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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구하는(求法) 도(道)의 세계-달마와 혜가

by 바로요거 2007. 10. 17.
[내 인생을 바꾼 중국 禪 기행 | 달마대사(3)]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대는 누구인가
위클리조선 | 기사입력 2007-07-10 14:37
혜가가 팔 하나와 바꾼 달마의 가르침 “부처님의 심인은 남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와 같은 마음을 주고받았을 달마동굴을 찾아 나를 묻다
달마대사가 9년 면벽수도한 동굴 입구.

소림사 경내에는 달마와 혜가를 기리는 건물이 하나 있다. 입설정(立雪亭)이 바로 그것이다. 달마의 제자가 되기 위해 혜가가 눈 위에서 기다렸다는 뜻의 건물 이름이다. 실제로 달마와 혜가가 만난 장소는 아니지만 그들의 선화(禪話)를 잊지 말자고 지은 건물인 것이다.

입설정 안에는 설인심주(雪印心珠)라는 편액 아래 달마 좌상을 중심으로 혜가,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의 입상이 봉안돼 있다. 그래도 입설정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달마와 혜가다. 설인심주의 뜻처럼 달마 앞에서 눈 위에 자신의 참마음을 새겼던 사람이 혜가였으니까.

달마 좌상에 입힌 붉은 옷이 몹시 강렬하다. 혜가가 자신의 팔을 잘랐을 때 흰 눈을 적셨던 그 핏빛 같다. 구법의지(求法意志)가 이쯤 돼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진리를 구하는 구법의 세계에서 무임승차란 없는 법이다.

영혼을 적시는 것은 진실한 마음뿐이리라. 벽만 바라보고 있다 하여 벽관(壁觀) 바라문으로 불렸던 달마 역시 자신의 팔 하나를 버린 혜가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잠시 그때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가 보자.

쑹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향산사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혜가는 달마 동굴 앞에 섰고, 달마는 그런 혜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달마는 동굴 안에서 등을 돌린 채 벽을 바라보고 참선만 할 뿐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3일째 되는 날에도 눈이 내렸다. 어느새 눈은 혜가의 발목을 덮고 있었다. 눈이 온다고 해서 물러설 혜가가 아니었다. 3일째 새벽 무렵이 되자 눈은 혜가의 무릎을 덮었다. 이윽고 달마가 동굴을 나와 물었다.

“눈 속에 서서 그대는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감로(甘露)의 문(門)을 여시어 여러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혜가가 감로의 문을 열어달라고 한 것은 제자가 되어 달마의 법문을 듣겠다는 간청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달마는 혜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처님의 위 없는 도(道)는 여러 겁을 부지런히 닦았더라도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해야 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하거늘, 어찌 작은 공덕과 지혜와 경솔한 행동과 교만한 마음으로 참법을 바라는가. 헛수고를 할 뿐이니 물러가라.”
달마는 다른 수행자를 만났더라도 이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북위의 승려들은 불경에서 얻은 작은 공덕과 지혜, 그리고 삼보(三寶·佛法僧) 가운데 자신이 승보(僧寶)라는 교만한 마음에 빠져 경솔하게 처신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뛰어난 혜가는 그들과 달랐다. 예의 바른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의 은둔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소리를 찾아 헤매던 혜가는 고행을 해서라도 진정한 해탈을 얻으려 했다.
‘고인(古人·부처님)이 도를 구할 때는 뼈를 깨뜨려서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서 주린 이를 구하고 벼랑에서 떨어진 호랑이에게 자신을 먹히었다. 고인이 이러하였거늘 나는 어떠한가.’
혜가는 더 망설이지 않고 칼을 꺼내 자신의 팔 하나를 잘랐다. 그러고는 잘린 팔을 달마 앞에 놓았다.
이에 달마가 입을 열었다.

“부처님도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몸을 던지셨다. 그대가 팔을 하나 끊으면서 법을 구하니 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비로소 달마는 혜가에게 해탈의 길을 알려주었다.
“부처님의 심인은 남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의 마음을 밖에서 찾지 말고 눈을 돌려 자기 영혼을 응시하라는, 선(禪)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달마가 마치 내면이 허허로운 나를 위해 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러니 달마의 가르침은 황량해진 영혼의 뜰에 내리는 단비다.

소림사 입설정을 나와 달마동굴로 가는 산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인적이 뜸해진다. 향객(香客·참배객)은 소림사까지만 왔다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초조암(初祖庵)을 지나서부터는 돌계단이 이어지고 있다. 비구니암자인 초조암에도 향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법당에는 초조 달마가 조금은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암자 마당에는 측백나무 고목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혜능이 달마동굴을 찾아왔다가 심었다는 측백나무가 법당의 달마를 천년을 하루같이 시봉하고 있을 뿐이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도(道)와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달마가 남긴 ‘이입사행(二入四行)’을 사색해 본다. 이를 우리말로 푼다면 ‘두 가지 입장과 네 가지 실천’ 정도일 것이다. 달마가 수행자를 위해 남긴 간명한 법문이다.

입설정 안의 달마상


‘도에 이르는 길은 많지만 요약하면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는 원리(原理)로 들어가는 방법이고, 둘째는 실천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원리로 들어가는 방법은 경전을 통하여 진리를 체험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본래의 마음(眞性)이 있는데, 이것이 망상(妄想)에 가리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망상을 쉬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벽을 향해 마음을 집중시키면 자신과 타인, 범인과 성인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체험한 바를 결코 잊지 말라. 문자와 언어에 미혹되지 말라. 이와 같은 깨달음의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면, 도와 하나 되어 어떤 분별도 사라진다. 이렇게 얻어지는 적연무위(寂然無爲·해탈의 상태) 경지를 이입(理入·원리적 방법)이라 한다.’

달마의 법문이므로 어마어마하게 심오할 것 같으나 사실은 이렇게 쉽고 명쾌하다. 해탈이란 번뇌·망상을 버린 경지이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깨달음을 놓치지 않는다면 성인·범부 할 것 없이 인간은 누구나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으로 제시한 네 가지 실천항목도 달마의 언어일까 의심될 정도로 소박하기 짝이 없다. ‘실천으로 들어가는 방법(行入·실천적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망을 지었으니 억울함을 참고(報怨行), 둘째는 무슨 일이든 인연으로 받아들이며(隨緣行), 셋째는 사물을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無所求行), 넷째는 진리대로 살자는(稱法行) 것이다.(하략)’

달마의 언어치고는 너무 싱겁지 않은가. 침묵의 체로 걸러진 9년 면벽의 언어라기보다는 수행자의 방에 붙여놓은 청규(淸規)나 좌우명 같다. 그러나 곰곰이 음미해 보면 나 같은 사람은 네 가지가 아니라 단 한 가지만 실천해도 번뇌·망상을 줄이고 때로는 본래의 마음을 찾아 적연(寂然)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달마는, 석가모니 부처가 과거나 미래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온전하라고 했던 것처럼 누구라도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깨어 있으라고 이 ‘이입사행’을 남겼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득 달마의 자비가 느껴지고 달마선의 본질이 무엇인지 짐작된다. 선은 지금 이 순간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처방전이지, 잡히지 않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고고한 무엇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괴롭고 고달픈데 먼 훗날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진정 살아 숨쉬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인 것이다.

달마 동굴을 오르면서 몇 번이나 쑹산의 산바람에 땀을 들였을까. 마침내 나는 달마동굴 앞에서 합장을 했다. 동굴 입구의 작은 패방에 음각된 묵현처(默玄處)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침묵이 그윽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바로 내가 대학시절부터 그리워했던 달마가 머문 9년 면벽 동굴이요, 혜가가 팔을 자른 단비(斷臂) 현장이다. 초로의 나이마저 넘어선 지금 가만히 헤아려보니 35년 만에 나는 다시 달마와 혜가를 만나고 있다. 동굴 안의 크기는 두어 평쯤 될까 싶다. 그러나 ‘눈 속의 눈’으로 본다면 좁다고 할 수만은 없다. 달마와 혜가는 이 작은 동굴에서 광대무변한 우주와 같은 마음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달마의 좌상 오른편 석벽에는 혜가의 잘린 팔이 통통하게 부조되어 있다. 팔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고 콧잔등이 찡해진다.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쉬운 말로 하자면 달마동굴에 들어온 ‘그대는 누구인가’이다. 달마를 찾아온 내가 나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뜨거운 순간이다. ▒


/ 정 찬 주 | 소설가·1952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장편소설로 ‘산은 산, 물은 물’ ‘대백제왕’, 산문집으로 ‘암자로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자기를 속이지 말라’ 등. jchanjoo@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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