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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 중원을 석권하다

by 바로요거 2007. 9. 6.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헌원과 싸워 이긴 치우천황, 중원을 석권하다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桓國)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倍達國)을 건국했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천황에 대한 역사왜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헌원에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사실대로 기술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이러하다.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이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상은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원은 황제로 격상되어 지존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짐승 몸에 사람 말을 함)로 묘사되어 짐승 같은 존재, 요술부리는 아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근원적인 역사왜곡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치우천황의 역사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 난을 지은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 (道典 2:38:1~2)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3.10월호