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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일제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과정

by 바로요거 2009. 12. 26.

일제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과정


민족혼을 말살하라!


1919년 3 1독립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소위 武斷통치에서 문화통치라는 명목으로 한국지배의 방식을 교묘하게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런 여러 징후 가운데 조선인에 대한 역사교육을 규정하는 심대한 ‘언명’이 천명된다. 이른 바 ‘조선교육조서’, 그리고 한국 내 온존하던 역사기록물들이 전후 어떻게 수난을 당했으며, 중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어 갔는지, 일제시대 사료수탈 실태조선사편수회 중요 회의록을 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해 볼까 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국민성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그 궤적을 따라 가 보도록 합시다.  


다음 글이 사이또(薺藤 實) 조선총독의 “조선교육조서” 번역문입니다. 1922년도의 발언이군요.

▼사이또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 : 부모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 : 역사기록과 유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인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帝國日本)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일 것이다.


섬뜩하지요. 이런 언어 폭력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일회성 언어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민족말살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라 볼 수 있었지요. 이런 기본방침은 점차 조직적, 전면적으로 이 한반도 땅에 엄습해 와, 종국에 가서는 제 역사를 망각하여, 제 조상을 부정하고, 제 문화를 천시하며, 한겨레를 비하하는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 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사이또는 한민족에 대하여 아주 강력한 망령의 주술을 걸었고, 그 것은 아주 창대한 결과를 우리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초대 총독 테라우찌 마사끼(寺內正毅)는 취임하자마자 ‘취조국’을 설치하여, 조선의 관습과 제도의 조사를 명분으로 11월 전국의 행정조직과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조선의 옛 사서, 조선의 역대 지도,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전기열전류, 외국의 독립운동사 등을 망라하여 불온서적이란 이름으로 향교, 사찰, 양반가, 세도가, 일반백성의 집을 색출 압수하기에 이르러 1911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1차 서적침탈이 판금서적을 일부 포함하여 총 51종류 20여만 권이라고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가 밝히고 있습니다.


1985년 10월 조선일보의 기사가 이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네요. 이것은 일제가 조선역사를 말살하려고 추진한 일련의 과정 중 단지 공개된 만행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일제는 수탈한 고서적을 동이민족 상고사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배달국 환웅시대의 역사, 그 위로는 桓國의 역사를 비롯한 주요 고대사 서적은 일본으로 극비리 반출하여 황실도서관 지하실에 외부의 이용을 차단한 채 보관 중에 있다는 여러 증좌가 나오고 있으며, 조선사 왜곡 편찬에 용이하게 이용될 서적 몇 종류와 시중에 유포되어도 조선사 왜곡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일부 서적(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 조선왕조실록, 고려사와 기타 사서 등) 만을 남기고 모조리 분서(焚書)하게 됩니다.



고대역사를 축소하라!


1915년 취조국의 조선사 말살왜곡 업무는 ‘중추원’으로 이관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의 직접 편찬을 시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료 수탈로 민중의 눈과 귀를 막았으나, 계속 발견되는 희귀한 서적들 그리고 민족사를 전수하는 사학자들의 출현으로 인해 진실을 은폐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차제에 역사를 왜곡⋅직접교육 전파하여 사실로 굳히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동원된 것이지요.


이완용, 권중현을 고문으로, 동경제대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 경도제대 미우라 슈코(三浦周行), 경도제대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촉탁 감독자로 하여 조선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들이 작성한「조선반도사 편찬요지」를 볼까요.

“ .... 그들을 충량한 제국 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 이번에 중추원에 명해서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 ... 이제 조선 역사를 읽는 편의를 제공하면 그들 조선인에게 옛날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지만 ... 조선에는 고래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러한바 전자(고래의 사서)의 것은 독립시대의 저술로서 독자로 하여금 독립국의 옛날 꿈에 빠지게 하고 ... <한국통사> 등 후자는 근대 조선의 청일, 노일간의 세력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등을 돌릴 길을 밝히고 있으니 이들 사서가 인심을 심히 고혹케 한다. 이러한 사서들의 절멸을 기함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그러니 차라리 「공명 적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


이 글의 요지는 사료의 대량분서와 조선사 왜곡 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하는 셈이다. 다량의 사서를 압수 불태웠으나, 씨를 말리려는 획책은 실패했다는 고백이고, 이런 실패를 위장하고 또한 왜곡한 역사를 조선인에게 가르쳐 일본에 동화시키겠다는 가증스러움이 여기에 여실이 들어난다.


자 얼마나 「공명 적확」한 역사서를 만드는지 그들의 회의록을 살펴 봅니다.

먼저 이 학자들에게 내린 ‘편사지침(역사편찬 방침)’이 있습니다.(1916년 1월)


① 조선반도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전편(全編)을 상고삼한(上古三韓), 삼국, 통일 후 신라, 고려, 조선, 조선 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 사설(史說)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제7쪽과 47쪽에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왜 일제는 통사서술에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의 방식을 고수했는지, 그리고 당초 ‘상고사’도 아닌 ‘상고삼한’ 이란 애매모호한 편재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 유념하여 아래 내용을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일제는 이제는 역사 편집의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제2차 서적침탈을 계속사업으로 연장하여 나갑니다. 이 이후로는 역사서적뿐 아니라 전통, 문화, 예술, 인물 등의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武勇傳)까지 압수의 대상이 되어 1918년 말까지 계속되었고, 3.1 민족항거가 있은 후, 위에 지적한 사이또가 부임하여 ‘조선교육조서’가 발표됩니다.


1922년 12월 훈령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 제정과 함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1923년 1월 8일 제1차위원회를 개최하여, 주요 편찬강령(목차)을 결정하게 되는데,

제1편 삼국이전

제2편 삼국시대

제3편 신라시대

제4편 고려시대

제5편 조선시대 전기

제6편 조선시대 중기

제7편 조선시대 후기로 확정한다.


당초에 상고삼한(上古三韓)이란 명칭을 三國以前이라는 한편으로 축소하여 우리 상고사를 얼버무려 점차 말살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1차 회의에서 논의된 단군조선 역사기록과 관련한 대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총독 직할로 새 진용 구축과 조선상고사 멸절 의도


1925년 6월엔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官制)를 공포하고, 조선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대체한다. 이 조직에 참여한 조선인을 나열하면 다음과 갔다. 고문에 李完用, 權重顯, 朴泳孝(고종의 사위), 李允用 등이며, 편찬위원에 李軫鎬(이진호 학무국장), 劉猛(유맹 중추원참의), 魚允迪(어윤적 중추원참의), 李能和(이능화 편수관), 李秉韶(이병소 편수관), 간사에 金東準(김동준), 수사관에 洪熹(홍희 편수관), 서기에 玄陽燮(현양섭) 등이 참여했다.


1925년 10월 8일의 제1차 조선사편수위원회에서는 더욱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다. 1923년에 결정한 ‘조선사편찬회’의 결정인 ‘제1편 삼국이전’이 다시금 ‘신라통일 이전’으로 하여 단군조선 등 상고사와 삼한, 삼국시대 등이 허공에 뜨게 되었다.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역사를 자꾸 아래로 끌어내려, 조선상고사와 삼국시대를 왜 없애려 하였을까? 


군국주의 일본의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긴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데 있었다. 왜구가 노략질 하면서도,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면서도, 또다시 일시에 조선을 합병하였으면서도, 그들 일본인 지도층들은 지울 수 없는 역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을 일시 침탈하였으나 이를 지배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총과 칼로 한 때를 지배할 수는 있었지만 영원히 탈취하기에는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총량이 조선보다 못함을 일본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역사왜곡을 시작한 것이다. 정한론의 바람이 불던 명치유신 시기에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광개토태왕비)와 칠지도의 명문을 삭제 조작하고 영원한 조선탈취를 실현하려고 철저한 준비를 해온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를 재정리하여 그들의 역사부터 왜곡한 다음 사전 조작한 설계도에 따라 조선사를 편찬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땅만이 아니라 민족까지도 일본에 동화시키려 하였다. 우선 그들의 역사 시작연대 서기 300년 언저리를 서기전 660년으로 상향 조작(일본서기) 하고도 2천년 이상이나 앞서는 조선의 상고사를 말살하는 것이 시급했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모두 자기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던 시절, 일제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조작된 역사 설계도에 두 나라 국민을 맞춰 일본을 형으로 조선을 동생으로 한나라를 만드는 망상을 실현하려고 허구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1927년 6월 1일 사무분담이란 명목으로 추가로 조직을 확대하며, 조선인을 영입하는데 그 유명한 이병도와 신석호가 이에 동참하게 된다. 이병도는 역사조작과 식민사관의 총아 금서룡(이마니시 류)의 휘하에서 ‘수사관보’라는 직함으로 조선역사 중 신라통일 이전, 신라통일시대, 고려시대 편찬을 분담 받아 일왕에 충성 봉사하게 된다. 또한 육당 최남선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따라 1928년 12월 20일 편수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단군조선의 역사 말살과 최남선의 반발


다음은 당초 조직 ‘조선사편찬위원회’ 1923년 1월 제1차 회의록의 일부,

정만조 : 삼국이전이라 함은 단군까지를 넣는 것인가?

○ 구로이따(黑板勝美) : 삼국이전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다시 더 연구하겠다.
○ 이능화 : 상대 조선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있다. 그러므로 삼국이전의 조선을 고대조선으로 고치는 것이 좋지 않으냐?

구로이따 : 그 당시의 조선은 현대의 조선과 지역이 다르므로 차라리 삼국이전이라는 막연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까 한다.

이능화 : 건국의 신화는 민족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니 반드시 본문에 수록하여야 한다.

카시와하라 쇼산(栢原昌三) : 단군과 기자에 관한 일들은 건국의 주요한 사항 이므로 망라하려 한다.

어윤적 : 단군과 기자는 삼국이전의 앞에 수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도 좋으냐?

○ 구로이따 : 단군과 기자의 기사는 기재할 것이나 건국에 관한 사료 중 연대가 불명한 것을 어디에다 넣을 것인가에 관하여는 금후 상의하여 처리하고자 한다.

오타 간치로(小田幹治郞) : 今西龍(이마니시 류) 위원이 부재하다 하여 안건의 결정을 보류하는 것은 사무수행 상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원안대로 결정함이 좋을까 한다.

아리(라)요시 츄이치(有吉忠一) : 원안가결 합니다.


두 달 후 1923년 3월 29일, 오타간치로는 의원면본관(依願免本官 : 의원면직)으로 갑자기 해직되고, 8월 16일 카시와하라 쇼산은 돌연 사고 死를 당한다. 또한 사이또 총독은 향후 5차례에 걸쳐 꼬박 이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한다. 변고를 당한 두 사람의 행적과 1월 위원회 발언이 상관성은 있는지...


그리고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를 출범하여, 1925년, 1927년, 1928년 진용을 확대한 끝에,

1932년 3월 31일 일제는 <조선사> 가운데 1편(통일신라 이전) 2편(통일신라시대)를 출간했다.


위에 기술하였듯이, 그나마 상고삼한(上古三韓)삼국이전, 삼국시대로 바뀌더니 종국에는 통일신라 이전으로 우리역사에서 서기668년 이전을 적당히 얼버무려 반죽을 만들어 놓았다.


1932년 7월 21일 제6차 회의록, 전체 내용 중 상고사 관련만 간추림.

구로이따(黑板) : <조선사>의 인쇄는 본문만 하기로 하고, 그 원문 <조선사 고본(朝鮮史 稿本)>은 인쇄 완료 후 적당한 장소에 보관하여 편수과정을 알 수 있도록 할까 한다.

최남선 : ... 셋째는 원전의 인용이나 고감에 있어서 일하는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리는 바는 없지 않으나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고구려의 동명왕의 곳에 인용된 <삼국사기>의 檀君古記 가운데「석유환국(昔有桓國 : 옛날에 환국(국명)이 있었다)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천한 놈(금서룡을 가리킴)의 망령된 붓 놀림]로 말미암아「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것이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더욱이 桓國 즉 환 나라와 환인 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예부터 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 경도대학의 영인본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의 桓因의 因자가 國자 위에 칠을 하여 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알 수 있다. ... 

 

 

사진 左 :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 正德本, 昔有桓國이라 표시

사진 右 : 1921년 경도제대 금서룡이 영인한 <삼국유사> 영인본, 昔有桓因이라 변조


桓國은 단군조선, 배달국 이전의 나라이름이다. 그림 중에 昔有桓國, 神市, 桓雄天王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옛날에 환국이 있었고, 서자 환웅이 있어 후에 나라를 세워 신시(국)라 했고, 그 왕을 일러 환웅천왕이라 한다고 정덕본에 쓰여 있다.

(口+王은 정자체 國의 약자임)


그런데, 환국이 환인으로 변조되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

실존했던 역사적 국가인 환국은 신화속의 집단이 되고, 남방으로 이주하여 ‘신시’ 국가를 창업한 환웅천왕의 존재는 신화의 형식을 빌어 표현한 설화가 말 그대로 실존하지 않는 신화가 되며, 그 신화의 주인공 환웅의 후손 단군왕검의 행적 또한 신화가 되는 일석 삼조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한 예로, 신시(神市)를 마치 무당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공간이 있는 다중의 집합소 시장바닥 정도의 상상을 떠올리도록 우리는 제도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즉,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한국 고대사의 아킬레스 건을 정확히 집었던 것이다. 글자 한자의 변조가 일파만파의 효과를 낳은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단군의 고조선은 ‘만들어진 신화’가 되어 역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남선은 1932년 7월 21일 이 사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효과는 없겠지만 기록은 남아있어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934년 7월 30일 제8차 회의록, 전체 내용 중 상고사 관련만 간추림.

최남선 : ... 다음에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록해야할 제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잔무」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이나 혹은 보편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

稻葉 : ... 단군이나 기자는 제1회 위원회 때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 회의 편찬방침으로 채용한「편년체」의 형식에서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집어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연차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어떻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해야 좋을지 ...

최남선 : ... 단군, 기자는 그 사실 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黑板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별편으로 한다고 하면 똑같이 ...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稻葉 : ...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 공민왕 전후의 인물로 백문보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이조 세종 때에 이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논의한 일이 있다... 이들 기사에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今井田 : ... 그리고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 한다.


이제 서서히 일제의 한국상고사 제거의 본심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편년체를 택했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사적을 기재할 수 없다던가, 단군과 기자는 신화라고 단정을 내리고, 실존했던 국가 단군의 역사를 공자 석가와 대비시켜 종교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자연히 신화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의 주류사학계와 몇몇 단체에서 주장하는 논리의 원천을 이 ‘구로이따’ 가 제공했군요.


4천여년 전(정확히 4,267년전=1934년+BC2333년)의 상고사를 가지고 어느 왕 갑자 몇 년, 몇 월, 몇 일에 어떤 사실(편년체의 서술방식임)이 있었으며, 그 세부내용이 있으면 내 놓으라고 요구하고 있군요. 사적과 기록이 불충분한 상고사에 대한 요구조건을 이 편년체 집필방식을 강조하면서 일거에 실존역사로의 설정 부당성으로 몰아가고, 또 허구의 역사로, 한발 더 나아가 토속신앙 같은 주술 신화로 날조합니다. 그래서 ‘단군신화’가 비로소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됩니다.


역사의 조작 작업과 병행하여 조선의 역사 문화 민속 인물 등의 서적을 처음엔 압수 소각을 하더니 1920년대 이후로는 저항을 모면하기 위하여 ‘서적차입’이란 형식으로 서적의 씨를 말리려했다. 어느 누구도 그 수탈된 수량을 알 수 없었다. 단지,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류라고 만 밝히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위난의 역사를 강조하여 영원한 속국의식 심어


1935년 7월 5일 조선사편수회 마지막 회의 제9회 최종보고위원회

(육당 최남선은 이 회의에 불참하였다. 그가 참여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稻葉 : ... 단군기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 회의 처음부터 논의가 있어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의 기사(백문보 卒去)를 검출하여 단군에 관한 고래의 문헌을 채록했다 ... 이미 책으로 출간되어 배본을 마쳤으니 여러분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



그러면,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에 단군을 수록했다고 생색내고 있는 부분인 백문보의 상소문을 보자.


백문보 함. 문보는 직산인으로 충숙왕조에 등제하고 ... 右尙侍累進하였다. 문보 상소하여 말하되 국가 사직을 世守하여 문물과 예악이 일어났으나 어찌 뜻하였으리오, 왜구의 난이 크게 일어나고 홍건적이 왕도를 함락하여 왕가가 남천하였으니 ... 대저 天數에는 순환의 이치가 있으매, 7백년으로써 一小元하고 3천6백년을 大周元으로 합니다. 우리나라는「단군」이래 이미 3,600년이 되니 이는 곧 대주원의 이 돌아오는 때입니다.



교활한 일본인들입니다. 교묘하게 ‘단군’이란 단어만을 집어넣어 이 일을 일거에 해결합니다.

故 문정창은 일제의 <조선사>을 조사한 끝에 밝히길, 조선사 35권 총 24,000여 쪽에 나오는 단군기록은 이 문구의 “檀君 두자”가 전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마저 고려의 국운이 쇠퇴하여 남과 북으로 고난을 겪을 때를 골라 단군을 부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를 깍아 내리고 위난의 시기만을 확대 강조하려는 일제의 고도의 음모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Profile

최남선 ..... 반민특위에서 민족반역자로 분류됨. 회유와 협박에 의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였다 하나, 자의로는 역사를 바로 세워보려고 참여한 부분도 있겠고, 그러나 타의(일제의 의지)는 그를 이용해 역사조작의 정당성을 일부나마 확보해보려는 음모이었을 것임. 당대 원로 역사학자이었음.


이병도 ..... 해방정국에서 서울대사학과를 접수. 이완용의 친척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고려시대 이전의 한국상고사 왜곡작업에 한국인 선수로 참여하여 맹활약. 40년간 주류 식민사학의 확고부동한 위상과 전통을 확립함. 1980년대 중반 사망 직전에 자신의 역사관을 대대적으로 수정, 진실을 고백하고, 고조선의 평양 中心說을 수정하여 한사군의 난하-대릉하 流域說 정립 및 단군조선의 실존 역사성 역설, 고조선의 2,000년 역사 실체 인정. 이기백을 위시한 그 제자들 스승의 망령을 통탄하고 깔아뭉갬.

 


이 기사가 1986년 10월 9일(목) 조선일보, 이병도의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특보입니다.


이 회의를 끝으로 조선사편수회는 역사 조작 작업에 박차를 가해 1938년에 <조선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7년 후 조선은 해방됩니다.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이들 일본인 역사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작업과 병행하여 한국사 재조명 작업에 들어간다. 소위 「식민사관」이란 것이 그것인데, 고등학교 시절의 역사시간 첫 강의시간부터 이를 가르쳐 왔다. 시험 점수도 좋지만 왜 이런 치욕의 역사관을 암기시켰는지, 암기하면서 스스로 세뇌되어 보편적 인식을 줄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기우일까요. 아닙 니다. 그 다음부터 전개되는 교과서는, 일본이 왜곡하여 심어준 내용이 곳곳에서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왜곡 내용의 극히 일부분만 이라도 회복되기까지는 1983년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요.(이때 국사교과서가 크게 개편됩니다).

 

이러한 민족 사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83년 국사교과서" 개편시 다음사항이 반영됬다 합니다.
(1)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사실 수록
(2) 백제의 대륙진출 수록
(3) 한 4군의 한반도 위치설 삭제

     (이후 교과서에 한사군은 남서만주의 요동반도, 요하, 대릉하 방면으로 표시됨)

 

이는 1981년 민족사학계의 요구로 성립한 ‘국회역사청문회’의 결과이지요. 이 청문회장에서도 대학의 주류사학계는 계속 고대역사 바로세우기에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 상세한 국회 속기록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는 객관적인 판정을 주었고, 국사교과서 개정과 당시 주류사학자 일색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교체를 요구해 민족사 정립에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983년 국정교과서가 민족사학의 학설을 받아드려 개정하게 되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이 교체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후론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은 스스로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어, 더욱 과장한 뒤 조선인들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은 학문을 빙자하여 수만은 학설을 내놓고(일선동조론, 타율성론, 반도적성격론, 사대주의론, 정체성론 등등 자세한 내용은 포털사이트 사전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교육합니다. 그리고 조선인 그리고 한국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사실에 동조 동화되어, 제 상고의 역사를 망각하여, 제 개국시조와 나라의 조상을 부정하고, 원래부터 한반도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었던 나라로 우리의 강역을 인식하며, 漢族이나 日本의 외침에 허둥대며 쩔쩔매는 무위 무능한 조상으로 경시하고, 당파나 일삼고 음모나 꾸미는 악질적 지도자로 멸시하였고, 제 전통 종교 문화 유습을 천시하며, 동족을 깔보고 비하하여 남의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타율적인 인간으로 동료와 타인들을 깍아 내려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이또 총독의 악령의 주술이 얼마나 강력 했는가 새삼 느껴지는 것이지요.


사이또! 근세 일본이 낳은 그들 민족의 영걸입니다. 우리에겐 이또오 히로부미(이등박문) 보다 더한 원흉이지만...


해방과 더불어 식민사관이란 것도 위축되었고, 그에 동조했던 이 땅의 사학자들도 식민사관 타파를 역설하였지만, 그건 허울 뿐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폭탄의 큰 덩어리는 제거했는데, 그 파편들이 사방에 흩어져 달라붙어 그곳에서 다시 암세포를 키우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지요. 역사분야에서도 말입니다.


식민지 역사를 주도했던 사람들, 그들이 대한민국의 사학계를 움켜잡았고, 그로부터 전수 받은 차세대들, 이들의 학문적 존립의 보물창고가 바로 왜곡시킨 역사사료 이었고, 소위 그들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지금의 영광과 기득권을 준 논문이 다 거기서 나오고, 제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와 구술되었고, 민족사학을 주창하는 학자들에 대하여는 소위 재야사학이라 부정하였던 그들이, 역사의 해방을 이룰 수 있을까요. 못하지요. 절대 못합니다. 어찌 하루아침에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그 명성과 영예를 걸겠습니까? 그래서 국민들은 그냥 그렇게 배우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역사교육의 현실이었고 딜레마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상고사를 부정하고 왜곡했던 일본은 이와 병행하여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고 단군의 건국에 대하여도 상세히 기술한 서적을 “조선사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즉, 그들은 역사적 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알았던 일제가 침략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라고 제공한 칼로, 우리는 신명 나게 제 살을 깍아 먹었고, 해방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의 굴종과 억압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관성이 붙어 제 뼈까지 도려내고 있었던 한국사학계.


진실을 알고 있던 일본인들은 전 후 한국인 사학계의 작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를 무엇으로 보아왔을까? 간도 쓸개도 없는 족속으로 보았을 겁니다. 그러니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한번 한국을 집어삼켜 볼 요량으로 저 일본 극우파들은 망언을 일삼고 있는 거지요. 엄존했던 제 역사도 못 찾아 먹는 한심하고 우매한 족속이니까 그리고 만만하니까.


당당한 외교? 자주? 역사왜곡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수십 년 아니 수세기 지나도 공염불일 겁니다.(끝)



이 글은 1986년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었던 서희건 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에서 일제의 한국사 말살과정을 기록한 내용 중 서적침탈 과정, 조선사편수회 등의 회의록과 중요발언에 대한 의견을 일부 발췌하였고, 글쓴이가 순서에 따라 재정리하여 나누고, 이에 대해 의견을 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