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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한민족 고대사의 연결고리, 부여사 정리

by 바로요거 2009. 9. 29.

 

한민족 고대사의 연결고리, 부여사 정리
- 북부여기,가섭원부여기를 중심으로 -

 

북부여사는 민족사의 missing link

 지금 시간은 북부여기 시간인데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결정적인 것이 이 북부여기에 대해서, 북부여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북부여라는 것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missing link다.

missing link라는 말은 진화의 단계에 있어서 중간에 도저히 유물이 나오지 않을 때 잃어버린 고리라고 얘기를 하는데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바로 북부여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역사가 완전히 왜곡돼 있어요.

북부여사 개괄

부여가 어디서 시작했냐 하면 ‘BC 425년에 구물 단군이 장당경에서 단군으로 등극을 하면서 대부여라고 이름을 바뀌었다.’ 하는 것을 우리는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이 원시 부여가 됩니다.

그런데 해모수가 BC 239년에 웅심산에서 기두하셔서, 웅심산은 지금의 길림성 서란현인데요..........


<해모수 역할의 허준호 : 주몽의 아버지로 나오나 실제 해모수는 북부여를 건국>

임술년에 해모수라는 분이 북부여를 건국하게 됩니다. 북부여를 건국해서 232년에는 부여의 고도, 장당경에 가서 오가가 공화정을 펼치는 것을 접수를 합니다.

그리고 쭉 나가다가 BC 195년에 어떤 사건이 벌여지냐면 한고조 유방이 죽게 됩니다. 한고조 유방이 죽으면서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가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천하를 통일했던 공신들을 전부 숙청을 합니다. 그때 연왕으로 있던 사람이 노관이에요. 노관은 한고조 유방하고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해에 같은 날 태어났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연왕에 봉해졌었는데 여태후한테 의심을 받게 됐어요. 진희라는 사람이 역모 사건이 있었는데 거기 연루된 걸로 의심을 받아서 소환 하려고 하니 흉노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노관의 부하에 위만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위만은 번조선으로 투항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번조선의 임금은 기준 이였습니다. 준왕.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이 기준이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기준은 번조선의 임금 이였습니다.

BC 195년에 해모수에게 자문을 구했어요. “이것을 받아줘야 됩니까?” “받지  마라.” 했는데 어영부영하다가 그 해에 해모수 단군께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기준은 위만을 받아서 상하운장 땅에다가 거기를 다스리라고 영토를 주구서 봉해줍니다. 상하 운장은 지금의 난하의 서쪽이면서 천진, 당상시 그 주위입니다.

그런데 이 위만이 그 다음해에 반란을 일으켜서 BC 194년에 기준을 몰아내게 됩니다. 194년에 기준을 몰아내니까 이 기준은 배를 타구서 바다에 들어가니까 행방불명이 되고 말게 되죠.
 

194년이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해가 되는데, 그러자 만주에 있던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에 있던, 진한 마한 번한에 있던 유민들이 이제 한반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간도수가 실현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마한 사람들은 익산 근교로 와서 월지국, 목지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BC 194년에 와가지구 그것을 건설을 해요. 그리고 진한 땅에 있던 농안, 장춘 지방에 있던 사람들은 경주로 가게 됩니다. 번한 땅에 있던 사람들은 김해 쪽으로 가게 되요.
 

마한에 54개국이 있었고 진한에 12국이 있었고 번한에 12국이 있었다. 78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한반도에 많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중삼한 연맹체라는 것입니다.
 

-전삼한, 중삼한, 후삼한의 개념

우리가 전삼한, 중삼한, 후삼한이라는 개념을 쓰는데 전삼한은 바로 고조선을 얘기하는 거예요. 고조선의 삼한 관경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때는 최고의 권력이 진한의 대단군에게 있었어요. 중삼한 연맹체에서는 그 권한이 마한에 있습니다.

무광왕 탁이라는 사람이 194년에 익산에 와서 나라를 건국하고 약용건이라는 사람을 진한에 봉해주고 진완이란 사람을 번한에 봉해서 이때 가장 강력한 나라는 마한이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중삼한 연맹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라가 경주에서 진한을 이었고, 마한을 이어서 백제가 나오고 변한을 이어서 가야가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후삼한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중삼한 연맹체가 한반도 땅에서 있게 되는 거죠.

 

-위만조선의 실체

그리고 북부여의 두 번째 단군인 모수리 단군, 세 번째 단군인 고해사 단군, 네 번째 단군인 고우루 단군 쭉 내려가는데 BC 108년이 우리 민족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죠.

한무제가 군사를 보내서 위만 조선을 쳐버리게 됩니다. 조선 자를 붙이기 아까운 건데 위만에 대해서는 역대 역사 학자들이 정확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위만에 대해서 제대로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이병도가 과거의 고조선은 한씨가 나라를 세워서 한씨 조선이다. 고조선은 한씨 조선이고 위만이 위만조선이다. 그래서 한씨 조선은 전조선, 위만조선은 후조선이고 이런 엉터리 얘기를 이병도가 했어요.
 

서거정은 동국통감에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었다. 이런 엉터리 얘기를 너무나 많이 해서 위만조선에 대한 머릿속에 잘못된 것이 있었는데, 그 뒤에 우리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위만은 찬적이다.” 도적질 할 찬자에 도적 적자, 찬탈한 역적이다. 정확하게 얘기를 했어요. 안정복은 찬적이라고 얘기했고, 석주 이상룡 선생은 한술 더 떠서 “내일강도다.” 하나의 강도 놈이다. 정인보 선생은 요해의 한 모퉁이를 도둑질해서 거했던 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에 넣어야 된다. 이 네 사람은 정확하게 얘기했습니다. 위만은 우리의 변방을 조금 차지하고 있었던 그런 사람일 뿐이고 우리의 북부여의 국통은 계속 진행이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108년에 위만의 손자 우거가 한무제에 의해서 망하게 되구요. 한무제는 그 군사력을 계속 이동해서 우리 북부여의 땅까지 침범을 하게 됩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처음에는 하북성 상여현에 있다가 거기서 해성으로 옮겼거든요. 둘 다 험독이라 불렀는데 명칭을 똑같이 썼어요. 어쨌든 위만조선의 영역이 기껏 동쪽으로 와봐야 요녕성 해성, 영구시 있는 그 근처에 불과했습니다.
 

-고두막한의 북부여 계승 과정

거기에서 더 동쪽으로 오게 되니까 그때 고두막한이라는 장군이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켰어요. BC 108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한나라 군사를 전부 무찌르고 내쫓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힘이 굉장히 세지게 됩니다. 힘이 세지다 보니까 BC 87년에 북부여의 네 번째 단군이 고우루 단군, 해우루 단군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우루 단군이라고도 하는데, 대권을 내 놓으라 하니 힘이 약하니까 고우루 단군이 병들어 돌아가십니다. 돌아가시고 그 동생인 해부루가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단군에서 제후로 강등을 시켜서 저 송화강에 있는 분릉, 지금 흑룡강성 통하현인데요. 분릉의 동부여 제후로 삼아서 보내줘요.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다섯 번째 단군이 됩니다.

이때 고두막한은 졸본 땅에서 단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졸본은 지금 흑룡강성 유분하시 유양진이란 곳인데. 그래서 우리가 졸본부여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요. 그런데 87년에 북부여의 4대 단군이 죽고 5대 단군 해부루를 쫓아내면서 다시 북부여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 이전은 졸본부여라고 했지만 고두막한은 당신 스스로는 나는 동명왕이라고 얘기하고 동명부여라고 호칭해요. 동명부여는 BC 108년~87년까지의 고두막한의 나라를 동명부여라 그래요. 5대 단군으로 가서는 북부여라고 부르면서 북부여의 정통을 계승하는 거예요. 동명은 자기 자신을 동명왕이라 하기도 하고 그 나라를 동명부여라 하기도 해요. 후세 사람들은 졸본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졸본부여라고도 했습니다. 동명도 해가 뜨는 동방이라는 뜻이 있어요. 우리는 전부 광명 사상을 가지고 있다.
 

-북부여를 계승한 고주몽 성제

<주몽과 소서노  역할 인물>

해부루가 통하현으로 쫓겨 간 거를 동부여라고 얘기하고 그 뒤에 BC 79년에 동부여 땅에서 고주몽 성제가 태어납니다. 거기서 위험을 느끼니까 송화강을 넘어서 졸본 땅에 와서 보니까 그때가 22살인데 여섯 번째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 단군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어요. 딸이 있었는데 6번째 고무서 단군의 딸이 소서노입니다. 소서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북부여는 BC 239년에 해모수 단군이 나라를 건국하죠. 그 아들이 두 번째 모수리, 세 번째 고해사 단군, 네 번째 고우루 단군. 근데 고우루 단군이 죽으면서 고두막한이 대신하게 되죠. 고두막한이 다섯 번째 단군이 되는 거예요. 그 동생인 해부루는 제후로 강등시켜서 동부여 후로 삼았어요. 동부여라는 개념이 나와요. 근데 그 땅이 가섭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섭원부여 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BC 79년에 고주몽 성제, 임인년에 태어나서 22살에 와서 소서노와 결혼을 해서 BC 60년에 고두막한이 돌아가시고 60년에 고무서 단군께서 단군이 되었는데 굉장히 정치를 잘했어요. 소해모수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2년 밖에 살지를 못했어요.

BC 58년에 돌아가시자 사위로써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의 7번째 단군으로 등극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북부여의 전통을 계승하게 된 거예요. 북부여의 전통을 계승해서 다물로 연호를 삼았다가 BC 37년에 평락이라고 연호를 하는데 삼국사기에 평락이라고 연호를 한때가 고주몽 성제가 건국한 해다. BC 57년에는 신라가 건국되고 BC 37년에는 고구려가 건국이 되었다. 그건 잘못된 얘기입니다. BC 37년은 평락이라는 연호를 쓰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다물이라는 연호를 쓰다가요.
 

-갈사국, 연나부부여 성립 과정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고주몽 성제, 유리 명제, 대무신 열제 이렇게 내려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고구려와 동부여가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AD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버립니다. 2월 달에 동부여의 세 번째 임금이 대소거든요.

 
<금와 역할의 전광렬>       <대소 역할의 김승수>

 

동부여는 해부루, 금와, 대소, 대소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는데 진창에 빠졌어요. 오도 가도 못하니까 대무신 열제의 키가 9척이나 되고 칼을 잘 쓰는 괴유라는 사람이 목을 댕강 잘라버렸어요. 동부여는 임금이 사라졌어요. AD 22년 사건인데요.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4월 달에 대소의 동생이 북쪽으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아까 43대 물리 단군이 도망가서 돌아가신 데가 해두 아닙니까. 해두왕이 사냥을 나온 것을 보고서 그것을 덮쳐서 죽여 버리고 거기에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 나라가 갈사국입니다.
 

북갈사라고 얘기하는데 AD 68년에 태조 열제 때 북갈사가 귀순을 해요. 귀순을 하니까 도두왕이 귀순을 하거든요. 훈춘에다가 식읍으로 줍니다. 68년에 그것을 우리가 남갈사라고 얘기해요. 동부여에서 북갈사와 남갈사가 나오게 되는데 남갈사가 있게 되고, 그 뒤에 7월 달에 AD 20년 7월 달에 도저히 어쩔 수가 없으니까 대소의 종제가 모든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무신 열제에게 항복을 합니다. 항복을 하니까 이 사람을 연나부라는 곳에 제후로 봉해줘요. 연나부는 지금의 장당경 아사달 서북쪽에 있는 지방인데 이를 연나부부여라고 합니다.

근데 그 사람 등에 무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등에 낙문이 있었다 그래요. 낙문이 있어서 성을 낙씨라고 하사를 합니다. 그걸 낙씨부여라 그래요. 연나부부여라고도 하구요.

그 사람이 그 뒤에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백랑곡에 가서 나라를 이루고 살다가 우리가 삼국사기에 보면 AD 494년에 문자 열제 때 부여를 완전히 병합하다. 그것이 연나부부여를 병합하게 되는데 그것을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부여라고 얘기합니다.

부여가 이렇게 많아요. 여러분 부여에 대한 개념을 다 잡았죠.

 

-동부여, 서부여, 남부여, 북부여 정리

자, 동서남북 부여를 한번 살펴볼까요. 북부여는 해모수가 건국한 게 북부여예요. 왜 북부여라 그랬습니까? 남쪽에는 그 당시 대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북부여라고 했습니다. 남쪽에는 대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오가가 공화정을 펼치고 47대 고열가 단군이 다스리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북부여라고 했고, 그 북부여가 그 뒤에 쭉 내려오다가 고두막한이 졸본에서 일어나면서 고두막한이 BC 108년~87년 까지를 졸본부여 또는 동명부여라고 했다. 그리고 북부여를 5대 단군으로 계승해서 북부여라고 했다.

그런데 해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통하현 분릉으로 도망을 가서 동부여라고 했다. 그것을 가섭원 부여라고도 한다. 그것은 BC 87년~ AD 22년까지 지속이 되었다. AD 22년에 망할 때 대소의 종제에게 성을 낙씨로 하사해서 연나부 땅에 봉해서 그것을 연나부부여라 한다. 연나부 부여는 AD 22년~ 494년까지니까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이 되죠. 낙씨부여라고도 한다. 성이 낙씨기 때문에, 등에 낙문이 있었다 그래요. 연나부부여 또는 서쪽에 있어서 서부여라고 한다.

북부여 동부여 서부여가 있는데 남부여는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남부여는 성왕이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를 하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라고 했어요. 부여라고 호칭을 한 것은 그 원뿌리가 온조왕인데 온조의 아버지가 고주몽 성제고 고주몽 성제의 원뿌리가 북부여기 때문에 부여의 뿌리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남쪽에 있는 부여라 해서 남부여라고 호칭을 했던 것입니다.
 

윤창렬 대전대 교수 (2004년 12월 7일 증산도 대학교 교육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