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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무왕을 물리친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출현

by 바로요거 2010. 1. 4.

한나라 무왕을 물리친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출현

 

연(燕)나라가 장성을 쌓고 한(漢)나라가 요새까지 쌓았는데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민강(岷江) 이서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하기는 진시왕(秦始王)이 쌓았다고 하는 만리장성(萬里長城)도 고구려 영토 안에 있으니까. 종이 위에 쌓아 놓은 상상의 장성(長城)이라서 그런 것이다. 수나라 양광(楊廣, 煬王)은 상상 속에 쓰여진 역사서에 열흘 동안 60 만명을 죽이면서 백제장성(百濟長城)을 증축했던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명(明)나라 때 날조된 것이다.

사서(史記)에 기록된 위의 내용은 노관(盧綰) 이전에 연(燕)나라가 같은 땅을 점령했다는 것인데, 문맥상 “요동(遼東)에 요새를 쌓아 패수(浿水)까지 경계로 삼은” 조선(朝鮮) 땅은 막조선(莫朝鮮)이 아니라, 진번조선(眞番朝鮮)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진번조선은 없었다. 그러면 연(燕)나라가 점령했던 땅은 어딜까.

경진(庚辰) 19 년(B.C. 221)

燕나라는 장수 진개(秦開 : 原典에는 秦介로 표시되어 있는데 秦開의 오기로 보임)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서쪽 변두리를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을 삼게 되었다(庚辰十九年......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北夫餘紀).

만번한(滿番汗)이니까 번조선(番朝鮮) 지역에 있었다. 연(燕)나라에 귀속된 만번한(滿番汗)은 연나라에 가까운, 번조선(番朝鮮) 북부이다. 연나라가 서강(怒江) 이남에 있었으니까, 만번한은 서강 상류에 있던 지명이다. 그러니까 연나라가 귀속시킨 땅과 한나라가 일시 점령했던 땅은 다른 땅이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원삭(元朔 : 漢武王시의 연호) 원년(B.C. 128년)에 우거왕(右渠王)에게 반기를 들고 28 만구(당시의 인구수는 口로 표시)를 이끌고 요동군(遼東郡)에 내속 하였는데 한무왕(漢武王)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 이라했고, 수년후 폐지되었다(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數年乃罷)고 했다[역사 왜곡 날조사에서는 漢은 南閭城에 蒼海郡을 설치했다 했고 이병도는 이 蒼海郡이 현도군(玄兎郡)의 전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곳이 濊貊族의 본거지인 동가강(佟佳江)일대라고 주장한다. 史記에는 衛滿朝鮮을 眞番朝鮮, 穢貊朝鮮이라고 기술하고있다].

이때는 朝鮮, 漢 전쟁이 일어나기 20 년 전이라 날조 漢四郡조차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遼東郡은 北夫餘의 영토였다. 당시 遼水는 岷江이었다. 濊君 南閭는 遼西(岷江 이서)에 있었던 것이다. 右渠를 배반한 것도 아니다. 右渠의 조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衛滿은 番朝鮮을 기만과 술수로 가로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衛滿이 점령한 땅을 떠나 우리나라로 찾아온 것이다. 濊君, 南閭 백성이 北夫餘를 찾아온 해인 癸丑 42 년(B.C. 128), 高奚斯 檀帝는 친히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衛滿의 도둑 떼를 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北夫餘紀).

癸亥 3 년(B.C. 118년) 右渠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해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해 海城 이북 50 리의 땅이 모조리 右渠에게 점령되자, 丙寅 6 년(B.C. 115) 檀帝(高于婁)가 몸소 정예군 5,000 을 이끌고 海城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薩水에 이르니 九黎河(嘉凌江)의 동쪽은 모두 항복해 왔다(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北夫餘記). 이 당시 西鴨綠江(岷江)은 회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책(木柵)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岷江 이서의 南閭에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한 丁卯 7 년(B.C. 114)에서야(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 北夫餘紀) 西鴨綠江을 탈환했다.

癸酉 元年(北夫餘 檀帝 高豆莫 元年, 檀君 高于婁 13 년 : B.C. 108) 漢나라의 劉徹(漢 武王)이 右渠가 차지한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자, 高豆莫(北夫餘 5 世 檀君)이 앞장서서 劉徹을 물리쳤다. 내버려 두면 衛滿朝鮮에 이어 우리나라도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 北夫餘紀). 더구나 高豆莫의 영토 옛 槀離國이 衛滿朝鮮과 접하고 있었다.

朝鮮, 漢 전쟁을 지휘해 승리로 이끈 高豆莫은 樂浪(崔)과 협(陿), 참(參), 음(霒)장군에게 右渠가 살해된 番朝鮮 땅을 나눠주었다. 槀離國의 제후가 제 마음대로 상국 北夫餘의 땅을 나눠줄 수는 없다. 高豆莫은 朝鮮, 漢 전쟁 직전에 卒本에서 檀帝로 즉위하고 帝號를 東明, 국호를 卒本夫餘라 했다. 그래서 北夫餘와 卒本夫餘가 병존했다.

北夫餘와 구분 하고자 卒本夫餘라 했다. 天王郞 解慕漱가 大夫餘와 구분하기 위해 藏唐京 阿斯達(長安)보다 고위도에 있는 白岳山 阿斯達(洛陽)에서 즉위하고 北夫餘라 한 것처럼.

癸酉 원년(B.C. 108), 이 해는 檀君 고우루(高于婁) 13 년이다. 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北夫餘)가 쇠약해지고 漢의 도둑들이 강성함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東明이라 하였는데 혹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 이라고도 한다(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爲人豪俊善用兵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北夫餘紀 下)

◀ 秦始王陵(?)에서 발굴된 병마용(兵馬俑)중에서,,,


사람됨이 호탕한 帝는 高于婁가 아니고, 고두막(高豆莫)이다. 北夫餘의 檀君 高于婁 13 년이 高豆莫 즉위 원년이다.

졸본[卒本.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에는 홀본(忽本)으로 되어 있는데, 의도적으로 바꾼 것인지, 卒本을 忽本 이라고도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곳에 위치한 大震國의 도성은 홀한성(忽汗城)이라고 했다]이 어딘가. 高豆莫이 卒本에 도읍을 정하고 卒本夫餘라 했다. 卒本은 解慕漱의 옛 도읍이 아니다.

解慕漱는 白岳山 阿斯達 즉 현 은허(殷墟)에서 즉위했다. 槀離國의 땅이 西鴨綠水(岷江)에서 九黎河(嘉凌江)까지라서 高于婁는 長安에, 高豆莫은 殷墟에 있는 상황이 절대 벌어질 수 없다. 高豆莫이 殷墟에 도읍 했다면 드넓은 槀離國(가우리)을 포기해야만 한다. 高豆莫은 槀離國 땅을 기반으로 檀君을 자처했다. 도읍만 北夫餘 檀君 高于婁가 있는 皇城 이서에 정하면, 槀離國 땅을 보유할 수 있다. 高于婁 이전까지 白岳山 阿斯達(현 殷墟)에서 건국한 北夫餘가 천도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卒本은 長安(현 西安)이다.

北夫餘(卒本夫餘) 불세출의 영웅 高豆莫汗! 그가 집권했을 당시의 도읍은 長安이며 이곳에서 秦始王의 무덤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夫餘가 殉葬制度를 시행했고 수많은 인원들이 王陵築造에 동원되었던 사실이 역사에 전한다. 百濟는 東明帝 高豆莫汗의 제사를 皇帝 등국시는 물론 수시로 성대하게 올렸다.그러나 여산릉(驪山陵)의 축조시기는 百濟時代로 알려지고 있다. 과연 지금의 秦始王陵은 누구의 무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