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스크랩]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 by 바로요거 2007. 10. 9. 우리가 고조선이라 부르는 단군조선의 강역 이 지도에 표시된 강역이 진짜라면 우리가 여태껏 배워왔던 역사는 거짓일까? 학계에서는 줄기차게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한쪽의 주장만을 교과서에서 배워왔다. 최소한 논쟁중인 내용이라면 양쪽의 주장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텐데... 인터넷이 발달하여 필요한 지식을 알수 있는 길이 열려 다행이지 대학에서도 교육시켜주지 않는 우리의 역사 과거사, 과거사 하면서 정치인들의 야욕만 채우지 말고 우리의 근본이 되는 고대사부터 다시 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항하는 첫걸음이 될 것같다. 목 차 1 총독부 우리 사서 20만 권 불태워 2 역사 왜곡편찬 진용확대 개편 3 사료 선별수집․복본 행방불명 4 '삼국유사', 단군신화설도 조작 5 단군, 기자도 '신화'로 조작 6 '영원한 屬國' 기도, 역사 날조 7 秘傳돼 온 마곡사 古書도 방화 8 개국 기록한 正史는 모두 인멸 9 '규원사화'도 탈취 소각 10 北崖子가 눈물로 쓴 한민족사 11 역대 임금을 신화적 인물로 날조 12 47世 1,195년간의 기록 있다 13 공자도 '동이국'의 실존 기록 14 중국을 위협하고 왜를 쳤다 15 '삼국유사' 단군 最古書 아니다 16 '규원사화' 단군 世系는 합리적 17 '규원사화' 중국 사서와 사실 일치 18 구석기 유물 발견 사실도 은폐 19 청동기 유물조차 부인한 일제 20 또 하나의 허구 '금석병용기' 21 고고학 조사도 총독부서 통제 22 '실증'가장... 역사 편년도 내려 23 청동기 시대도 둔갑시켜 24 고인돌 축조 연대도 크게 낮춰 25 '삼국사기' 초기 기록도 부정 26 일제 말살 고대사 복원 가능 27 '동몽선습'도 단군조선 가르쳐 28 기록은 왜곡해도 實事는 못 감춰 29 소학교에서도 고대사 교육 30 국사는 士民 교육의 필수 31 20세기초에도 '단군' 가르쳐 32 '식민악령' 아직도 살아 있다 33 신화 조작 '정한론' 만들어 34 '정한론' 바탕 '대동아 합방론'펴 35 '일․조 동조론'이 한국 고대사 파괴 36 한국 고대사 없애려 일본사도 왜곡 37 '일본서기' 주요 연대도 120년 올려 38 神功의 신라정벌은 거짓 39 '백제서기'서 '일본서기' 이름 따냈다 40 明治 초기 역사 조립...日국민 호소했다 41 한국 고대사 깎고 일본사는 올려 42 일제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 파괴 43 [임나일본] 입증위해 '삼국사기' 비방 44 日 학자 '삼국 초기 모두 조작이다' 45 日 패전 후도 침략사관 버리지 않았다 46 국내 학자들 침묵만 지키고 있다 47 日 교과서도 조작 역사 가르쳤다 48 '왕인이 천자문 헌상했다' 조작 49 임진왜란도 改惡시켰다 50 일본은 왜 역사를 조작하나 51 한국사는 다시 정리해야 한다 1. 총독부 우리 史書 20만권 불태워 1910년 초대 총독이 취임하자마자 전국적으로 史書 약탈에 착수, 6년 간 계속해도 씨를 말리지 못하자 일부 학자들까지 동원 본격적으로 上古史를 왜곡 편찬해 우리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다. <경찰 동원해 압수 선풍> 일제는 한국 상고사의 말살을 한국의 강제 병탄 이전부터 강력히 추진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탈한 후 이해 10월 1일 관보를 발행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보인다. 이 관보는 조선을 영원히 탈취할 것으로 착각한 그들이 만든 것이므로 이제는 오히려 일제의 조선 침탈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나 아쉽게도 번역이나 집중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실정이다. 1910년,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일․한합방'이 되자 초대 총독은 취임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반 제도 조사를 명령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해 설치한 가장 악질적인 기관의 하나로 초기에는 법령의 제정과 형벌을 관장했다. 일제의 무단정치를 악질적으로 수행한 관서였다.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운 취조국은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사(서점), 향교, 서원, 구가,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다. 다음 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 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문정창)>가 밝히고 있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열전류 및 심지어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장지연의 '대한시지지(大韓新地誌), 이채병의 '애국정신',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이 집중적인 수난을 받았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된 첫 만행이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 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분서하였다. 웃지 못할 이런 사실도 있다. 일제는 당초 3년 동안 수색을 하면 그들이 없애고 싶은 서적은 모두 씨를 말릴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적의 압수.분서 소식을 알개 된 소장자들이 깊이 감추는 바람에 생각했던 만큼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3년은 고사하고 6년 동안이나 강압적인 서적 수색을 강행했으나 정보를 갖고 찾아가면 또 사른 사서류가 나왔다.(조선문화보급회간 조선대관)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寺內正穀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허울뿐이던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일본인들이 이 나라 사서를 인멸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을 대어 왜곡 편찬을 노골화한 것이다.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附日)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힌 중추원은 1916년 1월 유정수 등 중추원 참의와 경도제국대학의 三浦周行 교수와 경도제대 今西龍(금서룡, 이마니시)강사 등 3인에게 지도감독을 의뢰했다. 이들 어용 학자들이 총독부의 명령으로 작성한 <조선반도사 편찬요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 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하여 그들을 충량한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 만들기 위해......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또한 민심 훈육(民心訓育)의 일단에 기하고자 함이다. 일부에서는 <신부(新府)의 인민을 교육함>을 불평과 반항의 기풍을 조장하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상례라고 하고......이제 조선인에게 조선 역사를 읽는 편의를 제공하면 그들 조선인에게 옛날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지만......조선인들은 독서에 작문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지 않아 그들을 무지 몽매하게 억압하기는 오늘날 시세(時世)에서는 물가능한 일이다......조선에는 고래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하느 것이 적지 않다. 그러한바 전자의 것은 독립시대의 저술로서 독자로 하여금 독립국의 옛날 꿈 <舊夢>에 빠지게 하고......<한국통사(韓國通史)등 후자는 근대 조선의 청.일(淸日) 노일(露日)간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등을 돌릴<배향(背向)길을 밝히고 있으니 이들 사서(史書)가 인심을 심히 고혹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절멸>을 기함은 오해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공명.정화>한 새로은 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이것이<조선반도사>편찬이 필요한 이유요, 또한 편찬 사업의 근본정신이다(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4-7쪽) 이 요지는 바로 조선사료의 대량 분서와 조선사의 왜곡 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는 셈이다. 총독부가 조선 13도와 대마도까지 뒤져 다량의 사서를 압수, 불태워 버렸으나 씨를 말리려는 기본 계획은 실패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러한 실패를 위장하고 또한 왜곡한 역사를 조선인들에게 가르쳐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가증스런 음모가 이 요지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조선반도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분서한 이외, 그들이 조선사 왜곡을 위해 근거 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두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자료의 철저한 분석과 왜곡 편사 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 조선반도사 편찬을 맡은 어용학자들에게 내린 편사지침이 이를 증명한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삼한, 삼국, 통일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 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조선총독부는 이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공명 정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여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한다. 겉으로는 중추원이 사료 수집을 맡아 대여 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했다. 이 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인물 등 제2차 수색에서는 압수 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 즉,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까지도 압수되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어쩔 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년 8월 12일 부임)은 조선사람들을 半일본 사람으로 만드는 이른바 교육시책에서 <①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②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③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떠벌여 놓고 그 새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령 제64조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중추원 서기관장 長野 幹 중추원 촉탁 栢原昌三 “ 小田幹次郞 중추원 부제학 鄭萬朝 경도제국대학 조교수 今西龍 중추원 참의 劉 猛 중추원 촉탁 稻葉岩吉 “ 魚允迪 “ 松井 等 총독부 편수관 李能和 그리고 위 黑板勝美, 三浦周行 교수 외에 다시 경도제국대학 교수 內藤虎次郞을 지도고문으로 추가하였다. 이 위원회는 그 이듬해 1923년 1월8일 齊等實총독과 有吉忠一 정무총감이 임석한 가운데 黑板勝美 교수의 사회로 제 1차 위원회를 개최하고 다름과 같은 <편찬강령의 결정에 관한 건>을 제안 심의 결정하였다. 즉, 조선사 편찬의 시대 구분을 제 1편 삼국이전 제 2편 삼국시대 제 3편 신라시대 제 4편 고려시대 제 5편 조선시대 전기 제 6편 조선시대 중기 제 7편 조선시대 후기로 한다. <三國이전> 싸고 논란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16년 1월 조선사편찬사업 착수 당시 새로 편찬할 조선사의 시대 구분을 상고 삼한,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서, 조선최근세사로 하기로 하였던 것을 <상고 삼한>을 없애 버리고 단순히 <삼국이전>이라는 한 편으로 축소하여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일제가 우리 상고사를 점차 말살하여는 저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 1차 위원회 때 논란이 된 의제와 그에 대한 위원들의 발언 요지를 보면 그 의도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 鄭萬朝 : 삼국이전이라 함은 檀君까지를 넣는 것인가? ○ 黑板勝美 : 삼국이전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다시 더 연구하겠다. ○ 李能和 : 上代 조선에는 단군조선과 기잔(箕子)조선이 있다. 그러므로 삼국이전의 조선을 <고대조선>으로 고치는 것이 좋지 않느야? ○ 黑板勝美 : 그 당시의 조선은 현대의 조선과 지역이 다르므로 차라리 <삼국이전>이라는 막연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까 한다. ○ 李能和 李能和 건국의 신화는 민족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니 반드시 본문에 수록하여야 한다. ○ 栢原昌三 : 단군과 기자에 관한 일들은 건국의 주요한 사항이므로 망라하려 한다. ○ 魚允수 : 단군과 기자는 삼국이전의 앞에 수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도 좋으냐? ○ 黑板勝美 : 단군과 기자의 기사는 기재할 것이나 건국에 관한 사료 중 연대가 불명한 것을 어디에다 넣을 것인가에 관하여는 금후 사의하여 처리하고자 한다. (중략,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참조) ○ 小田幹治郞 : 今西龍 위원이 부재하다 하여 안건의 결정을 보류하는 것은 사무수행상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원안대로 결정함이 좋을까 한다. ○ 有吉忠一 : 원안대로 가결합니다. 이 회의 후 어떤 사유에서인지 제 1차 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단군과 기자에 관항 사항은 건국의 주요한 사항이니 수록하겠다>고 발언한 일본인 중추원 촉탁 栢原昌三은 같은 해 1923년 8월 16일 돌연히 사망하고 만다. <今西龍 위원이 부재하다 하여 안건을 보류하는 것은 사무 수행상 지장이 있으니 원안대로 결정함이 가하다>고 발언한 중추원 서기관장 小田幹治郞은 이보다 앞선 3월 29일 <의원면본관(依願免本官)으로 갑자기 해직되는 변고가 발생한다. 왜 갑자기 조선 상고사의 일부나마 인정하려던 한 사람은 면직당하고 한 사람은 죽었을까? 이러한 변고가 있은 후 총독 齊藤 實은 이 위원회가 존속하는 기간중 5차례 개최된 이 위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였고 각 도지사에게 사료의 수집과 그 보관에 진력할 것을 엄달하는 등 우리 역사 말살작업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그러나 한국인 식자(識者)들은 이완용, 權重顯등 이른바 <조선사 편찬사업>을 크게 증오, 경시하여 협조하기를 꺼려했다. 이러한 실정을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조선사를 편찬하는 목적은 학술적이고 공평무사한 편년사를 수찬함에 있거늘 과거, 수년 간의 경험에 의하면 일부 조선인 사이에 이것을 오해하여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 사료 수집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장래의 편찬에도 지장이 적지 아니하다(28쪽)고 털어놓고 있다. 2. 역사 왜곡편찬 진용확대 개편 새롭게 정비된 조선사편수회는 수장가들이 사료를 내놓지 않자 편찬 採訪이란 美名으로 수집 아닌 <대여>라고 속여 위장된 수탈방법을 쓰기에 이른다. 편수회를 총독 직할로 조선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사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 齊藤 實은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했다. 齊藤 實총독은 <편찬위원회의 조직근거 법령이 조선총독부의 후니령으로 되어 있어 유능한 조선인 사학자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지적,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황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다. 일제는 1925년 6월 일황 칙령 제218호로「조선사편수회」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 관청으로 승격시켰다. 관제를 새로 제정한 다름달(1925년 7월) 개편한 조선사편수회의 참여 인물들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조선사 왜곡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수 있다. 고문에 이완용(후작), 권중현(자작)을 다시 �히고, 박영효(후작), 이윤용(남작)과 일본인 거물들과 학자들을 위촉했다.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실무자들의 관직도 높여 상당한 대우를 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자들을 유혹했다. 3명을 두기로 한 修史官을 고등관으로 하고 수사관보도 判任官으로 높여 4명을 쓸수 있게 한 것이다. 조선사 왜곡 편찬 진용을 재정비.강화한 일제는 조선인 사학자들을 끌어들이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총독 齊藤 實은 경무국을 동원하여 조선인 사학자 포섭 공작을 전개, 위협, 공갈, 매수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키고 실무자들의 관직도 높여 상당한 대우를 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자들을 유혹했다. 새롭게 정비된「조선사편수회」는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 방안이었다. 강제 수색․압수가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일제는 대여하는 형식으로 그 방법을 완화했다. 총독은 관계자들에게 편찬사료 탐방이란 이름으로 광범위한 사료수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大正 11년(1922년), 즉「조선사편수회」가 확대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음을 밝히고 있다.(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92쪽).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찾아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제1회 회의에서는 다시 조선사의 시대구분을 재편, 조선상고사를 말살하려는 저의를 보인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가 결의한 제1편「삼국이전」을 다시 끌어내려「신라통일이전」으로 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 제3편「고려시대」, 제4편「조선시대전기」, 제5편「조선시대중기」, 제6편「조선시대후기」로 편수마저 7편에서 6편으로 1편을 줄였다. 단군조선 등 상고사를 집어넣기로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 결의한 사항을 폐기하고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결의마저도 축소하여 '조선사편수회'에서는 6편으로 편수까지 줄인 것이다. 편수까지 줄인 것은「삼국이전」과「삼국시대」를 줄여「신라통일이전」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조선사의 시대구분 문제는 조선사가 완간될 때까지 조선 위원들에 의해 거론되고 끈질긴 공방전을 벌인다. 그러면 왜 일제는 조선사의 상고사 부분을 없애려고 광분하였으면 편찬 기구의 개편 때마다 역사를 자꾸 아래로만 끌어 내렸을까? 1910년 8월 29일 정식으로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그들이 <日.韓합병>이라는 위장된 침략 용어를 썼듯이 이 나라를 영원히 탈취하려는 계략을 눈여겨 보아야 그 이유를 명쾌히 찾아낼 수 있다. [상고사 없애기에 골몰] 일제의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긴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는 데 있었다. 왜구들이 노략질을 하면서도 조선의 위력을 두려워 했듯이 일제가 일시에 조선을 침탈하기는 했으나 지배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총과 칼로 한 때를 지배할 수는 있었지만 영원히 탈취하기에는 그들의 문화 총량이 조선보다 못함을 일제 지도자들 스스로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역사 왜곡을 시작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와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삭제 조작하고 영원한 조선 탈취를 실현하려고 철저한 준비를 해온 것이다. 일제는 명치유신 때 <일본서기>를 재정리, 그들의 역사부터 왜곡한 다음 사전 조작한 설계도에 따라 조선사를 편찬한 것이다. 조선의 땅만이 아니라 민족까지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광분한 이들은 우선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이 앞서 있는 조선상고사를 말살하는 것이 시급했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모두 자기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던 시절. 일제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조각된 역사 설계도에 두 나라 국민을 맡춰 일본을 형으로 조선을 동생으로 한나라를 만드는 망상을 실현하려고 허구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앞으로 제시할 사료들이 극명하게 밝혀 줄 것이다. [이병도.신석호 등 참여] 조선사편수회는 사료 수집에 열을 올리는 한편 1927년 6월 1일 사무분담 협박과 매수로 확보한 <조선사 왜곡 날조기사단(故 文定昌의 표현)>을 편성, 사무분담을 시킨다. 조선다 왜곡 편찬이 본격화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가 밝힌 <조선사 편수회 사무분담표>를 보면 편찬회 제1회 위원회 당시 보이지 않던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六堂 상고사 부활 노력도]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것은 <편수회> 구성 1년 반 후인 1928년 12월 20일이었다. 육당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덕망있는 조선 학자를 참여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끝내는 육당도 넘어가고 만 셈이다. 육당이 조선총독부의 위협과 포섭에 못 견디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키로 승낙하자 일제는 일본 내각의 결의를 거쳐, 일본 내각의 임명장을 주는 등 그의 참가를 내외에 선전했다. 육당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해지자 서울에서는 웃지 못할 비극의 촌극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육당의 죽마고우이던 위당(爲堂) 정인보는 <육당이 변절했다>하여 <최남선이 죽었다>는 조문(弔文)을 쓰고 그와 절교했다. 또한 익살스러운 조선의 사학자들은 서울 종로 명월관에 모여들어 굴건(屈巾) 제복 차림으로 제사상을 차려놓고 <최남선이 죽었다>고 방성대곡하면서 장례를 지냈다. 이런 소문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동료들에게 치욕을 당한 육당은 비록 조선편수회의 촉탁으로 어쩔수 없이 참여했지만 그 자신이 참가하기 전에 이미 삭제키로 결정한 단군 조선을 비롯한 상고사를 되살리려고 무한히 노력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실려있는 편수회의록을 보면 육당의 목소리만이 외롭게 넘쳐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3. 사료 선별수집․복본 행방불명 역사편수 과정에서 肅愼과 渤海는 인류학에 포함해야 한다는 이유로 삭제되고 문화 관련 사료도 거의 묵살되었다. 또한 소장하겠다던 수많은 사료의 複本도 종적을 감췄다. 1928년 7월 18일 중추원에서 열린 고문․위원간담회에서 나온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다. ● 山梨 총독 : 앞서 본회가 조선 사료의 수집․정리와 조선사 편찬의 사명을 가지고 창립되자 고문과 위원 각위들은 열심히 그 취지를 원조하고 각 직원들은 근면히 사무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적을 올리게 된 것을 다행하게 생각한다. 해가 거듭할수록 인멸되어 가는 사료를 수집하여 공정한 조선사를 만들려는 것은 본회 창립 당시에 비하여 더욱 절실한 소망일 뿐 아니라 조선 통치상으로 보아 긴요한 일로 믿는다. 여러분은 더욱 노력하여 이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해 달라. ● 池上정무총감 : 본회 사업의 경과를 보면 사료의 수집이 예정의 절반을 완료하였다. 이것은 여러분들과 일반인들이 귀중한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편의를 제공한 때문이며 참으로 만족한다. 앞으로 1~2년이면 일반 수집을 마칠 예정이니 여러분은 물론, 일반인들도 더 한층 편의를 제공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 黑板勝美 : 나는 다행히 여기에 참석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조선사의 편수에 관하여 나는 처음부터 상담에 응해 왔다. 최초에는 10개년에 역사 편찬을 완성하게 되었었으나 진재(震災, 1923년) 때문에 연장하여 12년간에 전부 완성하기로 했다. 사료는 각 도, 각 지방에 있는 것은 물론 일본, 지나(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여 가장 공정한 조선사를 편수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원과 고문 각위의 협력으로 벌써 사료 수집도 과반을 마쳤으므로 편수의 체제와 강령을 정하고 그에 따라 편찬을 진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무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단계에는 여러분의 기탄 없는 의견을 듣고자 하나 실은 자료가 너무 호한하고 그 수집 정리 및 편찬에 대해 수사관도 상당히 곤란을 받고 있는 실정이므로 충분히 연구하여 우선 완성한 다음에 심사를 앙청하기로 했다. 아직 오늘은 일일이 의견을 들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나 앞으로 위원회에 제출할 때는 여러분들의 주의나 의견을 수합하여 완전.공정항 역사를 만들려고 생각한다. ● 池上 : 權고문의 의견이나 今西龍위원의 의견은 지당한 말씀이다. 수시로 회합하여 각 위원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는 일고를 요한다. 즉시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으므로 후일 기회를 봐서 연구 한후 정할까 하낟. [일부 변경된 편사기준] 권중현, 유맹, 어윤적, 이능화, 정만조, 이강소등 조선인들도 참석한 모임이었으나 권중현의 조선사편찬을 찬양하는 발언 이외는 누구도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육당 최남선이 처음 참석한 조선사편수회 위원회는 1929년 12월 23일 중추원에서 열린 제3회 때였다. 회장인 정무총감이 다시 바뀌어 兒玉秀雄이 참석하고 권중현, 黑板勝美 고문과 今村武志(중추원 서기관장) 武部欽一(학무국장), 條田治策(李왕직차관), 劉猛, 小田省吾(총독부 사무관), 어윤적, 今西龍, 이능화, 정만조, 최남선 위원이 연석했다. 이밖에 간사와 修史官들도 배석했다. 이 모임에 처음 나온 兒玉 정무총감은 인사말을 겸해 위원들을 이렇게 독려했다. 취임이래 친히 고문 및 위원 각위들과 만나 간담하려 했으나 공무가 너무 바빠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해 유감이었다. 다행히 黑板 고문이 본희의 dydan를 가지고 내선(內鮮)한 것을 계기로 위원회를 열어, 연말 다망한 틈을 타서 여러분의 소견을 듣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수사(修史) 사업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거니와 특히 반도(조선)의 현상을 비추어 볼 때 시기 적절한 것이다. 본회의 종래 성적(成績)을 보건대 사료의 일반적 수집은 거의 완료 되었고 또한 고본의 작성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서로 경하하여 마지 않으며 예정한 연한 내로 어떻게 하든지 완성시켜 인쇄도 끝마칠 계획이다. 각 위께서는 이 분야 학식과 경험이 있는 분들이므로 의견이 있을 경우에는 기탄없이 토로하여 신중하게 심의를 거듭, 당초의 목적에 배치되지 않게끔 이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 앞으로 고문과 위원들의 더 한층의 찬조를 자라 마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黑板勝美는 편사기준의 일부 변경을 밝혔다. 첫째는 종래 제6편 조선시대 후기의 정조로부터 갑오개혁까지로 나눈 것을 정조시대는 제5편 끝에 넣고 제 6편은 순조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쇄계획으로 소화 8년(1933년)에 편찬.인쇄 완료 예정을 1년 연장한 것이다. 1930년 8월 22일 오전 9시 중추원 제5회 위원회. ● 小田 : 전번 위원회의 결의에 의하면 제 1편은 소화7년(1932년)부터 인쇄할 예정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현황은 어떤가? ● 黑板勝美 : 小田 위원의 질문은 내가 대답하겠다. 작년도의 위원회에서 제1편은 될 수 있으면 소화6년(1931년)부터 인쇄를 시작하기로 희망했으나 편찬의 실제 사정을 보니 제1편과 제2편은 지금 완성된 고본에다가 약간만 손질하면 인쇄할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인쇄는 예산이 있어야 하므로 당국에 알아본 결과 내년에 고려하겠다고 한다. 만약 인쇄비가 통과되면 내년에 1책 5백면씩 3책을 인쇄할까 한다. 본격적인 인쇄가 시작되면 조선사편수위원회 이래의 방법에 따라 제1편은 편년체가 아니고 기록사적인 원문 그대로를 유취(類聚) 수록하고 제2편 이하는 제1편과는 달리 본문만 인쇄할 계획이다. 다시말하면 제1편의 체제와 제2편 이하의 체는 다르다. 제1편은 지나(중국) 일본, 조선의 고사적(古史籍)에 의해 수집한 그대로 인쇄하난 제2편은 본문만을 인쇄하고 사료의 원문은 인쇄하지 않는다. 원문의 인쇄에 대하여는 먼저 위원회에서도 거론이 있었지만 사료를 인쇄하려면 심히 광범위하고 복잡하여 막대한 시간과 배용이 들기 때문에 본문만을 인쇄하고 본문과 사료를 모두 갖춘 복본은 대학이나 도서관 같은 곳에 남겨서 보존하고 일반에게는 본문에 사료의 명칭만 게재하여 그 출처를 밝히는데 그치게 한다. 제1편은 여러가지 책의 기사를 종합하여 하나의 본문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예를 들면 <삼국사기>라든지 <삼국유사> 하나 하나를 그대로 싣고 중요한 부분을 적요하여 본문에 방(.)점을 붙여서 출판하는 것이니 잘 양해하기 바란다. ● 최남선 : 편수에 관하여 질문이 있다. 첫째로는 제1편의 편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요람에 의하면「신라통일 이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심히 막연하다. 무릇 반도 안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역사상 밝혀진 것은 어느 정도까지 채택하는 것인가? 견해에 따라서는 종래 반도사에서 제외된 것이라도 반도에 심히 복잡한 관계를 가진 민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는 제6편은 갑오개혁까지 편수한다는 것인데 그 이후의 것이라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룰 작정인가? ● 今西龍(이마니시) : 제1편에 관해서는 담당자인 내가 말하겠다. 무릇 고대의 역사를 수찬함에 있어서는「민족」을 위주로 하느냐,「토지」를 위주로 하느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따라서 주된 민족의 흐름의 관계가 있는 한, 또한 그 설명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주변 여러 곳의 기사도 당연히 채택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같은 것은 그 지역이 반도 밖에 걸쳐 있었으니 물론 채입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 최남선 : 구체적으로 말하면 숙신(肅愼)같은 것은 아직 불명한 채로 남아 있는 민족이나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이후에 내려와서 발해(渤海)도 조선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 今西龍(이마니시)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발해도 조선사에 관계가 없는 한 생략하겠다. ● 최남선 : 참고로 말하겠다. 무릇 고대사는「민족」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고「지리」본위 또는「문화」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매우 복잡하고 모호한 상태이겠으나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전력을 다 할 필요가 있다. 조선 고대 민족에 관한 사료는 조선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지나(중국)의 여러 사적에서도 산견되고 있으므로 조선사를 밝히기 위하여는 사소한 것까지도 면밀하게 조사하여 유루(遺漏)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조선 민족은 인류학상으로도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선의 민족문화를 밝히기 위해서는 차라리 동방 제 민족의 관계 사료를 전부 하나로 종합․정리하여 주기를 바란다. ● 今西龍 : 최위원의 말에 대해 담당자로 깊이 감사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사료」와「사설」을 구별하는 것이다.「사료」는 될 수 있는 대로 수집하겠으나 「사설」을 수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 제4회 위원회는 육당 최남선의 지적으로 편수 기본방침을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거론했으나 兒玉 정무총감은 이를 무시하고 만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이 회의를 폐회시킨 것이다. <아까 黑板勝美 고문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명년도부터 인쇄가 된다면 매우 사업의 진전이 좋아질 것이므로 예산 관계에 대하여는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 되돌아보자. 일제는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계획할 때(1916년) 경도제국대학 교수 三浦周行, 이 대학 강사 今西龍, 동경제국대학 교수 黑板勝美와 함께 그 지침을 마련했다. 모든 제도를 쇄신하고 혼돈한 구태를 개혁하여 각종 산업을 진작하고 빈약한 민중을 구제함은 조선 시정상 급무라고 하겠으나 이와 같은 물질적인 경영에 힘씀과 동시에 교화, 풍기, 자선. 의료 등에 적절한 조처를 취하고 이 백성들의 지능, 덕성을 개발함으로서 이들을 선량한 帝國民으로 부끄럽지 않은 지위로 유도함에 그 목적이 있다.....(中略)...... 그러므로 <조선반도사>와 같은 새로운 사서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조선인은 만연히 합병과 관련이 없는 사서, 또는 합병을 저주하는 서적을 읽을 뿐이며 이리하여 풀이 무성하여지듯이 몇해를 지나면 언제나 눈앞에 보던 습성에 젖어 오늘날의 밝은 세상이 합병의 은혜에 기인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함부로 구태를 회상하고 도리어 개전의 기력을 상실할 우려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 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下略)...... 이 같은 <조선반도사>의 편수지침은 일제의 조선사편수 사업의 근본 정신으로 조선사가 완간될 때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는 이러한 사실들도 밝히고 있다.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1918년 1월) 한 수 조선사편수뢰로 개편(1922년 12월) 하기 직전까지 상고삼한, 삼국, 통일후 신라, 조선등 4편의 원고를 탈고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원고는 일부는 조선사편수에 참고했겠으나 통일신라 이전의 2편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하나 육당이 참석한 조선사편수회 제4회 모임때 거론 된 대학이나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겠다던 수많은 사료의 복본들 역시 행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조선사편수에 참여했던 일본인 학자즐이 스스로 조선의 사료가 너무 많아 본편에 처리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던 이들 사료들과 그들이 작성한 조선상고사의 일부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패망할 때 완전히 소각하지 못했다거나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면......? 광복 40년만에 뒤늦게 공개되는 이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처럼 우리 나라의 어느 곳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4 '삼국유사', 단군신화설도 조작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 편찬업무에 관여 해 온 일본인 학자 今西龍은 檀君考라는 단군 신화설을 만들어 역사 왜곡에 앞장 섰다. 그가 古朝鮮記중 國字를 因字로 변조했다는 사실을 육당 최남선이 폭로했다. [몹시 분노한 최남선] 조선 총독부는 조선사의 간행을 서둘렀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 조선사 가운데 처음 인쇄 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 이전) 1,2권과 제2편(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으로 1932년 3월 31일 출간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원고가 탈고되는 대로 인쇄에 넘겨, 원고 작성과 간해을 동시에 추진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편찬이 중요한 사항이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이라도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를 계속해 열겠다고 합의 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고의 심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 되자, 육당 최남선이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조선사편수회의 제6회 위원회가 개최된 것은 조선사의 첫 3권이 나온 약 4개월 후인 1932년 7월 21일이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이 모임에는 金井田淸德 정무총감, 권중현, 黑板勝美 고문, 牛島省三, 임번장, 어윤적, 松本伊織, 大谷勝眞, 鄭僑源, 小田省吾, 이능화, 윤재구, 최남선 위원, 위원을 겸임한 松本 稻葉, 두 간사의 보고가 있은 후 시작되었다. ● 今井田 : 본회 사업도 예기한 대로 순조롭게 진척되어 3권을 인쇄 출판했고 이미 여러분께 배부하여 열람을 기다리고 있다. 금년에는 6권을 상재할 예정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조선사의 출판은 시정(施政)상 유익한 참고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과 내지(일본)에 있는 학계를 위하여도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밑는 바이므로 참으로 경축하여 마지않는 바다. 이는 오로지 고문, 위원 및 관계 제위께서 열심히 진력할 결과라고 하겠다. 본회의 사업도 소화 9년도(1934)에 종료될 것이며 본년도 이후에는 인쇄 책 수도 해마다 증가되는 관계상 더 한층 분발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제위께서는 이점을 충분히 유의하시어 예정대로 본 사업이 진행되어 유종의 미를 거둘수 있도록 노력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더욱 급반 본희의 위원 및 촉탁으로 계셨던 今西龍 박사가 돌연 서거하게 된 것도 애도를 금치 못하는 바이다. 박사는 다년간 본희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담당했던 제1편 제2편의 출판 완료를 보지 못하고 서거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에 삼가 弔意를 표하는 바이다. ● 黑板 : 본희의 사업도 착착 진행되어 특히 제1편 2권, 제2편 1권등 3권의 인쇄가 완료되어 이미 여러분들의 수중에 배부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3권과 장애 할 일에 대하여 려러가지 의견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먼저 오늘 상담하고자 하는 일은 사료 인쇄의 일이다. 이것은 제1회 위원회에서 심의를 앙청할 때에 본회에서 편수하는 조선사는 일당일파(一黨一派)에 편파되지 않고 또한 곡필(曲筆) 되지 않는 공평 무사한 역사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먼저 정확한 사료를 선택하여 기초하고 본문을 입안하고 본문과 함께 그 근거되는 사료를 밝히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왔다. 그러므로 인쇄에 있어서도 본문과 사료 두 가지를 모두 인쇄하는 것이 이상적이나 사료까지 전부 인쇄한다는 것은 시일이나 경비상으로 매우 곤란한 일이며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상의한 후 <조선사>의 인쇄는 본문만을 하기로 하고 그 원문 <조선사고본(朝鮮史稿本)>은 인쇄 완료 후에 적당한 장소에 보관하여 편수과정을 알 수 있도록 할까 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제1회 위원회의 결의에 반할 뿐만 아니라 실제 독자로 하여금 사료에 대한 불안을 품게 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사업에 관여하여 왔던 관계로 지금부터라도 사료를 인쇄하여 어느 정도 제1회 위원회 결의의 취지에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제안하는 사료 출판은 물론 사료 전부는 아니나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을 골라서 출판하고자 한다. 본회에서는 연래 편수를 하면서 사료 수집을 한 결과, 예상외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잇다. 현재 선내(조선) 각지 명문가(民族舊家)에 비당된 사료를 차입(借入)하여 그 복본을 작성항 것이 1,350여 책, 사진이 2,700여 점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전부 출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가능한 범위내에서 이것을 공간(公刊)한다는 것은 본회 편수의 취지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 외에 보통의 간본(刊本)이라도 본희의 사업개시 후에 발견된 것 가운데 종래의 유포본(流布本)보다 좋은 것이 많이 있다. 이것도 본회에서 채용하였다는 근거를 나타내기 위하여 공간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은 사정이므로 제1회 위원회에서 결의한 사료 출판의 일은 꼭 실행하여 주기 바란다. <고려사절요> 출판 서둘러.. 그런데 이 사료 출판에 관하여 내 생각으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 조선사료총간>이라고 하여 앞서 말한 선내(조선) 각지 구가(舊家)에서 비장되어 것으로서 <조선사>에 인용한 것 중에 주요한 것을 출판하고, 둘째는 <조선사료사진 집>으로서 수집한 사료, 기타의 사진을 연한내에 간행할까 생각하고 있다. 만약 이에 찬성한다면 사료 총간에서 제3편에 <고려사절요>의 출판을 할까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옛 규장각 소장본 이외에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제3편의 인쇄와 동시에 병행되어 인쇄 된다면 <조선사>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돕게 됨과 동시에 학계에 비익(裨益: 補益)될 바가 클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 小田 : 방금 黑板고문으로부터 설명이 있었던 사료 출판에 관하여는 우리들도 꼭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전에 본회의 사업이 예산 긴축인 때에도 불구하고 착착 진행되어 기간(旣刊) 3권이 기대 이상으로 완선을 보게 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출간된 것을 통람하여 보건대 제1편과 제2편 이하와는 편찬 방침이 틀리고 제1편 2권은 사료를 정리하여 그대로 출판한 것이므로 일반 연구자에게 상당히 편리한 것이나 제2편 이하는 강문(綱文)에 사료이름(史料名)을 붙였을 뿐이므로 말하자면 강문이 살아 있지 않는 감이 없지 않다. 진귀한 사료가 인용되어 있어도 경성(서울)에서는 사료를 볼수 있으나 내지(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니 연구자를 위하여 유감스러운 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 사료의 공개에 관하여는 이의 없으나 그것이 공개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조선사 간행의 의의가 반감되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호 하여 인용한 사료를 모두 출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출판 하는 것이냐가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기간(其間)된 것에 관하여 인용된 사료를 보건대 (1)보통의 경우에 볼 수 없는 책(冊) (2)유포본(流布本)일지라도 보통의 것보다 더욱 좋은 것 (3) 오직 하나뿐이고 다른데서 볼 수 없는 것 등 3종이 된다. 이 가운데 (3)의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고려사절요>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 같은 것도 여기에 속하고 모두 근본 사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의 출판은 조선사의 출판보다 다소 늦더라도 꼭 결해아여 주기 바란다. <승정원일기>라든가 <일성록(日省錄)> 같은 것도 출판하고 싶으나 이것도 다행히도 대학에서 <이조실록>을 출판하였으므로 다음에 하더라도 <고려사절요>와 같이 오직 한 본 밖에 없는 것은 꼭 출판하여 조선사를 한층 효과있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이어서 두서너 가지 문답이 있은 후 今井田은 黑板 고문의 의견을 채용 할 것을 결정했다. <昔有桓國>이 <桓因>으로 ● 최남선 : 旣刊 3권에 관하여 알게 된 것 가운데 그 전의 것과도 관련이 되는 두서너 가지 점을 참고로 말하겠다. 그 첫째는 일차(日次)와 간지(干支)와의 대비에 관한 것이다. 제2편의 범레에 있는 바와 같이 <간지>가 있는 일차의 추정을 내무성(內務省) 구간(舊刊 1880년)의 삼정종람(三正綜覽)에 의거하였으나 알다시피 이 종람은 연대를 추산하여 이른바 지나(중국)라고 하는 것도 삭윤(朔閏)의 배정이 중국 당시의 실제 역일(曆日)과 틀리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조선사 제2편에서 문무왕(文武王) 9년부터 그 이후 약 1세기 동안에 대략 20회 가량이 틀리고 그 가운데는 1년에 2회 이상이나 틀린 것도 여러 번 있을 정도다. 신라의 역법(曆法)은 문무왕 때(14년)에 당(唐)의 <인덕(麟德) 역법을 전수 받았으며 그 이후에도 대체로 당나라의 역법을 습용(襲用: 그대로 씀)한 것이라고 보여지므로 간지의 추정에 있어서 <삼정종람>과 실제 역법과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당의 역법에 준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신라 경명왕 7년 11월의 삭(朔)은 경자(庚子)이고 대진(大盡)이라고 나와 있으나 지나(중국)의 역일(曆日)에는 신축(辛丑)이고 소진(小盡)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9일로 한 무신(戊申)은 대략 8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약간의 모순점을 들 수 있다. 이점은 고려조에 들어와서 <고려사>에 간지의 표시가 개소(個所)에 따라 사아세하게 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실제적인 분착(紛錯)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역일(曆日)의 비정(比定)을 요하는 경우에는 <삼정종람>과 같은 일정한 추정법에 의한 역일보다도 차라리 지나(중국) 당시의 시리제 역일을 표준으로 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요사(遼史)의 삭고(朔考)에 보이는 요(遼)와 송(宋)의 역법상 차이도 있으므로 역법의 비정에 각별한 주의도 하였을 것으로 짐작은 되나 참고가 될까하여 말한다. 둘째는 내외(內外) 기사의 대조에 있어서 일본 및 지나(중국)의 왕대(王代)나 연호가 바뀌는 대목에는 그 바뀌는 월차(月次)을 명시한다면 한층 더 편리할 것이다. 특히 남북의 여러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던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이것을 명백히 하지 않으면 실제로 불편할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원전(原典)의 인용이나 고감(故勘)에 있어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리는 바 없지 않으나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의 곳에 인용된 "삼국유사"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賤人)의 망필로 말미암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예부터 수상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경도대학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하여 ‘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바로 알 수 있다.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하고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스럽게 개찬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 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있어야 될 줄 안다. 이상 지적한 몇 가지는 잠깐 동안 발견한 것이다. <역사 왜곡 많다>폭로 ● 稻葉 : 기간 3권의 내용에 관한 주의는 참으로 고맙다. 지금 말씀한 역일(曆日)에 관하여 <삼정종람>의 삭순표(朔旬表)가 실제의 것과 틀린다는 것을 우리들도 인정하고 있으나 부득이 이를 채용한 것이다. 또 그 오류(誤謬)에 관하여는 <조선사고본>에는 정정(訂正)하고 있다. ● 최남선 : 역일(曆日)같은 것은 <삼정종람>보다도 20사삭윤표(二十史朔閏表)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한다........(下略)....... 이때까지만 해도 육당의 지적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다. 역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일본인 학자들을 조롱하는 것 같은 대목도 있다. 그러나 육당의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있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바꿨다는 지적은 조선사편찬 벽두부터 일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중대한 폭로인 것이다. 이 같은 조작은 조선사 왜곡에 앞장서 온 今西龍이 저질렀다. 이 회의에서 今井田 정무 총감이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애도를 표한 今西龍은 단군신화설을 조작한 장본인이다.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 교수를 따라와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今西龍은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마니드리어 그 모교인 경도 제대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중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다. 육당이 천인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今西龍의 조작을 지적한 것이다. 육당은 제7회 위원회에는 불참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다시 열린 제8회 조선사 편찬위원회에서 단군(檀君)에 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조선상고사의 별편 제작을 강력히 요구했다. 육당은 <단군과 기자(箕子)는 조선사의 지극히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제1편의 본문에 넣지 아니하고 주서(註書)에만 약간 기재하고 있다>고 지적 항변했다. 그리고 그는 단군등 조선상고사는 정편보편(正編補遍)을 제작하여 꼭 집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단군, 기자도 '신화'로 조작 -단군과 기자(箕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라고 생떼를 쓴 日人들은 조선사 편찬방침을 <편년체>로 할 것을 고집, 의도적으로 단군의 존재를 없애려고 했다.- 육당 최남선이 단군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소화 9년(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였다. 이 자리에는 今井田 정무총감과 黑板勝美 고문, 그리고 조선인 이윤용 고문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권중현 고문이 제8회 위원회 소집 약 3개월 전에 사망(1934년 3월 9일)했기 때문이다. 중추원 고문이던 이윤용은 權고문의 사망 직후인 이해 4월 17일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稻葉岩吉간사는 <조선사>의 편찬 분량을 늘리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조선사는 1929년 12월 23일 열릴 제3회 위원회때, 1권 5백면 총 30권으로 발간토록 결의했었다. 稻葉간사는 이에 대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료가 너무 많아 도저히 예정된 권수로는 수록할 수 없기 때문에 총 35권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사료가 수탈되었으면 철저한 사전 계획 끝에 확정한 조선사 편찬 예정을 바꾸기까지 햇을까. 또한 조선의 상고사는 줄이고 고려시대와 특히 조선시대를 파헤치는 역사서를 그들의 그리로 만들어 낸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黑板고문은 稻葉간사의 보고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했다. 본회의 사업은 처음에 10개년 계획으로 시작했으나 관동지진(關東震災) 때문에 2년을 연장했다. 그후 인쇄 사정에 따라 다시 1년을 연기, 소화 11년(1936년) 3월까지 완료하도록 했다. 이 계획은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나 만약 그 기간이 경과될 때는 잔무(殘務)를 정리한다는 형식을 취해 완료할 예정이다. 이렇게 부연한 黑板 고문은 사료의 출판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앞으로 중요한 문제는 사료총간(史料叢刊)이다. 이것은 제1회 위원회의 경의에 따라 <조선사> 편찬에 인용한 사료(史料)가운데 극히 중요하고 아주 희소한 것, 즉 그 동안 유포되지 않은 것을 출판 하기로 했다. 이 작업은 소화 7년(1932년)부터 시작했다. 이들 중요 사료에는 <승정원일기>, <일성록><종가문서(宗家文書)>등이 있고 이밖에 조선에 산재해 있는 귀중한 문집류들이 있다. 예를 들면 <三峰集><보한재집(保閑齋集)><모재집(慕齋集)>등 그 수가 많다. 이런 것들을 인쇄하여 본희의 편찬 태도가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이들 사료 출판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대사업이다. 그러나 이것도 <잔무>의 일부로서 처리하려 한다. 이것을 출판하는 데는 다년간 경험을 쌓아 숙련된 조선사편수회의 직원들이 그대로 맡는 것이 좋을 것이다. 黑板고문은 개인 생각이라는 전제로 <조선사>의 하한선을 갑오경장(1894)으로 하였으나 연대를 더 내려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黑板고문은 이같은 하한서늘 결정한 제1회 편수위원회 때는 병합(倂合: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탄) 직후로 국내외에 복잡 다단한 사건이 많았고, 10년 계획으로 <조선사> 편찬을 완료한다는 기본 계획으로 연대를 내겨 잡기가 어려워 미뤘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앞으로 <잔무>로 처리하면 <갑오> 이후의 역사도 충분히 포함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사>에 일본의 지배사까지 포함 시키려는 기도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稻葉 간사와 조선사 편찬을 주도하고 있던 黑板고문의 말을 듣고 있던 육당은 조선상고사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여 논쟁을 벌인다. ◆ 최남선 : 나는 黑板 고문의 의견대로 실행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업은 몇 번이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진도로 본다면 예정 기한내에 남은 부분이 전부 될 수 있는가 어떤가가 매우 의심스럽다. 오직 연한에만 관심을 가지고 일을 급하게 서둘러서 불완전한 것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미 잔무(殘務)라는 방법이 있다면 사료를 충분히 음미하여 완전한 것을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사료 총간에 충실하여 주기를 기대한다.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수록하여야 할 제 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殘務)'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혹은 '보편(普遍)'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그 다음에 본희의 <조선사>는 그 부수, 책수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는데는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그러므로 <색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색인도 역시 <잔무의 일부>로서 작성하여 주면 한다. ◆ 稻葉(도엽) : 지금 崔위원께서 하신 본회의 사업은 두 번 다시 할수 없는 것이 때문에 충분하게 음미하여 완전한 것을 작성하여야 한다는 말씀은 매우 좋은 지적이다. 단군이나 기자는 제 1회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회의 편찬 방침으로 채용한 '편년체'의 형식에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年次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본편에 채입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하여야 좋을지, 별편이냐, 보편이냐 교시하여 달라. ◆ 최남선 : 나는 제1회 위원회의 일은 모른다. 단군, 기자 문제를 등한시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것을 채입할 장소에 관하여는 필경 기술적인 문제이나 단군, 기자는 그 사실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黑板(흑판)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사상적 방면으로 별도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신앙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이나 만약 이것을 '별편'으로 하여 편찬한다고 하면 똑같이 사상․신앙적 방면에 중요한 전개를 하여 온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회의 사업이 자꾸 지연되어 있으므로 이 점은 최위원이 양해하기 바란다. ◆ 최남선 : 도대체 단군, 기자가 <역사적 인물이냐> <신화적 인물이냐>하는 것은 연구의 대상이라고 하겠으나 적어도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본희의 조선사에 이것이 채입되지 않은 것은 우리들 조선 사람으로서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것 때문에 본회의 <조선사>는 조선인 사이에 잘 얄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 稻葉(도엽) : 단군, 기자에 대한 우리 편찬자 측으로서 편찬경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다. 제 1편의 조선사료에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는 이미 지나(중국) 사료 중에 충분히 수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단군의 기사에 관하여는 고려 공민왕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寶)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 때에 이(檀君)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서는 '백문보'의 기사 대목이나 '세종'의 기사에 이를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이를 채입하려고 하였으나 '편년사'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편'으로 하는 일은 다시 상담하기 바란다. ◆ 小田(소전) : 나는 黑板 고문의 희망대로 조선사의 본편은 10년내로 끝마치고 그후에는 잔무라는 형식으로 <사료총간>을 많이 출판하고 편찬 연대를 연기하여 甲午이후까지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이 일은 한마디로 예산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므로 회장 각하(정무총감)의 많은 노력을 기대하는 바다 그리고 단군 문제는 편찬 간사로부터 이것을 채입하려고 하는 고심담도 있었으나 옛날의 편년사에 있어서는 이(檀君史)를 外史로 따로 취급한 예가 있으므로 별펀으로 하여 편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이능화 : 단군, 기자는 심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하지 못하고 '별편'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에 관한 사료가 아주 적기 때문에 '별편'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므로《삼국유사》,《동국통감》및 기타 중국 사람들의 설(設)을 모아서 도엽간사가 말한 바와 같이 고려 '백문보'의 곳이나 '이조세종'의 곳에 수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今井田(금정전) : 조선사의 편찬 연대를 연장하여 갑오경장 이후에 史實까지도 포함시키느냐, 사료총간을 증간하느냐, 색인을 붙이느냐 하는 것들은 모두 충실하고 좋은 방법이다. 또 종래 조선사는 30권으로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간사의 보고와 같이 제3편에 3권, 제5편에 2궈니을 증가시켜 총 35권으로 하겠다. 이와 같이 많은 시일과 많은 경비를 소요한 본회의 사업을 보다 훌륭하게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여러분들의 희망과 의견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분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한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적으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소화 10년도(1935년)에 완성하고자 하나 기한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서 정리할 방침을 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한 이외로 사상, 신앙 및 기타 문화면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고려하겠다. 금후 제위께서 가일층 진력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육당이 강력히 조선상고사의 추가수록을 요구하자 今井田 정무총감은 논쟁을 중지시키려는 듯 단군에 관하여는 여러분들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얼버무리고 이 회의를 끝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稻葉간사와 黑板 고문의 발언이다. 그는 '단군과 기자는 「조선사편수회」의 편찬방침이〈편년체〉로 되어있어 포함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黑板은 이 보다 한발 더 나가 단군과 기자는〈역사적 인물〉이 아니고〈신화〉라고 못박았다. '조선사'의 편찬 방침을 '편년체'로 결정한 것은 바로 단군조선을 없애려는 의도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수 천년 전의 고대사를 편찬하면서 '몇년 몇월 몇일'에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면서 자료를 제시하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인 것이다. 이 같은 생떼는 黑板勝美의 궤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단군을 별편으로 수록한다면 조선인이 아닌 공자와 석가모니까지도 조선사에 수록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해괴망측한 주장을 편 것이다. 이렇게 '조선사'의 상고사를 없애면서도 일제는 30권으로 예정했던 편찬계획을 바꿔 35권으로 확대했다. 이는 일본인 고문과 간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그들은 수집된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들 사료 중에는 세상에 유포되지 않은 희귀 유일 사료도 있다고 했다. 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보면 제7회 때 흑판고문이 '사료총간'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黑板고문은 당시 이런 말을 했으며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수집사료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것 중에는 한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특히《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당장서화첩(唐將書畵帖)》,《군문등록(軍門謄錄)》만이라도 먼저 출간해야 한다." 조선사편수회가 위원들에게 나눠 준 목록에 몇 종의 희귀 사료가 수록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목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板勝美가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이외에도 상당한 희귀 사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黑板勝美가 위원들에게 출판이 시급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일본 위원인 小田省吾는 조선사편수회가 작성한 목록에 이의를 제기, 선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小田은 목록을 열람해보니 '文祿의 役(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것이 많다고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선정 방향을 새로 정해 취사하자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사'를 편찬하기 전부터 사료를 탈취한 일제가 모두 얼마만큼 수집했는지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단지「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대정 12년(1923년)부터 소화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가 얼마나 많은 사료를 탈취하여 인멸했는지 그 죄상을 밝히는 것 또한 과제인 것이다. 사료의 인멸은 조선상고사를 없애기 위한 전초작업이었기 때문이다. 6. '영원한 속국(屬國)' 기도, 역사 날조 -경찰까지 동원, 온갖 사료를 무차별 강탈한 <朝鮮史> 편찬 작업...... 사진 4,511장, 文記, 畵像, 편액(扁額)등도 453점이나 된다고 <수탈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한국 역사를 그들의 통치 목적에 부합되도록 만든 歪曲 <한국사>인 것이다. 이를 위해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는 명목상 소수의 조선인 학자들을 포함시켜 악용했을 뿐, 그들은 다옻 의도를 버리지 않았다. 조선사편찬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강행되었다. 결국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소수 조선인 학자들은 그들의 들러리 역할만을 했고, 그 중 일부는 오히려 역사 왜곡의 편의까지 제공한 것이다. 1922년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1925년)로 명칭을 바꾸고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조선인 학자들의 주장은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그 증거는 바로 육당 최남선의 주장이 일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 제8회위원회(1934.7.30)에서 육당이 조선상고사의 <별편> 제작을 강력히 요구했고 위원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던 今井田 정무총감이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 처리할 방침]이라고 기대를 걸게 했으나 난처한 한 때를 넘기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의 마지막 회의인 제9회 위원회는 소화10년(1935년) 7월 5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렸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今井田 정무총감의 개회인사에 이어 稻葉岩吉 간사의 보고가 뒤따랐다. 육당 최남선은 이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稻葉 간사의 다음과 같은 보고에서 나타나듯이 육당이 참석할 명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일제 당국자들도 단군에 관해서는 부담을 가졌던지 보고의 첫머리가 육당이 주장한 단군기사의 수록 문제였다. "단군 기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 회의 처음부터 논의가 있어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의 기사를 검출하여 단군에 관한 고래의 문헌을 채록했다. 이 부분은 이미 책으로 출간되어 배본을 마쳤으므로 여러분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사 제3편(고려)을 미리 받아 보았을 육당이 이 모임에 참석했던들 무슨 뾰족한 수가 따로 있었겠는가? 일제 당국자들은 육당의 불참을 오히려 반가와 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일제가 그들이 편찬한 조선사에 단군을 수록했다고 생색내고 있는 부분은 백문보의 상소문(上疏文)에도 나온다. "문보(文寶) 상소하여 말하되 국가 사직을 세수(世守)하여 문물과 예악이 일어났으나 어찌 뜻하였으리요, 왜구의 난이 크게 일어나고 홍건적이 왕도(王都)를 함락하여 왕가가 남천(南遷)하였으니......대저 천수(天數)에는 순환의 이(理)가 있으매, 7백년으로써 일소원(一小元)하고 3천6백년을 대주원(大周元)으로 한다. 우리 나라는 '단군'이래 이미 3천 6백년이 되니 이는 곳 대주원의 운이 다시 돌아오는 때이다." 국가 위난을 당하여 크게 우려한 백문보(白文寶)가 죽을 때 왕에게 올린 애절한 구국 충정의 상소다. 일본인 학자들은 교묘하게, 그들의 말대로 이 부분을 검출하여 단군 두자를 집어넣고 육당 등 조선인 학자들의 주장을 반영 했다고 생색을 낸 것이다. 故 문정창은 '조선사' 3편 7권 말미 백문보의 상소문에 있는 '단군'2자가 '조선사' 35권, 총 2만 4천 여 쪽에 나오는 단군 기술의 전부라고 지적, 통탄을 금치 못했다. 또한 주의해서 볼 것은 단군이 나오는 부분마져 고려의 國運이 쇄퇴하여 북쪽은 홍건적에게 開京을 점령 당하고 남쪽은 왜구의 창궐로 백성들이 고난을 겪을 대를 골라(檢出)서 단군을 부기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깍아 내리고 위난의 시기만을 확대. 강조하려는 일제의 저의를 자명하게 드러내 주는 자료인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는 총목록, 총색인 각1권, 본문35권 총 24,111쪽, 도판 395매로 1938년 완간되었다. 조선사의 내용, 분량 및 간행연도, 담당자는 다음과 같다 이밖에 <조선사 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 集眞> 3질이 나왔다. 일제의 조선사편찬업무는 예정보다 늦은 소화 13년(1938) 3월에 완료되었다. 사료 수집 기간을 제외하고도 만 16년이 걸린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은 엄청났다. 초년도(1922)에는 연간 예산이 17,640원에 불과했으나 다음해부터 계속 증액되어 약 1백만원이란 거액을 투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24권은 조선총독부의 별도 예산을 받아 출간했다고 하니 일제의 조선사 편찬에 대한 집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대한 작업을 완료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우리의 고유한 사료를 수탈했을까? 일제는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낸 이 <조선사>를 뒷받침하는 사료만 남기고 나머지는 인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조선사편수회의 활동내용을 밝힌 <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남겨 놓아 이런 만행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 전 조선 각 도의 방방곡곡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또한 내지(일본)와 만주까지 찾아갔다.- 고 그들은 조선사 편찬에 기울인 심혈을 자랑하며 소화13년(1938) 3월까지 그 출장 일수가 연 2,800일에 달한다고 밝힌 것이다. 또한 수집한 사료도 많은 수에 달할 뿐 아니라 사진 4,511매 文記, 畵像, 편액(扁額)도 453점이나 된다고 성공적인 수탈실적을 내놓고 있다. ◇ 조선사편수회 편찬 '조선사' 내역 구 분 권차 내 용 분량(쪽) 간행연도 ----------------------------------------------------------------- 총목록 1 범례 및 목록 191 1938 ----------------------------------------------------------------- 1 편 1 조선사료 732 1932 신라 2 일본사료 352 1932 통일이전 3 중국사료 808 1933 ----------------------------------------------------------------- 2 편 통일신라 1 신라 문무왕9년(669년)~고려 태조 18년(935년) 457 1932 시대 ----------------------------------------------------------------- 1 고려 태조 19년(936년)~선종 1년(1083년) 530 1932 3 편 2 선종 2년(1084년)~의종 1년(1146년) 600 1932 고려시대 3 의종 2년(1147년)~고종 10년(1222년) 581 1933 4 고종 11년(1223년)~충렬왕 5년(1278년) 550 1933 5 충렬왕 6년(1279년)~충혜왕 1년(1330년) 543 1934 6 충혜왕 2년(1331년)~우왕 1년(1374년) 479 1935 7 우왕 2년(1375년)~공양왕 4년(1392년) 1935 ----------------------------------------------------------------- 1 조선 태조 1년(1392년)~태종 10년(1410년) 556 1932 4 편 2 태종 11년(1411년)~세종 5년(1423년) 516 1933 조선시대 3 세종 6년(1424년)~세종 24년(1442년) 683 1935 전기 4 세종 25년(1443년)~세조 12년(1466년) 756 1936 5 세조 13년(1467년)~연산군 3년(1497년) 1038 1937 6 연산군 4년(1498년)~중종 10년(1515년) 563 1935 7 중종 11년(1516년)~중종35년(1540년) 642 1936 8 중종 36년(1541년)~선조 4년(1571년) 772 1937 9 선조 5년(1572년)~선조 25년(1592년) 677 1937 10 선조 26년(1593년)~선조 41년(1608년) 1282 1937 ----------------------------------------------------------------- 5 편 1 광해군 1년(1608년)~인조 3년(1625년) 537 1933 조선시대 2 인조 4년(1626년)~인조 15년(1637년) 482 1933 중기 3 인조 16년(1638년)~효종 8년(1657년) 584 1934 4 효종 9년(1658년)~현종 14년(1673년) 546 1934 5 현종 15년(1674년)~숙종 15년(1689년) 634 1935 6 숙종 16년(1690년)~숙종 36년(1710년) 810 1936 7 숙종 37년(1711년)~영조 2년(1726년) 852 1936 8 영조 3년(1727년)~영조 25년(1749년) 1034 1936 9 영조 26년(1750년)~영조 51년(1775년) 784 1937 10 영조 52년(1776년)~정조 24년(1800년) 1016 1937 ----------------------------------------------------------------- 1 순조 1년(1800년)~순조 20년(1820년) 720 1934 6 편 2 순조 21년(1821년)~헌종 6년(1840년) 710 1935 조선시대 3 헌종 7년(1841년)~철종 14년(1863년) 697 1936 후기 4 고종 1년(1863년)~고종 31년(1894년) 1103 1938 ----------------------------------------------------------------- 총색인 1 부록 - 색인 894 1938 ----------------------------------------------------------------- 조사원들은 지방에 있는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 군청을 방문하여 사료 소재를 파악하고 군청 직원과 함께 사료 소장자를 찾아가 조사한 후 목록을 작성하여 귀중한 사료부터 입수했다. 조사를 완료하지 못했을 경우는 다시 군청을 경유하여 소장자를 설득했으면 이 같은 방법은 과거 사료 수집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로 인해 사료의 제공자에게 불안을 주어 불편을 준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취한 것이라고 자료 수집 방법의 개선을 떠벌리고 있다. 왜 사료 소장자들은 불안해했으며 제공을 기피했을까?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탄하자마자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 사료를 무차별 강탈하고 또한 엄청난 수랴을 불살라 버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료 소장자들에게는 당연한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사료차입이 조선사편찬회 설치 때 부터라고 수집 사료의 각 도별 차입 건수를 밝히고는 있으나 1923년 전부터 사료를 수집 했음이 <조선사편수사업개요>에서 드러나고 있다. 즉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수집한 사료를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남긴 기록들을 자세히 보면 사료 수집 기간은 1910년부터 <조선사> 발간 직전인 1937년까지 무려 27년간 계속된 것이다. 사료수집 기간도 여러 차례 연장했다. 그들은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참여자들의 지기급을 높인 이후에도 전국에서 발견되는 사료가 너무 많아 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 새로운 사료가 많이 발견되고 편찬도 늦어져 사료 수집을 1년 연장 했으나 조선사만이 아니라 중요 사료도 출판한다는 계획에 따라 다시 연장하여 소화10년(1035)까지는 완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편찬이 진행됨에 따라 사료가 더욱 더 불어나서 당초 예정했던 조선사 편찬 권수를 35권으로 5권을 늘렸고 사료 수집도 부득이 2년을 연장 소화12년(1937)에야 겨우 완료하게 되었다.- 고 밝힌 것이다. 조선사의 원고는 편(扁), 권(卷)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사료의 수집을 끝마친 부분부터 작성했다. 소화 2년(1927) 5월20일 확정한 사료 수재(收載) 범례에 준하여 규장각 도서와 李왕가 소장 도서, 각지에 산재해 있던 고문서, 고기록, 교지(敎旨), 녹권(錄券), 야사(野史), 문집, 시집, 서간등 조선사에 필요한 부분을 채록하고 같은 사건은 연차적으로 유취(類聚)하여 같은 장소에 주사료(主史料), 종사료(從史料)의 순서서로 배열했다. 인쇄는 제1편은 고본(稿本) 그대로 제2편 이하는 사료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고본 그대로를 모두 인쇄 하기가 불가능하여 본문(참가자들이 정리하여 쓴 日本文)만 싣고 사료는 이름만 달았다. 35편의 '조선사'는 이렇게 하여 출간되었다. 일제가 그들의 통치 목적에 맞춰 '조선사'라는 새 역사책을 쓴 것이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실제의 조선사를 왜곡하여 조선을 일본의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려고 역사마저 조작한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인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조선사'가 실제의 역사를 어떻게 분석해 놓았는지는 연구하지 않고 '이용할 가치가 놓다'고 쓰고 있는 사학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일제가 철저하게 우리의 사료를 색출하여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인멸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과연 그렇게 전국에 산재해 있던 사료의 씨까지 말릴 수 있었을까? 일제는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사 왜곡이란 만행를 저질렀으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 국가의 역사를 완전히 인멸 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비록 조선사편수회에 강제로 끌려가 어쩔 수 없이 참여했던 조선인 학자 중에도 양심이 있는 이들이 있었으며 수장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일제에 뺏기지 않은 사료도 광복 후 관심 있는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던 어윤적이 일제의 조선사서(朝鮮史書) 분서 직후에 <동사연표(東史年表)>를 작성하였으며 윤재구는 조선사가 출간된 후 낙향하여 제자인 서계수(徐繼洙)와 함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를 간행하고 그 서문에서는 눈물겨운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7. 비전(秘傳)돼 온 마곡사 古書도 방화 일제의 조선 사료 강탈을 피하려던 조선인들의 눈물겨운 정황을 밝혀 주는 이런 증거가 있다. 충남 공주군 사곡면 마곡사(麻谷寺) 상원암(上院庵)에는 전래되는 비전(秘傳)의 고서 수백 권이 있었다. 일제 치하인 1928년(소화 13년), 20세의 망국 청년이 산천을 주요하다가 이 암자에 들렀다. 그는 이 암자에 비전되어 오던 수백 권의 고서들을 열람하다가 깜짝 놀랐다. 신라의 대문호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그 내용을 보고 크게 깨달아 귀중한 서적을 어떻게 보관할까 걱정했다. 최치원이 쓴 고서의 사실이 누설되면 일제가 압수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고서 속에 있는 주요 사실을 필사(筆寫)하고 원본은 상원암에 그대로 두었다. 언젠가는 국보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그는 깊은 산사에 비장해 두는 것이 그 책의 보존에 오히려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암자는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타, 비장했던 고서들도 회진(灰塵)되고 말았다. 뒤늦게 상원암의 화재 소식을 들은 그 청년은 또 다른 최치원의 저서가 남아 있을까 하여 전국을 누비면서 수소문했으나 수포였다. 그 청년이 바로 홍종국씨로 그가 젊었을 때 마곡사에서 본 책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홍씨가 환갑을 막 지난 15년 전 자신이 필사했던 <제왕연대력>을 복간하며 그 서문에 고백함으로써 밝혀졌다. <제왕연대력>과 같은 사연을 가진 전래의 고사서들은 또 있다. 그리고 일제는 패망 직전 수집해 두었던 조선의 사서들을 모두 태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일부가 한국인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들을 종합하여 우선 우리 나라에 어떤 사서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할 때 어떻게 선별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잃어버린 역사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상시 변호사가 정리한 단군사서의 계보를 보면 그 역사는 상고시대부터 시작한다. 상고 및 삼국시대의 <신지비사(神誌秘史)> <해동비록(海東秘錄)>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고구려 大英弘)>둥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에는 이런 사서들이 또 있었다. 시조 동명성왕 때부터 제3세 대무신왕대에 이르는 사이에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史官들이 이 나라 상고시대로부터 고구려 초기까지 약 2,300여년 간의 역사를 유기(留記) 100권으로 편찬하였다. 이 사서는 제11세 동천왕 20년과 (단기2579. AD 246) 왜장(魏將) 관구검의 환도성(丸都城) 함락과 제16세 故國原王 12년(단기 2675, AD342) 연왕(燕王) 모용광의 환도성 공함(功陷)등 병란(兵亂)에 의해 그 일부가 약탈 혹은 소실 당했다. 그후 사관들이 다시 복원하여 놓았던 것을 제 26세 영양왕(嬰陽王) 11년 경신(庚申)(단기 2933, AD600)에 태학박사(太學博士) 李文眞이 다시 이를 <新集>5권으로 편수 요약했다. 이밖에 고구려에서는 사찬(私撰) 史書로서 대영홍이 저술한 <신지비사역술>과 도현(道顯)의 <日本記>가 있었다고 전한다. 제 28세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戊辰)(단기 3001, AD668) 9월 1일 나당 연합군의 평양성 함락으로 고구려 멸망 때 고구려 시대에 편찬 저술된 사서, 문헌은 모두 회진 되었는지 오늘날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 백제에 漢文字가 전래된 연대를 정확히 알수 없으나 적어도 제8세 고이왕(古爾王)대에 한문자의 사용이 성행 하였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고이왕 51-52년(단기 2617~2618, AD 284-285)에 걸쳐 아직기와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가서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비로서 일본에 한자가 전래 되었다.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 太子의 스승이 되어 논어, 천자문과 經學을 강술(講述) 하였다는 사실이 일본의 사서 (日本書紀 應人天皇 84-85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때 史書도 모두 손실] 백제의 사서로 제14세 근구수왕(近仇首王) 元年(단기 2708년경, AD375경)에 博士 고흥(高興)이 國史<서기(書記))>를 저술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고흥이 소찬한 이 서기의 내용과 편찬 권수는 알 수 없다. 신라의 한자 사용은 국가 형태가 이루어진 제 17세 내물왕(奈勿王) 때부터로 추측하고 있다. 한자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정한 것은 제22세 지증왕(智證王) 4년(단기2836, AD 503)이고 왕(王)의 시호(諡號)를 한자로서 추존(追尊)하는 시호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제23세 법흥왕(法興王)원년(단기 2878, AD 545) 7월이다 한자 사용이 공식화 된 것은 지증왕 때로 보고 있다. 신라의 사서편찬은 한자 사용이 공식화 된 지 약 40년 후인 제24세 진흥왕(眞興王) 6년 (建元 10년) 을축(乙丑) 7월에 거칠부(居柒夫)가 왕명으로 국사(國史)를 편찬한 것이 효시가 된다. 거칠부 소찬의 이 국사는 그후 통일신라시대에 저술된 것으로추측되는 그 편저자를 알 수 없는 <단군기(檀君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新羅古事> <백제신선百濟新選> 金大問 소찬의 <고승전 高僧傳>과 <花郞世紀> <한산기 漢山記> <선사 仙史> 기타 전기 등 수많은 사서가 있었다. 신라 제55세 경애왕 4년(단기 3270, AD 937) 정해(丁亥) 11월에 後百濟王 견훤(甄萱)이 그 옛날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설원(雪怨)을 한다는 명분으로 신라왕도 금성을 급습하여 경애왕을 시해하고 신라의 보물을 약탈, 사적(史籍)은 전주로 이관하여 두었다고 한다. 이들 사서는 후백제가 고려에 토멸 당할 때(단기 3269, AD936) 병화(兵火)에 의하여 전부 소실 되었는지 찾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 때 사고(史庫)가 회진하여 <신집(新集)> 100권을 비롯한 수많은 사서 문헌이 소각되자 서기 699년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조영이 발해(渤海)를 건국하였다. 발해의 시조 고왕이 된 그는 즉시 동생(王弟) 발요군왕(勃要郡王) 대야발(大野勃)을 시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찬수케 했다. 대야발은 왕명을 받고 天統 9년부터 13년간 돌궐을 3차례나 왕래하면서 사료를 수집, 각고의 노력 끝에 천통 21년 <단기고사>를 편찬 완성했다. <단기고사>는 편찬 당시 渤海文이었으나 그 약 100여년후 발해의 대문호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중간하고 장상걸이 주석(註釋)을 단 원본이 淸朝말엽까지 중국에 전승되어 내려왔다 이런 사실은 舊韓末 우리나라의 유응두씨가 淸國 각지를 외유하던 중 우연히 중국 고서점에 들렀다가 입수, 귀국하여 비로서 알려졌다. 한국에 들어온 <단기고사>는 유씨가 그의 문인(門人) 응암(膺庵) 이윤규에게 전했다. 이윤규는 이를 널리 세상에 전파할 목적으로 그 아들 李華史와 함께 수십부를 등사하여 그 중 1부를 당시 대한제국 學部 편집국장 이경직에게 주어 인쇄, 발간케 하였다. 이경직은 光武11년(단기 4240, AD1907)에 이를 인쇄 간행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 소각되었다. 그후 서기 1910년(단기 4243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일제는 장차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취조국을 설치하여 한국의 관습(舊習), 제도, 역사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같은 해 11월부터 우리나라의 고문헌과 사서를 압수, 약탈, 국내에 남은 <단군고사>는 거의 압수 되었다. 고사서 보존에 위기가 닥치자 응암 이윤규의 아들 이화사는 <간기과사>의 등사본의 일부를 단재 신채호에게 전했다. 단재는 이 책을 중국에 가서 발간 하려다가 여의치 못했던 듯하다. 그후 국내에 남은 일부 등사본은 일제 치하에서도 천행으로 그 잔맥이 보존되어 광복 후 서기 1949년(단기 4282년)에 이화사와 해암(海庵) 김두화씨가 國漢文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 1950년 6.25동란의 발발로 애석 하게도 번역 원고가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休戰이 되고 1959년(단기 4292년) 정해박, 이종국, 김재형씨등 세 사람이 일부 남아 잇던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해 10월 3일 개천절을 기하여 다시 <단기고사>를 복간했고 1981년 12월 7일 손중희씨가 다시 이를 중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단기고사>가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어 오는 과정에서 그 원본이 압수 소실되고 시본(寫本)도 산일(散逸) 되어 복간할 당시 <기억을 더듬어서> 편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발해 왕조는 <단기고사>외에 어느 때 누가 찬술하였는지 오늘날 그 책을 볼 수 없으므로 전혀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 이후 歷朝의 王代實記를 편찬한 秘史로서 <朝代記>가 있었다. 이 <조대기>는 서기 926년 발해가 거란(遼)에 멸망할 당시 발해 왕자 대광현(大光顯)등이 고려에 망명할 때 가지고 왔다. 후일 고려 말엽의 청평도사 이명이 <진역유기(震域遺記: 古朝鮮遺記) 3권을 저술 할 때에 이 책이 저본(底本)이 되었다. [산에 숨어서 <단군고기(檀君古記)> 편집] 고려는 초기에 사관(史舘 : 후에 春秋館)이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이미 국초(國初)부터 역대 실록을 편찬 보관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글 자료가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편저년대상으로 본 단군관계 사서의 계보] ------------------------------------------ ◆ 근거사서 : 47世 단군 또는 그 일부 史實을 인정하고 있는 사서 (소위 도가사서 또는 민족고유사서) 1) 상고․ 신지비사(神誌秘史) : 단군조, 신지(神誌)찬 삼국시대 해동비록(海東秘錄) : 저자미상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 : 고구려 대영홍(大英弘)저 ---→ A.D.1412년경(조선태종12년경)소각 2) 발해 단기고사(檀奇古史) : A.D. 707~719 대야발(大野勃)찬 1959. 복간본 현존 ---→ 삼국유사보다 약 560년전 3) 통일신라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 : A.D.890년경. 진성여왕20년경 최치원저 1929. 필사본 현존, 홍종국씨 소장 ---→ 삼국유사보다 약 390년전 4) 고려시대 조대기(朝代記) : A.D. 926. 발해멸망시 君子 대광현(大光顯) 등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 귀화할 때 가지고 온 고조선역대실기. ---→ 삼국유사보다 약 350년전 ---→ 일제 때 압수, 소각 표훈천사(表訓天詞), 도증기(道證記), 대변경(大辯經), 동천록(動天錄), 지화록(地華錄),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지공기(誌公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신선전(神仙傳), 삼성기(三聖記 상편, 안함로저), 삼성기(三聖記 하편, 원동중저) ---→ 일제 때 압수, 소각 진역유기(震域遺記) 3권 : 고려말엽 청평도사 이명(李茗) 저술 ---→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시기 단군세기(檀君世紀) A.D. 1283년경 이암(李巖)저 ---→ 일제 때 압수, 소각 5) 조선시대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실사(檀君實史)) : A.D. 1675. 북애자(北崖子)저. 故 양주동(梁柱東) 소장 필사본 현존. 도가사서 중 最高의 것 6) 일제시대 환단고기(桓檀古記) : 1911. 계연수 편찬 신단실기(神壇實記) : 1914. 김교헌 저 동사년표(東史年表) : 1915. 어윤적 찬 조선사략(朝鮮史略) : 1924. 김종한 저 대동사강(大東史綱) : 1928. 김 광 저 조선역사(朝鮮歷史) : 1934. 이창환 저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 1938. 윤재구,서계수 공편 7) 광복후 해동춘추(海東春秋) : 1957. 박장현 찬 민족정사(民族正史) : 1968. 윤치도 저 고려 예종 때 홍탁(洪濯)이 편저한 <편년통재(編年通載)>와 <속 편년통재>가 있으면 의종(毅宗)때 김관의(金寬毅)가 편찬한 <편년통록(編年通錄)>과 왕대종록(王代宗錄), 충렬왕(忠烈王) 때 민지(閔漬)가 편찬한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7권,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42권, 이인복(李仁復), 이색(李穡)이 공찬(供饌)한 본조금경록(本朝金鏡錄) 등이 잇다. 특히 고려 초엽에서 중엽에 걸쳐 도학자(道學者)의 소찬으로 추정되나 그 편저자들을 알 수 없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삼성밀기(三聖密記)> <표훈천사(表訓天詞)> <도증기(道證記)> <지공기(誌公記)> <대변설(大辯說)> <동천록(動天錄)> <지화록(地華錄)>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신선전(神仙傳)>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이성모(智異聖母)> <하사간훈(河沙艮訓)>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수찬공소(修撰公所))> 100여권, <한도참기(漢都讖記)-道詵 편저> 문태산(文泰山), 왕거인(王巨仁), 설업(薛業)등의 <삼인기록(三人記錄)>과 안함로(安含老), 원동중(元董仲)의 <三聖記> , 忠烈王 9년(단기 3616, AD1283) 10월 3일 文貞公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강화도 해령당에서 찬술하였다고 전하는 <檀君世紀>, 북애거사(北崖居士) 범장(范樟)이 편찬한 <북부여기(北夫餘記)>등 많은 희귀한 사서가 있엇다. 이들 사서 가운데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3권과 근세조선 제3세 태종 10년(단기 3743, AD1410)에 일십당주인(一十堂主人) 이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는 합본 되어 나라를 잃은 다음해인 1911년(단기 4244년, 明治44년) 5월에 운초 계연수씨가 묘향산 단굴암(檀屈庵)에 숨어서 한 권으로 편집 발간 했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환단고기>라고 한다. 도학자들이 저술한 단군사서로서 유명한 것은 고려 말엽에 청평도사 이명이 발해 왕자 대광현등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하여 올 때메 가지고 온 발해비사인 <조대기>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서술한 <진역유기> 3권을 들수 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여러 사서들은 고려 제23세 고종 18년부터 29년 동안 전후 6차례에 걸쳐 내침한 몽고군의 분탕(焚蕩 : 고종 18-46, AD 1231-1259)과 제31세 공민왕 때 4년간에 걸친 홍건적의 입구(入寇 : 공민와 8-11, AD 1359-1362)등 전란으로 많이 회진 또는 산일 되었을 것이다. 유교와 존화사상(尊華思想)을 국시(國是)로 하는 근세 조선이 건국되자, 국초(國初)부터 유교사서(儒敎史書)와 어용사서(御用史書)를 제외한 그 이외의 사서들은 국시에 위배되는 이단사서(異端史書)라고 하여 박해를 받았다. 태종 11년(단기 3744년, AD1411) 예부터 궁중에 비장하여 내려오던 <신지비사(神誌秘詞)> <해동비록(海東秘錄)> 등 많은 고서적과 <도학사서>들을 없앤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즉위하면서 이와 같은 정책을 완화하고 왕명으로 고사서와 비기류를 널리 구하여 보존 하도록 힘썼다. 세조3년(단기 3791, AD 1458), 예종 원년(단기 3802, AD 1469), 성종 원년(단기 3803, AD 1470)등 3차례에 걸쳐서 이들 왕들이 친히 전국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여 조선 팔도의 官民家와 사찰 들에 소장되어 있던 <도가서서>들을 찾아 올리라는 구서령(求書令)을 내렸다. 이때 많은 사서들이 수집되었으나 또 다시 임진 정유(壬辰 丁酉) 왜란(선조 25-31, AD1592-1598)과 丙子胡亂(인조 14-15, AD 1636-1637) 이괄(李适)의 난(인조 2년)에 북애자(北崖子 : 北崖老人 또는 北崖仙人)가 <규원사화>를 저술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부의 사서는 있었다. 저자인 북애자가 조선 팔도 전국 방방 곡곡을 편력 답사하면서 이와 같은 사서들을 보았던 것이다. 북애자는 바로 이들 사서들을 대부분 수집하여 <규원사화>에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 비근거사서 : 근거사서 이외의 사서. 소위 불가사서, 어용사서, 유가사서 등 1) 고려시대 삼국유사(三國遺事) : 1280년경. 일연 저. 1512. 正德本 현존 제왕운기(帝王韻紀) : 1287. 이승휴 찬 2) 조선시대 동국사략(東國史略) : 1403. 권 근 등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1454. 정인지 응제시주(應制詩註) : 1462. 동국통감(東國通鑑) : 1485. 서거정 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 1486. 노사신 등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 1705. 홍만종 등 동사강목(東史綱目) : 1758경.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1770. 홍봉한 해동역사(海東繹史) : 1814년경 한치윤 동사보감(東史寶鑑) : 저자미상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 : 1899. 대한제국학부 8. 개국 기록한 正史는 모두 인멸 - 숙종 원년 北崖子가 지은 규원사화는 종래 儒家史書들이 범해 온 東夷문화에 대한 自卑에서 벗어난 檀君實史로서 그후 실학자 등 민족학자들 저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힌 개국사(開國史)는 어찌하여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가? 고려시대의 사서가 몇 종류 있다. 하지만 왜 이들 사서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을까? 개국 설화를 담은 고문헌마저 5천년 역사를 가졌다는 이 민족은 어찌하여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우리 나라의 역사 서적을 뒤질 때마다 누구나 느끼는 의문일 것이다. 개국설화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인위적으로 없앴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민족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다음과 같은 문헌만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서《삼국사기》와《삼국유사》, 그리고 7언 한시로 된《제왕운기》가 그것이다. 정사(正史)로 분류되는《삼국사기》와 야사(野史)라고 한때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상고사에 관해 판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것이다. 결국 이들 두 사서는 '단군'을 부정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현재 우리가 거론하는 '단군'은《삼국유사》를 전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삼국유사》는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이라고 기록, 단군을 제석(帝釋)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처럼 각색한 것이다. 각종 사서류는 세월을 지나면서 많이 인멸 되었지만 새로운 편찬 작업 역시 계속됐다. 근세 조선에 이르러서는 國初부터 <國家滅而, 史不滅>이라는 역사 인식을 지표로 삼아 사서편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사서 편찬 사럽은 매우 활발햇다. 비록 易姓革命일지라도 조선조는 前 王朝의 역사를 찬수했다. 근세 조선은 국초부터 <高麗史>의 편찬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太祖는 즉위 원년(단기 3275, AD 1392) 10월에 정도전(鄭道傳)과 설총(薛摠)에 명하여 <고려사>를 찬수케 했다. 태조 4년(단기 3727, AD1395) <고려사> 37권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사서는 조선조의 건국을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고려 말기의 역사에 曲筆을 가했다. 사대존화(事大尊華)의 명분을 내세워 고려의 자주적 민족 통합과 전통문화 및 사실을 약화 시킨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世宗은 다시 <고려사>를 편찬케 했다. 하지만 이 改修本도 완벽을 기하지 못해 편찬에 많은 파란곡절을 겪었다. 文宗 원년(단기 3784, AD 1451) 8월에야 비로서 오늘날 전하는 정인지(鄭麟趾) 찬 <고려사> 139권이 와성됐다. 조선조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太祖 초부터 春秋館과 충청도 충주에 실록보관소(實錄保管所)를 두고 역대의 실록(王朝實錄)을 편찬 보관하여 오다가 세종 21년(단기 3772, AD 1439)에 경상도 星州와 전라도 全州에 2개의 史庫를 증설했다. 춘추관을 비롯한 忠州, 星州, 全州등 4개 사고에 실록을 보관했던 것이다. 이들 史庫는 전쟁으로 다시 피해를 입었다. 선조(宣祖) 25년(단기 3925, AD 1592)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성주의 3개 사고가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남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후 전주 史庫本 實錄은 내장산으로 이전했다가 평안도 영변 묘향산(妙香山)에 다시 옮기고 선조 39년 (단기 3939, AD1606) 全州本을 재인쇄 했다. 새로 인쇄한 실록은 춘추관과 새로 설치한 江陵의 오대산(五臺山), 봉화(奉化)의 太白山, 江華의 마니산(摩尼山), 무주(茂州)의 적상산(赤裳山) 등 5곳에 史庫를 다시 지어 보관했다. 이들 실록은 仁祖 2년(단기 3957, AD 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본>은 또다시 소실되고 나머지는 韓末까지 보관 되어 내려왔다. 이 가운데 <오대산사고본>은 일제가 동격제국대학으로 가져갔으나 1923년(단기 4256, 일제대정 12) 9월 關東大震災(관동대지진) 때 전부 회진되고 말았다. <태백산사고본>과 <적상산사고본(마니산사고본을 옮긴 것)>은 규장각에 옮겨 겨우 보존했으면 현재 서울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본>은 6.25 동란때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어윤적 등 史書 보존 앞장] 조선조 새대에 관찬사서(官撰史書)로는 <國朝寶鑑> 90권(世祖 3년-純宗 隆熙2년, AD 1458-1908)과 <三國史節要>(成宗 7년, AD 1476 노사신, 서거정 공찬), <東國史略> (太宗 3년 1403년 권근(權近), 이첨(李詹), 하륜(河崙), 유희령(柳希齡) 공찬) <동국병감(東國兵鑑) (文宗원년 1451년) <世宗實錄地理志, 端宗 2년 1454년, 정인지(鄭麟趾) 찬, <응제시주(應製詩註)> (世祖 7년, 1462년 권경(權擎) 편찬), <동국통감(東國通鑑)>(成宗 16년, 1485년 서거정, 崔薄 공찬)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成宗 17년, 1486년, 노사신, 김종직 공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英祖 46년 1770년, 홍봉한 편찬),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高宗 광무 3년, 1899년 대한제국학부 간행) 등이 있다. 사찬(私撰) 史書로는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肅宗 31년, 1705년 홍만종 편찬) <역대사론(歷代史論)>(英祖 12년, 1736년, 宋成明 간행), <역사집략(歷史輯略)>(東史輯略.高宗 광무 6년, 1902년 金澤榮 간행)등이 있다. 특히 실학파(實學派)의 사서로서 <동사강목(東史綱目)>(英祖 34년, 1758년, 안정복(安鼎福 편저), 수산 이종휘(修山 李種徽)의 <東史>,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삼한 정통론(三澣正統論)>,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 홍여하(洪汝何)의<휘찬여사(彙纂麗史)>와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純祖 14년, 1814년)등이 있다. 이밖에 기자(箕子)에 관한 史書로서 율곡(栗谷) 이이(李珥) <기자지(箕子志.箕子本紀)와 서명응의 <기자외기(箕子外記)>, 허무의 <대동정략(大東正略)>(高宗 광무 7년, 1903년) 등이 있다. 道學者의 史書는 조선조의 건국 초기부터 이단시(異端視)하여 박해를 가하여 왔기 때문에 별로 두드러진 것이 없다. 다만 숙종(肅宗) 원년(단기 4008, 서기 1675년) 3월 상순에 북애자가 고려 말엽 청평도사(淸平道士) 이명(李茗)이 저술한 <진역유기> 3권을 바탕으로 하여 편저한 단군실사(檀君實事)에 관한 <규원사화>가 있을 뿐이다. <규원사화>는 구한말 이후 광복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90여년 동안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한국 고대사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史觀)의 정립과 체계를 수립해 준 귀중한 사서였으나 어띠된 일인지 데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근세 조선 말엽의 이른바 실학파 유학자(儒學者)들이 저술한 史書, 즉 이종휘의 <동사>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등에서 비록 존화사상, 기자숭배(箕子崇拜)를 역사 의식의 정통으로 하여 저술� 유가사서(儒家史書)들이기는 하나 동이(東夷) 문화에 대한 종래의 자비(自卑)와 천시적인 인시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향을 끼쳤다. 이들 사서는 점차 동이(東夷) 문화에 대한 재인식과 자부심을 고취하는 한편 단군과 단국조선의 위치를 점차 부각시켜 나갔다. 단군의 신교(新敎)를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다. 유가 사학자의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역사 인식 체계를 서서히 바꾸어 놓는 계기를 <규원사화>가 마련한 셈이다. 구한말, 운초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편찬 했다는 <환단고기>를 비록 많은 역사서의 저본이 된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 전국 방방 곡곡에서 우리 사서(史書)를 약탈하여 <조선사편찬사업>을 벌여 놓고 우리 역사를 말살, 왜곡 하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던 시기를 전후하여 절멸되어 가는 우리 역사의 명맥을 살려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광복 후에 올바릉 우리 역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우국(憂國)지사 또는 재야 사학자들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우리 역사의 말살, 왜곡을 크게 근심한 나머지 일제가 수탈하여 온 조상 전래의 각종 사서들을 몰래 감춰 신중하게 고구(考究) 검토한 끝에 편찬 저술하여 놓은 우리 상고사 중 <단군사> 부분은 대개가 <규원사화>의 사실을 그 바탕으로 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밖에 이런 사실(史實)과 부합되거나 호기은 뒷받침하는 <제왕연대력> <단기고사>를 이들 사서는 인용하고 잇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서(史書)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환단고기(桓檀古記), 1911. 5. 명치(明治)44년 운초 계연수(雲樵 桂延壽) 編纂 ② 신단실기(神壇實記), 1914. 2. 대정(大正) 3년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編著 ③ 동사연표(東史年表), 1915. 9. “ 4년 혜재 어윤적(惠齋 魚允迪) 編著 ④ 조선사략(朝鮮史略), 1924. 7. “ 13년 김종한(金宗漢) 編著 ⑤ 대동사강(大東史綱), 1928. 3. 소화(昭和) 3년 송계 김 광(松溪 金 洸) 編著 ⑥ 조선역사(朝鮮歷史), 1934. 4. “ 9년 계봉 이창환(鷄峯 李昌煥) 編著 ⑦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1938. 1. 소화(昭和)13년 海平 윤재구, 利川 徐繼洙 共著 ⑧ 해동춘추(海東春秋), 1957. 10. 檀紀 4290년 中山 朴章鉉 編著 ⑨ 민족정사(民族正史), 1968. 8. 檀紀 4301년 義堂 尹致道 編著 이 가운데 <동사연표>를 편찬한 혜재(惠齋) 어윤적은 대한제국 학구 편집국장을 역임한 구한말의 史學者였다.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선사편수 사업에 참여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 총동 寺內(테라우치)가 부임하자마자 우리 사서 20여만 권을 약탁 소삭하는 것을 보고 <동사연표>를 남긴 것이다. 이 땅의 史書가 절멸 될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제왕연대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산집(修山集)>의 <동사>, <성호집>, <風俗考.丁若鏞 著> <동사강목> <해동역사> <동국통감> <연려실기> <삼국유사> <동국문헌비고> 등을 집대성하여 조선사 편찬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 되기 이전인 1915년(大正 4년) 9월에 <동사연표>를 간행 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1934년 (昭和 9년)에 재판 했으나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발매 금지 되었다. <조선세가보>를 감수한 海平 윤재구 역시 구한말의 史學者로서 조선사편찬위원, 조선사 편수위원으로 재직했다. 그는 1938년 조선사 편수 사업이 끝난 후 고향인 전라남도 羅州로 落鄕 은퇴했다. 역사 왜곡의 현장에 있던 그는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겨레의 正史가 말살 된 것을 몹시 애통하게 생각하던 끝에 門人 利川 서계수와 같이 1939년 (소화 14년) 1월 고향 나주에서 <조선세가보>를 간행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세가보>는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조선 집안의 역사를 기록하여 놓은 것이니 조선 사람이라면 어찌 이를 알지 못하리요! 세전(世傳)되어 온 우리 조선 집안은 두드러진 충효와 道學과 문장가의 집안이었다. 이들 모두 어찌 우리 집안의 선조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선 세가의 역사를 기록한 <세가보>를 지금 조선의 후손들이 소중하게 간직 하는 것이 어찌 또한 옳은 일이라고 하지 않으리오! 근자에 서계수군이 여러해 동안 깊이 생각하여 사료를 모은 끝에 책 한 권을 니욱하여 놓고 우리 조선 세가의 역사를 곧고 바르게 기록하였다. 이를 널리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책이름을 골라 <세가보>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어찌 이 책의 이름이 중요하고 바르다고 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고로 이에 몇 줄 권두언을 쓰노라. [단군 格下] 풍조 아직도... 해평의 애적한 심회를 가히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참여 했던 그가 은퇴를 빙자하고 고향에 은거하며 제자로 하여금 인멸된 역사를 다시 기록토록 한 것은 민족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이같이 우리의 선대들은 이 나라의 역사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멋대로 조작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는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대동사강(大東史綱)>과 <조선역사(朝鮮歷史)> 역시 이런 눈물 겨운 민족애의 소산인 것이다. <조선역사>는 계봉 이창환이 썼다. 그는 사학자가 아니었다. 만주관립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일제가 우리의 상고사를 말살 하고 왜곡하여 그들의 통치 이념에 맞도록 ROCKS 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일제하에 교사로서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던 그는 이러한 자리들을 떨쳐 버리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했다. 그는 중국의 상해 등 여러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고대 사료를 접할 수 있었다. 중국 고서를 비롯 조선 관계 史書는 빼지 않고 섭렵한 그는 단군조선의 발상지인 태백산(백두산)을 출발지로 만주 벌판의 고적들을 답사했다. 그 자신이 직접 확인한 고적들과 각종 사료를 종합하여 귀국 후 20년 만에 편찬한 책이 바로 <조선역사>인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료들을 불태워 모두 없애려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우리의 선대들이 새로운 자료를 찾고 다시 저술하여 광복 후 조선의 正史를 쓰도록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이들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사료로 활용하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이 나라를 역사를 지키기 위해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史書들을 기피하고 있다. - '단군'은 1천 8백 살이나 살았다는 신령이라더라. -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까지도 '단군'을 설화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태도를 알게 모르게 내보이고 있다. 한국의 상고사는 이야기처럼 흘려보내야만 실증적인 근대 사학을 배운 지식인처럼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서의 저본이 된《규원사화》를 비롯《조선세가보》,《동사연표》등은 단군조선의 왕대(王代)까지 밝히고 있으니 이는 어인 일일까? 9.《규원사화》도 탈취, 소각 - 민족 정기를 키우는데 이바지 했던 道家史書는 유학자들에 배척 당하고 조선 총독부의 탈취, 소각으로 檀君實史라 일컫는 <규원사화>조차도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우리 나라의 고사서를 분류하면 유가(儒家)사서, 불가(佛家)사서, 도가(道家)사서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사서 가운데 '도가(道家)사서'는 민족정기를 키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고려 때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한 이후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황당무계한 비사(秘史), 비기(秘記), 참서(讖書)라고 하여 이단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가(道家)사서'들은 고가(古家)나 암혈(岩穴) 등에 묻혀서 그 잔질(殘帙)이 연면히 계승되어 왔다. 적어도 '단군조선사'에 관하여는 '도가사서'만큼 풍부한 기록을 남기는 사서들도 없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도가'만큼 고유의 전통문화를 자부하고 존중하며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가들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도가>는 순수한 중국의 전통적인 도학자인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와는 다르다. <단군 이래의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神敎의 신봉자>를 말하는 것이다. <도가사서>로서 어떤 것이 있는 가에 관하여는 아직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는 상태다. 앞에서 밝힌 고사서 가운데 고구려 시대의 대영홍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신지비사역술>이나 신라 시대에 무명씨가 저술한 <단군기>와 <선사>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할 때 가지고 온 <조대기> 고려 말엽에 청평도사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 고려초-중엽에 편저자 미상의 <고조선비사>, <삼성밀기> <표훈천사> <도증기> <지공기> <대변설> <동천록><지화록><삼한습유기><신선전><통천록><마이록><호중록><지리성모><하사양훈><주남일사기><수찬기소> 100여권, <한도참기> 문태산, 왕거인, 설업 세 사람이 기�한 서적 등 20종의 고기류(古記類)가 있다 이 밖에 후일 <환단고기>의 저본(底本)이 되었다고 전하는 안함노, 원동중의 <삼성기> 행촌 이암 소찬의 <단군세기>, 번방이 찬수한 <북부여기> 이맥이 찬수한 <태백일사> 조선조 말엽에 저술된 <규원사화>를 대개 <道家史書)라고 한다. 이들 '도가사서' 중 현존하는 사서 가운데 단군조선사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장 방대한 고사기류와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비교적 상세하고 합리적으로 저술한 단군실사(檀君實史)가 바로《규원사화》라고 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지금으로부터 310년 전인 근세조선 제19세 숙종 2년 을묘(단기 4008, AD 1675) 3월 상순에 저술된 사서이다. '단군실사'라고도 하는 이 책의 저자는 불행하게도 이름(실명)을 밝히지 않고 오직 '북애'(北崖老人 또는 北崖仙人, 혹은 北崖子)라는 아호만 서문에 쓰고 있다. 이《규원사화》는 일제가 소위 '조선사편찬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이 나라 사서를 탈취, 소각할 때에 거의 전부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양주동이 감추어 두었던 소장본을 일제 치하인 1940년(단기 4273년) 9월 손진태가 극비리에 필사하여 두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뿐이다. 道家史書는 어떤 史書이든간에 공식적으로 간행된 일이 한번도 없었다. 또한 그 저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도가>들의 처세관(處世觀)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유교(儒敎 )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하고 있었던 조선새대의 사대주의 봉건적 재배 체제 하에서 儒家들의 탄압이 격심하여 이같은 현상을 빚은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따라서 <도가사서>는 기층 사회에세 口傳 되는 자료나 민간 신앙으로 전해 오는 자료들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또한 그 史書 자체가 상류사회보다도 하류사회에서 필사(筆寫) 또는 구전(口傳)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비록 그 사서가 산사(山寺)나 암혈(岩穴)에 묻혀 왔다고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규원사화》는 그 내용이 ①서문 ②조판기 ③태시기 ④단군기 ⑤만설 등 5개 부 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 저자인 북애자 자신의 집필 동기르 밝히고 있다. 과거에 낙방한 저자가 분연히 붓을 던지고 비울한 심정을 달랠 길 없어 3개 성상 동안 이 나라 전국 방방 곡곡의 역조(歷朝) 사적지(史蹟地)를 두루 편력, 답사하던 끝에 예맥고지(濊貊故地)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우연히 <진역유기(古朝鮮遺記 李茗 저)> 3권을 입수하게 된 것을 계기로 과거를 단념하고 다시 기사 회생의 용기를 얻어 고향(漢城)에 돌아와 부아악(負兒岳) 기슭 양지 바른 쪽에 규원초당(揆園草堂)을 지어 놓고 오로지 이 한 권의 책 <檀君實史>를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일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때는 임진(壬辰), 병자(丙子), 양란(洋亂) 직후였다. 국토가 어육(魚肉)이 되고 국론(國論)이 비등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근심이 가득차 있던 때였다. 임진, 병자 양란의 치욕을 씻고 요심(遼瀋 : 단조(檀朝)의 구강을 회복하는 일념으로 이 <사화>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저자인 북애 노인을 밝히고 있다. 이 '사화(史話)'는 '유가사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까다로운 범례나 주석 따위는 없으며 문장의 체제도 편년체나 강목체가 아니고 설화체로 되어 있다. 오히려 현대사서에 가까운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북애노인이《규원사화》에 쓴 서문(신학균 역 참조)은 다음과 같다. 북애자는 이미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붓을 던지고 강호에 떠돌아다니기 여러 해가 되었다. 내 발길은 이 나라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물에 빠져 죽을까 하는 슬픈 생각도 했다. 때는 양난(병자호란,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삼천리 방방곡곡은 슬픔에 잠겼고 국론은 물끓듯하며 관리들과 백성들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중략>...... 북애자는 남쪽 금주(金州: 김해) 月城(경주) 사비(泗沘 : 부여)와 웅천(雄川: 공주)을 거쳐 다시 漢山(경기 광주) 골짜기로 들어가 예맥의 옛 도읍을 밟았다. 북쪽으로는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올라가서 일만 이천 봉을 굽어보니 까아지른 산봉우리가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도이해에 솟아 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흘렀다. 티끌 같은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다시 서쪽으로 떠났다. 구월산에 이르러 당장평(唐莊坪)에 머물며 삼성사(三聖詞)에서는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 하구의 용만에 이르렀다. 통군정에 올라 북쪽 요동반도를 바라보니 나무와 구름이 손짓하듯 부르면 대답할 것 같이 가까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 줄기의 압록강을 넘어서면 벌써 우리 땅은 아니다. 슬프다! 우리 조상이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간 지 얼마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니 옛날이 그립고 오늘이 슬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다시 평양에 돌아가니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祠堂)을 세운다고 했다. 장군은 수(隨)나라 군사 백여만명을 무찌른 고구려의 명장이다. 다시 한 달 남짓 지나서 송경(개성)에 갔을 때 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삐 집으로 돌아와 지내자니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 집의 남쪽에 있는 부아악(負兒岳 : 북한산의 옛 이름, 용인의 부아악이라는 설(說)도 있음) 양지 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가(諸家)의 책을 모아 연구를 하며 여생을 마치고자 했다. 무릇 힘으로 사람을 복종 시키려고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배반을 당하고 재물로 사람을 쓰려는 자는 그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이 떠나가기 마련이다. 힘과 재물은 내가 갖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바라거나 구한 바가 없다. 황량한 산비탈에 무슨 힘과 재물이 있겠는가. 명예(名譽) 역시 손님과 같은 것이다. 내가 장차 명예를 바라다가 손님이 되면 무렀하랴. 이름 또한 바라지 않는다. 옛날에 물계자가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비추고 귀신은 사람이 하는 것을 본다>고 했다. 무릇 사람의 선악(善惡)관 정사(正邪)는 반드시 천지신명이 알 것이다. 죽으면 백골이 되는 인생인데 어찌 급급하여 작은 명리(名利)를 다투랴. 오직 착한 성품을 가지고 뜻을 기르며 도를 닦고 공을 세워 후대의 자손들이 본받도록 남겨 주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비록 세상이 끝나도록 이를 아는 자가 없다 해도 한탄하지 않으리라. 만세 후에라도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한번 만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짝하는 사이에 지나 버린 천년의 일을 보면서 백골만 남을 인생인데 어찌 명예와 치욕을 가지고 바쁜 세월 속에 다투랴. 내가 보건데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걱정이다> [요동땅 정벌 못 해 한탄] <춘추(春秋)>를 지으니 명분이 바르고 <강목(綱目)>을 이뤄 정윤(正閏)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이 나뉘었다. 춘추와 강목은 중국 선비들의 힘으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옛 경사(經史)는 여러번의 병화를 입어 없어지고 흩어졌다. 그런 중 후세에 고루한 이들이 중국의 책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다고 했지 먼저 그 근본을 세워 내 나라를 �낼 줄 몰랐다. 이는 등이나 칡덩굴이 독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히고 맺히기만 하는 것과 같아. 어찌 천하지 아니한가. 고려 이후 조공 바치는 사신을 보내기 수백년이 되었건만 한(恨)은 풀지를 못하고 졸지에 만주를 불구 대천지 원수처럼 대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 슬프다. 오직 하늘이 효종(孝宗)에게 10년만 더 살 수 있게 하였다면 군대를 요(遼瀋 : 심양)으로 보내고 배를 등채(登采)로 달리게 하였을 것이다. 비록 패했을지라도 시기만 놓치지 않았던들 근세에 있어 쾌사였을 것이다. 하늘이 성수(聖壽 : 효종의 나이)를 더 연장하여 주지 아니하여 요심 정벌을 못 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저 슬플 따름이다. 내가 일찍이 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본디 그 재주가 없고 또 명산(名山) 석실(石室)에도 진장(珍藏)이 없고, 나 또한 씻은 듯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니 어찌하랴. 그러나 다행히도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중 삼국 이전의 고사(故史)를 얻었다. 비록 그것ㅇ 간략하고 자세하지는 못하나 항간의 선비들이 구구하게 떠드는데 비하면 오히려 씩씩한 기운이 더 높다. 이에 한사제전(漢史諸傳)에서 글을 빼내 사화를 만들며 자주 밥 맛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있어 이 뜻에 동감하랴.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는다 해도 좋다>고 했다. 오직 이 일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만일 하늘이 내게 장수룰 누리게 한다면 이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 또한 國史를 완성하는 선구적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숙종(肅宗) 원년 을묘 삼월 상순, 북애노인(北崖老人)이 규원초당(揆園草堂)에서 서문을 쓴다. 북애노인의 <규원사화> 서문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오늘의 우리는 국사(國史)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북애노인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아! 역시 슬프다. 본 자료는 소개되는 출처의 정치적 사회적 평가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한 역사관련 자료입니다. 출처:<주간조선> 1985년 10월 20일~1986년 10월26일 연재출처 : LOVE is Kang Soo Jeong글쓴이 : 불량돼지 원글보기메모 : 공유하기 게시글 관리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 '한민족 역사문화 > 한민족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제(日帝) "단군 존재 인정" 총독부시절 문헌 발견[중앙일보] (0) 2007.10.09 고조선(古朝鮮)과 관련된 사서(史書)가 일본 왕실 도서관에 가득 (0) 2007.10.09 한민족의 뿌리역사, 어떻게 왜곡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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