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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한민족의 혼(魂)이 서린 땅, 간도

by 바로요거 2009. 11. 13.

 

한민족의 혼(魂)이 서린 땅, 간도

 

우리 땅 우리 혼(魂) 간도는 어디에..

여러분은 간도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부디 관심을..)

 

 

백두산을 가르는 중국과 북한 국계비의 마지막인 21번째 비석. 두만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세워졌다.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협정이 체결된 1962년에 처음 비석이 세워졌지만 1990년에 현재의 화강암으로 교체돼 비석에는 ‘1990’이라고 연도가 새겨져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한민족의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시켰고, 남북 분단은 다시 우리의 영토의식을 휴전선 이남에 가뒀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집요한 억지주장에만 분노하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본보 특별취재팀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과 두만강, 간도와 연해주 등을 돌아보면서 영토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임을 절감했다. 1909년 아무 권한도 없는 일제가 이권의 대가로 중국에 간도를 넘겨버린 간도협약에 가슴을 쳐야 했다.

백두산과 천지를 양분한 북-중 밀약의 정확한 진상을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웠고, 간도 영유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전율을 느꼈다. 우리가 대응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초조감도 들었다. 더 이상 외면하고 방치하면 영원한 ‘민족의 실지(失地)’가 될지도 모르는 영토분쟁의 현장을 소개한다.》

<1> 철책 하나 없는 北-中 국경

‘도화선(圖和線) 200km’라는 도로표지를 지나쳤다. 도로의 기점인 두만강 하구의 북-중(北-中)간 국경도시, 투먼(圖們)에서의 거리다. 차가 달리는 곳은 백두산의 해발 1300m 지점, 행정구역상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다. 표지석을 지나 겨우 5분을 달렸을까.
‘두만강 발원지’라고 한글과 한자로 병기된 말끔한 교통표지가 우뚝 길 왼편에 나타난다. 차를 멈추고 표지가 가리키는 도로 안쪽 숲을 향해 들어서다가 붉은색 페인트로 쓴 ‘월경(越境)관광 금지’ 경고문에 순간 발길이 주춤해진다.


○ 한 발은 북한, 한 발은 중국

“자칫하면 조선(북한)군이나 중국군에게 붙잡힌다”며 연방 주위를 살피는 길잡이의 긴장된 목소리와는 달리 사방 어디에도 국경을 나타내 주는 철책 하나 보이지 않는다.

길 안쪽으로 200여m를 걸어 들어갔다. 표지가 없었다면 그저 지나치고 말았을 작은 웅덩이에 불과한 두만강 발원지가 나타난다. 거기서 시작된 물의 흐름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100여m를 걸어가자 폭이 채 1m도 되지 않는 도랑 같은 물줄기가 보인다.

다리를 벌려 도랑의 이쪽과 저쪽을 밟고 섰다. 두만강은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가르는 국경하천. 그러니 지금 취재기자의 한쪽 발은 중국, 또 다른 한쪽은 북한을 딛고 선 것이다. 다시 도로로 나가기 위해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100여m쯤을 걸어나간 지점, 도로 안쪽으로 들어선 오른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비석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북쪽 면 글씨가 뚜렷이 보였다.


○ 백두산의 마지막 국계비


 

 

‘中國 21(2) 1990.’ 비석의 남쪽 면에는 똑같은 글씨체로 ‘조선 21(2) 1990’이 붉은색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약 1m. 어른 허리께에 차는 높이다.

북한과 중국 어느 쪽도 국경선을 언제 어떻게 획정했는지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지만 백두산을 가르는 표석으로 1960년대 이후 엄연히 실재해 온 국경 경계비(국계비)들. 21번 비석은 마지막 국계비였다.

백두산 일대의 국계비는 북-중간 국경의 ‘실체적 증거’다. 변화가 있었다면 1962년에 세워진 국계비가 1990년에 현재의 화강암 소재로 바뀌었다는 것뿐. 백두산 지역의 주민들은 이 국계비와 함께 40여년을 살아왔다. 이들 국계비는 요즘 밀수꾼들의 접선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중국 안투(安圖)현에 사는 조선족 청년 A씨의 얘기.

“요즘은 차 밀수를 많이 하는데 옌볜에 굴러다니는 한국제 고급차들 다 북한땅 거쳐서 들어온 겁니다. 저쪽(북한)에서 ‘오늘밤 차 한대 간다’며 ‘17호 쪽으로 간다, 19호 쪽으로 간다’고 하면 금방 그쪽으로 차 한 대 다닐 길을 닦았다가 차만 지나가면 국경부대가 못 보게 싹 흔적을 치워 버린단 말입니다.”


○천지를 가르는 두개의 비석

“백두산의 서쪽 등반코스에 5월이면 꽃이 활짝 피는데 ‘꽃축제’라고 아주 장관입니다. 서쪽 코스, 여기 말로 ‘시포(西破)’의 시작점이 5호 국계비죠.” 현지 등반가이드 B씨는 등산 가이드들에게도 국경비는 중요 지형지물이라고 전한다.

5호비는 천지 서쪽의 봉우리인 청석봉(2664m) 남쪽에 세워져 있다. 이 5호비와 동북쪽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는 지점에 6호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5호비와 6호비를 잇는 직선이 중국측 지도에 표시된 천지를 분할하는 국경선이다.

1∼4호 국계비를 보려면 백두산 남쪽 코스를 택해야 한다. 행정구역상 중국은 창바이(長白)현, 조선은 양강도 혜산시가 마주보는 지역이다.

1∼4호비는 백두산 관면봉에서 시작해 서북 방향의 와호봉 제운봉으로 연결되는 코스에 있다. 출발점은 창바이현의 23도구. 계곡 아래로 압록강 상류가 보이는 이 남쪽 등산로는 북한과 중국 양쪽 국경을 넘나들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코스를 올라본 한국인 K씨의 경험담.

“중국 사람들은 통행증을 받은 뒤 국경경비대의 안내를 받으면서 차를 타고 올라가요. 저는 아예 미화 100달러짜리를 준비해 갖고 가서 북한 국경경비대와 부닥칠 때마다 찔러줬어요.”

 

 ○중국의 묘한 2중 정책

21호비가 세워진 곳은 북한 쪽의 홍토수와 중국 쪽의 뤄류허(弱流河)가 만나는 지점. 20호비 또한 홍토수와 중국 쪽 무수린허(母樹林河)의 합수지점에 설치됐다. 지난해 21호비 앞쪽에 군사도로가 뚫리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옌볜대학출판사에서 2002년 발간한 ‘연변관광자원과 리용(이용)’이라는 책에서는 책자는 21호비를 관광자원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21호비로 통하는 길은 중국인들조차 통행을 하려면 국경경비대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통행 목적을 밝혀야 하는 군사도로다. 중국은 지난해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린(吉林)성과 랴오닝(遼寧)성 국경지역에 15만명의 군을 추가투입했다.

백두산 등반 북쪽 코스의 관문인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의 주민 C씨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 출신 변방 경찰들이 국경을 지켰는데 요즘은 허베이(河北) 쓰촨(四川)성 등 내지에서 온 군인들로 싹 바뀌었고 경비도 강화됐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을 막고 북한 정권에 변고가 생기면 신속하게 대응하려는 것 같다는 게 그의 짐작이다.

허룽(和龍)시 주민 D씨는 조금 다른 설명을 보탰다. “국계비에 가까이 가거나 사진촬영을 하는 것은 여전히 위법이지만 요즘은 시 재원 확보를 위해 두만강 발원지나 만주족 발상지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위안츠(圓池)’ ‘댜오위타이(釣魚臺·일명 김일성 낚시터)’ 등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경 경비 강화와 관광 홍보는 모순이다. 중국의 진짜 속내는 뭘까. 2002년 2월부터 중국사회과학원이 주도하는 학술프로젝트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민의 반중(反中)감정 격화를 예상하면서도 국가 주도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엔 한반도 통일 이후까지 대비하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국가전략이 숨어있는 듯해서다.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논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 사회과학원 홈페이지(www.chinaborderland.com)가 동북공정의 목표를 ‘동북변경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부터 학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근 10년 내 동북아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역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 북조선 한국 몽골 일본 미국 등의 국가와 중국이 갖는 쌍방관계 다자관계는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고 밝힌 대목은 중국의 의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2002년 동북공정 개시와 지난해 동북변경지역 군사력 증강에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다. 말없이 서 있는 국계비와 우뚝 선 백두산,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동북아에 암운을 드리울 가능성이 있다. 영토분쟁은 우리에게도 그리 먼 얘기가 아닌 것이다.


▼中, 천지에서 ‘국경 이벤트’▼

 

 

두만강 발원지’라는 대형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그러나 일부 중국학자들조차 이곳이 ‘과학적으로’ 두만강 발원지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낸다. 만주족의 발상지인 위안츠와 불과 2km 거리에 있는 이곳을 두만강 발원지라고 규정한 것은 지리적 사실에 대한 입증이기보다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2001년 8월 28일. 천지에 최초로 금이 그어졌다. ‘중국의 물개’로 불리는 장젠(張健·40) 베이징(北京)체육대 교수가 천지를 헤엄쳐 횡단했다. 장 교수는 천지 동서쪽의 국경경계비(5호비와 6호비)를 잇는 선과 200m 간격의 평행선을 그리며 물을 갈랐다. 물론 중국 쪽에서 수영을 했다.

이는 천지에 국경선이 있음을 보여주려 한 의도적인 이벤트가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중국 언론들은 행사 전날까지 이 이벤트에 관해 일절 언?僿舊?않았으나 행사 당일엔 일제히 ‘천지 횡단’을 부각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북한은 중국에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두산 창바이(長白)폭포 인근에 사는 한 주민은 “작년에도 한 중국인 사업가가 천지의 중국 쪽 절반만 운항하는 관광유람선을 띄우려 했다가 북한의 거센 항의를 받고 철회한 일이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중국지도출판사에서 제작한 지린(吉林)성 지도는 천지 한복판에 국경선을 그어놓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천지를 약 6 대 4의 비율로 나눠 갖고 있다. 그러나 1997년 북한 교육도서출판사가 펴낸 조선지도첩엔 국경선이 천지의 동서 양끝까지만 그려져 있다.

북한이 천지에 국경선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백두산은 부득이하게 중국과 나눠 가졌어도 천지만은 온전히 조선의 것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한국지도는 이를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근 발간된 ‘북한행정도’(성지문화사) ‘최신북한지도’(우보지도문화사) ‘대한민국전도’(새한지도) 모두 천지를 통째로 북한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천지에 사는 물고기들의 ‘국적’은 확실히 북한이다. 천지에는 원래 어류가 살지 않았으나 북한 조선과학원의 동물연구소 어류학자들이 60년 84년 89년 91년에 각각 5, 100, 120, 216마리의 물고기를 방류했다. 그래서 세계 화산호 중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천지에 붕어 산천어 등이 살게 됐다.

중국은 백두산을 AAAA급 관광구로, 북한은 백두산과 천지를 각각 명승지 제19호와 제351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간도의 혼은  토문강을 끼고..

 

 

쑹화강 지류인 우다오바이허.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은 이 우다오바이허의 상류인 헤이스허로 추정된다. 헤이스허의 물길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넘어 북한 쪽에 있는 백두산정계비터까지 이어진다.

 

난간이 절반쯤 부서진 이름 모를 다리. 그 아래로 쑹화(松花)강의 지류인 우다오바이허(五道百河)가 흐른다. 족히 6∼7m는 돼 보이는 강폭에 수량도 제법 많아 발원지는 아직 먼 것 같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헤이스허(黑石河)로 이어진다고 하나 차를 이용해 갈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가이드 생활 십수년에 이런 데 오자는 손님은 처음 봤습니다.” 여정 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현지인 가이드가 너스레를 떤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한국과 중국의 동쪽 경계로 새겨진 ‘토문(土門)’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3월 말인데도 강기슭엔 눈이 수북했다.


○300년 묵은 국경분쟁

1712년 조선과 청이 합의해 세운 백두산정계비엔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고 나와 있다. 그 후 토문이 어디인지가 줄곧 논쟁거리가 됐다. 170여년이 지난 1880년대엔 외교문제로 비화돼 두 차례 국경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조선측은 쑹화강 상류가 토문이라고 주장했으나 청측은 중국어 발음이 같은 두만(豆滿)강의 이칭(異稱)이라고 맞섰다. 토문이 쑹화강 상류라면 간도(間島)지역은 물론 연해주 일부까지 조선 땅이 된다. 그러나 회담 중단으로 시비가 가려지지 않은 채 다시 120년 가까이 흘렀다.

취재팀은 현지답사에 앞서 한국과 중국 현지의 역사학자 지리학자들과 함께 토문을 그린 고지도를 검토하고 최근 중국과 북한이 펴낸 지도와도 비교해 봤다. 현지인 탐문 취재와 역사문헌 조사도 거쳤다. 그 결과 우다오바이허의 지류인 헤이스허가 토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헤이스허 가는 길

1712년 국경 정계(定界)에 나섰던 청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은 국경으로 삼은 두 강의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우고 물길이 불분명한 곳엔 돌과 흙으로 담을 쌓게 했다. 그 정계비와 토퇴(土堆) 석퇴(石堆)가 있던 자리는 모두 북한 쪽에 있어 취재팀은 중국 쪽에서 되짚어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물길의 모양은 지도마다 조금씩 달랐다. 백두산에서는 목재 운반을 위한 임로(林路)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하천 주위의 도로도 명확지 않았다. 지도를 따라가도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일단 우다오바이허에서 백두산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을 찾았다.

쑹화강에서 우다오바이허가 갈라지는 지점의 ‘싼다오(三道)’라는 곳이었다. 거기서부터는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물길을 따라갔다.

강을 따라 올라가며 마을 사람들에게 “이 하천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모두 “쑹화강 상류”라고 대답한다. 우다오바이허라는 지리학적 명칭은 몰라도 물이 쑹화강으로 흘러드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싼다오에서 진흙탕길로 35km를 달려 작은 다리에 이르자 길은 끊겼다.


○토문은 두만강이 아니다

정계비는 백두산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 중 하나인 백두봉에서 남동쪽으로 4km가량 떨어진 해발 2200m쯤 되는 지점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두만강 지류가 보이지 않는다. 현지 지리학자 A씨는 “두만강의 지류 중 가장 북단인 홍토수(紅土水)조차 정계비터에서는 볼 수 없다”고 일러줬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지형도로 1986년 두만강 상류를 계측했던 한국하천연구소 이형석 소장도 “정계비 동쪽의 물은 두만강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는 “정계비는 쑹화강과 압록강이 갈라지는 이분수령(二分水嶺)에 있으며 두만강 쑹화강 압록강이 갈라지는 삼분수령(三分水嶺)은 대연지봉”이라고 설명했다.

화산 지형인 백두산의 동쪽 사면은 밟으면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 부석토로 물이 땅 속으로 스며 흐른다. 그래서 토문은 지표면으로 흐르는 하천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설득력이 있다. 현지의 지리학자 B씨는 “목극등이 정계비터에서 동쪽으로 본 것은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였을 것이다”고 말했다.

1712년 당시 조선측 통역관으로 동행했던 김지남(金指南)의 ‘북정록(北征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목극등이 사람들을 시켜 자신이 지목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보게 한 뒤 물길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받고 정계비터를 토문의 수원(水源)으로 정했다는 대목이다.


○토문은 쑹화강 상류에 있다

하지만 정계비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물길은 모두 쑹화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만약 목극등이 두만강을 경계로 정하고 싶었다면 정계비를 엉뚱한 자리에 잘못 세운 것이 된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해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 러시아의 연해주까지를 휘감아 흐르는 쑹화강. 그 상류는 서쪽부터 터우다오바이허(頭道白河)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싼다오바이허(三道白河) 쓰다오바이허(四道白河) 우다오바이허로 불린다. 헤이스허는 우다오바이허의 상류로 흘러 듣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에서 한 가지 사실만은 양측의 견해가 일치했다. 정계비와 토퇴, 석퇴를 따라가면 ‘황화쑹거우쯔’(黃花松溝子)가 나온다는 것. 당시 조선측 대표 이중하(李重夏)가 작성한 지도에도 ‘황화쑹거우쯔’가 명기돼 있다. 또한 청측 자료는 “비석에서의 거리가 90리다”고 밝히고 있다.


○토문이란 명칭은 실재한다

현재 지린성에서 쓰이는 지도와 1885년 이중하가 그린 지도를 비교해 보면 헤이스허와 황화쑹거우쯔가 위치나 물 흐름에서 흡사하다. 특히 중국의 지도나 지리서는 헤이스허와 정계비터를 점선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는 물론 지표면으로 흐르지 않는 하천임을 나타낸 것이다.

2002년에 한국의 우진지도문화사가 펴낸 ‘최신북한지도’는 아예 우다오바이허를 ‘투먼강(土門河)’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영택 우진지도문화사 대표(한국 땅이름학회 고문)는 “북한에서는 지금도 우다오바이허를 토문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전했다.

 

토문강 둘러싼 쟁점

영토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두만강과 토문강이 서로 다른 강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구분한 함경도도. 정조 11년(1787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서는 백두산 동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원으로 표시해, 대각봉 아래에서 나와 무산을 거쳐 흐르는 두만강의 흐름과 뚜렷이 구분했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청(淸)나라는 1658년 현재의 간도지역에 대해 봉금령(封禁令)을 내린 이래 19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에 사람이 살거나 농경지를 개간하는 것을 금했다.

 

조선 역시 19세기 후반까지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가는 행위를 ‘범월(犯越)’로 규정해 엄격히 다스렸다.

 

따라서 간도는 오랜 세월 조선과 청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중간지대로 존재했다. 간도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서울대 백충현 교수의 말처럼 ‘영토협상은 쌍방이 과거의 사실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국제법으로 엮어서 주장하는 과정’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의 혼용과 구별

중국측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조선과 청 모두 토문이 두만강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청은 토문과 두만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도 토문과 두만을 같은 것으로 표기한 것이 있다. 이 점은 한국측에 불리한 대목.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토문과 두만을 명확히 구분해 그리는 조선의 지도가 늘어났다. 179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여지도(輿地圖)에는 두만강과 분명히 다른 물줄기가 정계비에서부터 표시돼 있다. 역시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경도도는 백두산 동쪽에서 나와 북류하는 물길을 ‘토문강원’으로 명기하고 있다.

또한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全圖)는 정계비에서 갈라지는 물줄기가 두만강 북쪽의 ‘분계강(分界江)’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두만강과 합쳐지는 것으로 돼있다.


● 영토의식에 눈뜨는 조선

 

 

두만강 상류인 중국 지린성 조선족자치주 난핑에서 건너다본 북한의 무산. 무산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중국 쪽에서 들릴 만큼 지척이다. 법으로 월경이 금지됐지만 이미 19세기 초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을 캐거나 경작을 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1803년의 순조실록은 “무산에서는 강이 잠시라도 얼어붙으면 나무하고 꼴 베는 아이들이 다니는 길이 이루어질 정도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강 건너를 이웃 읍 보듯 해 범월을 막을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4군 6진을 개척했으나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은 뒤 이 지역을 방치했다. 군사방어선도 남쪽으로 후퇴했다. 인천교육대 강석화 교수는 “정계비를 세울 때만 해도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강변지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북방의 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은 중흥기인 영·정조대였다. 영조 때인 1767년부터는 백두산을 ‘조선의 종산(宗山)’으로 인정해 매년 세 차례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나아가 폐사군(廢四郡) 복구론, 요동수복론 등과 같은 논의가 일기도 했다. 토문은 두만이 아니고 쑹화(松花)강이라는 주장이 본격 제기된 것도 이때였다.


● ‘사기극’이라는 주장의 맹점

“1880년대 조선정부는 국경쟁의를 일으켰다. 투먼강(圖們江·두만강의 이칭) 북쪽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위증과 망언을 이용해 역사상 보기 드문 국제 외교사기극을 도모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산둥(山東)대 쉬더위안(徐德源) 교수는 1998년 ‘토문, 두만이 각각 다른 두 강이라는 망언에 관한 반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이 백두산정계비를 비밀리에 옮겼으며 △그에 맞춰 돌더미와 흙더미도 쑹화강 쪽으로 축조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정계비 위치를 바꾸고 국경축조물을 날조했다는 얘기는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현재의 정계비 터를 기준으로 하면 간도는 분쟁의 소지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실수라 해도 면책될 순 없다

국경 정계(定界) 합의의 청측 대표인 목극등(穆克登)이 저지른 실수는 중국측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대목이다. 현지 역사학자 A씨는 목극등의 실수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두만강을 경계로 생각했다면 정계비 위치를 두만강이 안 보이는 곳에 잘못 잡았고, 둘째 두만을 토문으로 오기(誤記)했으며, 셋째 두만강 상류가 아닌 물줄기에 국경축조물을 쌓게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1885년, 1887년 감계(勘界)담판에서 조선은 “목극등이 주장해 세워진 축조물대로 쑹화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충현 교수는 “비석의 위치가 잘못됐거나 비문에 오기가 있다면 국제법적으로 청의 중대과실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이일걸 박사(성균관대 강사)도 “과실 책임은 일방적으로 청에 있다”고 논문을 통해 주장해 왔다.


● 소백산정계비설은 타당한가

이를 뒤집기 위해 중국학계는 “정계비가 당초 압록강과 두만강이 다 보이는 소백산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조선이 정계비를 옮겼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정계비 건립 당시 목극등과 동행한 청의 화가가 작성해 청과 조선 정부에 제출한 지도를 보면 토문은 백두산의 대각봉보다 위쪽에 표기돼 있다. 현재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소백산보다도 북쪽에 그려진 것이다. 강석화 교수는 “당시 조선측 통역관으로 동행했던 김지남(金指南)이 남긴 ‘북정록(北征錄)’의 답사경로를 보아도 소백산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 간도는 조선인이 개척했다

간도지역의 개척자는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삶터를 옮긴 후에도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 지역에 대흉작이 들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 농경지를 개간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조선의 지방관이 주민들의 집단이주를 조장하기도 했다. 회령부사는 주민들이 개간청원서를 내면 이를 허용해주는 방식으로 이주를 지원했다. 강계군수는 자신의 권한 아래서 서간도 일대의 땅을 28개면으로 나눠 7개면은 강계군, 8개면은 초산군, 9개면은 자성군, 4개면은 후창군에 분속시켰다.

반면 청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청이 두만강 대안(對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관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1860년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체결한 이후. 청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도 변발하고 호복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 주민들은 청원도 조선에 했다

청은 1882년에야 간도주민들을 자국인으로 편입하겠다는 방침을 고시했다. 이에 간도의 조선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과 토문강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므로 두만강 이북지역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하려는 청의 시도를 막아달라”고 조선정부에 청원하기도 했다. 1885년과 1887년에 조선이 청과 회담에 나선 것도 간도주민들의 이 같은 청원 때문이었다.

사이섬 비석의 슬픈 운명

《평평한 돌 위에 한때 무엇인가가 서 있었던 흔적이 선명했다. 칼로 도려낸 듯 그 자리만 흉물스레 허연 속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왜 잔해를 치우지 않은 것일까. 무엇을 경고하려는 뜻일까. 가까이에 있는 집 대문을 두드려 그 까닭을 물었다. 집 주인인 듯한 중년의 조선족 남자는 “한국서 오셨소?”라고 되물은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잘 모르오. 한국 사람들이 자꾸 와서 비석을 들여다보면서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당국에서…”》

 

●‘원조(元祖) 간도’의 사라진 비석

중국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시와 룽징(龍井)시 사이의 두만강 어귀에 촨커우(船口)촌이라는 곳이 있다. ‘배 닿는 곳’이라는 뜻의 이 마을은 지금도 여름철 두만강이 범람할 때면 마을 앞 습지가 쪽배 하나 다닐 정도의 샛강으로 변한다. 그 건너편은 북한의 종성.

이 마을 옆 습지에 한글로 ‘사이섬’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건립된 것은 2002년이었다. ‘사이섬’은 간도의 우리말. 옌볜(延邊) 지역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었다. 그만큼 촨커우촌 사람들에게는 ‘우리 마을이 원조 간도’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1882년 청나라가 간도 주민을 청에 편입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제일 문제시했던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이곳으로 넘어온 조선 사람들이 서쪽으로 퍼져가며 룽징시도 만들고 했으니까요.” 현지 역사학자 A씨의 증언이다.


●개척기 정서가 남아 있는 간도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애타게 내 가슴을 불러야보건만/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기러기 갈 때마다/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사라진 비석 뒷면에 새겨진 노래로 간도 개척기 조선인 이주민들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세기 말 촨커우촌 일대는 여전히 국경을 넘는 것이 금지돼 있었지만 기름진 땅을 찾아 이주해 오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감시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들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저자도 생겨 제법 흥청거리기도 했다.


●금지된 단어가 돼버린 ‘간도’


 

 

옌볜지역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세워졌던 투먼시 촨커우마을의 사이섬 비(왼쪽). 뒷면에는 새 삶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던 조선인들 사이에 구전된 애달픈 노랫말,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라네’가 새겨졌다. 그러나 비석은 세워진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사진제공 백두문화연구소

선조들의 간도개척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들려던 조선족들의 궁리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비석이 강제 철거된 것. 누가 왜 철거했는지 공식적으로 경위를 확인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을사람 누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자문에 응해줬다는 현지 학자들을 수소문해 찾아가서 사건의 전말을 물어봐도 한결같이 “모르는 일”이라거나 “정치적인 문제”라며 입을 닫았다.

간도는 이제 조선족에겐 금지된 단어가 된 것이다. 비석을 철거하고도 흉하게 잔해를 남겨둔 것은 금기를 어기면 어떤 징벌을 받을 수 있는지를 냉엄하게 학습시키는 본보기였다.


●역사적으로 실존(實在)하는 간도

간도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1902년 조선정부의 간도시찰사로 임명돼 이 지역을 둘러봤던 이범윤(李範允)으로 알려져 있다. 이범윤은 당시 이 지역의 중국측 행정책임자인 둔화(敦化)현 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도’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1907년에 작성된 중국측 실사자료인 ‘옌지변무보고(延吉邊務報告)’는 이 지역을 ‘중저우(中洲)’로 표기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공식적인 행정표기 어디에서도 ‘간도’는 찾아볼 수 없다.

간도의 범위는 다소 막연하다. 넓게 만주 전체를 일컬을 때도 있고, 좁게는 쑹화(松花)강 이남을 뜻할 때도 있다. 19세기 말의 사료들이 두만강 대안지역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간도만 간도인 것은 아니다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들도 현재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간도’라고 지칭하는 곳은 북간도일뿐이라고 단언한다. 실제 간도는 더 넓다는 뜻이다.

“강 사이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이섬이 생기면 다 간도라고 불렀어. (북한의) 온성 건너편이면 온성간도, 종성 건너편이면 종성간도 하는 식이지. 두만강 건너편은 북간도 또는 동간도라고 부르고 압록강 건너편은 서간도라고 불렀어.”

조선정부 역시 서간도 지역 주민까지 조선 백성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1897년 이 지역을 관할하는 서변계(西邊界) 관리사를 임명하고, 1900년 무렵엔 평북관찰사가 이 지역 주민을 보호하도록 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둥 주민도 조선이 관리했다

포항공대 박선영 교수(중국사)는 “지금의 단둥(丹東)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호적을 조선 정부가 관리했다는 기록도 있다”며 간도문제를 서간도까지 확장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1962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중조변계조약(中朝邊界條約)은 양국의 전 경계선을 확정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국경은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이며 간도는 중국에 속한다.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유보적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1962년 북-중 국경밀약의 내용을 알고 있으며 그 효력을 인정하는가?’라는 취재팀의 질의에 “북한과 중국이 현재까지 조약 체결을 공식 확인한 바 없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약내용도 확인되지 않은 것이므로 정부가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그는 “남북통일로 북한이 맺은 조약을 승계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의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간도분쟁의 뿌리는 간도협약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즉시 간도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조선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일제가 1909년 태도를 돌변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

당사자인 조선정부의 동의를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아무 권한도 없는 일제의 만행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는 것이다. 5년 뒤면 통한의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는 땅..  간도는 어떻게…

《“지린성(吉林省) 투먼(圖們)시를 지나치자마자 차를 몰던 가이드가 “두만강이오”라고 외쳤다. 물길의 너비가 30m나 될까. 두만강은 지도의 굵은 실선이 연상시켰던 품 넓고 유유한 강이 아니었다. 옌지∼훈춘(琿春)간 국도 302호선과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흐르는 두만강은 바지만 걷고도 건널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학정과 굶주림에 신음하다가 고향 땅을 등져야 했던 조선 유민들이 건넌 두만강도 이랬을까?》


● 바지만 걷어도 건너는 두만강

“당시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지금보다는 수량이 더 많았고 강기슭의 숲도 더 울창했던 것 같습니다. 10리 간격으로 배치된 국경수비대 군인들의 감시도 있었고요. 하지만 도강(渡江)을 막을 만한 큰 장애물은 없었습니다.”(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

두만강과 압록강은 조선인들에게 마치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국내 하천으로 인식되었다는 게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국경 하천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중국학계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장광차이링(張廣才嶺), 하얼빠링(哈爾巴嶺), 라오이에링(老爺嶺) 등의 산맥과 쑹화(松花)강 같은 큰 물길이 가로막고 있는 둥베이(東北) 지역은 중국 내지(內地)로부터 접근하는 것보다는 조선에서 넘나들기가 훨씬 쉬웠습니다.”(조선족 원로 사학자 C씨)


● 국경은 선 아닌 지대의 개념


 

 

중국 지린성 투먼시 인근 302번 국도에서 바라본 두만강. 수심이 간신히 무릎까지 차오를 정도다. 조선 후기 간도 이주의 주요한 통로였던 이 일대에서는 최근 탈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강 건너편은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간도 지역은 12세기 초부터 500여년간 임자 없는 땅이었다.

“당시 국경은 선(線) 개념이 아니라 지대(地帶) 개념이었습니다. 명대(明代·1368∼1644)에 간도지역은 고려 및 조선과의 군사적 완충지대로 어느 쪽의 일방적인 통제력도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였어요.”(박선영 포항공대 교수)

청대(淸代)에 들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청은 1660년대 백두산을 조상의 발상지로 성역화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을 섬겨야 했던 조선 정부는 간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일단 봉금(封禁)조치에는 협조했다. 거기엔 조선 변경에 대한 청나라 사람들의 침탈을 단속할 명분을 얻기 위한 고려도 작용했다.

 

● 목숨을 건 범월(犯越 : 국경을 넘는 것 )과
유민 애사(哀史 : 슬픈 역사)

이후 200여년간 조선과 청은 봉금 합의를 엄격히 지켰지만 목숨을 걸고 범월(犯越)하는 조선인들을 막지는 못했다.

“1867년 여름 새 무산부사(茂山府使)가 부임해 각종 세금과 벌금으로 쌀 10여만 석을 강제 징수했다. 이를 피해 마을사람들이 500여리의 원시림을 뚫고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여름에는 더워 죽고 겨울엔 얼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여서 지금도 길가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1872년 압록강 상류 지안(集安) 린장(臨江) 등지의 조선유민 생활상을 기록한 최종범(崔宗範)의 ‘강북일기(江北日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 신천지를 찾은 조선 유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원시림과 황무지, 그리고 그곳까지 뒤쫓아온 일부 조선 관리들의 가렴주구였다.
그런데도 이주민은 늘어나기만 했다.


● 결국 청(淸)도 봉금을 풀었으나

그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간도에서 피땀으로 마련한 농토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3배나 되는 수확을 안겨 줬다. 처음에는 월강(越江)을 중죄로 다스리던 조선 관리들도 나중에는 이를 눈감아주거나 도와주기까지 했다.

결국 1880년대 청이 봉금을 풀었다. 팽창하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청조의 발상지에 주민을 대거 이주시켜 개발한다는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쫓겨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미 간도는 조선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1890년대 무산 종성 회령 온성 경원 대안(對岸)의 조선인은 지역인구의 93%(청측 통계) 또는 98%(조선측 통계)를 차지했다. 조선과 청이 간도문제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농업혁명’을 일으킨 조선 유민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하순까지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두만강 압록강 대안지역에 벼농사를 처음 도입한 것은 조선 유민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를 ‘농업혁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이밥(흰 쌀밥)은 뼈밥’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족은 얼음이 서걱거리는 강물에 들어가 보를 막고 도랑을 냈다. 쌀을 수입하던 둥베이지방은 1910년대 말부터 쌀을 수출하게 됐다.”(‘중국조선족역사상식’ 중)

벼농사는 1870년대 퉁화(通和) 옌지(延吉) 등에서 시작돼 압록 두만 하이란(海蘭) 무단(牧丹) 쑹화강 유역으로 퍼져 나갔다. 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에 따른 쌀값 급등이 벼농사 확산의 중대 전기가 됐다.


● 민족의 피땀이 어린 간도

그와 함께 조선 유민들은 동북 3성(省) 전역의 강 유역과 평지로 거주지를 넓혀 갔다. 1933년에는 북위 50도의 헤이룽(黑龍)강 연안에서 벼 재배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뤄 내기도 했다.

중국 통계에 따르면 1920년 현재 동북 3성 주요 지역 무논의 80∼100%는 조선족이 개간한 것이었다. 1934년 동북 3성 총 인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3.3%에 불과했지만 조선족의 벼 생산량은 전체 수확량의 90.1%에 달했다.

간도의 황무지가 비옥한 옥토로 바뀌는 과정은 곧 조선 유민들이 간도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우뚝 서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 이상의 역사가 숨쉬는 곳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간도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항일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됨으로써 개척의 역사에 투쟁의 역사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원로 사학자 C씨는 이렇게 말한다.

“개척과 투쟁으로 삶의 근거지를 다지고 지켜 왔다는 점에서 조선족은 중국의 30여개 과계민족(跨界民族·주변 국가로부터 국경을 넘어 들어온 소수민족이라는 뜻) 중에서도 아주 유별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