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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세 흐름 읽기/예언&비결*미래정보

미수 허목선생의 영험한 능력

by 바로요거 2008. 12. 10.

 

[문화재 이야기] 4. 미수 허목선생의 영험한 능력

“옛 삶의 풍모와 흰 털 섞인 눈썹으로 그 자태 학과 같았다”

2008년 08월 08일 (금) 강원일보 신화준

 

조선 중기 대 정치가 남인 실학파 기반
1660년 삼척부사 맡아 조수 피해 막아

# 박물관에서 만난 허목 선생

 

 

 

 
▲ 미수 허목선생 초상

국립춘천박물관 상설전시실 4실 안쪽에는 ‘강원을 빛낸 인물들’이라는 코너가 있다. 이곳은 강원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여러 위인들을 모신, 그리고 강원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여러 위인들을 모신 곳이다. 올해 7월부터 춘천과 인연을 맺은 필자는 이곳에서 허목(許穆·1595~1682)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허목 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서인(西人)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과 팽팽히 맞섰던 조선의 대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선생은 남인(南人)을 대표하던 큰 나무로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던 분이다.

신중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선생의 강직한 성격은 초상화 속 얼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 후기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李命基·1756~?)가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여든 두 살의 허목 선생의 초상화를 보면 선생은 차분하면서도 예리한 눈매에 하얀 눈썹에 긴 수염을 갖춘 갸름하고 홀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허목 선생이 ‘옛 삶의 풍모와 흰 털이 섞인 눈썹으로 그 자태가 학과 같았다’고 했고,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은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고 허목 선생의 신도비에 글을 남겼다.

그는 일신의 안녕을 위해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소인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강직한 선비로 평생을 살아간 선생은 젊은 시절 그 꼿꼿한 성격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 과거 응시 금지를 당한 이래 벼슬에 대한 뜻을 끊었다.

50대에 산림(山林)으로 천거되어 벼슬에 나가기 전까지, 선생은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했고 그 속에서 산수화에 취미를 붙였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의 허목 선생의 명성은 단연 서예 쪽이다. 특히 독특한 필치로 쓴 그의 전서(篆書)는 ‘동방의 제일’이라 불릴 정도로 이름이 높다.


# 삼척 부사 허목과 ‘척주동해비’

 

 

 

 
▲ 척주 동해비 탑본

예술에 대한 비평의 안목도 높았던 허목 선생의 예술을 보는 예리한 눈의 깊이는 선생이 남긴 여러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허목 선생은 삼척부사로서 도와 인연을 맺었다. 서인이 전권을 잡자 남인이었던 허목 선생은 좌천되어 삼척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때가 1660년 현종 원년, 선생의 나이 예순 넷이었다.

선생은 삼척을 위한 업적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향약을 실시하고 척주(陟州·삼척의 옛 이름) 읍지인 ‘척주지(陟州誌)’를 발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선생의 치적은 삼척의 조수(潮水) 피해를 막은 일이다. 삼척은 당시 해일의 피해가 큰 지역으로 유명했다.

또 선생은 동해 바다를 칭송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지었다. 동해 바다의 거대함과 웅장함을 상징적으로 찬미하고, 우주의 조화와 깊이를 아우르는 내용을 담은 시를 비석으로 만들어 1662년 정라진(汀羅津) 앞에 있는 만리도(萬里島)에 세웠다.

비석의 글은 바로 동해 바다 용왕과 바다 속 여러 신들 그리고 천지를 감동시켜 바다는 조용해졌고 백성들은 안정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이 비석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로 조수를 물리치는 신묘한 힘이 있다고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현재의 비석은 18세기에 다시 세운 것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돼 있다.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함을 가까이 두려 너도나도 탑본을 해갔다.

허목 선생의 글씨체는 미수체라 하며, 전서체는 미전(眉篆)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갸름한 직사각 꼴 속에서 뭔가 알 듯한 형상이 보인다. 구불구불하고 예리한 필획의 전서체로, 한문 서체의 계보 상 이런 글씨를 옛 전서라고 한다.

선생의 글씨는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의 영향을 받았다. 형산신우비는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치산치수(治山治水)의 공을 새긴 비석으로 우왕은 백성들을 홍수로부터 구원했고, 그의 치적은 군왕의 모범으로서 큰 기준이 됐다.

치산치수는 백성들의 삶과 경제와 관련 있고 백성들의 복지와 그대로 직결되기도 한다.

또 허목 선생이 척주동해비의 글씨를 형산신우비를 닮은 고전체로 쓴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선생은 백성들의 삶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한 끝없는 고민에 대한 답을 성군 우왕으로부터 찾았고, 그가 읽어낸 흔적을 글씨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척주동해비는 백성을 위한 늙은 정치가의 마음의 결정체이다.

그 마음이 동해송이라는 문장과 신기어린 글씨를 이루었고, 그 비석이 정말 바다를 감동시켰다고 필자는 믿고 싶다.

글 : 박성원
·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 박사과정 수료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
· 현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 학예연구사

출처: 강원일보 http://www.kad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