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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천거한 유성룡 선생

by 바로요거 2009. 11. 2.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천거한 유성룡 선생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나니까 임진왜란 발생 13년 전인 선조 12년 1579년 2월, 나이 35세, 이순신은  종8품(지금의 소위계급 정도)에 임명되어 국방부 산하 서울 훈련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근무지 훈련원은 군사들의 인사와 교육 등을 담당하는 부서였고, 훈련원내에서 직책은 ‘봉사’로써 가장 하위직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중요한 군내 인사를 담당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직속상관인 병조정랑(정5품, 현재의 국장급 혹은 과장급 정도, 실무를 총괄하고 장차관과 함께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 서익이 자신의 친족을 서열을 건너뛰어 정7품 참군으로 특진시키려고 하였다. 누구나 힘과 권력과 돈이 있으면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지인들로부터 청탁이나 유혹을 많이 받게 되는 법이다. 또 당시는 정치가 당쟁으로 시끄럽고 관료사회는 부패되어 공무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공공연히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었고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였다. 특히 국방부는 상하 복종을 우선시하는 군대사회였다.


서익은 이순신보다 3살 위였고, 성품도 사나워 동료들조차 말다툼을 꺼리는 인물이었고, 이순신보다 몇 단계 높은 직속상관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순순히 상관의 부탁을 들어주고 술 한잔 받아먹으면 그만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누구도 이를 손가락질 할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한 두 번 쯤 하는 일들이니까.


그러나 이순신은 인사사무담당관(종8품)으로서 이것이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서익에게는 충격이었다. 모두들 놀랐다. 의외의 반대에 부딪힌 서익은 계급과 힘을 앞세워 한참 부하인 이순신에게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야, 출세하고 싶으면 내 말 들어라! 내 말 들으면 너 뒤를 봐줄게.’ ‘너 밥줄 잘리고 싶어. 한직으로 보내줄까...’ 등등.


서익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이순신은 ‘죽일려면 죽여라.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옳지 않은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자세로 막무가내였다. 한마디로 막가파였다. 서익은 끝내 이순신의 소신을 꺽지 못했다.  나이 차이는 3살 차이 였지만 계급상 저 아래 부하인 소위에게 국방부 국장(혹은 과장)이 한마디로 쪽 팔린 것이다. 아마 하루만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몇 일에 걸쳐 이순신을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사건은 국방부내에 소문이 쫙 퍼졌고 심지어 국방부장관에게도 이 일이 알려지고 말았다. 모두들 이순신 소위의 기개에 박수를 보냈고 서익의 쪽팔림을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서익은 이 일로 인해 이순신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훗날 이순신에게 해꼬지를 하게 된다.

 


 옹졸한 서익, 앙갚음하다 - 이순신 첫 파직의 아픔

 

                               야비하고 비열한 반칙은 안되요!


이순신이 36세 되던 해 7월에 지금의 고흥 내발리에 있는 발포의 만호(종8품 -> 종4품 특진, 지금의 대대장급)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아마 유성룡의 추천과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순신의 성격상 청탁을 한 것으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게 발포에서 근무하던 중 38세 되던 1582년 1월, 딱 임진왜란 발발 10년전이다. 이전에 훈련원시절 상관이었던 서익이 특명을 받아 군기를 검열하는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에 내려오게 되었다. 서익은 훈련원시절 자신의 친척을 특진시키려다 이순신의 반대로 좌절된 일이 있었다. 그 후로 마음속에 ‘이순신 어디 두고보자. 언젠가는 내가 너를 박살내주마!’하고 앙심을 품고있었다. 아, 서익이 옹졸하고 속이 좁죠.

 

이순신의 부대는 군사훈련은 물론 군기와 내부정돈 등에 전혀 문제점이 없었지만 서익의 마음속에는 복수의 불길만 타오를 뿐이었다. 서익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순신을 한번 물 먹일까’ 그런 생각뿐이었다. 부대를 점검하고 돌아간 서익은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보고 들은 것과 정반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순신의 부대는 전혀 군기를 정비하지 않았다. 부대훈련은 엉망이었다. 부대장으로서 자신의 맡은 책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 부대원들의 훈련자세는 개판이고 기강은 해이해져 있다고. 그래서 이순신은 부대장의 자격이 없으며 군인으로서도 실격이라고. 그래서 파직해야 한다고. 이렇게 보고서를 올렸다. 결국 이순신은 서익의 악의에 찬 보고로 파면당하고 말았다. 서익의 앙갚음이 성공한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잘못된 자신의 처사에 대들었다고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여 힘 없는 부하에게 앙갚음한 서익. 이러면 안되죠. 

 

남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

 

 

증산도 도전

 근세 한민족의 사상적 원류인 증산도를 창도하신 강증산 상제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만일 한 신하가 오직 정성스럽고 한결같을 뿐 다른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착하고 아름다워 포용함이 있는 듯하여 남이 가진 재주를 자기가 가진 것처럼 아끼고 남의 훌륭함과 통달함을 마음으로 좋아하되 비단 말뿐이 아니라면 이는 남을 포용하는 것이니라. 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것이니 또한 이롭다 할 것이니라.

 

남이 가진 재주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남의 훌륭함과 통달함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지 못하리니 또한 위태롭다 할 것이니라. 나라의 흥망(興亡)이 이 두 마음에 달려 있고 신하로서 충성하느냐 반역하느냐가 이 두 마음에 달렸느니라. 또 천하사의 성패가 또한 이 두 마음에 매여 있느니라.


그렇지요. 강증산 상제님의 말씀대로 남의 재주를 아끼고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자손과 백성을 보존하고 사회에 이로운 사람이며, 남이 가진 재주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그 훌륭함과 재주를 드러내지 못하게 방해하는 놈들은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지요. 서익같은 사람은 후자에 해당될 것이고,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하여 높은 관직에 나아가게 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유성룡같은 분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죠.

 


유성룡,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해 나라를 구하다

  

                 선조의 마음을 움직여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유성룡


선조 23년 1590년 7월 46세인 이순신은 정읍현감에서 유성룡의 천거로 종3품직인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간원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되었다. 다시 1개월 뒤 평안도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으나 이것 역시 사간원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되었다. 이듬해인 선조 24년 1591년 2월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부임도 하기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고, 가리포 수군첨절제사로 부임하기 전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줄여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년 2개월 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좌의정 겸 특명 이조판서로 있던 유성룡의 강력한 천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당시의 정황에 대하여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왜가 군사를 움직인다는 소식이 날로 급해지자 위에서 비변사에게 명하여 제각기 장수될 만한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므로 내가 순신을 천거하여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켰는데, 그러한 갑작스러운 승진을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조실록을 보면 당시 사간원에서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임명하시니 관직 남용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반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유성룡은 이순신만 천거한 것이 아니라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정랑으로 있던 권율도 의주목사로 추천하였으니 실로 유성룡의 사람보는 눈은 정확했다.


만일 유성룡이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지 않았다면, 사간원과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를 이겨내지 못했다면 임진왜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이순신과 권율의 능력이 탁월했다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 대대장급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파직되어 초야에서 살아갔다면 이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혁혁한 전공을 올려 조국을 구한 이순신 장군과 권율장군의 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러한 인물을 천거하여 이나라를 구하게 한 유성룡선생의 공덕도 두 분 못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도 유성룡 선생처럼 내 한몸 잘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능력있는 주위의 인물들을 도와주고 밀어주는 상생의 정신으로 인생을 한 번 살아보자!  그런 상생의 정신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또한 나를 밀어주고 도와주는 사람도 생기지 않겠는가!


-참고자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사

개벽실제상황, 안경전, 대원출판사

부활하는 이순신, 황원갑, 이코비즈니스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 김종대, 북포스

이순신의 두얼굴, 김태훈, 창해

징비록, 김흥식옮김, 서해문집

이순신 실록 통곡, 이우각, 숲속의 꿈

다시쓰는 임진대전쟁1.2, 양재숙, 고려원

임진왜란 해전사, 이민웅, 청어람미디어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순신역사연구회, 비봉출판사

일본과 임진왜란, 최관, 고려대출판사

 

사진제공: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국방부 사이트

               월드컵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