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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상제님을 모셔오고 인류생활 문화에 큰 공덕을 끼친 마테오리치

by 바로요거 2007. 9. 10.

선천5만년 최고의 공덕자, 마테오 리치
 
  만약 당신이 지금 휴대폰 컴퓨터 자동차를 사용하고 있다면, 만약 당신이 극장에서 감동적인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훔친 적이 있다면, 만약 당신이 좋은 옷을 입고 기분이 너무 좋아 활짝 웃어본 적이 있다면, 마테오 리치 신부님께 마땅히 매일매일 지극한 감사기도를 올려야 한다.
 
 왜 그런가?
 
 바로 마테오 리치 신부님의 은덕으로 오늘의 당신이 갖가지 문명이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공자·예수를 포함한 동서고금의 어떤 성자 성철들의 공덕도 마테오 리치 신부님에 미치지 못한다. 이 분은 선천5만년을 통틀어 인류에게 최고의 봉사공덕을 베푸신 분이다. 다시 말하면 온 인류에게 하느님과 같은 분이다.
 
 
 현대문명의 허구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리치 신부의 그 큰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신도(神道)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절름발이 문명이다. 백미러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자동차처럼, 신도(神道)의 은혜를 간과하고 물질적 측면만을 중시하는 반쪼가리 문명이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다 신명(神明)으로 다시 태어난다. 또한 신명들이 모여 사는 신명계가 엄연히 실존하고 있고, 그 신명들이 인간의 문명발전과 역사전개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소위 21세기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현대인 대부분은 신도(神道)에 관한 한 장님과 같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리치 신부님이 베푸신 무궁한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 리치와 신명(神明) 리치의 양 측면을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틔운 열정
 
 리치 신부님의 행적과 업적을 수록한 서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숱하게 많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자료들이 오직 인간 리치의 측면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신명 리치의 공덕은 『이것이 개벽이다』 책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개벽이다』(상) 2002년 개정신판 379쪽을 보면, 이런 놀라운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 서양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하늘과 땅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神明)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서양의 문명 이기(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道典』 2:26 ; 『이것이 개벽이다』(상) 379쪽)
 
 “근대 지구 문명을 급속도로 발전시킨 분은 서양의 이마두(利瑪竇) 대성사 곧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님이라는 것이다.
 
 리치 신부님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까지 신학을 비롯한 천문, 지리, 수학, 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저술활동과 번역활동을 하여 서양문화를 동양에 소개했다. 또한 동양문화를 서양에 알리기 위해 사서(四書) 등의 유가(儒家)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한 바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리치 신부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지상 인간계의 문화장벽 뿐만 아니라 신명계의 문화장벽까지도 총체적으로 허물어지게 되었다고 밝혀주셨다. 즉, 리치 신부님의 공덕으로 지구의 인간과 천상의 신명이 자유롭게 교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벽이다』(상) 380쪽)

우주촌 통일문명의 기초를 세운 이마두(마테오 리치) 신부님
 
 “아울러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육신의 삶을 마치고 신명이 된 리치 신부님이, 문명개벽의 활동영역을 우주적으로 확대시켜 고도로 진보된 천상 외계 문명을 지구에 이식시키는 계기를 만듦으로써, 장차 지구에 꽃피우게 되는 가을 우주촌 통일문명의 원원한 기초를 세웠다는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마테오 리치 대성사에 대해, 기존의 어느 성자나 철인, 과학자와도 견줄 수 없는 우주사적인 불멸의 공덕을 쌓았다고 누누이 칭찬하셨다.” (『이것이 개벽이다』(상) 380쪽)
 
 
 동서문화에 달통한 최초의 세계인
 
 
 원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중국식 이름은 ‘이마두’(利瑪竇), 호는 ‘시헌’(時憲). 별호는 서방에서 온 현사(賢士)라는 뜻의 ‘서태’(西泰), 마테오(Matteo)는 그의 세례명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 1552년 10월 6일, 천주교의 본고장 이탈리아 안코네(Ancone)주 마체라타(Macerata)에 있는 귀족 집안에서 9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치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만 19세 되던 1571년에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입회하였다. 동양에 전도할 뜻을 품고 1578년 인도에 도착, 1581년(만 2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582년에는 중국 포교를 위해 마카오에 도착하여 그 이듬해 1583년부터 정식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남경, 북경 등지에서 천주의 복음 전파에 일심하는 구도자적 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중국에 서양의 학술, 천문학, 수학 등 당시에 싹트고 있던 근대 문명을 소개하였고, 또한 중국문화를 공부하여 사서 등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양에 알렸다. 아세아(亞細亞), 구라파(歐羅巴) 등 그가 만들어낸 서양 언어의 한자 표기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마테오 리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히라가와 스케히로’는, 마테오 리치 신부님을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세계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해) 지구는 처음으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자연과학 지식과 중국의 사서오경 등의 학문을 두루 갖춘 인간은 마테오 리치가 최초였던 것이다.”(히라가와 스케히로, 『마테오 리치, 동서문명 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358쪽, 동아시아, 2002)
 
 리치 신부님은 워낙 고생이 많아 50대 후반에 이르러 세상을 뜨기 직전에는 이미 머리가 백발이 되어 있었다.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외길 인생을 걸으시던 리치 신부님은, 1610년 5월 11일 저녁 6시 북경에서 운명하셨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 대로 ‘완전한 중국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국에서 유럽과는 다른 또 하나의 찬란한 문명을 발견하고, 그 문화를 속속들이 이해했다. 예수회에 보낸 편지에서 “(종교 문제만 제외한다면) 중국의 위대함은 아무리 보아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적을 정도였다.
 
 그가 숨졌을 때 중국인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이라고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고 전한다.

종교개혁과 예수회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님이 태어날 당시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결과로 북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등 튜턴계 북유럽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라틴계 남유럽은 카톨릭 교회로 남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에서는 광범위한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혁신운동의 하나가 예수회의 설립이다. 예수회의 목적은 카톨릭 신앙의 방어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예수회가 벌인 사업은 ①청소년 교육 ②신앙심의 확립 ③선교 활동 등 이었다. 히라가와 스케히로는 예수회 선교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전투적 확신에 가득차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회의 ‘회會’(societas)는 스페인어 ‘꼼빠니아’compania를 라틴어로 옮긴 것인데, 꼼빠니아란 원래 군의 부대를 뜻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예수회 입회
 
 리치 신부님의 부친 요한은 이탈리아 마체라타 시(市)의 시장을 지냈고, 어머니 요안나는 신덕이 두텁고 마음이 착한 현덕한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13남매를 혼자 다 양육할 수 없어, 장남인 리치는 조모에게 맡겨 양육하게 하였다.
 
 리치 신부는 신체가 건강하고 곱슬머리에 벽안의 미소년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총명하였으며 특히 기억력이 우수하여 책을 한 번 읽으면 즉시 암기할 정도였다. 리치는 가정교사 니콜로 벤치베니(Nicolo Bencivengni)에게 라틴어를 배웠는데, 리치가 7세 되던 해 그 가정교사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리치는 평소에 존경하던 스승이 예수회에 입회하여 충격이 컸다. 리치는 신부가 되어 중국에서 선교할 때까지도 그 가정교사를 잊지 못하여, 고스타 신부에게 보낸 서신 중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니콜로 벤치베니 선생님은 내가 명오가 열리기 전 나를 자애로 교육시키셨습니다. 그분의 지도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염원을 뿌리치고 구도의 길로
 
 가정교사 벤치베니와 헤어진 2년 후, 예수회에서는 마체라타 시에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리치의 어머니는 리치를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리치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의 뛰어난 어학의 재능은 이 때부터 드러났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주지사까지 지냈는데, 아들 마테오를 명문대학에 보내 위대한 정치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장남 마테오가 16세가 되어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를 로마에 있는 명문대학 법과에 진학시켰다.
 
 그런데 1571년, 마테오가 고향 마체라타를 떠나 로마에 와서 공부한 지 3년째 되던 해, 그는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수련원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그는 학문을 잠시 미루어두고 헌신봉사의 기초인 간절한 기도생활을 하며, 순명과 겸비(兼卑)에 대하여 배우는 수사가 되었다. 19세의 청소년기에 전공학과를 그만두고 그의 아버지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수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중에 그 소식을 편지로 전해 받은 아버지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잘 설득하여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
전도 여행,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
 
 
 20대 시절 고향을 떠나 인도로 전도 여행에 나서기 전에, 그는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이다. 이제 땅에서는 부모도 형제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예수회 신부들은 종교개혁의 물결을 타고 중국이나 인도 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는 것이 천주님의 가장 위대한 은혜라고 여겼다. 당시에는 이러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20∼30명이 여행을 떠나면, 5명도 살지 못하고 대부분 항해하는 과정에서 과로에 시달리며 병에 걸려 죽었다.
 
 고국을 떠나 26세에 인도의 수도인 고아에 와서 신부수업을 더 받기 위해 바오로 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30세(1582년)에 중국 마카오에 와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 때 리치신부는 불과 3개월 동안 중국어를 배웠을 뿐인데도, 3년 동안 배운 동료 루지에리 신부를 능가할 정도의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번 책을 읽으면 그냥 줄줄 외워버리는 어학의 귀재였다.

 

중국 선교, 그 드라마틱한 생애
 
 리치 신부님은 마카오에서 머리를 삭발하고회색승복을 착용하고 머리를 빡빡 깍고 전도생활에 들어갔다. 그러기를 여러 해, 44세에 남경에 들어가(1595년 5월) 전도할 때는 전략을 바꾸어 유학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여,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나면 30분씩 시간을 들여가며 머리를 올리고 옷도 유학자들처럼 입고 다녔다.
 
 리치 신부님은 1599년 당시 이름난 선승 삼회(三淮) 스님과 인간의 본질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궁지에 몰린 삼회 스님이 불경의 권위를 들어 답하자 그는 “나도 나의 신의 권위를 끄집어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권위가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한 논의를 하고 싶다”고 응수, 말문을 막았다고 한다. 그 후 리치의 학식과 인품에 대한 입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수도 베이징 영주 허가(1601년)를 받는 계기가 됐다.
 
 그는 마카오에서 남창(南昌 : 남경)으로, 다시 북경(北京)으로 와서(1601∼1610) 중국 예수회 관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소원대로 북경 자경문에 앉아 있는 황제를 만나 전도의 길을 뚫게 된다.
 
 그의 성격은 대단히 개방적이어서 아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 유학자들은 리치 신부님을 대단히 존경하였고, 그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 인정
 
 리치 신부님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유교의 관습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조상을 공경하는 예법으로 보고,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교황청은 리치 신부님 별세(1610) 105년 후인 1715년에 중국의 카톨릭 교인이 조상숭배를 비롯한 유교 제례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천주(天主)가 곧 상제(上帝)”
 
 리치 신부님은 중국에서 생활하며 유교, 불교, 도가, 양자, 묵자 등을 공부하면서 동서문화의 다양성에 눈뜨고 동양문화에 대한 깊은 안목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기 신앙관에 결단을 내리게 되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구도자가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모시고 있는 천주(天主)와 유교의 하늘(天)과 상제(上帝)님 신앙이 맥이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할 때 책의 서두에 ‘천주(天主)는 경서(經書)에 나오는 상제(上帝)와 동일한 분’이라 정의하며, 고대의 천(天) 사상으로 돌아가 거기서 상제를 만나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명나라의 고위 관료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큰 호감을 샀음은 물론이다.
 
 
 천상 신도세계에서 인류문명사의 근대화 혁명을 주도하다
 
 살아 생전 동서양의 지식을 두루 섭렵하신 리치 신부님은 원대한 이상을 품으신다. 동양을 무대로 ‘천주교 중심의 천국’을 건설해 보겠다고 하는,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품어보지 못한 실천적 대이상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 소망을 못다 이룬채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영원히 잠들고 만다.
 
 그런데 리치 신부님은 죽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신명이 되어 천상 신도(神道)세계에서 더욱 정열적으로 활동하신다. 우수한 두뇌와 부드러운 사교술, 폭넓은 인간관계와 근대과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지적 탐구욕을 가진 리치 신부님은 천주님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을 근간으로 하여, 사후 신도에서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 200여 년을 대역사한 일심 끝에 인류문명사를 근대화 혁명으로 인도한다.
 
 앞서 알아본 것처럼,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는 천상의 문명을 그대로 본받아 내린 것인데, 이것은 마테오 리치 신부님의 인류를 위한 지고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리치 신부님의 개혁이 천지의 문명을 변혁시킨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문명이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니라.”(『道典』 2:26)는 말씀은 20세기의 비약적 문명발전(progress)이 지상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천상 신도세계의 선행된 노력, 즉 구체적으로는 리치 신부님과 뭇 문명신들의 지고한 노력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침내 상제님을 이 땅에 모셔 내리다
 
 �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에 이마두는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菩薩)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道典』 2:27)
 
 
 근대문명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교만과 잔혹성으로 인해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자, 리치 신부님은 천주님이신 상제님을 뵙고 세계구원을 앞장서서 하소연하였다. 리치 신부님이 마침내 천상에서 상제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동서문명을 아우르는 신앙의 성숙과정에서 일찌기 동양문화에 상제님 신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리치 신부의 공덕이 인류역사상 누구보다도 큼에도 불구하고 세상사람들이 이를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공덕으로 십천(十天)무극상제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리치신부를 구천상제에 봉하여 광주 무등산 상제봉조에 장사지내 주셨다.
 
  이마두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이 그를 떠받드나니,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니라.(『道典』 4:11, 『이것이 개벽이다』(상) 3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