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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고조선(古朝鮮)과 관련된 사서(史書)가 일본 왕실 도서관에 가득

by 바로요거 2007. 10. 9.

고조선(古朝鮮)과 단군(檀君)에 관련된 사서(史書)가 일본 왕실 도서관에 가득하다고 한다. 1933년~1945년까지 12년간 일본 궁내청 황실도서관에서 한국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고, 한국 상고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박창화(朴昌和, 1962년 사망)씨가 이 사실을 서울대 명예교수 최기철(崔基哲)씨에게 털어놨으며, 최교수는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고 한다. 1999년 12월 06일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조선 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명령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고사서(古史書) 51종 20여 만 권을 약탈당했으며, 단군 조선 역사와 그 이전의 상고사(上古史)가 이 때 소실됐다고 한다. 문정창씨의 『군국일본 조선강점36년사』의 책에서도 똑같은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일제(日帝)는 불온(不穩)서적 수거 등의 명분을 내걸고 20여만 권의 상고사서(上古史書)를 빼았아 갔으며, 지금 일본 왕실 도서관에는 그 때 강탈된 수많은 상고사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2000년 12월 16일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일제(日帝)에 의한 우리민족 역사 조작 사실에 대해서 자세히 방영한 바 있다. 일제(日帝)는 36년간 조선(朝鮮)을 식민지(植民地) 통치하면서 수많은 우리의 역사책을 불살라 태워 버렸으며, 귀중한 사서(史書)는 모두 강탈하여 가져갔고, 일본 왕실 도서관에 잘 보관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역사적 사료(史料)들을 그들이 조선을 쉽게 식민지 통치할 수 있도록 조작시켜 놓았다. 식민지 사관(史觀)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제(日帝)에 의한 삼국유사의 기록 조작과 광개토대왕비의 기록 변조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들이다. 환국(桓國,B.C7,199~3,898), 배달국(倍達國,B.C3,898~2,333), 고조선(古朝鮮,B.C2,333~238)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뿌리를 거세하고자 일제(日帝)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중에서『석유환국(昔有桓國), 즉 옛날에 환국(桓國,B.C7,199~3,898)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라는 대목을『석유환인(昔有桓因), 즉 옛날에 환인이라는 왕이 있었다.』라고 변조시켜 놓았다. 환국(桓國,B.C7,199~3,898)이라는 역사적 존재가 없어지고, 환인(桓因)이라는 일개 왕(王)이 존재했었다라고 하여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완전히 거세(去勢)시켜 놓았다.

또한, 일제(日帝)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기록도 변조시켜 놓았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A.D 41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능비(陵碑)의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과 역사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업적 및 대외 정복사업 사실들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일제(日帝)는 이들의 내용을 완전히 조작해 놓았다. 첫째,『왜구대궤(倭寇大潰), 즉 고구려군에게 왜구가 궤멸되었다.』라는 기록을 완전히 조작하여, 『왜만왜궤(倭滿倭潰), 즉 왜가 신라성에 가득하고 왜가 신라를 궤멸했다.』라고 고쳐 놓았다. 둘째, 『後以辛卯年, '不貢因破, 百倭羅, 以以爲臣, 즉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파(破)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을『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羅, 以以爲臣, 즉 신묘년(331) 왜(倭)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으로 조작해 놓았다. 이를 근거로 일제(日帝)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즉 임나(가락국)의 자리에 일본 정부를 세워 200년간(4세기 말엽~6세기 중엽) 가야와 백제 및 신라를 다스렸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일제(日帝)의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한국을 흔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둔의 나라'라고 서양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다. 이렇게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는 18세기 일본에 온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Tagore)는 한국을 일컬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동방을 밝혔던 등불'이라고 했고, 루마니아의 소설가이며 25시의 작가인 게오르규(Gheorghiu, 1916~1992)는 그의 책에서 ‘한국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 줄 것이다.'라고 했으며, 한국은 단순한 반도가 아니라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아시아 대륙의 귀걸이ꡑ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타고르(Tagore)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19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인도와 비슷한 시기에 식민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다음은 타고르가 1929년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타고르의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기면서 그 대신 동아일보에 기고한 『동방의 등불』이란 시(詩)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빛나는 황금시대에, 코리아는 그 등불을 밝힌 한 주인공이었다.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 동방은 찬란히 세계를 비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 위에 길을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런 자유의 조국으로, 그런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주요한 옮김. 1929.04.02. 동아일보). 타고르(Tagore)가 말한 것처럼 한국은 아시아의 빛나는 황금시대를 다시 개척하고, 개벽(開闢)의 세상을 찬란하게 개척해 낼 것이다. 게오르규(Gheorghiu)가 말한 것처럼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귀걸이로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의 함성이 세상 사람들을 이미 깜짝 놀라게 했고, 다가오는 개벽의 파도는 세상 위의 모든 것을 흔들어 깨울 것이며, 환하게 비추어 오는 광명의 새로운 문명은 세상 위의 모든 것들을 춤추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