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실시간 지구촌 개벽소식/5선위기의 한반도

중국, 떠오르는 용龍인가, 떨어지는 이무기인가?

by 바로요거 2008. 3. 19.

■중국, 떠오르는 용龍인가, 떨어지는 이무기인가?
 
100여년 전 증산 상제님께서는 장차 중국의 국운을 심판하는 공사를 집행하셨다.  
중국은 동서양의 오가는 발길에 채여 그 상흔(傷痕)이 심하니 장차 망하리라. 이는 오랫동안 조선에서 조공 받은 죄로 인함이니라. (道典 5:402:7∼8)
 
또 안운산 종도사님께서는 중국의 종국적 운명을 이렇게 전해주고 계신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건드려서 득 본 게 하나도 없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져 있다. 중국이 망하는 원인이 있다. 중국은 배사율에 걸려서 망한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건드는 건 신명이 허락도 않는다. (道紀 134년 양력 11월 14일, 증산도대학교 말씀)
 
중국이 조선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이 왜 죄가 되는가?

■조선은 문명의 대스승국이었다
무릇 조선은 중국 문화의 뿌리요, 문명을 전해준 대스승국이었다. 인류문명의 뿌리와 중국 한족(漢族) 문화의 뿌리가 모두 동방 배달국과 고조선에서 전해진 고대 신교(神敎)문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런 조선으로부터 중국이 오랫동안 조공을 받아 왔으니, 이는 곧 스승에 대한 도리를 저버린 행위가 되므로 배사율(背師律)의 대죄가 되는 것이다.

중국이 과거 한반도를 침략하고자 시도했다가, 번번이 패망을 맞이한 뼈아픈 역사는 배사율의 냉엄한 심판을 대변해 준다. 그러나 중국이 한민족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저버리는 불의한 만행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으로 오늘날까지 계속 자행되고 있다.
 
■중국의 `한반도 징크스’
지난날 한·중간의 역사는 중국이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한반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했을 때 왕조의 멸망 또는 붕괴를 초래하거나, 국력만 낭비하고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 주중대사의 신분으로『떠오르는 용 중국』이라는 책을 써 화제가 된 김하중 씨는 이러한 한·중간의 역사적 현상을 ‘중국의 한반도 징크스’라 규정한다.
 
과연 배사율의 냉엄한 심판이라 할 ‘중국의 한반도 징크스’는 어느 정도로 무섭게 들어맞아 왔는가? 그 역사적 선례들을 하나씩 짚어 보기로 하자.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망한 수(隋)나라 
6세기 말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당시 요동평원에서 강력한 국력을 형성하고 있던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나 전염병의 발병으로 중도에 회군하고 만다. 다음 제위에 오른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와 돌궐족의 연합에 대비하고, 백제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다는 구실로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
 
서기 612년, 수양제가 1차 정벌을 위해 동원한 군대는 정규군 130만, 예비 병력 200만, 곡량을 운반하는 인부들이 600∼700만 명이었으며 군대 행렬의 길이는 960리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수나라 장수 우문술(字文述)이 이끄는 30만 5천의 군대가 평양을 침공했으나,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유도 작전으로 살수에서 대패했으며 살아서 중국으로 돌아간 병사가 2,700여 명에 불과했다.
 
서기 613년 수양제가 고구려에 대한 제2차 침공을 시도했지만, 국내의 농민봉기 발발로 철군했고, 614년 다시 제3차 침공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무리한 전쟁 준비는 국력의 쇠퇴를 불러왔으며 왕조 건립 38년만에 수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수나라 백만대군을 격파한 을지문덕 장군의 용맹을 그린 살수대첩도(좌)와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수십만 대군과 맞서 싸운 난공불락의 요새, 안시성 복원도(우)
 
■당태종(唐太宗)의 큰 과오로 기록된 고구려 침공
서기 626년 왕위에 오른 당태종은 수나라의 전례를 거울삼아 초기엔 고구려 침공을 자제한다. 그러나 정관(貞觀) 말년인 서기 645년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은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태종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645년 당태종은 10만의 원정군을 편성해 제1차 고구려 침략을 단행했지만 3개월 가량의 안시성 싸움에서 군량이 떨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자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당태종 자신도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복수를 다짐하던 당태종은 2년 뒤인 647년, 제2차 고구려 침략을 단행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당태종은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죽고 만다.
 
당태종의 무리한 고구려 정벌 시도는 당나라 국력의 막대한 손실과 민생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중국 역사는 이를 당태종의 커다란 과오로 기록하고 있다.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명(明)의 임진왜란 파병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이 원군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자국의 이익과 방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파병을 결정한다. 낙상지(駱尙志), 사대수(査大受), 이여송(李如松) 등의 장수를 앞세우고 연인원 약 4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조선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군사들의 극심한 수탈과 착취는 조선 민중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으며, 명군(明軍)은 군 작전권을 움켜 쥔 채 방어적인 전투를 치르는 데만 급급했다. 
7년 간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고, 황실의 사치와 낭비로 국가 재정까지 어려움에 빠진 명나라는 결국 여진족에게 왕조를 빼앗기는 운명을 맞는다.
 
■과욕과 자만으로 몰락한 청(淸)왕조
19세기 말 개화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예속화 정책’을 펴며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강화해 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식민적 지배와 관리의 압제에 시달려온 농민들이 ‘동학농민봉기’를 일으키자 청나라는 일본보다 먼저 조선을 장악할 욕심에 조선 파병을 결정한다.
 
1894년 청은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한 뒤 출병을 일본측에 통지했으며, 결국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일본과 청나라간의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서태후의 통치 아래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청나라는 결국 일본에게 패하게 되고, 자신들의 실력을 과신하고 한반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한 결과 국제사회에서 약점이 노출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이루어졌으며, 청조가 붕괴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고립을 자초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과, 북한·소련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애초 중국은 대만을 점령한 뒤 한반도 정세에 개입하고자 했으나, 6·25의 발발로 대외정책을 수정한 것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70여만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결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로부터도 배척받는 신세가 되었다.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으로 인해 폐쇄적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은 결국, 문화대혁명과 같은 암흑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의 마지막 운명 
그렇다면 과연 중국은 언제까지 지난 역사가 들려주는 교훈을 무시하고, 불행의 씨를 키워갈 것인가? 언제까지 과욕과 자만이 불러온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중국은 과연 미국에 견줄수 있는 강대국으로 떠오를까?
 
천지공사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신 상제님 태모님 말씀으로 그 해답을 살펴보자.
 
“난의 시작은 삼팔선에 있으나 큰 전쟁은 중국에서 일어나리니 중국은 세계의 오고 가는 발길에 채여 녹으리라."(상제님 말씀, 道典 5:415:4)
 
“내가 거처하는 곳이 천하의 대중화가 되나니 청나라는 장차 여러 나라로 나뉠 것이니라.” (상제님 말씀, 5:325:14)

 
중국은 상씨름 대전쟁을 치르면서 녹아버리고, 유물론에 입각해 신명을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 병겁개벽 3년 동안 인구가 대폭 감소하고, 극소수가 살아남아도 개벽 후에는 그나마 소수민족 단위로 나라가 쪽쪽이 갈라지고 만다. 사실상 중국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참고자료 : 김하중, 『떠오르는 용 중국』, 비전과리더십, 200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