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식민사관부터 극복해야”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석학인문강좌’ 강연 2009년 12월 21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일제는 한국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진행해나갔다.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사발전 과정을 부정하고 한국사에서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신공(神功)황후의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계승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어놓은 만선사(滿鮮史), 당시 한국의 경제가 일본 고대 말기의 촌락경제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정체성이론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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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
일제의 역사왜곡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붙들려 한국의 역사를 왜곡 발언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조’란 용어는 일제 어용학자들의 산물
“이조(李朝)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이조’란 용어는 일제가 조선시대 역사를 폄하하고, 공격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라는 것.
조선 역사를 이 씨들만의 역사로 국한시키면서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사관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며 ‘이조’란 용어 대신 500년 이상 역사를 이어온 국가 개념, 즉 ‘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줄 것을 당부했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조선 역사와 관련, 사색당쟁론(四色黨爭論), 사대주의론(事大主義論), 문화적 비정체성론 등을 주장했는데, 이들 역시 비슷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용학자들의 주장은 “조선이 500년 간 이어온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인해 망했다”는 것인데, 조선 역사에 있어 사색당쟁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대부분 양당 체제를 통해 견제와 균형, 부정부패 방지 등을 도모해왔다고 정 위원장은 말했다.
조선 전기 역사에 있어 주역은 사(士)와 대부(大夫), 즉 조선 건국공신 계열의 훈구파(勳舊派)와 유학자들인 사림(士林)이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이후 훈구파들의 독주가 이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내세웠다. 훈구파의 독주를 사림을 통해 통제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조선 후기 역사에 있어서도 사색당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후 정치를 주도한 것은 북인이었으며, 견제 세력으로 서인이 등장했다. 이후 역사에 있어서도 사림 간의 양당 체제와 비슷한 정치구도가 이어졌다.
중국 사여품에 있어 서적 대신 비단만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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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강연에 많은 청중들이 몰렸다. 청중들이 강연장 외부에 설치된 영상 시설을 통해 강연을 듣고 있다. |
사대주의론 역시 일제 어용학자들인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칭하면서 조선 역사를 비판한 용어다. 그러나 ‘사대’란 말은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 영향권 내의 외교질서를 의미했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존경과 책임이 공존하는 쌍방 관계가 존재했다.
양국 간에 이루어지던 조공(朝貢)과 사여(賜與)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조선이 특산물인 인삼, 종이, 화문석 등을 조공하면, 중국은 조공품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적, 비단, 약재 등을 사여했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중국의 사여품목에 있어서도 조선 역사를 크게 비하했다. 어용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비단을 사여 받은 것을 강조했는데, 당시 조선이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것은 비단이 아니라 서적이었다는 것.
조선사회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문(文)을 중시하던 나라였다. 명분을 중시한 나라였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인조반정이 대표적인 사례. 선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데 이로 인해 인조반정을 불러일으키고, 폐위하게 되는데, 가정 내 문제로 왕이 폐위되는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는 것.
결과적으로 조선은 무가 아닌 문을 내세움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를 이어갔는데, 어용학자들은 이 부분은 간과한 채 성종 이후 집중적으로 발생한 사화만을 강조하면서 당쟁으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만을 내세워 조선 역사를 비하하고 있다고 정 위원장은 말했다.
정 위원장은 조선이 5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그 생명력은 폭압적 통치를 배제하고,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친화적 정칙, 즉 왕도를 지향했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가 흔들렸지만, 왕조의 종말로 이어지지 않고 조선을 재건할 수 있던 것은 조선 사회 특유의 명분 정치에 있었다고 말했다.
역사상 250년 동안 몰락한 나라는 없어
“조선이 양란 후 무너져 내렸다는 설명은 역사의 기초지식도 못 갖춘 억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중국 왕조의 평균 수명이 150년에 불과한 점에 비추어 250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와해되는 사회가 역사상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기간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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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
“조선은 칼을 든 무사의 나라가 아니라, 붓을 든 선비의 나라였으며, 힘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성에 기반을 둔 논리의 나라, 논리로 통치하는 평화 지향의 문치주의 국가였다”고 정 위원장은 말했다. 다시 말해 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로서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였다는 것.
“한 마디로 조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삶을 성취한 시대였으며, 현대 물질주의 사회와 정반대의 가치를 추가한 사회였다”며 사대주의란 용어에 입각해 문화적 비정체성론을 주장한 일제 어용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정 위원장은 조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극복해야할 과제로 식민사관을 꼽았다. 구체적으로 당쟁이 조선망국의 원인이었다는 식민사관의 당쟁론을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지난 1970년대 역사학계가 당쟁론의 비판논리를 대신해 붕당론(朋黨論)을 제시한데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붕당론에서 말하고 있는 붕당정치(朋黨政治)란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특이한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공론에 입각,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 정당정치와도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각 당파들이 무엇을 위하여, 무슨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는제, 또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정치운영의 방향성을 갖고 움직였는지 등 본질적인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러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붕당론의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 타임즈 http://www.science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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