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 있는가?
캔 윌버의 세가지 눈
수행을 통해 진정한 눈을 뜰 �, 세상은 당신 앞에 그참오습을 드러낸다 세상을 보는 진안(眞眼), 관조의 눈을 뜨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당신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만일 이러한 질문이 당신에게 주어지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혹시 단순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눈 또는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닌가?
켄 윌버(Ken Wilber,1949~)는 ‘본다’라는 개념과 ‘눈’이라는 개념의 확장적 재해석을 통해 이 세상에 다가서는 다양한 접근방법과 통찰력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미세한 사물에서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적 영성에 이르는 영역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세 가지의 눈을 제시한다.
그 세 가지 눈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감각이나 과학기술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감각의 눈’, 이성과 논리로 대상을 인식하는 ‘이성의 눈’, 수행이나 명상으로 종교적인 영역을 체험하는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특히 그는 현대인들이 굳게 닫고 있는 ‘관조의 눈’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관조의 눈이 절대적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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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가 관조의 눈을 강조하며 영적인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기존의 철학자나 사상가와는 달리 수행과 명상을 통해 관조의 눈을 열고 직접 그 세계에 발을 디딘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한두 시간 정도의 수행을 한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명상과 철학을 병행하며 종교인의 심성으로 철학하는 사상가 윌버. 그가 제시한 세 가지의 눈은 무엇일까?
앎의 세 가지 눈-감각의 눈, 이성의 눈, 관조의 눈
윌버가 언급한 세 가지의 눈 즉 감각, 이성, 관조의 눈은 사실 서구 교회의 신비가이자 철학가로 알려진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e, 1221~1274)에 의해 설정된 개념이다. 그렇지만 윌버의 저서에 사용되면서 구체적이면서도 새로운 개념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감각의 눈(육안肉眼, the eye of flesh)이다. 감각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에 한정이 된다. 주로 과학적인 도구와 오감(五感)을 통해 체험적으로 증명되는 것들이 이 분야에 속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갈릴레오나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은 감각의 눈의 발전을 위해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감각의 눈은 과학자들의 활약이 역사 속에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과학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그 시야가 확장되었다. 일례로 최근에 자주 언급되는 나노 과학(Nano Science)은 그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생명과학과 정보통신분야 등에 응용되어 그 활용폭을 더욱 넓혀주었으며 또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천체망원경과 우주선 같은 것들도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무한히 넓은 우주세계를 물질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해주므로 감각의 눈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의 눈은 그 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오히려 맹점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20세기에 들어 두드러지게 만연되고 있는 과학지상주의다. 과학은 맹목적인 미신을 타파하고 경험적으로 체득된 우주만물의 체계를 세우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인간의 의식 내면에 성성하게 살아있어야 할 정신을 도려내었다. 윌버는 현대인들이 감각의 눈만을 너무 비대하게 키운 결과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명제만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오만한 태도까지 보인다며 이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즉 실체는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는 정신세계나 영적 분야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에 대해 배타적인 반응을 보이는 현대인들의 잘못된 의식구조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시속에 ‘개 눈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 웃자고 나온 얘기일 수도 있으나 개는 오히려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인지하여 컹컹 짖기도 하는데, 인간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뭐가 뭔지 모르니 한심해서 나온 말이 아닐까? 지진이 나기 전에 개미와 뱀은 먼저 몸을 피하고 해일이 나기 전에 새들은 무리 전체가 이동한다고 한다. 오감에 대한 체험에 너무나 자신감을 갖고 있는 인간. 그러나 그들이 가진 감각의 눈은 어떤 경우에는 동물보다 못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감각의 눈에만 의존하여 과학지상주의가 만연하면 할수록 오히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누릴 수 있는 영적인 부분이나 정신세계를 점점 상실해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의 눈에 이어 제시된 개념은 바로 이성의 눈(심안心眼, the eye of reason)이다. 초기에 이성의 눈은 감각의 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조의 눈 등과 혼합되어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일례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예를 살펴보자. 과학적인 논리나 경험으로 보아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1)
그러나 모든 것을 지구 중심으로 생각하던 근대 이전의 기독교인들에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발상은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였다. 이들은 이성의 눈으로 판단되어야 할 대상에 왜곡된 관조의 눈을 들이대어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2)
그런 의미에서 칸트 같은 사람은 이성의 눈을 위해 이바지한 사람으로 윌버는 평가하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의 눈은 본질상 영성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해 냈는데, 이는 곧 철학은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과 고작해야 신을 도덕적으로 가정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중세 때까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평가절하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칸트와 같은 사람이 이성의 눈을 밝히면서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한정짓고 철학의 영역을 독립시킴으로써 논리와 철학의 눈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배우는 언어나 수학, 철학, 심리학 등 논리와 이성적 사고를 통해 해결되는 제 분야는 모두 이성의 눈에 의해 습득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공식이 칠판에 적혀 있다고 가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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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간에 적분을 배운 사람이라면 주어진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위의 식은 단순한 알파벳과 기호의 나열일 뿐이다. 또는 외국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이에게 러시아어 책이 주어진다면 그 책은 의미를 갖겠지만 러시아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그 책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종이조각 모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눈은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분야에 속하지만 충분히 증명해내고 습득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감각의 눈과 함께 이성의 눈이 밝아질수록 눈에 드러나는 세계는 더욱 더 넓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계의 전부일까? 지금까지 인류는 고작해야 이 두 가지 눈에 의해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착각하였기에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이 세계의 진실은 그 두 가지의 눈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그 해답은 관조의 눈에 달렸다. 감각의 눈, 이성의 눈에 이어 마지막으로 관조의 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관조의 눈(영안靈眼, the eye of contemplation)은 무엇인가? 관조의 눈으로 인식되는 세계야말로 역설의 세계다. 사람들은 관조의 눈을 뜨고 그 세계를 보고 싶어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물론 감각의 눈만을 크게 키워온 현대인들이 할 수 있는 변명도 없지는 않다. 그들은 관조의 눈을 뜨고 그 세계를 체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3)
영성에 대한 믿음의 삶이 현실 생활 속에서 공존하던 시절이 인류에게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감각의 눈, 이성의 눈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아지면서 관조의 눈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 세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관조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신비’ 아니면 ‘의심’으로 말이다. 그러나 관조의 눈을 뜬 사람들은 그 세계의 절대성을 확신한다. 윌버는 관조의 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의 본질은 오로지 관조의 눈과 이것에 의해 직접적으로 밝혀진 대상물들, 즉 그것의 초월성, 그것의 영적 자료, 영적 세계에 대한 확고한 사실들로만 밝혀질 수 있다. … 또한 가장 심층적이며 가장 신비로운 절대/상대 문제는 오직 관조의 눈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 그러므로 진정한 해답은 감각 영역이나 지적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 영역에 놓여 있다.
초월 영역은 오직 ‘ 명상’ 실천에 몰두한 후에만 스스로 드러난다.”
요컨대 이 세상 본질에 대한 진정한 답은 관조의 눈을 떴을 때만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 관조의 눈을 뜨는 방법은 바로 ‘명상’이라는 것이다. 명상이나 수행 등 동양의 정신수련법에 대한 윌버의 애착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는 대학시절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그 사상에 매료된 후 동양의 사상서와 영적 문헌들을 마른 논이 물 흡수하듯 무서운 속도로 읽어나갔다. 동서양의 영적 문헌과 심리학, 철학, 사상서를 방대하게 섭렵한 그는 동양의 철인(哲人)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행과 참선을 통해 그의 의식세계를 넓혀나갔다.
깨달음의 영역은 감각의 눈이나 이성의 눈을 통해 지각될 수 없는 영역이다. 삶을 살아가며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방법론을 모른 채 단순히 머리로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윌버는 그들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나는 영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이미 그런 경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관념적 증명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초월 영역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관조의 실천을 수행해야 한다. 일례로 좌선, 진언(mantra), 자파(japa), 내면의 기도 등을 실천해야 한다.”
윌버의 지적은 수행의 삶과 소원해진 현대인들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웰빙(well-being)의 삶과 스트레스의 해소 등을 목적으로 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행의 본질적인 목적은 영성 체험이다. 초월 영역의 체험이다.
‘닫고 있었던 관조의 눈을 떠라.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라.영성을 키워 이 세상의 본질을 직시하라.’
윌버가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 간곡하게 들리기도 한다. 또한 외짝 눈으로 세상의 전부를 보는 것처럼 행사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준엄한 비판이기도 하다.
통합과 창조의 사상가 - 켄 윌버 Ken Wilber (1949~ )
초개인 심리학 분야에서 데카르트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에 비유되는 대사상가로서, 1973년 23살의 나이로 획기적인 처녀작을 발표하고 이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는 매월 일정기간 수련원에 들어가 수련을 하는 것 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장시간의 명상과 참선수련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심화시켰다.
5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19권의 저서와 5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전세계의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저서들은 동서고금의 철학과 종교, 심리학, 인류학, 과학, 신물리학, 신과학, 사회학,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참고사이트 wilber.shambhala.com>
1949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출생, 듀크대학시절 노자의 『도덕경』을 읽으면서 삶의 대전환을 맞이함
1973년(23세) 『의식의 스펙트럼』을 3개월 동안 집필, 초개인심리학에 기틀을 제공하고 패러다임을 크게 변화시킴
1981년 첫 아내와 이혼
1983년 시인 테리 킬람과 재혼, 1989년 아내와 사별
1991년 『우아함과 용기』(Grace and Grit)
1995년 『성·생태·영성』(Sex, Ecology, Spirituality) 온우주론 삼부작 중 제1부에 해당함
1996년 『모든 것의 역사』(A Brief History of Everything) 자신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윌버사상의 초보자에게 적합한 책
1997년 『정신의 눈』(Eye of Spirit) 『대화 속의 켄 윌버』(Ken Wilber in Dialogue) 전세계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벌인 학술대회를 정리한 책, 『켄 윌버 사상의 본질』(The Essential Ken Wilber) 윌버의 사상적 본질을 그의 여러 저서에서 발췌 수록한 책
1998년 『감각과 영혼의 만남』(The Marriage of Sense and Soul) 인류의 당면문제로 과학과 종교의 통합을 조명함
1999년 『윌버一味』(One Taste) 1997년에 쓴 일기형태의 명상록
2000년 『통합심리학』(Integral Psychology) “심리학은 그에게 천년의 빚을 지고 있다”는 평을 받음
2002년 소설 『Boomeritis: A Novel That Will Set You Free』발표
■ 한글 번역판 ■
2000년 『감각과 영혼의 만남』 (범양사출판부)
2004년 『아이 투 아이』 (대원출판 4월) , 『모든 것의 역사』 (대원출판 5월)
어떻게 적용시켜 볼 수 있을까?
이론이 체(體)에 해당한다면 그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은 용(用)이라고 하겠다. 모든 공부는 체와 용이 음양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백 마디 말과 글도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윌버의 세 가지 눈 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 여기서는 윌버가 본서에서 제시한 스페인의 화가 고야의 인상깊은 그림 《1808년 5월 3일》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림 <1808년 5월 3일> 1814~15 캔버스에 유채266 34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이 그림은 어떤 눈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우선 감각의 눈을 갖고 보면 화폭의 재질, 물감의 종류, 제작연대, 사용된 색의 채도 등, 대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감각의 눈으로 접근할 때와는 달리 이성의 눈으로 접근하면 그림 안에 반영된 내용의 역사적 배경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실제로 이 그림은 나폴레옹 군대에 항거하던 에스파냐인들이 무차별로 학살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무능력한 에스파냐 왕실과 부패한 기독교, 엎친데 덮친격으로 유럽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했던 나폴레옹 군대까지 등장하자 에스파냐인들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그림을 보면 그 느낌은 한결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관조의 눈으로 보는 것은 어떠한가? 과학적, 역사적 배경을 넘어 인간의 본질과 지나온 역사과정에 대한 명상을 깊이 해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은 분명 달리 보일 것이다. 그림 속에 보이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뇌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득 메우는 상극(相克)의 기운이 전달될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알기 위해서 세 가지 다른 눈은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심층적인 깨달음을 던지는 공안(公案)은 분명 관조의 눈에 담겨 있다.
윌버의 세 가지 눈을 적용시킬 수 있는 사례는 주변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부족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상에서 소개된 내용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현실에 투영시켜 보면 윌버의 논지가 더 쉽게 와 닿을 것이다. 깊은 안목과 사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하루의 밤낮이 바뀌는 문제와, 시간이 지나며 계절이 바뀌는 일상적인 문제도 분명히 다르게 보인다. 진리는 항상 주변에 있지만 어떤 눈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마음을 열고, 영성을 틔워서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자.
정리하며
의식연구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켄 윌버. 그가 제시한 감각의 눈, 이성의 눈, 관조의 눈은 지금껏 사물을 바라보던 혼재된 시각들을 명확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또한 그걸 넘어서서 인간의 영성에 관련된 ‘관조의 눈’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현대인들의 닫힌 세계를 새롭게 밝힐 수 있는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사상가이기 이전에 순수한 구도자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윌버.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는 많은 시사성을 담고 있다. 현대인들은 고도로 발전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갈등한다. 신은 있는가? 영성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인간은 왜 전쟁의 역사 속에 살아야 하는가?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등. 무수한 삶의 담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물음표만을 남기며 삶의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
윌버의 세 가지 눈의 이론은 결국 그가 원하는 통합 패러다임(Integral Paradigm)의 추구와 맞물린다. 그는 온우주(Kosmos)4)에 대한 관심의 확장을 강조하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에고로부터 가족으로, 또한 지역사회로 관심과 공감을 확장시킨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과 공감을 부족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인류로, 그리고 인류에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로 확장하는 것은 더 폭넓은 포옹 속에서 더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 속의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은 결국 세계를 포옹하는 과정, 모두가 하나되어 동인(同人)의 심법으로 대동세계를 건설하는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 열어야 할 것이 바로 세계의 본질을 보는 눈, 인간 내면의 영성을 회복하는 관조의 눈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어 속에 스며든 그의 본 뜻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느껴보길 바라며 윌버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말을 전한다.
“관조의 눈을 떠보라. 그러면 그 해답은 마치 시원한 봄날 이른 아침 수정처럼 맑은 연못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명백하고 완벽하고 틀림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해답이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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