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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한민족을 지켜온 정신, 낭가(郞家)

by 바로요거 2007. 11. 9.

 


 얼마 전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한·중·일 청소년 의식조사 결과,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나면 앞장서서 싸우겠다는 청소년이 10명당 1명밖에 안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일본의 4분의 1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라야 어떻게 되든 내 살길을 먼저 찾겠다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청소년들인 것이다. 갈수록 희박해져 가는 국가관.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려 말 행촌 이암 선생이 쓴 <단군세기> 서문에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으리요.”라는 말씀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탓이고, 이는 또한 잘못된 역사교육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은 본래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그 옛날 인류의 시원문명을 열고, 동방문명의 종주국으로서 동북아 대륙을 누비던 우리가 아니던가. 지금은 비록 협소한 한반도에서 살고 있어 의식마저도 위축되었지만 수천 년 세월 동안 수많은 전쟁과 외침 속에서도 영토와 민족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한민족의 정신과 저력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 저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낭가의 뿌리와 맥
 한민족의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역동하는 우리 역사의 중심에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위기의 순간마다 민족을 구원했던 알캥이 정신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낭가(郎家)의 역사 창조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 땅에 광명 세상을 열고자 했던, 우리 민족 본래의 이상을 역사속에 실현하고자 했던 낭가(郎家) 정신이 한민족사의 심장 속에서 언제나 고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낭가란 무엇인가? 이는 우리 역사의 뿌리인 환국시대로부터 시작된 한민족 고유의 선맥(仙脈)이며 선문도량(仙門道場)이라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낭가의 상무정신이 인류의 뿌리종교인 신교의 삼신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설하였다.
 
 오늘날 결혼하는 남자를 ‘신랑(新郞)’이라 부르는데, ‘랑(郞)’이란 본래 지금처럼 일반 사내를 일컫는 말이 아니었다. 『환단고기』에는 ‘삼랑(三郞)’이란 본래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三神護守之官)’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삼신(三神)의 가르침, 즉 신교(神敎)로써 백성을 교화하여 다스리던 배달환웅 때부터의 진리수호자들로서, 삼신하느님과 민족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인적 영달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천지의 도를 닦으며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을 천업(天業)으로 삼은 도꾼(道軍)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들을 선가(仙家)나 도가(仙家)라 부르지 않고 낭가(郎家)라 불러온 이유가 여기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살신하여 나라를 지킨 민족의 수호자들이며, 또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앞장섰던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다.
 
 흔히 ‘낭가’라 하면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낭가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6000여 년 전 환국시대 말, 배달환웅과 함께 동방문명 개척의 선구자가 된 3000 제세핵랑(濟世核郞)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배달환웅께서 신시(神市)를 여실 때의 개국이념은 일신강충(一神降衷), 성통광명(性通光明),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하나님이 참 마음을 내려주셨으니, 너의 본성이 광명을 통하게 하고, 삼신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여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이는 인류의 시원문명을 열었던 우리 민족에게 본래 주어진 지상천명이며, 또한 장차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배달시대로부터 비롯된 이 낭가정신은 근대까지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배달국 이후 단군조선의 13세 흘달단군은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게 했는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했다. 이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地花,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天地花郞)이라고도 불렀다. 신라의 ‘화랑’도 단군조선의 이 제도를 되살린 것이라 여겨진다.
 
 이후 고구려의 조의선인(?衣仙人), 신라의 화랑(花郞), 백제의 무절(武節)에 이어 고려 중기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그러다 ‘묘청의 난’ 때 국풍파(國風派)가 유학파(儒學波)에 패한 후로 사대주의의 소한사관에 혼을 빼앗기면서 낭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만은 우리 문화의 원형으로 깊이 뿌리내려 조선시대의 ‘선비정신’, ‘동학운동’, 구한말 ‘항일독립운동’과 ‘3.1운동’ 등 민족의 위기 때마다 낭가의 의기를 떨쳐 그 맥을 이어왔다.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구한 낭가
 최근 SBS드라마 <연개소문>에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다.
 
 고구려에서 조의선인이 제도화된 것은 9대 고국천열제(재위 179∼197)때다. 당시 국상(國相)으로 등용된 을파소는 나이 어린 영명한 준재들을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이 가운데 교화를 주관한 자를 ‘참전(參佺)’이라 하고,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섬기는 일을 맡겼다. 한편 무예를 관장하는 자는 조의라 하여 국가의 법을 잘 지키고, 나라의 공적인 일을 위해서는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을파소가 조의선인에게 말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시(神市) 시절에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교화할 때(理化之世)는,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으로 인해 날로 지극한 치정의 시대에 이르렀느니라. 이것이 만세에 걸쳐 가히 바꿀 수 없는 치정의 표준이 된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참전들에게는 그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어(參佺有戒) 상제님의 성신(聖神)을 받아 백성을 교화시키고(聽神以化衆), 한맹(寒盟)을 맞이함에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행해 공덕을 완수하도록 하느니라. 모두가 자발적으로 심법을 바르게 갖고 일심을 다해 앞으로 이루어야 할 공덕에 대비하도록 하여라.”
 
 조의선인은 단순히 무예만을 닦아서 나라를 구하려했던 조직이 아니었다. 그들은 심법을 닦아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삼신 상제님의 뜻을 지상에 구현하는 것을 궁극 목표로 삼았다. 오늘의 군인정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우리의 진정한 민족정신이며, 역사를 이어온 혼인 것이다.
 
 조의선인은 선배 또는 선비로도 불렸는데,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 ‘선배’라는 것은 고구려의 10월 제전 때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닦았다1).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 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머리를 박박 깎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이들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단재 선생은 선배의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講]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一身)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困苦]을 사양치 않았다.”
 
 이들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나라에 뽑혀 국통수호의 최일선에 섰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고구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모두 조의선인들이었다. 이를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선비란 말이 사대부 유학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변질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 이후 신라의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겠다 하고 덕을 행하는 자를 모아 화랑을 조직하고 그 우두머리를 ‘국선(國仙)’이라 하였다.
 
 김유신, 사다함, 김흠운, 관창 등 신라의 현자(賢者)와 충신, 명장(名將)과 용맹스런 군사들이 모두 화랑출신이다. 이들의 무용담은 신라인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비록 망국통일이긴 하지만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라 이후로도 화랑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이지백에 의하여 ‘화랑을 중흥시키자’는 논쟁이 있었으며, 고려 곡종(穀宗)은 “국선(國仙)이 묻혀 있는데, 다시 열어라”는 조서(詔書)를 내리기도 했다.
 
 고려 때, 몽고에 항복을 거부하며 끝까지 항쟁했던 삼별초(三別抄)는 낭가정신의 표상이다. 삼별초의 무인정신 또한 민족수호의식에서 나온 것이니 두고두고 한민족의 사표가 되어왔던 것이 아닌가?
 
 
 다시 일으켜야 할 한민족의 혼
 그러나 이러한 낭가정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에 이어 유교의 사대주의사상으로 그 명맥을 잃어갔다. 중화사상은 우리의 뿌리 역사를 은폐시키고 왜곡시키면서 낭가가 설자리를 잃게 했다. 그중 치명적인 사건은 민족의 뿌리 역사를 기록하고 정통사상을 바탕으로 쓰인 민족사서들이 국가의 정책으로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세조실록』에 보면 “안함로, 원동중이 쓴 『삼성기』(三聖記)란 책을 갖고 있는 이는 나라에 바치라. 그 사람에게는 벼슬과 상을 내리리라.”는 교지를 전국에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 『삼성기』는 나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20세기 초 계연수에 의해 편찬된 『환단고기』에 의해서 비로소 다시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1000여년에 걸친 외래종교의 억압 속에서 민족사관은 좁은 반도 중심으로 축소되어, 지금은 민족을 말하고 민족의 정통 사상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국수주의란 말을 듣는 기이한 세상이 되었다.
 
 중국 한족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이가 낭가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도 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족의 역사와 혼을 잃고 역사교육의 부재로 민족의 정체성마저 상실해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킬 이는 누구인가? 우리 속에 잠재된 낭가정신을 되살려 우리 역사를 회복하고, 광명개천의 천명을 오늘에 다시 실현할 이는 누구인가?
 
 ... 6000년 전 배달국을 열고 광명세상을 열고자 했던 제세핵랑군의 천명이 개벽과 더불어 이 땅 이 역사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그것은 단순히 한 민족, 한 나라에 그치는 일이 아닐 것이요, 전 인류를 광명한 세상, 상생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천지의 대업이다.
 
 이제 대한 사람이면 누구나 대한의 깃발을 들고 외쳐야 한다. 우주의 가을을 여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이야말로 천지에서 대한의 정신을 깨우는 천고(天鼓)2)를 높이 울리는 때다.
 
 
천고여! 천고여!
 너는 울고 나는 춤을 춰 우리 동포들을 일으키자.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신교 문화를 다시금 부활시키고
 대한의 대광명을 활짝 열어 한민족의 사명을 완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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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의선인(혹은 조의)을 단순히 하나의 관직으로만 보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단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학자들 간에 선인(先人, 仙人)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사정병(士正兵)’이라 하고, 『삼국사기』에‘선비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한 것을 보아도 선인이‘선배’라 부르던 무사단(武士團)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2) ‘천고(天鼓)’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북경에서 1921년 1월부터 중국인과 한국인을 상대로 일본 침략의 부당함과 역사 왜곡을 알리기 위해 홀로 발행한 잡지의 이름이다. <천고>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텬고여, 텬고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이 땅에 가득 찬) 더러움과 비린내(역겨움)를 씻어다오. … 우리 동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보자꾸나. 우리 산하를 돌려다오. 천고여, 분투하라. 노력하라. 너의 직분을 잊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