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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미스테리와 관운장(관우 대장군)

by 바로요거 2010. 11. 25.

1차 세계대전의 미스테리와 관운장(관우 대장군)

 

천하영웅 관운장

 

관운장(關雲長, ?~219). 관우(關羽). 촉의 장수로 자는 운장(雲長). 송대 이후에 관제묘(關帝廟)가 세워져 무신(武神), 군신(軍神), 복록 장수신(福祿 長壽神)으로 모셔지는 등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만력 42년(1614) 제호(帝號)를 받으며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에 봉해졌다. 세속에서는 ‘관성제군’, ‘관제(關帝)’라 불린다.
166:4 관운장은 의리와 용맹의 표상으로 그의 대인대의(大仁大義)를 기려 역대 왕조에서 거룩할 성(聖), 임금 제(帝), 임금 군(君) 자(字)를 놓아 성제군(聖帝君)으로 추앙해 왔다. 우리 민족이 관운장을 경애하여 잘 받들어 주어 관운장이 삼보조선(三保朝鮮)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적벽대전 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공을 세우며 화용도에서 조조를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조조에게 입은 후의厚誼를 생각하여 그를 놓아줌으로써 은혜를 갚는다. 후에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해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합공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신도의 병마대권자 관성제군
❁ 관운장(關雲長)은 병마대권(兵馬大權)을 맡아 성제군(聖帝君)의 열(列)에 서게 되었나니 운장이 오늘과 같이 된 것은 재주와 지략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의리 때문이니라.
천지에서 으뜸가는 보배, 의로움
천지간에 의로움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은 없느니라. 하늘이 하지 못할 바가 없지마는 오직 의로운 사람에게만은 못 하는 바가 있느니라. 사람이 의로운 말을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천지도 감동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천지의 모든 보배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의로움을 가장 으뜸가는 보배로 삼느니라. 나는 추상 같은 절개와 태양같이 뜨거운 충의(忠義)를 사랑하노라. (증산도 도전 4:15)

 

관운장에게 세계 대전쟁의 천명을 내리심
❁ 4월에 신원일을 데리고 태인 관왕묘 제원(關王廟 祭員) 신경원(辛京元)의 집에 머무르실 때 하루는 원일, 경원과 함께 관왕묘에 가시어 관운장(關雲長)에게 천명을 내리시며 공사를 행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동양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약소국을 건지려면 서양 열강 사이에 싸움을 일으켜야 하리라.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극진한 공대를 받았으니 그 보답으로 당연히 공사에 진력 협조함이 옳으리라.”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며 관운장을 초혼하시니 경원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이상히 생각하니라. 이 때 자못 엄숙한 가운데 상제님께서 세계대세의 위급함을 설하시고 서양에 가서 대전쟁을 일으키라는 천명을 내리시거늘 관운장이 감히 거역할 수는 없으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는지라상제님께서 노기를 띠시며 “때가 때이니만큼 네가 나서야 하나니 속히 나의 명을 받들라. 네가 언제까지 옥경삼문(玉京三門)의 수문장 노릇이나 하려느냐!” 하고 엄중히 꾸짖으시니라. 관운장이 그래도 대답을 아니하매 상제님께서 관운장의 수염을 휙 잡아당기시고 옷을 찢어 버리시니 이 때 조상(彫像)에서 삼각수(三角鬚) 한 갈래가 바닥에 떨어지니라.이렇게 하룻밤을 지새시며 ‘이놈, 저놈’ 하고 불호령을 내리시거늘 관운장이 마침내 굴복하고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서양으로 가니라.  이후에 김경학(金京學), 최창조(崔昌祚), 최내경(崔乃敬), 최덕겸(崔德兼) 등 태인 사람들이 상제님의 면모를 숭배하여 상제님을 따르니라.


여기서 무슨 제사를 지내느냐
그 뒤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김성연(金成淵)과 함께 말을 타고 관왕묘에 이르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냈는데 여기서 무슨 제사를 지내느냐.” 하시고 성냥을 그어 관왕묘에 불을 지르려 하시다가 성연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시니라. (5:166)

 

관운장의 서양 대전쟁 공사
❁ 하루는 낙범에게 물으시기를 “관왕묘에 치성이 있느냐?” 하시니 낙범이 “있나이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관운장이 지금 이 지방에 있지 않고 서양에 가서 큰 난리를 일으키고 있나니 치성은 헛된 일이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5:401)

 

1차세계대전의 미스테리 비화

 

세계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사라예보 방문 오스트리아 황태자 저격사건` 프린치프가 황태자를 저격할 때의 심경(쿠오바디스,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P197쪽

"쏴야 할 것인가 , 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어떤 이상한 감정이 나를 황태자로 다가서게 . 심지어 내가 서 있던 보도에서 내려서게 만들었어요.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내가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도, 심지어 내가 누군가에게 총을 쏘앗는지, 쏘지 않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쿠오바디스,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P197쪽

 

 

 

*1914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재무상이었으며 후일 영국 수상

(1916~1922)을 지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8월 4일 밤 참전 결정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악마의 손에 의해 궤도에서 떨어져 나와 미지의 공간으로 내동댕이 처진채 팽이처럼 미친듯 돌아가고 있는 혹성에 서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 1910년 5월 6일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왕의 장례식에서 왕의 친구이자 자문관이었던 에서경의 말:: 이와같은 붕괴는 일찌기 없었다. 우리삶의 水路를 표시해온 낡은 浮標들이 모두 휩쓸려가버린 느낌이다.(구질서의 붕괴)


그 당시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전쟁을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갔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1차 세계대전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미스터리와 해프닝의 연속 끝에 발발한 기묘한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참고 : 몽스 전투의 비화 ANGEL OF THE BATTLEFIELD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한 전투중 하나인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3배나 많은 수의 독일군을 맞아 고전하던중 영국군의 한 보병중대가 퇴각하자 독일군들이 맹렬한 속도로 추격해왔다. 바로 그때 '천사부대'가  나타나 독일군 앞을 가로막았고 혼비백산한 독일군은 사방으로 도주해버렸다. 이로써 영국군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계 상식 백과 동아출판사 1989 376쪽)
<독일군의 전진을 막은 몽스 전투의 천사들> The ‘Angels of Mons’ halt the German advance; a picture by Alfred Pearce in A Churchwoman’s 1915 book The Chariots of the Gods

 

 

삼계 복마를 물리치는 운장주를 내려 주심

 

❁ 기유년 봄에 와룡리에 사는 황응종이 누런 암탉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상제님께 올리니 말씀하시기를 “황계(黃鷄)가 동하니 필시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조짐이라. 어서 관운장을 불러 화용도(華容道)의 목을 단단히 지키게 하리라.” 하시고 일어서시어 멀리 청도원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시니 문득 동남풍(東南風)이 일어나니라. 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형렬에게 그 닭을 삶아 오게 하시어 성도들과 나누어 잡수신 뒤에 운장주(雲長呪)를 써 주시니 이러하니라.또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대차력주(大借力呪)니라.” 하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한 번 보아 외우게 하시니 이 때 참석한 사람은 형렬, 공숙, 찬명, 자현, 갑칠, 송환, 광찬, 응종 등이더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운장주를 많이 읽으라.” 하시니라. (5:363)

 

관왕묘 [關王廟]


중국 삼국시대의 명장인 관우(關羽)를 모시기 위하여 세운 묘당(廟堂).
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壬辰)·정유년(丁酉年) 왜란 때에 원정왔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워졌다.
최초로 세워진 것은 1598년(선조 31) 서울의 숭례문(崇禮門:지금의 남대문) 밖에 건립된 남관왕묘이다. 남관왕묘는 명나라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요청으로 건립되었다.

 

서울에 건립된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1602년 봄에 준공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방에서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을 전후하여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4곳에 건립되었다. 강진의 관왕묘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고금도에 세웠고, 1684년 개수하면서 이순신(李舜臣)과 진린을 별사(別祠)에 배향했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했다. 처음에는 안동 성내에 있었으나 1606년 서악의 동대(東臺)로 옮겼다. 성주의 관왕묘도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세웠다. 처음에는 성주성 동문 밖에 있다가 1727년(영조 3) 남정(南亭) 아래로 옮겼다. 남원의 관왕묘는 서문 밖에 있으며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건립했다. 그뒤 고종 때에 와서 다시 서울에 북묘·서묘를,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 세웠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과 중구 장충동에 남아 있는 관성묘가 각각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호와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166:1 태인 관왕묘.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항가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1891년에 전(前) 참봉 송석진의 꿈에 백마를 탄 관운장이 며칠 동안 나타나, 그가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키며 “이 자리에 있고 싶다.” 하여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자묘를 문묘(文廟)라 하는 데 비해 관성제군의 묘는 무묘(武廟)라 한다.


관운장이 되시어 공사 보심
❁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우를 데리고 태인 새울에서 백암리로 가실 때 갑자기 관운장(關雲長)의 형모로 변하시어 돌아보며 물으시기를 “내 얼굴이 관운장의 형모와 같으냐?” 하시거늘 공우가 바라보매 용안과 체격이 관운장과 아주 흡사하더라. 이에 공우가 놀랍고 의아하여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그와 같이 세 번을 물으시거늘 공우가 ‘이 물으심에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뢰기를 “관운장과 흡사하옵니다.” 하니 그제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시고 경학의 집에 이르러 공사를 행하시니라. (5:264)

 

관운장의 삼보조선
삼보조선 : 조선에서 관왕묘를 세워 극진히 대접을 하여 관운장이 조선에 세번 보답을 한다는 뜻 

 

춘산채지가 - 남조선뱃노래 편 중에서
도원결의 하실적에 만고대의 누구신고 /
황금갑옷 떨쳐입고 적토마상 비껴앉아 봉의 눈을 부릅뜨고 삼각수를 거사리고 /
청룡도를 손에들고 중원회복 하려들 제 추상같이 높은의리 만고일인 이아닌가 /
임진출세 하실적에 삼보조선 하신다니 무섭더라 무섭더라 의리 의자 무섭더라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구절이 보인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 주어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싸움, 홍산싸움 때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까지 차지하니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곧이어 명나라 여송의 구원병이 들어 닥쳤다. 조명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되찾으려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왜군도 만만치 않게 버티니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수천의 신병이 나타나 왜병을 치는지라 마침내 빼앗겼던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날 칠흙같이 어두운 밤 신병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관운장.

▶ 때는 선조대왕 25년 어는 봄날이다.
선조대왕께서는 촌곤을 못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산에 위퐁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고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 와 동생(장비)는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겨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 ~ 8년이나 걸릴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테니 주저말고 시행하게."하고 선연히 사라졌다. 깨고 보니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아찔하고 머리가 핑돌았다. 대왕은 조정의 백관과 더불어 방책을 논의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힘없는 조정은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임진왜란 때 관운장이 현몽한데로 선조 25년 4월 왜군 15만이 부산에 상륙하여 쳐들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인 것이다. 막아낼 재주가 없는 선조대왕은 서울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가니 삼천리 강산은 초토화가 되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 이 틈에 많은 보물과 문화재는 왜적들의 손에 들어갔고 피난민들은 쫓기다 굶어죽은 자가 부기지수였다. 임진왜란이야 말로 개국 오천년 이래의 대참살전이었는데 자칫하면 국맥이 끊어질 뻔한 위기에까지 다달았다.

<명나라 신종>

선조대왕께서는 의주에서 사신을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李如松)을 총수로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였는데 마침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전쟁은 가까스로 끝이 났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간에 겪은 말할 수 없는 오욕과 회한과 비통과 수모를 어찌 다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관우의 현몽이요,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관제묘를 건립하였는데 명나라 신종황제는 사신을 보내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후에 수많은 관왕묘에 이땅에 세워지게 되었고 극진한 대접과 공경을 받게 되었다.

 

조자룡

 

촉나라를 세운 맹장 다섯 가운데 마지막에 이름이 등장하는 장수로 지명도가 높지만 아쉽게도 조운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령 상산군 진정현 출신이라는 것은 기록되어 있지만, 몇년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정사의 첫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운전] 조운은 자를 자룡이라고 하며, (병주) 상산郡 진정현 사람이다. 원래 공손찬의 배하였으나, (192년 즈음) 공손찬이 선주를 파견하여 전해를 도와 원소를 막게 할 때, 수행하면서부터 주기(主騎)가 되었다.

 

일단 유비를 섬겼으나 친형이 죽는 바람에 상을 치르기 위해 잠시 곁을 떠났다가 200년, 유비가 원소를 의지할 때에 다시 찾아와서 장수가 되었습니다.
주로 경호를 맡았으며 208년 9월에는 당양에서 조조의 기병대에게 패할 때 유비의 아들 유선과 감부인을 구했습니다.


212년, 제갈량을 수행하여 익주공격에 참가했고 전공을 세워 승진했고, 219년 조조와의 한중공방전 때는 또 한사람의 맹장인 황충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221년, 관우가 오나라의 배신으로 처형된 것에 분노하여 유비가 복수전에 나서고자 할 때에 극력 반대하지만 유비의 뜻을 꺾지 못하고 남쪽 강주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227년, 제갈량의 1차 북벌 때에 선봉이 되어 조진의 군대를 유인함으로써 본군이 옹주 3군과 가정을 기습점령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이 때 조운의 군대는 적고 조진의 군대는 많았으므로 싸움에 졌다. 다만 병사를 독려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29년, 북벌이 한창일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은 뒤에는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시호를 추증받았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조광은 263년에 촉나라가 망할 때, 강유를 따라 전장에 나섰으며 그곳에서 전사했습니다

 

제가 제 일을 해야 하느니라
삼제갈(三諸葛), 팔한신(八韓信), 관우, 장비, 조자룡, 진묵대사, 사명당이 때가 때인 만큼 일제히 나서나니 만고의 성인 오시는데 오방신장(五方神將) 이하로 신명맞이 어서 하소.나 살고 남 살리는 공부니 사람 잘되기를 바라소.  지난 일은 생각 말고 오는 일을 되게 하라.  제가 제 마음을 찾아야 되고 제가 제 일을 해야만 되느니라  (11:123)

 

무슨일을 해봐도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의욕이 떨어지고 되는일이 없는 맥빠지는 인생!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과연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또한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 수 있는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온갖 자연재해. 세계 경제 위기. 일촉즉발 남북문제. 신종플루 대유행과 슈퍼박테리아 등 전염병은 끝난 것인가? 불확실한 현실 그리고 인류의 미래,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지금 우리가 당장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시대적 상황을 잘 파악하여 지구촌 대세의 흐름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위기와 불확실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고급정보를 습득해서 이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바라볼 줄 아는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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