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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일본문화의 형성은 한반도의 벼농사 문화로부터

by 바로요거 2006. 12. 14.

일본문화의 형성은 한반도의 벼농사 문화로부터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펼쳐진 동북아의 단군조선이 B.C. 239년 무너지면서 동북아는 정치적 혼돈기로 들어섰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동이한민족은 중국에서 만주와 한반도로 활동무대가 좁혀졌습니다. 이때 정치적 혼란기에 일본열도로 벼농사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일본에 형성된 문화가 야요이 문화입니다.

그후 한반도의 정치적 여건은 일본에 직접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반도에서 정치적으로 실패한 집단은 어김없이 일본에서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3세기경 히미코라는 여왕이 세운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 야마타이국이 이러한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상상을 해봅니다. 이 야마타이국은 倭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문헌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倭는 벼농사와 여성이 연관된 말입니다. 倭라는 한자를 보면 여자가 벼를 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농경은 모계중심사회의 여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배웠습니다. 농학자 입장에서 벼농사문화를 뿌리내린 것은 여성이었다는 말을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본의 농학자의 말에 의하면 2-3세기경에 철제농기구가 급격히 보급되고, 일본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때 신공황후가 철을 구하기 위해 한반도로 원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를 연구하는 어느 일본역사가는 이 한반도 원정의 연대를 약 120년 뒤로 미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와 일본의 연관성을 조심스레 접근해보겠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영산강유역은 벼농사와 해양문화가 동시에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6세기경이 되어서야 백제에 편입되고 있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하튼 일본의 역사를 보더라도 일본의 벼농사와 한반도는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문제는 철기문화 후진국이 철기문화 선진국을 정벌하기 위해 떠났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의 시대로 돌아와서 군사의 약소국인 우리나라가 군사대국인 미국을 정벌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러니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역사의 조작은 한두 마디를 고쳐셔 물줄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역사의 전 줄거리를 새로 쓸 수는 없습니다. 일본의 고대사도 마찬가지로 봅니다. 뭔가 줄거리는 있는데 여기에 약간의 조작을 가미함으로써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벼농사와 여성과 관련된 듯한 倭라는 용어, 일본고대사에서 사라진 여왕 히미코, 위치도 모르는 그리고 히미코 이후 사라진 야마타이국, 신공황후의 한반도 원정, 일본이 일제시대때 발굴하고도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지 못한 영산강유역의 벼농사와 관련이 있는 그리고 사라진 옹관고분사회, 그리고 분명한 것은 벼농사문화의 일본으로의 전래 등을 나열해보면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뭔가 집히는 게 있을 것으로 봅니다.

영산강유역에 대해 흥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지석묘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석묘 군락지대라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세계 어느 지역을 둘러봐도 이러한 곳은 없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후기의 것이라 하는데, 이때 인구밀집지대가 영산강 유역이라는 것이지요. 영산강유역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체가 능히 결성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덧붙인다면 일본은 지리적으로 벼농사문화를 아무 도움없이 독창적으로 처음으로 만들어내기는 무척이나 힘든 곳입니다. 왜야하면 그곳은 해마다 태풍이 많이 불어오니까 그러합니다. 예전에는 벼농사가 담수직파로 행해졌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벼농사피해가 자주 일어나게 되고, 또한 벼농사는 수리시설의 발달이 필수적입니다. 수리시설은 집단화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양자강과 같은 입지적 조건이 좋은 곳은 스스로 벼농사와 관련된 문화가 생겨날 수 있지만 일본과 같은 지리적 여건에서는 문화가 독창적으로 생겨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벼농사문화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지리적 여건 때문에 벼농사를 한반도보다 더 발달시킬 수 있었습니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까지는 어쩔 수없이 한반도로부터 문화를 수입하여 발달하였지만 일단 국가의 체계가 잡히면서 일본은 그 지리적 여건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경제적으로 노력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벼농사에 보면 풍수해 피해가 더 적은 이앙재배를 발전시키고, 수리시설도 우리보다 더 발전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 지리적 여건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하여 임진란을 전후로 하여 문화가 역수입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倭라는 용어가 일본땅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倭라는 이름은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집단으로부터 생겨야 합니다. 그 정치적 집단이 불행하게도 한반도에서 뿌리를 완전히 내리지 못하고 일본으로 쫓겨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부활을 한 것입니다. 일본의 시조 天照大神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일본의 최초 고대국가를 세운 왕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