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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과 이이의 우주론과 인성론 비교 정리

by 바로요거 2007. 10. 17.
이황과 이이의 우주론과 인성론 비교 정리


류 태 건*

 

Ⅰ. 서  론

본고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주자학, 신유교, Neo-Confucianism)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우주론과 인성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양론을 비교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근래에 들어 유교는 지속적으로 학문적, 나아가 정치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80년대에는 주로 아시아의 경제발전과 관련하여, 여기에 덧붙혀 90년대 후반부터는 이 지역의 정치발전과 관련하여 유교의 역할에 대한 '기능주의'적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며, 급기야 유교는 소위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중심주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유교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은 많은 경우 유교의 특정 가치나 개념을 선택적으로 강조하여 이헌령 비헌령 식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음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우리가 본 주제를 새삼 검토해 보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유교는 공자 맹자의 고전유교로부터 송대(宋代)의 성리학으로 발전되어, 바로 이 성리학의 형태로 후대의 사상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또 사상사에서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고전유교가 성리학의 바탕임에는 틀림없으나, 유교의 오늘날에의 영향을 살피려는 어떠한 시도도 성리학에 나아가지 않고 고전유교에 머물러서는 적실성이 없다. 사실상 고전유교의 모든 가치나 개념들은 성리학의 이론적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합리화되고 있다. 본고의 서술 대상은 이러한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우주 그리고 소우주로서의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전제로 정치, 경제, 사회 등 기타 주제를 종합적으로 해명하고 있는 하나의 연역적 사상체계이다. 이이의 표현을 빌면,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미루어 나아가는 곳"이다. 따라서 유교의 특정 가치나 개념은 1차적으로 이 형이상학적 이론과의 관련 하에서 그 의의 -합리성, 타당성, 중요성- 가 정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유교의 특정 가치나 개념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한 선행조건으로서, 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이론 자체를 검토 서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성리학은 중국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크게 주리학파와 주기학파로 분리되어 발전하였다. 그 결과 한국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이론틀은 중국 성리학(주자학)의 그것을 포괄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성리학의 양대 학파의 개조인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의 형이상학적 입장은 나아가 성리학 일반의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황과 이이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비교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의의를 가진다.
우리의 서술은 이 주제와 관련된 1, 2차적 문헌자료의 분석을 통해 수행될 것이나, 다만 한가지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사실상 이황과 이이의 우주론과 인성론 그리고 수양론은 지금까지 학계에서 너무나 많이 연구되어 진부한 감마저 드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어떤 독창적인 시각이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황과 이이의 관련 주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우선 우리 자신의 이해를 명료히 하고, 이를 우리 나름대로의 서술 논리에 따라 명료히 진술하고자 할 따름이다.  

Ⅱ. 우주론

고전유교 이래 모든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인간은 대우주-소우주의 관계로 비춰지고 있다. 우리는 성리학의 소우주 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그 대우주 이론을 먼저 검토하기로 한다. 이 이론은 리기론이 대변하고 있으므로, 이황과 이이의 리기론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의 리기론은 일정 부분 서로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는 그들 이론의 토대가 되고 있는 주희의 리기론의 모순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황과 이이의 리기론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주희의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주희의 리기론


1) 주희의 리기론의 개요


그에 앞선 성리학자 정호(程顥 1032-1085, 호: 명도明道)와 정이(程  1033-1108, 호: 이천伊川) 형제의 입장에 따라, 주희(朱熹 1130-1200, 호: 회암晦庵)는 우주 자연은 리와 기라는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실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우주에는 리도 있고 기도 있다. 리란 형이상의 도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란 형이하의 그릇[器]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具]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은 생성될 때에 반드시 리를 품수한 연후에야 본성[性]을 가지며, 기를 품수한 연후에야 형태[形]를 갖는다."

기는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물질적 재료이며 리는 만물이 생성되는 원리이다. 만물이 생성되면, 기는 그들 각자의 물질적 형체를 이루고 리는 그들의 본성이 된다.

"기는 그 작용을 위하여 리에 의존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기가 모이고 흩어지고 할 때에 리도 역시 거기에 있다. 대개 기는 응결하여 사물을 만들 수 있는데 반하여 리는 감정도 없고 사려도 없고 조작(造作)도 없다. 단지 기가 모여 있는 곳이면 리가 그 속에 있을 뿐이다...리는 단지 깨끗하고 텅 빈 넓은 세계로서 형태나 흔적도 없고 조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는 한데 엉겨모여 사물을 생성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기가 있으면 리도 곧 그 가운데에 있다."
리는 형태나 흔적도 없이 텅 빈 비물질적인 것이고, 감정도 사려도 없이 비정신적인 것이며, 능동적인 조작력도 없는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추상적 원리이다. 주희는 리를 좀 더 분석적으로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 그렇게 되는 까닭)와 소당연지측(所當然之則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까닭)으로 정의한다. 달리 말해 리는 존재적, 당위적 법칙이다. 기는 물질적 재료로서 자체의 능동적 작용으로 응결되거나 분산되기도 하면서 물질계를 형성하고 변화시킨다. 그러나 기의 작용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 즉 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현상적 차원에서 리와 기는 서로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된다. 그러나 이때 리와 기가 각자의 속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은 여전히 실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실체인 것이다.

"리와 기는 결단코 두 개의 어떤 것[二物]이다. 사물의 차원에서 보면 그 둘은 섞여 나누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한 곳에 있다. 그러나 그 둘은 각각 하나임을 해치지 않는다. 만약 리의 차원에서 보면 아직 사물이 없다 하더라도 사물의 리는 있다. 그러나 역시 단지 그 리만 있을 뿐 이 사물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리의 개념에 대해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주희에 앞서 정이는 "리는 하나이나,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理一分殊]"는 명제를 정립했었던 바, 이는 그후 성리학의 기본명제가 되었다. 정이의 입장을 받아들여 주희도 우주에는 단 하나의 리만 있을 뿐이며, 이 유일한 리가 삼라만상 가운데서 다양화되어 그들의 특수한 리가 된다고 간주한다. 다시말해, 각 사물의 특수한 리는 우주 전체의 보편 유일한 리의 다양한 양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보편 유일한 리는 우주의 삼라만상에 발현되었거나 잠재되어 있는 모든 리들의 총체와 같다. 주희는 이 보편 유일하고 총체적인 리를 태극이라고 부른다: "천지만물의 리를 총괄하는 것이 바로 태극이다."

태극은 우주만물의 리의 총체이다. 그러나 주희에 의하면, 또한 각각의 개별적 사물 속에도 태극이 있다.

"태극은 단지 천지 만물의 이치일 뿐이다. 천지에 대하여 말하면 천지 속에 태극이 있고, 만물에 대하여 말하면 만물 속에 각각 태극이 있다."

그렇다면, 태극이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졌단 말인가?

"본래 하나의 태극만이 있는데 이것이 만물의 각각에 품수되었다. 또 각각의 만물은 단 하나의 태극을 구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있는 달과 같다. 달은 하나뿐이지만 강과 호수에서 반사되어 가는 곳마다 보인다. 그러나 달이 나뉘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유명한 비유는 우리가 보기에 그리 적절하지 않다. 굳이 달에 비유하려면 차라리 초생달, 그믐달, 보름달 등 달 자체가 나타나 보이는 다양한 모습을 비유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에 비춰진 달은 사실상 달의 실체가 아니고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희가 말하는 만물에 구유된 태극은 태극의 실체를 말한다.
어쨋든 개개의 사물은 보편적인 태극과 그 작용인 특수한 리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개별적 사물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본체[體]이고 후자는 그 본체가 개별적인 사물에서 드러난 작용[用]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주희를 포함하여 모든 신유학자들은 우주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항상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전 유교 이래 유교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주요한 사상적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의식이 이제 주희에 의해 '리' 개념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보편 유일한 리인 태극을 특수 다양한 리로 나타나게 하는 원인은 바로 기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기의 다양성이다. 삼라만상이 구유한 기에 맑거나 흐리고 순수하거나 잡박한[淸濁粹駁] 차이가 있어, 태극의 온전한 본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통하거나 가리워지고 열려 있거나 막혀 있는[通蔽開塞]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리는 그것이 어떠한 특수한 모습으로 나타나든 우주의 통일원리이고, 기는 우주의 다양성의 요인이다. 바로 이러한 리와 이러한 기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있다.


2) 주희의 리기론의 모순


위에서 개괄적으로 소개한 주희의 리기론은 특히 우주론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아가, 소우주인 인간론에 있어서도- 이론적인 모순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성리학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한국에 양대(兩大) 성리학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모순점을 검토한 뒤 이에 대한 이황과 이이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주희의 우주론의 토대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다. 태극도설에서 주돈이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은 운동하여 양을 낳고 운동이 극에 달하면 고요에 이르고 고요함으로써 음을 낳는다".

태극도설에 따르면 우주의 시원인 태극은 자신의 운동과 고요함에 의해 양과 음을 생성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음양의 실체는 기가 분명하나 태극의 실체는 무엇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주희는 설명한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지극한 리가 있다는 것이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희의 우주론의 출발점은 이처럼 태극을 리와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요컨데 형체없는 리인 태극이 우주의 제1원인인 것이다. 이때, 태극도설의 그 다음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음 구절에서 주돈이는 "태극은 운동하여 양을 낳고 고요함으로써 음을 낳는다"고 했다.
정호와 정이 형제 이전의 유교의 우주론은 기를 우주의 유일한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고려하면 태극의 실체는 리가 아니라 당연히 기일 것이다. 이 경우, 위의 구절은 기를 실체로 하는 태극이 자신의 운동과 고요함으로써 두 가지 성질의 기 즉 음과 양을 낳는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정씨 형제에 이어 주희는 우주는 리와 기라는 두 개의 실체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태극의 실체를 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는 주돈이의 표현에 따라 태극은 운동과 고요함으로써 양과 음의 기를 낳는다고 자신의 저술 도처에서 주장했다: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 동은 곧 태극이 동하는 것이요 정은 곧 태극이 정하는 것이다."

주희는 리는 감정도 사려도 없으며, 형태나 흔적도 조작(造作)도 없다고 했다. 감정도 사려도, 형태나 흔적도, 특히 조작(造作)도 없는 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고요해지며, 그래서 기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는 "운동과 고요함은 기이다"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태극의 운동과 고요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과연 리인 태극 자체의 운동과 고요함을 일컫는 것인가? 그렇지만 운동과 고요함은 그 자체로서 이미 기이다. 주희는 말한다: "운동과 고요함이 있기 위해서는, 운동과 고요함의 원인이 되는 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태극이다."

그렇다면 운동과 고요함은 기이고 태극은 그 작용인(作用因)이다. 이때, 태극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의 운동과 고요함의 원인이 된다하면 문제가 될 게 없다. 다만 기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태극이 기를 생성해야만 그것의 운동과 고요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태극 즉 리는 조작(造作)의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운동과 고요함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기가 운동과 고요함의 작용 원인인 태극과 동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주희 자신은 우주의 시원에 태극과 기가 공존했었다고 분명하게 밝힌 적이 결코 없었다. 그와 반대로, 주희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는 명제를 "형체는 없으나 리가 있다"라거나 혹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지극한 리가 있다"(앞의 주 11 참조)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태극은 기 없이 즉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단독으로 존재했으며, 이 태극 즉 리가 기를 생성했다는 뜻으로 귀결된다-주희에게 있어서 리는 조작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희의 입장은 상당히 모호하여 그의 제자들조차도 스승의 입장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현대의 중국철학자 풍우란의 해석에 의하면, 주희의 태극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즉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다른 것을 움직이는 존재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는 다른 것을 움직이게는 하나 생성시키는 창조력은 없다. 그러므로 풍우란의 해석을 따른다고 하드라도, 주희에게 있어서 태극 즉 리가 기를 생성한 것인지 어떤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태초에 태극 즉 리가 기를 생성한 것인가 아닌가? 리에 스스로의 운동성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바로 주희의 모순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문제였다. 한국 성리학자들은 이들 문제에 대해 결코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 문제에 너무나도 진지하게 몰두했다. 왜냐하면, 매우 현학적이긴 하나 그 문제는 그들의 연역적 사상 체계-즉 신유학-가 근거하고 있는 대전제를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제로 다른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이 파생되기도, 귀착되기도 했던 것이다.

 

2. 이황과 이이의 리기론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이황과 이이의 견해를 알아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하면, 이황은 태극 즉 리가 태초에 기를 생성했으며 또한 리는 능동성을 가진다고 생각했고, 이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점이 한국 성리학의 양대 학파가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우선 이황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리에 대한 질문에 이황은 답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리는 정의(情意)도 조작(造作)도 없다' 하였는데, 이미 정의도 조작도 없다면 또한 음과 양도 낳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낳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애당초에는 기가 없었으나 일단 태극이 음과 양을 낳은 연후에 그 기가 비로서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주자가 일찌기 말하기를 '리에 동과 정이 있으므로, 기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리에 동정이 없으면 기에 어찌 스스로 동과 정이 있으랴'하였으니, 이것을 알게 되면 이러한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정의가 없다고 한 것은, 본연의 체(體)가 능히 발하고 능히 낳는다는 지극히 묘한 작용[用]을 말한 것입니다. 리에 스스로 작용[用]이 있는지라, 자연히 양을 낳고 음을 낳는 것입니다."

이황에게 있어서 리는 본체적[體], 기능적[用]인 두 가지 양상을 가지고 있다. 리의 본체적인 양상은 "텅 빈 넓은 세계로서 형태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리가 존재론적으로 무(無)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의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표현은 이황의 해석에 따르면 "리는 형상(形狀)도 방소(方所)도 없지만 지극히 있는 것이 있고 지극히 실(實)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황은 우주론적으로 리는 기보다 선재(先在)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돈이의 태극도설의 둘째 구절 즉 "태극은 운동하여 양을 낳고 운동이 극에 달하면 고요에 이르고 고요함으로써 음을 낳는다"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주희가 운동과 고요함 그 자체는 기이고 태극은 그 원인이라고 해석한 것과는 달리, 이황은 운동과 고요함은 태극 자체의 운동과 고요함이라고 주장한다: "태극에 동정이 있음은 태극이 스스로 운동하고 정지하는 것이다...어찌 달리 시키는 자가 있으리요."
태극 즉 리는 스스로의 운동과 정지에 의해 양과 음의 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리의 기능적 측면[用]이다. 요컨대, 이황의 태극 즉 리는 비물질적이며 추상적인 원리로서, 유일하지만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그 자신 운동성과 생성력이 있다.
기는 태극 즉 리에 의해 만들어지긴 하지만, 기와 리는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다. 리는 비물질적이고 기는 물질적이다. 이황은 어떻게 해서 비물질적 법칙인 리가 자기와 이질적인 물질적 기를 생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 그에게 이 점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아마 그는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그것은 단지 리 스스로의 "지극히 묘한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성 작용은 초경험적인 것이라서 구체적인 사실판단을 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주론적인 차원에서는 명백히 일원론인 이황의 논리는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더 이상 일원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리 밖에는 기가 없고 기 밖에는 리가 없으니 진실로 잠깐이라도 떨어질 수 없으나, 그 분수인즉 또한 서로 섞이어 분별이 없을 수 없다."

기를 생성하는 동시에, 태극 즉 리는 기에 내재되어 기의 존재 법칙이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의 본성[性]이 되는 것이다. 현상 속에서 리와 기는 이런 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렇지만 주희와 마찬가지로, 이황에게 있어서 리와 기는 결단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로서, 다만 사물 속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이 합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희와는 달리, 이황은 리 역시 기와 마찬가지로 능동성을 가진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천지 인(人) 물(物)에서 보아도, 리가 기의 밖에 있는 것은 아닌데도 오히려 분별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성(性)에 있어서나 정(情)에 있어서도 비록 리가 기 가운데 있다 하고, 성(性)은 기질 속에 있다 하더라도 어찌 분별하여 말할 수 없겠습니까. 대개 사람의 한 몸은 리와 기가 합하여 이루어진 까닭으로, 이자(二者)는 서로 발하여 작용하고, 또 그 발할 적에 서로 소용되는[相須] 것입니다. 서로 발[互發]하는 것이고 보면 각각 주(主)되는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서로 소용[相須]되는 것이고 보면 서로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그 가운데 있으므로 분화(分化) 이전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도 확실히 있을 수 있고, 각각 주(主)됨이 있으므로 분별하여 말하는 것도 불가함이 없습니다."

이 인용문은 이황의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에서 따온 것이나, 성정에서의 리기와 사물에서의 리기를 같은 맥락에서 고려해도 무방하다. 이황 자신도 위의 인용문의 처음 구절에서 '천지 인 물'의 리기의 문제를 성정의 리기의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특히 리의 문제에 있어서 이황은 다른 모든 성리학자들과 더불어 리는 하나[理一]라는 명제를 고수한다: "인심(人心)의 동정(動靜)의 리는 천지(天地)의 동정의 리요,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쨋든 리와 기는 각각 스스로의 작용력을 가진다. 그리고 리와 기는 현상적 차원에서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 각자의 작용은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상호작용은 다음과 같이 일어난다: "리가 발(發)하면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면 리가 그 위에 탄다[理發氣隨之 氣發理乘之]."

이황에 의하면, 모든 현상화 과정은 리와 기의 이러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현상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황은 말하자면 이원론자인 것이다. 그러나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태극 일원론자이니, 이와 같은 의미에서만 그의 리기론을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처럼 주리론(主理論)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이리기(理氣)의 문제에 관해서 이황과 견해를 달리 했다. 그는 말한다.

 

"성현의 말씀도 과연 미진(未盡)한 곳이 있으니, 다만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았다'고만 말하고, 음양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요, 어느 때에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다는 것을 미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글만 보고 해석하는 자들은, '기(氣 즉 음양)가 생기기 전에는 다만 리(理)가 있었을 뿐이다'하니, 이것이 한 병통이요, 또 어떤 이론에서는, '태허(太虛)는 담일청허하여 음양을 낳는다'(이것은 서화담의 설/필자 주)하니, 이것도 한 쪽으로 치우쳐서 음양이 본래 있는 줄을 모르는 것이니 역시 병통입니다. 대개 음양 양단(兩端)이 순환하여 마지 않아 원래 처음이란 것이 없습니다. 음이 다하면 양이 나고 양이 다하면 음이 생겨서,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데, 음에나 양에나 태극은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태극은 천변만화의 추뉴이며 만물의 밑바탕입니다."

이이에 있어서도 태극은 곧 리이다. 그런데 이 태극은 태초에 음양의 기와 함께 존재했으며, 태극이 음양을 생성한 것이 아니다. 그는 또 말한다.

"리·기가 처음이 없으므로 실로 선후를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까닭을 추구(推究)하여 보면, 리가 중요한 밑바탕이므로 부득이 리를 선(先)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이는 리가 기보다 먼저 존재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창조자도 없이 리와 기는 우주적 실체로서 본래부터 존재한다. 다만 논리적으로 보면 존재이유가 존재 보다 선행하는 까닭에 태극 즉 리가 음양 즉 기 보다 앞선다고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이는 리가 능동적인 작용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오로지 기만이 스스로 작용을 한다. 주희의 몇몇 표현에 의거하여 기와 마찬가지로 리도 작용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황을 비판하면서 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만일 주자가 참으로, '리와 기가 서로 발용(發用)함이 각각 있다.'고 말하였다면, 이것은 주자도 잘못 안 것이니, 어찌 주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이에게 있어서 스스로 작용하는 것은 기 뿐이고, 리는 기의 작용이 근거하는 원리이다. 그리하여, 이이는 현상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리·기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여 일물(一物)인 것 같으나, 그 구별되는 바는 리는 무형이며 기는 유형입니다. 리는 무위(無爲. 爲는 작용의 뜻)며 기는 유위입니다. 무형·무위하여 유형 유위의 주(主)가 된 것은 리요, 유형 유위하여 무형 무위의 재료[器]가 된 것은 기(氣)입니다. 리는 무형이요 기는 유형이므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합니다[理通氣局]. 리는 무위요 기는 유위이므로, 기가 작용[發]하면 리가 탑[乘]니다. 리가 통(通)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리는 본말(本末)도 없으며 선후도 없습니다.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으므로 응하지 아니하였을 때도 먼저가 아니며 이미 응한 것도 뒤가 아닙니다. 이러므로, 리가 기를 타고 흘러가서 천차만별하여 같지 않아도 그 본연의 묘리(妙理)는 없는 데가 없습니다. 기가 편벽한 곳에는 리도 역시 편벽하나, 편벽한 바는 리가 아니라 기이며, 기가 온전하면 리 역시 온전하나 온전한 바는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맑음 탁함 순수함 잡됨 찌꺼기 재[煙燼] 거름[糞壤]가운데도 리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그 성(性)이 되나, 그 본연의 묘함은 그대로 같습니다. 이것이 리가 통한다 하는 것입니다. 기가 국한한다 함은 무엇인가 하면, 기는 벌써 형적에 겪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습니다. 기의 근본은 맑고 깨끗할 뿐이니 어찌 찌꺼기 재 거름의 기가 애초에 있겠습니까만은, 그것이 오르락내리락[昇隆]하면서 날고 드날려[飛揚]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차만별로 변화가 생깁니다... 리는 만물에 어디서나 그 본연의 묘가 그대로 있지 않는 것이 없지만 기는 그렇지 아니한데, 이것이 이른바 국한된 기[氣之局]입니다. 다음에, 기가 발하여 리가 탄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음이 정(靜)하고 양이 동하는 것은 기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요, 시킨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동하는 것은 리가 동에 탄 것[理乘於動]이요 리가 동한 것이 아니며, 음이 정(靜)한 것은 리가 정에 탄 것이요 리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이에게 있어서 리는 이황의 리처럼 창조력이 있는 것도 아니요, '부동의 동자'와 같은 작용인(作用因)도 아니다. 기의 작용은 기의 능동성에 의해 "기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요, 시킨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의 작용이 일어날 때, 그 기는 리를 국한시켜 유일 보편한 리를 다양하고 특수한 리로 나타나게 한다.
이이의 입장을 요약하기로 한다. 그는 다만 리의 능동성을 부정할 뿐 그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리와 기는 속성을 달리하여 실재하는 두가지 실체로서 애초부터 함께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이의 리기론은 리기 이원론이다. 그런데 비물질적이며 추상적 원리인 리는 능동성이 없으며, 물질적인 기는 능동성이 있다. 능동적인 기의 다양한 작용으로 인해, 리는 본래 하나이나 다양하게 나타난다[理通氣局]. 이처럼 기의 능동적 작용에는 항상 어떤 원리 즉 리가 수반된다[氣發理乘]. 리와 기의 실재성은 인정하나, 리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기의 능동성만을 인정하는 이러한 이이의 리기론을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주기론(主氣論)이라 부른다. 
  
이제 우주의 리와 기의 문제를 벗어나 인간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렇지만 리기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 및 인간 정신에 관한 문제는 그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소우주인 것이다.


출처 : 연어알  |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