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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상제(上帝)문화의 회복을 주장한 정약용

by 바로요거 2011. 4. 22.

상제(上帝)문화의 회복을 주장한 정약용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영조38∼헌종2). 그의 이름을 들으면 대다수 사람들은 ‘실학(實學)’이나 ‘거중기’ 또는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과연 다산이라는 대학자를 ‘조선후기의 실학자’나 ‘거중기를 만든 과학자’와 같은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학문의 본질적인 의미와 그 깊이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다산은 주자학, 양명학, 서학 등 다양한 사조(思潮)를 집대성하여 방대한 사상체계를 구축한 시대의 대학자였다. 또한 자신의 학문을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의 착취 속에 고통받던 조선 민중을 위한 해결책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시대의 선구자였다. 비리와 모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했던 불운한 지성인,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불의한 시대가 빚어낸 대학자, 다산 정약용. 치열했던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노라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일꾼들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약용의 탄생 ▶▶ 임오년(1762, 영조 38) 윤(閏) 5월 21일, 영조의 두 번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뒤주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역사는 사도세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사도세자가 참극(慘劇)을 당한 지 24일 후인 6월 16일, 마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정재원(丁載遠)의 집에서는 새 생명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리게 되니, 이가 바로 뒷날의 다산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다산에게 ‘당쟁에서 벗어나 농촌으로 귀의하라는 의미’의 귀농(歸農)이란 아명(兒名)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시대는 귀농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비와 아들의 천륜마저도 끊어 놓았던 시대의 불의는 그를 세상 속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범한 소년, 다산 ▶▶ 다산의 비범함은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다. 4세 때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다산은 6세 때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7세 때 지었다는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가깝고 먼 곳이 같지 않네’ 라는 시를 보고서 그의 부친도 ‘분수에 밝으니 자라면 역법(曆法)과 산수(算數)에 능통할 것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또한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10세 이전에 지은 작품을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시집을 펴낼 정도였으니 다산이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독서와 작문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새로운 세계에 눈뜨다 ▶▶ 15세가 되던 해, 다산은 풍산 홍씨 홍화보(洪和輔)의 딸에게 장가를 든다. 처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서울을 자주 드나들며 자형인 이승훈(李承薰),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 이가환(李家煥), 이벽(李檗) 등과 교유(交遊)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다산은 성호의 유고(遺稿)를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학문에 대한 큰 뜻을 세우게 된다. 고리타분한 유학의 답습(踏襲)이 아닌 열린 미래를 지향하는 학문으로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23세가 되던 해, 다산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는데, 훗날 그의 삶에 숱한 비극을 안겨주게 될 천주교였다.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20대 청년 다산은 ‘신에 의한 천지창조와 영혼, 사후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다산이 비록 진산사건(珍山事件, 1791년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른 사건) 이후 천주교를 배교하였지만, 그가 탐독한 마테오리치(Matteo Ricci :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여러 천주교 서적은 훗날 다산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다산은 이 시기에 철학적인 면에서는 성호 이익의 영향을, 종교적인 면에서는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묵은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그만이 추구하는 새로운 학문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정조의 후원 속에 실학사상의 기초를 다짐 ▶▶ 다산은 28세 되던 해 봄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의 관료생활은 정조(正祖, 1752∼1800)가 재위한 12년의 기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산은 그 짧은 기간 동안 정조의 극진한 총애를 입으며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중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것은 화성(華城, 흙으로 지은 성이었으나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한 이후 화성이라 칭함) 축성이다. 다산은 서학서적을 참조하여 다양한 축성기술을 제시하였으며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화성 축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이렇게 축조된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화성[빛나는 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날까지도 18세기 건축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화홍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였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수원성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고 있는데, 일곱개의 아치형 수문위에 화홍문(북수문)이라는 누각을 세웠다.)
  
 정조의 후원을 등에 업고 벼슬길에 나가 있던 기간은 다산의 실학사상이 학문적 기초를 정립하고, 사회적 구현방법을 제시하여 다산 실학을 실험하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정조와의 만남은 다산이 39세 되던 해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매듭을 짓게 되었고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집의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지었는데, 『노자』의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정조 사후 그가 정적들 때문에얼마나 노심초사(勞心焦思)했는지 알 수 있다.
  
 수많은 저술과 역작을 남기다 ▶▶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는 아직 12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그 첫 해인 신유년(1801년), 남인을 주축으로 한 진보적 사상가들과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다산도 이때 경상도 장기(포항시 장기면)로 유배되었으나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黃嗣永帛書,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 사건으로 다시 잡혀오게 된다. 다행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전남 강진으로 다시 유배된다.
 


 (▲ 다산초당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곳으로 초가집이었던 것을 기와로 복원하였다.) 
 
 하지만 다산은 ‘비로소 여가를 얻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41세 때인 1802년 봄부터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고 시력도 급감하여 안경에 의지해서만 볼 수 있었다고 하니 다산이 저술에 얼마나 집중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유배기간 동안 다산은 『주역사전周易四箋』을 비롯하여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춘추고징春秋考徵』, 『중용자잠中庸自箴』, 『심경밀험心經密驗』,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등 정치, 경제, 역리, 철학, 의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실로 많은 양의 저서를 남겼다. 유배생활이 끝난 뒤에도 『흠흠신서欽欽新書』, 『역학서언易學緖言』등의 역작을 남겼는데, 그가 남긴 저술은 총 492권에 이르며 실제 저술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은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펼칠 기회를 끝내 얻지 못했으나 방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학문정신과 사상을 다음 시대에 남김으로써 자신이 맡은 시대적 역할을 실현했던 것이다.
 (◀ 정약용선생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 경기도 기념물 제7호.)
  
 
 그리고 1836년 2월 22일 아침,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노년의 대학자는 고향집에서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게 된다.  
 
 ‘상제문화(上帝文化)’의 회복을 주장 ▶▶ 다산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양명학, 노장사상, 불교 및 서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들을 섭렵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사상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자.
 
 상제님께서 흠잡을 데가 없다고 칭찬하시며 유도의 새 종장(宗長)으로 삼았을 만큼 주희는 불세출의 인물이었으며 또한 그가 유가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주희가 너무 위대해서였을까? 주희의 사후 500년이 지나도록 유학은 더 이상의 사상적 발전이나 변화를 추구하지 못한 채 상제님의 말씀 그대로 썩고 있었다.
 
 다산은 이러한 주자학의 공소성(空疏性)에서 벗어나 실천 지향적인 학문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 중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은 바로 다산이 ‘상제문화(上帝文化)’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이다.
 
 다산은 성리학의 관념적인 천(天)개념을 비판하며 인격적 존재로서 상제님을 얘기하였다. 다산 철학의 출발점이며,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우주 만물의 근거로서 비인격적인 이(理)와 기(氣) 대신에 인격적인 천(天), 즉 하느님(상제)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상제관은 저서 곳곳에 드러나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상제님이란 누구신가? 이는 천지신인(天地神人)의 밖에서 그것들을 조화하고 재제안양(宰制安養)하시는 분이다. 상제를 하늘이라 이르는 것은 마치 국왕을 ‘나라’라 하는 것과 같다. 저 푸르고 푸른 형체를 갖춘 하늘을 가리켜 상제라 하는 것은 아니다.’(『춘추고징春秋考徵』, 上帝者何 是於天地神人之外 造化天地神人萬物之類 而宰制安養之者也)
 
 ‘일음일양 하는 위에 분명히 이를 주재하는 상제님이 계시다.’(『역학서언易學緖言』, 一陰一陽之上 明有造化之本)
 
 ‘군자가 어두운 방 가운데 있을 때도 두려워하여 감히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상제께서 조림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중용자잠中庸自箴』, 君子 處暗室之中 戰戰慄慄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

 
 성리학에서는 理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존재론적 天으로 한정시키고, 그러한 천리(天理)가 인성(人性)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아 수양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天을 공경하며 天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사라짐으로써 인간의 현실에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주재자로서의 上帝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리학은 점점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지게 되었고, 이 고착된 이념의 둑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산은 간절히 상제님을 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지천(知天, 상제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상제님이 내려주신 천명을 깨닫는 것)’, ‘사천(事天, 상제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섬기는 것)’, 그리고 ‘격천(格天, 올바른 예법과 정성으로 상제님께 제사 드리는 것)’의 방법으로 상제님을 섬길 것을 주장하였는데, 우리 일꾼들이 눈여겨볼 내용이다.
 
 
 경세(經世)를 강조하다 ▶▶ 끝으로 다산은 무엇보다 실천윤리를 강조하였다. 성리학의 목적이 성인(聖人)을 이루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을 성취할 수 없었던 이유로 ①천(天)을 이(理)라 하고, ②인(仁)을 만물을 살리는 이(理)라 하고, ③『중용(中庸)』의 ‘용(庸)’을 평상(平常)이라 한 세 가지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응하여 성인이 되기 위한 그 자신의 조건으로 ①‘신독(愼獨)’하여 하늘을 섬길 것, ②‘서(恕)’에 힘써 인(仁)을 구할 것, ③항구(恒久)하여 중단함이 없을 것을 제시하였다.(『심경밀험心經密驗』)
 
 이처럼 다산은 성인도 끊임없는 ‘실천적 노력의 결과적 산물’로 인식했을 정도로 실천 위주의 사상을 추구하였다.
 
 또한 다산은 ‘군자의 학문은 자신을 닦는 것[修身]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牧民]이다.’(『목민심서서牧民心書序』)는 말로 경세(經世)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이 말에서 ‘다산 실학’의 완성은 백성을 다스려 세상을 바르게 경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치천하공부를 하는 상제님 일꾼들이 새겨봄직한 말이다.
 
 이밖에도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아, 하늘을 우러러 살펴보니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빽빽이 줄지어 있고 땅을 구부려 살펴보니 초목과 금수가 질서 있게 있는데, 이 모두가 사람을 비춰주고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고 사람을 길러주고 사람을 섬기지 않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라고 설파한 내용은 다산의 높은 식견을 잘 보여준다.
 
 
 경세(經世)의 참 일꾼 ▶▶ 당쟁과 집권세력의 공격 속에서 허물어진 꿈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대학자, 다산 정약용. 하지만 다산은 그의 원대한 사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없었다. 무능한 정권과 묵은 사상을 개벽하여 열린 시대를 지향했던 그였지만, 시대는 그에게 경세(經世)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이 이루지 못했던, 아니 이룰 수 없었던 실학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일꾼들일 것이다. 참하나님의 진리로 새 세상을 열어제치고 그 진리로 후천 5만년 새 세상을 경영하는 상제님의 일꾼들이야말로 진정 열매맺는 사람들일 것이다. 상제님 모든 일꾼들이 튼실한 열매를 맺어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하며 글을 줄인다.  
 
 <참고문헌>
 정약용, 『자찬묘지명』
 금장태, 『정약용, 한국실학의 집대성』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9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 김영사, 2004
 차성환, 『글로벌 시대 정약용 세계관의 가능성과 한계』
 김성일, 「茶山의 上帝思想 硏究」

 

출처: 증산도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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