 생생한 사진은 강릉지역 성도들의 피해현장을 돌보던 91광역 모춘일 수호사가 촬영하여 제공한 것입니다.
 
(월간개벽 20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