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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요하문명(홍산문화)의 주인공인 한민족(동이족)[한민족역사찾기]

by 바로요거 2010. 9. 30.

요하문명(홍산문화)의 주인공인 한민족(동이족)[한민족역사찾기]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10.04월호

 

4, 다큐 다시보기

 

요하를 무대로 문명의 새벽을 연 사람들
 
 BCE 6000년, 만주 요하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황하문명보다 훨씬 앞선 고대문명. 특히 BCE 3500년경 꽃 핀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대규모 적석총, 제단, 신전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이 지역에 이미 초기국가 단계에 진입한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을 무대로 문명의 새벽을 연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하 내용은‘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KBS TV 역사스페셜, 2009.8.29 방영) 방송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
 만주벌판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이 하나 있다. 바로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요하(遼河)다. 최근 들어 이 요하 일대에서 고대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른 시기에 유적과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간 수수께끼 같았던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드넓은 땅 만주(滿洲).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그곳에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赤峰市)에 있는 홍산(紅山). 붉은 산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1984년 중국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5000년전의 여신상(女神像)이 발견된 것이다. 전 세계로 타전된 이 발굴소식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요하문명’이라 불린다. 세계 4대문명 중 탄생이 가장 늦었던 중국문명은 이로써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요하문명을 연구해온 이형구 교수는 이곳이 중화민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요하문명의 꽃, 홍산문화
 ● 우하량의 여신상 여신상(女神像)이 발굴된 우하량은 요하문명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다. 신전(神殿)을 비롯해 기원전 3500년 시기에 홍산문화 유적이 집중된 곳이다. 이곳에서 여신상이 발굴된 것은 홍산문화의 발굴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건 당시 홍산인들의 얼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엄청난 수확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지금으로부터 5500년에 이런 여신을 모신 신전이 발견됐다는 것은 대단히 큰 사건이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_ 이형구 교수 (선문대 역사학과)
 
 더욱 놀라운 것은 여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5500년전 반 지하식 건물이었던 여신묘(女神墓)에는 각 방마다 크기가 다른 여신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 시베리아보다 2천년 앞선 적석총 우하량 제2지점. 원형 및 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돌무지. 한 변이 20미터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3단으로 쌓아올린 돌무지무덤, 적석총(積石塚)이다. 이런 계단식 적석총은 중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묘제(墓制)다. 바로 옆에선 27기의 석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중국 학계를 또한번 놀라게 했다.
 
 “이런 석관을 쓰는 묘제는 한반도나 요동반도, 시베리아 북방벨트를 따라서 많이 분포되고 있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이런 석관묘가 발굴되고 있습니다. 시베리아보다 2000년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_이형구 교수
 
 그동안 적석총의 기원이 시베리아라는 학설을 뒤집어버릴 만한 엄청난 발견이었다. 무덤은 사각형, 제단은 원형으로 만들었다. 거의 허물어지고 윤곽만 남은 제단의 둘레에선 대량으로 토기(土器) 편(片)이 발굴되었다. 흙으로 다지고 돌을 쌓아올려 만든 3단의 원형제단을 위아래가 모두 트인 토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과 소통하고 싶었던 홍산인들의 종교의식이었다.
 
 ● 삼위일체 구조 기원전 3500년전 거대한 적석총과 신전, 제단을 만들어냈던 홍산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하량 지역은 홍산문화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소(聖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신묘와 천제 제단터와 거대 적석총을 갖추고 있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구조라는 것은 이 우하량을 짓는 시기에는 최소한‘초기국가 단계’나‘초기문명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입니다.”_ 우실하 교수 (항공대 교양학부)
 
 황하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선 홍산문화는 5000년 전 이미 초기국가 단계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다. 주거지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우하량 지역은 어쩌면 홍산인들의 성지(聖地)였을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중화사상과 동북공정
 ● 중화문명 기원지 수정 요하문명의 출현은 중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달된 문화가 만리장성 이북지역에서 발굴됐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만리장성을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북방한계선으로 인식해 왔다. 중국은 중화문명의 기원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 이른바‘다(多)기원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오랫동안 황화문명을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보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는 장강문명, 그리고 최근엔 요하문명을 시원지로 삼고 있다.
 

 ● 동북공정의 실체 북경 인근 황제성(黃帝城)이라 불리는 곳에 중국인들의 시조를 모시는 사원이 있다. 1997년 건립된‘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 이름 그대로 세 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그 한가운데가 황제(한족의 시조 황제 헌원). 최근 들어 여기에 슬며시 치우(배달국 14대 자오지 천황)를 끼워 넣었다. 이것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이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양(瀋陽)의 요녕성 박물관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3층. 이곳에선 4년째 요하문명전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중국문명의 시원을 요하문명으로 정하고 이를 황제가 주도했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황제를 홍산문화의 대표로 등록함으로써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넣어버리는, 소위‘동북공정’(東北工程)의 핵심이다.
 
 중국은 이제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황하문명과 만리장성을 넘어 요하문명을 그들 문화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하지만 요하문화와 중원의 문화는 이질적인 면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 그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
 
 
 요하문명의 서광, 사해·흥륭와 유적
 ① 사해유적
 ● 용龍신앙의 원형 발견 요하문명의 서광은 홍산문화보다 수천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000년에 탄생한 사해(査海) 유적이 바로 요하문명의 시작이다.‘ 중화제일촌’이라 불리는 사해 유적은 중국 영토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적을 빛나게 하는 요소는 바로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용(龍) 모양의 돌무더기다.
 
 “크고 작은 돌들을 용의 형태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m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연도가 가장 이르고 형태가 가장 큰 용입니다. 현재‘중화제일용’이라고 부릅니다.”_ 리징옌 (사해박물관)
 
 이는 기존에 발견된 용 형상보다 무려 2000년이 앞서는 것이다. 중국 용 신앙의 원형마저 이곳 요하 지역에서 나타나자 중국 학계에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다.
 
 ● 중원과 무관한 빗살무늬토기 마을은 57개의 주거지가 용 형상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 돌로 만든 각종 농기구가 출토돼 이미 농경생활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주목할 점은‘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 취락에서 나온 토기가 빗살무늬토기라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와 제작방법이라든가 태토(胎土, 토기바탕흙)가 너무 유사합니다.”_ 이형구 교수
 
 빗살무늬토기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방루트를 통해 발견되는 유물이다. 한반도와 요하유역에선 대부분 발견되지만 황하유역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기원전 6000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② 흥륭와유적
 ● 한반도産옥玉으로 판명 사해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내몽고자치구의 흥륭와(興隆窪)유적은 중국 최초의 마을자리를 놓고 사해유적과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BC 6000년). 중화취조부락. 마치 기획도시처럼 조성된 이곳은 주거지가 일렬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다. 사람과 돼지가 함께 묻힌 순장(殉葬)의 흔적도 발견됐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옥(玉)이었다. 인류가 사용한 그리고 가공한 최초의 옥이다.
 

 저명한 옥기전문가 북경대 조조홍 교수는 수년간의 조사 끝에 흥륭와 옥이 압록강 부근 수암산이란 것을 발견했다. 색깔과 경도 모두가 정확히 일치했다. 수암은 흥륭와에서 450킬로미터 거리다. 더 놀라운 것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거의 똑같은 옥 귀걸이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들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주·한반도와 동일문화권인 요하문명
 ● 요하에서 찾아낸 한국형 암각화 국립중앙박물관의 최광식 관장은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한국형 암각화를 요하 일대에서 다수 찾아냈다. 각로영자(閣老營子)의 암각화는 함안 도항리의 동심원 문양과 일치하고, 상기방영자(上機房營子) 암각화는 포항 칠포리의 검파형과 비슷하며, 지가영자(遲家營子)의 연속된 마름모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를 그대로 빼닮았다.
 
 한반도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한국형 암각화가 대륙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내민 것이다. 기원전 6000년 문명의 서곡을 울렸던 요하문명은 처음부터 중원과는 이질적인 문명이었던 반면 만주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 여러시대를 거쳐온 요하문명 이른바‘요하문명’이란 요하가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고대문명을 말한다. 이 기간은 수천 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기원전 6000년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小河西)를 시작으로, 사해(査海)와 흥륭와(興隆窪)에서 요하문명의 새벽이 열리기 시작한다. 기원전 4500년 무렵에는 요하문명의 꽃이라 불리는‘홍산(紅山)문화’가 시작되고, 기원전 3000년 이후에는 ‘하가점(夏家店)문화’로 계승되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이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요하문명’이다.
 
 기원전 6000년 당시부터 만주는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고 한반도와는 대단히 연관성이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산인, 그들은 누구인가
 ● 옥玉을 숭배한 홍산인 사해와 흥륭와로 시작된 요하문명은 홍산문화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운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골, 그 머리 옆에 낯선 물건이 놓여져 있었다. 바로 옥(玉)이었다. 옥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유골에 배치됐으며 사해, 흥륭와 시기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다양해졌다. 한 무덤에선 무려 20점의 옥기(玉器)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대 홍산인들은 옥을 숭배했다. 옥을 매우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중요한 부장품이 된 것이다. _ 조조홍 교수 (북경대 고고학과)
 
 홍산인들은 왜 옥을 숭배했을까? 홍산인들에게 옥은 영원불명의 상징, 하늘과 소통하는 상징이란 것이다.
 
 “(옥기는) 굉장히 중요한 의기(儀器)입니다. 일반인들이 석기처럼 상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의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된다는 것은 결국 그 문명단계에서는 옥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 집단이 기능적으로 분화돼 있다는 겁니다.”_ 우실하 교수
 
 세련된 옥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전문 장인, 또 그중 최고급품을 소유하며 신께 제사지내는 권력자의 존재. 홍산문화 시기엔 권력과 신분이 이미 분화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요서지역을 다스린 나라 문명단계에 진입한 홍산 문화는 후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적봉시 성자산(城子山)에 홍산인들의 후예가 남긴 흔적이 있다. 이성(城)은 홍산문화를 계승한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의 일부로, 확인된 건물 터만 232개에 이른다. 기원전 2000년경이 되면 요하문명 지역엔 수많은 성들이 건축되기 시작한다.
 
 “요서지역에서는 이미 70개 이상이 넘는 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도, 즉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을 겁니다. 그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를 국가라고 하는데, 그 국가가 과연 어느 나라냐? 중국과 한국의 사서(史書)를 검토해 보았을 때 그 지역은 고조선밖에 없습니다.”_ 복기대 교수 (국제 뇌교육종학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기원전 2000년경 요서지역을 터전으로 국가란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세력은 고조선밖엔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 건국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 곰을 숭배한 홍산인 신화에 따르면 환웅이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고 그 단군이 나라를 개국했다고 되어있다. 고조선 개국세력이 곰 토템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하량 여신묘에선 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새를 형상화한 소조상과 함께 곰발이 출토되었다. 남쪽 방에선 곰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홍산인들이 여신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제사지냈던 사실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것은 홍산인들이 곰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_ 이형구 교수
 
 홍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는 웅룡(熊龍). 곰을 숭배하던 홍산인들이 그들의 터전에서 세운 나라는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 고조선을 대표하는 비파형 동검 교통의 중심지 조양(朝陽). 중국 역사상 한족과 북방민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조양 일대에서 고조선의 대표 유물‘비파형 동검’이 발굴되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의 종족과 문화를 구별 짓는 기준이 바로 청동검이었던 것이다.
 
 “고조선 지역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발전하게 되고, 고조선 이외의 지역, 주나라 등에서는 직인검이 나타나게 됩니다. 고조선 지역에서 나오는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특색을 끝까지 보유한 가장 특색있는 청동검입니다.”_ 복기대 교수
 
 ● 북·중, 고조선영역 공동조사 요나라의 수도였던 영성(榮成). 1963년부터 3년 동안‘고조선의 발원지를 찾아서’란 주제로 이 일대에서 합동 발굴조사를 벌였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하에 이뤄진 조사지역은 요하문명의 터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어 당시 중국도 이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선사문명은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그간 알려져 왔다. 하지만 요하지역의 문명들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보다 더 빠르고 발전된 문명이 요하 서쪽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인가
 ● 한국인과 친연성 높은 요하인 중국 길림대의 주주홍 교수는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나온 134개 인골의 체질인류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연구결과 크게 두개 종족(고古동북형/고古화북형)으로 나눠졌는데, 요하문명 일대의 고(古)동북형이 3분의 2 이상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사람보다는 한국 사람이 훨씬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서지역의 고대문화는 한국 선조들이 건설한 것으로 봐야 맞습니다.”_ 복기대 교수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 거대한 성을 세우고 대륙을 호령하던 국가는 고조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 전형적인 북방문화, 적석총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우하량의 거대 적석총.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적석총이다(가로세로 60미터). 요하문명 일대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적석총이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다 1000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적석총은 장군총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며, 집안시(集安市) 일대에는 이런 형태의 적석총이 수천 기 분포해 있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요서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지역적 특색이 매우 강한 유적이다.
 
 “전형적인 북방문화입니다. 그것은 한반도로 해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문명임과 동시에 주요한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라는 것입니다.”_ 우실하 교수
 
 “요하일대는 우리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서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이르는 발해연안벨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요하문명이라고 한정해서 말하기보다는‘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_ 이형구 교수
 
 장장 4천 킬로에 달했던 만주대탐사. 우리는 그곳에서 수천 년전 우리 민족의 원형을 만날 수 있었다. 감춰졌던 역사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10.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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