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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와 백마고지 전투

by 바로요거 2008. 7. 17.

 

백마고지와 백마고지 전투

 

 

백마(白馬)는 흰 말인데, 흰 색은 가을을 상징함.

봄은 木이며 청색, 여름은 火이며 적색, 가을은 金이며 흰색, 겨울은 水이며 흑색이다.

그런데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종오(金鍾五) 장군은 1921년 辛酉生이다.

김종오 장군은 金씨로 성이 가을을 뜻하고 있으며

역시 신유에서 辛은 金이며 가을이고, 酉도 金이며 가을이다,

또한 그 당시 이끌었던 부대는 9사단인데 이 9자도 金이며 가을이다.

백마고지가 38선에서 아주 중심인 천원점이었는데 왜 하필 중공군 38사단과 처절하게 싸웠을까?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숫자 중에서 가장 큰 수이면서 통일하는 수가 10인데

특히 10일동안 12차례 뺏고 빼앗기는 격전 중에서 육탄 3용사가 10차 돌격에서 결정적으로

백마고지를 빼앗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까?

가을 9수와 남북이 분단하여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을 상징하는 38수의 의미

육탄 3용사의 3, 그리고 10차의 10수....

열린다는 10수!

 

 

 

백마고지 []

395고지라고도 한다. 철원읍 북서쪽 약 12km 지점인 휴전선 북쪽에 있다. 심한 포격으로 온통 파괴되어 공중에서 보니 백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2년 10월 6~15일 정예군으로 알려진 중공군 제38군이 국군 제9사단(사단장 소장)이 지키고 있는 395고지에 공격을 개시하여 고지의 주인이 24회나 바뀔 정도로 혈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 1개 군단의 병력을 투입하여 1개 사단 병력을 잃었으며, 아군(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둔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UN)군은 휴전 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백마고지전투 []

6·25전쟁 중인 1952년 10월 6일 저녁부터 10월 15일 오전까지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보병 제9사단과 중국군이 벌인 전투.
언제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어디서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
누가 국군 보병 제9사단과 중국군
무엇을 철원고지 쟁탈전
어떻게 국군의 승리

1952년 10월 6일 저녁 장융후이[]가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은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을 이끌고 철원 서북방 395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 명에 국군 제51·52·53포병 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4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9일 동안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0월 15일 오전에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로 군사지정학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국군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 사이의 적절한 협동, 공군의 항공근접지원,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