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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큰 해일이 오면 이곳을 떠나라! - 미수 허목(許穆) 선생의 예지능력

by 바로요거 2008. 12. 10.

"장차 큰 해일이 오면 이곳을 떠나라!" 고 예언한 

미수 허목(許穆) 선생 

 도전 5:136:4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에 꽂으심

허미수는 하루만에 강선루(降仙樓)를 지었다 하나 나는 하루만에 36만 칸 옥경대(玉京臺)를 짓느니라.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보시면서 천하의 지령지기를 타고난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공사에 쓰셨습니다.

허미수의 재능이 아주 뛰어 났던가 봅니다.

 

 

허미수(1595~1682 선조 28년~숙종 8년)는 누구인가?

 

우암 송시열과 라이벌이었던 미수 허목 선생의 진면목!

호는 미수, 그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자 남인의 영수로 서인 우암 송시열과 벌어진 예론관련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 는 동방 제1로 칭 해집니다.  

56세인 1650년 효종 1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660년 효종의 상(喪)에 계비인 조대비의 복제(服制)로 일어난 제1차 예송(禮訟)에서 
송 우암의 기년설(1년설)에 반대하여 3년상을 주장하다 서인의 반격으로 삼척부사로 좌천 됩니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다시 조대비의 복제가 문제되자 
서인의 대공설(9개월)에 반대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조참판,우의정을 지냈고 송우암 처벌에 강경론을 내세워,

온건론을 편 같은편 남인인 허적과 반목하여 청남(淸南)의 영수가 됩니다.

1860년 경신환국으로 삭탈관직,고향에 은거하게 됩니다. 
저서로는 『동사(東事)』,『미수기언(眉수記言)』,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가 있고 
그림으로는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해 집니다. 
 
집안의 화를 예지했던 허미수  
흔히 허미수를 유학자로만 알고 있는데 한편으로 그는 도력이 높은 이인(異人)으로도 전해 집니다. 
허적의 탄생과 관련하여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해 집니다. 
허미수는 한집안 사람인 허적의 아버지와 한때 절에서 함께 공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스님이 한명씩 없어졌습니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잡아먹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무기를 칼로 찔러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고 들어갔습니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아들을 낳는 족족 죽이라고 충고 했습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명의 아이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허적'이었는데 
허미수는 그 아이가 허씨가문의 멸족을 초래할 것임을 예견하고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수 없다며 아이를 살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가 자신을 해칠 것을 미리 알고 친척간에 파적(破籍) 하였다고 합니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훗날 결국 역적이 되어 허씨 가문에 화를 입히게 됩니다. 
 
'장차 큰 해일이 오면 이곳을 떠나라'  
그런데 허미수의 예지능력은 강원도 삼척에 있는 영험한 <척주동해비>를 통해서 최근에 더욱 부각 되고 있습니다. 
당시 삼척은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서 고기잡이 배가 다 부서졌을 뿐만아니라,
파도 때문에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여 어민들이 굶어죽게 되는 상황에 직면 하게 되었습니다. 
해일이 밀려 올때는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 
바닷가로 부터 30리 가량 떨어진 동헌 마루까지 바닷물이 밀려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허미수가 돌에다가 직접 글씨를 써서 바닷가에 비석을 세우자 
신기하게도 그 이튿날 부터 물이 평소의 3분의 1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는 비석이 묻힌 주춧돌 까지만 들어 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 까지도 백성들이 논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척주동해비
허미수가 삼척부사 재임시절 동해의 해일로 인한 바닷가 마을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1661년에 높이 170cm,너비 76cm의 검은색 오석으로 만들어 
삼척 정라진 앞 만리도(萬里島) 에 세웠던 것 인데,
그후 비가 파손 되어 현재의 정라동 육향산(六香山)에 다시 세워졌다.  
그런데,허미수가 삼척을 떠난뒤 반대파인 노론계의 인물이 신임부사로 왔는데, 
그는그 비석의 내력을듣고는 허무맹랑하다고 여겨 비석을 깨드려 버립니다. 
그러자 다시 풍랑과 해일이 몰려 왔고,당황한 신임부사는 다시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허미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또 하나의 비석을 만들어 두어서 
그 비석이 오늘날 까지 유명한 '삼척 동해비'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허미수가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일컬어 '동해송(東海頌);동해바다를 예찬한 글) 이라고도 하는데,
육경에 뿌리를 둔 것으로 도가(道家)적이며 주술적인 비유들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한편,허미수는 이 비석을 세우면서 
'지금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수 있지만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수 없으니 
그 때는 이곳을 떠나라' 고 경고 하면 서 
'앞으로 불(火)로 난리가 난 후에 물(水)로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난 2000년 4월부터 강원도 고성,강릉,삼척등 영동지방에

해마다 산불이 일어 나다시피 했으며, 최근에는 동남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쓰나미가 
동해안 에서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언론에 자주 등장 하고 있습니다. 

 

지축의 정립현상이 일어나는 가을 대개벽의 때에는,

 

일본 열도는 초대형 지진으로 태평양으로 대부분 가라 앉게 되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 동해안으로 상상도 못할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 올 것입니다.  
개벽의 파고를 극복하여 진정 새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를 축원 드립니다.
 

출처:진리의 대변자로 http://blog.empas.com/rbforla/19777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