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보천교' 민족 종교 재조명 절실
새전북신문 2016년 08월 28일 (일)
이종근 문화교육부 부국장 jk7409@hanmail.net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의 정읍고택은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50여 채의 보천교 본당 부속 건물의 하나로 전해진다. 1936년 보천교가 해체된 뒤, 정읍 지역의 유지가 사들여 장명동으로 이축한 것을 1988년 박성기(박종조의 부친)씨가 내장산으로 다시 옮겨 사용했다. 박중조씨가 2010년 전주시에 기증함으로써 2011년 6월 이전 복원해 전주전통문화연수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또, 조계사 대웅전이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一殿)을 이전·건축하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지금의 보천교는 그 교세가 극히 미비하지만, 한때는 600만 신도를 가졌다고 이야기될 만큼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신흥종교였다.
태을교, 훔치교라고도 불리는 보천교는 일명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리는 월곡 차경석이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일순을 만나면서 세운 신흥종교이다. 1919년경에 임명된 간부가 55만7,700명이고 신도가 600만 명이라고 스스로 내세울 만큼 규모 있는 종교 조직이었다. 민족주의 색체가 강하였고 당시 독립운동에도 자금과 인력이 결합했다.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본당은 2만평의 부지에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워졌다. 건축물이 45채, 부속 건물이 10여 채로 성전(聖殿)이라 불렸다. 정문은 보화문이라 이름했으며, 광화문을 본떴다. 중앙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는 십일전을 지었던 바, 지금까지의 목조 건축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필요한 원목은 만주 훈춘현과 노금 방면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십일전이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사용되는데는 보천교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차경석이 1936년 타계하자 그때까지도 보천교에 대한 의심과 억압을 하였던 일제는 해체를 추진한다. 중요 간부 24인을 경찰서로 연행해 ‘보천교 해산’, ‘삭발’ 등을 강요하며 협햇다. 이어, 성전 내 개금된 성상과 제기, 신앙 대상인 삼광경 벽화(三光影 壁畵)나 도금된 제단 모두를 뜯어갔으며, 이어 정읍경찰서 소속 수십 명의 경찰이 본소로 난입, 나머지 시설들을 철거했다.
일제는 보천교 측 재산처리위원회라는 유령 단체를 만들어 이들에게 재산 포기 각서를 받아낸 뒤, 십일전에 대한 경매에 들어갔다. 건축 비용이 50만원인데 비해 경매가는 터무니없는 500원이었다. 경매로 넘어간 보천교 십일전이 제 삼자를 통해 불교계로 들어오니 이때가 1937년이며, 대웅전 낙성 봉불식은 1938년 10월 25일 거행됐다. 당시의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포함한 민족 종교를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로 매도했고, 차경석의 죽음과 함께 일제는 군대와 경찰 등의 총칼을 동원, 교단해체령으로 역사 속으로 점점 더 사라져갔다. 하지만 일제가 왜곡한 보천교의 진실은 아직도 바로 잡히지 않고 있다. 민족종교와 보천교에 대한 재조명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돼야 한다./이종근(문화교육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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