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사군은 없다, 조선사군이다
우리는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 그동안 의심 없이 믿어왔다. 우리가 배운 것은 이렇다. 한사군은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점령한 뒤에 식민지로 4개의 군현郡縣(낙랑․진번․임둔․현도)을 두었는데, 그 한사군 중에 낙랑은 AD.313년까지 존속했다고.
여기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한나라 건국이 BC.202년이요 멸망한 해가 AD.8년(한나라의 존속기간은 230년)이다. 즉 한사군을 이끌던 종주국이 망했는데, 그 군현이 305년이나 더 지속되었다니 말이 되는가. 만일 낙랑이 무려 421년이나 존속한 군현이라면 중국사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일 것이다.
한나라의 7대 왕 무제는 BC.109에 누선장군 양복의 7000수군과 좌장군 순체의 육군 50,000군을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위만조선을 침략해왔다. 당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제47대 고열가단군 시대로서 힘이 쇠약하여져 단군조선은 BC.239년에 망하고, 그 뒤를 이어 고조선의 장군인 해모수가 북부여를 일으켜 통치하였다. 이 때 위만조선은 여전히 난하 이동의 변한(단군조선 3한 중의 하나)지역에 존재해 있었다.
한 무제는 오늘날의 난하를 건너 갈석산 일대의 위만조선 땅에 쳐들어왔지만 위만군대의 거센 항쟁과 북부여 6대 고두막한 단군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1년간 싸우다가 패퇴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천이 쓴《사기史記》를 주목해야 한다.《사기》는 한 무제의 신하였던 사마천이 쓴 목격기이다.《사기》가 완성된 때는 BC.100년으로 사마천이 27세 때였다. 그는 당시 한사군 전쟁을 직접 보고《사기》〈조선열전朝鮮列傳〉을 썼는데,〈조선열전〉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4군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사기》 다음에 쓰인 중국정사가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인데, 이 책은 AD.80년 경, 《사기》보다 180년 뒤의 기록이다.《한서》는《사기》의〈조선열전〉을 똑같이 기록했지만 그에 몇 글자를 추가해놓았다. 즉‘수정조선위사군 평주날양추저홰청(遂定朝鮮爲四群 平州捏陽萩菹澅淸)'이라는 기록을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여덟 자를 바꿈으로써《한서》에서부터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여덟 글자가 나오게 된다.
사마천의《사기》에 있는‘(한무제의 침략군이 쫓겨 가고)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그곳에)평주날양추정홰청의 사군이 되었다.’라는 기록을‘마침내 조선이 평정되고 (그곳에)낙랑현도진번임둔을 설치했다’고 바꿔놓았다.
생각해보자.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을 목격한 사마천의 기록에는 한사군이 없는데, 한사군 전쟁이 일어난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반고가 적은 《한서》에는 한사군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또 조선사군은 한 무제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가 만든 사군이다.
한 무제의 침략당시를 되돌아보자.
당시 위만은 연나라에서 온 지도층이었고, 그가 다스린 지역의 주민들은 기자조선인들이었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주민들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 내전을 기화로 한나라의 무제가 침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토착 조선인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북부여의 참전으로 한나라 침략군을 물리치고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쳐 4세력이 평주․날양․추정․홰청이라는 조선사군을 설치한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각각의 지도자(조선사람)가 있었으니 평주에는 최, 날양에는 참, 추저에는 읍, 홰청에는 협씨였다.
한 무제의 침략은 연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단군조선이 일어났던 옛 땅을 전통 조선인들이 회복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나라에서 만들었다던 식민지 4군현에는 지도자가 없지만 조선사군에는 분명히 지도자가 나온다. 이 때 조선인들의 분전에 음양으로 도움을 준 것은 후방에 위치한 고조선의 후예 북부여였다. 당시 북부여 6대 고두막한단군이 한나라의 침략군을 격퇴하고 스스로를 동명왕이라 칭한 것을 보면 한족의 침략에 조선과 북부여가 연합작전을 전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주몽은 BC.58년에 졸본 땅 어하라왕국 소서노여왕의 도움을 받아 북부여 7대 단군이 되었다가 BC.37년에 국호를 고구려라 바꾸지만 태조를 해모수로 삼아 제사지냈다. 따라서 고구려는 단군조선-북부여를 계승한 적자국嫡子國이며, 주몽 역시 한나라와 대적했다.
한나라와 조선간의 전쟁에서 한나라는 많은 피해를 당했고, 무제는 휘하 장군들의 책임을 물어서 죽이거나 좌천을 보냈다. 무려 1년간 대군을 동원하여 싸웠지만 조선군에 패한 무제는 장군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버린 것이다. 한 무제가 전쟁에서 졌는데 어찌 한나라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설치되었겠는가. 중국은 한나라가 조선과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기록한 일이 없는데, 우리는 이겼으면서도 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 한심한 일이다.
사마천의《사기》〈열전〉끝에는‘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죽임을 당했고,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 장교나 졸병이나 간에 아무도 후侯가 된 자 없다’(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問莫侯矣)라고 했다. 결국 철저히 패하여 장졸 간에 엄청난 치죄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 조선사군지역에 대한 다툼은 고구려와 위나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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