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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담긴 비밀과 진실을 찾아서

by 바로요거 2008. 5. 15.

숫자에 담긴 비밀과 진실을 찾아서

오마이뉴스 | 기사입력 2007.12.07 18:18

[[오마이뉴스 김규종 기자]


< 수의 신비 : 숫자는 어떻게 태어나, 어떤 상징과 마법의 힘을 갖게 되었나 > (마르크 알랭 우아크냉 저/변광배 역) 겉그림.
ⓒ 살림출판사



글을 시작하면서
에스파냐 세비야의 대주교였던 성(聖) 이시도루스(560∼636년)는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 어원사전(語源事典):Etymologiarum seu Originum libri > 을 남겼다. 모두 20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수학·의학·역사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고 한다. 그가 저작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모든 것에서 수(數)를 없애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시라. 수를 빼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얼마나 되겠는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관계와 사건, 그리고 사유의 전면과 배면에는 언제나 수가 자리한다. 수라는 개념을 제외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수로 규정되고, 정리되며,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는 단지 '수'나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학이나 물리학, 화학과 생물학 등과 같은 분과학문과 긴밀하게 결합한다. 또한 < 다빈치 코드 > 같은 소설에서 수는 '피보나치' 수열로 등장하여 적지 않은 지적인 긴장과 흥미를 선사한다. 우아크냉의 저작 < 수의 신비 > 는 수의 여러 가지 면모를 독자에게 매우 다채로운 정보와 재미를 선물한다.

서책의 구성과 골자

< 수의 신비 > 는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숫자'는 부제 '근대 숫자의 탄생과 변천'이 명시하듯이 숫자의 기원에서 출발한다. 우선, 기원전 3세기에서 9세기까지 인도에서 어떻게 숫자가 태어났는지 추적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어떻게 인도숫자가 아랍세계를 거쳐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에 도달했는지 조명한다.

제2부 '여러 가지 수'에서 지은이는 무엇보다도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학파'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지속한다. "만물의 근원은 수"라고 주장한 피타고라스학파는 기원전 5세기 무렵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시기 학파에는 히포크라테스, 데모크리토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히피아스 등과 같은 쟁쟁한 학자들이 포진하였다고 한다.

제3부 '여러 형태들'의 부제는 '마법진과 부적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은이의 관심은 수에 내재되어 있는 신비주의다. 고대 중국의 마법진과 파우스트의 마법진, 그리고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 멜랑콜리아 > 에 나타난 마법진까지 동원한다. 또한 연금술과 부적을 통하여 숫자에 들어 있는 비의와 더불어 기하학의 어원까지 추적한다.

제4부는 부록으로 서책 < 수의 신비 > 에 담겨 있는 각종 용어들과 인명을 자상하게 풀이한다. 또한 다섯 쪽에 걸친 참고문헌과 일곱 쪽에 이르는 주석을 덧붙임으로써 저작을 보다 풍부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순서와 무관하게 < 수의 신비 > 에서 골자를 추출하여 재미있고 유익하며 흥미로운 서술을 시도하고자 한다.

수수께끼 같은 수 '0'에 대하여

명수법(命數法)의 기초는 0에서 시작하여 9로 끝나는 열 가지 숫자다. 만일 여기서 0이 빠진다면 분명히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01과 11은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가. < 수의 신비 > 를 지은 랍비이자 철학자 우아크냉은 숫자 0이 존재하기 위한 철학적 기초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0을 발견하기 위해서 '공백'이란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런 단어가 있었다. '슈냐 shunya'는 '공백'이면서 '부재'를 뜻한다. 이 단어는 몇 세기 전부터 인도의 삶과 문화에서 종교와 신화적 사고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88쪽) 우리는 여기서 < 반야바라밀다심경 > 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되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막힌 변증법적인 개념 말이다. 이런 생각은 노자의 < 도덕경 > 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났으나,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 (노자 < 도덕경 > , 40장)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중세 유럽에서 '비어 있다'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개념을 이해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를 생각해보시라.) 지은이는 그런 상황이 유럽에 0이 뒤늦게 도입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중세는 기독교 신학, 즉 신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는 충만의 신학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인도와 달리 공(空)과 무(無)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0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 시기에는 0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정신적으로 그럴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46-147쪽) 그러므로 인도에서 생성되어 아랍세계, 특히 바그다드의 지적인 풍토에서 성숙한 수학과 숫자 0이 유럽에 자리 잡는 시기는 피보나치가 < 산반서(Liber Abaci) > 를 저술하였던 1202년 무렵에야 가능했다고 우아크냉은 주장한다. 피보나치의 말을 들어보자.

"아홉 개의 인도 숫자는 9, 8, 7, 6, 5, 4, 3, 2, 1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아홉 개 숫자와 아랍어로 'zephirum'이라 (어떤 원고에는 'cephirum'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불리는 0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수를 표기할 수 있다." (160쪽) 중세아랍과 유럽의 학문, 그리고 숫자

중세 바그다드에는 '바이트 알히크마(Beit alHikma)', 즉 '지혜의 전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런데 9세기에 바그다드에 들어온 책들 가운데 아랍어로 써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지혜의 전당'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최고의 번역진이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과학과 철학 관련서적을 번역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학자들의 책을 번역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디오판토스 등의 저서가 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지리학자,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같은 의학자, 헤론 같은 기계학자들의 저서도 아랍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럽이 암흑기를 지나고 있는 동안 아랍세계는 고전 그리스의 풍요로운 지적 전통을 이어받음으로써 거대한 지식창고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인도의 숫자가 아랍세계로 이주해왔다고 < 수의 신비 > 에서 우아크냉은 지적한다.

"번역의 열기에 사로잡혀 천문학과 수학을 포함하는 인도 서적들이 다량으로 바그다드에 수입되었다. 인도에서 바그다드로 지식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숫자의 첫 번째 장거리 여행이었다." (105쪽) 반면에 13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대학교육을 시작한 유럽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인도-아라비아 숫자와 대면한다. 그것은 훗날 교황 자리에 올랐던 제르베르 도리야크(938∼1003)가 도입한 새로운 계산기(아바크)와 십자군원정(1096∼1270), 그리고 그리스와 아랍 및 인도 서적들의 라틴어 번역에 기초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에 숫자가 자리를 잡은 다음 숫자의 꼴이 갖춰지고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데에는 인쇄술 발명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숫자가 완전히 정착하고 난 다음 형태를 갖추는데 기여한 것은 인쇄술, 특히 인쇄업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글자꼴의 창조였다. 그리하여 숫자들은 인도식 꼴이나 아라비아 숫자의 꼴을 잃어버리고 현대숫자의 꼴을 갖추게 되었다. 인쇄술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1492년 무렵 아라비아 숫자가 오늘날의 모양과 거의 같은 꼴을 갖추었다." (163-165쪽)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97), 그리고 탈레스 (기원전 624∼546)

< 수의 신비 > 는 우아크냉의 자유자재한 서술과 폭넓은 지적 토양이 독자에게 흥미를 배가한다. 지은이는 더러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들쭉날쭉하게 시간을 요리한다. 그러므로 일목요연한 독서를 바라는 사람은 다소간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풍요로운 앎을 희망하는 독자에게 그는 유쾌한 안내자인 셈이다. 우아크냉은 특히 피타고라스를 중시한다.

철학이란 용어를 피타고라스가 만들어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그리스어로 '사랑하다'를 뜻하는 단어 'philein'과 '지혜'를 뜻하는 'sophia'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 철학! 그것을 사람들은 대개는 '지혜의 사랑'으로 이해하지만, 후설과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철학을 '사랑의 지혜'로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는 수를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하였는데 완전수, 초월수, 그리고 불완전수다.
"완전수는 가장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희귀한 수로 약수의 합이 그 자신과 같은 수를 일컫는다. 0과 1000 사이의 완전수는 6, 28, 496의 세 개다. 약수의 합이 그 자신보다 큰 수가 초월수인데, 최초의 초월수는 12다. 그리고 약수의 합이 그 자신보다 작은 경우가 불완전수이며, 최초의 불완전수는 10이다." (255-256쪽) 사람들은 탈레스에게 역사상 '최초의 수학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원에 관심을 가졌고, 원의 본질 자체에서 유래하는 진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탈레스는 수 자체에 전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기하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수학자였다.

"탈레스의 주된 관심은 기하학적인 형태인 원, 직선, 삼각형이었다. 그는 각(角)을 완전한 수학적인 실체로 생각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기하학에서 이미 알려져 있던 길이, 면적, 부피의 세 가지 항목을 연결하여 기하학의 네 번째 항목인 각을 하나의 수학적 실체로 만들어낸 사람이 탈레스이다." (394쪽) 피타고라스나 탈레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항상적인 진리'를 찾아 평생을 바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들은 어떤 상황과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가 '공리(公理)'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원과 지름의 관계'에 대한 탈레스의 발견에 저절로 탄복하게 되는 것이다.

짧은 맺음말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무수한 숫자들의 행렬을 생각한다. 밤하늘에 떠 있는 그 많은 별을 헤아리다 잠들어버린 어린 시절을 반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숫자나 수학은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매력적인 존재로 수용되지 않는 듯하다. 이미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은 기피대상 1호로 낙인찍힌 지 오래이며, 방계학문인 물리학과 화학도 비슷한 처지다.

하지만 서양 근대철학의 문을 열었던 스피노자나 파스칼은 모두 수학자였다. 근대수학의 기수였던 아이작 뉴턴은 <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 > (1687)에서 우주운항의 법칙을 숫자와 수학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였다. 20세기의 최고 물리학자로 칭송 받았던 리차드 파인만은 < 재미있는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 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경험과 직관은 거시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미시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커다란 물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지만, 미시세계의 사물들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분야의 학문을 배울 때에는 기존의 경험적 지식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다소 추상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이런 추상능력과 학문자세를 가지고 수학과 숫자를 대하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