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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성삼문과 수양대군

by 바로요거 2013. 6. 26.

성삼문과 수양대군

 

상극의 이치가 만물을 맡아 다스리는 세상에서 성삼문 선생은 아버지 성승과 서너 살 먹은 어린 아들까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삶이었다. 성삼문 선생은 뜻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비운의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아래의 글은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내려주신 도훈 말씀입니다.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갈꼬?

黃泉(황천)에 無酒家(무주가)하니 今夜(금야)에 宿誰家(숙수가)오! 
-성삼문의 절명가 중에서-


 가치관이라 하는 것은 물질로써는 환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질로써 환산할 수 없는 것이 가치관이다.
 

 조선시대 때 사육신에 성삼문(成三問)이 있다. 수양대군이 열두 살 먹은 조카 단종을 삭탈관직해서 노산군이라 하고서 강원도 영월 청룡포로 귀양을 보냈다. 그 때 사육신 생육신이 생겨났다. 사육신이 누구냐 하면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하위지다.
 
 그런데 성삼문 아버지가 이길 승 자 성승(成勝)인데, 수양대군이 성삼문을 설복시키려고 그 아버지를 잡아다 대궐 뜰에 벗겨놓고서는 쇠로 만든 인두를 참숯불 같은 데 벌겋게 다려서 등짝서부터 장단지 이런 데를 그냥 막 지져댄다. 그러면 살댕이가 지글지글 타면서 연기가 풀풀 나고 고기 익는 냄새가 나고 그런다.“ 자, 니가 항복을 하면 니 애비가 이런 악형을 안 당한다. 항복을 해라.”그런다. 허나 성삼문이는 아버지가 그런 악형 당하는걸 보면서 참 안 됐지만 눈도 깜짝 안 한다. 성승이 그렇게 해서 죽었다.
 
 항복을 안 하니까 종국적으로 성삼문의 서너 살먹은 아들을 잡아다가 성삼문이 보는 앞에서 자루에다 집어넣고 대뜰에서 냅다 태질을 시킨다. 태질시켜서 깨트려 죽인다. 하니까 성삼문이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하니까 수양대군 하는 소리가‘저런 역적 같은 놈 봐라, 지 애비는 인두로 지져도 눈도 깜짝 않더니 제 새끼를 죽이니까 눈물을 뵌다’고 한다.
 ▶수양대군 자료 보기 http://kimstreasure.tistory.com/95
 그러니까 성삼문이가 한 소리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왜 죽는 줄을 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천지에 생생지리(生生之理)로써 생겨나서 세상에 왔다가 왜 죽는지를 모르고 죽는다. 그래서 비정한 그 불의에 분해서 내가 눈물을 흘렸다.”고.
 
 가치관이라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가치관을 위해서 사육신도 되고 생육신도 된다. 사육신의 그 처절한 역사. 지나간 인류 역사라 하는 것은 그렇게 상극이 사배해서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러면서 성삼문이 죽으러 나가면서 이런 시를 읊는다. “황천(黃泉)에 무주가(無酒家)하니 금야(今夜)에 숙수가(宿誰家)오.”황천에는 술집이 없을 게다. 목 베여 죽어 황천에 가서도 술 한 잔 사먹고 싶을 텐데, ‘금야에 숙수가오.’술집도 없으니 술 한 잔도 못 사먹고, 또 잘 집도 없을 테니 오늘 저녁에는 뉘 집에서 잘꼬. 죽는데 잠을 어디서 자나. 그냥 그렇게 읊은 소리다.
 
 인간이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어질 수는 없잖은가?

우리는 사람인지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해서 진리에 살다 진리에 죽어야 한다.
 
 
 성삼문 절명시(絶命詩)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갈꼬? 
 
 성삼문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 한 사람. 1418(태종18)년 무관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이라 지었다.
 
 1435(세종17)년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집현전 학사·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창제를 위해 음운연구를 하여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공헌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아버지 승(勝)·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처형되었다.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1676(숙종2)년 홍주(洪州) 노은동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6신과 함께 제향되고, 1758(영조34)년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문집에『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출처: 증산도공식홈페이지 http://www.js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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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의 생애

 

매죽헌 성삼문 (1418~1456)

성삼문은 서기 1418년(태종 18년) 충청도 홍주 적동리 노은동(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성삼문이 39세의 짧은 생애동안 남긴 발자취와 업적을 살펴보면 충절과 의리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준 점이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규정하고 단종의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충절과 의리를 끝까지 주장하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니 의리를 지킨 대가는 너무도 컸다.

 

당시 성삼문도 수양대군에게 협력을 했더라면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자신의 인생도 순탄대로의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삼문은 수양대군의 행위를 정권의 도둑질로 보고 이에 협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바름이라는 가치, 정의라는 가치를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친 것이다.

 

또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바친 그의 학문적 업적을 들 수 있다.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서문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언어가 중국과 달라 역관(譯官)이 있어야만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선대 임금 때부터 이를 위해 승문원(承文院)을 두어 이문(吏文)을 맡게 하고, 사역원(司譯院)을 두어 통역을 맡게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해왔다.

 

또한 왕명에 의하여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음운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배웠으니, 이후 요동을 왕복한 것이 무려 13회나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성삼문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위하여 바친 열정과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에 앞서 한글로<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들어서 실제로 시험해 보았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훈민정음을 바로 쓸 수가 있으므로 신숙주를 비롯한 최항, 성삼문 등에게 <동국정운>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즉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어떻게 훈민정음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 해결의 연구였다. 이 <동국정운>이 만들어짐으로써 처음으로 한자음을 우리의 한글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성삼문은 당시 언어학 분야의 탁월한 학자였던 것이며, <직해동자습>의 교정에 참여하였고,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의 기초적인 연구를 위해 요동을 13번나 왕래하며 음운연구에 심혈을 바쳤던 것은 그가 남긴 큰 발자취라 하겠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도자는 비록 세종이라 하더라도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도와준 것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라고 볼 때, 이들의 한글창제에 바친 공헌은 민족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http://www.mc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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