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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과 여성의 해원을 풀어주라“-증산도

by 바로요거 2008. 5. 27.

[한국의 창종자들]“천민과 여성의 해원을 풀어주라“

뉴스메이커 | 기사입력 2008.03.06 15:41

증산도(甑山道) 증산교 강증산③

강증산 "당대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자들을 품어야 한다" 강조

세상이 불행하여 종교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절망적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노예로 가혹한 현실을 살던 유태 백성에게 모세는 민족의 자각을 이끌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다. 예수는 로마의 학정에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이라는 삶의 방식을 일깨웠다. 석가모니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 위협 속에서 수행의 길을 택했다.

 

↑ 동곡약방에 걸린 강증산의 친필.

 

↑ 강증산의 진영이 걸린 한 증산도 도장에서 수행하는 모습.

 

↑ 김제 금산사 전경.

증산의 시대는 변화와 고난과 두려움이 지배하던 때다. 사람들은 불행했다. 그는 이런 세상의 모습을 천지가 새로 열리는 개벽(開闢)의 시대로 파악했다.

행복해지려면 왜 불행한지 알아야 한다. 고통의 원인을 바로 보아야 하고 무엇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강증산은 세상이 혼란한 원인을 불행한 이들의 원한에서 찾았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인 선천개벽(先天開闢) 시대에 쌓인 원한이 극에 달해 세상이 망해버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자각이다. 그러니 원한을 풀지 못하면 세상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하리라고 했다.

요순시대는 조선이 꿈꾼 이상세계

모세가 율법을 외쳤고 부처가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며 예수가 사랑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증산은 해원(解寃)을 말했다. 원한과 원망은 불행의 씨앗이다. 개인과 국가 모두가 그렇다.

조선은 사회 운용의 모범을 중국에서 찾고 있었다. 모든 이가 풍요를 누리던 태평성대의 요순(堯舜)시대는 조선이 꿈꾼 이상세계다. 유교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요순시대의 실현이다. 조선이 망해가던 시절 강증산은 요순시대야말로 최초의 모순, 원한이 시작된 출발점이라고 파악했다. 당시까지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한국종교학회의 김탁 박사는 해원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의 첫 원한을 맺은 것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입니다. 모든 원한은 그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단주의 원한을 풀어가는 과정이 선천시대의 해원이며 천지공사의 시작입니다."

1926년 이상호가 쓴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는 강증산의 언행을 적은 최초의 기록이다. 그곳에 실려 있는 강증산의 육성은 해원의 의미와 단주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옛부터 쌓여온 원을 풀어 그로부터 생긴 모든 불상사를 소멸하여 영원한 화평을 이루려 한다. 대개 머리를 끌면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이 인륜 기록이 비롯되었으며 원의 역사의 첫 장인 요임금의 아들 단주의 원을 풀어주면 그 이하 수천 년에 쌓여온 원이 다 마디와 코가 풀어지리라."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는 왕권이 당연히 자신에게 전해지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현명하지 않음을 안 요임금은 왕위를 순에게 물려주었다. 단주는 아버지로부터 바둑판 하나를 받고 말았다. 요와 순임금이 세상을 풍요롭게 했다지만 단주에게는 원한의 대상일 뿐이다.

강증산은 유교적 이상세계란 개인에게 불행을 강요하는 허위란 점을 간파했다. 한 시대와 세계관이 몰락하고 있으니 그 원인을 종교적으로 규명하고 풀어주려 한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가치는 더 이상 힘이 되지 못하며 새 세상을 이루는 걸림돌에 불과하다는 통찰이었다.

강증산이 꿈꾼 행복한 세상이란 결국 원이 풀린 세계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그 원한의 첫 단추를 바로잡아야 했다. 강증산은 천지공사를 펼치며 해원의 첫머리를 푸는 종교적 상징을 장치하고 있다. 그는 천지공사의 현장인 동곡약방(銅谷藥房)에 약장을 만들어 천하를 고치는 도구로 삼았다.

공사기에는 약장의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약장의 가운데 칸에 단주가 명을 받는다는 뜻의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시고 그 속에 목단 껍질을 넣어두셨다. 그 아래에 사나운 바람과 번개·비에도 혼미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열풍뇌우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옆으로 쓰셨다. 또 '칠성경(七星經)'을 아래로 쓰고 그 끝에 걸음을 재촉하여 양명에 오른다는 의미로 '우보상최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쓰셨다." 단주가 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원을 풀어주었음을 밝힌 것이다. 창조주인 강증산이 쓴 글귀를 통해 해원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

강증산 사후 교세 들불처럼 번져

뜻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한 자들의 좌절은 아프다. 그것이 쌓여 세상의 불평등과 소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강증산은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가톨릭 신앙을 전한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利瑪竇) 신부도 원을 남겼다고 보았다. 강증산은 서학의 이마두는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고 했지만 유교의 폐습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동학의 전봉준과 최제우도 원을 남겼으니 풀어준다고 했다.

강증산의 해원 실행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천민과 여성의 원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당대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자를 품지 않고서 세상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도 수도를 하면 도를 통할 수 있고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가르쳤다. 증산의 교의 중에 음양합덕(陰陽合德)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음과 양은 동등하게 세상을 이룬다는 가르침이다.

강증산이 예고한 세상에서는 천민도 귀해지고 주인이 된다. 가장 약한 것이 강해지며 천한 것이 높아지는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조선의 사회는 그런 세상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그 역사는 이미 끝장나버렸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윤이흠 명예교수는 강증산의 공사사상과 해원의 종교행위야말로 독창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해원의 가르침을 통해 증산 특유의 신비주의적인 교리가 진행됩니다. 증산은 개인과 사회의 원, 동양과 서양 뿐 아니라 일본의 원까지 풀어주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예언하여 도수를 정해놓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갖게 하고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민족의식을 강조한 강증산의 종교적 가르침은 격렬한 압력이 되어 돌아왔다. 탄압의 빌미가 됐다. 예수가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섰던 것처럼 강증산도 고부경무청에 체포되었다. 나라가 망해갈 때 종교에 민족의식이 더해지면서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그의 가르침은 번져나갔다.

모악산 금산사에 재림할 것을 예고

강증산의 사후인 1918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의 유사종교 조사 자료'에는 증산계열 종교의 교도는 약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1923년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훔치교계 보천교 2만3006명, 무극대도교 1031명, 태을교 210명, 불교를 표방한 미륵불교 4411명 등 약 3만 명 가까이로 늘어난다.

1935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유사종교단체를 엄중 취체할 방침을 세웠다. 현재 종교단체의 9할이 유사종교이며 교도는 38만으로 추정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일제는 일본의 신도(神道), 기독교와 불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사종교로 규정하여 배척했다. 당시 민족종교의 교세가 얼마나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으며 일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일제는 종교단체해산령을 내려 본격적인 탄압을 가한다.

증산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신도들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집단으로 주목받았다. 1919년 증산의 제자인 차경석 등은 조선총독부에 불온사상을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조서에 따르면 "강증산이 다시 돌아와 독립을 되찾고 조선을 통치할 것이다"라는 불온한 가르침을 펼치고 국권 회복을 꾀했다는 것이다. 이후 선도교(仙道敎), 보천교(普天敎), 인도교(人道敎) 등 강증산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단체는 일망타진의 대상이 됐다. 결국 강증산이 종교적 가르침 속에 숨겨놓은 민족의식은 민초들에게 식민지의 폭압에 맞설 수 있는 꿈이 될 수 있었다. 일제는 그 사실을 직시했다.

일제 법원자료에 등장하는 증산계열 종도의 죄목은 다양하다. 때로는 신국가건설, 불온사상유포, 사기, 비밀결사, 미신단체, 금품사취, 독립 주장 등의 죄목이 적용됐다. 1920년대 중반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줄곧 사찰과 체포와 투옥을 계속했지만 뿌리 뽑지 못했다. 1938년 6월 조선총독부는 사상 취체의 방침을 세워 민족적 색채가 있는 종교는 범죄 여부를 떠나 엄중히 탄압 지도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김종서 교수(종교학과)는 강증산의 가르침에 배어 있는 민족의식과 개혁의 정신을 이렇게 말했다. "민족종교로는 보기 드물게 동서양의 종교적 가르침을 모두 어우르고 있습니다. 국운이 흔들리던 당시 상황에서 기존의 유교와 불교만으로는 부족하며 서양의 기독교만으로도 구원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동서양의 종교에 무속신앙까지 포함해 모두를 가지고 종교적 비전을 제시한 것이 강증산의 가르침입니다."

믿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고 믿을 수 없으면 신이 아니다. 강증산은 자신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예고했다. 제자들도 그의 재림을 의심치 않았다.

죽음을 나흘 앞두고 그는 제자를 불러 모아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믿는다고 하자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라고 물으니 제자들도 죽어도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잘 보아두라고 했다. 후일 다시 돌아올 때는 눈이 부셔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금산사에 들어가니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모악산 금산사에는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천 < 객원기자 >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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