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부터 유행, 1918년 5000만명 목숨 앗아간 스페인독감과 유전자 흡사 인체 통한 감염 땐 급속 확산, WTO 등 최소 수백만 희생 경고···각국 약품확보 초비상 | |||||||||||||||
유엔의 인플루엔자 담당 조정관으로 임명된 세계보건기구(WHO)의 데이비드 나바로 박사는 지난 9월 29일 지구촌을 향해 충격적인 경고를 했다. 그는 “인류가 조류독감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500만명 내지 1억5000만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며 “앞으로 수개월간 우리의 준비 여하에 따라 희생자가 1억5000만명이 될지 500만명이 될지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WHO는 나바로 박사의 발언이 전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자 예상 사망자 수를 200만~740만명으로 낮추었지만 희생자가 수백만 명이 될지 수천만 명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WHO가 수정한 수치를 기준으로 해도 조류독감 대유행시 전 세계적으로 5억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600만~2800만명이 입원한다.
미국 연구팀들이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와 ‘네이처’ 최근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은 이같은 재앙 예고가 분명한 과학적 근거가 있음을 입증했다. 연구팀들은 1918년 전 세계적으로 4000만~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 바이러스(H1N1)의 유전자를 완전 해독한 결과 이 바이러스가 아미노산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재 아시아에서 유행하는 조류독감 바이러스(H5N1)와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스페인독감도 현 조류독감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조류독감이었으나 후에 인체간(間) 감염을 일으키는 살인독감으로 변이됐다고 밝혔다. 아시아 조류독감은 아직 인체간 감염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 인체간 감염이 가능한 바이러스의 변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생체분자학자 니돔 교수는 조류독감 H5N1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통해 2가지 소그룹으로 분리된 것을 확인했다며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변이를 일으키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2003년부터 아시아 지역에 번지기 시작한 조류독감은 지금까지 모두 4개 나라에서 6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난 9월 현재 WHO가 공식 인정한 각국별 사망자 수는 베트남 41명, 태국 12명, 캄보디아 4명, 인도네시아 3명이다. 단순 사망치만을 보면 조류독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의 변이에 따른 폭발적인 확산을 예상하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빌 프리스트 미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바이러스들이 끊임없이 변이되고 있어 이를 일거에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 일단 질병이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면 글로벌체제가 형성된 지구촌 경제부터 먼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조류독감 확산 추세는 이미 세계화 양상을 띠고 있다. 동남아 조류독감은 중국 티베트와 몽골, 카자흐스탄을 거쳐 이미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확산됐고, 유럽 일부 지역에도 발병이 확인됐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인 H5N1이 시베리아를 출발한 철새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가까운 시일 내에 카스피해와 흑해 등으로 번져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FAO는 철새들의 이동경로가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우크라이나를 지나고 있다며 일부 지중해 국가들도 조류독감 발병 위험지역으로 분류했다.
조류독감은 치사율도 가공할 만하다. 태국은 17명 발병자 중 12명이 목숨을 잃었고 베트남은 91명이 발병해 절반 가까운 43명이 사망했다. 캄보디아는 발병자 4명이 모두 숨졌다. 대재앙의 그림자가 다가오자 각국은 방역 비상체제에 들어가고 국제사회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의회에서 이미 조류독감 백신 생산 등을 위해 39억달러의 예산안을 통과시킨 미국은 비상시 군동원 계획까지 나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지난 10월 4일 특정지역에 조류독감이 발생하면 지방정부가 이를 통제할 수 없다며 자신에게 군소집권을 부여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군대를 동원한 강제 검역과 발병지역에 대한 전면 봉쇄를 연상케 하는 초강경책이다. 국방부 일각과 학계에서 과잉대응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미 정부가 이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각국은 조류독감 전염 차단에 주력하면서 백신 및 항(抗)바이러스 약품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수도 자카르타와 당게랑주를 조류독감 비상구역으로 선포하고 전문 치료병원을 지정하는 등 초비상이 걸렸다. 말레이시아 또한 국경감시를 강화하고 가금류 밀수업자를 엄벌하는 ‘조류독감 비상대책’을 발표했고, 싱가포르와 태국은 비상대책반을 설치했다. 베트남은 전국적인 백신 투여작업과 가금류 농장 일제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공동대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유엔은 9월 29일 인플루엔자 담당 조정관을 임명하고 조류독감의 변이에 의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변종 독감이 유행할 가능성에 대한 유엔 차원의 대처 노력에 착수했다. 호주 정부는 이달 말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참가하는 조류독감대책회의를 준비 중이다. 호주 브리스베인에서 10월 31일부터 이틀간 열릴 이 회담에 역내 21개국이 참가할 전망이다. 조류독감에 대한 아태경제협력체(APEC) 국가들 간 공동 전략을 개발하고 조류독감 대책 청사진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회의 주목적이다. 미국은 리빗 미 보건장관을 조류독감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높은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파견, 세계적인 조류독감 감시체제 마련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호주는 조류독감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전문가팀을 파견, 이웃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WHO가 조류독감으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아직까지 사람과 사람 간에 쉽게 감염된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 말이다. ‘아직까지’라는 WHO의 언급이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여시동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sdye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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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간조선(2005.10.17. 18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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