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 두암(斗庵 ) 한동석(韓東錫) 선생
황제내경 운기편 일만독(運氣篇 一萬讀) 위업 달성
매사에 熱中, 학문·임상에 빈틈 없어
斗庵 韓東錫 선생은 ‘宇宙變化의 原理’와 ‘東醫壽世保元註釋’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宇宙變化의 原理’는 40년이 지나도록 동양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읽혀지고 있는데 비해 그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가 어떻게 공부하고, 우주론을 터득했는지, 그리고 임상에서 치료와 환자는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는 것 자체로 전통의학의 맥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되새겨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마 二傳弟子 김홍제 선생 영향
한동석 선생의 본관은 청주이며 본명은 國欽으로 월남후에 東錫으로 개명했다. 호는 斗庵 혹은 東庵이다. 1911년 7월 3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오늘날 함남 영광군 용동리 근방)에서 청주한씨 예빈윤공파 22세손으로 부친 希春과 모친 李氏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0대 후반까지는 장사를 하였다. 그러다 부인이 폐병을 앓아 동무 이제마 선생의 2傳제자 김홍제 선생(북청의 양경호 선생에게 배웠다는 증언도 있다)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부인의 사망과 함께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근대사가 그렇듯이 선생의 일생에도 곡절이 많았다. 해방 이후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의 함경남도 조직국장을 역임하였다. 6.25 동란 중에는 국군 반격시절 함흥 민선 경찰국장을 2∼3개월 지내다 월남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인과의 이혼, 사별, 월남, 출가 등으로 5번의 결혼을 치뤄 복잡한 개인사를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1953년에 부산 영도에서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고 그 곳에서 정식으로 仁溪한의원을 개원하다 서울로 이사왔다.
선생에게 한의학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은 김홍제 선생이지만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1953년 ‘易學原論’의 저자인 韓長庚 선생에게 2개월간 주역을 배우고서부터다. 한장경 선생과는 북한에서 정치생활을 하여 이미 아는 사이였다. 선생은 이때부터 계룡산 국사봉에 강학의 장소를 마련하고 한 달에 3∼4회 방문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宇宙變化의 原理’에 나오는 正易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의 학문이 점차 무르익을 무렵에 동양의약대학 폐쇄령이 내려져 몇몇 교수들이 학교를 떠나자 교수로 추천되어 윤길영, 안병국 교수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양의약대학 제2대 학장으로 양방의사인 이종규 박사가 취임하자 그 날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학교를 나오게 된다. 한의과대학에 양의사가 학장을 하는 것은 한의사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게 사직의 이유였다. 그만큼 그는 한의학에 대한 자긍심이 컸다.
부산서 한의원 차려
6.25가 발발하면서 부산에 피난 가 한약방을 하면서 선생은 독학을 했지만 자기보다 나은 이가 있으면 찾아가든지 아니면 모셔와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면서 주위의 한의사들을 모아 같이 배웠다.
그러던 중 황제내경 運氣篇을 만나 이것을 萬讀하고 내경 전체를 千讀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했다. 조카인 한봉흠 고려대 교수는 황제내경 운기편을 만독했다고 증언했고, 부인 이옥자 씨는 약성가일 수 있다고 증언해 어느 것을 만독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아 신빙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선생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시사해주는 일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선생은 아침, 저녁을 불문하고 책을 보았고 길을 걸을 때나 자리에 앉아 있을 때나 항상 무언가를 외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자신은 한의사이니 이런 것은 항상 입에 달고 다녀야 한다며 내경 운기편 외에도 본초의 약성가를 쉴새없이 외웠다고 한다.
한봉흠 교수는 선생과의 대화내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三千讀을 하고 나면 뭔가 알게 될 것 같아 공부했었는데 三千讀을 하고 났지만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부터 오대산, 계룡산 등지로 공부를 하러 가기 시작했고, 주역공부를 배우기 위해 사람을 찾아 헤맨 것도 같다. 그렇게 六千讀을 하고 나니 구름 밑에 뭔가가 있는 것 같으니, 三千讀을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三千讀을 더 하였다. 그런데도 트이질 않아 ‘만독을 하면 뭔가 통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기어이 만독을 달성했다.”
초인적인 집중력
선생의 집중력을 실로 대단해서 의문점이 생기면 추호도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에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철저함을 보였다. 학문뿐만 아니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철두철미하게 임하여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세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간명하면서도 철저한 치료를 행하고 있었다. 제자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한의학 根株 파고든 대가
우주변화의 원리(宇宙變化의 原理)
선생의 저서는 ‘宇宙變化의 原理’와 ‘東醫壽世保元註釋’ 두 권이다. 66년과 67년 두해에 걸쳐 한 권씩 발간한 것이다. 짧은 기간에 나온 책이라고 해서 한번에 쓴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선생은 틈틈이 원고와 자료를 챙겨 계룡산으로 들어가 목욕재계하며 준비했다.
선생은 이 책의 의미에 대해 대한한의학회지 광고문 중 저자의 말 중에서 “우주도 변화하고 인간도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살필 줄 모른다. 이 원리를 계발하여 놓았지만 인간이 그 根株를 파헤치기는 진실로 어렵다. 필자는 내경을 연구하는 학도와 우주의 신비를 개발하려는 후학들에게 그 안내의 역을 다하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세상에 내보려는 바이다”라고 운을 떼고 “평이한 말과 쉬운 문장으로 엮음으로써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는 데 노력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생의 글은 광고문안과는 달리 그 내용이 무척 난해한 것으로 소문났다. 그 때까지의 이론들을 부정하고 새롭게 정립한 학설들이 많지 않아 이해하는 이가 적었을 뿐더러 지금도 이 책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오행개념의 質量變化, 五行의 變極, 對化作用, 土化作用, 寅申相火論, 金火交易論, 精神論, 本體論 등은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이론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동의수세보원도 註釋
‘東醫壽世保元註釋’이란 책은 ‘宇宙變化의 原理’보다 1년 뒤에 나왔다. 선생은 이 책이 이해되지 않으면 ‘우주변화의 원리’를 먼저 공부하고 나서 다시 이 책을 공부할 것을 머리말에서 권하고 있다.
두암 선생은 머리말에서 이 책이 동무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해설서로서 모든 질병의 변화는 체질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 동무의 원리를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처방에 대한 입방원리를 밝혀 놓음으로써 누구든지 동무의 입방원리와 인간생리의 특수성을 알고 처방을 운용할 수 있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 책은 선생이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한 그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이제마 선생의 ‘동의수세보원’을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인체를 그 기질과 성격에 따라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의 사상(四象)으로 나누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는 증증(症證)보다도 오히려 체질에 중점을 두고 시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질병치료에서 종래와 같은 음양오행설의 공론에 의존하지 않고 환자의 체질에 중점을 둔 것은 한의학의 전통을 벗어난 획기적인 학설로 평가되고 있다. |
한의학 무시하면 불같은 호통
선생은 양방의사나 양약사들이 한의학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나 지면을 통해서 준엄하게 꾸짖고 한의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던 1960년대 한의학의 위상과 자존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느 날 어떤 환자 가족이 한의원으로 찾아왔다. 자신의 오빠가 신장결석으로 신촌의 모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수술할 것을 권유하여 수술하기 전에 한방으로 할 방법이 없나 찾아온 것이다. 내용을 들은 선생은 다짜고짜로 “왜 수술해. 멍텅구리나 수술하지. 腎장속의 돌이 뭐야, 金氣지. 거기에 불을 넣으면 다 녹아”라 하였다. 그래서 진맥을 하고 한약을 몰래 먹은 결과 X-Ray상에 結石이 없어진 것이다. 그제서야 환자가 전말을 털어놓았다. 그 사실을 안 병원 양의사가 선생에게 전화를 해 불손한 말투로 병원으로 와보라고 하자 선생은 “결석 하나 고치지 못해 칼로 째는 백정새끼가 어디다 대고 와라 가라야. 요놈 새끼. 우리 집에 기어와도 내가 너를 대할랑 말랑 해. 에이 상놈”하며 소리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선생의 불같은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그렇다고 무작정 양방의사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진지한 학문적 토론을 나눌 수 있거나 양방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허심탄회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면 한방 양방을 가리지 않고 깍듯하게 대해주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왕진을 갔는데 으리으리한 저택의 대문을 놔두고 집뒷편 골목으로 난 쪽문으로 인도하더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의 남편이 사회적으로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내과전문의는 자신의 집에 한의사가 들락거리는 것을 남들이 알까봐 창피하고 두렵게 생각한 것이다. 완쾌된 다음 그 내과전문의가 찾아와 선생에게 명의라면서 감사를 표시하자 선생은 “부인을 치료하는 동안 차도가 있음을 감지하고 계속 맡겨 준 내과전문의 당신이 명의”라며 공을 양의사에게 돌리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 뒤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술잔을 나누며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로기사 김수영의 ‘바둑 이야기. 나의 스승 조남철’에 나와있는 이야기다.
寄稿와 講演에도 열심
선생의 학문의 깊이와 올곧은 성정은 각종 기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12월 22일 동아일보에 쓴 글 ‘한의사가 본 의료법개정-김두종씨의 논문을 보고’라는 글을 인용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체라는 정신과 육체로 화합된 유기체적 종합적인 생명체를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구명하려 하거나, 또는 원소분석에 의한 약물만으로 치료하려는 양의학의 입장은 인간을 완전히 파악못한 소치인 것이다…순전히 과학적인 의학을 가지고는 인간의 정신(形而上) 분야를 완전히 개척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선생은 부산의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부터 많은 이들을 상대로 한의학 강의를 했었다. 1960년 동양의대 교수가 되고 난 후에도 야간 시간대에 한의원 2층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동양의대에서는 주로 內經과 運氣學을 강의했다.
선생은 대한한의사협회 일에는 별로 간여한 바가 없지만 대한한의학회 일에는 정성을 쏟았다. 한의학회지 기고에도 열심이었고 한의학회 이사와 교육부장도 맡았다.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한의사 중에는 설태훈(서울 동광한의원) 원장과 송융섭(서울태화한의원) 원장, 문준전 전 경희대 및 동국대 한의과대학 학장(현 서울 문한의원 원장), 오세정(서울 세정한의원)원장 등이 있다. 특히 문준전 전 학장은 한동석 선생을 초빙할 당시의 동양의대 학년대표였으며 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직접 한동석한의원으로 방문하였고 이후 학교와 한의원에서 수학하였다.
운기에 정통한 분이라서 그런지 선생은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生日, 生時에 닥칠 것을 미리부터 내다보았다. 그 운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에 임박하여 자구책으로 자신의 생일을 넘기고 오겠노라고 계룡산으로 내려가는 시도를 하였으나 지병인 고혈압, 비증, 후두암 등으로 투병하다 뇌졸중이 악화되어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1968년 자신의 생일인 음력 6월 5일 생시인 寅時를 끝내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향년 58세였다.
선생은 서울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된 것은 선생을 천주교에 입교시킨 김동열(작고. 70년대 서대문에서 복자한의원 운영)씨의 주선에 힘입은 것이다. 그 후 1년 뒤 제자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비석의 뒷면에는 선생의 일생을 요약한 글이 적혀 있다.
“出於關北, 遊於漢陽, 守心養性, 尊德樂道, 醫通百家, 術濟萬人, 廣設絳帳, 大育英材, 乃承其業, 以頌其德, 謹表石銘, 永世不忘”
실제로 한의학 관과 임상은 물론이고 한의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한동석 선생은 많은 한의인들 곁에 영원히 살아 있다. (권경인. '한동석의 생애에 관한 연구')
명리학과 한의학 꿰뚫은 대가 한동석의 대예언 |
명리학과 한의학의 연결고리는 오행사상에 있고,이 오행에 대한 이해를확실히 한 인물이 斗庵 韓東錫이다. 1911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한 한동석은 '宇宙變化의 原理'라는 문제의 저서를 남겼는데, 66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 책은 4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내려오고 있다. 한동석은 오행사상에 관한한 창신(創新)을 해낸 인물이다. 오행의 원리를 스스로 입에 넣고 하나씩 씹어 철저하게 맛 본 다음 이 책을 썼다. 한 · 중 · 일3국중 오행에 대한 이해를 오늘의 맥락에서 이처럼 확실하게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중국 隨나라 소길(蕭吉)이라는인물이 '五行大義'를 쓴 이래 오행에 대한 역작이 바로 한국의 한동석이 저술한 우주변화의 원리'다. 한동석, ' 그는 누구이며 그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교수의 평) |
* 출처 : 월간중앙 12월호 315p-316p 글 :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 대학원 교수)
한동석 선생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하던 중 논문이 하나 눈에 띄었다. 대전대 한의학과 대학원 석사논문인 '한동석의 생애(生涯)에 관한 연구' (權景仁, 2001)이다. 한동석의 친척들과 제자 그리고 동료들을 인터뷰함으로써, 그의 출생에서부터 가정생활과 공부 과정, 환자들에 대한 임상 그리고 학술활동을 밝혀 놓았다. 한동석에 관한 학계 최초의 논문이다.
한봉흠 교수가 본 한동석
한봉흠은 1960년대 초반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를 하였으며, 63년부터 93년까지 고려대 교수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하였다. 한씨들 집안내력인지는 몰라도 이 양반도 역시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박사는 사촌 형님인 한동석과는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주고받은 친밀한 관계였으므로 반드시 인터뷰해 볼 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 좀 해 주시죠.
"내가 독일 유학을 갈 때가 1959년도인데 이승만 정권 때죠.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나에게 형님이 그랬어요. '이기붕 집안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이박사는 하야하고 마는데 난리 나서 갈팡질팡할 것이다. 그 다음에 1년 정도 민주정부가 들어선다.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 정세를 보니 형님 말한 것이 전부 맞는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형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귀를 쫑긋하고 들었죠. 1963년도에 귀국해 보니 박정회 정권이 들어서 있더군요. 박정권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형님에게 물었더니, 육여사를 포함해서 부부간에 객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이 어떻게 객사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으니 '누군가가 장난하지 않겠니' 하더군요. 총 맞아 죽을 수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나서 1968년도에 형님은 죽었죠. 이 말을 머릿속에 담은 나는 1970년대에 고려대 총장을 지내던 김상협씨와 단둘이 만나 식사할 때마다 '대통령은 총 맞아 죽는다' 고 이야기하고는 했죠. 그때가 유신치하라서 살벌한 시기인데 대통령 총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를 대낮에 떠들어대니 김상협 씨가 놀라서 '한교수 제발 대통령 총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저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고는 했습니다 저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두들겨 맞기도 해서 박정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총 맞아 죽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 그밖에 다른 예언은 없었읍니까?
"박대통령이 죽고 난 후에 정치적 혼란기가 다시 한번 오게 되는데, 이때에도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정치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정부 상태를 거친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군사독재가 한번 더 온다는 겁니다. 군사독재 다음에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인물이 정권을 잡은 다음 금기(金氣)를 지닌 사람들이 한 10년 정도 정권을 잡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금기를 지닌 사람들이란 양김(兩金) 씨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금기 다음 정권은 목기(木氣)와 화기(火氣)를 지닌 사람이 연합한다고 했습니다. 목기와 화기를 가진 연합 팀이 정권을 잡았을 때 비로소 남북이 통일된다는 것이죠. 어찌되었든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이 연합해야 피를 안 흘린다. 그리고 이 시기에 통일된다고 했습니다. 형님은 남북이 통일이 이루어질 때 남쪽이 80%, 북쪽이 20% 정도의 지분을 갖는 형태일 것이라고 했죠. 통일이 되려고 하면 남쪽에 약간 혼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각종 종교 · 사회 단체 여기 저기서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사회가 혼란스러운 과정은 거칠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의 기질이나 성격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형님 지론에 의하면 대통령은 목 · 화 기운이 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목 화는 밖으로 분출하는 형이어서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운이 밖으로 팽창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금 · 수는 수렴형이어서 안으로 저장하고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내무부 장관이나 중앙정보부장 같은 자리는 금 · 수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하고, 상공부나 생산하는 분야는 목 · 화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금융분야는 토기(土氣)를 많이 가진 사람이 적당하다는 거죠. 금융은 양심적이고 공정해야 할 것 아닙니까. 토는 중립이어서 공정하죠. 이게 오행에 맞춘 인재 배치법이자 용병술이죠. 국가적인 차원의 인재 관리는 오행을 참고해야 한다는게 형님 생각이었습니다. "
한박사에 의하면 한동석은 6-25를 보는 안목도 특이하였다. 음양오행적인 시각에서 6 · 25의 발발을 해석하였다.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는 강은 한탄강인데, 한탄강 이북이 북한이고 이남이 남한이다. 오행으로 보면 이북지역은 북방수(北方水)에 해당하고, 이남지역은 남방화(南方火)에 해당한다. 이북은 물이고 이남은 불이다. 그런데 소련의 상징이 백곰이다. 백곰은 차가운 얼음물에서 사는 동물이니 소련 역시 물이다. 중국은 상징동물이 용이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언서 중국 역시 물로 본다. 이북도 물인데, 여기에 소련의 물과 중국의 물이 합해지니 홍수가 나서 남쪽으로 넘쳐 내려온 현상이 바로 6 25다. 대전은 들판이라서 그 홍수가 그냥 통과하고, 전주·광주도 역시 마찬가지로 통과하였다. 그러나 대구는 큰 언덕이어서 물이 내려가다 막혔다. 울산·마산은 모두 산이어서 물이 넘어가지 못했다. 부산은 불가마이니 물을 불로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가 6 · 25의 피해를 덜 본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한동석은 1963년 1월부터 자신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생일, 생시인 6월8일(음력) 인시(寅時)에 닥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생일, 생시를 넘긴다면 자신이 더 살 수 있을 것이나 아무래도 그것을 넘기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본인의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룡산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6월8일 축시에 사망하였다. 2시간 정도만 견디면 인시를 넘길 수 있었으나 자신의 생시를 코앞에 두고 그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임종한 것이다. 가족문제도 그렇다. 생전에 본인이 죽고 난 뒤 온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본인의 임종후 가세가 기울어 인사l동 집을 비롯한 가산을 팔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그밖의 예언을 간추려 보면 2010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임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될 수 있으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딴따라'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 또한 그대로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국토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보았다. 한반도 남쪽이 물에 잠기는 반면 서쪽 땅이 2배쯤 늘어난다고 예언하였다. 한동석은 이처럼 탁월한 한의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앞일을 내다보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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