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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사의 맥

by 바로요거 2009. 9. 29.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사의 맥

 

•부여사의 맥•

정리 유래윤

부여사의 중요성


①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열쇠가 바로 부여에 있다.

   중국 일본의 역사가들과 국내 반민족 사가들이 한민족 삼성조 역사와 신교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부여사를 표적으로 삼아 날조․은폐해옴.


부여단군조선의 대통직접 계승한 나라

    

 한중일이 바라보는 한민족사의 맥

   

   ▪중국

   

   기자조선 → 위만조선․삼한 → 한사군 → 신라 → 고려 → 조선 → 남북한

   

   ▪일본

    

   ?조선 → 위만조선․삼한 → 한사군 → 신라 → 고려 → 조선 → 일본의 지배      → 남북한


   ▪한국


   (사대주의 역사관)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삼한 → 삼국 → 신라 → 고려 → 조선


   (부일 반도식민사관: 이병도 역사관)

   한씨조선 → 위만조선․삼한 → 한사군 → 신라 → 고려 → 조선 → 일본의 지배 → 남북한


   (신교 정통사관)

   환국 → 배달 → 조선(북삼한 중 진한․진조선) → (열국 가운데) 북부여 → (오국 가운데) 고구려 → 대진국 → 고려 → 조선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남북한

  

※ 진한․진조선(대부여)의 대통을 이은 나라가 해모수의 북부여


   진한의 뜻 → 몽골어의 󰡐칭기스칸(成吉思汗 = 진+거수+한)󰡑과 비슷한 뜻

                최고(辰)의 통치자(韓)란 뜻(=天帝子)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 부여사의 맥


• 북부여 역대 임금


전북부여

① 해모수 단군   BCE 239~

② 모수리 단군   BCE 194~

③ 고해사 단군   BCE 169~

④ 고우루 단군   BCE 120~BCE 87년


후북부여

⑤ 고두막 단군  BCE 108년 동명왕으로 즉위 BCE 87~ 북부여 계승

⑥ 고무서 단군  BCE 59년 이듬해 고주몽에게 양위


※동명과 주몽

동명(東明)은 ‘동방의 광명(밝음)’이라는 뜻이다. 47세 단군 고열가의 후예인 고두막한이 세운 나라로(《북부여기》하)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또는 인물로서의 동명왕 고두막한을 가리키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동명을 고주몽이라 했으나, 동명과 고주몽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동명왕 고두막한의 북부여 후기시대를 이어 고구려를 세운 인물이 고주몽이다.(이 점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간시대에 해당하는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찾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므로 철저히 알아두어야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존 역사서에서 주몽을 동명왕으로 지칭한 것은 주몽이 동명왕 칭호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연개소문 아들인 연남산(淵男産) 묘지(墓誌)의 “옛날에 동명은 기운에 감응되어 표천(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 踰淲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라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동명과 주몽은 명백히 다른 인물이다. 원문에 “칭국동명(稱國東明)”은 “잉칭북부여(仍稱北夫餘)”의 오기(誤記)이다. 동명부여는 원래 고두막한이 졸본(卒本)에서 동명왕으로 즉위할 당시에 정한 국호로 동명부여는 졸본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기》에는 동명왕 고두막한이 고우루 단군의 북부여를 계승한 뒤에는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했다고 전한다. 고두막 단군이 세상을 뜨자 태자 고무서가 즉위하여 도읍을 다시 졸본으로 옮겼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가 동명제의 졸본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처음 창업된 나라가 아니라 재건국된 나라다. 주몽의고구려 이전 시대에 원시 고구려(고리국(槀離國))가 있었다는 사실은 본서 뿐 아니라 《후한서(後漢書)》, 《논형(論衡)》, 《양서(梁書)》, 《위략(魏略)》 등 수많은 문헌에서 밝히는 사실이다. 특히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의하면 초대 단군 성조께서 둘째 아들 부소(夫蘇)에게 서쪽 땅의 구려를 다스리게 한 것처럼 원래 단군조 이래로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 훗날 우거를 멸하고 이어 북부여를 침략한 한 무제가 한때 원시 고구려의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현으로 삼으려했는데 후세 중국 역사가들이 후한시대 반고(班固: 32∼92)가 편찬한 《한서(漢書)》〈지리지〉에 나오는 현도군 고구려현을 근거로 고구려가 마치 현도군에서 나온 것처럼 왜곡하고 고구려사 전체를 빼앗으려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수(隋)·당(唐)시대 때 수 문제, 당 고조 등을 설득하여 고구려 침공을 부추긴 배구(裵矩: 557-627)이다. 그의 사관은 당대 뿐 아니라 후대 중국 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 동북공정의 기본 논리로까지 이용되고 있다.

 

• 동부여의 왕 계보:

1세 해부루왕 BCE 86년∼

2세 금와왕   BCE 47년∼

3대 대소왕   BCE 6년∼CE 22년 : 고구려 대무신열제와의 전투 도중 전사


《삼국유사》에서 해부루와 부루태자를 혼동해서 기술함. 식민사학자들에게 악용됨.


• 갈사부여

1세 갈사왕 BCE 22년~

2세 ?

3세 도두왕 ?~CE 68년


죽은 왕의 아우가 추종자 수백 명과 더불어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렀는데 마침 해두국(海頭國) 왕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백성을 취한 뒤 갈사수(曷思水)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가 바로 ‘갈사왕(曷思王)’이다.

(고구려 6대) 태조 무열제(武烈帝) 융무(隆武) 16(CE 68)년 가을 8월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나라의 역년 3세 47년 만에 망했다.

이 때 고구려 열제가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아 살집을 하사하고, 혼춘(琿春)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동부여후(東夫餘侯)’로 봉했다.


• 연나부부여


※ 계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후한서》와 《삼국지》 《진서》 동이전에

3대? 위구대왕,

4대? 간위거왕,

5대? 마여왕,

6대? 의려왕

7대? 의라왕 등이 보위를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소왕이 죽은 BCE  가을 7월, 왕의 종제(從弟)가 그 나라 백성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왕(先王)은 시해되고 나라는 망해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고, 갈사국은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 홀로 국가를 지탱할 수 없도다. 나 역시 재지(才智)가 부족하여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여망이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여 생존이나 도모하자.”하였다.

드디어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고구려에서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椽那部1)에 살게 하였다. 또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으므로 낙씨(絡氏) 성을 주었다.


부여가 그 후에 독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으로부터 ‘백랑산(白狼山)’2)계곡으로 옮겨갔다.


이 때 의려왕이 백랑산으로 옮겼는데 285년 선비족 모용씨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의려왕은 자살하고 태자 의라는 옥저에 숨어살았다고 《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진(晉)나라 무제가 모용씨를 몰아내고 의라가 나라를 되찾도록 했다고 한다.


반면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의려왕이 자결을 기도하다 문득 생각하여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간들 성공하지 못하리요?󰡑 하고는 은밀히 아들 ‘부라(扶羅: 의라)’에게 당부하여,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 해구는 대릉하 하구를 말함.

를 건너게 했다. 이 때 추종하는 자 수천 명이 되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는데 자신은 삼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한 것(應三神符命)이라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하례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應三神符命󰡑은 15대 응신(應神)천왕(신공황후 합치면 16대)의 이름을 연상시킵니다.


다른 기록에서는

“의려왕은 선비에게 패하자,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제들은 북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였다. 이 때부터 모용외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잔존 세력은 연(燕)나라의 땅과 가까운 곳에 있다가, 고구려 (21대) 문자열제(文咨烈帝) 명치(明治) 4년(CE 494)에 나라를 고구려에 바쳤다. 이로써 연나부의 낙씨가 완전히 망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연해주 북쪽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를 세웠다.


• 남부여(백제)

백제 26대 성왕(253~554)이 538년에 도읍을 웅진(곰나루)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변경한 국호. 현재까지도 그 부여라는 이름의 도시가 남아있다. 


※ 고주몽의 혈통


해모수 단군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의 아들


고진은 4세 고우루 단군의 동생으로 우거의 침략을 막은 공로로 고구려후로 임명됨.


해모수와 불리지(고모수)는 동명이인. 후세 역사가들이 혼동하게 됨.

부여계 인명에는 동명이인이 다수.


예) 구태와 위구대, 백제(남부여)의 초고왕과 근초고왕, 수구왕과 근수구왕 등등...


주몽의 부인: ① 동부여의 예씨 부인 → 아들 유리

             ② 소서노

               (고무서 단군의 딸이라는 설과 고구려 개국공신 연타발의

                딸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음.

                후자에 의하면 첫 남편은 해부루왕의 서손 우태(병사))                   → 비류․온조


※ 연타발(延佗勃): 2명의 연타발이 있다.(동명이인)


① 북부여 2세 모수리 단군 때 상장군. 평양(요령성 해성 부근)에 성책을 쌓아 위만의 침입에 대비함.


② 연타발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졸본 사람 연타발. 소서노의 부친으로 거상이다. 남북갈사를 오가며 거금을 모았고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창업하는데 공을 세움.



1) 연나부(椽那部)는 고구려의 5부(순노부(順奴部, 동부), 관노부(灌奴部, 남부), 계루부(중부) 연노부(涓奴部, 서부), 절노부(絶奴部, 북부)) 가운데 서부인 연노부를 말한다.  

2) 백랑산은 일명 백록산(白鹿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열하성(熱河城) 능원현(凌源縣)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