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천하대세 흐름 읽기/예언&비결*미래정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미수 허목 선생

by 바로요거 2008. 12. 10.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미수 허목 선생

 

1, 허미수 선생의 약력

 

호는 미수(眉?), 이름은 목(1595∼1682: 선조 28년∼숙종 8년). 그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서인(西人)이던 우암 송시열과 벌어진 예론(禮論) 관련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는 동방 제1로 칭해집니다. 56세인 1650년(효종 1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660년 효종의 상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대비의 복제(服制)로 일어난 제1차 예송(禮訟)에서 송우암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에 반대하여 3년 상을 주장하다 서인의 반격으로 삼척부사로 좌천됩니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다시 조대비의 복제가 문제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에 반대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조참판, 우의정을 지냈고, 송우암 처벌에 강경론을 내세워, 온건론을 편 같은 남인인 허적(許積)과 반목하여 청남(淸南)의 영수가 됩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煥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삭탈관직을 당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미수기언(眉?記言)』,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합니다.
 


2, 허미수 선생의 탄생 일화

 

미수선생의 증조할아버지인 허자(許磁)는 좌찬성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었으나 당쟁에 연루되어 홍원 땅으로 귀양을 갔다가 죽었고, 할아버지 허강(許 )은 뛰어난 글재주가 있으면서도 초야에 묻혀 기인들과 교류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미수선생의 아버지인 허교(許喬)에게도 많은 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세(家勢)가 기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수선생의 어머니는 조선 중기의 풍류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딸입니다. 그런데 백호 임선생의 직계 자손들은 그 집안에서 부리던 사람의 깊은 원한 때문에 대代)가 끊어졌고, 다만 딸인 미수선생의 어머니는 두 명의 아들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귀신들은 외손 계통으로 뻗어나가는 백호선생의 대(代)도 끊기 위해 미수선생의 어머니가 낳은 두 아들도 하나같이 돐을 넘기기 전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멀쩡한 자식을 둘이나 낳았으나 모두 죽어 허씨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내외간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우리 매일 기도를 하여 봅시다. 기도를 하여 자식을 다시 얻도록 하십시다."

낮에는 시부모님 모시랴 집안살림 하랴 틈이 없었으므로, 밤이 되어 뒷산으로 5리 정도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들 내외는 수백 년 묵은 묘를 말끔히 손질하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하기를 백일, 꿈에 갑옷을 입은 대장군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누운 지가 어언 5백년, 아무도 나를 보살펴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데 너희 내외간이 지성으로 기도하니 너희의 원을 들어주고자 하노라."

이어서 미수선생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너희 친정의 윗대에 원통하게 죽은 시종들의 원혼이 너의 친정집안 대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너를 기점으로 하여 외손들이 뻗어나가는 것까지 원혼들이 막고 있기 때문에
너희에게도 자식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며 간절히 원을 하니 내가 그 원혼들을 달래어 자식을 하나 주리라.
하지만 이 아이는 농사나 지을 그릇일 뿐이니, 글을 가르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마침내 기도의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마음을 모았습니다.

"우리, 기도를 백일 동안 더 합시다.
우리 가문에 농사만 짓고 살아야 할 자식이라면 낳으나 마나 하니까,
조금 더 눈이 밝은 아들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부부는 장군의 묘 앞에서 다시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장군이 다시 꿈에 나타났습니다.

"정성이 갸륵하구나.
그렇다면 향교에 출입할 수 있는 자식을 주겠다."

옛날에는 군 단위로 향교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향교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을 안의 선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더욱 크게 원을 일으켰습니다.

"지금부터 천일기도를 다시 시작합시다.
몰락한 집안을 빛내고 온 나라를 빛낼 수 있는 자식을 하나 달라고…."

내외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마침내 천일기도를 마친 날 밤, 대장군은 다시 나타나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지성이 옥황상제님께 닿아 소원과 같은 자식을 주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너의 친정 윗대의 원결 맺힌 사람들 때문에 자식의 모습이 굉장히 이상할 것이다. 그것만은 하는 수가 없다. 나라안에 이름을 드날리고 끊어져 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되, 윗대에 얽힌 원한 때문에 아이의 모습이 괴상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구나."

이렇게 해서 미수 허목 선생은 세상에 태어났고, 대장군의 말 그대로 모습이 매우 괴이했습니다. 얼굴과 몸은 온통 털이 가득했고 뼈와 가죽이 바짝 붙어 명태처럼 말라 있었습니다. 백일 동안 젖을 먹였건만 살이 찌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태어난 손자를 보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미수선생의 부모는 할아버지가 몰골이 괴이한 손자를 보고 실망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잠깐 숨기고, 아래채 머슴의 아기를 잠시 데려다가 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눈 점호만 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또한 보통 분이 아니었습니다. 방문을 열어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차며 말하였습니다.

"우리 집안이 망해도 이렇게까지 망할 줄은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이게 내 손자라면 볼 것도 없다."

할아버지가 방문을 닫으며 돌아서자 미수선생의 아버지는 다급해졌습니다.

"아버님, 잠깐만 좌정하옵소서."
"좌정할 것 없다. 저 아기가 내 손자라면 우리 집안은 이제 문 닫을 수 밖에 없다."
"아버님, 저 아기는 진짜 제 자식이 아니옵니다."
"그래? 왜 그랬느냐?"
"자식 하나를 얻기는 하였으나 몰골이 하도 괴이하여 아버님께 도저히 '당신의 손자입니다'하고 보여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래채의 아기를 데려다놓은 것입니다. 아기와 함께 쫓겨나도 좋으니 진짜 손자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털복숭이에 명태처럼 빼빼 마른 손자를 보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됐다, 됐어. 이놈이 진짜 내 손자다. 내려앉은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집안의 이름을 나라에 드날릴 훌륭한 놈이다. 이렇게 좋은 손자를 얻었으니 내 한잔 안할 수 없구나. 술상 차려 오너라."

미수선생은 대장군의 예언이나 할아버지의 말씀 그대로 뒷날 영의정이 되어 쓰러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대유학자요 천하명필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 미수선생의 탄생 이야기에서처럼, 지극히 기도하면 멸족의 원결도 풀어집니다. 원결이나 응어리만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영광도 함께 깃들게 됩니다. ......
 

출처;http://insan.ivyro.net/zboard/view.php?id=misoo&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

 

3, 집안의 화를 예지했던 허미수

흔히 허미수를 유학자로만 알고있는데

한편으로 그는 도력이 높은 이인(異人)으로도 전해집니다.
 허적1) 의 탄생과 관련하여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1)허목과 허적은 같은 양천 허씨로 12촌지간이다.
 
 허미수는 한집안 사람인 허적의 아버지와 한때 절에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스님이 한 명씩 없어졌습니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스님을 잡아먹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안 허적의 아버지가 이무기를 칼로 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고 들어갔습니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습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허적’이었는데, 허미수는 그 아이가 허씨 가문의 멸족을 초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친척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합니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훗날 결국 역적이 되어 허씨 가문에 화를 입히게 됩니다.
 
 
 허적은 허미수와 함께 후에 남인을 영도하여 서인인 송우암을 공격하였는데, 허미수는 강경한 입장을 띤 데 반해 허적은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여 둘의 사이가 벌어집니다.
 
 허적과 갈등을 겪은 허미수는 1678년(숙종 4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당시 우의정이던 허적과 그의 아들 허견(許堅)의 실정과 죄상을 논핵하다 왕의 노여움을 삽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허미수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5, 척주동해비 세운 미수 허목선생

 

 

척주란 삼척의 옛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운 이는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년, 선조 28∼1682년, 숙종 8). 허미수는 60세가 넘도록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늦게 관직에 오른다(최초 관직
사헌부 지평, 63세). 사헌부 장령(64세)을 하던 1660년,
조선조 17대 임금인 효종이 붕어(1659년)한 후 인조(16대)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服喪)문제로 우암 송시열과 맞서
논쟁을 벌였다.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은 효종이 차남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조대비는 1년상만 입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허미수 등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어도 대통을
이어 왕위를 계승했고, 종묘의 제례를 주관한 사실상의 종통이므로 3년 복상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며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허미수는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퇴조비(退潮碑)를 세우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미수는 향약(鄕約)을 만드는 등 백성을 교화하며 여러 치적을 쌓아 목민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2년간의 짧은 부임 기간 중에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의 하나로 척주동해비를 건립한다.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미수는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극치를 담은 오묘한 문장인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글)을 짓고는 그가 개발한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비(碑)를 세운 이후 수마가 물러가고 바다가 잠잠해지다

 허미수가 척주동해비를 세운 이후 신기하게도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 비석과 비문의 신비한 위력에 놀라 이 비를 퇴조비로 부르기도 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미수 선생이 비석을 세운 곳은
정라진의 만리도(萬里島, 지금의 큰 방파제 끝부분)였다.
그런데 48년 뒤인 1708년 누군가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다.

 

한편 김구용이 지은 『척주지』(1848년)에
의하면 1708년 비석이 파손되자 조수피해가 다시 일어나므로 당시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허미수 선생의 문하생(門下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을 했으며, 1709년 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串島) 동쪽 산록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후 이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비각의 위치가 음지라 훼손의 염려가 있어 1969년 12월 6일 지방 유지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죽관도(현재의 육향산) 산정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장차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다”

 금석문 연구가들에 의하면 척주동해비문의 글씨는 허목 선생의 전서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글씨라고 하는데, 특히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창적인 서체로 품격 있고 웅혼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비문의 신비한 힘이 알려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비문을 탁본하여 소장하였는데, 소장한 사람들이 물과 수재로부터 보호되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이 비문이 모든 재액을 물리치고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하며 가정의 안녕과 번창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삼척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 안내문의 내용).

 그런데 취재진은 현지 답사를 통해 이 비를 처음 세운 허미수 선생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입을 타고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앞으로 불로 난리가 난
후에 물로 큰 난리가 있다.”
(척주동해비가 있는 육향정 아래 육향식당 주인 김성근씨 증언, 42세)


 장차 불과 물의 대개벽을 예고한 허미수의 놀라운 통찰력

 2000년 4월 강원도 고성, 강릉, 삼척 등 영동지방에는 사상 최악의 산불이 발생하여 수많은 이재민을 발생시키고 수만 핵타르의 산림을 황폐하게 만드는 대사건이 있었다. 지금도 영동지역의 전주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 산불은 그러나 삼척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허미수 선생의 전언에 비추어 보면 개벽을 알리는 작은 예고탄에 불과할 뿐이다.

 취재진이 만난 박남언 씨(68세, 삼척시 정상동 3통 1반, 전 어촌계장)는 자신이 이곳에 살면서 경험한 바를 잘 말해 주었다. 10년 전 북해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TV
뉴스를 보았는데 2시간 반만에 이곳 삼척에 해일이 닥친 것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는 것이다. 해일이 몰려오면 오십천에서 흐르던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역류하여 들어와 시내로 물이 넘쳐흘렀다는 것이다.

 


육향산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 설명글이 서 있다
 

 
척주동해비 및 대한평수토찬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소재지: 강원도 삼척시 정산동 82-1 

 이 비들은 조선 현종 2년(1661)에 삼척부사 허목이 세운 것이다.

 허목(1595∼1682)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물려받아 근기의 실학발전에 가교적 역할을 한 분으로 효종의 초상(初喪)에 대한 모후(母后)의 복상기간이 논의되자 서인(西人) 송시열 등의 기년설(朞年說)을 반대하여 남인(南人) 선두에서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左遷)되었다. 

 당시 삼척은 해파(海波)가 심하여 조수(潮水)가 읍내(邑內)에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는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독창적인 고전자체(古篆字體)로 써서 정라진(汀羅津) 앞의 만리도(萬里島)에 동해비(東海碑)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

 
그후 비가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숙종 36년(1710) 이를 모사(模寫)하여 현재의 정상리(汀上里) 육향산(六香山)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 한다. 문장이 신비하여 물리치는 능력을 가졌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하는 이 비는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 제일의 필치(筆致)라
일컬어지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서도 유명하다. 

 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는 평수토찬비(平水土贊碑)는 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중국 형산의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字碑)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에 새기여 군청에 보관하던 것을 고종 광무 8년(1904)에 칙사(勅使)
강홍대(康洪大)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 등이 석각(石刻)하여 세운 것이다.

  
척주동해비 비문(碑文) 풀이 

 
이 고을은 옛날 실직씨의 땅으로 예나라의 옛터 남족에 있으며, 서울에서 7백리이고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다. 도호부사 공암 허목 씀
 


 큰 바다 끝없이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무궁하여라/

 동북쪽 사해(沙海)1)여서/
 밀물 썰물 없으므로/
 대택(大澤)2)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 동쪽에 구름이 끼었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3)으로/
 태양의 문이라서/
 희백(羲伯)4)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5)의 위차요/
 빈우(牝牛)6)의 궁(宮)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네/

 교인(鮫人)7)의 보배와/
 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
 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
 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을 일으켜 보여주네/

 조개 속에 든 진주는/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8)와/
 외발 달린 짐승 기(夔)9)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 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하늘의 수경이 되니/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10)/상투 튼 보가(?家)족/

 연만의 굴과 조개/조와(爪蛙)의 원숭이/불제(佛齊)11)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12)으로 왔으나/

  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

  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자료제공 : 삼척시청 문화공보 담당관실) 

 1) 사해 : 동해는 모래바다여서 비습(卑濕)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물이 쉽게 새서 조수   가 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
 2) 대택 : 동해의 별명
 3) 양곡 : 해가 뜨는 곳
 4) 희백 : 요(堯)임금때 천지(天地), 사시(四時)를 다스린 관원
 5) 석목 : 정동쪽 인(寅)방에 있는 기(箕), 두(斗) 두 별
 6) 빈우 : 축(丑)방에 있는 기(箕), 미(尾) 두 별자리
 7) 교인 : 물 속에 사는 괴물, 쉬지 않고 비단을 짜는데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을 이룬다.
  8) 천오 : 수백(水伯)으로 몸은 범과 같고 얼굴은 사람과 같으며 머리, 다리, 꼬리가 모두 여덟이며 청황색인 신
 9) 기 : 유산(流山)에 있는 짐승으로, 소의 형상에 몸이 푸르며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인데 그가 물에 드나들 때 비바람이 인다
 10) 부상, 사화, 흑치, 마라 : 동해 가운데 있는 나라와 남만의 종족이름
 11) 보가, 연만, 조와, 불제 : 나라와 부족, 종족 이름
 12) 중역(重譯) : 여러번 통역을 거침

 

6, 미수 허목 선생이 손수 만든 우물

 

달천구천達川龜泉

 

종 목 시도기념물 제32호 (창원시)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주거시설

수량/면적 일원

지 정 일 1974.02.12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차상기 외

관 리 자 창원시

 

 외갑리 새터 마을의 달천정이라는 정자 옆에 마련된 우물이다. .

 

조선 숙종 때의 유학자이며 우의정을 지낸 허목 선생이 고향에 돌아와 달천정에 머물 때 손수 만들었다고 하며, 그 속에 거북 모양의 돌을 만들어 넣었다고 하여 ‘달천구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

 

큰 돌을 이용하여 사각형의 우물을 만들었는데 한쪽으로 넓직한 돌을 얹어 놓아 거북의 모습을 닮았다. 이곳에서 1㎞ 쯤 떨어진 천주산 계곡에는 허목 선생이 ‘달천동(達川洞)’이라 직접 새긴 암석이 있어 이 계곡을 달천동 계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7, 허미수 선생이 쓴 "곤재전"

 

곤재전困齋傳

                                                 

미수  허 목         眉叟 許 穆

 

  困齋 선생 鄭氏의 諱는 介淸이며, 宣祖때 徵士다. 선생은 道를 敦篤히 믿고 禮를 좋아 하고 隱居 하여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여들므로 제자를 거느리고 鄕飮酒禮를 大安 學舍에서 행하니 州牧 柳夢井이 가서 그 예를 보고 感歎하여, 三代의 예가 여기에 있도다 하고, 薦擧하여 州 訓導를 삼으니 선생이 師弟의 예를 嚴하게 하고 施敎를 오로지 소학과 藍田鄕約대로 하며 冠婚 喪祭를 重히 여기었다.

  鄕校生洪 千璟이란 자가 嘲笑하고 가르침을 쫒지 아니하거늘 州官이 벌을 다스리니 도리어 말을 지어 誹謗하기 시작하였다. 柳 牧使가 간뒤에 선생도 돌아왔다. 金 誠一 公이 그후 牧使가 돠어 다시 예로써 請하니 선생이 마침내 가지 아니하였다. 宣祖가 그 어짐을 들으시고 여러번 벼슬을 주었으나 모두 받지 아니 하였다. 그 때에 經書義를 校正할 때 널리 여러 선비를 부르시니, 선생도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京師에 갔다가 곧 辭職하고 왔다. 뒤에 典牲主簿를 除授하니, 上疏하여 道德으로 根本을 세우는 글을 올리니 임금이 칭찬하여 下敎하시기를, 지금 至論을 얻어 보았다. 하시고, 불러 쓰고자 하시니 늙은 아버지가 있으므로 辭養하고 가까운 고을을 얻어 奉養하기에 편리케 하겠다. 말하니 드디어 谷城縣監을 삼았으나, 8개월여만에 辭職하고 돌아왔다.

 

 그 때에 일본 왜()가 장차 변()을 내려고 우리를 忌憚 없이 엿보고 있으니 임금이 근심하여 군신에게 장수될 자를 물으셨다. 영의정 박 순이 천거 하기를 , 정개청이 儒術로 이름이 높으나 실상은 장수가 될 재주가 있사오니 마땅히 장수를 맡길만합니다. 하였다.

  朴公의 집에 책이 많아 선생이 책 보기를 청하므로 박 공이 어질게 보고 손님을 맞는 예로써 대접하였다.

  선생이 본래 鄭 澈이 사람됨을 탐탁하게 생각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이 그 淸白한 志操가 취할만하다고 말하여도, 선생은 다만 답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正을 꾸미고 거짓 행세를 하니 바른 사람이 아니다. 하므로, 철이 이 말을 듣고 심히 怒하였다.

  그 후에 얼마 아니 되어 鄭 汝立을 上變하는 일이 있어 獄이 가득찼으며, 철이 군읍에 명하여 죄인들과 친한 사람을 잡아서 몰래 염탐하라 하니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랐는데, 나주사람 5,6명이 鄭 介淸이 죄인과 통정 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선생은 죄인과 잘 알지 못하며 다만 經義를 校正할 때 서로 對한것 뿐인 것을 철의 집에 드나드는 丁 巖壽. 洪 千璟 등이 함께 조직을 꾸미었으나 심문 하여도 實이 없으므로 임금의 뜻이 비로소 풀려 있는데, 澈이 아뢰기를, 개청이 아무리 무죄다 말하나 일찍이 背節義論을 지어 인심을 眩惑케 하였으니 그 폐단의 害가 洪水 와 猛獸보다 심하다 하여 고문 하였다.

  南方의 풍속이 기운을 좋아하고 호협으로 임무를 삼아 법도를 따르지 않음을 고상히 여기기 때문에 선생이 東漢節義와 晉宋淸談의 說을 지어 時俗을 깨우쳤으니 澈이 절의를 배척한다고 임금님께 아뢰어 격동시킨 것이다. 임금이 방금 반역을 다스리는 중이므로 심히 노하여 학사를 시켜 교서를 초하고 그 말을 낱낱이 번역하여 사방에 포고하여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라 하고 介淸을 귀양 보냈다.

  처음에는 謂原으로 流配하라 명하였는데 澈이 북쪽 끝 慶源으로 다시 고치었다. 6월에 阿山堡에 도착하여 한달 남짓 만에 죽었다. 相國 柳成龍이 임금께 여쭈기를, 정 개청이 평생에 經術 行誼로 힘쓰다가 우연히 한편의 著述로 인하여 몸을 멸하기 까지 되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지은 책 [隨手記] 9권과 [우득록] 3권이 있었는데 옥사를 당하여 죄인의 서류를 수색 함으로 인하여 압수되매 임금께서 이를 보시고, 옛 사람의 글을 읽은 사람 이로다. 하시여, 다시 縣에 내려 보내 그 집으로 돌려 보내라 하시었는데, 다 분실되고 오직 우득록만 세상에 전하였다. 뒤에 고을 사람들이 그 고향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孝宗 때에 澈의 무리들이 다시 요로에 권세를 부리므로 임금께 아뢰어 사당을 헐어버렸다.

 

 

-------

 

(1) 학봉학단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석계 이시명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 - 대산 이상정-

 

- 손재 남한조 - 정재 유치명 - 서산 김흥락 - 성재 권상익 - 춘번 권명섭

 

(2)서애학단

 

서애 유성룡 - 우복 정경세 - 백졸암 유직 - 활재 이 구 - 식산 이만부 - 청대 권상일-

 

(3)한강학단

 

한강 정구 - 미수 허목 - 반계 유형원 - 성호 이익 - 순암 안정복 - 하려 황덕길 -

 

-성재 허 부 - 방산 허 훈 - 석재 서병오

 

(4) 율곡학단

 

율곡 이 이 -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 집 - 우암 송시열 - 수암 권상하 - 남당 한원진-

 

- 운평 송능상 - 성담 송환기 - 강재 송치규 - 수종재 송달수 - 심석 송병선 - 회재 주면겸

 

(5)우계학단 (조정암 연원)

 

우계 성 혼 - 팔송 윤 황 - 미촌 윤선거 - 명재 윤 증 - 일암 윤동원 - 도계 이양원 -

 

해은 강필효 - 과재 성근묵

 

(6) 고봉학단

 

고봉 기대승 - 제봉 고경명 - 육류정 박지호 - 하담 박태현 - 주곡 박치화 - 호계 김광수

 

(7) 월천학단

 

월천 조 목 - 만퇴헌 김중청 - 이시겸 - 이 락 - 이인유 - 이 익 - 이문현 - 이규진 - 이주연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조선유교연원. 퇴계집. 학봉집. 서애집.갈암집.석계집.밀암집.정재집.대산집.한강집.율곡집.

 

                                                                      [허목 선생의 필체] 

『한국미술의 역사』 김원용.안휘준 지음| 시공아트 刊| 703쪽| 2005


●허목, ‘애민우국’, 조선중기, 53×156㎝
“조선 중기의 서예에서 또한 특기할 일은 미수 허목의 전서체다. 그는 행서의 필법을 전서에 응용하여 독자적인 서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서체는 ‘미수체’라고 불리워진다. 그의 ‘愛民憂國’을 예로 보아도 그의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서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글자들의 독특한 형태, 자획의 개성적 구사, 飛白을 빚어내는 운필법 등이 한결같이 허목만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559~560쪽) http://www.kyosu.net/?news/view/id=8217

 

 

8,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

 

[성석제의 위의 이야기] 싸움의 이면

조선시대의 당쟁사에서 가장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 두 파당을 꼽으라면 단연 서인과 남인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서인의 영수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남인의 지도자는 미수(眉) 허목(許穆)이었다. 어느 해 우암이 병이 들었는데 여러 의원에게 보이고 약을 지어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우암은 아들을 불러 “미수가 약을 잘 짓는다고 하니 내 병세를 이야기하고 약방문을 받아 오라”고 했다. 미수는 우암의 아들에게서 병세에 대해 듣더니 별 말 없이 약방문을 써서 내주는 것이었다. 미수의 집에서 나온 아들은 약방문에 비상(砒霜)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상은 극약 중의 극약으로 소량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약제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드실 약에 어떻게 비상을 쓰겠느냐고, 약방문을 찢어버리려 했다. 우암이 아들을 말리면서 “내가 소시적에 약으로 오줌을 먹은 적이 있는데 오줌을 먹은 사람의 약에는 비상을 섞어 쓰는 법”이라고, 어서 약을 지어오라고 했다.

아들이 지어온 약을 먹은 우암은 쾌차하여 다시 싸움에 나섰다. 사람들은 “비상이 든 약방문을 써준 미수나, 그 약을 쾌히 지어먹은 우암이나 어찌 보통 사람이겠는가”라고 고개를 흔들었다.<출전 미상> /소설가 

입력시간 : 2003/04/22 17:38

 

 

  출전은 미수선생(허목:1595~1682)문집( 국역총서, 문족문화추진회 譯, 년도미상)이다.

  오래전에 노트에 베껴 놓았던 것이라 혹 자세하지 못 한 점이 있지만

  중용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살펴 보면 좋을 듯 하다.

 

 

 아래의 그림은 예전에 미수선생님의 문집(국역총서, 문족문화추진회 譯 , 년도미상)을 보다가

노트에 베껴 놓았던 것인데 여기에 다시 옮겨 본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특별한 이견은  보이지 않고 다만 주자의 중용서문 가운데 나오는 인심도심에 대한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9, 허미수 선생이 묘소와 손수 쓴 비명 그리고 신도비

 

허목 선생이 생전에 미리 지어놓았다는 비명의 뒷부분.

봉분과 가까이 있어서 정면으로 찍지 못했다.

사진을 찍어놓고 자세히 보니, 銘碑陰記.. 北岩土許本駕洛國 首露王之...多崇孔岩村主..禮部尙書..府使扉陜川郡守薰義盈庫...明秊 奉改掌令 顯宗立臥爭禮...以大司憲一年..

(명비음기.. 북암토허본 가락국 수로왕지...다숭공암촌주..예부상서..부사비합천군수훈의영고  ...명년개장령 현종입와쟁례..) 등의 내용이 적혀있는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은 김수로왕으로부터 비롯된 양천허씨의 유래와 직계선조의 행장 및 관직 등을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묘소 옆쪽에서 바라본 전경

묘역 아래쪽에는  민통선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묘를 해왔다는 11대 직계후손께서 가건물을 짓고 전체 묘역을 관리하고 계셨다.

이곳이 다른 묘역과 다른 점이 문인석과 장명등이 "검은색"이라는 점이다!  

 

 

묘역에서 바라본 민통선내의 풍경. 허가받은 농부들이 정해진 시간내에 들어왔다가 오후 역시 정해진 시간까지 나가야 한다고 들었다.

건너편은  허목선생일가의 또다른 묘역들. 

 

 

 

헉...묘역앞에는 웬 관들이...?

알고보니 의정부에 있던 미수公의 증조모묘역을 이장하다가 나온 석관이라고 한다. 조선중기에는 이런 석관에 회를 두껍게 발라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허목선생 묘역 아래의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