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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국통 계승은 어떻게 되었나?

by 바로요거 2009. 12. 21.

고조선의 국통 계승은 어떻게 되었나?

 

고조선의 국통계승은 어떻게 되었나 

 

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삼성기』 상편을 보면, 배달의 역사에 이어 고조선 단군왕검의 역사가 나온다. 이분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얘기해 주는 것보다 우리 일꾼들이 현장에서 뛰고 활동하면서 꾸준히 『삼성기』를 읽고, 정보를 분석하고, 하편과 종합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삼성기』 상하를 종합해서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어디를 가더라도 『삼성기』를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조선 이후 나라의 계보가 북부여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실이다.

 

 

병진(BCE 425)년 주나라 고왕 때, 그러니까 고조선 제44대 구물 단군 때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다. 여기서부터 국통 맥으로 부여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부여사의 시작은, 실제로는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의 이름인 ‘부여’에서 온 것이다. 단군왕검의 슬하에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부루, 둘째가 부소, 셋째가 부우, 넷째가 부여다. 단군왕검은 막내인 부여를 지금의 하얼빈에서 서남방으로 300리 떨어진 곳의 제후로 임명했다. 바로 이것이 부여사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구려의 제후로 봉했다. 여기서 고구려라는 호칭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셋째 부우는 진번의 제후로 삼았다.

 

부여의 역사는 그 자체가 수수께끼요, 우리 뿌리 역사의 신비이다. 일본도 부여족이 건너가서 670년에 세운 나라다. 그리고 하나님(상제님)이 1871년에 인간으로 오실 때도, 부여 문화의 계승국인 백제 땅에서 오셨고, 또 불교사에서 미륵불 신앙이 가장 강력한 곳도 바로 이 부여문화의 호남 땅이다.

 

4,300년 전, 단군왕검의 막내아들 부여로부터 비롯된 이 부여사의 시작을 가을개벽의 완결처, 동북방에서 실현되는 간도수艮度數의 출발점으로 볼 수도 있다.

 

 

고조선의 국통은 어떻게 계승되는가?

그러면 고조선의 국통이 어떻게 북부여로 이어지는가?

 

단군왕검은 삼신문화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삼한 체제는 22대 색불루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이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게 되면서 차츰 삼조선 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 44대 구물 단군 때에, 병권을 막조선과 번조선에 완전히 나눠줌으로써, 삼조선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러다가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五加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그리고 이후 오가의 공화정을 접수하고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하게 된다.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한 위만

이렇듯 북부여가 고조선의 본조인 진조선의 국통 맥을 잇게 되면서, 고조선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중국과 국경을 맞닿아 있던 번조선은 그대로 남아 역사가 지속되고 있었다. 번조선은 69대 왕부터 기자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 74대인 기준까지 이어졌다.

 

그 당시 중국의 역사를 보면, BCE 221년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15년 후에 망하고, 이어 중원의 패권을 잡기 위해 항우와 유방이 5년 동안 싸움을 계속했다. 그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BCE 201년 1월에 즉위를 하는데, 몇 년 뒤에 그가 죽자 그 아들인 혜제가 제위에 올라 6년간 통치를 하게 된다.

 

이 무렵, 위만이란 자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으로 투항을 해왔다. 원래 위만은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노관은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노관은 연나라 왕으로 봉해졌다가 유방이 죽은 뒤, 여태후의 가혹한 숙청을 피하기 위해 흉노로 도망쳐버렸다.

 

그러자 노관 밑에 있던 위만은 번조선으로 와서 거짓 투항을 하고, 준왕을 구슬려 서쪽 변방의 수비대장이 됐다. 여기서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하루아침에 치고서 왕위에 올랐다. 그 때가 BCE 194년이다. 이렇게 번조선이 망함으로써 고조선의 역사가 완전히 끝이 난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중요한 연도는 외우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전체 맥을 사통팔달로 시원하게 꿰뚫을 수 있다.

 

 

준왕의 망명으로 시작된 간도수의 역사 시대

한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길에 오른 준왕은, 황해를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지역으로 피신을 왔다. 군산으로 왔다고도 하고 익산으로 왔다고도 하는데, 이후 준왕은 오늘의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써 대륙을 호령하던 북삼한의 시대가 끝나고, 한반도의 한강이남 지역의 남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간도수가 뿌리내리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도전』 5편 303장을 보면, 증산 상제님은 인류의 선천역사가 송두리째 폭발하여 무너지는 가을 대개벽의 파탄 도수를 금강 하구인 장항에서 보셨다. 선천 상극 세상을 끝맺고 후천의 신천지 조화선경 세상으로 들어가는 파탄 도수를 그곳에서 보신 이유가 무엇일까? 금강 하구에서 간도수의 역사 시대가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실체

그러면 고조선 이후 조선의 역사에 대해,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이야기한다. 천하에 불의한 위만이란 자가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권을 잡은 것인데, 그가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정신 나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안정복(1712∼1791)은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고 했고, 신채호(1880∼1936) 선생은 ‘그것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아무리 좋게 불러도 ‘위만정권’이나 ‘위만왕조’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자들은 여전히 ‘위만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사람들은 ‘기자조선’을 이야기한다. ‘원래 은나라에 기자, 비자, 미자라는 세 분의 어진 현인이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하자 그 중 한 사람인 기자가 동방으로 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고 하여, 주나라를 연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고 했다.

 

하지만 본래 기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이복형제로서 ‘기’라는 땅의 제후였다. 그는 은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않겠다 하고서 옛 고국으로 내려간 사람이다. 그런 그가 무슨 왕이 되었단 말인가. 사마천이 붓대를 갖고 그렇게 조작을 한 것이다. ‘단군조선’이란 말은 전혀 없고, 약 3,100년 전에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그런 거짓말 역사를 쓰고 있다. 이는 이 땅의 역사가 중국의 제후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매도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일본 사람들은 우리 조선 역사의 출발을 ‘위만조선’으로 말한다. 조선은 본래 독자적으로 나라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위만조선이 BCE 194년부터이니까, 조선의 역사는 약 2,200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 조작된 한사군의 실상

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본 사람들이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네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BCE 108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려고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내부의 반란에 의해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다. 우거의 정권은 조선의 왕위를 찬탈해서 만든 한족 정권이기 때문에, 니계尼谿에서 상相이라는 벼슬을 하던 참參이 주동이 되어 우거를 죽여 버렸다. 그러고서 조선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 군에 대항하여 피 터지는 조선족의 독립전쟁을 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우거가 죽어 결국 한 무제가 승자가 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시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워낙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네들의 사군四郡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조선족의 사군을 자치 군郡으로 인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도 오래 지나지 않아 한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 『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나라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고,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棄市刑, 목을 자르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에 처해지고, 상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아무튼 한사군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일제에 의해 완전히 왜곡 조작됨으로써, 한국 고대사 인식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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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고두막한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그런데 『삼성기』 상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또 있다. 한 무제가 우거의 왕검성만 정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옛 고조선 지역인 만주의 북부여까지 완전히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방 한민족사에 최대의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난 구국의 인물이 서압록 위에 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왕대나무에 왕대가 난다고, 47대 고열가 단군의 직계 후손인 고두막한이 나서서 한 무제를 물리쳤다. 그러고서 그는 졸본에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방 신교의 대광명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바로 동명왕이 고두막한이고 고두막한이 동명왕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말살되어 지금 고주몽이 동명왕으로 알려져 있다.

 

동명왕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해부루 단군을 동쪽으로 몰아내고 5세 단군으로 등극을 했다. 이로써 북부여의 후기 시대[後北夫餘]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6세 고무서 단군 때에 이르러 북부여는 막을 내린다.

 

한편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 단군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하며,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무서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북부여의 BCE 58년에 7세 단군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668년에 망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고구려 역사는 기껏해야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신라시대의 고운 최치원의 글을 보면, ‘중국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900년으로 알고 있더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900년이 되는 것일까? 『삼성기』 상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되는 놀라운 내용이 있다. “사해모수祠解慕漱하여 위태조爲太祖라”,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는 것이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것이 BCE 239년이니까 668년까지, 900년이 조금 넘는 역사가 나오는 것이다.

 

 


  안경전 / 증산도 종정님

강증산 상제님의 도업을 3대째 개척해 온 한국의 유일한 지도자 집안에서 출생하셨다. 평생을 바쳐 상제님의 후천 가을문명의 도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대중화, 세계화하고 상제님의 대학교 문명을 이끌며 인재를 기르는 지도자이시다.

 

적바림  [증산도 월간개벽 2009년 7월호 '개벽의 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