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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1.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 둘 셋 ...열의 뜻) 해독 서론(보강)

by 바로요거 2006. 12. 29.
 

*** 하나 둘 셋...열 속의 비밀

     신지녹도문자와 최치원 천부경81자 풀이

 

 

((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 은 사실 책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과 한 쌍이 되는 내용이다.그래서 이글은 책의 독자들 서비스 차원에서 쓴것인데 좀  아쉬운것은 책을 읽지 않으신 독자 께서는 우리말, 특히 ㄱ ㄴ ㄷ ...ㅎ 속에 들어있는 뜻에 대해서  책 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지 못해 이해 하는데 좀 생소한 부분이 많으리라고 생각 된다.

그렇다고 그 방대한 책 내용 모두를 여기에 수록 할수도 없어서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인용 하였을 뿐이니 이점 양해 바란다.))

 

*신지녹도문자와 최치원 천부경81자 풀이서론 1.

 

천부경(天符經) 하면 흔히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하여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최치원의 81자를 천부경으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이 최치원의 81자는 원래 16자의 신지녹도전자(神誌鹿圖篆字)를 갱부작첩(更復作帖),즉 최치원이 해독하고 다시 시첩으로 만든것 이라 하므로 이것이 과연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그대로 번역한 번역문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천부경과 관계가 없는 최치원이 쓴 별도의 최치원 천부경인지 또는 하느님의 천부경을 예찬한 예찬문인지 우리도 한번 신지녹도문을 해독해 보자는 것이다.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이란 우리의 뿌리인 하느님께서 그 아드님 환웅이 새 나라를 세우려 하자  나라를 세우는데 근간이 되는 천하의 보물 천부인 세 개와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교훈을 내려 주셨는데 이 교훈은 당시 문자가 없었으므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다가(口傳之書) 환웅의 신하 신지에 의해 인류 최초의 문자가 만들어지고 이 문자로 하느님의 교훈이 멸실 되거나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바위에 새겨 놓은 16자의 글자이다.

 

그러므로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은 하느님교훈을 가감 없이 적어놓은 글이고 또 하느님 말씀이 직접 전해지는 문서는 오직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이외엔 없기 때문에 천부경 하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고 그렇다면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은 우리 한민족한테는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그렇다면 우선 16자의 신지녹도전자를 우리도 해독해 보고 다음  최치원의 81자를 풀이해 보아야 하는데 만약 이 신지녹도문을 최치원만이 해독하고 우리는 해독할 수 없다면 이는 글자가 아니다.

다만 최치원이 그 신지녹도문을 해독 하는데 하루가 걸렸다면 우리는 열흘이면 될 것이고 최치원이 한달 이 결렸다면 우리는 열 달이 ...또 일년이 결렸다면 우리는 10년이 걸려서라도 우리도 해독할 수 있어야 그것이 글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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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를 통하여 선인들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 까지 그 난해 하다는 최치원의 81자를 무려 20 여년을 통하여 해석해 보고 이것이 하느님의 교훈 천부경이 아니라 천부경의 예찬 시임을 알고 감히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이라는 졸저를 썼다.

그리고 이 최치원의 예찬 시에서 신지녹도전자 해독하는 힌트를 얻고 이 신지녹도전자를 해독해본 결과 이 16자의 신지녹도전자가 바로 진짜 하느님의 교훈인 천부경임도 알아 여기에 그 해독문을 쓴다.

 

이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 써진지 실로 6천년 만에...최치원 이후 1200년만에 해독 하여본 결과이고 이 하느님의 진본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란 놀랍게도 우리가 숫자로만 알고 써오던 "하나 둘 셋 ....열" 이었다.

따라서  이 우리 숫자 속에는 사람의 본질과 생성원인, 그리고 번성 과정과 진로와 홍익인간의 뜻이 들어 있음을 알았다.

 

즉 우리가 그 심오한 뜻도 모르는 채 한자 뜻만 가지고 제멋대로 윤색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 아니라 이는 사람의 최종목표 이어서 세계적으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피의 전쟁을 끝내고 세계가 한 가족이 되며 개인적으로는 영생불사 하여 신선이 될 수 있는 길이 들어있으므로 이는 우리 민족은 물론 전 세계인이 외워야 할 위대한 경문 이었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무수한 강의와 토론을 통하여 검정을 거친 결과이고 이는 대략 500쪽 짜리 책 한권이 되며 출판사에서 출판을 권유 받았으나 많은 독자들의 보다 원활한 독서와 토의를 위하여 여기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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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보강된 군더더기 부문이다.

 

본론을 전개 하기 전에 한자도 우리 글자이고 음양오행설도 우리 사상이니 천부경은 최치원 81자를 한자와 음양오행설로 풀어야 한다는 이론이 너무 많아 우선 이 문제 부 터 집고 넘어 간다.

 

* 지금 한자는 절대로 우리 글자가 아니다.

 

한글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 를 TV 에서 토론하는 것을 보면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의 이론은 한자는 애초 우리가 만들었고 또 역사를 통하여 오랫동안 써 왔으니 우리글자 라고 한다.

 이는 사실로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면 사실 한자를 빼 놓고는 그 말이나 글이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 순수한 말들을 죽이고, 원시한글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한자만을 써 왔던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원시한글이란 세종도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서문에서 누차 밝히고 있듯이 "옛 글자를 모방하여(字放古篆) "  란 말이 수없이 나오고 또 최만리 상소문을 보더라도 이 원시한글 문제가 무려 6 차례나 거론되므로 세종전 원시한글이 있었다는것은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따라서 필자는 원시한글 이란 신지녹도문자를 이어받은 기림토(加臨土) 의 존재를 확신하는 증거를 이미 이 카페에 수 없이 올렸다.

 

" 한자를 처음에는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 글자다?"

이 한자, 즉 원시 한자는 처음에는우리가 만든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말에 맞추어 발전된 글자이니 우리 글자가 아니다.

여기서 원시한자를 우리가 만들었으니 한자도 우리 글자다 하는 이론은 다음과 같이 비유 할 수 있다.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 달구지는 우리가 처음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가 우리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우리가 처음에는 만들었으나 연구 연구 발전 시키어 그들의 언어와 맞춘 것은 중국인인데 이제 와서 우리 글자라고 우기는 것은 위 달구지 이야기 같다고...

 

그러나 그래도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우기시는 분들이 많아 할 수 없이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서문까지 인용한 것이다.

 즉 세종은 한자가 우리글자이고 따라서 우리 말과 맞아떨어진다면 뭘 하러 다시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훈민정음 서문의 글자 중에 中國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즉 세종 당시에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을 수 없으니 國中을 中國 이라고 잘못 표기한 것 아니냐고...

즉 "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가 아니고 " 나라안에 말들이 달라서... " 라는 것이다.

 

세종이 쓰신 훈민정음 서문을 보며 中國이 말이 되는지 國中 이 말이 되는지 좀 해석해 보자.

 우선 원문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 이를 中國으로 본 해석

 

國之語音異乎 中國

나라의 말과 소리가 中國과 달라...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렇게 中國으로 해석하면 문장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 이를 만약 國中 이라 한다면

 

國之語音異乎 國中

나라의 말과 소리가 나라 가운데에서도 달라

 

이 해석대로 라면 지금도 그렇지만 세종 당시에는 더욱더 방언이 심해서 지방마다 말소리가 다르다는 말이고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즉 예를 들면 祖父母를 지방에 따라 "할배, 할매"  라고 하기도 하고 " 할아버지, 할머니" 라고도 하며 女를 가지고 "가시내" 라고 하는가 하면 "계집"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귀와 말이 연결이 되질 않는다.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여기서 문자란 물론 기존 한자다. 즉 祖父라는 한자는 "할배"나  "할아버지"라고 말 하는 어느 지방에서던지 통한다. 그런데 이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인가?

그래서 한글을 만들었다니 만약 한글로 적었다면 어찌 될까?

이것을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적었을때는 "할아버지" 라고 말하는 지방에선 "할배" 가 뭔지 모르며 "할배" 라고 말하는 지방에선 "할아버지" 가 원지 모르게 된다.

즉 우리 말과 문자가 서로 맞지 않아 새로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이 오히려 지방마다 서로 달라서 말과 문자가 맞지를 않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 國中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완전 반대가 되는 말이고 따라서 아래 글들과도 완전 딴소리가 아니라 그 반대 소리가 된다.

지금 중국에서도 지방말들이 사투리가 심해서 말로 해서 통하지 안으면 글자로 쓰고 그러면 통한다.

이상으로 볼때 훈민정음 서문 中國을 國中으로 해석 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종 당시에는 중국 이라는 나라가 없었으니 그것은 완전한 國中의 오기라고 우긴다.

그렇다면 최만리 상소문에 中國 이라는 단어는 모두 6  번이나 나온다. 왕 앞에서 사서를 기록하는 사관이 단 한 자의 오기가 있어서도 되지 않는데 中國 이라는 단어를 무려 여섯번이나 오기했다는 말인가? 따라서 최만리 상소문을 기록하던 사관들이 國中을 中國으로 오기 했다는것은 세종실록도 보지않은 경솔한 자 들의 경솔한 말 이다.

 

* 그렇다면 세종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中國 소리가 왜 나왔을까?

먼저 말했듯이 중국은  현재 중화민국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그 국호야 어떻건 中國 이라고 불려 졌다.

즉 중국인들은 자기네 나라가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네 변방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무시해 불렀던 것이다.

 

東夷 - 물론 우리 한민족 이다. 지금 우리 민족학을 논하는 학자들은 이 夷자가 弓에 大가 가해진 글자로 큰활을 가진 사람들의 뜻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고 중국인이 붙여준 이름에 감지덕지 하고 있고 더구나 아래 西戎이나 南蠻 北狄에 비해 벌러 지나 오랑캐가 아닌 좋은 이름이라고 자위하지만 어쨌건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사는 오랑케 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우리조차 東夷族 이라고 뽑낸다는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西戎 - 서쪽에 사는 뙤놈 이라는 뜻이고

南蠻 - 남쪽에 하는 벌래같은 오랭케 이고

北狄 - 북쪽에 사는 도적같은 오랑케

 

이상 중국은 華夏족(지나족)인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고 그래서 중국 이라는 말은 세종보다 더 올라가서 단군 때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 증거로 다음 글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닌 증거 중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기록으로 본 증거 ) 

(역시 책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58쪽 - 59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올린다.)

 

* 단기고사의 기록
천제께서 유위자에게 물어가로대
" 우리 후손들의 성쇠의 기간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대답하여 가로되
"...중략 ... 그때를 당하여 기하(基下)의 후손은 혹은 북방의 터를 보전하고 혹은 동방으로 천도를 하며 혹은 남방에 건국하리니 큰 나라는 수 천리요 작은 나라는 수백 리 인데 후속들은 서로 침략이나 하다 보니 문화가 차츰 쇠퇴하여 조국의 문자는 돌아보지 않고 모화(慕華)사상이 날로 높아져서 그 천년 뒤에는 모화 하는 미친 선비들이 나라에 가득하여 우리의 문자를 폐지하고 한문만을 전용하여 나라이름이나 왕의 칭호나 벼슬이름이나 지방의 이름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나 물건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화식으로 하여 마침내 자손은 그 조상을 잃을 것이오니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통한 스럽나이다. 엎드려 비오니 기하께서는 깊고 멀리 생각하시어 후일을 예비하소서."

 

천제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신인(神人)이십니다. 능히 반만년 뒤의 일을 추측 하시다니요."

그러시고 하명을 하셔서 사방 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

(帝問於有爲子曰吾之雲孫盛衰之期果如何曰.....中略.... 當其時基下之後孫或保基北方或遷都東方或建國南方大邦數千里小邦數百里後屬疏遠相尋以干戈文化漸退不顧祖國文字慕華思想日漸高廣後其千年則慕華狂儒遍滿國中全廢吾國文字專用漢文至於國名王號官名地名人名物名相同於中華終至於子孫失其祖先想見將來眞所痛恨也伏乞基下深思遠慮豫備後事帝曰先生眞千古神人能推測半萬年後事乃下詔立石碑於四方國境刻帝王名號刻以本國文字曰永遠保全國文 - 檀奇古事)

 

* 단군세기 기록

12세 단군 아한 재위52년
무자이년(BC 1833) 여름 4월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천제께서 나라안을 순시하시고 요하의 좌측에 이르러 셔서 관경을 순수하신 비를 돌에 새겨서 세우게 했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겨서 전하게 했다. 그런데 이것이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다.

(十二世檀君阿漢 在位五十二年 丁亥元年
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 - 檀君世記)

 

이 기록은 12세 단군 아한때 기록으로 BC1883년 이야기 이다.

그리고 위 글 단기고사 에서  全廢吾國文字專用漢文 즉 우리의 문자를 페지하고 한문만을 전용 한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도 원시한글 이야기가 나온다.

 

또 중국의 표현은 中華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이름은 중화인민공화국 이다.

이 중화 인민공화국을 우리는 지금 그냥 중국 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위 세종대왕 서문에서 中國을 그때는 중국이 없었으니 國中 이라 해야 한다는 이론이 과연 타당한 이론이라 할 것인가?

 

*  교착어인 우리말과 한문은 그 토씨나 어순에도 맞지 않는다.

 

글자란 그 민족의 말과 맞아야 그 나라 글자다.

즉 그 나라 말과 맞지 않는 글자는 그 나라 글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수입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착어인 우리말과 한문과는 그 토씨나 어순 등이 전연 맞지를 않는다.

 교착언어란 우리말로 보면 주어나 목적어 동사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붙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 교착어는 현재 우리말은 물론 수메르어나 일본어 등 '우랄 알타이 언어'의 공통된 현상인데 중국어나 인도어, 영어는 교착어가 아니다.

 

한문으로 예를 든다

우리말로 "나는 학교에 간다."

이것을 우리말 순서대로 한자로 쓰자면 我 學校 去 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문장은 한문에 없다.

 

이를 한문으로 옳게 쓰자면 "我去學敎"가 된다.

我 - 나

去 - 간다

學敎 - 학교 가 된다.

이것을 한문 어순대로 하면 " 나. 간다. 학교" 이다.

 

더 예를 들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 중에 析三極

析 - 쪼개다

三 - 셋

極 - 극

이것을 한문 어순으로 하면 " 쪼개다. 삼극" 인데 우리말로 하면 "三極으로 쪼개다" 이다.

 

더 예를 든다.

명심보감 첫머리 子曰爲善者

子 - 공자님

曰 - 말씀

爲 - 하다.

善 - 착하다.

이것을 한문 어순대로 하면 " 공자. 말씀.  착하다, 놈 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하라면 " 공자님 가라사대 착한 일을 하는 넘은..."  이다.

 

한가지 예를 더 든다

중국인이 숫자를 쓰려면 一二三四 ...라고 쓰고 이것을 읽으려면 그대로  니 얼 샨 스 ... 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一二三四 ... 쓰고 읽으려면 처음에는

一 - 한일

二 - 두이

三 - 석삼

四 - 넉사

.

.

.

결국 一二三四...를 우리말 "하나 둘 셋 넷..." 으로 번역한 다음에야  이해가 간다.

이와 같이 한자로 만든 한문에는 우리말과 그 어순도 맞지 않지만 그 토씨인 "은, 는, 이, 가" 등 도 없다. 그러므로 한문을 우리가 이해 하려면 일단 번역 해야 한다. 이 번역 해야만 알수 있는 문자가 과연 우리 문자 인가?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한문 표기가 자기네 말과 어순이 일치하고 있으므로 새겨서 듣고 말고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인도어나 영어도 교착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번역하고 새겨 들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번역은 물론 자기네 어순과도 맞는다.

 

이렇게 어순과 토씨와 번역을 해서 이해 해야 하는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주장 하는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야기 이고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그렇다면 왜 한자가 우리글자라는 말이 생겼는가?

필자는 애초 인류의 최초의 문자는 신지녹도 문자라고 했다.

 이 신지녹도문자는 원시한글인 가림토의 어머니도  되지만 한편 초기 한자인 金文의 어머니도 되는데 가림토는 일본에 건너가 신대문자가 되었는가 하면 슈메르등 인도지방으로 퍼져나가 인도의 부라미 문자가 되었고 한편 금문은 은허 갑골문을 지나 소전 대전을 거처 현재의 한자로 발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종전 까지는 우리 글자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한자에 매달려 와서 한자가 우리 글자처럼 친숙해 졌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는 우선 말과 글자가 몇 개 되지 않던 옛날에는 그림 글자이며 뜻 글인 금문이나 은허갑골문등이 모음등 조합이 혼동 되어 뜻글도 못되고 소리글도 못되는  가림토 보다는 ( 상형문자이며 뜻글이며 자기 어군에서만 통하던 소리글...이 문제는 이카페 계시판중  책에 추가할글과 보관할글 183번 (" 가림토는 이렇게 쓰여젓다" ) 에서 자세히 설명 했다.

 즉 가림토는 원래 그 물건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 (像形文字)인 뜻글 이면서도 그 어군(語群) 에만 통하던 소리 글 이었다.

 

이를 책에서 쓴 이론을 인용하면 'ㅅ'은 그 모양대로 서거나 솟거나 그 끝이 뾰죽 하므로 서는 동물인 사람, 그 모양 비슷한 서까래, 사타구니, 또 그 잎의 모양과 같은 삼(인삼 포함), 그리고 그 끝이 뾰죽한 솔(松) 등에 쓰여졌지 그 어군이 다른 하늘이나 땅에는 쓸수가 없었다.

이것은 애초 원시한글인 가림토는 물론 지금 한글도 그 뿌리는 천부인인 ㅇ ㅁ △ (ㅅ) 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글은 완전한 소리 글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한자만을 신봉하던 학자들은 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즉 ㅅ 으로 발음되는 事物, 事件 등에는 쓸 수가 없는 글자였다. 즉 상형문자도 아니고 소리 글도 아니 어서 혼동되는 글자였다.

 

따라서 당시 한문 학자들은 말과 글자가 몇 마디 되지 안던 그 시절에는 차라리 완전한 상형문자, 즉 뜻 글인 한자를 쓰는 게 더 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한 이유는 고조선이 망하고 중화 족이 강한 나라가 되자 모화 사상이 너무 강했던 미천 선비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친 선비들의 문자를 통한 정보의 독점욕 때문, 즉 현재 우리 정치 언론계나 학자들 처럼 영어를 쓰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유식한 체 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한자를 너무 오랫동안 대하다 보니 한자가 우리 글자처럼 친숙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한자의 시초는 우리가 만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연구 발전시킨 글자가 아니기에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말과 맞지를 않으니 우리 글자가 아니다.

 

 

* 이외 한자는 글자 하나를 두 음으로 읽는 글자가 많다.

 

즉 한자의 인사말 爾好를 우리는 "이호" 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니 하오" 라 하고, 다시 보자는 再見을 우리는 "재견" 이라고 읽지만  그들은 "짜이지엔" 이다.

 

여기서 중국말인 "하오" 즉 好를 왜 우리가 " 호" , 再를 '짜이', 見을 '지엔' 으로 발음하는 것은 세종때 까지만 해도 우리도 그랬다.

이 세종 때 발음은 위진(魏秦)시대 즉 조조와 유현덕이 나오던 삼국지 시대의 발음이 그때까지 그대로 써졌다.

그러나 지금은 물질 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들의 발음도 많이 변해서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中國의 발음은 세종 때 까지는 '듕귁' 이었으나 지금은 '듕궈' 이다.

 

그런데 세종은 이 한자 음의 두 마디를 한 마디로 축소 시켜 '하오'를 '호', '짜이' '째', '찌엔'을 을  '짼' 으로 축소하여 표시 하다 보니 훈민정음 발표 후 바로 써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는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괴상한 글자들이 많다.

 

이것을 현재 우리가 읽기 편하게 째(再)를 '재'로, 찌엔(見)을 '견' 으로 완전하게 고친 이는 1824년 (순조 24 )년에 류희 이다.

즉 그가 저술한 그의 문집 文通 제 19권 '한글 한자음' 에 대한 연구서에서 그는 四聲점, 즉 월인천강지곡 등 훈민정음 음에 점을 찍었던 것은 중국인들의 한자 음 에서는 필요하나 우리말에서는 불필요 하며 된소리도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고 주장 했다.

 

류희는 신숙주 최세진 박성원 이광사 이영익 정동유 등의 학설을 수용 비판 햐여 자신의 학설을 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 할수 있도록 연구를 해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의 연구를 시도한 책으로 조선시대 국어학 연구에 가장 돌출 하다는 칭송도 받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음은 애초 중국인들의 음을 우리 입맛에 맞게 여러 사람이 고친 것 뿐 이니 그러므로 한자가 우리글자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참으로 뚱딴지 캐먹는 이론이다.

 

 *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두 개 있다.

 

1)  好 의 발음은 우리 식으로 "호" 가 맞는데 중국인들이 이 발음이 안되니까 풀어서 " 하오" 라고 하고 再도 원래는 우리 음과 같은 "재"  이었는데 중국인들이 "재" 발음이 되지 않아 "짜이"로..., 見도 견 발음이 되질 않아 "찌엔"으로 ..., 즉 우리 원 발음을 중국인들이 비슷하게 흉내 냈는가? 아니면 함경도, 경상도 사투리와 같은 사투리에 불과 한가?

 

2) 그 반대 경우이다.  "짜이" 가 우리에게는 그대로 발음이 잘 되지 안으니 " 재" 로,  '지엔" 이 "견" 으로 ...?

 

여기서 1)번 중국인들은 다른 말에서 '호' 나 '재' 나 '견' 발음이 나오므로 그들이 그 발음이 되지 안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안는다.

그러나 2) 우리말에는  '하오' 정도는 몰라도  '짜이' 나 '찌엔' 같은 발음은 함경도건 경상도건 없다.

 

* 그런데 이런 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말에 " 달 이 밝다" 라고 하지만 " 月이 밝다는 말은 없다. 달이 밝다는 말을 한문으로 하려면 明月 이라고 해야 한다. 그건데 明月의 중국 발음은 "멩 위엘 " 이다.

 여기서 우선 月 발음만 보자.

한자는 소리 글이 아닌 뜻 글이다 중국인들은 달을 보고 '위엘' 이라 했다. 그리고 글자는月자를 쓴다. 이 月자를 우리가 들여다 쓰자니 '위엘' 이라는 말은 우리 말에 없어 발음이 되질 안는다. 그래서 '월' 로 발음하게 된것이다.

 

다음 우리 말에 '사람이 많다'라고 는 하지만 " 사람이 多라" 하지는 안는다. 이것을 한문으로 하자면 人多 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도 우선 多의 발음을 보자. 중국인들은 이것을 '뚜어', 와 '뚜아' 의 중간음 즉 '어' 와  '아'의 중간 음이 발음된다. 이런 말도 우리 말에는 없기 때문에 '똬'로 하려 했지만 이 발음도 되지 안아 '다' 로 하는 것이다.

 

이것도 반대라고 생각해 보자, 중국인들이 우리 한자를 가져 갔다고 치자.

즉 한자와 그 발음이 우리 것 이어서 우리는 달을 '달' 과 '월' 이라고 두 가지 말을 썼으며 그 중 중국인들은 '달' 은 가져 가지 안고 이 '월' 만 가져가가 그들 혀로 '월' 발음이 되지 안으니 '위엘' 이라고 했을 것이며 우리말 '많다'와 多 둘 중에서 '많다'는  버리고 多 만 들여다가 '다' 발음이 되질 안으니 '뚜어' 라고 했을 것 같은가?

 

또 말한다.

우리에게도 얼마 전 유행했던 중국 영화의 주제곡 티엔미미(甛蜜密)에서 好像花兒開在春風里의 발음은 우리 한자 발음으로는 " 호상화아개재춘풍리" 인데 중국 발음은 " 하우쇙화러 가이짜이 텬풍리" (이것도 대강 우리글자로 쓴것이지 원음은 한글로 표시 못함)이며 우리의 아리랑과 같이 중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月亮代表我的心도 우리의 발음은 '월량대표아적심' 이지만 그들의 발음은 "위엘량따오비에워더씬" 이다. 이도 우리 한글로 중국어를 표현 하기에는 부정확 하므로 대강 적은 것이다.

 

이게 과연 우리 음인가?

우리가 고대에서 중국인들과 뒤엉켜 살았을 때 우리 혀도 그들과 같이 이렇게도 돌아갔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분명 아닌 증거는 우리 뿌리 말에서 이따위 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라 치고 우리의 한자음 " 호상화아개춘풍리"를그들이 가져다가   " 하우쇙화러 가이짜이 텬충리" 로 고쳤단 말인가?

 

다음 '호상화아개춘풍리' 를 우리 한자 우리 발음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글세대나 옛 평민은 그만두고 한학자들 까지도 말로 해서는 모르고 한자로 써 놓고도 번역을 해야 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 식 대로 발음하면 번역이고 뭐고 할것도 없이 문맹자 라도 다 알아 듣는다.

이것이 과연 우리 말이고 글자인가? 

 

또 여기서도 위에 말한 어순 문제가 발생한다.

즉 한자는 글자 하나 하나 이고 한문은 그 글자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여시서 甛蜜密는 우리 말로 해석하면 " 꿀같이 달콤해" 이다 그러나 한자 글자순 대로 한다면 " 달콤해 꿀" 이다.月亮代表我的心는 이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 달빛이 내마음을 대표 한다" 인데 한자 순서대로 하면 " 달빛이 대표한다. 내마음" 이다.

 

즉 위에 써진 문장들은 한문이고 한문은 한자의 연결 이며 그 한문은 우리 맘대로 고치수도 없는 고정화된 하나의 문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자를 우리글 이라고 가정하고  우리 글자인 한자를 가지고 우리 말을 만들때 왜 우리 자신은 몰라도 중국인이나 알 수 있는 어법 등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왜 우리는 한문을 중국인들처럼 그대로 읽지 못하고 영어 번역하듯 번역해야만 우리가 알수 있게 된단 말인가?

참으로 이런 문제를 전연 생각 하지 안은 자들이 한문이 우리 글자라고 우기는데 속이 터진다.

 

따라서 한자는 중국사람들이 그들의 말과 어순에 맞게 발전시킨 글자이고 우리는 그 한자들을 들여다가 우리 발음에 맞게 고치고 번역하여 쓰는 것이니 이것이 왜 우리 글자인가?

 

이렇게 우리가 중국 발음을 고쳐 제멋대로 고쳐 발음하자 이곳 저곳에서 한자의 발음이 다 달라지게 되어 각자가 만든 한자 발음으로 하면 서로 헷갈리어 서로 상통하기가 힘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말의 구성요소와 중국어의 구성요소를 전연 공부해 본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자가 우리 글자라 하면서 천부경 해석을 한자와 음양오행서만 풀려 하고 이 방 이론을 공격하니 이 한자가 우리 글자가 아니라는 이론을 너무 상세히 쓴것이다.    

 

 * 우리 글자는 원시 한자 금문과 원시한글 가림토의 어머니인 신지문자에 의하여 나왔다.

그러나 금문은 우리 말을 표현하기가 마땅치 않아 버리고 가림토를 택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금문은 중국인들에 의해 은허갑골문, 그리고 소전 대전을 통하여 그들의 말과 함께 발전해 왔다. 그러나 가림토는 발전을 못 하고 한자에 의하여 눌리어 길가의 잡초처럼 버려지고 말았다.

이 버려진 가림토를 세종이 복원하여 한글을 만든 동기좀 보자.

 

충령대군 이었던 세종은 위로 양녕대군과 효령 대군이 있으므로 자신이 왕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따라서 왕이 되어 국가를 통치한 王道 보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이 한자 발음들을 중국음 (당시 연경 - 북경)그대로 통일 시키고 싶어  중국 발음사전인 洪武正韻을 참고 한다.

그러나 한자로 설명된 이 사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세종은 녹음기 같이 정확한 발음 사전을 만들 생각을 한다.

 

왕세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었던 세종은 상것들이 무먹구구 식으로 쓰는 언문에 주목 한다. 그리고 그 언문을 자신이 用音合字, 즉 잘 조립 한다면 글을 몰라 고생하는 우매한 백성을이 모두 글을 읽을줄 알것 같아 일생동안 자녀 몇명과 누구 도음도 없이 혼자 만들다시피 한다. 이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자타난다.

"나라의 말과 소리가 中國과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세종때 언문이 있었다는 증거는  다음 최만리 상소문을 보자.

 

* 옛 글자가 있었다는 최만리 상소문 기록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 속용문자(俗用文字) -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에 의하면 동방에는 예로부터 속용문자가 있었는데 그 수는 가 추어 지지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었다.

 

이렇게 상것들이 무먹구구 식으로 쓰는 언문을 유심히 관찰한 세종은 깜짝 놀라 이것만 가지고 그 조합법만 잘 맞추면 중국인들의 정확한 한자 발음은 물론 우리의 모든 말 까지 정확히 적어 한자를 몰라 고생하는 백성들의 고생도 덜어줄 것 같았다.

 

세종은 그후 왕이 되고서도 이 한글제작에 몰두 한다. (단 아들 몇명을 조수로 하여)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하고 바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우리 혀로는 돌아가지 안아 폐기된 발음들로 책을 만들고 여기에 더하여 그간 자기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정확한 중국 발음 사전까지 만들기 위해 신숙주 성삼문등을 요동에 수도 없이 보내어 신숙주 성상문의 엉덩이는 말을 타느라고 생긴 굳은살 까지 박혔다.

 

왜 요동에 보냈는가는 거기에는 중국에서 귀양 온 황찬 이란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발음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신숙주 등은 그의 한자발음을 새로 만든 한글로 적어 왔고 드디어 훈민정음 반포 후 4 년 만에 세종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던 한자 발음 기호 책을 다시 만드니 그 이름은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이 통일된 중국 북경 음 괴상한 음을 다시 우리 입맛에 맞게 고친 것이 현재 우리가 쓰는 한자음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이고 그 한자 발음은 우리 발음 그 대로 라면 세종이 뭣 때문에 그 한자의 정확한 발음기호 책을 만들려고 그 고생을 했겠는가?

만약 한자가 우리 글자였다면 오히려 중국인들이 우리 발음을 배우려고 애썼어야 할것 아닌가?

 

 따라서 한자가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글자라고 주장 하고 여기에서 비슷한 한자음과 우리말을 연구하는 모 언어 연구소의 이론들은 마치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 달구지는 우리가 먼저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도 우리다" 하는 말과 같다.

 

이 필자의 이론에 아직도 이의가 있다면 한번 독자 토론마당에 반론을 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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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음양오행설이 모두 우리 것이니 그걸로 천부경을 풀어야 한다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 위에서 한자는 우리 글자가 아니란는 이론을 썼고 여기서는 음양오행설이 그 원론부터 모순된 이론이며 우리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여기 저기 써 있던 글을 긁어다가 보강하여 붙이니 누더기가 되는것을 양해 하시라.

 

*** 그 원론부터 잘못된 음양 오행설

음양의 이론으로는 태극(태허)은 존재 할 수 없다. 다음 음양의 원론적 이론부터 보자.

 

*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 <역(易)에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으며,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고 한 데서 시작된다. 이 글은 역의 팔괘도형 성립을 말하고, 동시에 우주만물의 생성을 설명한 것으로 해석되어 이후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걸쳐 여러 계통의 생성론에 태극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 경우 태극이란 원기(음·양 2기로 분화되기 이전의 근원이 되는 기)로 여겨졌는데, 태극·원기를 만물생성의 최고 근원이라고 하는 설과, 그 위에 다시 형이상(形而上)의 도(道)와 무(無)를 세우는 설이 있다. 또 태역(太易) → 태초(太初) →태시(太始) → 태소(太素) → 태극의 단계를 거쳐 만물이 성립한다는 오운설(五運說)의 생성론도 있었다. 그 뒤 북송(北宋)의 주돈이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하여 태극은 송학(宋學)의 철학이론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 음양이란 서로 상반(相反)되는 두 가지 기운, 즉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삼은 고대 중국의 철학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음양설(陰陽說)이라고도 칭한다.
음양론은 태극(太極)이라는 원기(元氣)가 변화해서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낳고, 다시 이 음(陰)과 양(陽)이 대립.교체.소장(消長)을 통해 우주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소멸한다는 논리이다.그리고 원래 강(剛)과 유(柔)의 원리에 의해서 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한 역학(易學)에서 강유(剛柔)를 대신해 음양(陰陽)이 받아들여져 만물의 이치가 설명되어졌다.
양(陽)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하늘(天).해(日).낮(晝).남(男).동(動).밝음(明)등이 있고, 음(陰)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땅(地) .달(月).밤(夜).여(女).정(靜).어두움(暗)등이 있다.

 

*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우리 훈민정음은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 하였다는 자방고전(字倣古篆)이나 또 최만리 상소문에서 훈민정음은 옛 상것등이 쓰던 언문이니 반포를 철회 하라는등 세종실록은 무시하고 중국의 음양오행설로 세종이 창작 했다는 정인지 등이 쓴 제자해 만 보고 이것만을 고집하는 이 제자해의 서문에서 음양오행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를 참고해 본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坤復之間 爲太極.而動靜之後爲陰陽...
천지의 도(道)란 하나의 음양과 오행일 따름이다. 곤복(坤復)괘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거나 정지한 후에 음양 이 되는데...

해설 : 곤( 坤)이나 복(復)은 易의 괘명이고 곤 복 사이란 역의 괘도상 곤괘에서 복괘에 이르는 사이 이며 無極이라 하는데 이 무극이 바로 太極이다.

 

* 태극설의 모순

이 음양이 생성된 이론은 얼필보아 그럴듯 한것같다. 그러나 그렇다면 음양이 생기기전 태극(태허,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것)이 있었다는 말은 모순이된다. 무엇인가 움직이려면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는 음양의 대립에서 나온다는것은 꼭 전기 작용을 말하지 않더라도 알것이다.

그렇다면 태극에 어떤 에너지가 있었다면 이는 태극이 이미 음양인 양의(兩儀)로 분리된것이며 태극에 에너지 따위가 없었다면 움직일 수가 없고 또 태극이 분리되전 태극,즉 태허가 음양을 잉태 하고 있었다 해도 이는 완전히 비어있는 태허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에너지가 없는 돌맹이는 천만년을 두어본들 그냥 돌맹이 일 뿐인데 만약 그 돌맹이가 변했다면 어떤 에너지가 이미 있었거나 외부 에너지가 간섭 했다는 말이되고 어떤 에너지가 있었다면 아무것도 없는 태허, 즉 태극이 아니다. 따라서 태극(태허) 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이론이다.

 

*<역(易)에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괘(四象)을 낳으며,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는 그림을 보자,

 

양(陽)

적색

존귀

왼쪽[左]

음(陰)

청색

아래

희망

오른쪽[右]

 

사괘[四卦]

이름[卦名]

건(乾)

곤(坤)

감(坎)

이(離)

방위[方位]

동(東)

서(西)

북(北)

남(南)

자연[卦象]

천(天)

지(地)

월(月)

일(日)

계절[季節]

춘분(春分)

하지(夏至)

동지(冬至)

추분(秋分)

사덕[四德]

인(仁)

의(義)

지(智)

예(禮)

가정[家庭]

부(父)

모(母)

딸(女)

아들(子)

요일[曜日]

금(金)

목(木)

수(水)

화(火)

의미[意味]

정의

풍요

생명력과 활력

지혜와 정열

 

 

즉 애초 태극에서 나왔다는것은 음양 양극(兩儀)이고 여기에서 건곤감리 (乾坤坎離) 사괘(四象)가 나왔으며 이 사괘에서 다시 8 괘가 나왔다는 것이다.그리고 64 괘와 그 이상으로 분화 되어 만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태극과 음양 으로 인하여 생긴 존재중에 形而上學, 즉 정신적 문제는 증명이 되지 않으니 形而下學인 물질적 측면만 보고 논 하자.

과연 우주의 물질이 애초 태극(태허) 에서 음양 양극 뿐으로만 갈라 지는가?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이 있으면 그 하늘과 땅을 있게한 존재원인이며 하늘과 땅의 대립을 중화 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 있어 태허는 음양 뿐 아니라 중성까지 있는것이 天地人 삼극이고 우주를 생성하고 있는 원자도 음양극 이외에 중성자가 있어서 음양 양극을 안정 시킨다. 중성자가 없이 음양 양극으로는 우주 만물이 형성되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형성 되었다 해도 그 순간에 소멸 한다.

즉 그 태극 음양 이론으로 보면 이 우주는 생성될 수가 없다.

 

다음 음양 양극은 꼭 4 괘로만 갈라 지는가? 원자의 수는 중성자 수를 가지고 원자 번호를 먹이며 자연속의 원자 수는 1. 2. 3....으로 증가하여 135 까지 있다.

꼭 태극이 양극이 되고 4 괘가 되고 8 괘...가 되는 곱하기 순서가 아니다.

또 사람이나 짐승은 꼭 양성이 4 괘대로 새끼 넷을낳는것이 아니다. 외아들, 외 딸도 낳을 수 있고 열명의 아들, 또는 딸 만 낳을 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위 태극 음양설을 위배한 것인가?

그러므로 이 음양설의 易은 공상가의 이론에 불과 하다.

 

또 이런 태극이 음양이 되고 4 괘,  8괘가 아니라 64 괘로 풀이해 보고 공자의 십익을 붙여 봐도 易으로는 사물의 진리나 ...내일의 일기예보, 그리고 점괘 하나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오행설로 보강한것이 음양오행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태극설은 원래부터 잘못된 이론이다.

 

* 엔젠가는 페기해야 할 태극기

 

 

 

우리 국기의 태극은 원래 부터 존재 하지도 않았고 또 그 원리가 잘못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통일을 앞두고 있다. 이때 남한 태극기나, 우리 한민족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중국이나 서양에서나 쓰는 별이 그려진 인공기가 통일민족의 국기로 사용될 수 있을까?

이는 절대로 되지 않을것이다. 양쪽 국기의 제작 원리는 그만두고 서로 자기네 기를 쓰자고 하던가 아니면 양쪽기를 모두 페기하고 새로운 통일 국기를 만들자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신성시 하던 위 태극기를 페기할수 밖에 없다.

 

아니 통일전에도 남북 회담을 한다거나 남북 공동 경기등을 할때 마땅히 걸어놓은 국기가 없으니 한반도 기를 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삼천리는 우리 영토가 아니다. 멀리 고구려, 고조선 까지 갈것도 없다. 일제가 만주철도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고종황제의 직인도 없이 청나라와 맺은 간도 조약은 무효가 된지 오래고 2002 년 반기문 외교는 북한과 합의, 간도반환 국제재판을 제소라도 한다고 했으니 언젠가 우리는 반도삼천리가 아니라 대륙 일만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남북 행사시에 한반도 기를 쓰고있는것은 세계 만방에 " 우리 국토는 한반도 뿐이요." 하고 선언하는 것이고 또 중공의 동북공정의 장단에 따라 춤을 추는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전 새로운 통일국기를 제작해 남북이 머리를 맞댈때 사용하고 남북공동 행사에도 사용한다면 통일의지를 한발짝 앞당길 수도 있고 이 의지를 세계 만방에 선포도 할 수 있을것이니 남북한 현재 국기는 지금 페기 하고 남북 공동 통일 국기를 사용해야 할것이다.

 

* 우리 태극기가 만들어진 경위도 참으로 굴욕적이다.

음양오행설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온 것은 이조 초 정도전의 성리학이며 이것을 더욱 발전시키어 우리에게 익숙하게 한 사람은 퇴계 이황의 聖學十圖 이다.

고종황제는 일본에 의하여 개항이 되고 배가 출입을 하게 되자 일본인들은 배에 그 나라 국기를 달게 했고 고종은 신하들과 상의 하여 처음에는 태극만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멀리서 보면 자기네 일장기와 흡사하니 고치라 하였고 이를 가지고 고심하던 고종과 신하들은 그기에 팔괘를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이 팔괘는 너무 복잡 하므로 지금과 같은 사괘가 된 것인데 이것도 일본이 그만하면 됐다고 싸인을 해 줘서 된 것이다.

 

여기에 필자는 졸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책 후면에서 우리 민족의 상징인 삼극기를 제시 한바 있다.

이상 감히 우리 태극기가 잘못만들어진 제작 원리와 경위를 설명하고 다음은 오행설의 부당함을 말 한다. 우선 오행의 출구 부터 한번 보자.

 

* 음양 오행설이 만들어진 연대와 제작자.

*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음양이라든가 오행이라든가 하는 말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그 의미도 극히 평이한 것이었다.또 이 두 가지 말이 함께 연용된 적도 없었다.
 음양오행설을 지은 사람은 그 시원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에게서 비롯되나 그 이론을 구축하고 전파한 세 사람은  추연(鄒衍)과 동중서(董仲舒), 유향(劉向) 이다.
양한 시대의 이른바 금문경학자들의 학설 중 음양오행에 대한 취향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이삼 할도 되지 않으며, 한유들의 음양오행학은 동중서에서 시작되어 유향과 유흠 부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 음양론에 오행론을 삽입한 음양오행설

(음양 오행의 형성된 경위를 설명한 다른 분들의 글.)

 

* 고대 중국의 세계관의 하나이었던 음양설(陰陽說)과 오행설(五行說)은 발생을 달리하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이후 융합되어 음양오행설이 되었고, 특히 한(漢)나라때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즉, 음양이란 사물(事物)의 현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記號)라고 할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에다 모든 사물을 포괄·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인 본질(本質)을 양면으로 관찰하여 상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 오행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곧 목·화·토·금·수를 이르는 말인데, 이는 오행의 상생(相生)·상극(相剋)의 관계를 가지고 사물간의 상호관계 및 그 생성(生成)의 변화를 해석하기 위해 방법론적 수단으로 응용한 것이다.

① 오행상생(五行相生):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는 관계
이며,곧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이 된다.

② 오행상극(五行相剋):상극에는 억제(抑制)·저지(沮止)의 뜻 이내포되었고,그상호관계는목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금극목(金剋木)으로 되었다.

 

* 또 다른 이론에서는 팔괘와 음양오행설이 만들어진 시기와 작자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하기도 한다.

관자 -- 관중 -- B.C. 645.
주역십익 -- 공자 -- B.C. 479.
황제내경 -- 전국시대 -- B.C. 403-220
여씨춘추 -- 여불위 -- B.C. 235.
회남자 -- 유안 -- B.C. 122.
춘추번로 -- 동중서 -- B.C. 104.
태현경 -- 양웅 -- A.D. 18.
백호통의 -- 반고 -- A.D. 92.

이상이 음양 오행설을 만든 사람과 경위 이다. 

 

* 그러니까 이 오행 이론은 위 易의 金木水火 사괘(四象) 로 사물의 운행이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누군가 土 하나를 더 붙여 오행을 만들어 본것이고 그렇다면 위 천하의 진리같은 사괘의 진리가 무너지며 따라서 팔괘, 64 개 모두가 무너진다. 즉 오행의 원리를 따르면 음양 양극, 사괘, 팔괘등 易의 이론이 무너질수 밖에 없다. 즉 음양 역의 원리를 오행으로 보강 한단는 것은 음양의 이론이 완전치 못하다는것을 증명하는것 이다.

또 이렇게 易의 음양 양극,사괘, 팔괘 이론이 미흡하여 대입시킨 오행설이 그래도 사물의 이치와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점술로써의 가치가 불분명 하다면 다음번에는 어디서 7 행의 이론이 나오면 또 그 7 행의 이론을 삽일할 것이며 그래도 맞지 않음면 서양의 점성술 원리나 하다못해 고스톱 원리라도 삽입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처럼 처음부터 모순된 이론, 그것도 우리것도 아닌 중국것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우리는 매달려 혹세 무민 할 것인가?

 

* 또 오행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곧 목·화·토·금·수를 이르는 말이라 했는데, 이는 오행의 상생(相生)·상극(相剋)의 관계를 가지고 사물간의 상호관계 및 그 생성(生成)의 변화를 해석하기 위해 방법론적 수단으로 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金水木火土는 분명 形而下學인 물질적 작용이고 그렇다면 이는 陽이 아니라 陰에만 속한다.

이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 즉 아무리 오행론은 易과 다른 이론이라 하더라도, 또 보완 한다는 이론이라 하더라도  이역시 우주만물을 형성한다는 이론인데, 즉 음과 양이 변하고 합쳐지면 양 도 되고 음도 되야 할 텐데 위 오행설 처럼 음만 되고 양은 없다는것은 음양의 균형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金水木火土 는 꼭 어떤 물질적 形而下學인 陰 만으로 볼것이 아니라 우주 운행의 어떤 부호로 보아 形而上學인 陽에도 응용 할 수 있다고 해 보자. 그래서 정신적 사고에도 쓸 수 있다 해 보자.

그러나 金水木火土 오행설 에는 형이상학적 陽의 이론은 없다.

 

성리학은 理와 氣가 있다고 했다.

즉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을 함께 타고 태어난다는 것이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理는 불쌍함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 ,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 ,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이다.

 

이에 반해 기(氣)는 얼굴에 나타나기 쉬운 칠정(七情)의 성격을 말하는 감성인 것이다.

기에는 희(喜) : 즐거워하고, 노(怒) : 노여워하고, 애(哀) : 슬퍼하고, 구(懼) : 두려워하고, 애(愛) : 사랑하고, 오(惡) : 미워하고,욕(慾) : 욕심을 부리는 것이 있다.

여기에 비해 화담 서경덕은 理氣一元論 이긴 하지만 거기서도 사단 칠정은 마찬가지 이다.(자세한 이론은 필자 카페 게시판 참나와의 만남 62번 참조)

 

그렇다면 이조 5백년을 지배하여 우리 하느님의 신선도인 조의(衣)소리만 나와도 몰매르 맞고 관직이 짤리던 성리학에서 조차도 金水木火土 오행을 형이상학인 정신적 작용으로 논한것도 없다.즉 사단 칠정에는 오행은 없다.

이상과 같기 때문에 음양오행설은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 병자호란과 일제에게 국권을 빼았기게 했던 음양오행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진족에서 일어난 청태조 누루하치는 그래도 우리가 동족이라고 원군을 3 만명이나 보내 준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는 오랑케한테는 지원을 받을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지나족인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늦장을 부리다가 오긴 왔는데 와서 한일은 이순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무리들과 부하 뇌동하여 사실상 도와 준것이 없다.

 

결국 이순신이나 의병에 의해 임진왜란이 끝이 나고 선조 대신 광해군이 왕이 되어 다 망해가는 명나라 보다 청나라와 교류를 하려 하니 대신들은 광해군이 의리도 없는 자라며 내 쫓고 인조를 세웠다.

그래도 청나라에서는 교류를 청해왔다. 대신들은 또다시 오랑케 라며 사대문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내 쫓았다.

드디어 12 만 대군의 청병이 몰려왔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3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했으며 수 많은 우리 처녀들을 공녀로 바친것이 바로 환향녀 들이다.

 

우리 선비들은 명나라가 망한 몇백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명나라를 잊지 못하고 숭배 하고 청나라를 오랑케 라 취급했다는것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잘 나타난다. 오죽했어야 명나라가 망한지 몇백년 후 청나라 사신으로 가던 그들은 국경을 넘자 마자 청나라 몰래 명나라에 제사 부터 지내는 의식부터 치루었을 것인가?  그래도 박지원등 실학파 들은 청 으로 부터 망원경 자명종등 서양 문물을 받아 드리려 했으나 당시 선비들로 부터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받았던 것이다. 고종때 까지 그랬다. 결국 우리는 일제한테 먹혔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모두 우리 선비들은 易을 만든 문왕, 공자 사상과 주자가 창시자인 그 성리학, 음양 오행설만을 숭배하여 曰理曰氣 하며 신 문물은 배척한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난게 아니다. 그렇게 우리 민족에게 치욕의 역사를 준 음양오행설은 지금도 숭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 의학적으로 본 음양오행설.

의학에서 양의, 한의 어느것이 낳다고 단언 할 수 없다.

양의는 당면부위, 즉 환부만 보는반면 한의학 에서는 그 병이 일어난 원인까지 봐 가며 그 원인을 치료 하려고 하니 일종의 예방의학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페에 이상이 생기면 양의학 에서는 페만 치료 하려 하지만 한의학에서는 페가 나빠진 원인, 즉 폐에 水를 공급해 줘야할 신장이 제 구실을 못하니 페 까지 이상이 생겼다며 우선 신장을 강화 시키는 음식이나 약재를 쓴다.

이는 매우 옳으면것 같으나 꼭 식물속에 음양오행을 맞추지 않더라도 고기 등을 너무 먹어 너무 비만에 싸였고, 그래서 당뇨, 고혈앞에 걸린 사람은 다이어트 식품을 먹어 살을 빼야 한다는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식물로 병을 치로한다는 이론은 중국 황제내경들으로 시작되고 우리는 허준이 동의보감으로 완성시켰다. 즉 황제내경등이 부실 했기때문에 허준이 오랜 경험으로 임상실험 하여 완성시킨 것인데 허준이 꼭 인체를 음양 오행으로 구분 하고 또 각 식물도 음양오행으로 구분하여 임상실험을 했을 것인가? 아니면 임상실험을 하다보니 어떤 병에는 어떤 식물이 유효 하다고 정한 것인가?

 

지금 의사는 양, 한 의를 물론하고 상대 의술을 무시 하고 있다.

즉 양의는 " 한의학도 의술이냐고 한의 알기를 무당 알듯 하고 있으며 한의는 제까짓것들이 음양오행이 뭔지도 모르며 무슨 병을 치료하는냐고 양의를 욕한다.

그러나 이는 밥그릇 싸움이다. 어떤 병은 양의학으로 고칠 수 있지만 어떤 병은 한의학으로 고쳐야 하는데 환자는 모르고 양,한병원에서는 자기만의 상식으로 병을 고친다니 환자들은 어떤 병에 걸리면 양방 한방 병워을 전전 하며 이 치료 저 치료를 받아가며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한다.

따라서 의학은 중국에서 처럼 양, 한 의학이 서로 보완, 협조해야 할것이다.

 

원래 명의란 양, 한이를 물론하고 환자 얼굴만 보면 벌써 그사람의 병명과 치료 방법을 안다.

양의의 청진기나 CT, MRI는 사실 장식품에 불과하고 한의역시 청문, 진맥등은 환자에게 믿음을 주기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오랜 경험이 있는 명의는 꼭 관상쟁이 같다는 말이고 이제마의 사상의학 역시 이런 맥낙에서 나온것이지 꼭 음양 오행설로 병을 고치는것은 아니다.

 

* 사주 관상으로 본 음양오행설

사주 관상학에서 음양오행으로 본 사주팔자는 고칠수 없는것 이라 하여 자연 분만은 하지 않고 개복 수술 까지 하여 사주 팔자를 잘 타고 나게 하려는 세태에 이르렀다. 여기서 개복 수술하는 의사는 물론 양의 이지만 수술 비가 들어오니 그렇게 배척하던 음양오행설의 사주 팔자론을 은근히 부축이기 까지 한다.

처녀 총각이 아무리 사랑해도 궁합이 맞지 않으면 결혼을 시키지 않는것이 우리 풍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에는 우리 신혼부부의 이혼율이 서양보다 적었으나 요즘은 오히려 늘어가고 있다. 그럼 요즘 처녀 총각은 음양오행으로 궁합을 보지 않는다는 말인가? 오히려 속궁합 보기전에 ㅎㅎ그것부터 볼 것이니 이역시 사주 팔자가 궁합에 미친다는 이론은 맞지 않는다.

 

사주 팔자를 보며 그것으로 밥 벌어 먹는 사람은 분명히 말하고 또 이말은 진리이다.

" 사주팔자는 관상만 못하고 관상(觀相)은 심상(心相)만 못하다!"

즉 마음 쓰임새가 얼굴을 바꾸고 이는 사주팔자 보다 낳다는 말이다.

 

* 선천역 후천역

음양 오행설이 아무리 해도 맞지 않자 일제때 김일부에 의하여 ' 선천역 후천역' 소리가 나왔다.

즉 易이란 정확한 것인데 다만 문왕, 공자때 易은 시효가 다 되었으니 이젠 후천역을 만들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섭리를 논 하는 역도 참으로 한심하다. 불과 기천년 사이에 시효가 다 하다니...그럼 또 수천년 후에는 다시 후,후 천역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미래를 예측 한다면 미래역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 모순이 있는것은 진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TV, 래디오, 핸드폰을 사용할때 백만분의 일 이론만 틀려도 그 기기는 작용하지 않는다. 과학은 아직은 미숙하나 신의 섭리를 밝혀 나가는 학문이고 그 증명을 필료 요건으로 하고 있으므로 확실한 진리가 된다.

완전한 것 만이 진리라고 볼때 엉거주춤한 이 음양오행설은 원시에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갈팡 질팡 쓰던 학문이니 혹 통계학적, 재미로 본다면 몰라도 이를 불가변의 진리고 신봉한다는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 역과 음양오행설은 우리것도 아니다.

이 易의 팔괘를 우리 조상 복희씨가 처음 만들었다 가정 하더라도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중국 사람들이 연구 발전 시킨것이며(문왕, 공자가 동이인 이라 하더라도) 이는 이미 중국인이 발전시킨것이고 위에서 보았드시 음양 오행설도 중국인들이 만들고 발전 시킨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니 이 음양오행설로 우리 천부경을 해독 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필자는 게시판 자유 토론방에 써져 있던 글을 군더더기로 올린다.

 

* 고기는 맛있게 잡수시며 백정을 욕하는 양반님네들 처럼,

 

양반님네들은 고기는 맛 있게 잡숴가면서 소를 잡는 백정은 얼마나 무시 했는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요즘 자신은 전기, TV, 냉장고 컴퓨터 핸드폰 은 즐겨 쓰면서 과학문명을 비천시 하며 음양오행등으로 우주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복희씨가 처음 팔괘를 만들었다 하고 복희씨가 우리 조상이라 하지만 중국에서는 자기네 조상이라하니 복희씨를 비렁이 자루찟듯 하지만 주역에 대해서 30 년간 연구한 서울대 김경탁 박사에 의하면 은나라 시대에도 팔괘가 없었고 따라서 복희씨는 완전한 전설적 인물에 불과 하다고 했다.

또 팔괘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주역도 중국 문왕 공자가 만들었으니 우리것 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음양오행설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온것은 이조초 정도전의 성리학에서 이고 이것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것은 퇴계의 성리학에 의해서다.

그리고 우리는 이조 500 년간 왈리 왈기 (曰理曰氣) 하며 그 애매 모호한 성리학의 음양오행설만 따지다 보니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갈리워 싸웠다.

그 틈에 서양에서는 물질의 성질을 관찰하여 위에서 말한 전기, TV, 냉장고 컴퓨터 핸드폰 등 과학문명을 만들어 지금 우리까지도 편하게 쓰고 있다.

필자의 글 " 참나와의 만남" 에서 서양 사람들이 이 물질의 성질을 알려고 얼마나 노력 했는지 한번 보시라! 그때 우리는 왈리 왈기 하며 싸우다가 나라 까지 빼앗겼다.

 

그런데 뭐 도사 입네 하는 사람들은 그 음양오행설을 들먹여 가며 자기 혼자 아는 이론으로 과학문명을 비웃고 있다.

이것이 먼 시대 원시인류로 부터 전해지던 어떤 점술 같은것을 중국인에 의해 발달시킨 학문이란것도 모른다.

이것이 이조 초에 우리에게 들어왔고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깜박 죽었었다는 것도 모른다. 죄송 하지만 우리 태극기도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종주국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만약 미국에서 어떤 점성술이 들어오면 우리는 또 그 점성술에 깜박 죽으며 이것만이 우주 진리라고 할 것이다.

우리 전통 사상인 천지인 삼태극 사상은 관심도 없다.

 

 도대체 음양오행설이 무엇인가?

그들은 그것으로 우주 운행의 섭리를 알 수 있다지만 100 년후의 일식등이 어디서 언제 일어 날것을 아는것은 관상대 청소부도 알것이다.

그러나 그 음양오행설로는 그 일식등은  고사하고 내일의 일기예보 하나 알수없다.

 

도대체 그 음양오행설로 우리 인간에게 뭐 하나 응용되는것이 하나 라도 있는가?

도사들의 자기만 아는 아리송한 말과 점쟁이 밖에 더 있는가?

그러나 점은 그사람의 잠재의식을 읽는것 이기 때문에 그 음양오행 팔괘가 아니더라도 별을 보고 점치는 점성술도 있으며 쌀이나 엽전, 화투나 트럼프를 가지고도 얼마던지 점 칠 수 있다.

 

우주는 음양의 섭리로 운행 되고 모든 물질도 그 음양의 이치로 존재 한다나?

그러나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는 양성자 음전자 중성자, 즉 우리의 천지인 삼극으로 존재 한다.

 

인간도 음양에 의해 태어나고 살아 가고 있다나?

이것은 암수가 있어 새끼를 치니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옛날 종주국에서 들어온 음양오행설로 혹세 무민을 할 것인가?

언제까지 고기는 맛있게 잡숴가며 소 잡는 백성을 욕하는 가증 스런 짓을 계속할 것인가?

 

* 또 어디엔가 써 있던 좀 구제적인 글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공위성의 전파를 타는 TV 도 보고 휴대폰을 쓰는 세상에 살면서도 음양오해의 신비함만 즐기려는 사람이 많다.

즉 별들의 운행이 궁금하면 천문대로 가는 게 아니라 음양 오행설을 보며 천둥번개가 치면 피뢰침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음양 오행설로 피 하려하며 풍랑이 심하면 기상관측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역시 음양 오행설로 점을 치며 하늘을 날고 싶으면 새들이 나는 원리는 생각해 보지는 않고 음양 오행설로 도사가 되어 하늘을 날 생갓을 한다.

 

이와 같이 음양오행의 원리가 되는 역의 원리로 무엇인가 풀려고 한다는 것은 신비한 것만 동경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이라고 보므로 이 이론은 받아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음양오행설이 우주 천체의 운행원리를 너무 정확히 표시하는 이론이라는데 그렇다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나사에서도 우주 천문학등 과학자들을 내어 쫓고 음양오행설 점쟁이 들을 써야 하며 관상대에서도 일기예보를 하려면 음양오행설 쟁이들을 써야 한다.

 

자고로 일식 월식이 나타나는것 조차 수학자들의 천체운행 주기 계산으로 알아낸것이지 음양오행설로 알아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그 음양오행설이 그렇게 정확하다면 그걸로 로또 복권이나 사 보라고 하는 것이다.

 

* 코걸이 귀걸이 식인 역의 해석 

 

주역,년말 년시에 재미로 보는 토정비결, 예언서 등 에서 나오는 말을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역으로 점풀이를 해 보니까  새로 집을 짖은 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봄에 결혼을 하여 아내를 얻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점 쾌가 정확하게 맞았다고 했다.

즉 아내란 바로 집 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름에 새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먼저 아내를 얻은 것은 잘못 푼 점괘이고 새로 집을 샀으니 이것이 정말 주역 점괘가 맞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먼저 아내를 얻은 것이나 새로 집을 산 것은 점 쾌를 잘못 푼 것이고 새집이란 바로 묘 를 말한다고 하며 그 주역 점 쾌가 정말 놀랍게도 잘 맞아 떨어진다고 했다.

 

주역이나 토정비결 또 누구 예언서는 모두 이 모양이다.

이따위 예언 같으면 나도 백 권의 예언서도 더 쓸 수가 있다.

 

대개 예언서 들은 위 " 새 집을 짓는다" 와 같이 지나간 다음에 때려 맞추면 맞지 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래는 절대 알수 없게 써 있고 또 알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말 들이다.

 

그래서 어떤 예언서나 주역, 토정비결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란 것이다.

사람들은 논리적인 것보다 허황되지만 신비한 것을 즐긴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가들이 혹세무민들 하여 배를 불리고 있다

 

이 역등 음양오행설은 과학이 뭔지도 몰랐던 원시에서 신비한 우주 운행을 점 처 보려던 하나의 수단이었고 이는 잠재의식의 작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는 것도 사실 이다

 

이 역의 창시자는 하느님 보다 천 년이나 뒤진 전설적 인물 복희씨에 의하여 팔괘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은나라 때 팔괘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도 지어낸 이야기 라는 것이 저의 연구결과 이기도 하지만 역에 대해서 30년간 연구한 서울대 철학박사 金敬琢의 '易' 해석이란 책에 나온다.( 明文堂 간) 

 

* 易으로 첨 치기

역의 음양오행설의 점술에 대하여 말하면 우선 易으로 점을 칠 때 가장 정확한 방법은 공자님 十翼의 繫辭傳 의 방법이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난이 아닌 진심을 다 한 다음 무의식적 에서 나오는 마음으로 점 대 50 개를 왼손에 잡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그 중 한 개를 뽑아 책상 위에 놓는다. 이는 태극을 상징한다. 다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49 개의 점대 를 양손에 갈라 쥔다.

여기서 왼손에 있는 것을 陽인 天策이라 하고 오른손 것을 陰인 地策이라 한다. 여기까지가 第 一營이다.....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국 四營에서 남는 것은 5 아니면 9....나머지 점대로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四營을 계속 ...이렇게 세 번을 되풀이 하면서 얻어진 점대의 합은 25, 21, 17, 13 의 어느 하나... 이것을 태극을 제외한 수 즉 49 에서 빼면 32, 36 중 어느 하나...이것을 4 로 나누어 얻어진 수가 6 이면 老陰...이렇게 해서 여섯 개의 爻를 얻으려면 똑같은 동작을 8 번해야 하므로 이 本策法을 十八 變法 이라고도 한다.

 

이 점보는 방법은 절대로 작난으로 해서는 않되고 좋지 은 수가 나왔다고 다시 봐서도 않된다.

그리고 정성을 다 해서 해야지 절대 다른 마음을 먹고 해도 않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잠재의식 작용을 보는것이다.

만약 이것이 정확한 확률이 있거나 과학, 또는 수학이라면 아무렇게나 백번 해 봐도 그 결과는 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역 이란 그 형식을 취해서 그 사람의 잠재의식을 보는 것이니 이 易이 아니고 그냥 정신과 의사나 무당 등 상대의 잠재의식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앞에게 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며 또 잠재의식은 이것이다 하기도 힘이 들것이므로 가변성이 많아 점을 볼 때마다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잠재의식으로 점을 보는 방법은 세계인들 풍습마다 다르다.

어느 나라 (우리도 그랬지만..)에서는 점성술이 발달했다. 가만히 있는 별들이 어떤때 대기 불안정으로 흔들리면 그 별에 의하여 태어난 사람은 병이 생긴다 했으며 그 흔하게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어느 누가 죽었다 했다.

또 트럼프나 화토장 가지고도 점을 보고 무당들이 상 위에 쌀 알이나 엽전을 던저 놓고 그 흐터지는 모양을 보고 점을 친다.

그런데 이때 절대로 작난 같은 마음으로 해서는 않된다. 성심 성의껏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역으로 얻어진 爻로 해당되는 괘를 찾아 보는 것도 순 점 보는 이의 잠재의식 작용이고 또 그 결과도 완전 토정비결식이라 코걸이 귀걸이 식이다.  

 

* 음양 오행설이 왜 코걸이 귀걸이 인가 말한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

SBS에서 취재한 바에 의하면 어느 사람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작명가 백 아무개에게 백만 원을 주고 귀한 손자의 이름을 이 역법으로 지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중병에 걸리자 방송국 기자와 함께 다시 그 작명가를 찾아가 그 아이의 병과 이름과 사주를 감정해 달라고 내 밀었다.

작명가는 3 년 전의 일 이므로 자신이 지어준 이름인줄도 모르고 대뜸 " 음양오행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음' 자도 모르는 어떤 미친놈이 아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며 백만 원만 자기에게 주면 당장 그 이름을 고쳐주어 병을 낫게 해 준다" 고 했다.

그때 그 사람이 가지고간 영수증과 그 이름의 해설서를 보여주자 그 사람은 " 그때엔 내가 술을 먹었나?" 라고 했다. 이 작명가는 지금 내가 말하면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다.

 

방송국 기자와 그 사람은 다른 작명가들 한테 찾아가 보았다.

그 작명가들은 사주를 보더니 어떤 사람은 개똥이 어떤 사람은 쇠똥이 등 다니는 곳 마다 말이 달라 졌다. 그리고 각자 자기가 말 하는 대로 이름을 고쳐야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돈을 요구 했다.

이 모두 방송까지 탓 던 내용이다.

 

위에 글은 물론 점을 보거나 이름 등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역으로 우주 운행의 원리를 본다거나 개인의 운명을 본다는 것도 원리가 이렇게 귀걸이 코걸이 식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 된다.

 

이상 음양오행설로 천부경 풀이를 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며 또 그 풀었다는 것 조차 백이면 백이 다 다른 소릴 하는데 그 중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독자가 이해 할만한 것이 있으면 한번 제시해 주시기 바란다.

 

필자는 단언 하건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독자는 그만두고 그 해석했다는 사람조차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해설서를 썼으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 음양오행설로 천부경을 풀 수 없다.

 진본 천부경은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고 최치원의 81자는 그 예찬문 인것은 다음 신지녹도 천부경 해독을 보면 밝혀 진다.

그런데 아직도 최치원의 81 자만이 천부경으로 아는 사람들이 그 81자를 우리 말로 해독을 하자니 할 수가 없으니까 어느 누구도 알지못할 음양오행설로 풀이 해 가며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에 이 음양 오행설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를 자세히 밝혀 본 것이다.

 

* 삼극 만이 우리것

우리는 그간 음양의 태극이 아닌 천지인의 삼극을 써 왔으며 그 근거는 책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표지 뒷면에 제시 했듯이 신라시대 보검, 기왓장 등 수없이 많으나 내가 알기로 이조전 태극 문양유물은 아직 발견 하지 못했다. 어디엔가 있으면 제시해 보시라!

 

그러나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은 아직까지 점 서로 써 진일도 없고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도 음전자 양성자 중성자등 존재의 기본 사상을  말하는 데만 쓰여지는데 이는 그간 우리 조상들이 홍살문이나 북 그리고 심지어 부채와 요즘 지하철역 환승역도 이 삼태극을 쓰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잠재적으로 삼태극을 써 왔다는 증거가 아닌가?

 

다음 그림은 필자의 음양오행설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쓰여진 것은 이조 후기라는 말에 반론을 단 그림들인데 한번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www.songpr.com/flag1.htm 

 

치우기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은나라 때에도 팔괘의 기록이 없는데 그 천년전 치우때는 혹 팔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음양 태극은 없던 시절 이다.

 

 이  원리들은 누차 말했드시 하는님 고손자의 고손자 그리고 또 그 고손자 때에도 없었던 이론인데 하느님이 과연 그 고손자를  위하여 음양오행설로 천부경을 말했을까 하는점 이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천부경 해석들을 써 왔기문에 필자는 우리 천부경과 음양오행 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반론자가 제시한 중국의 문양들

 

중국의 태극+팔괘문양


 

 

 

 

 

한국은 고대로 부터 3태극만 썼다는 필자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한 그림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태극문양

 

 회암사터의 돌계단 태극문양
회암사터의 돌계단에 태극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태조 이l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자마자 때마침 마땅히 사용할 종묘가 없어 개국공신 무학대사가 불사를 일으키고 있던 회암사를 임시종묘로 정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현재 회암사터에 남아 있는 태극문양들은 적어도 600 여년이 넘는다.

 

 

 청평사터의 돌계단 태극문양
 
옛청평사의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소맷돌에 연꽃잎 속에 쌓인 음양태극이 돋보임


 


 

 

 

태극문양은 궁궐,종묘,왕릉외에도 조선왕조를 거치는 동안 여기저기서 많이 나타는데 특히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깃발
  <해군사관학교보관중인 임진왜란당시작전도>

* 위 사진들은 이조전에 우리가 태극 문양을 써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이조 전에 어디엔가 혹시 태극문양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필자는 아직 찾지를 못했다.

 

 * 하블 망원경으로 본 우주를 생성하는 또하나의 삼극.

 

 

그러나 이조전 삼극 무늬는 너무 흔하다.

 

* 보물 제 635호 신라 시대의 장식 보검 (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103쪽 ) 우리 민족이 사용하던 삼극 무늬는 신라시절 기와장뿐 아니라 보검 자루에도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http://www.metmuseum.org/

#1. 홍산 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삼태극 옥지환

 

 

http://www.daangoon.pe.kr/base/DRACON1.jpg

용(홍)산문화 (중국대륙에 있던 고조선 문화) 옥기의 삼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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