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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大安門)을 덕수궁(大漢門)으로 바꾼 일제침탈의 망국의 역사

by 바로요거 2011. 4. 22.

경운궁(大安門) 덕수궁(大漢門)으로 바꾼 일제침탈의 망국의 역사

 

덕수궁 大漢門과 경운궁 大安門
 일제 침탈의 슬픈 역사를 돌아본다

 

 

1. 대한문(大漢門)에 관한 논란
 
 덕수궁(德壽宮) 대한문(大漢門)은 2004년 6월 초부터 보수공사 중이다. 심각한 훼손 상태 때문에 30여년만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계기로 이름에 관한 논란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덕수궁(德壽宮) 대한문(大漢門)’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일제침략이 본격화된 1905년의 을사늑약 후 1906년에 대안문(大安門)이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고 1907년에는 경운궁(慶運宮)이 덕수궁(德壽宮)으로 궁이름이 바뀐 사실이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렇게 궁궐 이름과 궁궐문의 이름이 바뀐 배경에는 일제의 침략적 의도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이번 보수공사를 계기로 다시 대안문(大安門)으로 이름을 환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선조임금이 1593년 행궁을 정하면서 동문에 대안문(大安門)이란 현판을 올리게 한 이래, 1897년 10월 고종황제가 경운궁(慶運宮)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원구단으로 통하는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하였다. 의정부참찬 민병석의 글씨인 '大安門'의 편액(위)1899년 3월에 걸렸다.

지금 이 편액은 궁중유물전시관의 소장품(유물번호 674)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대한문(大漢門)에 매달린 편액(아래)은 궁내부특진관 남정철(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음)의 글씨이며, 1906년 5월에 등장했다.) 
 
 다른 이들은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에 즉위하면서 큰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므로 일제에 의해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대한문(大漢門)에 관한 이러한 논란속에서 필자는 본고를 통해 대한문(大漢門)에 대한 세간의 논란을 정리해보고, 더불어 덕수궁(德壽宮)이라는 궁이름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필자가 비록 역사학자나 문화재 연구가는 아니지만, 일제 치하에서 우리 문화유산이 입은 정신적인 상처가 확인된다면 이를 치유하고 바로잡는데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모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졸고를 집필한 것임을 밝혀둔다.
 
 
 2. 대한문(大漢門) 개명에 대한 쟁점사항 및 상반된 견해
 
 (1)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개악이라는 주장
 
 려중동 교수(경상대학교), 정준영 대표(역사교훈실천시민운동연합) 등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한 것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개악이므로 대안문(大安門)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한말의 당시 시대상황을 간략히 짚어보자. 1895년 8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관으로 옮겨 지내다가(아관파천) 1897년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인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원구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원구단과 경운궁(慶運宮)을 잇는 길을 통천로(通天路)라 하였고, 정문은 옛 이름 그대로 대안문(大安門)으로 하였다.
 
 그런데 1904년 4월 경운궁(慶運宮)에 의문의 대화재사건이 발생했다.
 
 정준영 대표 등은,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2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화재로 불탄 경운궁(慶運宮)을 복구한다는 미명하에, 불타지도 않았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하여 ‘놈 한(漢)’자를 넣어 큰놈이 사는 대궐문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금의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악한 것이라고 한다.
 
 
 (2) 고종황제의 칙명에 의한 자발적인 개명이라는 주장
 
 한영우 교수(한림대)나 이태진 교수(서울대) 등은, 1906년에 쓰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鑑儀軌)의 내용으로 보아 대한문(大漢門)은 대한제국의 광영을 앞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고종황제의 칙명에 의한 자발적인 개명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은 의궤의 내용에서 ‘대한(大漢)은 소한(?漢)과 운한(雲漢)이라는 하늘의 뜻을 취한 것’이라 밝히고, 황제께서 칙명을 내려 대한정문(大漢正門)을 세우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늘에 천제를 올리는 일은 황제만이 할 수 있고, 대한문(大漢門)이 천제를 올렸던 원구단을 향하고 있었기에 큰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일은 황제만이 할 수 있다”며 “대한문(大漢門)은 본디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며 하늘을 향해 제를 올렸던 원구단(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을 향하고 있었기에 큰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 덕수궁(德壽宮)에 깃든 망국의 슬픈 역사
 
 대한문(大漢門) 개명에 관한 논란을 바르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운궁(慶運宮)의 역사를 살펴보고, 1907년 경운궁(慶運宮)이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이 바뀐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에도 있었다. 정종(定宗)은 왕위를 자신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를 위해 개성에 덕수궁(德壽宮)을 지었다. 태종(太宗)이 한양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德壽宮)이라 하였다.
 
 현재의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초의 덕수궁(德壽宮)과는 무관하게 선조가 현재의 자리에 행궁(행궁이란 본래 왕이 왕릉에 행차할 때 하루나 며칠 묵을 곳이 필요하여 경유하는 군현의 관아에 마련한 것을 의미한다)을 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피난하였던 선조가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하게 되어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자리에 행궁을 정한 것이다. 선조는 승하시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를 보았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3년(1611년)에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거한 이후로 점차 퇴락하다가 구한말 고종이 수리를 명하기까지 한적한 별궁에 불과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1896) 1년만인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의 수리를 명하고, 같은 달 20일 정문인 인화문을 통해 환어하였다.
 
 고종의 환궁 뒤 개화파와 자주적 수구파들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로 힘을 모아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였다. 우선 ‘칭제’는 뒤로 미루고 ‘건원’을 하기로 하여, 1897년 8월 16일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이어 고종과 정부는 1897년 9월 27일부터 ‘칭제’를 위한 본격적 준비작업을 시작하여 남별궁 영빈관터에 원구단을 착공하는 한편, 경운궁(慶運宮) 즉조당 현판을 태극전으로 바꾸었다. 또 원구단과 경운궁(慶運宮)을 잇는 길을 통천로라 하였다. 그리고 경운궁의 정문은 남문이었던 인화문이었는데,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大安門이라는 이름은 처음 행궁을 정한 선조임금이 선조26년(계사년) 직접 지었다고 한다)을 정문으로 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에는 고종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에서 황천상제께 천제를 올리고 나서, 경운궁 태극전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와 동시에 황제와 정부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정하여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대한이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반포 후에도 국세는 계속 기울어 가고, 아관파천 후 주도권을 잡은 러시아와 각축전 속에서 일본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져 갔다. 러시아의 극동함대 사령관의 인천상륙으로 일본과 러시아간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1903년 12월 22일 고종황제가 거처하는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앞에서 상상치도 못한 신비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색 고깔을 쓴 무당이 대안문 지붕 용마루에서 지상으로 연결시킨 밧줄을 타고 성큼성큼 걸어 내려오면서 갑자기 큰 소리로 “대안 대왕(大安 大王) 강천(降天)이시다. 고종 황제는 속히 나와 대왕을 맞으라!” 하고 호통을 친 것이다. 무당이 고종황제를 빨리 대령하라고 계속 호통을 치니 지나가는 행인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대안문(大安門) 앞 통천로와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새로운 대왕이 나온다는 말에 민심은 동요되어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이듬해인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 세력을 꺽기 위하여 일본함대가 러시아의 여순군항을 침공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듬해 9월5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총칼을 앞세우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도움을 받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에 따라 고종이 거처하던 경운궁(慶運宮) 중명전에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1906년 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덕수궁 배치도 색칠한 부분이 1904년 의문의 화재로 불타버린 전각.
 자료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15-서울』(한국문화 유산답사회 엮음. 돌베개2004)

 
 
 그런데 1904년 4월 고종황제가 있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의문의 대화재사건이 발생하자, 1906년 6월 이토 히로부미는 대화재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함령전,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과 각 전각을 복구하도록 했는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이토 히로부미가 불타지도 않았던 대안문(大安門)도 수리하도록 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하여 상량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외교주권을 빼앗긴 고종황제는 의병의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해외에 밀사파견을 추진하였다. 1907년 7월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어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면서 고종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순종으로 그 뒤를 잇게 하면서 궁호를 덕수(德壽)라 하였다.
 
 
 4. 경운궁(慶運宮)인가 덕수궁(德壽宮)인가?
 
 ‘대안문(大安門)인가 대한문(大漢門)인가’의 문제를 검토하기 이전에 ‘경운궁(慶運宮)인가 덕수궁(德壽宮)’인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왕위에서 물러난 상왕이 머무르는 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였다.
 
 그리고 선조임금이 임진왜란 후 환도하여 지금의 자리에 행궁을 정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1611년 경운궁(慶運宮)이라 명한 이래 약 300여년 동안 궁이름은 경운궁이었다. 또 비운의 고종황제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쳐 환궁한 곳이 경운궁(慶運宮)이었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곳도 경운궁(慶運宮)이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경운궁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야욕의 화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를 강제 폐위한 후 덕수궁(德壽宮)이라 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경운궁(慶運宮)이 조선과 대한제국이 정한 궁이름이라면, 덕수궁(德壽宮)은 일본 제국주의가 정한 궁이름이다.
 
 물론 현재의 덕수궁(德壽宮)이 경운궁(慶運宮)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경운궁으로 개명한 후 일본제국주의는 계속적인 축소 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시절의 경운궁에 비하여 그 규모가 3분의 2 정도로 위축되었다. 또 주변환경 역시 구한말의 슬픈 역사를 증거하듯 열악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아직까지도 당시 주변 건물이나 대문 등이 제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대한문(大漢門)만 해도 1960년대 태평로 확장공사로 인해 제 위치보다 14미터나 뒤로 물러나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제 점령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둘 수도 있겠지만,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는 입장에서 보면 덕수궁(德壽宮)의 이름은 마땅히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원해야 할 것이다.
 


 (▲ 대안문(大安門) 대한문으로 현판이 바뀌기 이전의 대안문(위, 사진제공: 코리안 포토 정성길)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을 오가는 사람들이, 대한문 현판에 얽힌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를 알고 있을까?)

 
 
 5. 대안문(大安門)인가 대한문(大漢門)인가?
 
 이 논쟁에서 중요한 사실은 대안문(大安門)이라는 이름은 1897년 고종황제가 처음 붙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593년 계사년에 선조임금이 의주에서 환도하여 지금의 자리에 행궁을 정하고, 나라는 태평스럽고 백성을 크게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담은 대안(大安)이라는 이름을 지어 동쪽 대문에 현판을 걸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선포시까지 남쪽의 인화문(지금의 중화문 앞쪽에 있었다고 한다)이 경운궁(慶運宮)의 정문이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선포를 계기로 경운궁(慶運宮)의 동쪽에 설치된 원구단과 통천로로 이어지는 대안문(大安門)이 정문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약 10년동안 대안문(大安門)이라는 이름은 변동이 없다가 1906년 2월부터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경운궁(慶運宮) 중명전에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때 이미 고종황제는 주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화재로 불탄 경운궁(慶運宮)의 전각들과 불타지도 않은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여 상량하도록 한 것은 고종황제가 아니라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고종황제는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와신상담하며 의병지원과 밀사파견을 추진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불타지도 않은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도록 할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히려 선조임금이 대안문(大安門) 현판을 올린 지 약 300여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한지 약 9년만에 대안문(大安門) 현판을 내리고 대한문(大漢門)을 현판으로 한 것은 고종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통감정치를 시작하여 대한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를 표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경운궁중건도감의 글귀만을 보고 대한제국의 광영을 앞세우기 위해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문(大漢門)을 현판으로 하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자전에 한(漢)이 은하수를 뜻한다고는 되어 있으나, 굳이 만백성이 다 아는 하늘 천(天)자를 사용하여 대천문(大天門)이라 하지 아니하고, 소한(?漢)과 운한(雲漢)이라는 하늘의 뜻에서 한(漢)자를 취하여 대한문(大漢門)이라 하면서 하늘과 통하는 큰문이라는 뜻을 취하였다는 것 또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과거 경부선을 지나면서 ‘태전(太田, 지금의 대전)’에 이르러 클 태(太)의 기운이 크다하여 점 하나를 빼고 ‘대전(大田)’으로 지명을 바꾸도록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경운궁(慶運宮) 중건 당시 고종황제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경운궁(慶運宮)의 고종황제 거처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광영을 위하여 큰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의 현판을 올리게 했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에 방해가 되는 고종황제를 비하하여 ‘큰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의미로 대한문(大漢門)이라 하였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6. 글을 마치며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이 본래의 경운궁(慶運宮)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도 아닌 현실에서, 또 덕수궁(德壽宮)의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한문(大漢門)을 대안문(大安門)으로 그 이름을 환원하자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선후가 뒤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광복 후 건국과정에서 특정 정치세력에 의하여 일제의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 우리의 주변에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우리 역사의 혼과 정신을 말살한 식민사관이 아직도 우리의 역사 교육에 뿌리깊게 남아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가리어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대한문(大漢門)의 이름을 바로 잡아 대안문(大安門)으로 고치고, 덕수궁의 본 모습인 경운궁(慶運宮)을 되찾고, 나아가 우리 한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되찾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길 바랄 뿐이다.

출처: 증산도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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