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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잃어버린 한민족 9천 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윤창렬 교수 논문]

by 바로요거 2006. 12. 14.

9천 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논문원본down받기



Ⅰ. 역사란 무엇인가

*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생기(有天下之生氣)하고,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사기(有天下之死氣)니라. : 천하의 대세를 알고 있는 자는 살 기운이 붙어있고 천하의 대세에 눈 못뜨는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밖에는 없느니라. (道典 5:259)

1. 역사는 진리의 종합적인 모습이다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 생활해 온 총체적인 모습으로 진리의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이다. 역사를 버리고서 인간은 진리의 진면목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며 역사를 떠나 천지의 대세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을사년에 부안 사람 신원일이 모시기를 원하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명(命)이 있으므로 신도(神道)에서 신명이 먼저 짓나니 그 기운을 받아 사람이 비로소 행하게 되느니라. (道典 4:41:5-6)

인간이 역사를 실현시키는 주인공이지만 여기에는 4차원의 신(神)이 들어서 함께 역사하고 신(神)은 천리(天理)의 운행원리에 따라 작용(作用)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운행원리(理)에 따라 그 기운을 주재하는 신(神)이 들어서 지상의 인간을 통해 사건(事)으로 전개된 총체적인 모습이 역사이므로 역사는 진리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우주의 운행원리에 시각을 맞추면 운도사관(運度史觀)이 나오고 신도의 법도에 촛점을 맞추면 신도사관(神道史觀)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예) 선천의 역사가 끝나가면서 상제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여야 할 시운이 도래함(理) → 선천의 말기가 되면서 인간의 죄악이 난무하고 천지가 혼란하므로 맛테오릿치 신부를 위시한 신성과 불타와 보살들이 상제님의 강림을 탄원함(神) → 상제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시어 천지공사를 신명과 더불어 집행하심(事)

상제님의 강림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2. 단재 신채호의 역사 정의

*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니… (신채호 저, 이만열 주석, {조선상고사} 상 27쪽)

이는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我)와 비아(非我)를 주체적(主體的)으로 인식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개별성으로서의 존재파악이요 공동체적으로는 민족의 주체성 파악이다. 나라와 겨레의 역사는 한 집안의 족보와 같은 것이다. 내 집은 작은 집이고 나라는 큰 집이다. 나는 작은 나이고 겨레는 큰 나이니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일이 곧 대인이 되는 것이다. 작은 나는 죽어도 큰 나는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단재는 민족사관의 이론적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사대주의 사관을 깨뜨리어 단군조선(檀君朝鮮) - 북부여(北夫餘) - 고구려(高句麗)의 법통을 세웠으며 지리적으로 압록강, 두만강의 퇴폐한 정신적 국경을 떨쳐내어 민족구강(民族舊疆)의 복원(復元)을 제창하였고 철학적으로 주자학의 추방과 함께 삼신상제(三神上帝)와 신교(神敎)의 광명사상을 정립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둘째, 역사의 투쟁적 성격을 간파하였다.

"선천은 상극의 운(運)이라" (道典 2:12:4)

셋째, 정신적 활동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역사의 삼대원소(三大元素)인 시(時)·지(地)·인(人)의 역사성 인식을 통한 실증적 방법론을 도출하고 있다.

Ⅱ. 왜 우리 역사를 알아야 되는가

1. 역사는 자아인식을 목적으로 한다

*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니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자와 환골(換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道典 2:41:1-2)

영국의 외교관이며 정치학, 역사학 교수였던 E. H. 카(1892∼1982)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곧 역사라 하여, 역사는 과거의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아 생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민족과 국가의 발전은 올바른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시대의 문명을 진단하는 역사가들은 지금을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위기라는 말은 인류가 위험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더 나은 시대로 도약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전락하느냐 하는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a turning point for better or worse in an illness)

이러한 위기를 야기한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발전에 따른 자연 파괴와 공해, 윤리와 도덕의 타락,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끊이지 않는 전쟁의 발발 등을 들 수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가장 중요시되는 위기는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 민족의 역사는 어떠한가? 우리 민족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보다는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하루살이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잃어버린, 가치관을 망각해 버린 인간 정신사의 타락이 가장 큰 위기라고 진단해 볼 수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 시대를 인류의 모든 문명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원시반본하는 때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울러 이 위기의 시대에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망각하거나 역사의 참된 뿌리를 부정할 때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해 주셨다.

만해 한용운도 {조선독립의 서}에서 "월조(越鳥)는 남지(南枝)를 생각하고 호마(胡馬)는 북풍(北風)을 그리워 우나니 이는 다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다. 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굴을 향하고 죽는다고 하니 근본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미물이나 동물에게도 나타나는 진리라고 하겠다.

한민족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공부하고 체득하는 것은 인류의 새 시대, 21세기를 한민족이 열어 나가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행촌 이암선생은 {단군세기 서}에서 "정유기(政猶器)하고 인유도(人猶道)하니 기가리도이존호(器可離道而存乎)며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 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아. 병수도기자아야(竝修道器者我也)며 구연형혼자역아야(俱衍形魂者亦我也)라. 고(故)로 천하만사(天下萬事)가 선재지아야(先在知我也)."라고 하셨다.

2. 지금 우리 민족은 몸은 국산이지만 정신은 외제이다

*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니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리라. : 만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시작함이 있으니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을 가릴줄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 (道典 8:12:1-2)

지금 우리 나라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 빠져 있다.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각자 자기의 목소리만을 높일 뿐 남의 사상이나 생각은 전혀 수용을 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국론분열의 난맥상이 판치고 있는 시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민족의 통일과 미래를 걱정한다는 미명아래 공산주의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무법천지를 열고 있는 대학생들의 데모 시위이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의 각 개인은 사상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것을 공부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선후의 순서는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이란 19세기 후반 서구의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근세의 이론이다. 이것을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북통일을 원하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대한의 젊은이라면 우리의 9,000년 역사와 정신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운동을 전개하라는 것이다. 민족운동, 민족통일운동은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철학도,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인 것이지만 민족의 혈통만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은 민족단합의 근원이며, 민족자존의 원동력이며 민족발전의 추진력이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만을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이 배여 있는 고유한 종교와 사상이 없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민족은 있으되 역사는 없고, 아니 역사는 있으되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 역사는 어렴풋이 알되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국론이 분열되고 대학생들이 좌경 이론에 빠지고, 한국이 종교백화점화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 정신을 배우지 못해서 주체성을 상실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라. :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릴 줄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道典 8:12:1)는 상제님의 말씀은 지금의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할 것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친구에게서 유학 당시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파티를 열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나라의 고유한 춤을 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만 고고와 디스코를 추어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연 당신은 몸도 국산이고 정신 세계도 국산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정신세계의 무국적(無國的) 현상을 타파하는 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지만, 우리 민족의 상황에 비추어 "너의 민족을 알라."로 고쳐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3 애국심은 역사의 올바른 인식으로부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는 환희와 충격의 대 드라마를 목격하였다. 몇십 년이 지나도 요지부동할 것처럼 보였던 동서독의 냉전이 같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소련에서도 발트해 3국을 비롯해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등의 공화국이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마침내 독립을 성취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민족이란 무엇이기에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첫째, 민족이란 언어, 문자, 풍속, 관습, 생활, 사상, 그 밖의 문물일체를 공동 소유하고 있는 짙은 혈연의 사회적 집단으로 운명공동체, 역사공동체, 문화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명예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세계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9,000년 동안 국통의 단절됨이 없이 단일민족으로서 지속되어 온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부흥은 애국심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애국심의 고양은 역사의 올바르고 자랑스런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도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라는 글에서

*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눈에 국(國)이란 글자가 배회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손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봉사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발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뛰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목구멍이 항상 나라를 찬양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뇌가 항상 나라만을 생각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머리털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혈혈누누(血血淚淚)가 나라를 위하여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대저 역사가 무엇이기에 그 공효의 신성함이 이와 같은가. 역사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변천소장한 실적(實蹟)이니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가 반드시 흥기하니라.

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단군세기 서}에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이라는 말이 있다.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몸뚱아리와 같고, 역사는 우리 몸속에 있는 혼과 같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나 국가는 혼빠지고 얼빠진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비록 있더라도 후세들의 기를 펴주고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는 역사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역사없는 민족과 진배없다. 엄하게 기르되 기(氣)는 죽이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만, 지금의 역사 교육은 학생들과 우리 민족의 기(氣)를 살리기보다 죽이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끝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이기백 저, {한국사 신론} 서문)

(2) 우리 겨레가 처음 어디서 살았는지 분명치 않으나 단군신화가 말하는 고조선이 대동강 평양 근처에 세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국정교과서의 한 대목)

(3) 대동강변에 설치된 한사군은 원시적 국가 형태로 볼 것이나 韓민족은 漢나라의 식민지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는 변칙적인 과정을 밟았다. (김철준·한우근 저, {한국사 개론})

(4) 한국사는 반도의 태반을 한족(漢族)에게 빼앗김으로써 상고(上古)에 있어서 외래족에게 굴복하는 선례를 남겼다. (이병도 저, {한국사 대관})

석주 이상룡1) 선생은 "노예역사의 교육은 노예국민을 만든다."2) 라고 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정신의 역사는 무정신의 민족을 낳고, 무정신의 민족은 무정신의 국가를 만든다." 라고 하였다.

역사의 실례를 들어 보더라도 민족의 역사와 주체성이 확립되었던 고구려, 백제, 대진국 등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민족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었지만, 외래 종교인 불교에 빠지고 사대주의에 물들었던 신라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영토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은 {단군세기 서}에 있는 다음의 내용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위국지도(爲國之道)가 막선어사기(莫先於士氣)하고 막급어사학(莫急於史學)은 하야(何也)오. 사학(史學)이 불명즉사기(不明則士氣)가 불진(不振)하고 사기(士氣)가 불진즉국본(不振則國本)이 요의(搖矣)요 정법(正法)이 기의(岐矣)니라. :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그 민족의 엘리트이면서 지도자인 선비들의 기상보다 더 먼저할 것이 없고 역사 공부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 것은 왜 그러한가? 역사가 밝지 아니하면 민족 엘리트들의 기백이 떨쳐지지 못하고, 엘리트들의 기백이 살아나오지 못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치의 법도가 분열되느니라.

4. 지난 역사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원리에 의해

후천문화 건설의 모델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특히 중요시 되는 이유는 우리의 시원사가 인류 역사의 시원사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으며, 환국·배달·단군조선 시대의 신교의 사상과 철학과 문화는 원시반본의 정신에 의해 후천 문화를 건설하는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신교(神敎)의 제천의식과 음악, 미술, 무용 등의 삼성조시대의 문화와 철학의 원형 발굴은 후천 문화를 재정립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Ⅲ. 우리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나

*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에 열국시대 이래 중국의 한족과 일본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고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 (道典 1:1:6)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우주원리적으로 이것은 우주의 숙명이며 우리 민족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주변화의 섭리는 129,600년을 우주 1년으로 하여 봄·여름의 생장 과정과 가을·겨울의 통일 성숙과정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봄·여름의 전반기 5만 년 과정은 근본자리에서 멀어지면서 자기의 과거를 지워버리면서 새롭게 나아가는 때이다. 씨앗이 땅속에 묻혀 썩어서 새롭게 돋아난 떡잎이 점점 커가면서 과거의 형체를 남기지 않듯이, 우주 1년에 있어서 전반기의 끝인 여름철의 극기가 되면 과거의 진실이 다 묻혀버리고 본질이 왜곡되고, 알맹이 없는 겉모습만 화려해진다. 그리하여 많은 책들이 저술되어 나오면 나올수록 역설적으로 사실은 더욱 더 왜곡되게 되는데, 상극 분열시대의 숙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때에는 역사뿐만 아니라 현상계에 존재하는 진리 자체가 왜곡되고 생명력을 잃는 때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민족의 역사가 가장 왜곡이 심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위치하는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팔괘 중에 간방(艮方)에 속한다. 艮의 섭리는 모든 것을 창조한 모체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해 완성되는 장소인데(成始成終), 현실적으로는 드러나지않고 숨어버리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간(艮)'을 '씨'라고 비유하는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사과나 배, 복숭아 등의 씨는 생명의 뿌리이지만 가장 깊숙이 내재해 있어서, 가장 큰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숨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간도수(艮度數)의 섭리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되고 소멸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3) 특히 삼성조시대의 역사는 그 중에서도 뿌리의 역사가 되므로 더욱 더 드러나지 않게 될 운명이었다.

둘째는, 주체성을 상실한 선조들에 의해서 그리고 아(我)와 비아(非我)도 구별치 못했던 얼빠진 조상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역사가 왜곡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단재는

(1)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에서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탕잔되었다.4)

(2) 조선의 사가들은 매양 얼토당토않은 혹을 붙여서 조선사를 지으려하였다.

(3) 도깨비도 뜨지 못하는 땅 뜨는 재주를 부리어 중국의 졸본(卒本)을 떠다가 조선 함경도의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놓았으며, 중국의 안시성(安市城)을 떠다가 용강(龍岡) 혹은 안주(安州)에 놓았으며, 아사산(阿斯山)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을 만들었다.

(4) 위서(僞書)를 그대로 믿고 아조(我朝)를 무욕(巫辱)한 것을 그대로 수입하였다.

고 갈파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할 때 민족사학자들은 삼독(三毒)의 해(害)와 외래종교의 영향을 꼽고 있다. 삼독(三毒)이란 중독(中毒)·왜독(倭毒)·양독(洋毒)을 말하는데, 중독(中毒)이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중국에 예속되어 중국에 조공이나 바치며 반도 안의 소중화(小中華)로 만족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요, 왜독(倭毒)이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뒤에 한국은 일본 문화의 한 지류이며 그 혜택을 받고 성장해 왔다는 식민사관에 물든 것이요, 양독(洋毒)이란 해방 이후 서구의 문물과 사상에 물들어 우리의 역사를 내려깍는 것을 말한다. 이것의 공통점은 우리 로 하여금 우리 역사와 문화의 위대성을 망각한 채 자기비하, 자기학대, 피지배 민족의 열등적 역사관을 주입시킨다. 이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독(中毒) : 사대주의사관(事大主義史觀)

신라 26대 진평왕 30년(608년) 원광법사를 통해 수나라에 걸병표(乞兵表)를 지은 것을 사대주의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무열왕 김춘추가 648년에 당에 들어가 패강 이북의 땅을 당에 바치기로하고 나당밀약(羅唐密約)을 맺어 사대의 길을 열었고, 신라 28대 진덕여왕 4년(650년) 부터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徽) 원년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5)

이후 통일신라시대는 숭당(崇唐), 고려시대는 사송(事宋), 조선시대에는 숭명(崇明)이 국시(國是)로서 자리잡은 결과, 주체성을 상실한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 역사가 쓰여져 역사가 왜곡되게 되었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비아적(非我的) 입장에서 쓴 대표적인 사대주의 사서(史書)이다.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송(宋)의 소식과 소철을 사모하여 셋째 아들 이름을 김부식(金富軾)으로 짓고, 넷째 아들의 이름을 김부철(金富轍)로 짓는 등 김부식의 아버지 때부터 사대의 심리가 몸에 배어 있었다. 따라서 김부식 그의 이름 속에는 사대의 기운이 벌써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의 사서(史書)에서 우리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왜곡된 몇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

1) 김부식의 삼국사기

① "진덕여왕 4년에 당의 永徽 연호를 행하게 되었다."의 아래 부분에 다시 논하기를 "편방(偏方)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속(臣屬)한 나라는 본래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 쓰지 못하는데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쓴 것은 미혹된 일이다. 당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머뭇거리다가 이제 봉행당호(奉行唐號)하니 가위(可謂) 과이능개(過而能改)라." 하였다.

② {수서(隋書)}의 "고려(高麗) 교오불공(驕傲不恭)하야 제장토지(帝將討之)하니라."를 "아(我) 교오불공(驕傲不恭)하야 제장토지(帝將討之)하니라."로 고쳐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③ "고려(高麗) 침기봉장이수지(侵其封場以极之)하고 입기군현이거지(入其郡縣以居之)라. 시고(是故)로 병연화결(兵連禍結)하야 약무영세(略無寧歲)러니 급기동천(及其東遷)하야 치수당지일통이유거조명이불순(値隋唐之一統而猶拒詔命以不順)하고 수왕인어토실(囚王人於土室)하야 기완연불외여차(其頑然不畏如此)라. 고누치문죄지사(故屢致問罪之師)에 수혹유시설기이함대군(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이나 이종어왕항국멸이후지(而終於王降國滅而後止)하니라."7) 하여 우리 민족의 입장이 아닌 망당(亡唐)의 유신(遺臣)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2) 일연의 삼국유사

①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의 아래 주(註)에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천제(天帝)의 환국(桓國)을 불교의 제석환국(帝釋桓國)으로 변조하였고, 환웅천황이 천강(天降)한 태백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주(註)하여 사실을 왜곡하였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반도 안으로 축소하였다.

② 고조선조 다음에 위만(魏滿) 조선조를 두어 위만을 고조선의 후계 왕국인 것처럼 조작하였다.

③ 연개소문 장군을 수나라 양견(楊堅)의 부하였던 양명(羊皿)의 후신으로 모함하여 놓았다.

3) 서거정의 동국통감 (외기사관 : 外紀史觀)

① 단군조선사를 외기(外紀)로 다루어서 타국사(他國史)인 것처럼 적었다.

② 삼국기(三國紀)부터 기록하여 삼성조(三聖祖)시대의 역사를 산거(刪去)했다.

4) 안정복의 동사강목 (수기사관 : 首箕史觀)

"기묘(己卯) 조선기자(朝鮮箕子) 원년(元年)"을 서두에 적고 "은(殷) 태사기자(太師箕子) 동래(東來)하니 주천자(周天子)가 인이봉지(因以封之)라." 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가 기자(箕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꾸미고, 단군왕검의 사적은 기자동래(箕子東來)의 밑에다 적고 있다.

5) 이 외에 정인지의 {고려사}, 한백겸의 {동국지리},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8) 등도 모두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여 기술하고 있다.

단재는 우리 나라 역사서를 평가하기를 "대개가 정치사들이요, 문화사에 상당한 자는 몇 못됨이 일감(一憾)이요, 정치사 중에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작이 없고 모두 일왕조의 흥망 전말로 글의 수미를 삼았음이 이감(二憾)이요, 공구(孔丘)의 {춘추}를 史의 극칙(極則)으로 알아 그 의례(義例)를 효빈(效嚬)하여 존군억신(尊君抑臣)을 주(主)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숭화양이(崇華攘夷)를 주(主)하다가 말내(末乃)에 자국까지 양(攘)하는 벽론(僻論)에까지 이름이 삼감(三憾)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공하려 함보다 외인에게 첨미(諂媚)하려한 의사가 더 많아 자기의 강토를 촌촌척척(寸寸尺尺)이 할양(割讓)하여 말내(末乃)에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하였음이 사감(四憾)이다."라고 하였다.9)

2. 왜독(倭毒) :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

*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道典 5:90:1-2)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의 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사서(史書)를 약탈하고 역사를 악랄하게 조직적으로 왜곡하였다.

한국 강점 후 일제 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에서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을 총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체 수색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가 지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적인 첫 만행이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 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분서했다.

일제는 당초 3년 동안 수색을 하면 그들이 없애고 싶은 서적은 모두 씨를 말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서적의 압수, 분서 소식을 들은 소장자들이 깊이 감추는 바람에 3년은 고사하고 6년 동안이나 강압적인 서적 수색을 강행했으나 씨를 말리지 못하자, 무단정치로 악명 높던 사내정의(寺內正毅)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 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중추원(中樞院)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어쩔 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며,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 총독 제등실(齊藤實)은 교활하게도 조선 사람들을 반일본 사람으로 만들려고 이른바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듬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라고 떠벌려 놓고 1922년 12월 훈령(訓令)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조선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사편수회는 사료 수집에 열을 올리는 한편 1927년 6월 조선사 편찬을 위하여 조직을 확대 정비했는데, 이 때 이병도(李丙燾)가 금서룡(今西龍)의 수사관보로 들어간다.

금서룡(今西龍)은 1903년 동경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도제대 교수로 있었는데, 1921년 단군고라는 논문을 써서 경도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근래(1920) 조선인 사이에는 갑작스레 단군을 숭봉, 존신하는 바람이 불고 있어서 단군을 조선민족의 조신(祖神)으로 믿는 단군교(檀君敎) 또는 대종교(大倧敎)라는 교도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사태 때문에 논문을 서둘러 발표한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1512년 경주 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 중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하여 경성제대 영인본이라며 각 계에 배포했었다. 1932년 7월 21일, 조선사편수회의 제6차 위원회에서 육당 최남선은 이를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라고 통박하였다. 그 후 1938년 본문만 총 35권의 조선사가 완간되었다. 당시 쌀 한가마에 10원 미만이었는데, 일제는 이 사업에 잔뜩 100만 원을 투자했다.

식민사관의 폐해는 반도사관(半島史觀) 주입, 고대사 말살, 특히 단군의 신화화, 한사군 설치, 광개토왕 비문의 조작10)등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다른 분야에서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풀려 나왔지만 국사에 있어서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의 내용을 소개한다.

송오순 : 제가 한마디 추가하겠습니다. 이왕에 식민사관에 대한 말씀을 하실려면 우선 식민사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합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오늘의 좌담회를 준비하려고 서재를 뒤지다 보니까 마침 {다물}지 1981년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이 눈에 띄기에 가져 왔습니다. 그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제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편리하도록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한국 민족이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국민에게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그런데 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일정한 구성 요건이 꼭 필요한데 바로 이 구성요건이 제거되지 않고는, 제 아무리 그 껍데기를 다른 이름으로 예컨대 '민족사관'이라고 바꿔 붙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의 식민사관을 반복하는 반민족적인 교과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그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4천년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한(漢)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며 이것을 한국에 대한 외국 세력의 식민지 선례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날조하기 위하여 일제는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역사책은 전부 약탈하여 갔습니다. 이러한 한국사 날조의 음모는 일제의 명치유신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는 명치 유신이래 그들의 국시였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일본 역사를 한국지사(韓國支史)가 아닌 자생민족사로 날조하여 소위 황국사관을 만들어 냈고, 밖으로는 한국 역사를 오히려 일본지사(日本支史)처럼 날조했습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 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날조),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와 그 밖의 여러 종교를 탄압하고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국사 교과서의 표지 이름이나 그림이나 삽화가 제 아무리 우리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이 대체로 위에 말한 식민사관 내용을 탈피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 식민사관의 답습 또는 복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또한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설정한 것은 고조선의 대륙 지배 역사가 우리 민족 정신을 자각시키는 원천이될 것이 두려워 그것을 깡그리 이름도 내용도 말소해 버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짜 조선사의 핵심이 되는 제1편 신라 통일 이전(즉 고조선시대), 제2편 신라 통일 시대, 제3편 고려시대와 같은 우리 민족이 그 능력과 재질을 과시하여 크게 웅비했던 시대를 날조하는 작업에는 일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비록 일본의 요인이라고 해도 감히 근처에 얼씬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도 한국사람 이병도씨가 무슨 연고가 있었는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의 6개편의 역사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깊숙이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여 국사오도(國史誤導)와 민족 종교 거세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사학도들이 설 자리는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최남선과 같은 독립운동가나 이에 준하는 독립지사를 빼놓고는 오직 일제의 식민사관의 포교사(布敎師)의 지위 밖에는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비록 광복후라고도 해도 겉치레만 자주(自主), 자유(自由)였지 사실상 진정한 국사학도들이 공부할 우리 국사의 진본(眞本)은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랜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무대에서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당시 사학자들이 교육받고 성장하였다면, 이 사람들을 새로 교육시켜 식민사관으로 인한 왜독을 철저히 제거하는 작업이 최선결 과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국사 이외의 다른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공인 교수, 박사를 우선 그 방면의 학술 전문가로 꼽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사학계와 국사교육 정책에서만은 기실 이른바 전문가가 비전문가요, 재야의 세칭 비전문가가 오히려 실제의 전문가였습니다. 요컨대 이 사이비 전문가들, 식민사관에 완전무결하게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이상으로 식민사관과 그 문제점들을 대강 말씀드렸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임성국 : 그게 무엇입니까?

박기자 :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임성국 :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첫 단계로 역사를 날조하고, 그 다음으로 종교 탄압, 국어와 한글 못 쓰게 하기, 창씨 개명으로 우리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종교, 국어, 한글 그리고 창씨 개명했던 우리의 이름은 당장에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학계에서도 역사만 빼고는 모두 일제의 손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환수된 것이 사실입니다. 가령 일제의 식민통치용으로 쓰이던 행정 기관, 철도, 경찰 그 밖의 모든 분야가 해방되는 날로 비록 미군정하이긴 하지만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봉사하는 기관으로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소나 말을 부리던 주인이 바뀐것이나 마찬가지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사 분야만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채 행정과 정치의 사각지대에서 온존하면서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시녀 노릇을 해왔습니다.

박기자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해방후 한국 역사를 주체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가령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 포교사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S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Y대학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S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씨는 그 때까지도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3. 양독(洋毒)

해방 후 서양학의 영향으로 이룩된 사학을 양독(洋毒)이라 할 수 있는데, 식민주의 사학이 중독(中毒) + 왜독(倭毒)의 복합증상이지 결코 왜독이라는 단순현상이 아니었듯이, 양독이야말로 전근대 사학과 일본 식민사학을 부합시킨 현대의 괴물 사학으로 양독 = 중독 + 왜독 + 양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양독의 특징은 고고학을 위주한 실증주의, 문헌고증주의(랑케사학) 등을 위주로 하는데, 우리 민족의 고대 강역이 만주, 몽고, 시베리아, 중국의 요령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임을 생각할 때, 고대사의 자료가 망실된 현실에 있어 역시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는데 큰 독소이다.

4. 외래 종교의 폐해

1) 유교의 폐해

외래의 사상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국수주의라고 할 것이다. 어떤 민족이든지 외래 사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민족이라야만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외래 사상이 좋은 약이 될 것이지만,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외래 사상은 아편이 될 것이다. 유교는 중국 중심주의를 제창한다. 중국이 인류의 중앙이고 그 밖의 모든 민족은 중국에 예속되는 것이 천리(天理)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여기에 물들게 되면 주체성과 자주독립정신이 말살되고 종속적인 사대주의에 철두철미하게 물들게 된다.

이의 폐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夷)'는 중국인이 '동방에 사는 대궁(大弓), 즉 큰 활을 다루는 민족'이란 뜻으로 썼는데, 공자가 {춘추}에서 융적(戎狄)과 동일한 명칭으로 사용한 이래 우리나라 사람도 이에 동화되어 한문 교과서에서까지 이(夷)를 오랑캐라 부르고 있다.

② 이조의 역사가인 서거정, 안정복, 송병준 등이 우리 역사의 시작을 신라의 삼국통일에 맞추고 단군조선을 외기(外紀)로 다루었다.

③ 기자조선을 환작(幻作)하였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봉기자우조선이불신야(封箕子于朝鮮而不臣也)'라는 오기(誤記)에서 비롯하였는데, 사실 기자가 도망간 곳은 산서성 태원부로 번조선의 땅이었다. 극단적인 사대주의자 김부식조차도 감히 언급하지 못했던 내용이다.

고려때 송사(宋使)가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묘(箕子墓) 찾아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년)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기자묘(箕子墓)라 하고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향을 올렸다. 그 뒤 평양의 사당에서 주벽(主壁) 단군왕검의 위패를 서향지좌로 하고 기자의 위패를 주벽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자는 삭망향축(朔望香祝)까지 올리는 제전(祭田)이 있었지만 봄·가을 두 번 지내는 단군 제사에는 제전(祭田)조차 없었다.

④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만 세계 유일의 사필(史筆)로 여기고 우리 민족을 예맥(穢貊)이라 폄칭(貶稱)하여 스스로 오랑캐로 자처하였다.

⑤ 이조의 세조, 예종, 성종 때 우리의 도가사서인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표훈천사}, {안함노 삼성기}, {원동중 삼성기}, {삼성밀기}, {도증기}, {동천록} 등의 문서를 거두어 들여 소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 철학, 종교, 문화의 중요한 사료를 말살했다.

⑥ 훈민정음 제정의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 이래 지성으로 중국에 사사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다.

2) 불교의 폐해

불교는 교리 자체가 공학(空學)에 매이고 개인주의적이어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바로 잡는데 등한히 하였으며, 특히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석유환국(昔有桓國)' 아래 주석을 달아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천제(天帝)의 환국을 제석(帝釋)의 환국으로 풀이하여 환인을 한낱 불법의 수호신으로 인식하게 하여 큰 폐해를 가져왔다.11)

3) 기독교의 폐해

서울시에서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이 세계만방에 자랑할만한 것은, 유구한 역사와 단일민족임을 상징하는 단군성전을 새롭게 건립하는 것이라 여기고 단군성전을 건립코자 하였다. 없던 것을 새로 짓는 것도 아니고 사직공원에 모셔져 있는 기존의 단군 영정과 재실이 너무 협소하여 개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전국적으로 단합하여 단군성전 건립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교회에 걸어놓고 매스컴을 통해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고 우상이라고 선전을 하였으며 일부 광고 중에는 한국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문구까지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던 통분할 사건이 있었다.

이외에도 기독교는 조상숭배를 부정하고 장승을 쇠톱으로 잘라버리는 등 민족문화에 반하는 행위를 자행하여 민족보다 사상을 우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어떠한 종교도 민족보다는 우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별치 못하여 공자가 한국땅에 들어오면 '한국 속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한국'을 만들려 하였으며, 석가가 이 땅에 들어오면 '한국속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한국'을 만들려 하였으며, 예수가 이 땅에 들어 오면 '한국 속의 예수'가 아닌 '예수의 한국'을 만들고자 광분하였으니, 이제라도 이 미몽에서 깨어나 우리는 삼신 상제의 축복을 받은 인류역사의 뿌리민족이며 인류의 새 시대를 여는 '선택받은 민족[抄選人(초선인), 뽑아 선택된 민족, The chosen people]' 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Ⅳ. 우리 민족의 9,000년 역사와 사상

사대주의와 외래 종교에 물들지 않은 우리의 주체정신을 소유한 역사가들에 의해 서술되었던 {단기고사},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이 근래에 번역 출판되면서 우리 민족의 진정한 역사와 철학과 종교 사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1. 전 인류의 어머니 나라, 환국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를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하여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는 환국이라고 하였다. 환국은 우리 말로 '광명의 나라'이다. 고려 초기의 원동중 씨가 쓴 {삼성기(三聖紀)}를 보면 환국은 시베리아 중앙고원(파내류산 = 천산 : 天山)과 바이칼호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은 9환족 12환국의 연방국이었으며 3,301년 간 지속되었고, 7명의 환인이 다스렸으며, 문화수준은 구석기 말 내지 신석기 시대였다.

그리고 초대 환인을 안파견 환인이라 하였는데 '안파견'은 '만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백성을 교화할 때 주제천신(主祭天神)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로서, 우리 겨레는 바로 삼신 하느님의 피를 받은 천강족이며, 천손민족임을 나타낸다. 우리 민족 최초의 종교가 신교(神敎 : 以神設敎)이고, 환인이 천산에서 광명의 도를 체득하여서 국호를 환국이라 하고 통치자를 환인이라 하였으므로 우리 민족 최초의 철학은 광명이세(光明理世)라는 광명철학이었다. 그리고 조즉제등동산(朝則齊登東山)하야 배일시생(拜日始生)하고 석즉제추서천(夕則齊趨西川)하야 배월시생(拜月始生)하는 풍속(風俗)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태양의 총화색인 백색을 선호하여 백의를 즐겨 입었다. 그리고 지선수행(至善修行)하야 개심광명(開心光明)하는 수행을 중시하였다. 또 오훈(五訓 : 桓國五訓)이 있어 질서를 바로 잡았는데, 오훈은 일왈성신불위(一曰誠信不僞)요, 이왈경근불태(二曰敬謹不怠)요, 삼왈효순불위(三曰孝順不違)요, 사왈염의불음(四曰廉義不淫)이요, 오왈겸화불투(五曰謙和不鬪)였다.

환국지말에 인구가 증가한데다가 기상의 이변으로 북방이 점점 추워지자 환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한 갈래는 성지 태백산으로 이동하여 환국의 정통을 지켜 오늘의 한민족이 되었고, 삼위산 방면으로 가다가 몽고의 고원에서 초원을 보고 이곳에 정착하여 몽고족이 되었고, 십간십이지지의 신장(神將)과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 씨 등과 더불어 삼위산의 납림동굴(拉林洞窟)까지 간 민족은 반고씨를 위시한 중국 민족의 뿌리가 되었고 몽고에서 알타이산의 이목로(移牧路)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수메르 제국을 건설한 무리는 수밀이족(須密爾族)이 되었고, 여기서 분파하여 바빌론 문명을 세운 아카드(山岳人 혹 아파티)족이 되었고, 태백산을 향해 들어 오다가 금아림(선비산) 좌우계곡에서 주저 앉아 사냥하던 계레는 읍루(揖婁 : 만주족)가 되었고,이에 앞서 베링해협을 넘어 아메리카로 넘어간 사람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되었다.

이 중 특기할 사항은 서양사람들이 인류문명의 뿌리로 여기는 수메르 문명이 환국의 이주민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수메르인은 B.C. 3,5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진출하여 우르, 우르크, 라가슈, 움마 등의 도시 국가를 세우고, 이후 오리엔트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 {The sumerians}와 {History bigins at sumer}(1897년)를 쓴 Samuel N. Kramer 교수는 수메르인이 동방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다그라쓰 씨와 C. H. 고든에 의해서도 확인되었으며, 고든은 추가하여 이들이 중근동에 들어오기 전에 고대의 문자를 가지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에노(上野景福)씨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문자(cuneiform)가 태호복희(太昊伏羲)의 팔괘부호와 흡사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 의하면 우리의 12환국 중에는 수밀이국과 우르국이 있었으며 복희씨는 서계(書契)문자의 창시자였다. 수메르인들이 높은 장소, 높은 고원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평지로 이동하여 예배할만한 높은 산이 없자, 흙을 쌓아 인조산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지구랏트(Ziggurat)로서 지금까지도 이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수메르인들이 건립한 지구랏트이다. 이는 환국에서 이동해 간 수메르인이 고향의 종교의식이었던 제천의식을 잊지 않고 지켰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서, 대영백과사전에서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그 어근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수메르의 문화는 이후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앗시리아, 헤브라이 등으로 계속 전해지면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구약성경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즉 기독교의 뿌리도 우리 환국에 두고 있는 것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의 모세오경12)의 모법(母法)이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13)이다. 1914년 미국의 크레이와 릇즈가 수메르 법전의 단간(斷簡)을 발견했는데, 이 함무라비법은 수메르 법전의 보수법(補修法)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수메르 법전 → 함무라비 법전 → 모세오경이다.

그리고 헤브라이 사람들의 유일신관도 삼일신고의 신관과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크레머(Kramer) 박사는, 아브라함의 고향도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칼데아우르 지방이었고, 노아의 장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된 셈(Shem)의 어원도 Sumer에서 나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Shumer에서 어미 'er'이 떨어지고 모음 'u'가 'e'로 전음되어 'Shum'이 'Shem'으로 되었다고 했으며, 이런 현상은 고대 수메르어와 히브리어 사이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였다.14)

결론적으로 환국은 인류의 시원사를 밝혀주는 전 인류의 어머니 나라로서 또 4대 문명의 모체로서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2. 하늘의 광명이 비친 땅, 배달국

환국의 대이동 때 천부(天符)와 인(印) 삼개(三個)를 가지고 서자부(庶子部) 종족의 수장이었던 환웅천황15)이 삼백(三伯)16), 오가(五加)17)와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18) 3,000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내려오셔서 재세이화(在世理化)하시며 홍익인간(弘益人間)하셨다. 그리고 호족을 추방하고 교화된 웅족과 더불어 배달계레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배달국은 18대 환웅 동안 1,565년 간 지속되었다. 도읍은 신시(神市)에 정하시고 나라 이름은 배달19)이라 하였으며, 삼칠일(三七日)을 택하여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를 올렸다.

배달국은 환국의 정통을 이은 장자국이다. 그 이유는 7대 환인으로부터 정통의 표시인 天符와 印을 받았고 광명(光明)의 사상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다스리고 교화한다는 재세이화(在世理化)로써 우리 민족은 사후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상, 하느님의 이상을 이 지상에 구현하고자 한 철학의 소유자였다.

우리 나라의 교육법 제1조에 "교육은 홍익인간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여 인류 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환웅천황의 신시개천의 법통과 홍익인간의 사상이 계승되고 있다. 주체성을 상실한 후세에 와서 우리의 국시가 사대주의(事大主義) 또는 반공(反共), 통일(統一) 등으로 여러번 바뀌었지만, 홍익인간만이 남북한의 동질성을 회복케 하는 불변의 국시라 하겠다. 또한 주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하여 각 개인으로 하여금 민족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방법론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 예수교의 신구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사와 국사의식에서 찾아야 하고, 특히 신시개천(神市開天)의 법통인 광명개천(光明開天)·재세이화(在世理化)·홍익인간(弘益人間)의 3대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상은 하늘의 이상을 지상에 구현하는 것으로서 더 구체적으로 삼신 상제님의 이상을 지상에 펼치는 것이다. 배달국시대에는 환국(桓國)시대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삼신(三神)사상이 삼백(三伯)의 제도로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일웅일호(一熊一虎)는 곰과 호랑이가 아니라 웅족과 호족이다. 곰과 호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문 실력이 부족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가 월남전때 맹호부대를 파견했는데, 신문에 맹호향월(猛虎向越)이라 했을 때 용맹스런 호랑이가 월남땅에 갔다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환단고기}의 [삼성기] 下에는 웅호이족(熊虎二族)이라하여 두 개의 부족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환웅천황의 신시개천(神市開天)은 이번의 후천개벽과 중요한 관련이 있으므로 그 원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석유환국(昔有桓國)하니 서자환웅(庶子桓雄)이 수의천하(數意天下)하사 탐구인세(貪求人世)어늘 부지자의(父知子意)하시고 하시삼위(下視三危), 태백(太白)하니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일새 내수천부인삼개(乃授天符印三個)하야 견왕리지(遣往理之) 하시니라. 웅(雄)이 솔도삼천(率徒三千)하시고 강우태백산정신단수하(降于太白山頂神檀樹下)하시니 위지(謂之) 신시(神市)요 시위환웅천왕야(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장풍백우사운사(將風伯雨師雲師)하사 이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하시고 범주인간삼백육십여사(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하사 재세이화(在世理化)하시니라. 시(時)에 유일웅일호(有一熊一虎)하야 동혈이거(同穴而居)러니 상기우신웅(常祈于神雄)하야 원화위인(願化爲人)이어늘 시(時)에 신유(神遺)로 영(靈)하니 애일주(艾一炷)와 산이십매(蒜二十枚)라. 왈이배식지(曰爾輩食之)호대 불견일광백일(不見日光百日)이라야 변득인형(便得人形)이리라 웅호(熊虎)가 득이식지(得而食之)하야 기삼칠일(忌三七日)이러니 웅(熊)은 득여신(得女神)하고 호(虎)는 불능기(不能忌)하야 이부득인신(而不得人身)하니라. 웅여자(熊女者)가 무여위혼(無與爲婚)일새 고(故)로 매어단수하(每於檀樹下)에 주원유잉(呪願有孕)이어늘 웅(雄)이 내가화이혼지(乃假化而婚之)하야 잉생자(孕生子)하니라. ({삼국유사})

배달국의 신시개천은 상제님의 천하사와 여러면에서 깊은 상관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배달의 역사에 대한 더욱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① 우주법도를 논리화하고 중국대륙을 개척한 배달국의 태호복희

*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인데 하사도인다불가(何事道人多佛歌)오. : 모름지기 선천문명의 조종은 태호복희씨인데 웬일로 도닦는 자들이 아직도 부처 타령만 하느냐. (道典 5:303)

* 세상에 성(姓)으로 풍(風)가가 먼저 났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사람의 몸에 들어 체상의 칭호로만 쓰이게 되어 풍신, 풍체, 풍골 등으로 일컫게 되었을 뿐이요, 그 다음에 강가가 났나니 강가가 곧 성의 원시라. 그러므로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되는 고로 강가가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 (道典 2:37:2-5)

복희씨는 배달국시대 5대 태우의환웅의 막내 12번째 아들20)로서 현재 복희씨의 무덤은 중국 하남성 회양현성(淮陽縣城) 북쪽 1.5km에 위치해 있는데 회양은 엣날의 진국(陳國)으로 복희가 도읍(都邑)했던 곳이다. 춘추시대 이후로 능묘(陵墓)가 있었고 한나라때 능앞에 사당을 세웠다. 송태조가 조칙을 내려 능묘(陵廟)를 세웠고 명·청대를 거치면서 여러번 수리하였다. 능앞에는 "태호복희지묘(太昊伏羲之墓)"라는 큰 비석이 있다.

태호복희의 태호는 '크게 밝다'는 뜻으로 환국, 배달국의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신교(神敎)의 우주관(宇宙觀)을 정립한 것인데,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감화를 받아 영통(靈通)을 이루신 분이며,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를 최초로 획하신 분이며, 주역(周易)과 팔괘(八卦)를 그리셨으며, 하도(河圖)를 그리시어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우주법도를 논리화하셨다.

따라서 주역(周易)은 중국의 문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 태극·음양·오행·팔괘의 원리는 우주 질서를 파악하는 최고의 진리이며, 이의 주재자가 삼신상제님이시다. 129,600년으로 순환하는 우주1년의 원리도 북송 때, 동이족의 혈통을 받은 소강절이 최초로 언급한 것이지만 그 뿌리는 복희씨가 정립한 태극우주관으로 소급해 올라 간다. 태극이란 서로 대립되는 陰과 陽이 협조와 조화에 의해서 만물을 창조 변화시키는 이치를 말하는데, 곧 우주의 마음자리이다.

또 서계(書契)문자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천제를 올릴 때 처음으로 동물의 희생(犧牲)을 사용하였다.

복희씨의 나라는 15대간 왕통이 이어지다가 혈맥이 끊어졌다.

② 경농과 동양의학의 창시자 신농

* 신농이 농사짓는 법과 의술로 천하만세를 윤택하게 하였고 태공이 병법과 정치로써 천하만세에 은혜를 주었나니, 이제 하늘과 땅이 성공하는 가을철을 당하여 천지의 모든 신들이 그들을 높이 받드느니라. (道典 2:37:6-8)

신농(神農)은 쟁기와 보습을 처음 만들어 경농을 시작했고, 백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했으며, 일중위시(日中爲市)하고 교역퇴(交易退)하는 시장을 처음으로 설했다.

웅씨족(熊氏族)의 후예로 소전(少典)이 있었는데,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지말(桓雄之末)에 소전(少典)이 명을 받고 강수21)의 감병관으로 갔었는데, 소전의 아들 신농은 후에 열산22)으로 옮아 갔다. 그의 나라는 8대 520년간 지속이 되다가 마지막 왕 유망에 이르러 치우천황에게 멸망당했다.

지금 신농의 무덤은 호남성 영현 성(城) 서남쪽 15km에 있다. 황보밀이 지은 {제왕세기}에 '장우장사(葬于長沙)'라 하였고, 송대(宋代)의 나필(羅泌)이 지은 {노사(路史)}에는 '붕장장사다향지읍(崩葬長沙茶鄕之邑) 시왈다릉(是曰茶陵)23)'이라 하였다.

명나라 만력 48년(1620년) 오도남(吳道南)이 지은 {비기(碑記)}에 이르기를 "송태조가 등극한 후 두루 고릉(古陵)을 찾았는데, 문득 꿈에 한 신이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을 보고 비로소 다릉에서 염제릉(炎帝陵, 신농의 무덤)을 찾았다."고 하였다.

중국의 호북성에는 신농이 백초를 맛보고 틀(架)을 세워 놓고 오르내리며 채약(採藥)을 한 신농가(神農架),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는 신농가(神農架)의 주봉(主峯)인 대신농가[大神農架 : 신농정(神農頂)]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③ 도읍을 청구로 옮긴 14대 자오지 환웅

* 황제가 난을 지으므로 치우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 난을 지은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道典 2편 1-2)

세칭 치우천황이라 하며, 도읍을 대능하 유역의 청구로 옮겼으며 신용관절(神勇冠絶)하야 동두철액(銅頭鐵額 : 청동기 시대임을 의미)으로 중국의 하북, 산동, 강소, 절강 등의 땅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해동산북(海東山北) 천왕관경(天王管境)24)을 구가하게 되었다.

소전(少典)의 별파(別派)25)인 황제 헌원과 탁록의 들에서 10년 동안 73회나 싸워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황의 능이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鄕城) 중에 있는데 높이가 칠척(七尺)이고 진한대(秦漢代)까지 주민들이 시월에 항상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 때 황제헌원이 우리 청구국(배달국)에 와서 문물을 배워감으로써 우리 한민족의 철학인 주역, 음양, 오행의 내용이 중국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26)

배달국 시대는 교화(敎化)의 시대로써, 불이 발견되었고(고시례 : 高矢禮), 문자가 발명되었고(신지혁덕 : 神誌赫德), 집을 짓기 시작했고, 가축을 길렀고(왕금 : 王錦), 남녀혼취지법(男女婚聚之法)을 정하고(육약비 : 陸若飛), 음양·오행·팔괘·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및 청동기 등을 발견하였다.

3. 삼신상제의 이상을 지상에 구현코자 한 고조선시대

* 조선국(朝鮮國) 상계신(上計神) 중계신(中計神) 하계신(下計神)이 무의무탁(無依無托)하니 불가불(不可不) 문자계어인(文字戒於人)이니라. :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기를 글로써 이렇게 경계하노라. (道典 5:259:20)

고조선 시대는, 환국과 배달국이라는 생·장의 단계를 지나 우리 민족의 고대 정치와 사상과 문화와 종교가 완성된 시기이다. 다시 말해 사상과 제도의 완벽한 일치를 이룬 시대인데 환국시대부터 구환족(九桓族)은 삼신(三神)으로 일원지조(一源之祖)를 삼아 소도제천과 책화(責禍), 화백(和白), 관경제(管境制) 등의 제도를 유지해 왔었다.

단군왕검이 구환족(九桓族)을 통일한 후 제일 먼저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리고(봉제우삼신 : 奉祭于三神),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에 의해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도입하였다.

즉, 단군이 겸섭(兼攝)하는 진한(眞韓, 人에 해당)은 압록강 이북, 요하이동의 땅이고, 마한(馬韓, 天에 해당)은 압록강 이남의 반도와 제주, 대마도의 땅이고, 번한(番韓, 地에 해당)은 요하의 서쪽으로부터 하북, 산동, 산서, 강소에 이르는 땅이었다.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 번한은 칸27) 등을 두어 다스렸으니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인 일즉삼(一卽三), 삼즉일(三卽一)의 원리에 합치된다.

이러한 삼한관경(三韓管境)의 원리는 근세에 단재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우리 민족의 철학과 사상을 알았기에 그리 할 수 있었던 내용이다. 근자에 고조선(古朝鮮)의 역사를 발굴한 윤내현(尹乃鉉) 교수 등이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로서도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는 내용이다.

외래종교에 얼빠진 사람들이 단군을 자꾸 신화의 인물이라하므로 초대 단군의 일대기를 간략히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B.C. 2370 신묘 5월 2일 인시(寅時)에 탄생

B.C. 2357(14세) 웅씨국(熊氏國)의 비왕(裨王)에 추대

재위 24년, 이 때 요임금 등극

B.C. 2333(38세) 무진 10월 3일

九桓을 통일하고 天帝에 卽位, 요 25년

B.C. 2285(86세) 대홍수 범람

B.C. 2283(88세) 운사(雲師) 배달신에게 명하여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음

B.C. 2280(91才) 마리산에 오르시어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드림

B.C. 2267(104才) 도산회의를 소집하고 부루 태자를 보내 禹에게

五行治水之法을 전해 줌

B.C. 2241(130才) 3월 15일 붕어하심

비서갑(지금의 하얼빈) 하백의 따님(낙빈)을 맞아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의 4子를 두셨다.

동이(東夷)와 요순(堯舜)에 대한 고찰(考察)

'동이(東夷)' 또는 '구이(九夷)'라 함은 단군이 직접 관할하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의 영토가 아니라 중국 지나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절강 등지에 진출한 조선인의 이주 집단이다.

이들 지역은 이미 치우천황에 의해 회척(恢拓)되어 낭야를 연합 수도로 삼은 조선의 분국(分國)이었다. 이 낭야 분국은 조선이 감우소(監虞所)를 두어 다스렸다.

* 세상에서 우순(虞舜)을 대효(大孝)라 일러 오나 순은 천하의 대불효니라. 그 부친 고수의 악명이 반만 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요. 세상에서 요순지치(堯舜至治)를 일러 왔으나, 9년 홍수는 곧 창생의 눈물로 일어났나니 요(堯)는 천하를 무력으로 쳐서 얻었으므로 9년 홍수가 일어나 백성들을 다 유랑하게 하였느니라.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환부역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堯)의 아들 '단주가 불초(不肖)하였다' 는 말이 반만 년이나 전해 내려오니 만고의 원한 가운데 단주(丹朱)의 원한이 가장 크니라. 정말로 단주가 불초하였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단주를 '계명(啓明)하다' 고 천거하였겠느냐? 만족(蠻族)과 이족(夷族)의 오랑캐 칭호를 폐하자는 주장이 어찌 말이 많고 남과 다투기를 좋아하는 것이겠느냐? 온 천하를 대동(大同)세계로 만들자는 주장이 어찌 시끄럽고 싸우기 좋아한다는 것이겠느냐." 하시니라. 한 성도가 상제님께 여쭈기를 "우(禹)가 단주의 허물을 들어 말하기를 '밤낮 쉬지 않고 강마다 배를 띄우고, 벗들과 떼를 지어 집 안에서 마시며 세상을 없애려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단주가 밤낮없이 쉬지 않았다는 것은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며 부지런하였다 함' 이요, 강마다 배를 띄웠다는 것은 '대동세계를 만들자는 것' 이며, 벗들과 떼지어 집 안에서 마셨다 함은 '사람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는 말이요, 세상을 없애려 하였다 하는 것은 '서로 주장하는 도(道)가 같지 아니하였다' 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이어 말씀하시기를 "요순시대에 단주가 세상을 다스렸다면 시골 구석구석까지 바른 다스림과 교화가 두루 미치고 오랑캐의 이름도 없어지며, 만리가 지척같이 되어 천하가 한집안이 되었을 것이니, 요와 순의 도는 좁은 것이니라. 단주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깊이 한을 품어 순(舜)이 창오(蒼梧)에서 죽고 두 왕비가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는 참상이 일어났나니, 이로부터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원한이 쌓여서 마침내 큰 화를 빚어 내어 세상을 진멸할 지경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먼저 단주의 깊은 원한을 풀어 주어야 그 뒤로 쌓여 내려온 만고의 원한이 다 매듭 풀리듯 하느니라. 다가오는 선경세계에서는 단주가 세운(世運)을 통할(統轄)하게 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4:24)

단군왕검이 당요와 병세(竝世)하였는데 요덕(堯德)이 쇠하여 쟁지(爭地 : 땅의 분쟁)가 그치지 않자 천왕(天王)이 우순에게 명해 동이(東夷) 지역을 떼어 주어서 다스리게 하고,28)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시켜 당요(唐堯)를 공벌(共伐)하고자 하였다. 이 때 요(堯)는 힘이 달려 순(舜)에 의해 목숨을 보존하고 나라를 양위하게 되었다.

이 때 순은 요를 가두고(산동성 견성현), 요의 아들 단주를 막아서 부자가 서로 볼 수 없게 하였다.29) {맹자(孟子)}에도 '순(舜)이 남면이립(南面而立)하고 요솔제후(堯率諸侯)하야 북면이조(北面而朝)하였음'을 묻는 질문에 맹자(孟子)가 이를 '제동야인지어(齊東野人之語)'라고 부정했지만, 오히려 '요가 늙어서 순에게 선양했다' 하는 것이 궤변이다. 이 뒤에 감우소(監虞所)를 산동성 낭야성에 두고 '이결구려(以決九黎 : 九夷) 분정(分政 : 分朝) 지의(之議)'했는데 {서전}에 언급된 동순망질사근동후(東巡望秩肆覲東后)30)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삼한의 중심지인 진한(眞韓)의 수도는 지금의 하얼빈으로 단군이 직접 다스렸고, 마한(馬韓)은 평양, 번한(番韓)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이다. 마한의 초대 부단군은 웅백다(熊伯多)로 이후 맹남(孟男)까지 35대가 계승하였고, 번한의 초대 부단군은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용맹과 지혜로 소문난 치두남이었고 이후 기준(箕準)까지 74대가 계승하였다.

진한의 수도도 그 후 2번의 이동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송화강 아사달 시대 (현 하얼빈)

: 초대 단군왕검 - 21대 소태(蘇台) [B.C. 2333-1286, 1048년간)

② 백악산 아사달 시대 (현 農安, 長春)

: 22대 색불루(索弗婁) - 43대 물리(勿理) [B.C. 1285-426, 860년간]

③ 장당경 아사달 시대 (현 요령성 개원)

: 44대 구물(丘勿) - 47대 고열가(古列加) [B.C. 425-238, 188년간]

이 내용은 문헌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는데,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향수(享壽) 1048년'은 진한의 송화강 아사달 시대만을 언급한 것이며, {삼국유사} [고기(古記)]의 '수(壽) 1908년'은 송화강 아사달시대 1048년과 백악산 아사달시대 860년을 합한 연수이다. 요약컨대, 단군조선 시대는 47대 동안 총 2,096년간31) 지속되었다.

그리고 3세 단군 가륵 때,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이 정음(正音) 38자(字)를 지었는데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하였다. 이것은 후대 세종대왕 때 한글의 모체가 되었다.

지금의 국어학자들은 훈민정음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창제라고 주장하나, 정인지 서문에서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 발음기관의 형상을 본떴으되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함)'이라 했고, 또 최만리(崔萬理)의 소(疏)에서도 '자형(字形)은 방고지전(倣古之篆)이나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진반어고(盡反於古)라 : 글자의 형태는 옛 전자를 모방했지만 音을 기록할 때 글자를 합하는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라 하여 옛 전자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가륵 단군 6년32)에 열양(列陽 : 산동성) 욕살33)인 색정(索靖)을 약수(弱水 : 감숙성 장액현 서북)로 귀양보냈는데 이 사람이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 4세 단군 오사구 원년에는 봉황제오사달(封皇弟烏斯達)하야 위몽고리한(爲蒙古里汗)으로 삼았다. 47대 단군 고열가(古列加)는 위(位)를 버리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여 신선이 되었다.34) 그 후 해모수에게 나라를 넘길 때까지 오가(五加)가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였다.35)

초대부터 21대까지는 '삼한(三韓)'으로 통칭했고, 22대부터 43대까지는 '삼조선(三朝鮮)'으로 주로 불렀으며, 44대 구물(丘勿) 단군은 '대부여(大夫餘)'라고 국호를 바꾸었는데 이를 원시부여라 한다.

4. 북부여(北夫餘)

북부여는 B.C. 239년(임술년) 4월 8일에 해모수 단군이 웅심산(熊心山 : 지금의 길림성 서란현)에서 즉위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모수 단군 재위 45년36)에 노관의 부하 위만이 망명을 구해 왔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병석에 누워 있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번조선(番朝鮮)의 왕 기준(箕準)이 속아서 위만에게 박사(博士)를 배수하고 상하운장(上下雲障)37)을 떼어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에 해모수 단군께서는 붕어하셨다.

2세 단군 모수리 원년38)에 번조선 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입해이불환(入海而不還)하였다.

기준을 몰아낸 위만39)은 도읍을 험독(險瀆)40)으로 옮겼으며, 그의 손자 우거 시대에 한무제의 침입을 받았을 때, 토착인인 조선 장 상에 의해서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한사군이 아닌 조선 장상의 自治四國이 설립되었다.

졸본(卒本 : 연해주의 유분하지역)에서 즉위41)한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후에 해부루를 동부여후로 강등시켜 가섭원(迦葉原)으로 붸아내고서 북부여의 5대 단군으로 대통을 이었다.42) 6대 단군 고무서는 아들이 없어 딸 소서노(召西努)를 고주몽에게 시집보내고 사위인 고주몽이 B.C. 58년에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대통을 계승하고 연호를 다물(多勿)이라 하였다.

준왕이 입해이불환(入海而不還)하자 제가지중(諸加之衆)이 한반도의 남쪽으로 대거 이주하여 익산에 도읍을 정한 마한43)이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무강왕(武康王) 탁(卓)이 박사 악용건(樂龍建)으로 하여금 진한(辰韓 : 都慶州)을 다스리게 하고44), 좌대부 진완(秦玩)으로 하여금 번한(番韓 : 都金海)을 다스리게 하니45), 이것이 '중삼한연맹국(中三韓聯盟國)'이다.

진한은 B.C. 193년에서 B.C. 57년까지 137년간 지속되었고, 번한은 B.C. 193년에서 B.C. 39년까지 155년간 지속되었다.

이후 백제(B.C. 37-A.D. 660), 신라(B.C. 57-A.D. 935), 가야(A.D. 42-532)까지 '후삼한 시대'가 펼쳐졌으며, 고구려까지 합하여 '사국(四國)시대'가 전개 되었다.

최숭(崔崇)이 B.C. 195년 낙랑산(樂浪山)으로부터 진보(珍寶)를 싣고 바다를 건너 평양에 도읍한 최씨의 낙랑국은, A.D. 32년 최리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황자(皇子) 호동이, 최리의 딸로 하여금 자명고(自鳴鼓)를 찢게 하고 낙랑을 병합(竝合)함으로써 멸망되었다.

동명부여(졸본부여, B.C.108 - B.C.58)의 속국이었던 동부여(B.C.86 - A.D.22)는 북갈사(A.D.22 - A.D.68)로 계승되었다. 이후 북갈사는, 고구려에 투항후 우태(于台)의 벼슬을 받아 훈춘(王軍春)을 식읍(食邑)으로 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해졌는데 이를 남갈사(南曷思)라 한다. 동부여가 항복하자 고구려가 왕의 종제(從弟)를 연나부에 봉해 주어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A.D. 22-494)가 되었는데, A.D. 494년 문자열제 때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5. 삼국(三國) 시대

1). 고구려(高句麗)

B.C. 58년 고주몽 성제46)가 북부여의 6대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사위로서 북부여의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다물(多勿)이라 건원(建元)하였다.

B.C. 37년, 고주몽 성제가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평락(平樂)'이라 하였다. B.C. 26년에 졸본에서 눌견(訥見)47)으로 이도(移都)했다가 A.D. 3년 국내성으로 이도(移都)했고, A.D. 427년 평양으로 천도했다.

고주몽 성제가 동부여로부터 도망할 때 자칭(自稱) 천제자天子)48)라 하시고, 오이(烏伊), 마리(摩離), 섬보(陜父)의 삼인(三人)과 함께 엄리대수(淹利大水)49)를 건너서 모둔곡(毛屯谷)50)에 이르러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의 삼현(三賢)을 만나 모두 7인이 졸본(유분하)으로 들어가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5토(土)가 7화(火)51)로써 작용(作用)하는 이치이다.

원광법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사친이효(事親以孝), 사군이충(事君以忠),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화랑오계(花郞五戒)는 사실은 고주몽이 지은 다물옥계(多勿五戒 : 삼한오계)이다.

고주몽성제는 요동성에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지어 제천(祭天)하였으며, 대통일(大統一)시대를 열었던 호태열제(好太烈帝)도 말을 타고 마리산에 이르러 등참성단(登塹城壇)하야 친제삼신(親祭三神)하였으며, 속리산(俗離山)에서도 제천(祭天)하였다.

그 후,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도교의 수입으로 신교의 정신이 약해졌기 때문이다.52)

2) 백제(百濟)

소서노(召西努)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대방고지(帶方故地)53)에서 나라를 세움으로써 백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B.C. 19년 소서노가 죽자 비류가 왕이 되었으며, 온조는 마려(馬麗), 오간(烏干) 등의 신하와 함께 배를 타고 와 B.C. 18년에 하남(河南)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11대 비류왕때 하북성의 요서(遼西), 진평(晋平) 등을 경략하였고, 양자강 하류의 좌우양안(左右兩岸)을 점령하여 250여 년 간 통치하였다.54)

또한 백제는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수세기 동안 일본 민족을 지배하였었다.

3) 신라(新羅)

신라의 삼국통일은 '망국통일', '반벽통일'이었다. 신라 시대에 이미 사대주의와 외래종교에 의해 민족의 정신이 해체기로 접어들었으며, 대진국과 남북조의 시대를 열었다.

6. 대진국(大震國)

환환단(桓桓檀) 고구려55)의 정통을 이어 A.D. 668년 세조진국열황제대중상(世祖振國烈皇帝大仲象)이 동모산에서 등극하여 926년 거란의 침략에 망할 때까지 15세 259년 동안 지속되었다.

5경(京) 60주(州) 1군(一郡) 36현(縣)의 제도가 있었고, 원폭(圓幅)이 9,000여 리로 당·왜·신라에서 조공을 받았으며 천하(天下)에서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했고 발해삼인당일호(渤海三人當一虎)라는 말까지 있었다.

3대 광종(光宗 : 묘호) 무황제(武皇帝 : 시호)56) 때 서압록하지상(西鴨綠河之上)에서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께 천제(天祭)를 올렸었다.

738년, 4대 세종광성문황제(世宗光聖文皇帝)가 입태학(立太學)하야 교이천경신고(敎以天經神誥)하며 강이환단고사(講以桓檀古史)하였으며, 상자국도(上自國都)로 하지주현(下至州縣)에 이르기까지 개유학(皆有學)하여 구서오계(九誓五戒)를 조석송습(朝夕誦習)하였다.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대해 2대 태조성무고황제(太祖聖武高皇帝 :대조영)는 {삼일신고(三一神誥)어찬(御贊)}을 지었고, {단기고사}를 지은 태조(太祖)의 친제(親弟) 대야발(大野勃)은 {삼일신고(三一神誥) 서문(序文)}을 지었고, 태조(太祖)의 처남(妻男)인 문적원감임아상(文籍院監任雅相)은 {삼일신고(三一神誥) 주(注)}를 지었고, 세종광성문황제(世宗光聖文皇帝 : 대흠무)는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를 지었기에, 환환단 고구려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는 대진국이지 한반도의 반쪽만 차지하고 외래 종교에 빠져 주체성을 상실한 통일신라가 결코 아니다.

그 후 대진국은 자연재해로 나라가 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고려(高麗)

고구려의 정통 국시(國是)를 이었다고 자칭한 고려는, 오히려,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정통을 단절했으며, 구성(九城)회복의 공(功)이 있는 윤관, 오연총이 사대주의 유림당에 의해 붸겨나게 했으며, 건원칭제(建元稱帝)를 주장하던 국풍당(國風堂)이 사대주의 유교인에 의해 타도되게 했으며, 정명론자(征明論者) 최영 장군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주자학자(朱子學者)에 의해 몰락당하게 하는 등의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원은 북쪽으로 쫓겨가 버리고, 명은 새로이 나라를 세운 직후라, 아직 만주를 장악할 만한 실력이 없었던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우리 민족이 만주를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명나라가 강계에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압록강 일대를 탈취하려 했을 때 최영이 만주 수복군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겁을 먹고 물러가 버렸다. 그야말로 만주 수복의 더 없는 상서로운 징조였었다.

심지어 1371년 당시 만주의 중심지 요양(遼陽)의 평장사(平章事)였던 유익(劉益), 왕우승(王右承) 등이 고려에 내부(內附)할 것을 자청했었다. 다시 말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망친 것이 바로 사대주의자들이다.

8. 조선(朝鮮)

사대(事大)에 빠져 완전히 주체성(主體性)을 상실했던 시대이다.

9. 대한민국 임시정부

* 시속에 중국을 대국이라 이르나 조선이 오랫동안 중국을 섬긴 것이 은혜가 되어 소중화가 장차 대중화로 바뀌어 대국의 칭호가 조선으로 옮겨 오게 되리니 그런 언습을 버릴지어다(道典 5:90:3-4)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임시정부가 건립되어 '대한민국'이라 국호하고, 한민족의 국통을 계승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사상은 대진국이 망한 뒤 그 여파가 요(遼), 금(金), 원(元), 청(淸)으로 퍼져나가 그들의 대제국 건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Ⅴ. 삼성조 이후 대진국까지 국교였으며 유불선의 모체 종교인 신교

1. 상제님에 대한 인식

* 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은 곧 일신이요 우주의 조화성신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오니라. 동방의 한국은 본래 신교를 닦아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의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니라. (道典 1:1)

신교(神敎)란 무엇인가? 이신설교(以神說敎)의 준말이다. '이신설교(以神說敎)'란 '신으로써 모든 인간 교화의 중심을 삼는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은 태극의 원리에 의해 인간계와 신의 세계가 병립함을 알았고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신이 들어서 되는 것임을 올바르게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 신(神) 중에서도 인간과 신을 통치하는 최고의 자리에 계신 분을 '하느님'이라 불렀고, 한문으로는 '상제(上帝)'로 표기하였다. 이 상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아(我)에 대한 인식과 민족에 대한 인식과 국가에 대한 인식 및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인식이 출발하게 된다.

{환단고기} 등의 내용을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상제님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였는가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제님을 인류 기원의 뿌리, 역사의 근원으로 보았다.57)

즉 모든 사람은 삼신상제님의 후손으로 인식하였다.

둘째, 창조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58)
셋째, 교화(敎化)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59)
넷째, 통치(統治)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60)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과 더욱 밀착되어

다섯째, 생사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61)
여섯째, 화복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62)
일곱째, 진리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63)

이 뿐만아니라 우리 민족은 상제님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의 [삼신설]에 의하면 "상계주신(上界主神)은 기호왈(其號曰) 천일(天一)이시니 주조화(主造化)하사 유절대지고지권능(有絶對至高之權能)하시며, 무형이형(無形而形)하사 사만물(使萬物)로 각통기성(各通其性)하시니 시위청진대지체야(是爲淸眞大之體也)시며, 하계주신(下界主神)은 기호왈(其號曰) 지일(地一)이시니 주교화(主敎化)하사 유지선유일지법력(有至善唯一之法力)하시며, 무위이작(無爲而作)하사 사만물(使萬物)로 각지기명(各知其命)하시니 시위선성대지체야(是爲善聖大之體也)시며, 중계주신(中界主神)은 기호왈(其號曰) 태일(太一)이시니 주치화(主治化)하사 유최고무상지덕량(有最高無上之德量)하시며, 무언이화(無言而化)하사 사만물(使萬物)로 각보기정(各保其精)하시니 시위미능대지체야(是爲美能大之體也)시니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은 환국시대부터 우주의 주재자인 하느님을 신앙하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을 한문으로는 '상제(上帝)'라 하는데, 여기다 '삼신(三神)'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삼신상제님'이라 호칭한 이유는 위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세 분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뜻은 결코 아니다. {태백일사}의 [삼신오제 본기]에서도 "자상계(自上界)로 각유삼신(却有三神)하시니 즉일상제(卽一上帝)시오. 주체즉위일신(主體則爲一神)이시나 비각유신야(非各有神也)시며 작용즉삼신야(作用則三神也)시니라"라고 하였으며, 또 "도지대원(道之大原)이 출어삼신야(出於三神也)라" 하였다.

삼신이란 하느님이 3가지 역할로, 만물을 창조해 내는 아버지의 역할(父)인 조화신(造化神), 그리고 창조해 낸 삼라만상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師)인 교화신(敎化神), 그리고 만물이 각자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다스리는 군장의 역할(君)인 치화신(治化神)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는 바로 우주의 창조법도(Being, 존재의 원리)와 구원의 법도(Becoming, 변화의 원리)가 모두 3수의 원리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執一含三 會三歸一)

예를 들어 우주가 하나이지만 현실적으로 천지인(天地人)으로 존재하며, 사람의 한 몸뚱아리도 머리·몸통·다리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원자의 세계도 양자·전자·중성자의 셋으로 나뉜다. 이 밖에 빛과 색의 3원색의 원리, 입법·행정·사법의 정부 조직원리, 기체·액체·고체의 물의 3단 변화 등이 있다. 현재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 우리의 고대 사회가 삼신을 신앙했고, 삼신은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이라 했는데 너무도 잘못된 설명이다.

2. 유불선의 어머니 종교인 신교(神敎)

일반적으로 '종삼횡사(縱三橫四)'라 하여 시간의 원리는 사(四)를 마디로 하는데, 어째 구원의 원리는 삼(三)으로 변화한다고 하는가? 이것은 생·장·염·장(삼현일장 : 三顯一藏) 중 근본이 되는 장(藏)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문화의 최고 원리인 종교도 이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환인, 환웅, 단군,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까지 8,000년 이상 우리 민족의 국교였던 신교(神敎)는 유·불·선으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신교를 제1의 종교 또는 모체 종교라 하고, 유·불·선을 제2의 종교라 한다. 유·불·선의 사상이 포괄된 모체 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삼국사기}의 신라 24대 진흥왕 37년조의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 서문}64)에 보인다.

유교에서는 우주의 본원인 '무극', 창조의 본체인 '태극', 그리고 무극과 태극을 이어주며 현실을 과불급이 없도록 조화시키며 작용의 중심점이 되는 중의 본체를 '황극'이라 하는데, 이들은 각각 다르면서도 하나의 원리 속에 내재해 있으며, 불교에서도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의 삼신불이 있으며, 도교에서도 상청(上淸), 태청(太淸), 옥청(玉淸)의 삼청(三淸)65)사상이 있다.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하여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일체(一體) 원리가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에도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 유지신인 비슈느, 파괴신인 시바가 있지만 각각 다른 신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권화(權化)로서 현현한다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원리가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볼 때 유·불·선·기독교의 원리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제2의 종교인 유·불·선은 증산도로 통일되어 인류 문명의 결실을 이루게 된다. 집일합삼(執一合三),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이다.


증산도는 신교(神敎)의 이상을 실현하고 유불선의 예언을 완성하는 제3의 초종교이다. 신교의 정통맥을 이어 4대 고등종교의 이념을 완성하는 무극대도인 것이다. 삼신상제(三神上帝)는 후에 언어가 분리되어 삼신은 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상제는 도가로 흘러 들어가 본질이 왜곡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신의 본래 의미는 상제님을 지칭하지만 후세에 삼신상제님의 三化의 기능을 지상에서 대행한 삼성조(三聖祖)를 일컬을 때도 있고, 우주의 조화삼신을 대행하여 생명을 태워주는 조상신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다.

* 상제님께서 4월 13일에 하운동 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형렬이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에 산기가 있구나." 하시니라. 형렬이 여쭈기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삼신이 말을 몰고 너의 집에 들어가므로 알았노라." 하시고... (道典 2:19:1-3)

이 말씀에 나타난 삼신은 바로 그 집안의 조상을 가르킨다.

3. 신교는 상제님을 근원으로한 다신(多神)의 체계


위의 내용으로 보건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은 음양(陰陽)의 원리를, 오제(五帝), 오령(五靈)은 오행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오령의 태수(太水)·태화(太火)·태목(太木) 등에서 태극(太極)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음양오행은 신교의 우주관을 설명하는 이론인 것이며 우주의 근본체계를 설명하는 이론인 것이다. 또한 신교는 광의적으로 Animism66), Shamanism67), 산천숭배68), 조상숭배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4. 신교는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한 절대자 신앙이다.

* 사람이 살다가 죽게 되면 삼신도 따라 떠나니라. 밥을 해 놓고 또 적삼을 흔들어 초혼하나니 이는 다 부당하니라. 삼신에게 고함이 옳으니라. (道典 2:103:1-2)

초대 단군 할아버지의 팔조법(八條敎)의 제3조에 "이생유친(爾生惟親)이요 친강자천(親降自天)이니 유경이친(惟敬爾親)이라야 내극경천(乃克敬天)이라."하여 부모와 조상을 섬기지 못하는 자는 하느님을 섬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부여의 구서(九誓)에서도 효를 처음에 언급하고 있고, 삼한통속(三韓通俗)의 오계(五戒 : 多勿五戒)에서도 효가 처음에 자리하고 있다.

5. 신교는 종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의 근원이다

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참전계경(參佺戒經)의 삼화경(三化經) 및 태극(太極), 음양(陰陽), 오행(五行), 팔괘(八卦), 하도(河圖),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등은 인류 철학의 모태가 되며, 삼신상제님에 대한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부터 음악, 미술, 체육 등의 문화가 기원하였다.

6. 신교는 상제님의 조화원리를 통해 인간의 생성원리를 밝혀주며 수행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69)

{단군세기서(檀君世紀序)}에 "왈(曰) 부삼신일체지도(夫三神一體之道)는 재대원일지의(在大圓一之義)하니, 조화지신(造化之神)은 강위아성(降爲我性)하고, 교화지신(敎化之神)은 강위아명(降爲我命)하고, 치화지신(治化之神)은 강위아정(降爲我精)하나니라." 하였으며,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인물이 동수삼진(同受三眞 : 性命精)이나 유중(惟衆)은 미지(迷地 : 처지 즉 환경에 미혹)하야, 삼망(三妄 : 心氣身)이 착근(着根)하고 진망(眞妄)이 대(對)하야 작삼도(作三途)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통성(通性), 지명(知命), 보정(保精)의 방법과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수행법을 제시하여 인간완성(덕:德, 혜:慧, 력:力)의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국선도(國仙道)의 장생불사의 맥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7.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성지(聖地)

* 이 세상에 조선과 같이 신명(神明)대접을 잘하는 곳이 없으므로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각기 소원을 따라 꺼릴 것 없이 받들어 대접하리니 도인(道人)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천하사(天下事)만 생각하게 되리라. (道典 2:25:5-7)

제천의식은 민족단합(民族團合)의 근원이었으며, 그 장소는 아사달(阿斯達) 또는 소도(蘇塗)라 하였다.70) 천제(天祭)의 목적은 위민기복(爲民祈福), 축신흥방(祝神興邦)이었고 제천단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의해 원구단(圓丘壇)을 쌓았으며 고인돌에도 그 사상이 들어있다.

처음에는 3월 16일과 10월 3일에 제천71)하였는데, 후에는 5월(씨뿌리고 난 뒤), 10월(추수한 뒤)에 행하였다. 이 의식은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중삼한(中三韓)의 상달제로 계승되었다. 흉노(匈奴)도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주(祭天主)로 삼았다. 초대단군 88세때 운사 배달신을 보내 참성단을 마리산에 쌓았었는데,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최고의 제천단이다.

순이 왕위에 오른 뒤 "사류우상제(肆類于上帝)하시며 인우육종(漝于六宗)하시며 망우산천(望于山川)하시며 편우군신(磈于群神)하시다." 하여 상제(上帝)이하 모든 신(神)에게 제사를 올린 것으로 보아 그도 동이족임을 알 수 있다.

올림픽도 원래는 올림프스 12신에게 제사를 드린 뒤 하는 뒷풀이 의식이었으며, 우리 민족도 천제를 올린 후에는 신단수 아래서 무술을 즐겼었다.

8. 삼신산(三神山)72)에 대하여

하루는 공사를 행하실 때 "백두산의 기운을 뽑아 제주 한라산에 옮기고, 금강산의 기운을 뽑아 영암 월출산으로 옮긴다." 하시니 한 성도가 그 이유를 여쭈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백두산에 천지(天池)가 있고 한라산에도 못이 있으며, 금강산이 일만 이천 봉이요 월출산도 일만 이천의 기운이 있음이로다."하시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이 동과(冬瓜)의 형체인데 뿌리에 수기(水氣)가 고갈되어 이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백두산이 근본처이므로 그곳에 가서 수기를 돌리고 오리라."하시니라. (중략) 이 뒤에 백두산에서 돌아오시어 말씀하시기를 "이제 수기를 돌려 회생케 하였노라."하시니라.(道典4:53:1-4,22)

73)

즉 백두산으로 바뀌었다.

금나라의 6대 임금 장종(章宗)은 백두산 산신에게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란 존호(尊號)까지 올렸는데, 예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삼신상제님께서 백두산에 내려오시어 삼계를 선화하신다고 믿어왔다.

* 너의 동토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물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道典 2:73:6)

혹자가 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로 각각 금강산, 지리산, , 한라산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74)

백두산은 우리국토의 진산(鎭山)이며, 역사의 근원, 신앙의 근원이 되는 산이다. 백두산에 근원지를 두고 있는 강도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등 3개의 강으로 나뉜다.

{위서}는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 표범, 곰, 이리 등이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고 사람들도 산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지 않으며, 산에 오르는 자는 모두 소변담는 그릇을 가지고 갔으며, 백두산에는 흰 사슴, 흰 꿩, 흰 매 등이 산다."라고 전한다. {괄지지(括地志)}는 "백두산의 새와 짐승과 초목은 모두 희다."고 말하고 있다.

Ⅵ. 증산도 五大理念의 역사성

1. 원시반본(原始返本)

우리 민족은 근본을 가장 잘 확립한 민족이다.

우주의 근원인 상제님에 대한 믿음, 부모님에 대한 효, 조상님에 대한 추원보본(追遠報本), 고향에 대한 애착, 국가에 대한 충성, 군사부일체(君師父一切) 사상 등은 근본을 잊지 아니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잘 나타내 준다.

추석이나 설날 때 고향으로 향하는 대이동과 조상님에 대한 차례를 올리는 의식 등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 깊게 뿌리내린 원시반본의 발로이다. 상제님에 대한 신앙 뿐만 아니라 천지일월(天地日月)에 대한 신앙도 뿌리 신앙의 발로이다.

고구려의 연호인 다물(多勿), 고려의 북진정책(北進政策) 등에서도 원시반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2. 해원(解寃)

환국(桓國)의 환인(桓仁)께서 거기병이해기원(去其病而解其寃)하셨고,75) 10세 단군 노을(魯乙)은, 관문외(官門外)에 설신원목(說伸寃木)하야 이청민정(以聽民情)하니 중외대열(中外大悅)하셨고,76) 45세 단군 여루(余婁)는 하대한(夏大旱)하니 여유원옥(慮有寃獄)하야 대사(大赦)하고 친행기우(親幸祈雨)하셨고,77) 조선 태종은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78)

3. 보은(報恩)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보본(敬祖報本), 효(孝)와 충(忠)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환웅(桓雄), 단군(檀君)에 대한 숭보지례(崇報之禮)가 영세불체(永世不替)하였다.79)

4. 상생(相生)

향약 중의 '환난상휼(患難相恤)'과 전통적인 '품앗이', '두레', 길흉사간(吉凶事間)의 '상부상조' 등이 바로 우리 민족 대대로의 상생의 전통이다. 총 963회의 외침을 받았으나 우리 민족이 먼저 외국을 침입한 경우는 거의 없는 점도 우리 민족의 남 잘 되게 해 주고자 하는 상생의 심성의 발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살생유법(殺生有法)하니 상자국왕(上自國王)으로 하지서민(下至庶民)히 수자택시여물이행지(須自擇時與物而行之)하야 일불람살(一不濫殺)하니 자고부여(自古夫餘)는 유마불승(有馬不乘)하며 금살방생자(禁殺放生者) 역기의야(亦其義也)라. 고불살숙(故不殺宿)하고 불살란(不殺卵)은 시택시야(是擇時也)며 불살유(不殺幼)하며 불살익(不殺益)은 시택물야(是擇物也)니 중물지의(重物之義)가 가위지의(可謂至矣)니라. {太白逸史}

5. 개벽(開闢)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개벽인데, 환웅천황께서 수의천하(數意天下)하사 탐구인세(探求人世)한 것과 백두산에 천강하여 새 세상을 연 것이 개벽의 전형이다.

동학혁명때 수십만 명의 동학군이 죽창을 들고 정부군과 일본군에게 대항한 것도 그 밑바탕에 개벽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Ⅶ. 한민족의 3대이념의 증산도적 고찰

우리 민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상과 가치를 추구해 왔는가? 우리는 누구든지 가끔 나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하곤 한다.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음으로써 보다 더 뜻있고 가치있는 삶을 영위하려는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보다 나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과거를 알아야만 한다.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부질없듯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민족사의 의미와 교훈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를 결정한 과거를 안다는 것은 오늘의 나를 알기 위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나를 알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이건 민족과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이건 누구나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사적 존재라는 것은 단지 과거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을 살아갈 존재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연결된 역사적 연속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모든 개인에게 목표가 있듯이 더 큰 생명체인 민족과 국가도 목표와 이상이 있다. 우리 민족이 추구해 온 이상, 현실적으로 지향하는 이념과 목표,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옛부터 있어 왔는데 그것은 바로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재세이화·광명이세이라 할 수 있다.

이 3대이념을 바탕으로 대원일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이상이었다. 특히 급속한 사회변화와 다양한 가치관과 복잡한 국제 이해관계 속의 오늘날과 같은 시점에서는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인간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널리 모든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인데 그 이익이라는 것이 더 이상 넓고 더 이상 클 수 없는 최대한의 이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전세계 인류의 영원한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1조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채택한 동기에 대해 문교대관은 "홍익인간은 우리나라 건국 이념이기는 하나 결코 편협하고 고루한 민족주의 이념의 표현이 아니라 인류공영이라는 뜻으로 민주주의 기본정신과 완전히 부합하는 이념이다. 홍익인간은 우리 민족정신의 정수이며 일면 기독교의 박애정신, 유교의 인(仁), 그리고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되는 전 인류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홍익인간은 환웅천황이 신시(神市)를 여실 때 건국이념으로 선포한 것에서 유래하여 인본주의,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협동,80) 사랑,81) 평화, 행복, 창조82) 등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니라. (道典 2:13:3)

2. 재세이화(在世理化)

재세이화의 문구적 뜻은 세상살이 다스리고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이상은 죽어서 좋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간 세상에 하늘나라를 닮은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인간 세상을 하느님의 섭리로서 되게하고 만드는 것이라 번역할 수 있다. 홍익인간과 마찬가지로 환웅개천시 선포된 이 이념은 지상에 하느님 나라, 즉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83)

신의 이상을 건설한다는 의미에서 배달국시대에 환웅이 백두산에 천강하여 신시(神市)를 베풀고, 신의 작용원리인 삼신(三神)과 보필자 오제(五帝)의 원리에 따라 삼백오가(三伯五加)의 제도들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삼한관경제와 오가제(五加制)를 실시했으며, 북부여시대에는 B.C. 220년 천(天)에 응(應)하는 천안궁(天安宮) 366간(間)을 지었고, 오가제84)를 실시하였다.85)

우리 민족은 문화적 정신적 주체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외래문화를 흡수하고 소화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외래문화에 대한 이러한 개방성은 이질 문화에 대한 흡수, 조화, 종합, 적응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온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문화 속에는 우리 고유문화의 편린이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후에는 불교적 이상국가86)를 세우려 하였다. 고려에 와서도 불교적 이상국가 건설의 의지는 강하였으나 정권과 결탁하여 부패하자, 이조에 와서 개혁의 세력에 의해 유교적 이상국가관이87) 대두하였고, 이조 말기에 유교의 폐해가 나타나자 다시 기독교 등이 유입되면서 자본주의가 들어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속에서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으나 모순만을 내포한 채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민족의 사상을 집대성한 증산도가 기존 종교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든 폐해를 개혁하여 하늘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하니 역사의 대세인 것이다.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얼마나 우리 민족이 희구하였는지는 기미 독립선언서88)에도 잘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민족 정신사의 표출이며 이상사회를 노래한 것이다.

이제 우주의 봄철 조화신의 시대와 여름철 교화신의 시대가 지나고 우주의 가을철 치화신의 시대가 도래한 이 시점에서 후천개벽 후의 지상선경 건설로서 재세이화가 드디어 완성될 것이다.

3. 광명개천(光明開天)

광명개천이란 말은 광명으로 세상을 연다는 뜻이다.(遣往理之曰開天)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이념과 光明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민족은 三神上帝님을 신앙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만물을 살리고 기르는 작용은 日月의 광명이 대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古人들은 광명의 실체인 해(太陽)를 숭상하였으며 더 나아가 광명을 삼신상제님의 實德이라고 인정하여 광명을 숭상하였다. 즉 삼신숭배와 광명숭배를 동일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朝代記}에 "曰古俗이 崇尙光明하야 以日爲神하고 以天爲祖하야 萬方之民이 信之不相疑하고 朝夕敬拜하야 以爲恒式 하니라." 하였고, {환국본기}에는 "太陽者는 光明之所會요 三神之攸居시니 人得光以 作하야 而無爲自化라. 朝則齊登東山하야 拜日始生하고 夕則齊趨西川하야 拜月始生한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백색의 옷을 즐겨 입었던 것은 태양의 총화색이 백색이기 때문이며, 백은 또한 하늘 天宮의 상징색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또 만물의 씨앗이 해의 빛과 열을 받아 싹이 트는 것을 보고, 이 씨앗을 해의 分身으로 여기게 되어 우리 민족 특유의 光明說話와 卵生說話가 나오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고, 石脫解가 알에서 나왔고, 김수로 왕도 알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고주몽은 承日光而生이라 하였다. {삼신오제본기}에는 "表訓天詞에 云하되 大始에 上下四方이 曾未見暗黑하고 古往今來에 只一光明矣러라." 하여 우주의 본래 면목이 광명세계라고 하여 어둠으로부터 시작하는 기독교의 우주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서양이 곧 명부(冥府)라. 사람의 본성이 원래 어두운 곳을 등지고 밝은 곳을 향하나니 이것이 곧 배서향동(背西向東)이라. 만일 서양 사람을 믿는 자는 이롭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道典 2:104:1-3)

이러한 철학의 바탕 위에서 인간은 至善修行하야 開心光明을 추구하였고, 사회를 광명케 하고 민족과 국가를 광명케 하여 광명한 세상을 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다. 다시 말해 삼신상제님의 實德의 세계(大圓一:크고 둥굴고 절대적 하나인 세계)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이상이었다.

{신시본기}에도 "庶子之部에 有大人桓雄者하야 探聽輿情하시고 期欲天降하야 開一光明世界於地上하시니라." 하여 광명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목표임이 밝혀져 있다.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우리의 國號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9,000여 년89) 동안 9번의 國統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9개의 국호가 다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국'은 '광명의 나라', '배달국'은 '광명이 비친 땅', '조선'은 '아침의 해가 빛나는 나라', '부여'는 '아침에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는 나라', '고구려'는 高大光麗 즉 '높고 빛나는 나라', '大震'은 동방 震 자를 썼으니 역시 '광명이 처음으로 올라오는 나라', '발해'도 '광명의 바다' 또는 '불의 해'라는 뜻이니 역시 광명의 뜻이 담겨 있다. '고려', '조선'을 이어 大韓民國의 '韓'도 광명을 이어 받아 마음 속의 어둠의 찌꺼기를 다 제거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의 어둠과 악까지를 모두 제거하여 대광명의 지상선경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으니, 光明開天, 光明理世는 우리 민족의 지고한 사명이다.

또 인명과 지명에 쓰인 解, 蓋, 箕, 高, 濊90), 發, 桓, 檀 등도 모두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造化神의 시대인 우주의 봄, 교화신의 시대인 우주의 여름이 지나고, 治化神의 시대인 우주의 가을을 여시기 위해 상제님께서 강림하시어 천지공사를 보셨고, 自天光明의 桓의 시대와 自地光明의 檀의 시대가 지나고 인간의 광명인 韓의 시대를 앞에 두고 있다. 또 '9'91)개의 국호가 지나가고, '10'의 대통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스스로의 광명을 열어 세상을 개벽하여 상제님께서 명하신 성사재인의 길을 걸어 통일 시대를 열 것인가? 일꾼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Ⅷ. 한사상으로 본 민족사상과 후천개벽관

우리 민족은 한민족이며, 국호는 대한민국이며 글은 한글이며 음식은 한식이며 집은 한옥으로 우리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에는 모두 한이란 글자가 들어간다. 김상일 교수는 한에는 '一(one), 多(many), 中(middle), 同(same), 或(about)'의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고, 一과 多 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中, 同, 或의 해석으로 한사상의 철학적 특징이 있다 하였다.

그는 또한 한사상은 서양의 二元論의 벽을 깰 수 있는 위대한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이란 단어는 '밝'과 '감'이 결합된 말로 '밝'은 '밝은 광명'을 뜻하고, '감'은 '검다'의 의미로 '어두움'을 나타내므로, '한'은 남성원리와 여성원리를 조화시키는 사상이고 이원론을 극복하여 음양을 조화시키는 사상이라 하였다.

신철균 씨는 한에는 크다(大), 동이다(東), 밝다(明, 鮮), 하나다(單一, 唯一), 통일하다(統一), 꾼 또는 뭇(大衆), 오래됨(久), 참음, 일체(一切)다, 전체다, 처음이다(始初), 한나라, 한겨례(韓民族), 희다(白), 바르다(正), 높다(高), 같다(同一), 많다(多), 하늘(天), 길다(長), 으뜸이다(元), 위다(上), 임금(王), 온전하다(全), 포용하다(包容) 등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한민족은 한을 실현시키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볼 때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많은 個體를 포용하고 문화를 통일하여 하나의 대도진리로 후천 5만년의 大圓一의 세상을 여는 이념이 곧 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Ⅸ. 민족사로 본 개벽 일꾼

* 일꾼은 일하는 자니 새 하늘 새 땅을 여신 증산 상제님의 천지대업을 개척하여 후천선경을 건설하는 자니라.(道典 8:1)

일꾼은 모든 것을 이루는 자이다. 상제님의 일꾼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들을 계승하고 있는가?

우선 개벽의 문을 열었던 문명 개척단인 神市開天의 제세핵랑군92) 3,000명이 그 뿌리이다. 그 뿌리는 단군조선시대의 女郞, 花郞, 仙郞, 國子郞, 天王郞93) 등으로 계승되었다. 우리는 또한 삼랑94)의 후예이며 고구려95)의 조의선인96)의 후예이다.

또한 신라의 화랑을 계승했으니 화랑은 신라 발흥의 원인이었을뿐 아니라, 후세에 중국 한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 조선을 支那化하려 했을 때, 이를 반항 배척하여 조선을 지켜온 자도 화랑이다.97)

이들은 삼신상제님을 섬기던 신교의 무리로서 평소에는 단체 생활을 통해 修行과 文武를 연마하여 공도를 집행하였고, 국난 시에는 선봉에 나선 국난 극복의 선구자들이었으며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수, 당의 세력을 물리친 원동력이었으며, 신라의 화랑이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는데, 이들은 또한 제세핵랑군과 삼랑의 정신을 이은 민족정신의 계승자들이었으며, 새 역사의 개창자였다.

증산도의 일꾼은 바로 이들의 전통을 이은 민족정신의 진액(津液)으로, 새 역사를 여는 개벽의 주인공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