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라는 용어를 한번더 심도있게 생각하여야겠다. 지금 우리가 倭라고 말하는 정치 집단은 분명히 일본이다. 그래서 왜의 본적은 분명히 일본이다. 그런데 필자가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은 이 왜의 원적지가 어디인가가 문제이다. 일본은 일본이란 국호를 670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681년 천무왕이 일본서기 편찬을 계획하여 그후 720년에 간행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부터 실질적으로 한반도로부터 독립을 꽤한 것이다. 시조로부터 시작되는 독립된 역사가 있어야 나라가 진정 독립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는 중요하다.
일본이 우리의 단군조선을 없애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열국시대로부터 역사가 시작이 되면 첫시작부터 분열된 민족이 되니까 그러하다. 항상 첫시작은 통일된 국가 하나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독자적인 문명과 최소한의 부족연맹체는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우리가 일본을 아주 비하시켜 부를 때 왜라고 표현한다. 왜 일본을 倭라고 불렀을까? 의문을 가져보자. 이 글을 쓰면서 언뜻 의문을 표시할 때 '왜'라고 쓰는데 이 또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왜'에 대한 인식에서 뭔가 큰 오해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왜가 한반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독자행보를 내디뎠기 때문은 우리는 아주 나쁘게 인식하고 있었던가?
倭는 본래 중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말이다 라고 알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그냥 중국의 동쪽에 있는 오랑캐니까 동이전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큰 잘 못이다. 동이는 한민족을 가르키는 말이다. 즉 일본이 독자적으로 독립하기전에 왜는 동이족의 한 소국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일본이란 국호가 생기기 이전에 말이다.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에 말이다.
또 우리말 사전에 재미있는 단어가 하나 있다. 倭夷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보통사람들이 인식을 할 때는 중국이 오랑캐를 부를 때 쓰는 夷라는 용어가 있으니까 그냥 왜놈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하면 그 문제가 또한 아니다.
夷를 표현할 때는 우리 동이 한민족에게 붙혀지는 말이다. 夷는 한자 모양 그대로 큰활을 쓰는 민족이란 뜻이 있고, 또 그 속에는 더 깊은 인류문명의 씨앗이라는 의미가 또한 있다. 아무한테나 붙이는 이름이 결코 아니다.
즉 倭夷라 표현하는 글이 있다 함은 倭는 본래 東夷족이라는 뜻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왜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이유를 이제나마 인식하였기를 바란다.
먼 옛날 우리 동이족중에 고대국가가 형성이전에 이 땅에 강력한 부족연맹체를 일으켜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벼농사를 세계에 가르쳤던 여성이 우두머리가 되어 실존했던 정치적 집단, 벼농사기술이 지극히 발달하여 다른 나라들로부터 倭라고 불리던 집단, 강한 정체성 때문에 철기중심의 고대국가가 탄생하면서도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아니한 집단, 바로 가장 중요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법을 가르친 집단이 倭였다. 그런데 이 왜의 원적지는 이치로 보아 분명히 이 한반도여야 하고 우리 민족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한반도가 艮方이기 때문이다. 주역 설괘전에 艮爲 果 라 하였다. 씨앗이요 열매라는 말이다. 또 독자적으로 문화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 이름을 결코 붙혀주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그 이름이 살아있으려면 최소한 부족연맹체정도는 되었어야 한다.
한반도 벼농사 문화가 기원전 2~3세기부터 일본에 본격적으로 이식되었다. 이것이 야요이 문화이다. 일본의 뿌리문화인 야요이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다. 이 문화는 기원전 2~3세기경에 시작된다. 물론 한반도로부터 그 영향을 받는다. 영산강유역의 청동기 후반 문화가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뿌리 때문에 일본을 우리는 倭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倭의 색체는 사라져 버리고 말이다.
일본의 형성은 다 아시다시피 한반도에서 정치적으로 기반을 잃은 집단들이 건너가서 세운나라이다. 거기에는 가야의 색도 백제의 색도 신라의 색도 고구려의 색도 들어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倭의 색깔이 일본의 최초의 고대국가를 이루어낸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왜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일본열도에 부활한 것이다. 그것이 일본이다. 일본에 가야의 색도 백제의 색도 신라의 색도 고구려의 색도 다 들어있지만 그들을 표현할 때 그 어느 색도 아닌 벼농사와 관련된 용어 倭를 그들의 이름으로 우리가 부르는 이유는 일본열도의 문명의 뿌리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학자이든 한국의 역사학자이든 일본열도의 시작문명이 일본열도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시작문명이 倭인 것이다. 그 시작문명은 기원전 2~3세기경의 벼농사문화인 야요이 문화이고, 이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안다. 이것이 倭이다.
단군조선이 무너지면서 남삼한이 펼쳐지는 것이 기원전 2~3세기부터이다. 물론 이 때부터 일본의 야요이 문화도 시작된다. 청동기문화이다. 아직 철기문화가 발달하기 전이다. 이 때까지 벼농사가 가장 발달하였던 곳이 어디였을까?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도입되는 시기가 기원전 1세기경이니 기원전 3세기 전후해서 벼농사가 가장 발달한 곳이 영산강유역이라 하여도 하자가 없다. 지석묘는 청동기 후반 유물이니까 말이다.
여하튼 영산강의 옹관고분 사회는 청동기 후반 지석묘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기원전 3세기부터 격변기를 거쳐 옹관고분 사회는 3세기에서 6세기 전반기에 한반도 남부의 크나큰 세력으로 부상한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유물이 엄연히 남아있다. 묘하게도 일본의 최초통일국가 히미코의 야마타이는 일본열도의 어디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렇게 먼 세월도 아닌데도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초에 이르는 800년간의 이 지역에서의 독자세력을 상정할 수 있다.
三國志 魏書 韓傳에 '韓은 …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南與倭接)라 되어 있는데, '接'이라는 표현은 육지로 경계를 삼을 때 쓰는 표현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역사가가 있다.
이에 대해 반론을 펴는 일부 역사가들은 '接'의 표현을 쓴 것은 당시 바다와 섬들을 통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반드시 육지로 경계를 삼는 경우에만 쓰는 표현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라고 하였다.
문제는 언어의 속에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숨겨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자가 倭라는 단어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오고 있다. 언어는 세월이 흘러 과거를 아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경우 우리와 일본이 接해 있다 표현해 보자. 그리고 그 어감을 느껴보자. 과거보다도 더 활발한 교류가 있었는데도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지않는가? 한반도 옆에 일본이 맞붙어 있다?
다시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해보자.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倭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기원전 2~3세기 이후여야 한다. 왜야하면 그 이전에 일본열도에 倭라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벼농사의 발달이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조를 통해 보면 3세기경의 최초통일국가 히미코의 야마타이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문화의 기반이 생겨야 한다. 즉 그 집단의 정체성이 생겨나야 한다는 말이다. 안그러면 최초통일국가가 야마타이니까 이와 관련된 말이 나와야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조선하면 한중일 동양삼국에서는 통한다.
히미코가 국가를 통일하였다는 것은 그 집단의 정체성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이 정체성을 통칭하여 倭라고 표현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때 겨우 한반도로부터 벼농사 문화를 이어받아 정착시킨 상황에서 벼농사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단어를 쓸 수 있을까? 이 용어는 일본민족 자신이 쓰기 시작했다기 보다는 밖에서 그렇게 불러준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자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이제 겨우 벼농사문명의 틀이 잡혀가는 일본열도에다가 倭라는 이름을 붙혔을까? 엄연히 벼농사문명의 중심지가 한반도인데 말이다. 만약에 倭를 쓴다면 한반도의 벼농사문명의 중심지역에 있는 집단에다가 붙히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을까?
결국 한반도에서 벼농사 문명을 일으킨 倭의 본류는 청동기후기의 지석묘 문명을 뒤로 하고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에 그 자리를 새로이 틀었다.
자 이제 시각을 더 크게 보면서 이야기 해보자.
벼농사문명은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로 보면 분명히 양자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동이 한민족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문화의 중심세력은 청동기 후반이 되면서 근거지를 한반도 남부 영산강 유역으로 옮겨 오기 시작했다. 아마 그 때의 정치적 변동이 있었으리라. 그런데 또 철기 시대가 대두되면서 격변기에 일본으로 들어가 倭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영산강 유역의 벼농사집단은 일본으로만 간 것이 아니다. 지금 국제미작연구소가 있는 필리핀으로도 갔다. 그 증거가 필리핀 바나웨에 있는 세계 8대 불가사의인 rice terrace이다. 이는 처음에 제단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지금은 벼농사를 짓고 있다. 제단과 벼농사 두가지를 가지고 우리는 그 때 상황을 추적할 수 있다.
라이스 테라스는 약 2,000년전에 만들어졌다 한다. 동북아의 격변기이다.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정착한 직후이다. 그래서 많은 유민이 일본으로 동남아 각처로 멀리 인도까지 옮겨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 벼농사를 새로운 개척지에 정착시킬 민족은 영산강 유역의 벼농사 집단밖에 없다. 그리고 제단이라함은 천제문화인데, 이 또한 동이족의 고유문화이다.
그러니 倭라는 용어와 관련성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벼농사 준비를 하는데 노인이 전통복장이라고 입고나오는데 아랫도리를 보니 일본의 씨름꾼과 아주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 또한 이러한 경로를 거쳐 전파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언어가 지금 선진국으로부터 들어온 언어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잖는가? 언어의 전파는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가는 것이다. 이게 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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