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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수의 방/나의뿌리*조상님,족보

이계손(李繼孫)-여주이씨

by 바로요거 2014. 1. 7.

경헌공 이계손(李繼孫, 1423~1484)

1423(세종 5)∼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자는 인지(引之)이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진(珍)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유(猷)이다. 아버지는 의인(依仁)이며, 어머니는 송구빈(宋九贇)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대표관직은 철산군수,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병조판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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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기근이 심한 백성들의 진휼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 에 오르고, 형조·예조참판을 지냈다.1469년(예종 1) 함길도관찰사로 이시애의 난 뒤에 동요된 민심을 수습, 교학을 진흥시켰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계손 [李繼孫] (두산백과)

 

1453년(단종 1)에는 정언, 이듬 해에는 철산군수·철원부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병조좌랑, 1457년 예조정랑을 거쳐 1459년에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이듬 해에는 함길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여러 장수들을 위문하였다.

1461년 북방의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해 한명회(韓明澮)를 순찰사로 삼고 그 종사관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병을 이유로 꺼리자 웅천진(熊川鎭) 군졸로 복무하는 형벌을 받았다가 곧 사면되었다. 이듬 해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가 기근에 시달리는 도민을 적절히 진휼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아 1466년 형조참판·예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 함경도관찰사로 나아가 이시애(李施愛)의 난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했다. 1470년(성종 1)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향교를 적극 후원해 이 지방의 학문을 진작하는 업적을 쌓았다. 1474년 형조판서로 재임하던 중 주문사(奏聞使) 김질(金礩)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토지 30결, 노비 3구, 말 1필이 하사되었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한성부윤·병조판서를 거쳐 1483년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재상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동잡록(海東雜錄)』
  • 『성호문집(星湖文集)』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계손 [李繼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화(成化) 19년(1483년, 성종 14년) 9월 9일(己亥)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이 졸(卒)하였다. 장사를 지낸 이듬해 한 근신(近臣)이 영안도(永安道)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그 도(道) 유생(儒生)들이 지은 사부(詞賦)를 올리고, 인하여 공이 그들과 화창(和唱)한 이유를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의논해서 공을 추장(推獎)하라 하니,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니, 실로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었다.

그 7년 후에 사자(嗣子) 이지임(李之任)이 공의 사장(事狀)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 임사홍(任士弘)에게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공명(功名)과 사업은 국승(國乘)에 실려있으나 그 출처(出處) 시종(始終)에 대한 기록은 더러 자세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이번의 증작(贈爵)과 융성한 은혜를 천양(泉壤)에 미치게 하려고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후세에 보는 자들의 법을 삼기를 원하니, 비문을 지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사장을 상고해 보건대 공의 휘(諱)는 계손(繼孫)이요, 자(字)는 인지(引之)로 이씨(李氏)의 계파(系派)는 여강(驪江)의 망족(望族)이다. 학사(學士) 이고(李皐)가 공의 비조(鼻祖)요, 증조 이진(李珍)과 할아버지 이유(李猷)는 모두 관직에 있었으며 아버지 이의인(李依仁)은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으로 생을 마쳤는데 공의 귀(貴)함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시서 영(京市署令) 송구빈(宋九贇)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힘써 배워 정통(正統) 정묘년(丁卯年, 1447년 세종 2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해에 급제하여 교서관 교감(校書館校勘)에 보직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러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공을 검상(檢詳)으로 삼으니, 세조(世祖)께서 영의정 강맹경(姜孟卿)에게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나 역시 부리고 싶으니, 경은 천인(薦引)하지 말라.” 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에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양계 순찰사(兩界巡察使)가 되어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공이 어머니가 병환 중임을 상당군에게 고하니, 사적인 일을 핑계대었다고 아뢰어 웅천(熊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때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우리나라의 벼슬을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명(命)을 선포하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 어렵게 여기다가 특별히 공을 불러서 1급(級)을 진급시켜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로 삼았다. 해도(海島)에 이르자 갑자기 원하지 않는다고 알려와 그 사행(使行)이 정지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461년 세조 7년)에 세자 시강원 우보덕(世子侍講院右輔德)에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술에 취하여 공을 놀리기를, “상당군(上黨君)에게 붙좇지 않은 것은 경의 잘못이었다.”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에 강원도에 흉년이 들자 공을 관찰사로 내보냈으니 황정(荒政)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라 1년 동안 그대로 유임(留任)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었는데 임금이 공경(公卿)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보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경이 강원도민을 잘 진구(賑救)하여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강원도를 경에게 위임하고자 하니, 경은 그곳에 가서 다스리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오직 임금께서 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의정(議政) 황수신(黃守身)을 돌아보니, 공에게 이르기를, “황수신은 이미 정승(政丞)이 되었으니, 경은 어렵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으니, 그 기대함이 이와 같았다. 얼마 후 형조 참판을 제배했다가 예조로 옮겨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다. 평안도민들이 유리(流離)하는 자가 많자 공을 순무사(巡撫使)로 명하고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함경도는 북쪽 오랑캐와 가까워서 그 풍속이 활 쏘고 말 타는 일만 좋아하고 학문을 하지 않아 공은 그들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 품신하여 학교(學校)를 일으켜 난신(亂臣) 노비(奴婢)로 호적에서 누락된 자를 쇄환(刷還)하여 소속시키고, 명민한 자제로 자격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아서 가르치면서 공이 친히 수업을 하였다. 또 경적(經籍)을 군현(郡縣)에 반포해 주고, 문신(文臣)을 가려 교관(校官)으로 삼고 사시도회과시법(四時都會課試法)을 설치하여 권려(勸勵)해서 사람들이 기꺼이 학문하기를 청하니, 한 도내가 크게 교화되었다. 이를 말미암아 매 식년(式年)마다 영안도(永安道)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된 자가 많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한 벼슬을 한 자까지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곳 백성들이 부모처럼 떠받들며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문옹(文翁)이 촉(蜀)을 교화시킨 일1)에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옮겼다. 이듬해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공이 평양에 도착하여 귀후사(歸厚司)를 설치하여 관곽(棺槨)을 만들어 민간에 팔아 그 은혜를 입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474년 성종 5년)에 형조 판서에 임명되어 몇 달이 지나 옥이 텅 비게 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상(賞)을 내렸다. 다음 해에 중추부사로 옮겨 회간왕(懷簡王)의 고명(誥命)을 청하는 일로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의 부사(副使)가 되어 경사(京師)에 가서 준허(準許)를 받고 돌아오니, (임금이) 장획(臧獲)과 전토를 하사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476년 성종 7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인 정유년(丁酉年, 1477년 성종 8년)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478년 성종 9년)에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해 겨울 가벼운 죄로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신축년(辛丑年, 1481년 성종 12년)에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를 겸대하였다가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옮겼다.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에 글을 올려 사직하고 중추부로 옮겼다. 갑진년(甲辰年, 1484년 성종 15년)에 또 병으로 사직하니, 임금이 의약(醫藥)을 내려 치료하게 했으나 효험이 없어 졸(卒)하니, 향년(享年) 62세이며, 시호(諡號)는 경헌(敬憲)이다.

공의 배위(配位) 정씨(鄭氏)는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손녀이며, 계배(繼配) 이씨(李氏)는 정랑(正郞) 이영서(李永瑞)의 딸이다. 아들 딸을 다 두었으니, 이지임(李之任)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요, 이지화(李之和)는 진사요, 이지시(李之時)는 사맹(司猛)이며, 딸 하나는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최철중(崔鐵重)에게 출가하고, 하나는 지금의 승정원 좌승지 정경조(鄭敬祖)에게 시집갔다. 손자 손녀 약간 명이 있다.

공은 평생 동안 기우(氣宇)가 크고 넓었으며 마음씨가 평탄하였다. 이미 문의(文義)에 능숙하고 이도(吏道)에 능통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경(敬)으로써 상관을 섬기고 성(誠)으로써 너무 세밀하게 따지는 일이 없었어도 사람들이 호도(糊塗)하지 않았다. 너그러운 도량이 있어 신망(信望)이 조정에 미덥게 되었으며 평소 혹 불평스러운 일을 당하면 한번 웃어넘기고 말았으니, 공이야말로 군자(君子)라고 하겠다. 아! 공의 성대한 덕을 관원이면 그 누가 모르겠는가? 영안도에서 시행한 일들은 풍속을 교화하는 데 큰 공을 부담하였고, 나라의 원기(元氣)를 부축하여 도왔으며 그 나머지 공명(功名)과 사업은 생략하고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표(表)하여 드러내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성인의 도(道)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가 중천(中天)에 운영되는 것과 같고, 사람은 현명하고 어리석음이 없어 지혜로운 자가 가르치면 밝게 되네. 북쪽 풍속이 태어나면서부터 굳세어 궁마술(弓馬術)을 익혀 성격을 이루었고, 시서(詩書)는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예의(禮義)를 도리어 가볍게 여겼네. 공이 가르침 펴기를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불쌍하게 여기어 여러 방법으로 권면하고 장려하여 오경(五經)을 연구하도록 강론하고 가르쳤네.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면 저절로 덕(德)을 좋아하게 되니 옮겨져 공에게서 듣게 되었네. 책을 지고 다투어 배우러 오고 사책(射策)을 명정(明庭)에 바쳤네. 무기를 버리고 글공부하고 갑옷을 잠영(簪纓)으로 바꿨네. 촉군(蜀郡)이 문옹(文翁)에게 교화되어 새북(塞北)이 영원히 편안하니, 여러 백성들이 아버지처럼 떠받들며 지은 사당(祠堂)이 높네. 임금이 그 치적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내리고 총애하였네. 큰 은혜가 많은 사람들 눈에 가득하니 구천(九泉)의 영혼도 놀랐으리. 공의 도량은 바다와 같고 공의 재주는 가을에 나는 송골매 같았네. 여러 조(曹)와 대(臺)의 벼슬 두루 거쳐 명위(名位)가 높아져 구경(九卿)이 되었네. 그 청렴한 풍도와 고상한 의리는 조정의 모범이 되었네. 어찌하여 임진년(壬辰年, 1472년 성종 3년)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제경(帝京)에 조회(朝會)했나. 구포(仇浦)는 동쪽을 향해 흐르는데 그 중간에 8척 되는 무덤이 있네. 산천에는 초목이 매우 무성하고 영기(靈氣)는 광채와 연결지어져 있네. 자손이 이어져 가성(家聲)이 천년까지 전해지기를 빈다네.

 

원본글 출처: 이계손의 비명(碑銘), 저자: 임사홍(任士弘), 원전 서지: 국조인물고 권14 경재(卿宰)

각주

  • 1) 문옹(文翁)이 촉(蜀)을 교화시킨 일:한(漢)나라 문옹(文翁)이 경제(景帝) 때 촉군(蜀郡)을 다스리면서 성도(成都)에다 학궁(學宮)을 지어 속현(屬縣)의 자제들을 입학시켜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군현(郡縣)의 관리로 임명하니 문교가 크게 일어났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계손 [李繼孫]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