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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3] 한민족의 활동무대

by 바로요거 2008. 10. 14.

[3]  한민족의 활동무대




1. 서문(序文)


한민족의 행동반경은 곧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의 행동영역이 된다.


그것이 역사를 공부해야할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오늘 서기 2006년 9월 6일자 조선일보 신문에서 보듯, 중국이 한강 이북의 지역을 모두 중국의 변방사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중국이 한강 이북지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모르면 개개인의 행동반경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역사를 아는자의 힘임은 앞서 말한바 있다.


아래 한민족의 행동반경은 초원과 중원, 만주, 반도, 열도, 해양의 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한국인이 이동해간 행동반경을 파악하는데 편할 것이다.




2. 초원 - 대평원을 달리던 사람들




"모든 몽골인종의 근원지"(이르쿠츠크국립대 블라디미르 역사학 교수의 말(출처 : 정재승,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정신세계사, 2003. 11쪽.))는  지구의 자궁이자 지구최대의 민물담수호인 바이칼연안이다.




1300년전 테무진이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몽골제국을 세우기 900년 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 치고 있었다.




고대 국가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멸명한 고조선 지역의 영토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각 종족의 사활을 걸고 각 민족간의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고승 안함로와 원동중이 각기 남긴 「삼성기」에는 6000년 전 현재 한국인의 직접 조상들은 형제들에게 중앙아시아의 땅을 넘겨주고 지금의 백두산 부근에 신시라는 도시국가를 세우고 국사를 시작하게 된다. 역사는 이 역사의 시작을 초대 커발환 환웅천황께서 3천명의 제세핵랑군을 이끌고 동방출정을 떠난 사건으로 부터 보고 있다.



  이후 배달국의 14세 자오지 환웅천황 무렵 서방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천황에게 도전하였다. 이때 자오지 환웅께서 중원의 탁록을 중심으로 헌원의 난을 평정하셨는데 10년 동안 73차례 싸워 모두 이기셨다. 이 때 천황께서 큰 안개를 일으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동방의 문화를 전수해 주셨다.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5, 207쪽.



헌원은 한족 또는 지나족이 자신들의 시조로 삼는 분인데, 이때 탁록을 중심으로한 73차례의 싸움에서 자오지 환웅천황은 전쟁의 신, 우레의 신, 개벽의 신이라는 의미의 치우라는 별명을 얻게 되신다. 치우천황은 탁록에서 도망쳐서 예성 공동산까지 도망간 헌원을 쫓아 색도, 공상, 진류를 거쳐 탁록과 예성으로 군대를 추격하여 마지막으로 화산을 거쳐 종남과 교산사이의 땅으로 추적하여 공동산에서 헌원의 군대를 격파하고 신하로 삼게 된다.




이에 대해 이병도,최태영 공저, 한국상고사입문, 1989,60쪽에서는 북애자가 남긴 고서 『규원사화』의 「단군기」 인용하여, "신시시대 오랜 옛날 선성이 일찍이 나라의 기틀을 잡아 놓고, 회남, 산동, 북경, 낙양 등 넓은 지역을 개척하여 남국, 유주, 청국 등지에서 위력을 떨치며 살았기 때문에 단군의 개국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활약을 계속해서 큰 나라를 이룬 것이다. 신시시대부터도 그러했지만 단군의 개국 후에는 일층 더하여 그 넓은 천하의 땅을 나누어 공을 세운 겨레들에게 봉토(封土)를 했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국(藍國)을, 신지(神誌)의 후손에게는 숙신국을 고시(高矢)씨의 후손에게는 청구국(靑丘國)을, 주인(朱因)씨의 후손에게는 개마국(蓋馬國)을 나우어 주고, 여수기(余守己)는 예군(濊君)을 삼고, 부소(夫蘇, 단군왐검의 둘째아들), 부우(夫虞, 단군왐검의 셋째아들)와 작은 아들 부여(夫餘, 단군왐검의 넷째아들)는 서쪽 땅에 봉하니 그 후에 부루(夫婁, 단군왐검의 태자)가 동으로 온 3인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에 옥저(沃沮), 졸본(卒本), 비류(沸流)라 한 것은 다 그 봉한 데 따른 나라 이름이다"고 밝히고 있다.




또 61쪽에서 "단씨(檀氏)의 세대를 통해서 보면 큰 나라를 9로, 작은 나라를 12로 나누어 천하의 여러 주(州)를 다스렸다 한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역사서인 『산해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해에 나라 이름이 있으니, 조선(朝鮮)이라 한다"고 하고, 또 "대황(大荒) 가운데 산이 있으니 그 이름은 불함(不咸)인데, 숙신국에 있다"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 기록된 『관자(管子)』에는 헌원이 지남차를 만들어 치우천황에 대응하자 치우천황의 군대가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또 『사기』에 주석을 붙인 응소는`치우는 옛 천자라고 하고,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치우 군대가 `동두철액` 즉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 등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전한다.



한편 고조선의 경제와 관련하여 현재 진행된 연구의 결과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이러한 역사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조선을 강역을 보면, 명도전이 발굴되는 강역과 일치한다. 러시아 학자 부찐이 그린 고조선의 영토와 명도전 유적의 위치를 표시한 서울시립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박선미 연구원이 2000년에 발표한 논문 `기원전 3~2세기 고조선의 문화와 명도전의 유적`지도가 거의 일치한다.


또 길림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2000년 작고한 초기 만주사 연구의 기초를 닦은 권위자인 장보촨(張博泉) 교수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행하는 고고학계 학술지 <북방문물(北方文物)> 2004년 제 4기 논문집에 실린 그의 유고집『명도폐연구속설(明刀弊硏究續說)』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절식도폐가 그것이다. 이들 화폐 가운데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 관련 족의 화폐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의 화폐다.」고 밝히고 있다.


고조선의 강역에서 출퇴되어 1990년대 관광객들에게 개당 1천원정도에 팔렸던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이야기다.



3. 중원 - 대륙에 있었던 삼한과 삼국



서울대학교 천문학 교수로 한국 고대기록물에 관심을 가졌던 박창범 교수는 어이없는 역사학계의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김영사, 2004, 41쪽


곧 삼국사기 초기의 기록 곧 신라가 성립된 기원전 57년 이후 중국 문헌에 의거하여 인정되고 있는 내물마립간 때인 기원이후 356년의 시간까지 곧 약 400년의 시간동안이 잘려나간 것이다.


곧 천문현상기록들의 조작 여부와 그 시기에 대한 문제 곧 "계산으로 진위를 따져 본 결과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들은 위조되었거나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삼국사기』초기 400년의 역사기록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사학계에서는 서기500년 이전의 특히 서기 200년대 이전의 삼국 초기에 대해서는 좀더 새롭고 풍부한 사료가 나올때까지 연구를 보류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음을 전한다.



재미있게도 우리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천문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기록을 남겨 온 천문의 나라인데, 정작 일본의 여러 천문학자들이 우리『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을 연구하여 세계에 발표하는 동안 우리의 고대 천문 기록에 대한 과학적 계산과 철저한 분석을 수행하여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먼저 1000~2000년 전에 일어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남겨진 67개의 일식기록, 행성 움직임 40개, 혜성 출현 65개, 유성과 운석의 떨어짐 42개, 오오라 출현 12개 등 240개가 넘는 천문현상들을 아득한 옛날에 살았던 무지한 사람들이 제대로 천체현상을 읽어 내고 또 읽어냈다고 해도 기록으로 정확히 남길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박창범 교수 역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릇된 선입관으로 판명된 것은 천체 역학적 계산으로 확인해 본 결과 놀랍게도 이 시기의 천체 관측 기록들은 대부분 사실이었으며, 천체 현상들이 일어난 연대와 날짜, 그리고 상황까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겨론을 내놓고 있다.



지구와 해와 달 그리고 성간의 움직임은 규칙적이고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지금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이라는 방법으로 천체가 수천년간 이동해서 특별한 현상들을 만든 기록들을 확인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신라 문성와 7년(서기 845년) 해가 여러 개 뜸 현상이나, 신라 혁거세거서간 9년(기원 49년전) 혜성이 나타나 혜성이 별자리에서 나오거나 들어간 기록이 나온다. 또 혁거세 거서간 4년(기원 54년)에 일식현상이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정확한 사실임이 확인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태백범월(조선시대 간행된 『서운관지』에는 천상을 관측하는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태백범월은 곧 곧 별과 달이 서로 빛을 미칠 정도로 다가감을 뜻한다) 사건들에 대해 5차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사서에는 없는 독자적인 기록이다. 이중 특히 하나의 예인 백제와 신라가 모두 관측한 서기 205년에 금성이 밝아진데다가 달이 가까이 접근한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후한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천체 현상이고 이것이 실제 일어났던 것임이 증명된 것이다. 백제와 신라가 적어도 서기 205년부터는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관측하고 있었으며, 그 관측 결과를 기록하여 남기거나 구전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앞서 현재 역사학계가 보류하고 있는 356년이나 346년에 약 150년 앞서서 삼국의 초기 역사가 사실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천체 역학적 계산도 옛 기록을 확인하기에 문제가 없을 만큼 정확하다. 그런데 왜 일본학자들은 초기 기록을 부정하고 있을까? 그것은 일본학자들이 달이 행성에 가장 근접했던 때의 시각만을 계산한 뒤, 그 시점이 해가 떠 있을 때라면 모두 잘못된 기록으로 판정을 내린 탓이다. 그러나 달과 밝은 행성은 낮에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낮에 접근한 경우를 모두 틀린 기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또 행성과 달의 상대거리는 느리게 변하기 때문에 최근접이 낮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일출 전이나 일몰 후에 달과 행성은 여전히 매우 가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이 이를 무시하고 최근접 시점만을 근거로 한 까닭에 『삼국사기』 초기의 400년간의 역사가 잘리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삼국사기』가 일본 사서의 기록이었다고 해도 그들이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을까?(박창범, 앞의책, 48쪽)



이와 함께 주목할 만한 기록은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는 태백주현(太白晝見)기록이다. 금성이 낮아 보일 수 있는지 금성의 등급을 계산해 보면, 지구에서 보았을때 금성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크기가 변하고, 달처럼 위상도 달라진다. 평소에는 밝기가 -3.9등급 정도이다가 태양에서 가장 먼 각도로 멀어지는 동방최대이각이나 서방최대이각 근처에서 약 -4.7등급까지 밝아진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태백주현` 기록이 있는 해에 금성의 등급을 계산하면 놀랍게도 기록 중 4개가 금성이 가장 밝아진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백제 구수왕 11년 10월의 `태백주현` 기록은 계산상 서기 224년 겨울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즉 당시 금성은 -4.67등급으로 가장 밝아져 가는 시기여서 기록과 일치한다. 이 현상은 중국측에도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백제 아신왕 3년(서기 394년) 7월, 고구려 양원완 11년(555년) 11월의 기록은 독자 기록이면서 계산상으로도 역시 금성이 밝아진 시기와 일치해 독자적 관측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 `태백주현` 기록만 보아도 7세기에 이르러서야 삼국이 천문 관측을 독자적으로 수행했을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일본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일식 기록이 중국 기록의 차용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 검증한 과학적 결과가 아니라 일본학자들이 미리 주관적 결론을 세워 놓고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천문 기록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부분적인 분석만을 하거나 비과학적 논리를 앞세워 결론을 합리화하려 했다는 혐의가 짙다.


또 독자적 관측의 진위 여부와 함께 이때의 `태백주현` 관측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낮에 금성을 관찰하는 `태백주현`의 관측은 전문성을 요한다는 것이다. 낮이 밤처럼 되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식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환한 낮에 금성을 관측하자면 오랜 기간에 걸쳐 금성의 위치변화를 추적해 두어야 한다. 그 축적된 지식에 따라 당일 낮에 금성이 하늘의 어디쯤에 자리할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주의깊게 관찰해야만 금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같은 `태백주현` 관측이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천문학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25년(서기 7년)에 천문 관측을 담당했던 관리인 일자(日者)가 등장하고, 일관부(日官部)라는 부서가 존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사서에 기록된 천문기록들이 실제 존재했었는지 관측할때 나타나는 실현율이다.  확인 결과 실현율이 가장 높은 사서가 바로 『삼국사기』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식 기록 총 66개,중 53개가 사실로 확인되어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인다. 특히 서기 200년까지의 초기 기록은 그 실현율이 89%에 이른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그 천문 기록을 베꼈다고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중국 사서의 일식 기록은 한나라때 실현율이 78%로 가장 높고, 당나라 말까지 약 63~75%의 실현율을 보인다. 일본사서의 기록은 일식이 처음으로 기록된 서기 628년부터 950년대까지의 일본의 초기 기록은 실현율이 35%에 불과하다. 셋 중 두개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식 기록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중국측 사서의 기록을 베꼈다면 일식 기록의 실현율도 마땅히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천문현상의 실현율과 비슷해야 할 것이다. 일부를 그대로 베껴쓴 답안이 원래의 답안보다 점수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것도 들쭉 날쭉함이 없이 모든 시기에 걸쳐 고르게 실현율이 높다면 더욱 그렇다. 이는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의 일식기록들에는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는데, 중국측 사서를 베꼈다면 『삼국사기』의 각 나라가 기록한 일식들의 경우, 일식 때 지구상에 드리워지는 달 그림자가 매번 비슷한 지역에 떨어지는 일식들이라는 점이다. 즉, 일식들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삼국의 관측자가 각각 지구상의 고정된 한곳에서 꾸준하게 관측한 실측 자료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 사서에 나오는 일식들은 『삼국사기』의 일식기록들만큼 한곳에 집중되지 못한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본기><백제본기><고구려본기>의 천체기록들은위도상으로 각각 떨어져 있다. 만약 중국측 기록을 베꼈다면 당시 중국 나라들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와 삼국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가 평균적으로 모두 같은 위치로 나와야 이치에 맞지 않은가? 곧 『삼국사기』일식 기록이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기존의 결론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신라본기>에 수록된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난다.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下代)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는 북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구려의 최적 관측지는 만주 북부 바이칼 동쪽 지역이고, 상대신라의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 곧 중원대륙의 한복판이며, 백제의 최적 관측지는 요서 곧 지금의 북경지역 및 역사서에 등장하는 산해관 지역이다. 하대 신라의 경우 한반도 남쪽 지역이 최적 관측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왜 삼국의 최적 관측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 동부일까? 왜 상대 신라와 백제의 최적 일식 관측지가 한반도 내에 있는 게 아니라 중국 대륙 동부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현대의 기상, 지질, 해양학적 자료들을 얻어 이들 중 중국 동부와 한반도에서 관측했을 때 완연히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면, 『삼국사기』에는 가뭄, 한재, 지진이나 태풍 현상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때 아닌 눈이나 꽃의 개화 등 이상 현상도 종종 나타난다.



중국과 한반도의 자연 현상 중 가장 두드러지게 지역적 계절적 차이를 보이는것이 장마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즉 양자강 유역과 한반도는 장마가 지는 때가한달 가량 차이가 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수(大水)는 큰비, 큰물을 뜻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러한 큰물이 일어나는 시기가 삼국마다 차이를 보인다. 신라의 경우 서기 약 500년 이전에는 음력 4~5월에, 그 이후에는 5~8월경에 큰물이 났다. 백제의 경우에는 5~6월경에, 고구려는 5~8월경에났다. 현대의 관측 자료에서 이러한 기상학적 특성을 지닌 곳이 어디인가를 추적해서 최근50~100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여러 기상 관측소에서 측정한 강수량과을 이용하여 비교한 결과 서기 500년 이전의 신라처럼 음력 4~5월경에만 큰비가내리는 곳은 바로 양자강 유역뿐이다. 반면에 동북아시아에서 서기 500년 이후의 신라 기록처럼 음력 5~8월에 큰비가 내리는 곳은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위도로 나타났다. 이것은 바로 하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한반도)와 일치한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백제는 큰물 시기가 상대 신라에 비해 한달 정도 늦게,고구려는 백제보다도 더 늦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역시 백제의 최적 일식 관측지가 발해만 부근이고, 고구려의 일식 관측지가 그보다 고위도 지역이라는 사실과 부합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상 자료를 통해 살펴본 삼국의 지역적 특색은 천문 기록으로 찾은 최적 관측지와 일치한다. 이는 비록 이 관측지가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사의 내용과는 다르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자연 현상들이 보여주는 지역적 특성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는 것이다.(이상 박창범, 앞의책, 38~67쪽의 내용 정리)



일본에는 <일본서기>(697년 이전), <속일본기>(697~806), <일본후기>(806~833),<속일본후기>(833~850),<일본문덕천황실록>(850~858),<일본삼대실록>(585~887) 등등으로 이어지는 소위 정사서들이 있다. 이러한 일본의 고대사서들에는 628년의 기록을 필두로 많은 일식 기록이 나오는데 계산을 통해 확인해 보면 이중에 76개만이 일본에서 관측 가능한 기록들이다. 즉, 사서에 실린 일식기록 중 실제로 일어난 일식의 비율은 35%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일본 또는 동아시아나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일식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하대 신라의 일식(787~911) 실현율이 90%이고, 당의 일식(618~906) 실현율이 77%인 점과비교하면, 일본의 일식 기록은 그 신뢰도가 이례적일 만큼 현저히 떨어진다. 784년 이전의 야마토와 나라 시대만 떼어놓고 보아도 81개의 일식 기록 중 27개만이 실제로 일어난 현상이어서 실현율이 33%에 그치고 있다.


일본의 고대 사서에 수록된 일식 대부분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무엇을 뜻하는가? 일본 정사서들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나라시대는 일본의 문화적 융성기로 알려져 있는데 나라시대의 일식 기록은 36개인데 그중 약 3분의 2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식기록이다. 반면, 일식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일본 역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시기는 약 1190년에서 1330년 사이이다. 이 시기의 일식 기록 약 75%가 실제로 일어난 현상들이다. 일식 관측지도 정확히 일본에 위치한다. 이 기간은 일본에서 무사들의 독재정치기였던 가마쿠라시대(1185~1333)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일식 기록들은 이 시기에만 유일하게 실제로 관측한 자료가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상은 박창범, 앞의책 68~76쪽을 정리한 기록임)



4. 만주 - 삼위산족과의 싸움(다물)



한국인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된 데에는 4가지 사건과 한편 이와함께 네명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첫번째는 배달국의 14대 자오지 환웅인 치우천황과 지나족 또는 한족의 조상으로 받들여 지고 있는 황제헌원과의 73차례에 걸친 탁록을 중심으로한 10년간의 대전쟁이다.


두번째는 창의흥병으로 일어난 졸본부여의 창시자인 고두막한 단군과 한무제가 요서와 요동의 패권을 놓고 싸운 전쟁이다.


세번째는 강이식,을지문덕 등과 수문제, 수양제와의 싸움이다.


네번째는 연개소문,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당태종과의 싸움이다.


이 네번의 싸움으로 동방족과 서방족 사이의 전투에서 동방족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의 전쟁이 있고 난이후 지도력을 갖춘 리더의 부재와 국력의 점진적인 소모로 국가의 힘은 점차 약화되었고, 이로서 강력한 외세에 대한 내부적인 결속이 깨어져 결국 배달, 조선, 대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는 멸망해 갔다.



5. 반도 -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고 조선은 조물주 삼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서 삼신 하나님의 삼신제도에 맞추어 나라를 삼한,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것을 삼한관경 곧 경계를 셋으로 나누어 각기 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단군이 직접 통치하던 진조선이 47대 고열가 단군대인 기원전 238년전에 멸망하고 삼조선의 한과 직접 국경이 닿아있었던 번조선의 74대 부단군 기준이 기원전 194년전에 유방을 세워 한나라를 세웠다가 숙청당한 노관의 부하였다가 숙청을 피해 투항하여, 번조선의 74대 부단군 기준이 변방수비대장을 맡겼던 위만에게 번조선을 찬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안정복의 『동사강독』은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선생도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고 한바 있다. 위만정권은 결국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결국 기원전 108년전에 멸망당한다. 삼조선 또는 삼한의 백성들은 이때 한무제의 난을 피해 대거 한반도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각기 변한 마한 진한땅에 터를 잡게 된다.


이때 한무제가 흉노를 굴복시키고 자신감을 얻어 번조선을 치고 우거정권을 멸한뒤 북부여에 까지 쳐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병사하게 된다.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를 지켜보던 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여 기원전 108년에 졸본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명(東明: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으로 바꾸고 단군으로 즉위한다. 이분이 바로 동명성왕(東明聖王)이시다.


그리고 북부여의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 땅에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란 뜻으로 동부여(또는 가섭원 부여)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6. 열도 - 섬으로 이주해간 사람들



반도에서 다시 섬인 열도로 옮겨간 때는 대체로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이전부터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지도층과 백성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를가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고대 일본의 역사는 사국 곧 신라,백제,가야, 고구려인들의 이주사라 할 수 있다. 특히 백제인들의 열도로의 진출이 가장 활발했는데, 이는 중원에 있던 대륙백제와 열도의 식민백제 그리고 반도에 있던 백제와의 해상권 장악을 통해 활발히 해상무역국가로서의 기틀을 세움에서 비롯되었다.


후에 수당의 중원 재통일과 함께 대륙에서의 백제가 소멸하고 나당연합으로 반도백제 또한 소멸하게 되자 반도에 있던 많은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들이 열도로 건너가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후 열도의 이주민들은 반도와 대륙으로의 진출에의 꿈을 버리지 않아 고려와 조선의 1천년간 992회 이상의 충돌이 있게 된다.



7. 해양 - 바다를 지배하던 사람들


비단길을 연 고선지 장군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후신라말의 해상왕 장보고는 청해진에 요새를 만들고 해상무역을 장악하게 된다.


주로 발해연안을 포함한 황해에서 중원과 반도 그리고 열도를 잇는 해상무역이 벌어졌기 때문에 해양은 굉장히 중요한 고지였다.


지금 이 시대 역시 해상무역을 장악하는 국가가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8. 동북 간방의 역사 - 간도수


앞서 살펴 본것처럼, 동방족은 그 활동무대가 초기에는 광활한 초원과 중원, 만주와 반도에 걸쳐있다가 점차 국가 리더의 지도력부족과 잦은 서방족과의 전쟁으로 점차 국력이 쇠퇴해져 활동무대가 배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점진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고대 한반도는 방위로 간방이라고 불렸는데 간방은 동북방을 말한다. 지금의 극동을 지칭할때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끝을 일컫듯 간방은 고대 극동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즉 점차 한민족의 역사에서의 활동무대가 축소되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다.


결국 동방족 또는 동이족 또는 한민족의 이동경로는 바이칼호의 감방(坎方)에서 발해연안의 진방(震方)으로 다시 간방(艮方)인 한반도로 욱여 들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9. 결문(結文)


이상으로 역사속에서 한민족의 활동무대를 살펴 보았다.


현재 한민족의 활동무대는 전 세계로 퍼져있다. 이는 지난 한세기, 100년 동안 구한말과 일제식민지 36년과 3년간의 미소군정과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며 각기 관리들의 세금수탈을 피해 지금의 중국 땅인 만주로, 식민착취를 피해 지금의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일본을 배워 일본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일본과 러시아에, 다시 독립운동을 위해 중원으로, 소련의 강제이주에 의해 사할린과 연해주에 있던 사람들은 중앙아시아로, 일본의 태평양전쟁에서의 군수물자 생산 및 탄광자원착취를 위해 일본으로, 필리핀 및 태평양 각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소련, 중국 일본, 미국 및 남한과 북한 어느곳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스위스, 인도, 호주 등 제 3세계로 피해갔고, 개발독재시대에 수많은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독일로 갔고, 석유와 건설을 위해 중동으로 많은 인력이 떠났고, 근래 자원봉사 모집을 통해 아프리카의 오지로 동남아시아의 오지로, 갔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남미의 자원개발 및 땅의 확보를 위해 옮겨가 또 최근까지 미국과 캐나다 호주로 많은 젊은이들이 어학연수를 위해 떠나있고, 최근에는 동남아 지역과 중원과 인도지역에 이주와 투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있다. 또 남극의 킹 조지섬에 세종기지를 세워 연구활동을 하기도 하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이라크와 이란 아프간 등지로 선교개척을 떠나기도 하는등 현재 한국인은 전 세계로 전 지구로 퍼져 있다.


남한 4800만, 북한 2200만의 남북한 6900만과 전 세계 1000만의 재외 교포들이 퍼져 동시대 지구를 살아가고 있다.


도기 136년 9월 6일 목요일 늦은 8시 4분

환기 9205년 웅기(신시개천) 5904년 단기 4339년

불기 3032년 유기 2553년 서기 2006년 이슬람력 13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