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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수의 방/나의뿌리*조상님,족보

이우직(李友直, 1529~1590)

by 바로요거 2014. 1. 10.

이우직(李友直, 1529~159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중익(仲益). 저로(樗老). 문의(文懿). 

대표 관직(경력)은 대사간, 대사헌, 도승지.

 

우리 선조(宣祖)의 조정에 우참찬(右參贊) 이공(李公)이 있었는데, 휘(諱)는 우직(友直)이고, 자(字)는 중익(仲益)이다. 그의 아버지 좌랑(佐郞) 이사언(李士彦)이 부정(副正) 김승경(金承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에 공을 낳았다.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26개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는 모두 선발로 된 것이었다.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고 또 11개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대사헌(大司憲)ㆍ대사간(大司諫)ㆍ호조 참판(戶曹參判)ㆍ예조 참판(禮曹參判)ㆍ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또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예조 판서(禮曹判書)ㆍ형조 판서(刑曹判書)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ㆍ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내고 졸(卒)하였는데, 때는 만력(萬曆) 경인년(庚寅年, 1578년 선조 11년) 2월 14일이었다.

조정에서 관례대로 조문과 제전과 부의를 하고 청백리(淸白吏)로 기록한 다음 정헌 대부(正憲大夫) 좌참찬(左參贊)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이어 법령(法令)으로 삼았다. 또 원종 공신이라고 하여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더 추증하였고, 그 뒤에 다시 아들의 귀(貴)로 인하여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공은 ≪근사록(近思錄≫ㆍ≪두시(杜詩)≫ㆍ≪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읽기 좋아하였는데, 항상 술을 마시고 궁통(窮通)과 비환(悲歡)을 반드시 여기에서 달래곤 하였다.

시사(時事)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웃으며 대답하기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을 하관 선생(何關先生)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강장(剛腸)을 품고 있어 흔들리지 않고 바르고 곧았다. 공이 처음에 헌장(憲長,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을 때 율곡(栗谷) 선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말로 이 직책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율곡이 곤경을 만나 조정을 떠날 때 공이 소인을 억제하는 의리를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에 진출의 길이 조금 막히었다. 변방의 고을에 부임하였을 때 번호1)(藩胡)가 복종하고 따라 은혜와 위엄을 오래도록 차마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이 떠난 뒤에도 후임자가 그 힘을 입었다.

인조(仁祖) 때 북변(北邊)에 임명된 사람이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었다. 인조가 경연(經筵)에 나와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아무개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공은 과거의 철인(哲人)들이 경계한 말을 써서 벽에다 많이 걸어놓았다. 일찍이 범익겸(范益謙, 남송(南宋)의 학자)의 말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마음을 보존하고 몸을 닦는 데 매우 해롭다.”고 하였다. 대체로 공은 사물에 담담하여 경영하는 것이 없었으나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정을 독실히 하기 위해 자신의 분수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힘쓰는 것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은 여흥(驪興) 사람이다. 교위(校尉) 이인덕(李仁德)이 비로소 고려 시대에 현달하였고, 본 조선조로 들어와 판서(判書) 이계손(李繼孫)이 성종(成宗) 때에 유명하였다. 그의 아들 이지시(李之時)는 현감(縣監)이고, 현감이 계공랑(啓功郞) 이공려(李公礪)를 낳았는데 이분이 좌랑공(佐郞公, 이사언(李士彦))의 아버지이다. 공이 젊었을 때 이미 재상의 명망이 있었는데, 안팎의 직책을 30년간 출입하면서 하루같이 게을리 하지 않고 주어진 직임을 다하였다. 또 가정의 행실이 순수하고 독실하였기 때문에 지위가 높이 이르렀지만 위에 성주(聖主)와 현신(賢臣)으로부터 아래 유생(儒生)과 천민(賤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 실상을 상고해 보면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사용(司勇) 윤탕인(尹湯仁)의 딸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사람은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안산군(安山郡) 첨성리(瞻星里) 선영의 곁에 부장(祔葬)하였다. 직장(直長) 이상경(李尙絅)은 아들이고, 사인(士人) 최상(崔瑺), 장령(掌令) 이흡(李洽), 주부(主簿) 박선(朴瑄), 진사(進士) 이복원(李復元)은 사위이다. 아들 이무생(李戊生)은 측실(側室) 소생이다. 이지원(李志遠)ㆍ이지수(李志遂)는 직장(直長)의 서출이고, 최명직(崔命稷)은 큰사위의 소생이고, 이경배(李敬培)ㆍ이충배(李忠培)ㆍ이의배(李義培)ㆍ이신배(李信培)이 장령(李掌令)의 소생이고, 박환(朴桓)ㆍ박승(朴)ㆍ박탁(朴椓)은 박 주부(朴主簿)의 소생이고, 이점(李漸)ㆍ이엄(李淹)ㆍ이잠(李潛)ㆍ이심(李淰)ㆍ이함(李涵)은 이 진사(李進士)의 소생이다. 나에게 찾아와 묘표를 써달라고 요청한 자는 이함의 아들 참봉(參奉) 이상길(李相吉)이고, 장차 비석을 세워 새길 사람은 이상경의 아들 이지원이다.

내가 말하기를, “공과 같은 두터운 덕과 성대한 공적으로 사손(嗣孫)이 쇠약하니, 이 점이 슬프다. 그러나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겨 포상하고 손자대의 임금에 이르러서도 덕음(德音)이 더욱더 융숭한 데다가 또 대현(大賢)이 자신을 알아주었으니, 이것이 모두 불후(不朽)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명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상길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백세(百世)의 뒤에 묘소를 훼상하고 묘역의 나무를 베는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기에 이를 써서 주었다.

원본글 출처: 이우직의 묘표(墓表), 저자: 송시열,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9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

 

각주 1) 번호(藩胡) : 회령(會寧)ㆍ종성(鍾城)ㆍ온성(穩城) 등 국경 지대에 사는 여진족을 일컬음. 북도(北道)의 여진족으로서 강(江) 건너 변보(邊堡) 가까이 살며 무역을 하고 공물을 바치는 자들을 번호(藩胡), 백두산 북쪽에 사는 여진족으로서 아직 친부(親附)하지 않은 자들은 심처호(深處胡)라고 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이우직 [李友直]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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