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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과 발렌타인 데이

by 바로요거 2014. 2. 13.

★2월14일 발렌타인데이는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날입니다.

 

"발렌타인데이" 하면  "사랑하는 연인들의 날",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 맞나요?

발렌타인데이 날에 쵸콜렛을 선물하는 이유는 쵸콜렛의 달콤함 때문이라고합니다.

최근에는 초콜렛 외에도 자기만의 독특한 선물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우리가 발렌타인데이를 즐기기에 앞서서 한 가지 알아 두셔야 될 것이 있군요~

발렌타인데이는 바로, 1953년 일본 모리나가 제과점이 하트 모양의 초콜릿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밸런타인데이를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라고 규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 살펴 본 다음에 발렌타인데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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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詩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안중근(安重根, 1879.9.2~1910.3.26) 의사는 대한제국항일운동가이며 의병장, 정치사상가.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아버지는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이다.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고, 태어날 때 부터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는 응칠(應七)이라고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소년기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의병활동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8년 6월에는 안중근은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출정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키기도 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였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 철도의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한국 만세라는 뜻이었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26]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세종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2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6월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경천은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내용출처: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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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살펴 본 바와 같이 안중근 의사께서는 분명히 1910년 2월 14일 날 사형선고를 받으신 날이 맞네요. 그럼 발렌타인데이는 어떤 날인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발렌타인데이는, 1953년 일본 모리나가 제과점이 하트 모양의 초콜릿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밸런타인데이를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라고 규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는 발렌타인데이가 '그리스도교의 성인 발렌티누스 축일'이라고 나와 있군요?

 

*발렌타인데이의 세 가지 유래

 

발렌타인데이의 유래1 - 3세기경(269년) 로마시대 당시는 결혼을 황제의 허락하에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 발렌티누스'는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황제의 허락없이 결혼을 시켜준 죄로 순교를 당했는데, 이 '성 발렌티누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성 발렌티누스'가 순교한 날을 축일로 정해서,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사랑하는 연인사이에 선물이나 편지를 주고 받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2 - 성(聖) 발렌타인은 평소 사회 봉사를 실천해 왔는데, 그가 늙고 병들게 되어 거동조차 힘들게 되자 '몸으로 하는 봉사 대신 병자와 어린이에게 사랑의 편지와 선물을 보내면서 발렌타인데이가 시작됐다'고 한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3 - 과거 로마에는 '해마다 2월 중순경 젊은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런 풍습이 '성 발렌타인의 순교일과 겹치면서 발렌타인데이가 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때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젊은 이들도 비슷한 축제를 즐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에 2월 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 남녀가 탑돌이를 하며 복을 비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 것 또한 로마, 영국, 프랑스 등의 젊은이 축제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 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발렌타인데이가 2월14일이 된 것은 이 때부터 짐승과 새들도 짝짓기를 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두 명의 발렌티노 성인, 사제 발렌티노와 발렌티노 주교

 

한명은 서기 269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의해 처형된 사제이며 또 한명은 로마에서 순교한 발렌티노 주교이다. 사제 발렌티노는 교회를 박해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배교 권유를 무시함으로써 체포돼 아스데리오라는 법관에게 보내졌는데 발렌티노는 앞을 보지 못하던 아스데리오의 딸을 기도로 고쳐 주었다. 이를 목격한 아스데리오의 일가족 40여명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발렌티노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황제에 의해 발렌티노와 일가족은 모두 처형당했다.

 또 한명인 발렌티노 주교는 로마에서 집정관 플라치도의 명령에 따라 고문을 받고 순교했으며 로마에서 10여㎞ 떨어진 테르니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학자들은 두 성인이 결국 같은 인물로 발렌티노 사제가 주교가 된 다음에 순교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발렌티노 성인이 연인들의 수호성인이 된 것에 대한 그럴듯한 해답을 주는 일화는 이렇다.

 당시 클라우디우스 2세는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의 결혼을 금했는데 발렌티노 성인이 이를 무시하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몰래 혼인시키다가 발각돼 2월14일 순교했다. 그는 감옥에서 간수의 딸에게 발렌티노의 사랑을! (love from Valentine)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냈고 이것이 발렌타인데이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풍습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도 있다. 로마 제국의 루퍼칼리아 라는 축제 중에는 도시의 젊은 여자들이 자기 이름을 적은 쪽지를 항아리에 넣고 남자들이 항아리에서 이름표를 고르는 짝짓기 행사가 있었다. 또 이를 통해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축제를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여긴 당시 교황은 서기 498년 2월14일을 발렌타인데이로 선포하고 남녀간 사랑을 표현하는 날로 삼았다고 한다. 영국인들이 2월14일을 새가 짝을 짓는 날로 믿고 또 봄을 연인을 위한 계절로 여겼던 데서 유래됐다는 속설도 있다.

 

글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9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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