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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 서린 한국의 명산, 지명 본래 이름 되찾자!

by 바로요거 2009. 10. 26.

민족혼 서린 한국의 명산, 지명 본래 이름 되찾자!

 

 이 혈(穴)이 와우형(臥牛形)인데 금혈형(琴穴形)이라고 혈명을 잘못 지어 발음(發蔭)이 잘 못 되었느니라. 어디든지 혈명을 모르거든 용미(龍尾) 없이 조분(造墳)하였다가 명사(名師)에게 혈명을 지은 뒤에 용미를 달면 발음이 되느니라. (증산 상제님 말씀, 道典4:108:1∼3)
 
 마니산 → 마리산, 계족산 → 봉황산 된다
 일제 때 바뀐 전국의 산 이름이 원래의 우리 이름으로 되돌려진다. 산림청은 지난해(2005년 10월)부터 ‘우리 산이름 바로 찾기’캠페인을 벌여 국민으로부터 제안받은 잃어버린 우리 산 이름 39건을 바로잡아 해당 자치단체에 넘겼다. 일제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했다.
 
 강화도 마니산(摩尼山)도 원래 마리산(摩利山)이다. 이는 곧 머리산을 뜻하는 것으로 뭇 산의 머리가 되는 숭고하고 거룩한 성산을 상징한다. 『고려사』『세종실록』에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岳)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지 주민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단군 성조가 몸소 단을 쌓고 상제님께 제를 올린 참성단이 이 산에 자리하고 있다.
 
 대전의 계족산(鷄足山)은 그 산줄기가 봉황새 형세로 뻗어있어 당초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렀으나 일제가 닭발로 격하시켜 계족산으로 바뀌었다(정상의 팔각정자는 봉황정으로 부르고 있다).
 
 서울의 북한산은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있다 해서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고려 때부터 천여 년간 사용). 그러던 것이 1915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을 지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소개하면서 사용한 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되었다.
 
 한편, 계룡산과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은 원래 천왕봉(天王峰)이었으나 일제가 일본 천황을 뜻하는 ‘황’(皇)으로 바꾼 것이다.

  일제, 한민족 정기 끊으려 남한산성에 쇠말뚝 박아
 조선시대 임금의 피란처,남한산성 부근에서 일제가 박아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쇠말뚝이 무더기로 발견, 그 제거작업이 마무리됐다. 이 일대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것은 지난 8월말로 무려 30개에 달한다. 쇠말뚝은 중앙을 기준으로 좌청룡,우백호 형태로 박혀 있다. 일제가 명당의 지맥을 끊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제거작업에 나섰던 소윤환 씨는 20년 동안 뽑아낸 쇠말뚝이 150개나 된다고 밝혔다.  수년전 지리산 천왕봉에서도 비슷한 크기의 놋쇠말뚝 두개가 발견돼 지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보관중이다. (2006.10.20)

 
 대전(大田)원래 지명은 태전(太田)
 대전의 본래 지명은 태전이다. 역사적으로 태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에 태전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 모든 공식자료(대한제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이곳의 공식지명이 태전으로 기재되었다.
 
 그러던 태전이 ‘대전’으로 그 지명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일본인 전중여수가 지은 『대전발전지』에 그 내막이 나온다. 국권피탈 되기 한 해 전인 1909년 1월의 일이다.
 
 당시 순종황제를 호종하여 태전을 지나던 이등박문 통감이 이곳의 그 주변의 수려한 산세와 이름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아랫사람에게 태전의 태(太)자에 점을 뺀 대전이라 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고쳐 부르게 한 것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금수강산 곳곳에 혈자리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경복궁 앞에 ‘日’자 모양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왜 이등박문은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이라고 부르게 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이름을 왜곡시킴으로써 그 지세의 기운을 꺽고 나아가 지기(地氣)를 받는 조선사람의 기운을 제어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대전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강제로 개명시킨 오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증산도를 중심으로 1992년부터 시작된 태전지명찾기 서명운동은 민족의 혼과 역사를 바로 찾는 운동으로 승화되어 1993년 12월 당시 태전 시민의 4분의 3에 달하는 약 75만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상세한 내용은 월간개벽 2000년 11월호 2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