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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

by 바로요거 2007. 10. 14.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1.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 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 지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 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 기

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 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기 818년에 4대 58년간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 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

)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의 나라 평로치청왕국"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cafe.daum.net/hanfuture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

이정기 (732~781)

 

 "대흥 45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웁게 하더라.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22(?),년 장수들은 군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고를 모셨다."
출처 : 환단고기 中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다. 민족의 후예는 선조의 얼을 이어 새 역사를 창조해 간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오늘날 얼7마나 사실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동북아를 웅비했던 우리 한민족의 9천년 역사는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고, 말살되었다. 인류의 시원사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한민족 9천년 역사가 언젠가는 정확하게 재조명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만주 대륙을 풍미했던 옛 고구려의 사라진 역사의 일편을 밝혀 보고자 한다.

꺼지지 않는 고구려의 불꽃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해 온 대 제국 고구려가 멸망했다. 그 동안 고구려는 동이족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등 불세출의 영웅들이 대륙을 호령할 때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백만 중국인의 뼈가 고구려의 산하에 묻혔다.
 

이러한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어이없게도 자중지란이 일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는 철저히 고구려를 궤멸시켰다. 고구려의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고구려 황족을 비롯한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하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900년 장구한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서기 670년 4월, 보장왕의 외손 안승(安勝), 검모잠 등이 칼을 들고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대진국을 세우고 당군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 보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자신들의 나라로 쫓겨가야만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사라져 간 고구려의 자손 가운데는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 장군도 있었고, 345 무열(武列)의 명예에 봉해진 왕사례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일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이정기의 꿈, 당나라를 멸망시켜라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755년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하북지역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요동에 있는 평로절도부와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의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하여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하여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동쪽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이정기는 요동에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본토에 또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고구려인 정예군 2만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에 상륙하였다.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패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갔던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영원히 망해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대군이 왔다는 소식에 산동의 유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웠다.
 

사실 2만의 군사는 극히 작은 병력이었다. 당나라는 1개 주만 해도 몇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2만의 병력은 별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2만의 군사로 중국의 한복판으로 쳐들어간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곳엔 수많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정기의 고구려 군대는 10여 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781년, 이정기는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과 장안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가 점렴해 버리니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하여 20만의 대군으로 총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천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승승장구하여 변주의 20만 군대를 무찔러 성에 고립시키고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이 다한 것이다. 당나라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고구려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정기는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통함을 삼키며 고구려군은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제(齊)국의 최후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 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제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을 써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준비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의 200만 섬의 군량미를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낙양성을 기습하여 궁궐을 불살라 버렸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을 명하였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잠들지 않는 고구려의 혼(魂)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 지 58년. 이제 그 불꽃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망한 뒤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의 왕이 되었다. 중국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 휘하의 배를 타고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 백성들이 그 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영웅 이정기! 어찌하여 이같이 찬란했던 민족의 영웅이, 민족의 정신이 1,200년 간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었던가? 왜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처럼 고증이 확실한 고구려의 후예들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제는 과거의 친일 식민사관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에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밴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자료:
『고구려를 위하여』, 하서출판사, 김병호
『유목민족 제국사 - 三個의 위구르 帝國』
『舊唐書』
『新唐書 烈傳』
『三國史記』
『三國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